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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 - 모욕의 매뉴얼을 준비하다] 부당한 세상이 시비 걸 때, 여성이여 '싸움닭' 이 돼라

이름 때문에 "이모티콘이 난무하는 인터넷 소설 작가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는 '미실' '백범'의 작가 김별아씨의 세 번째 산문집이다. 부부 교사의 딸로 태어난 그는 "소심하고 예의 바른 처자"였다. 모욕의 매뉴얼을 준비하다 김별아 지음, 문학의 문학 그러나 부당하게 모욕을 당하곤 집으로 돌아와서야 그 자리에선 떠오르지 않던 대꾸의 말을 수없이 되뇌이는 일이 반복됐다. 다른 이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그에게 세상은 언제든 쌈닭으로 변신할 수 있는 '모욕에 대한 매뉴얼'을 마련하도록 부추기는 곳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이 사회의 2등 인간인 여자이고 홑몸으로 움치고 뛸 수 없는 애 딸린 아줌마이고 아직 나잇살로도 밀어 붙일 수 없는 젊은 것이다. 예의와 범절은 경조부박한 세상에서 나를 전혀 방어해 주지 못했다."(15쪽) 그는 "한국 사회가 주는 압력을 그걸 견디지 못해 쩔쩔매는 유약한" 자신을 견딜 수 없어 캐나다로 도망친 적도 있단다. 언어로 먹고 사는 작가가 미용사와 의사소통이 안 돼 빡빡머리가 된 아이를 보곤 더없이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아줌마 최대 강점 오지랖"으로 러시아인 이웃에게 김치를 담가 보내 특별한 정을 나누는 적응력도 발휘한다. 아마 아이를 업고 다니며 스스로를 "공포의 파란 포대기"라 부르던 순간부터 세상에 대한 전투력은 차츰 높아갔을 터다. 그는 여성의 노출이 성범죄를 부추긴다는 이들에게 이렇게 쏘아붙인다. "범죄는 항상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출발한다. 인간은 애초에 알몸뚱이로 태어난다. 우리는 필요에 따라 벗는 게 아니라 필요에 의해 입는 것뿐이다."(103쪽)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소동을 보곤 장애인의 이동권조차 보장하지 않는 사회에서 불치병 환자의 희망과 국익을 논하는 아이러니를 꼬집는다. 시원하다. 그렇다고 내내 쌈닭인 건 아니다. 오히려 '모욕의 매뉴얼을 준비하다'는 제목에 비하자면 여린 속내가 자주 드러난다. 오랜 시간에 걸쳐 각종 매체에 기고한 글들을 모은 산문집이기에 하나의 키워드에 끌어다 묶기엔 어려움이 있을 게다. 논리적인 글솜씨는 논술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참고가 되겠다. 이경희 기자

2009-04-06

[북 리뷰 - 듀이] 우리 아픈 마음 안아준 넌, 고양이 아닌 친구

이야기는 대평원 혹은 미국의 심장부라 불리는 아이오와주의 농촌 마을 스펜서에서 시작된다. 1980년대 경제 불황과 대규모 농업화의 물결은 이곳에 실직과 금융 위기의 구름을 드리운다. 듀이 비키 마이런·브렛 워터 지음 배유정 옮김, 갤리온 대평원의 냉기가 맹위를 떨친 88년 1월18일 아침 이 마을에 드리운 구름을 걷어낼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스펜서 공공도서관장이던 저자가 도서 반납함에서 버려진 새끼 고양이를 발견한 것이다. 이 고양이가 19년간 스펜서 도서관의 마스코트로 사랑 받으며 전 세계에 감동을 전한 '듀이 리드모어 북스(Dewey Readmore Books)'다. 2006년 안락사할 때까지 듀이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았다. 오렌지색 솜털과 커다란 황금빛 눈을 가진 고양이 듀이는 사람들의 상처 난 마음을 어루만지며 마을 전체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외로운 노인은 그와 마음을 나누고 실직자는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저자는 "경제가 나쁠 때 겪는 가장 큰 피해가 마음의 상처"라며 "듀이 때문에 경제가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듀이는 잠시나마 사람들의 고달픈 삶을 잊게 해줬다"고 강조한다. 듀이의 엄마를 자처한 저자도 그에게서 위안과 희망을 얻었다. 알코올 중독이던 남편과 이혼한 뒤 싱글맘으로 살며 자궁.난소 적출 수술과 유방암 수술 가족의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었지만 듀이가 있어 버텨낼 수 있었다고 토로한다. "힘든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을 바닥에서 일으켜 꼭 껴안아주며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라고 이야기해주는 누군가가 있느냐는 것"이라며 "기억나지 않는 더 많은 나날 동안 듀이가 나를 안아주고 있었다"고 말한다. 역자의 말대로 이 책은 온갖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남은 질긴 생명력과 내면의 강인함에 관한 이야기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체온이 있는 생명체 사이의 교감이 만들어 내는 큰 울림이 곳곳에서 배어 나온다. 때문에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아라. 그리고 가진 것에 만족하고 행복해하라. 모든 사람들을 잘 대우하라. 좋은 삶을 살아라. 인생은 물질에 관한 것이 아니다. 사랑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 어디에서 찾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라는 듀이의 가르침이 더 와 닿는다. 하현옥 기자

2009-04-06

[북 리뷰 - 닌텐도의 비밀] 닌텐도 회장은 게임할 줄 모른다, 그런데 세계 최고 게임업체 됐다?

