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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공예의 어제와 오늘’ 특별전

LA한국문화원(원장 정상원)은 숙명여대 박물관, 캘스테이트 샌버나디노대학(CSUSB)과 공동으로 7일부터 12월7일까지 4개월간 RAFFMA 미술관에서 ‘한국 공예의 어제와 오늘(Korean Craft, Yesterday and Today)’ 특별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하고,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이 주최하는 ‘2024 트래블링 코리안 아츠(Traveling Korean Arts)’ 사업의 일환으로 개최된다.   한국의 전통공예와 현대공예를 미국 서부지역 현지에 소개하는 이번 전시에는 한국 현대 공예작가들이 15세기부터 20세기 사이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던 가구, 복식, 회화, 도자기 등을 새롭게 재해석한 작품들이 선보인다.   1부 〈한국의 선(線)〉에서는 사대부가 사용했던 사랑방 가구와 선과 선이 변주된 박숙희의 현대 태피스트리 작품을 병치해 한국적인 선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2부 〈한국의 색(色)〉에서는 한국 백자의 흰색과 품위를 재해석한 최지만의 현대 도자 작품과 백자청화의 푸른색을 담아 산수를 표현한 조예령의 현대 섬유 작품을 통해 사대부의 생활과 이상을 보여준다.   3부 〈한국의 기(器)〉에서는 한국 전통 그릇과 함께 김설의 현대 칠기 작품, 김준수의 가죽 공예작품, 김미식의 섬유 작품 등 새로운 소재를 사용한 작품을 전시해 전통적인 그릇의 형태를 벗어나 다양하게 표현한 현대공예를 보여준다.     또한, 한국 전통 길상 문양을 재해석한 김혜경 작가의 미디어아트 작품이 도자기, 회화, 전통 목가구 등과 어우러져 한국 공예의 아름다움을 전한다.   정상원 문화원장은 “이번 전시는 숙명여대 박물관과 함께 시대를 초월한 한국 공예의 아름다움을 되새기고, 이를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을 통해 우리 공예문화의 지속가능성과 창의성을 경험할 수 있다”면서 “12월초까지 이어지는 전시인만큼 많은 분들이 방문하셔서 과거와 현재가 조화를 이루는 다양한 한국공예의 진면목을 느껴보길 바란다”고 밝혔다.   개막식은 오늘(5일) 오후 5시 RAFFMA 미술관에서 개최된다. 숙명여대 박물관은 전시 기간 한국의 전통 혼례복인 활옷을 종이로 만들어보는 워크숍 등을 열어 한국 전통문화에 관한 관심을 더할 계획이다.   ▶문의:(323)936-3014 LA한국문화원 전시 담당 태미 조게시판 한국 한국 공예 가죽 공예작품 한국 전통

