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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 갈등, 화해, 축복 열창…미션아리아 정기공연 성료

클래식 보컬그룹 '미션 아리아(Mission Aria, 대표 장미 아이젠버그)'의 '제4회 정기공연'이 지난 3일 파웨이 인카네이션 루터란 처치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야생화들 속에서: 노래로 부르는 생의 찬미 (Among the Wildflowers: A Celebration of Life Through Song)'라는 타이틀로 열린 이번 공연에는 아이젠버그 대표를 비롯해 샌디에이고 오페라단의 소프라노 타샤 쿤츠씨와 테너 토니 백씨 등 수준급 성악가들이 참여해 다양한 레퍼토리의 신선한 무대를 선보였다.     이날 공연 순서에는 한인 이민자로서의 정체성 확립과 적응, 성장을 담은 주제에 맞게 한국문화가 자연스럽게 소개됐다. 특히 샌디에이고 무용협회의 캐롤 정 강사는 소프라노 쿤츠씨가 코른골크의 오페라 '죽은도시'(Die Tote Stadt)의 '마리에타의 아리아'를 부를 때 창의적이고 아름다운 독무를 선보여 장내를 가득 메운 200여 관객들로부터 큰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날 무대의 사회를 겸한 아이젠버그씨는 "이번 공연은 개인적으로 이민 49년을 자축하는 의미도 있다"며 "어린 시절 미국에 온 한인으로서 두 가지 문화 속에서 갈등하고 화해하며 결국은 축복을 경험하는 과정을 레파토리로 구성해봤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11세에 도미해서 어려운 시기를 넘어 의사로 성장하고 현재 크리스천으로서 성숙을 향하는 과정을 다양한 장르의 노래로 풀어냈다. 관객들은 "2시간 동안 지속된 공연이었으나 하나도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그 과정을 공감하고 함께 잘 즐겼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공연의 피날레는 아이젠버그씨와 한국무용협회 회원들의 신나는 난타 공연으로 장식됐다. 서정원 기자미션아리아 정기공연 미션아리아 정기공연 이민자 갈등 축복 열창