교토의 일본 국왕 여름 별궁 맞은 편에는 별궁 못지 않은 높은 성곽으로 둘러싸여 베일에 가려있는 성이 하나 있다. 원제 Game Over: How Nintendo Zapped an American Industry, Captured Your Dollars, and Enslaved Your Children 데이비드 셰프 지음, 김성균·권희정 옮김, 이레미디어 수년째 일본 갑부 1위를 지키고 있는 닌텐도의 야마우치 히로시 명예회장의 저택이다. 그를 일본 최고 갑부로 게임회사인 닌텐도를 시가총액 일본 4위 기업에 올린 것은 다름 아닌 '수퍼 마리오'다. 빨간색 모자를 눌러쓰고 헐렁한 멜빵바지 차림의 배관공인 마리오는 닌텐도의 초기 작품부터 최근까지 20여 년간 온갖 게임에 등장하며 닌텐도를 세계 최고의 게임업체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명박 대통령까지도 국내 기업들을 향해 세계시장에서 통하려면 닌텐도 같은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을 정도로 그의 성공은 눈부시다. 하지만 닌텐도는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수퍼 마리오 캐릭터를 만들어 '마리오의 아빠'란 애칭으로 불리는 게임 디자이너 미야모토 시게루가 간간이 언론 인터뷰에 모습을 나타냈을 뿐 닌텐도를 이끄는 주역들과 사업전략 게임 개발 스토리 인재 채용 등은 극도로 노출을 꺼렸기 때문이다. 닌텐도는 100여 년 전 교토에서 화투를 만드는 허름한 가내수공업 공장에서 시작했다. 야마우치 명예회장은 40여 년 전 외조부로부터 경영을 이어받은 후 최대의 게임회사이자 가전제품회사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저자는 닌텐도가 성장하면서 소니나 세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쟁쟁한 경쟁업체들을 누른 비결로 게임기와 게임 시장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봤기 때문이라고 봤다. 이전까지의 게임기는 기술의 조작이 점점 복잡해졌지만 닌텐도는 쉽고 간결한 게임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가 '닌텐도 DS'이다. 설명서를 읽지 않아도 되는 간편한 게임을 개발해 10대들뿐 아니라 부모 세대 심지어 노년층까지 게임에 빠져들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또 게임기로 단순히 즐기는 게임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관점을 채택한 것도 성장에 한 몫 했다. 국내서도 출시된 '매일매일 DS 두뇌 트레이닝' 등은 교육용 소프트웨어로 열풍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또 비디오 게임기인 '위(Wii)'를 통해서는 혼자만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닌텐도가 항상 간결함과 즐거움만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대만 같은 국가는 물론 샌프란시스코의 조그만 소매업체에까지 서슴없이 칼날을 겨눴다. 야마우치 명예회장이 닌텐도를 이끈 40여 년간 거래업체나 협력업체에 각종 소송을 내고 불공정거래를 강요한 것은 점잖은 축에 속한다. 경영간섭과 협박 등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2007년 게임업계 최초로 저작권 소송을 벌인 주인공이 닌텐도이다. 야마구치 명예회장의 육성이 빠져 아쉽긴 하지만 이처럼 깊숙이 들어가 파헤친 책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닌텐도의 성공비결을 궁금해 했던 경영인이나 게이머들에겐 많은 도움이 될 듯 하다. 장정훈 기자

2009-04-06

[북 리뷰 - 문명과 바다] '대항해 시대' 난쟁이<아시아>는 어떻게 거인<유럽> 삼켰나

지난해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때 중국이 애써 보여주려 했던 게 15세기 초 명나라 시절 정화(鄭和)가 이끌었던 대원정의 이미지였다. 문명과 바다 주경철 지음, 산처럼 2만8000여명을 나눠 실은 300척 보물선단의 위용…. 당시 중국 문물의 세계 전파는 평화적인 성격이었다는 강조인데 그건 사실이 맞다. 하지만 3년 뒤인 1424년 명나라는 돌연 원양항해 일체를 금지시켰다. 이유는 지금도 잘 모른다. 느닷없이 쇄국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중국은 2500톤 규모의 선박 건조 자체를 금지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2500톤은 당시 유럽 배들의 10배 규모이고 18세기말 영국 해군의 가장 큰 전함의 3배다. '중국이라는 거인'이 잠시 쉴 무렵 '유럽 난쟁이들'의 약진이 시작됐다. 작은 나라 포르투칼.스페인이 한강 유람선(280톤)만한 배들을 인도양에 띄웠다. 그걸 15~18세기 대항해 시대의 개막이라고 하지만 출발은 우스웠다. 규모도 그렇지만 내용면에서 거의 해적 노릇이었다. 기존의 상업 네트워크를 빼앗거나 통행료를 챙기는 수준이었다. 후발주자 네덜란드.영국은 달랐다. 그들은 동인도회사 등 상관(商館) 설치에 바빴다. 유럽.아시아 혹은 아시아 각국 사이의 무역에 끼어 '낙전 수입'을 노린 것이다. 교실에서 배웠던 세계사와는 뉘앙스가 좀 다를 것이다. 조금 강하게 표현했지만 서울대 서양사학과 주경철 교수의 새 책 '문명과 바다'의 서술이 그렇다. 이 책은 지난 해 호평을 받았던 책 '대항해 시대'(서울대 출판부)의 축약판이다. 한국 학자가 쓰는 세계사 서술의 새 기준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게 '대항해 시대'다. 서구 중심주의의 시선을 접고 균형 잡힌 비교사의 시도인데 이번 책은 훨씬 경쾌하다. 원고량을 절반 정도 솎아내고 컬러 도판을 집어넣어 교양서로 탈바꿈시켰다. 정보량을 줄이고 문장도 편안해졌지만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경계는 여전하다. 대항해시대가 끝난 19세기 초 중국.인도의 GDP 총생산은 전 세계의 50%. 2001년 현재 각국이 차지하는 비중(중국 12% 인도 5%)에 비하면 엄청난 차이인데 이는 식민지 수탈의 결과라는 암시를 책 서두에서 드러낸다. 대항해 시대 말에도 세계의 무게중심은 아시아가 쥐고 있었다. 지난 100~200년 주도권을 내줬을 뿐 지금은 권토중래 즉 '리오리엔트'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시각이 내내 유지되지만 영 궁금한 게 있다. 난쟁이가 거인을 어떻게 삼켰을까? 방대한 식민제국 건설은 본래 난쟁이의 꿈이 아니었다. 동인도회사 등 상관이 대륙의 등짝에 붙은 채 고혈을 빠는 것이 난쟁이들의 우선적인 관심이다. 1750년을 기점으로 확 바뀌었다. 해안 지역에 거점을 차렸던 상관들은 차츰 쐐기로 변해 내륙의 넓은 영토로 파고들어갔다. 정치적 이익을 확보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항해 시대 직후 펼쳐진 19세기 식민지시대란 유럽이 아시아를 삼켰다기 보다는 아시아가 스스로 무너졌다는 게 이 책의 관점이다. 지금까지 역사서의 대부분은 육지 중심이었는데 이 책은 바다에 액센트를 찍는다. 막 열린 근대 해양세계의 리얼한 모습도 이 책이 아니면 접할 수 없는 정보다. 말도 아니게 폭력적인 선상의 기율과 최악의 먹을거리 태평양을 건너다가 절반 내지 3분의 2 정도의 선원이 죽는 것은 다반사이던 시절에 관한 묘사는 이 책이 풍속사. 생활사로도 괜찮음을 보여준다. 축약본이라는 형태는 다소 낯설다. 거의 유례없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밀도와 양에서 압도적인 전작(前作)이냐 읽어 내리기에 편안한 신작이냐? 독자들의 호불호가 다소 엇갈릴 전망이다. 조우석〈문화평론가>