2024-09-04

[기고] 알래스카의 비버 증가, 왜 문제일까

알래스카의 비버(beaver)는 원주민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동물이다. 비버 고기와 가죽은 원주민 생활에 유용한 재료이기 때문이다. 특히 두툼하고 큰 꼬리에는 지방이 많아 겨울철 원주민의 영양 공급원 역할을 했다고 한다. 또 비버 가죽은 유용한 모자와 신발 재료로 사용된다. 비버 가죽과 털로 만든 모자는 보온성이 좋고 내구성도 뛰어나다.     그런데 지난 10년간 알래스카의 비버 개체 수가 급증하면서 지형 변화는 물론 다른 동물의 생태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한다. 이는 관련 연구를 진행 중인 ‘북극 비버 관찰 네트위크 (Arctic Beaver Observation Network)’가 최근 알래스카 대학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네트위크는 과학자는 물론 토지관리자 및 부족 대표, 비버 사냥꾼 등 다양한 전문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립과학재단의 지원으로 2026년까지 연구를 진행할 예정이다.     네트워크 측이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비버의 서식지가 북쪽으로 확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버는 주로 하천에 많은 나뭇가지로 댐을 만들어 서식하지만 스스로 환경을 바꾸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주변에 하천이 없어도 작고 강한 앞발로 습지를 만든다는 것이다. 또한 연못이나 습지 면적을 확장하기 위해 수로까지 판다고 한다. 네트워크에 따르면 항공사진 조사 및 인공위성 관측 결과에서도 비버의 서식지가 점차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라시아 비버는 수 세기에 걸쳐 모피용으로 과잉 포획되면서 개체 수가 급감했다. 그러나 사냥 조건을 강화한 이후 개체 수가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회복되면서 서식지도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버와 물새가 서식하는 북극 호수 주변의 많은 관목이 물에 잠겨 죽었다. 이는 홍수 때문이 아니라 온난화로 동토가 녹으면서 융해수가 늘었기 때문이다. 이를 환경 교란 (disturbance)이라고 한다. 비버의 서식지 근처에는 다른 동물의 개체 수도 함께 증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비버를 먹이로 하는 오소리 (wolverine)와 늑대 개체 수가 늘어난 것이다. 늑대는 순록보다 움직임이 느린 비버를 더 쉽게 사냥할 수 있다고 한다. 비버가 특정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순록 개체 수 감소 시 늑대의 새로운 먹이가 되는 것이다.     비버가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거나 이전 서식지가 호수화되면 온난화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기 쉽다. 동토 융해는 그 속의 많은 유기물의 분해도 초래해 메탄의 발생 원인이 되기도 한다.  비버 서식지의 증가로 하천이 고립된 호수처럼 변하면 수중 산소가 점차 고갈되어 무산소 상태로 변한다. 이런 무산소 환경에서는 메탄 생성 미생물이 증가하면서 메탄 발생도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호수 온도의 증가로 동토 융해 현상까지 더해지면 메탄 발생은 이중으로 증가하게 된다.       온난화로 수온이 올라가면  동토중에 함유됐던 수은의 발생량도 늘어난다. 이는 수중 어류뿐만 아니라 비버와 인간에게도 피해를 미칠 수 있다.   비버 서식지 확대 및 개체 수 증가는 환경을 교란하고, 최종적으로 메탄 발생을 증가시켜 북극 온난화를 가속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즉, 북극 비버의 서식지 확장은 산불만큼 큰 교란을 의미하며, 인간을 제외하면 북극을 이처럼 빠르게 변화시킨 동물은 없을 것이다.     캐나다 원주민 장로의 말에 의하면, 하천에서 10개의 비버 서식지와 댐을 발견하고 이를 신속하게 제거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3일 후 그 지역에 다시 갔더니 어느새 비버의 댐이 또 만들어져 있더라는 것이다. 비버는 나무를 자르는 능력이 뛰어난 설치류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그의 말은 비버의 급속한 서식지 확장 문제를 절대 과소평가하지 말라는 메시지로 들렸다. 김용원 / 알래스카주립대 페어뱅크스 교수기고 알래스카 비버 비버 개체 북극 비버 비버 가죽

2024-03-18

최원국 수필가 신간 출간

최원국(85·사진) 수필가가 두 번째 수필집 『낡은 가죽 가방-정적 회로를 통한 시간 여행길』을 출간했다.   최 작가는 책 출간소감으로 “16년의 학창시절은 전쟁·혁명·데모의 소용돌이 속에서 꿈·젊음을 빼앗기고 잃어버린 세월이다. 이를 더듬으며 글을 썼다”며 “추억을 상기하면 글을 쓰는 동안 가슴은 뜨거워졌고 머리는 어린 시절에 머물렀다. 그것이 팬데믹을 이겨내는 힘이 됐다”고 했다.   수필집은 총 5부로 이뤄져 있으며, 글 66편을 담았다.     ▶슬프지 않은 이별은 없다 ▶항공사에 다니다 ▶대서양에서 세월을 낚다 ▶사업 시작 ▶세 번째 이사 ▶가을이 오면  ▶밤중에 걸려 오는 전화  ▶자메이카의 택시 기사  ▶뉴욕의 두 경찰관 등 작가의 진솔한 경험담을 녹인 수필이 담겼다.   특히 작가는 작품 ‘낡은 가죽 가방’을 통해 “가방에도 삶이 있다”며 “누가 봐도 오래되고 볼품없는 골동품이지만, 나에게는 가방이 소중했다. (가방에서) 원고를 꺼낼 때마다 글 속에 지나온 삶이 매달려 있다”고 표현했다.   최 수필가는 1979년 미국으로 이주해 직장생활을 하다 개인 세탁업으로 생계를 꾸렸다.     2006년 은퇴 후 뒤늦게 펜을 잡았고, 2012년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계간 ‘서시’ 해외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지난해에는 첫 수필집 『십만리 길의, 미국여행』을 펴냈다.   현재 최 작가는 뉴저지 팰리세이즈파크에 거주하고 있다. 강민혜 기자 [email protected]최원국 수필가 최원국 수필가 가죽 가방 시간 여행길

