[수필] 사슴 가족과 레몬 나무
“사슴은 정원을 꾸미는
사람들에게는 골치다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잎과 꽃들을 마구…”
그러다가 팬데믹으로 온 식구가 집에 있게 되니 사위가 정원을 만들어 레몬나무, 귤나무들을 심었다. 그리고 예쁜 꽃들도 심었다. 꽃나무가 자라 꽃을 피우고 나무들도 잎이 커지며 또 새 순도 여기저기서 나와 가지가 잎들로 우거져 튼실했다. 날마다 연둣빛 여린 잎이 나와 쑥쑥 크는 것을 보는 것이 우리 식구들의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 주먹만한 열매를 맺을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가 보니 나무들의 잎은 다 없어지고 가녀린 줄기들이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사슴 가족이 산에서 내려와 몽땅 따 먹었다고 했다. 심지어 장미꽃, 국화꽃, 제라늄꽃까지 다 먹어 치웠다. 딸 집이 산 중턱이라 가끔 사슴 가족이 동네를 돌아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정원까지 들어와 망쳐 놓을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그래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물을 주고 거름도 주었더니 예전 만은 못해도 다시 잎이 나고 튼튼해졌다. 꽃들도 다시 피었다. 동물들이 싫어하는 냄새나는 약도 뿌려 놓았다.
아! 그런데 이번에도 몽땅 잎을 따먹고 꽃잎도 따먹었다. 잎이 없으니 나무들은 탄소동화작용을 못해 시들해 갔다. 우리 식구는 어린 나무들과 꽃들의 상태에 따라 기분이 좌우되었다. 여름 들어 날씨가 뜨거워 물을 주어도 금방 마르고 사슴 가족의 습격을 몇 번 당한 뒤론 그 예쁘던 정원도 몸살을 앓고 있다. 이제 우리 식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포기한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왠지 정원을 내가 다시 살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이리저리 궁리를 하고 있다. 인터넷에 들어 가서 사슴에 대해 알아 보았다. 사슴은 초식 동물이며 숲에 살며 겁이 많은 동물이란다. 다리가 길며 체형이 가느다랗고 여리여리하며 눈망울이 매우 맑아 연약하다는 느낌이 강한데 실제로는 기린과 같은 맹숫과이므로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고 한다. 무기를 안 든 성인 정도는 거뜬히 이긴다고 한다. 비디오를 보니 사슴은 싸울 때 뒷발로 서서 앞다리를 두 손처럼 마구 휘둘렀다. 그래서 세 마리가 떼를 지어 다니며 정원에 들어 와 잎이며 꽃들을 따 먹어도 가만히 두어야 한다고 한다.
아는 분이 사는 집도 산자락인데 휴가간 사이에 사슴 가족이 정원에서 기거를 했다고 한다. 그 모습에 놀라 당국에 신고를 했더니 사람이 동물이 사는 구역을 침입해서 살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며 도움을 거절했다고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사슴은 정원을 꾸미는 사람들에겐 골치라고 한다. 3미터 정도 담도 훌쩍 뛰어 넘는다고 한다. 사슴은 또 혼자 다니지 않는다. 어미가 새끼들을 달고 다닌다. 산 동네 차가 다니는 도로도 유유히 오르내린다. 운전할 때도 조심해야 한다. 동물 구역에서 사는 한 오렌지와 레몬나무도 아예 큰 나무를 심든지 장소를 바꾸어 심어야 할 것 같다.
어릴 때 우리 집 뒤로 감나무 밭이 아주 넓었다. 동생들과 같이 감나무, 밤나무들을 세고 놀았다. 우리 형제들은 자라면서 감, 밤을 물리도록 먹었다. 부모님 생전에는 결혼 후에도 손주들을 생각해서 부쳐주시곤 하셨다. 가을이면 그 많은 감나무에 동그란 감들이 온통 울긋불긋 서로 얼굴을 비벼대며 우리를 반겨 주었다. 방과 후에 책 보자기를 마루에 던져 놓고 긴 간짓대를 메고 가서 홍시를 따서 손으로 살살 문질러 닦아 먹으면 그 달콤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무슨 복으로 지금 우리 집에도 이사 올 때부터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있어 그때 생각들이 더 역력해진다. 사실 나도 몇년 전에 딸 집에 귤나무, 레몬나무를 한 그루씩 심었다. 그때도 잘 자라다가 어느날 잎이 다 없어졌다. 사슴이 먹었다고 생각도 못했다.
이렇게 과일 나무 키우기가 힘드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 많은 감나무와 감나무 밭을 빙 둘러 울타리로 밤나무를 심어 우리에게 먹거리를 주셨다. 새삼 돌아가신 아버지께 감사하고 감을 따고 밤을 터는 날이 되면 우리 형제들이 싫어서 퉁퉁 부은 얼굴을 해서 아버지 맘을 상하게 해드렸던 일들도 후회가 된다. 내 힘으로 과일 나무 한 그루를 키워 열매까지 따 먹는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과일 나무 얘기를 하다보니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의 사과나무가 생각난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나는 오늘 사과 나무를 심겠다.” 이 말과 상관없이 나무를 심어 키운다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민 와서 지낸 10년이 아쉽다.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 과일 나무 한 그루라도 딸 집 정원에 심었다면 지금 얼마나 뿌듯할까 싶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르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사슴이 여린 잎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았으니 내년 봄에는 사슴이 올 수 없는 뒷마당에 튼튼한 레몬나무 한 그루를 심어야겠다.
이영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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