2009-03-30

[북 리뷰 - 슈퍼 크런처] 시나리오만 보고도 영화 수익 맞추는 '그'

'티끌모아 태산'이란 옛말은 인터넷 세상에서도 통한다. 인터넷엔 하루에도 수억 아니 수백 조 개의 시시콜콜한 정보들이 쌓인다. 슈퍼 크런처 이언 에어즈 지음, 안진환 옮김 뉴욕의 스미스씨가 월마트에서 딸기쨈 2통을 사고 부동산중개 사이트에 들어가 시세를 확인하고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읽고… 얼핏보면 쓰레기같은 정보들이다. 그러나 스미스씨의 정보가 홍길동씨나 와다나베 부인의 정보들과 뭉치기 시작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내일 아침 스미스씨가 어느 웹사이트를 방문할지 홍길동씨가 언제 이혼할지 와다나베 부인이 1년 뒤 어떤 금융상품에 가입할지 알게 된다. 수많은 '쓰레기 데이터'를 요리해 새 정보를 뽑아내는 이들 덕분이다. 저자는 이들을 슈퍼 크런처라 부른다. '대량의 데이터를 고속 처리하는 자'를 뜻하는 슈퍼 크런처는 새로운 종족이다. 기존의 전문가들이 감(感)과 직관 경험으로 앞날을 예측하고 분석했다면 슈퍼 크런처는 데이터를 사용한다. 몇 백 몇 천 개가 아니다. 페타바이트(1000조 바이트)급 데이터를 수집.분석한다. 슈퍼 크런처의 강점은 방대한 정보와 실험을 활용한 객관성이다. 슈퍼 크런처가 데이터로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무궁무진하다. 촬영이 시작되지도 않은 영화의 예상 수익을 맞춰낼 수도 있다. 에파고긱스란 회사는 시나리오만 가지고 어떤 영화가 얼마나 벌지를 예측했는데 9편 중 6편의 예상 매출이 2백~3백 달러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영화흥행 전문가들의 예측은 잘해야 30%쯤 맞을 뿐이다. 정부의 정책 결정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멕시코는 슈퍼크런칭을 활용한 빈민구제프로그램 '프로그레사'를 통해 빈민들의 교육과 주거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했다. 판사의 성향을 분석해 판사들 자신보다 더 정확히 판결을 예측하고 경마 결과를 도박사보다 더 정확히 맞출 수도 있다. 저자인 이언 에어즈 자신도 대표적인 슈퍼 크런처다.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활용해 현상 이면에 숨겨진 경제 법칙을 알아내기를 즐긴다. '괴짜경제학'을 쓴 스티븐 레빗과 함께 뉴욕타임스의 '괴짜 경제학' 블로그의 공동 칼럼니스트로 활약중이기도 하다. 에어즈는 누구나 슈퍼 크런처가 될 수 있고 돼야 한다고 말한다. 분석을 기다리는 데이터가 세상엔 무진장 널려있고 그런 데이터의 속내를 읽어낼 줄 알아야 성공도 따라온다는 이유다. 이정재 기자