2023-12-19

[살며 생각하며] 툰드라의 아이들

어제 교회에서 한 감동적인 영상을 보았다. 러시아 시베리아에서도 가장 북쪽 극한 지역인 툰드라 지역에 사는 네네츠 족의 이야기였다. 북극 아래 첫 땅이라는 이 지역은 일 년 중 7개월이나 지속하는 겨울이면 섭씨 영하 50~60도는 기본이라고 한다. 화씨로 그것도 영상 50~60도가 춥다고 스웨터를 입어야 하고 여름에도 전기장판을 애용하는 나로서는, 이런 곳에 황제펭귄들도 아니고 사람들이 산다는 것부터가 엄청 충격이었다.     이 동네, 여름에는 또 세상 끈질기고 무자비한 모기떼가 엄청나다는데, 이런 극한 환경 속에서도 수천 년을 살아남은 이 민족 정말 대단하다. 네네츠 족은, 이런 환경 속에 살아남은 대표적 동물인 순록의 먹이인 이끼를 찾아, 겨울에는 남쪽으로, 여름에는 북쪽으로 이동하는 지구 위 마지막 순록 유목민이라고 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아이는 꼴랴라는 일곱 살 남자아이였다. 부모 보호 밑에 어리광을 부리며 살 ‘꼴랑’ 초딩 2학년 나이 ‘꼴랴’는, 식구들 먹을 커다란 생선 네 마리를 나뭇가지에 꽂아 집에까지 낑낑대며 가져가서 식구들 저녁을 해결하는가 하면, 어느 날은 저보다 더 어린 두 아이를 태우고 눈보라를 헤치며 스노모빌을 타고 어딘가 볼일을 보러 가신다. 그런데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점점 거세지는 눈보라, 이 그룹 총 책임자이신 일곱 살 꼴랴가 갑자기 방향을 확 틀더니 어느 텐트 앞으로 간다. ‘춤’이라는 순록 가죽으로 만드는 이 민족 전통 집이다.     와, 나, 완전 얘네들 집인 줄 알았음! 스노모빌은 잘 타고 왔니? 눈 털고 들어와 앉아, 하며 먹을 것을 차려주고 불을 더 때주는 아줌마, 오래전부터 그 집 자식인 듯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애들, 아이고 얘들이 눈보라 속에 그래도 집을 잘 찾아왔다고 하는 순간 내레이션이 나온다. 이곳이 얘들 집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네네츠 족은 집을 찾아온 손님은 누구든 이유를 막론하고 사흘간은 재워주고 대접을 한다는 것. 아, 갑자기 이 추운 동네 사람들의 따뜻한 심장이 느껴져 온다. 춥건, 모기에 뜯기건, 갑자기 이런 동네에서 하루라도 살아보고 싶어진다.   요즘 듣기 힘든 뉴스들이 이어진다. 바로 분노 총격(rage shooting) 사건들이다. 동생들을 데리러 갔다 집을 잘못 찾아 다른 집 초인종을 누르는 바람에, 자기 차인 줄 알고 문을 열려다 미안하다고 하고 자기 차로 돌아왔는데, 아빠와 농구를 하다 공이 옆집으로 굴러갔다고 해서, It’s okay 라는 말을 듣는 대신, 총을 맞았다. 지난주에는 신생아가 있으니 총소리를 좀 조심해달라는 부탁에 화가 나 여덟 살, 열 살 아이들을 포함 일가족 다섯 명을 사살한 이야기를 들을 때, 정말 암담한 생각이 든다,   분노는 인간의 기본적 감정 중의 하나로, 반드시 느껴지고 표현되어야 한다. 하지만 표현 방식이 폭력적이 되거나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이 될 때는, 뇌에서 컨트롤이 안될 때는, 치료 또한 반드시 받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치과를 가듯 신경정신과를 찾았으면 좋겠다는 어느 의사분의 말이 격하게 공감되는 요즘이다.     툰드라의 아이들은 여섯 살이면 헬리콥터를 타고 도시로 나가 기숙사 학교에서 봄, 가을 의무적으로 러시아식 교육을 받는다. 하지만 십여 년의 도시 생활을 마치고, 절반의 아이들은 다시 툰드라로 돌아온다고 한다. 편한 문명의 삶을 마다하고 툰드라로 돌아오는 이들의 선택을 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미국 정신건강의 달 오월이다. 김선주 / NJ 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살며 생각하며 툰드라 툰드라 지역 동네 여름 순록 가죽

