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믿음] 예수의 선포 4-하나님 나라(마25:31-46)
도대체 기독교는 어떤 종교일까? 나의 구원, 나의 헌신과 믿음, 나의 삶,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가장 우선적으로 하는 종교일까? 교회가 오랫동안 증거한 기독교는 사도바울이 기록한 서신을 중심으로 ‘누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라는 주제에 큰 관심을 보여온, 구원중심의 기독교 사상이었다. ‘구원’은 모든 종교의 보편적인 주제이긴 하지만 예수의 선포는 구원을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드러낸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25장은 예수께서 재림했을 때 고통당하는 자들을 도운 자들은 천국에, 그들을 외면한 자는 영벌에 처할 것이라고 기록한다. 구체적으로 본문을 살펴보면,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충격적이다. 배고프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고 섬긴 자들이 사실은 예수를 섬긴 것이다(25:35-40).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25:40). 더 나아가 고통받는 자들을 섬긴 의로운 사람들은 그들이 사실은 예수를 섬겼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주여 우리가 언제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25:37). 본문의 말씀은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의 예측을 넘어선다. 우선 고통당하는 자들을 섬긴 것이 어떻게 예수를 섬긴 것과 동일할까? 해방신학자들 가운데 “이 땅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이 바로 고통당한 예수다”는 다소 극단적인 견해를 보이는 자들이 있는데 오늘 본문은 이러한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있다. 혹은 고통당하는 자들 속에 예수께서 계신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어떻게 해석하든 간에고난당한 예수와 고통당하는 자들의 깊고도 깊은 연대(solidarity)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땅에서 가난, 질병, 탄압, 외면으로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 속에 예수께서 계신다. 기독교는 ‘나’에 관한 종교이기도 하지만, 고통당하는 ‘타자’에 관한 종교다. 둘째, 예수는 ‘고난 속에 있는 자들을 섬긴 사람들을’ 의인으로 간주했다. ‘믿음’ ‘예배’ ‘선교’ ‘헌신’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단어나 표현이 본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사랑’이라는 단어도 언급되지 않았다. 오로지 고통당하는 자들과 그들을 섬긴 자만이 등장한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이다. 그런데 고통당하는 자들을 섬긴 자들은 자신들이 사실은 예수를 섬겼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즉 의인들의 섬김은 ‘의식적인 선행’이 아니라 미처 자신들이 선행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일어난 행위이다. 이것은 윤리적, 종교적 올바름이라기보다는 인간과 인간의 본질적인 연대(solidarity)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예수를 쫓아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이 사랑이 단순히 ‘예수의 명령을 쫓아서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결코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혹은 오늘 본문을 윤리적으로 이해해서 ‘나도’ 의인들처럼 고통당하는 자들을 섬겨야지라는 결심으로 타자를 사랑한다면, 역설적으로 오늘 본문의 의인들이 결코 될 수 없다. ‘나의 선행에 대한 의식’이 이미 생겨나 버렸기 때문이다. ‘나의’ 종교적 신념이나 헌신이 동기가 아니라 ‘타자’의 고통과 아픔이 우리 행동의 주체가 되어서 우리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그들과 고통의 연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실체다. 기독교는 ‘나’에 대한 종교, ‘구원’에 대한 종교이기도 하지만, 고통받는 ‘타자’에 대한 종교, ‘연대’에 관한 종교다. 예수께서 그들과 연대를 이루시며, 고난의 연대 속에 있는 모든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차재승 / 뉴브런스윅 신학대학원 교수삶과 믿음 하나님 예수 하나님 나라 윤리적 종교적 가난 질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