2009-03-30

[북 리뷰 - 위기와 기회] '한 5년은 죽었다' 복창하고 경제 체질 바꿔라

잘못된 외신보도가 문제라고 한다. 외환보유액도 충분하고 외채 상환도 걱정할 필요 없단다. 위기와 기회 변상근 지음, 민음사 그런데도 외신이 자꾸 문제가 있다고 써대는 바람에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게 우리 정부 주장이다. 이른바 외신 리스크다. 급기야 윤증현 장관 등 경제 수장이 출동해 영국 런던서 경제설명회를 여는 등 부산하다. 정말 외신이 틀린 걸까. 평생을 경제기자로 활동했고 특히 국제경제에 정통한 지은이는 다른 입장이다. 외신이 과장한 부분도 있지만 정부 주장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단다. 가용 외환보유고가 2000억달러 선이라고 하지만 이보다는 적을 것이라 한다. 사놓은 미 국채 등을 제값 받고 팔기는 힘들어서다. 외채 상환능력을 계산할 때 갚지 않아도 되는 환 헤지용 차입을 감안하지 않은 건 외신 잘못이지만 선박 주문의 취소 사태도 전혀 배제할 수 없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렇다고 외환위기가 올 것으로 전망하는 건 결코 아니다. 다만 지은이가 비판하는 건 우리 정부의 안이한 자세다. 그는 "한국 경제의 안전은 외환보유고 규모보다 해외 금융시장에서 어떻게 평가되느냐에 더 많이 좌우된다"고 본다. 그래서 외환위기가 있다면 그건 대외신뢰의 위기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정책 초점을 여기에 진작 맞췄어야 했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의 인식과 대응은 12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설사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셈이라고 해도 우리 정부가 정말 귀담아 들어야 할 고언이다. 이 책의 강점은 이런 것이다. 이제는 글로벌 경제위기의 원인과 영향 분석 정도로는 독자의 시선을 끌지 못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할 것이냐"다. 이 책 역시 한국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안한 디테일에 강한 책이다. 가령 지은이는 "한 5년은 각오하자"고 한다. 5년은 죽었다고 복창하고 세계 경제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출렁대는 지금의 경제를 전면 개조(리스트럭처링)하자고 주장한다. 지은이는 또 맨날 외신에서 두드려 맞는 건 국력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한 탓이 크다고 한다. 중국과 인도보다 낮은 국가브랜드 삼성이나 LG가 '메이드 인 코리아'를 내세우지 않는 국가브랜드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제 목소리를 내자"고 제안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외개발원조(ODA)를 늘리는 등 지구촌 문제 해결에 앞장서면 한국을 만만하게 보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하긴 지금은 자기 PR도 미덕인 시대가 아니던가. 김영욱 기자

2009-03-30

[북 리뷰 - 유혹의 역사] S라인에 침 삼키는 수컷들아, 여자들은 너희보다 한 수 위야

책을 덮으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남자는 바보다. 세상의 절반인 이들을 농락하는 여자는 영리한 존재다. 유혹의 역사 잉겔로레 에버펠트 지음 강희진 옮김, 미래의 창 성의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인 저자는 고차원 방정식으로도 풀기 어려운 남녀 관계를 '보기'와 '보여주기'라는 관점에서 접근해간다. 현기증 날만큼 아찔한 여성의 곡선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남성과 여성적 매력을 최대한 강조해 그들의 눈길을 잡으려는 여성의 게임이 남녀 관계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독자 앞에 남자를 걸어 넘긴 유혹의 도구를 펼쳐 보인다. 완벽하게 균형 잡힌 S라인의 몸매와 티끌 없는 매끄러운 피부 풍성한 머리칼과 싱그러운 향기까지 여성이 분출하는 이런 아름다움에 넘어오지 않을 남자는 흔치 않다. 19세기 여인들이 정신을 잃는 고통을 감수하며 개미허리를 만드는 데 열을 올리고 중국 여인들이 제대로 걷지 못하면서도 전족을 참아낸 것은 모두 유혹의 극대화를 위한 선택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1970년대의 살인적인 하이힐과 오늘날의 각종 성형수술 화장과 가발 등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지향점은 하나다. 아름다움을 앞세워 자신의 '생산력'을 증명하는 것이다. 저자는 "남자들의 가슴이 무너지는 것은 왕성한 번식력을 상징하는 싱싱함과 청춘"이라며 "여성의 아름다움은 청춘과 늘 연계된다"고 설명한다. 이 모든 것을 조종하는 배후에는 우리 유전자에 내재한 '원시적 욕망'이 있다. 번식과 종족 본능을 위한 남자와 여자의 선택이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집착을 낳았고 능력 있고 든든한 배우자를 얻기 위해 예뻐져야만 하는 여성의 처절한 노력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때문에 여성이 유혹의 무기인 자극적인 몸매를 가질 수 있다면 어떤 고통도 마다치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결국 유혹의 역사는 인류가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만들어 준 근원적 힘에 대한 기록이기도 한 셈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유혹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하현옥 기자