2023-05-10

[밀레니얼 트렌드 사전] 베지터블 가죽

단어 그대로 풀이하면 베지터블(Vegetable·채소)로 만든 가죽이라는 뜻이다. 채소의 어떤 성분을 이용해 동물 가죽 비슷한 원단을 만들어냈다는 건가. ‘베지터블 가죽’이란 친환경적으로 만든 가죽을 부르는 업계 용어다. 즉, 사용된 소재가 아니라, 만드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 용어다.   베지터블 가죽 제품을 만들었던 코오롱FnC ‘쿠론’ 생산파트 이병관 차장의 설명에 따르면, 동물의 가죽인 원피(原皮)를 상용 가능한 피혁 형태로 만들려면 무두질 공정이 필요하다. 원피는 시간이 지나면 부패하거나 굳기 때문에 불필요한 성분을 제거하고, 사용하기 편리하게 부드러우면서도 내구성 갖춘 소재로 만들기 위해서다. 바로 이 무두질 공정에는 크롬 화합물을 사용하는 방법과 식물성 섬유 추출물을 활용하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   크롬 무두질은 여러 장의 가죽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어 상업성이 높은 반면, 세척 후 유해 중금속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을 경우 환경오염을 일으키기 쉽다.     식물성 섬유 추출물을 사용하는 무두질은 친환경적인 반면, 공정이 복잡하고 또한 양질의 가죽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대량 생산이 어렵다. 당연히 제품값은 올라간다.   하지만 요즘의 밀레니얼 세대는 가격이 조금 비싸도 ‘윤리적 소비’를 지향한다. 개인의 이익이나 만족보다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는 소비인가, 미래 세대에 이익이 되는 올바른 소비인가를 먼저 따진다.     건강한 지구를 위해 지속가능한 패션을 선택하려는 이들의 고민은 진지하고 열렬하다. 이 진심을 기업들은 마케팅 홍보 이슈로만 이용하지 말고 꾸준한 연구로 화답해주길 바란다. 서정민 / 중앙SUNDAY 문화선임기자밀레니얼 트렌드 사전 베지터블 가죽 베지터블 가죽 동물 가죽 무두질 공정

2022-10-12

[J네트워크] 죽어서 남긴 ‘디지털 가죽’

클라우드에 저장된 사진, 소셜미디어에 쓴 글이나 e메일, 카카오톡 기록, 음성파일 등등. 개인의 디지털 기록물도 ‘상속’ 대상일까. 최근 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난 4월 3200만 계정을 복구하고 서비스를 재개한 싸이월드 운영사가 망자의 기록물을 유산으로 보는 수정 약관을 공개하면서다. ‘계정 주인이 사망한 경우, 유족에게 사진이나 글 등 망자의 디지털 기록물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이 회사에 따르면, 가족관계를 입증하고 망자의 SNS 기록물에 접근하겠다고 신청한 이들이 보름 만에 2000명 넘게 몰렸다. 이참에 살펴보니, 구글·애플 등 빅테크 기업도 사용자가 생전에 지정한 사람에게 그 기록물을 제공하는 식으로 디지털 기록물을 상속 대상으로 보고 있다.   인터넷이 한국에서 상용화된 지 곧 30년(2024년)이니, 경제적·비경제적 가치가 있는 디지털 자산이 상당히 축적됐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사람들은 온·오프라인 세계를 실시간으로 동기화하며 살고 있어 개개인이 남기는 디지털 족적은 더 깊고 넓어졌다. 개인의 위치정보나 쿠키 같은 디지털 발자국은 물론, 생체인식 정보를 수집한 IT 서비스도 많다. 준비 없이 떠난 망자의 흔적이 가죽처럼 곳곳에 남게 됐다. 그러나 이것의 처리에 관한 법령은 현재 없다. 유족에게 당장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정부로선 상속세 부과 대상도 아니니 방치된 면이 있다.   하지만 결코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다. 망자의 프라이버시 문제로 볼 일만도 아니다. 우리가 남긴 디지털 흔적은 누군가 복제하거나 왜곡하기에 충분할 만큼 쌓였고, 인공지능(AI)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진보하고 있다.   지난달 말 아마존이 내놓은 AI 음성비서 알렉사의 신규 서비스를 보니, 그런 위험이 머지않았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목소리를 AI가 복원해 손자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서비스였다. 1분 분량의 음성 파일만 있으면 가능한 서비스라는데, 점점 희미해진 그 목소리를 다시 듣는 반가움을 노렸을 테다. 그러나 왠지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 같다. 이 기술이 아마존의 기대처럼 이롭게 쓰이기만 하면 좋겠으나, 디지털 범죄는 언제나 최신 기술 뒤에 바짝 붙어 있다.  망자의 동의 없이 복제된 목소리가 망자의 인격이 담긴 콘텐트와 결합해 범죄에 악용될 가능성은 없을까. 그 범죄는 누구의 책임일까. 망자는 자신의 생체인식정보와 콘텐트가 이렇게 쓰이는 걸 원했을까. 그렇게 복원된 디지털 자산은 기업의 소유일까. 비경제적 디지털 자산의 상속에 대한 논의를 더 늦출 수 없는 이유가 매일 늘고 있다. 박수련 / 팩플팀 팀장J네트워크 디지털 가죽 디지털 기록물 비경제적 디지털 디지털 자산

2022-07-21

[살며 생각하며] 사람은 실수하고, 신은 용서한다

 그녀가 세탁소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이 어제 오후 6시 반쯤이었다. 그저께 아침에 바지 길이를 줄여달라고 우리 세탁소에 처음 온 여자 손님이었다. 얼굴도 예쁘장한 데다가 말도 조곤조곤 얌전해서 호감이 가는 인상을 가진 그 손님에게 하루를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었다. 물론 ‘좋은 하루’였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가 내미는 티켓을 받아 옷을 찾으려고 옷이 걸린 컨베이어를 돌렸다. 그런데 그녀의 옷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이럴 때의 당혹감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머릿속은 신경들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졌다.     세탁소 경력 25년이 넘은 나는 몇 가지 경우의 수를 알고 있다. 첫째로 옷의 위치가 잘 못 되어 있을 경우다. 두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컨베이어에 옷이 너무 조밀하게 걸려 있을 때 옷걸이 하나에 걸려 있는 옷이 가끔은 튕겨 나가 바닥에 떨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옷이 걸려 있는 컨베이어의 바닥을 살펴보아도 손님의 옷은 찾을 수가 없었다. 또 하나는 옷걸이 하나에 걸려 있는 옷은 주변에 걸린 다른 옷과 함께 엉뚱한 손님에게 전달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속으로 진땀을 빼며 여자 손님의 옷을 찾고 있는 동안 너덧 명의 손님이 세탁소에 들어와 줄을 서고 있었다. 이럴 때 손님들은 어떤 생각으로 우리 세탁소를 보고 있을까를 생각하면 속은 더 검게 타들어 간다. 결국 그 여자 손님의 양해를 구했다. 옷을 찾으러 온 손님들은 옷을 찾아서 돌아갔고, 한 더미 옷을 가져온 손님에게는 나중에 전화로 알려줄 테니 옷을 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결국 로사가 옷 수선을 하는 곳으로 갔다. 혹시나 하고 작업대 반대편을 살펴보았더니 거기에 손님의 옷이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잃어버린 옷을 찾았을 때의 환희란. 그러나 그 환희는 순간,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준 그녀에게 무언가 선물을 하고 싶었다. “혹시 내일까지 기다려 줄 수 있으면 돈은 받지 않을게.” 그녀는 내일 아침에 어디 멀리 가야 하기에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그녀가 맡긴 옷을 돌려주는 팔에 힘이 빠져나갔다. 들어와야 할 수입도 잃었고 신용도 잃었다.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며 그녀를 배웅했다.   그저께는 종업원 하나가 소매가 가죽으로 된 코트를 다리다가 가죽을 망치고 말았다. 이번 주도 적자가 예상되는바 그 코트 값까지 물어주고 나면 손해는 더 지고 말 것이다. 그 여자 손님이 가게를 떠나고 나니 문 닫는 시간이 살짝 넘었다. 30분 넘게 지옥에서 시간을 보냈다. 종업원들이 실수로 끼치는 손해를 몽땅 내가 다 껴안아야 한다는 사실이 억울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고등학교 시절 외웠던 영어 격언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To err is human, To forgive divine.” (사람은 실수하고, 신은 용서한다)   따지고 보면 나도 실수를 많이 하는 흠 많은 사람이다. 때로 그 실수가 남들에게 알려지기도 하고, 그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한다. 아내와 가족, 그리고 사회에 본의 아니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분명 많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실수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신에게 가까이 가는 거룩한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순 시기를 지나며 고통이나 극기같이 교회에서 권하는 일에도 게으르고 기도마저 멀리하고 사는 나에게 바지를 잃었다가 찾은 일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어디서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너는 고작 한두 명 종업원들 실수한 것 가지고 그리 억울해하니?” “나는 세상의 모든 사람의 실수와 죄 때문에 이리 십자가를 지고 간다.”   로사가 출근하면 평소와 다름없이 미소 지으며 인사해야겠다. ‘Como estas?’ (How are you this morning?) 김학선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실수 용서 세탁소 경력 우리 세탁소 소매가 가죽