2009-03-23

[북 리뷰] 안개처럼 살아나는 기형도 열기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시인 기형도(1960~89.사진)가 스물 아홉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뜬 지 7일로 만 20년이다. 밤 공기가 아직 차가운 3월 그는 서울 종로의 한 심야극장에서 곧 출간될 첫 시집 원고 뭉치와 함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일했던 그는 몇 줄짜리 기사를 쓸 때도 안절부절 못하는 심약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당대의 평론가 김현이 제목을 붙이고 해설한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문학적 성공'을 거뒀다. 1980년대 후반 문학 청년들은 낮에는 박노해의 노동시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다가도 밤이면 그의 시를 홀로 읽으며 위로받았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70년대 김지하 80년대 황지우.이성복 등을 잇는 90년대의 문학수업 커리큘럼이 됐다. 지금까지 24만 부가 팔려 대중적인 인기마저 얻고 있다. '입 속의…'에 대한 뜨거운 반응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른바 '요절 후광 효과'는 없는 것일까. 20주기를 맞아 기형도의 삶과 문학을 재조명하는 책 출간 추모 행사가 줄을 잇고 있다. 추모 문집 '정거장에서의 충고'(문학과지성사)는 '기형도 열광 현상'의 비밀을 엿볼 단서를 준다. 김행숙.심보선 등 젊은 시인과 평론가 함돈균.이광호 등이 좌담회.기고 등을 통해 90년대 이후 시에 미친 기형도의 영향 작품 세계 등을 따진다. 함돈균은 "('입 속의…'에서) 죽음과 떠돎의 이미지 신성한 것을 향한 갈망 허무의 표지들이 보인다"고 평한다. 시인의 눈에 비친 "세계는 몰락과 폐허"이고 따라서 시인은 "죽음을 살고 있다"고 느낀다. 대부분의 사람이 거짓 위안에 안주할 때 '세상은 지옥 같은 곳'이라고 솔직히 선언하는 시인의 윤리적 감수성은 독자들에게 위안을 준다. 시인의 '석연치 않은' 죽음도 대중의 호기심과 상념을 자극해 기형도 현상을 재촉했다. 하지만 김행숙은 "죽음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고 해서 시인이 죽음을 예감했고 시집의 진정성이 돋보인다고 평가하는 것은 낭만적 독법 샤머니즘적인 독법"이라며 경계한다. 시인들은 시집 속의 죽음은 육체적 죽음과는 거리가 있다고 분석했다. 심보선 시인은 "기형도의 시 세계는 생명 없는 사물들이 집적된 일종의 가상 세계"라고 평했다. 이런 세계에서는 죽음마저 아름답게 그려진다. 결국 시와 시인의 삶을 분리하거나 일치시키는 것 모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추모 행사도 이어졌다. 5일 오후 7시 홍대 앞 카페 '이리'에서 '기형도 문학 콘서트-기형도 시를 읽는 밤'이 6일 오후 7시에는 광명시민회관에서 '기형도 문학의 밤-어느 푸른 저녁의 노래'가 열렸다. KBS1TV도 '낭독의 발견'은 '영원한 청년 시인 기형도를 읽다'를 13일에 방송했다. 동료 가슴 속의 기형도… 밤새워 조사 하나까지 몇 번씩 손질…입버릇처럼 "선배, 있을 때 잘해줘" 기억은 살아남은 자의 특권이자 의무다. 생전에 시집 한 권 내지 못한 채 떠난 기형도의 삶은 순전히 남은 자들의 기억이 빚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20주기 기념 문집 '정거장에서의 충고'(문학과지성사) 제2부에 동료 문인들이 기형도와 얽힌 기억을 담았다. 거기에 다른 문인들이 남긴 기억을 덧붙여 인간 기형도의 모습을 그려본다. 연세대 재학 시절인 1983년 기형도는 학보 '연세춘추'에서 제정한 '윤동주 문학상'을 받았다. 상금으로 세계문학전집과 수동 타자기를 마련한 뒤 문우 성석제(소설가)에게 "너도 상금 받으면 먼저 책하고 타자기부터 사. 눈 딱 감고"라고 충고한다. 세계문학전집과 타자기 덕일까. 기형도는 졸업도 하기 전인 1984년 10월 중앙일보 기자로 취직하고 이듬해 1월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다. 기형도는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 소주 대신 콜라를 시키기도 했지만 술자리는 즐겼다. 노래를 잘 해 술자리에서 절창을 뽑곤 했다. 주변 인물들의 캐리커처를 즉석에서 그려내는 재주도 있었다. 그렇게 밤 늦도록 문인들과 어울리다가도 한밤중 신문사로 돌아가 밤이 새도록 기사를 쓰곤 했다. 조사 하나까지 몇 번에 걸쳐 손질하는 꼼꼼함은 결벽증에 가까웠다. "유쾌한 농담과 능청스러운 엄살과 재치 넘치는 수다로 주위를 환히 밝히던 그를 뇌리에서 지울 수 없다. 좀 안 좋은 일이 있어도 '아 절망 절망!' 이렇게 빠르게 말하는 그의 과장된 말투와 몸짓에서 음울한 그림자는 찾을 수 없었다."(문학평론가 이영준) 선배 기자였던 문학평론가 이경철에게 "선배 나 살아 있을 때 잘해줘"라 입버릇처럼 말하던 게 요절의 예고랄 수 있을까. 89년 3월 초 부친상을 당한 이문재 시인에게 문상 온 기형도는 "형 상복이 참 잘 어울리네요"라며 웃었다. 난감했지만 이문재 시인도 따라 웃었다. 그 며칠 뒤 기형도는 돌연 유명을 달리 한다. 질투나도록 시 잘 쓰던 동료를 잃은 슬픔에 문인들은 집단최면이라도 걸린 듯 장례식장에서 패싸움을 벌인다. 요절 시인의 신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신준봉·이경희 기자

2009-03-23

[북 리뷰 - 글로벌 트렌드 2025] 미국 16개 정보기관 지구촌 미래 보고서

"대체로 흐림. 곳에 따라 때때로 폭우." 글로벌 트렌드 2025 미국 국가정보위원회 지음 유지훈 외 옮김, 예문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기관과 연구소 전문가들이 참여해 신뢰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2025년의 지구촌 전망이다. 미국 정부 산하 16개 정보기관의 보고를 취합 분석하는 국가정보위원회(NIC)의 예측이니 마음이 편치 않다. NIC는 1997년 '글로벌 트렌드 2010'을 낸 것을 시작으로 세 번에 걸쳐 5년 단위 미래 예측보고서를 냈다. 이번 네 번째 보고서는 역대 최대 인원이 참여해 설득력을 커졌다고 자부하는 '역작'이다. 지난해 말 오바마 대통령당선자 측과의 조율을 거쳐 공개됐다 한다. 글로벌 경제 세계 인구동향 에너지. 식량. 자원 문제 지역분쟁 등 7개의 영역으로 나눠 미래를 전망하는데 성글다 싶을 정도로 쉽게 서술되어 있다. 가상의 편지 일기 신문기사 등을 통해 메시지를 재미있게 전달하기도 한다. 예컨대 2020년 10월 미국 대통령이 쓴 '일기'는 아찔한 내용이 담겼다. 세계적 기후변화로 뉴욕에 홍수가 났다. 월 스트리트는 큰 타격을 입어 증권거래소를 옮겨야 할지 고민하고 UN 총회리셉션이 항공모함에서 열리는 판이다. 인용된 영국 보고서에는 21세기 중반이 되면 2억 명의 '기후변화 실향민'이 생기는데 이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결국 난민이 되어 다른 국가에 큰 사회문제를 제기할 것이란 구절도 보인다. 가장 관심이 가는 한국 관련 대목은 '지역분쟁:꺼지지 않는 갈등의 불씨'에서 눈에 띈다. 하나의 통일국가가 될지 느슨한 남북연합이 될지 형태를 알 수는 없지만 2025년 무렵엔 한반도가 통일된단다. 그런데 썩 유쾌한 소식은 아니다. 비핵화 비군사화 난민 유입 경제 재건 등 난제에 부닥쳐 1991년의 우크라이나처럼 비핵화 보장을 조건으로 국제적 경제지원을 택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전망됐다. 국책기관의 보고서가 대부분 그렇듯이 '제언' 또는 '처방'이 있긴 하다. 그런데 그것이 맥이 빠진다. 인간의 행위가 결과를 좌우하는 핵심요인이지만 결국은 이를 이끄는 지도자들에게 달렸다니 말이다. 미국의 행로 그리고 국제정치 판도에 관심 있는 독자들이 우선 읽을 만하다. 저작권이 없는 탓인지 '한울'에서도 같은 제목의 책이 같은 때 나왔다.

2009-03-16

[북 리뷰 - 내 인생을 바꾼 선생님] 낙제 위기 15세 소년, 스승 만나 학자가 되다

책은 예순이 된 제자가 스승에게 바치는 뒤늦은 고백이며 찬란한 헌사다. 내 인생을 바꾼 선생님 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안성찬 옮김, Y브릭로드 낙제의 위기에 몰렸던 15살 소년은 스승을 만나 세상에 눈을 뜨고 그의 걸음을 따르며 '정신적 진보'를 향해 발맞춰 나아간다. 그리고 이순(耳順)의 나이에 스승의 가르침과 조언이 자신의 일생을 비춰준 등대였음을 깨닫는다. 저명한 과학사가인 지은이는 책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꾼 스승 하인리히 하네가 전한 지혜와 가르침을 기록한다. 화려한 수사는 없다. 하지만 하네 선생님이 보여준 삶과 세상.진리에 대한 통찰은 소박해서 더욱 예리하게 빛난다. 잔잔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내공이 느껴지는 통찰은 '교양'이라 불리는 인문학적 지식에 기인한다. 스승은 학문에 대한 제자의 열정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자신의 서재를 만드는 일은 아무리 서둘러도 이르지 않다"거나 "새로운 지식을 열망하는 사람에게 '끝'이란 없다"고 강조한다. 또한 진리와 지식을 추구하는 삶을 통해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이 된다"고 말하며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한 내적 분위기는 오랫동안 여운을 남긴다"고 제자를 독려한다. 가르침은 지식의 습득에만 치우치지 않는다. 여행을 가치 있게 하는 방법과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바람직한 태도에 대한 깨달음도 학생들에게 전한다. 독일어.라틴어와 철학을 가르친 교사답게 "작은 쉼표 하나로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언어의 불분명함 때문에 우리가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거나 "최상급 표현을 남발하면 언어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된다"는 하네 선생님의 지적에는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책에 실린 60개의 가르침은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남긴다. 이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이처럼 멋진 스승을 만난 저자에 대한 부러움과 함께 질투심도 모락모락 솟아오른다. 그럼에도 스승의 가르침을 독점하지 않고 독자들 앞에 펼쳐낸 저자에게 감사하고픈 마음도 든다. 만약 삶의 길을 이끌어 줄 스승의 손길이 아쉽다면 책장을 넘겨볼 만하다.