2022-04-11

[아름다운 우리말] 참 이야기

참이라는 말은 좋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참이라는 말을 들으면 동시에 거짓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그만큼 참은 좋은 것이고 거짓의 반대입니다. 참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가득 차 있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속이 꽉 찬 것을 좋아합니다. 채소를 고를 때도 속이 꽉 찬 것을 고르지요. 배추도 속이 꽉 찬 게 좋은 거 아닌가요? 사람을 칭찬할 때도 속이 꽉 찼다는 표현을 비유로 듭니다. 속이 찼다는 것은 생각이 깊고 거짓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믿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참에 비해서 거짓은 속이 아니라는 느낌의 말입니다. 거짓의 어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는 겉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속이 아니라는 거죠. 겉과 관련된 어휘 중에 거죽, 가죽이 있습니다. 소리가 조금 바뀌면 거품이 되기도 합니다. 모두 속과는 관련이 없고, 차 있는 것과도 거리가 멉니다. 거짓의 느낌을 보여줍니다. 겉모습으로만 사람을 대하고, 거품처럼 텅 비어 있습니다.     참과 반대가 되는 표현으로는 ‘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반대라기보다는 다른 것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표현이 참깨와 들깨가 있습니다. 여기서 나온 참기름과 들기름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참기름과 들기름은 반대의 개념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입니다. 용도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들기름을 써야 할 자리에 참기름을 쓰면 안 됩니다. 참기름이 꼭 나은 것만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참은 가장 기본이 되거나 대표적인 것을 의미할 때도 쓰입니다. 어떤 대상의 이름에 참이라는 말이 붙어 있으면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대표라는 뜻이니 왜 대표가 된 것인지 알아보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노력이 인지언어학에서도 일어납니다. 머릿속에서 원형이나 대표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실마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가장 새 다운 새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인간은 어떤 새를 가장 원형으로 생각하고 있을까요? 저는 언어나 문화에 따라 원형에 대한 개념이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언어마다 문화마다 원형을 찾아가는 과정은 힘들지만 즐거운 과정입니다. 언어학자나 문화학자들이 좋아하는 일입니다. 저는 참이라는 단어에서 실마리를 봅니다. 우리말에서 참은 원형에 다가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새 중에 참이 붙어있는 새는 참새입니다. 저에게 참새는 좀 고민입니다. 이왕 새를 대표하는 것이면 학처럼 멋있는 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참새만큼 우리 가까이에 있는 새도 없겠구나 하는 반성도 합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우리와 함께 지내는 새이기 때문입니다. 함께하는 게 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꽃 중에는 참꽃이 있습니다. 참꽃이라고 하면 금방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을 겁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참꽃은 진달래의 다른 이름입니다. 봄에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하였던 그 꽃이 참꽃이네요. 그런데 참꽃에 대해서 공부하다가 놀라운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참꽃은 원래 먹는 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먹는 꽃의 대표인 진달래가 참꽃이 된 듯싶습니다. 열매만 먹는 게 아니라는 걸 깜빡 잊고 산 것입니다. 잎도, 줄기도, 뿌리도 먹을 수 있는 게 많습니다. 꽃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참꽃입니다.     나무 중에는 참나무가 있습니다. 참나무는 다른 말로 상수리나무라고도 합니다. 열매는 묵을 만들고, 목재는 가구를 만드는 데 쓰이는 훌륭한 나무입니다. 이때 만드는 묵이 바로 도토리묵입니다. 왜 참나무에 참이라는 말을 붙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토리는 우리의 주린 배를 달래주고, 나무로 만든 집은 우리를 보호해 주는 안식처가 됩니다.   참이 또 있겠지요. 참이 붙은 말을 찾아보면서 우리는 선조의 생각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속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즐겁고 신기한 여행이지요.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이야기 우리 마음 거죽 가죽

2022-03-06

[이 아침에] 인간의 품격

지난해 추수감사절 직후 주문 판매를 하는 손님이 스카프 500장이 든 박스를 들고 왔다. 스카프 하나하나에 레이블을 붙여달라는 주문이었다. 앞이 캄캄했다. 그 많은 일을 가게도 바쁜 시기에 가져오다니. 2~3일 사이에 일을 마쳐 주어야 주문받은 손님에게 팔 수 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어 일할 사람을 찾았으나 구하지 못했다.     결국 우리 가게 옷을 다른 곳에 내보내고 그 스카프를 내가 하기로 했다. 그때 팔지 않으면 모든 것이 수포가 된다니 그의 사업이 걱정되었다. 코로나19로 모든 비즈니스가 바닥을 친 마당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위로를 주고 싶었다.     조그마한 검은색 레이블을 스카프 한쪽 모서리에 붙이는 작업이다. 완전히 공장에서 한 가지 작업에 몰두하는 사람 같이 익숙하게 손을 놀려야 했다. 눈이 침침해 보이지 않아 손가락을 바늘에 찔리기도 했다.     단순한 일이지만 스카프는 이 레이블이 없으면 상품으로 가치가 없었다. ‘100% pure silk, dry clean only, made in USA’. 우리가 많이 보는 옷마다 붙어 있는 레이블이다.   가게에서 옷을 세탁할 때 드라이클리닝을 해야 할지, 물세탁을 해야 할지 헷갈릴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꼭 옷에 부착된 레이블을 확인한다. 레이블에는 섬유 종류와 세탁 방법, 손질하는 법까지 자세히 설명돼 있다. 면 종류는 물세탁을 해야 깨끗하다. 어쩌다 레이블을 잘못 읽거나 옷의 감촉을 감지해 드라이클리닝을 해야 하는 옷을 물세탁해 망치는 일이 있다.     요즘 폴리에스터는 가죽처럼 부드럽고 보기에도 가죽으로 보인다. 가죽 코트를 폴리에스터로 착각해 물빨래를 했다. 세탁기에서 꺼내는 순간 확 줄어든 느낌이 들었다. 옷걸이에 걸어 말렸는데 딱딱해져 도저히 입을 수가 없는 옷이 되어버렸다.   손님이 코트를 찾으러 올 날짜가 되었다. 어떻게 손님을 대할까, 옷 가격은 얼마나 비쌀까, 손님이 화를 내고 소리치면 무어라 답할까. 여러 생각들이 온종일 내 머리를 맴돈다. 아니야, 완전히 내 실수니까 손님이 원하는 대로 해줘야 돼. 이렇게 결정하고 나니 두렵지가 않다.     그리고 그냥 솔직하게 손님에게 설명했다. 가죽 세탁 공장에 보내면 세탁비도 비싸고 시간이 오래 걸리며 번거로워 여기서 세탁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으니 배상을 하겠다고 했다. 뜻밖에 손님은 코트를 오래 입었는데 세탁해서 누구를 주려고 했다고 한다. 그 누구는 생활이 어려워 코트를 사 입을 수 없었는데 이 코트를 입고 싶어했다고 한다. 손님이 코트를 살 수 있는 값을 요구했는데 아마도 그 돈으로는 사기 어려울 것 같았다. 내가 돈을 더 주겠다고 하니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사람도 각자 갖고 있는 인성과 품성에 맞는 레이블이 있다. 누구나 보면 알아차리는 그것 말이다. 이 손님처럼 없는 사람과 나누며 사는, 따뜻한 품성의 ‘레이블’을 가슴에 달고 싶다.  양주희 / 수필가이 아침에 품격 검은색 레이블 가죽 코트 가죽 세탁

2022-02-04

[오피니언] 삶의 뜨락에서 양주희

사람의 레이블       삶의 뜨락에서       양주희 수필가       지난해 추수감사절을 보낸 직후 주문 판매를 하시는 분이 스카프 500장이 약간 넘는 박스를 들고 오셨다. 스카프 하나하나에 레이블을 붙여 달라는 주문이었다. 앞이 캄캄했다. 그 많은 일을 가게도 바쁜 시기에 가져오시다니. 그분은 내가 2~3일 사이에 일을 마쳐 주어야 자기가 주문받은 손님에게 팔수 있는 여건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일할 사람을 찾았으나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가게 옷을 다른 곳에 내보내고 그 스카프를 내가 하기로 했다. 그분도 이때 팔지 않으면 모든 것이 수포가 되니 나보다 그분의 사업이 걱정되었다. 코로나19로 모든 비즈니스가 땅바닥을 내려친 마당에 조금이라도 내 도움이 필요한 분에게 위로를 주고 싶었다.      원단이 실크라서 촉감이 부드럽고 반질반질하며 색깔 또한 아름다웠다. 질감을 만지면서 보드라움이 내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조그마한 검은색 레이블을 스카프 한쪽 모서리에 부치는 작업이다. 완전히 공장에서 한 가지 작업에 몰두하는 사람 같이 손을 놀려야 했다. 눈이 침침해서 보이지 않아 손가락을 바늘이 찌르기도 했다. 이런 단순한 일이지만 스카프는 이 레이블이 없으면 상품으로 가치가 없었다. 100% pure silk, dry clean only, made in usa. 우리가 많이 보는 옷마다 부쳐져 있는 레이블. 이 조그마한 딱지도 상품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가게에서 옷을 세탁하기 전 드라이 크리링을 해야 할지 물세탁을 해야 할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꼭 옷에 부착된 레이블을 확인한다. 그 레이블에는 섬유 종류와 세탁방법 손질하는 법까지 자세히 설명되어있다. 면 종류는 물세탁이 깨끗하게 빨아진다. 어쩌다 레이블을 잘못 읽거나 옷에 감촉을 감지하여 드라이 크리링해야 하는 옷을 물세탁 하여 망치는 일이 있다. 폴리에스터가 요즈음 가죽같이부드럽고 보기에도 가죽으로 보인다. 가죽 코트를 폴리에스터로 착각하여 물빨래했다. 세탁기에서 꺼내는 순간 확 줄어든 느낌이 들었다. 행거에 걸어 말렸는데 딱딱하고 도저히 입을 수가 없는 옷이 되어버렸다.    손님이 코트를 찾으러 올 날짜가 되었다. 어떻게 손님을 대할까 옷 가격은 얼마나 비쌀까 손님이 화를 내고 소리치면 난 무어라 대답할까 그리고 협상은 이루어질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온종일 내 머리를 맴돈다. 아니야, 이것은 완전 내 실수니까 손님이 원하는 대로 들어주어야 돼. 이렇게 결정을 하고 나니 두렵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냥 솔직하게 손님에게 설명했다. 가죽 세탁 공장에 보내면 세탁비도 비싸고 시간이 오래 걸리며 번거로워 여기서 세탁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으니 내가 배상을 하겠다고 했다. 뜻밖에 손님은 코트를 오래 입었는데 세탁해서 누구를 주려고 했다고 한다. 그 누구는 생활이 어려워서 코트를 사 입을 수 없었는데 이 코트를 보면 입고 싶어 했다고 한다. 손님이 코트를 살 수 있는 값을 요구했는데 아마도 그 돈으로는 사기 어려울 것 같았다. 냉큼 나도 네가 요구한 돈만큼 보태겠다고 했더니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사람도 각자 가지고 있는 인성과 품성에 맞는 레이블이 있다. 누구나 보면 알아차리는 그것 말이다. 이 손님처럼 내뿜는 따스하고 인자하고 없는 사람과 나누며 함께하는 레이블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오피니언 양주희 뜨락 검은색 레이블 양주희 수필가 가죽 코트