2009-03-16

[북 리뷰 - 간신] '천하 망치는 데 소인 하나면 족해요'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군자가 여럿 모여도 모자라지만 망치는 일은 소인 하나면 족하다잖습니까." 치명적인 내부의 적 간신 김영수 지음·추수밭 최근 '치명적인 내부의 적 간신'(추수밭 356쪽)을 낸 김영수(50)씨는 '간신 전문가'라 할 수 있다. 동서양의 간신 현상을 분석하고 그 위험성을 경고한 글을 모아 2000년 '간신은 비를 세워 영원히 기억하게 하라'를 낸 데 이어 2002년엔 중국사의 간신을 행태별로 파헤친 '간신론'(이상 아이필드)을 엮어 냈으니 이번이 세 번째 '간신 책'이다. 그에게 그토록 간신에 매달리는 이유를 묻자 '송사(宋史)'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마치 당연한 걸 묻는다는 표정이다. 이어 전제군주 시대와 간신의 개념이 다르기는 하지만 나라를 어지럽히는 관리는 언제 어디서나 있기 마련이므로 분석하고 경계해야 마땅한 주제라는 설명이 뒤따른다. 이번 책은 중국사상 악명을 떨친 간신 19명의 생애와 횡포를 살핀 약전(略傳)이다. 그런데 전국시대 초나라의 비무극(費無極) 환관정치의 막을 올린 한나라의 석현(石顯) 이자성의 난을 부른 명나라 말기의 온체인(溫體仁) 등 낯선 이름이 여럿 나온다. 물론 주군에게 잘 보이려 자식을 삶아올린 역아 삼국지에 등장하는 동탁 수호지에 나오는 채경 등도 만날 수 있다. "시대별로 '대표선수'를 소개하려다 보니 중국사를 어지간히 아는 분들도 못 들어본 인물들이 많아졌네요." 그렇다면 중국 최악의 간신이 궁금했다. 책선 당 현종 때 이임보 남송 흠종 때 진회 명 세종 때 엄숭을 '3대 간상(奸相)'으로 꼽긴 했다. 한 명만 꼽아달라니 그는 뜻밖에 엄숭(嚴嵩)을 든다. 엄숭은 20년 넘게 황제의 총명을 가린 채 은인의 목숨을 뺏고 조정을 쥐락펴락하며 국정을 어지럽혔다. 숫법을 보면 그리 악하지 않은 것 같은데 앞에선 달콤한 말을 하며 등뒤를 찌른 '구밀복검(口蜜腹劍)' 이임보나 개인의 영달을 위해 나라의 기둥을 모해한 매국노 진회보다 더 악하단다. "엄숭은 당대에 이름을 떨친 지식인이었습니다. 지식인이라면 사회적 책무를 하는 데 이름값을 했어야죠." 그럼 간신의 발호를 막을 방법은 없을까. 그는 "제 책을 보면 청나라 때 간신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탐관오리는 있었겠지만 나라를 뒤흔들만한 '한간(漢奸)'은 없었기 때문이죠. 이는 청나라 황제들이 이전 왕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현명하고 자제력이 뛰어났던 덕분이었다고 봅니다"라고 지도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책에서도 "권력자의 자기통제라는 둑이 무너지면 그 둑을 넘어 부패와 비리 간신이라는 바이러스가 사정없이 밀고 들어오고 결국은 나라를 떠받치는 제방 전체가 무너진다"고 지적했다. 단순한 재미를 넘어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책다운 구절로 읽혔다.

2009-03-16

[북 리뷰 - 땡큐! 스타벅스] 나는 '별다방'에서 인생을 배웠다

삶의 추락은 예고 없이 다가온다. 땡큐! 스타벅스 마이클 게이츠 길 지음 이수정 옮김, 세종서적 커다란 파도가 닥치면서 익숙한 일상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그때 당신은 새로운 삶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갈 수 있는가.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한 미국의 한 늙은 백인 남자의 감동적인 대답이다. '뉴요커' 지 칼럼니스트이자 작가로 이름을 날린 아버지와 명문가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저자 마이클 게이츠 길(64)은 맨해튼의 상류층 가정에서 자랐다. 예일대를 졸업한 뒤 세계 굴지의 광고회사인 제이월터톰슨(JWT)의 광고제작 이사까지 승승장구하며 평온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온 그에게 '추락'은 전혀 남의 얘기인 듯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해고와 불장난 같았던 불륜이 이혼으로 이어지면서 그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월세를 걱정하는 무일푼 신세가 된 그는 3월의 어느 비 오는 날 안락한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그때 살던 동네의 스타벅스에서 라테를 마시는 마지막 호사를 누린다. 운명이었을까 그에게 구명 밧줄이 던져졌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스타벅스의 매니저인 크리스털 톰슨이 "여기서 일할 생각이 없냐"며 말을 걸어 온 것이다. 1000만 명 중 한 명 꼴로 발병한다는 '청각신경종양'으로 수술을 받아야 하는 그는 스타벅스가 직원에게 의료보험 혜택을 제공한다는 설명을 듣고 일할 마음을 굳힌다. 그렇지만 채용 연락은 빨리 오지 않았다. 마이클이 일을 하겠다고 나선 것만큼이나 매니저 입장에서는 인텔리의 늙은 백인 남성을 점원으로 채용하는 것도 고민스러운 사안이었을 테니. 일자리는 생겼지만 저자는 순간 순간 낯선 세계로 뛰어들어야 하는 두려움과 참담함에 흔들린다. 그는 스타벅스에 출근하던 첫날의 아침을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현재 직업이 없다. 직업을 구하고 있다. 나는 돈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또 성적 본능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서 이 지경까지 왔다는 잔인한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나는 이제 새로운 현실에 직면해야 했다. 불안하고 암담하고 창피했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스타벅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매장에 들어선 그는 더 절망한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너무나 힘든 작업일지도 모른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다음날 출근길. 예순이 넘은 노인은 "(출근길에 만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자신감에 질투가 났다. 출근길이 완전히 몸에 익어 보이는 그들의 여유가 야속했다"며 눈물을 쏟는다. 하지만 그는 무릎 꿇지 않는다. 가끔씩 과거로 회귀를 꿈꾸는 자신을 향해 "과거는 짧게 미래는 길게"라고 되뇌면서. 그리고 천천히 최선을 다해 그동안 그를 가뒀던 삶에서 벗어나 겸손을 배우며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몸으로 익힌다. 그는 평생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화장실 청소에 열을 올리고 쓰레기 봉투를 나르며 주문 받기와 계산하기 개점과 영업 마감 커피 만들기까지 하나씩 해내면서 평화와 행복을 느낀다. 그는 "스타벅스는 공허한 상징물만 쫓아다니던 허영심으로부터 두려움만 가득했던 피상적인 삶을 살면서 느껴야 했던 불안감으로부터 나를 구해줬다"고 고백한다. 그는 "가슴을 따르라"는 톰슨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우리 삶은 언제든 바뀔 수 있으며 나는 그걸 진작 깨달았어야 했다"고 말한다. 책의 미덕은 마이클이 스타벅스의 바리스터로 거듭나는 모습만을 그리는 데 있지 않다. 그가 25년간 JWT에서 일해온 시간의 힘이 스타벅스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그가 발휘하는 능력의 밑바탕에 깔려 있음을 보여준다. 원제'How Starbucks Saved My Life'.

2009-03-09

[북 리뷰 - 엄마의 은행 통장] 엄마 통장의 비밀은?

아빠의 월급봉투는 쥐꼬리다. 엄마의 은행 통장 캐스린 포브즈 지음 이헤영 옮김, 반디 소설의 주인공 카트린은 공책 살 5센트도 아쉽지만 엄마는 걱정말란다. 은행 예금이 있단다. 앞날이 불투명할수록 현금 자산은 아껴야 하는 법. 목돈 쓸 일이 생기자 엄마는 "예금 건드리고 싶냐"며 가족들의 자구노력을 끌어낸다. 당장 아빠가 금연하는 식이다. 20년 후 작가가 된 카트린이 예금하시라고 원고료 수입을 건네자 엄마는 "처음부터 은행 통장은 없었다"고 털어놓는다. 아이들을 불안하지 않게 하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첫 장부터 깨끗하게 한 방 먹이는 소설은 대공황으로 치닫는 격동기였던 1920년대 미국 샌프란시스코가 배경이다. 방송작가 회고록 대필작가를 거쳐 소설가로 활동한 저자가 노르웨이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할머니의 체험을 토대로 1943년 펴냈다. 파산 직전의 가정 형편이 소설의 진전에 따라 차츰 풀려 나가지만 제목(원제 Mama's Bank Account)만으로 일종의 '불황 탈출기'를 예상한다면 오산이다. 소설은 카트린의 고민은 물론 온갖 집안 문제를 척척 해결하는 '수퍼맘 회상기'쪽에 가깝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자녀 사랑이 끔찍하고 노르웨이 음식 솜씨가 일품인 엄마는 그야말로 억척스럽고 만능이다. 모자란 아버지 수술비를 절묘하게 해결하고 학교 공식 왕따인 카트린을 한순간에 '엄친딸'로 만든다. 아이들 앞에서 눈물 한 번 보이는 법도 없다. 소녀 카트린의 눈에 비친 엄마.학교.이웃에 관한 이야기이여서 자칫 청소년 소설로도 읽힐 법하다. 하지만 통과의례처럼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만한 그 또래 고민을 생생하게 그려내 공감의 폭이 크다. 각각 하나씩의 에피소드를 담은 17개 장으로 이뤄져 있지만 극적인 반전과 재치 있는 글솜씨 덕에 모든 이야기가 읽는 이의 마음을 건드린다. 소설을 덮고 훈훈한 마음이 돼 돌아서려는 순간 드는 생각은 과연 현실이 소설에서처럼 녹록한가 하는 점이다. 혹시 쓴 현실을 잠시 잊도록 하는 '당의정'은 아닌가. 엄혹한 현실을 은폐하는 문학작품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오랜 논쟁거리다. 그렇더라도 금융위기가 깜깜한 절벽으로 다가오는 요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당의정인지도 모른다.

2009-03-09

[북 리뷰 -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세요] 삶의 또 다른 풍경

약 30%가량은 고아원 출신 약 60%는 결손가정 알코올중독.가정폭력 가정에서 성장. 평균 나이는 50세…. 우리나라 노숙인에 대한 통계다. 그러나 노숙인들은 우리에게 '낯선' 사람들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세요 임영인 지음, 삶이 보이는 창 지저분하고 냄새 나고 게을러 보이고 그 '존재' 자체가 위협적으로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그들은 가까이에 있다. 서울역에 350명 용산역에 80명 영등포역에 150명 청량리 역에 50명…. 이 책은 노숙인 진료소를 운영하는 성공회 임영인 신부가 직접 만나고 대화하고 겪은 노숙인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생생하면서도 담담하게 그려낸 우리네 삶의 또 다른 풍경이다. "신부님 나는 누구예요? 내가 누군지 좀 알려주세요." 이렇게 물은 사람은 서울역을 기반으로 35년을 살아온 노숙인 고현길씨다. 일곱 살 때 그의 어머니는 서울역에서 그를 두고 떠나며 "잠깐 다녀올게. 절대로 딴 데 가면 안 돼"라고 말했다. 이후 그는 경찰서.시립아동보호소.고아원.교도소를 전전했지만 그의 삶의 중심은 여전히 서울역이다. 임 신부는 이렇게 적었다. "'절대로 딴 데 가면 안 돼' 라던 어머니의 말 혹시 지금까지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걸까." 임 신부에 따르면 을지로입구 역의 50~60명의 노숙인들은 '자기 관리'를 잘하는 편이다. 밤 10시에 잠자리에 들고 새벽 4시쯤이면 일제히 일어나 떠난다. 술도 자제하고 나이든 사람을 대접하고 '대장'도 있다. 그런가 하면 노숙인들의 세계에도 '주말'은 있다. 주말이면 그들은 친구도 만나고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멀리 가기도 PC방에서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숙인들에겐 그놈의 술이 원수다. 그들을 상대해야 하는 임 신부는 "마치 블랙홀 앞에 서있는 것 같다. 내 에너지 열정 뼛속에 든 진액을 다 빨아가는 듯하다"고 털어놓는다. 그런데 왜 그들은 노숙인이 되는 걸까. "그저 '바람' 때문이다. 평범하고 성실하게 생활을 하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무너지곤 한다. 한동안 잠잠하던 김민석(가명.28)의 가슴에도 바람이 불었다." 임 신부의 해석이다. 임 신부는 밑바닥에서 '도심 속의 섬'처럼 고립된 채 살아가는 그들에게서 '사람'을 보았을 뿐이라고 한다. 책의 말미에 실린 노숙인 선교의 진정성을 꼬집는 이야기도 그들이 가치 있는 삶을 찾아가려고 해도 그것은 돕지 않는 현실이 문제라는 지적도 설득력 있게 들린다.

2009-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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