2022-02-02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다시 뛰는 가슴으로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기억하고 싶은 것뿐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는 것은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지난 이년 동안 병마와 가난, 고통과 슬픔을 견디며 맨땅에 헤딩하듯 살아왔다. 배 만 고프고 허기진 게 아니라 심장이 오그라드는 불안과 절망으로 영혼이 지치고 어둠 속에 갇혔다.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의 기억 속 아름다운 날들과 사랑의 추억마저 멍들게 했다. 꿈 희망 소망 믿음 기쁨 행복이란 단어들이 사라졌다. 불안과 공포의 장막 속에서 고삐 물린 소처럼 죽음과 사투를 벌였다. 아름다운 날들이 슬픈 기억의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하얀 소의 해’ 신축년(辛丑年)이 가고 ‘검은 호랑이 해’ 임인년(壬寅年)이 밝았다. 검은 호랑이는 명예욕이 강하고 큰 야망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희망을 유보한 사람들은 더 이상 명예와 야망을 꿈꾸지 않는다. 그냥 살고 싶을 뿐이다. 죽을 때까지는 안 죽는다. 살아있는 동안은 사람답게 살고 싶다. 가족들 무탈하고 평범한 일상에 감사하고, 친구들과 맛난 음식 나눠먹고, 이웃 만나면 함박꽃처럼 웃으며 손 흔들고, 별사탕처럼 빛나는 애들 눈동자에 달콤한 꿈의 단어들을 새기며 그대 눈 속에 남아있는 사랑의 언약을 기억하고 싶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 되느니라”- 마태복음 9:17절   엎질러진 물은 주워담지 못한다. 맑고 깨끗한 새물로 새날을 채우는 사람은 희망의 문으로 다가갈 수 있다. 그 동안 육신만 지치고 고달픈 게 아니라 영혼이 배고프고 메말랐다. 배가 고프면 먹으면 되지만 영혼이 갈급하면 무엇으로 어떻게 채울까. 마음이 허허로워지면 불안과 공포, 의심이 생기고 우울증에 걸린다. 믿음과 사랑이 사라지고 만남을 기피하고 자신을 어둔 방에 가둔다.     어제는 흘러갔다. 어제가 아무리 힘들고 아파도 내일은 내일의 시간이 온다. 오늘을 참고 견디면 기적처럼 내일은 반드시 온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중략) /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김수영의 ‘풀’ 중에서   마지노선도 무너진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 육군장관 마지노는 독일의 침공을 막기 위해 140킬로미터에 걸쳐 두께 30미터가 넘는 콘크리트 벽을 구축했지만 독일의 침공을 막지 못했다. 마지노선은 ‘최후의 방어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뜻이다.   인생의 마지노선은 없다. 선택이 있을 뿐이다. 죽는 것 빼곤 못할 것이 없다. 쓰러지고 넘어져도 백번 천번 더 일어났었다. 기억의 창고를 열고 사랑과 희망이 담긴 날들을 기억하겠다. 하얀 손수건 가슴에 달고 꿈이 뭉게구름처럼 번지던 유년의 입학식. 늘 푸른 측백나무는 둥글게 다진 황토빛 운동장을 감싸 안았다. 하얀 이 드러내고 웃던 소년과 동그란 눈망울의 계집아이도 기억해 낼 테다.   심장이 뛴다. 밝음으로 어둠을 덮고 희망으로 절망을 이기는 날들 위해 바람보다 태양보다 먼저 일어나 웃고 속삭이는 날들을 간구한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가슴 손수건 가슴 가죽 부대 희망 소망

202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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