2024-03-07

[김형석의 100년 산책] 120세도 바라보는 시대, 장수가 축복이 되려면…

100세가 넘으면서 가장 많이 받는 인사가 있다. “120세까지 사시라”는 축하 말이다. 나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고맙다는 표정으로 대신한다. 그런데 내 가족 안에서는 그런 인사가 없다.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104세인 지금도 힘들게 사는 모습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여론조사 통계를 본 적이 있다. ‘100세까지 살고 싶으냐’는 물음에 한국 사람은 51%가 그렇다고 답했는데 일본인은 22%만이 그때까지 살고 싶다고 했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장수인구가 많은 나라다.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일본의 100세 이상 인구는 9만 명이다. 우리보다 10배가 높은 셈이다.   한국과 일본, 100세를 보는 다른 눈     그런데 왜 일본인들은 78%가 100세 이상 살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100세 이상의 장수를 행복한 삶이라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왜 120세까지 살라는 인사를 받으면서도 고마운 마음을 못 가졌을까. “더 오래 우리 곁에 계셔 주세요”라는 인사라면 머리를 숙이면서 “감사합니다”라며 답례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 첫째 원인은 100 이상의 삶은 신체적 부담과 고통이 동반하기 때문이다.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모르는 어려움이 있다. 나도 95세 이후부터는 내 정신건강이 신체적으로 노쇠한 육신을 업고 다니는 부담을 느낀다. 저녁 10시가 되어 잠드는 시간에는 편안한 안식을 느낀다. 하루의 짐을 풀어놓는 가벼운 자세다. 반대로 아침 기상 시간이 되면 일어나는 것이 싫어진다. 내 몸이 천근만근 같아지면서 “30분만 더 자면 안 되나”라며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심정이다. 기상 자체가 주어진 부담이다.   이런 상황을 직접, 간접으로 경험해 보는 사람들은 “100세라는 산(山)을 넘어서까지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100세 이상 사는 가족이나 친지를 보는 사람은 그런 상태 이전까지의 인생을 원하게 된다. 정신이 신체의 노예가 되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러면 100세 이상까지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는가. 통계에 따르면 가장 많은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긴 인생을 즐기고 싶다는 소원이다. 오랜 기간의 행복이 인생의 목표다. 그보다 낮은 수이기는 하나 두 번째가 가족들의 성공과 행복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것이 인간적 본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보고 싶다는 기대도 있었다. 죽기 싫어서 산다는 대답도 있으나 20% 정도뿐이었다.   “가는 데까지 가보자” 마음으로 살아     100세까지 살기 싫은 이유는 무엇인가는 물음에는,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가장 많았다. 그에 뒤따르는 것이 신체의 노쇠현상에서 오는 걱정, 경제적 불안감, 더 좋은 삶이 불가능하다는 예측, 평균수명이면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하는가’라는 물음에는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돌연사가 으뜸이다. 죽음에 따르는 고통과 슬픔을 함께하는 죽음의 분위기가 싫기 때문이다. 같은 희망의 반쯤은 가족들의 돌봄 속에서 조용히 가고 싶다는 기대였다. 평상시와 같이 잠들었다가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도 모르게 깨어나지 않는 죽음은 복을 받은 편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은 어떠했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90까지는 내 인생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고 믿었고 또 그렇게 되었다. 그런 희망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막상 90이 되니까 “앞으로는 어떻게 하지”라고 스스로 반문했다.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했는데 100세까지 연장되었다. 지금은 더 갈 수 있고 가야 할 인생의 길을 스스로 포기할 수가 없어 계속하고 있다. 평균수명과 건강나이가 10년은 더 연장된 세상이니까. 그러니까 100까지는 누구나 도전해도 좋을 것이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는가. 행복과 보람을 유지할 수만 있으면 누구나 의욕과 희망을 품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한다. 100세가 되었다고 스스로 인생을 포기할 수는 없다. 앞으로는 120세까지도 연장되는 세상이 올지 모른다. 구한 말에는 왕실에서 80세 장수한 노인을 찾아 지팡이를 선물했다. 20년이 연장되어 나는 100세에 청와대에서 주는 지팡이를 받았다. 지금 20~30대의 젊은이들은 20년쯤 더 연장될 수 있을지 모른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사명감     그러나 그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선물은 아니다. 자연인의 한계를 넘어 삶의 정신적 가치와 의미를 창조해 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전이다. 자연의 한계를 넘어 정신적 문화에 동참하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니까. 인간은 시간 안에서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사회와 더불어 창조해 가게 되어 있다.   역사를 누가 이끌어 왔는가. 삶의 가치와 의미를 위해 최선의 삶을 영위해 준 사람들이다. 이에 뒤따르는 또 하나의 삶의 창조적 영역이 있다. 내가 사는 공동체 의무를 사명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나와 더불어 가족을, 우리와 함께 민족의 행복과 발전을 위한 삶이 본연의 책임이다. 정신적 가치를 창조하는 노력과 공동체의 기본이 되는 민족과 국가를 위해 주어지는 일과 사명 의식을 갖추고 산다면 100세라는 시간적 한계는 사라지게 된다. 나이란 숫자일 뿐이라는 말이 진실이 된다. 나 같은 늙은이도 주어진 일이 있는 동안은 책임져야 한다는 의지로 삶을 계속하고 있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장수 축복 정신적 가치 시간적 한계 여론조사 통계

2023-09-01

[독자 마당] 관절염

두 달 전쯤인가 보다. 비구름이 무겁게 가라앉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지속된 가뭄으로 물이 필요한 시기에 비가 온다는 것은 보통 축복이 아니다. 그날 이후 계속된 비는 모두를 기쁘게 했다. 드디어 캘리포니아 주 정부가 가뭄이 해소됐다는 반가운 소식을 알렸다. 오랜만에 먼 산에 한 눈도 쌓였다.     그런데 나는 문제가 생겼다. 그때부터 왼쪽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다. 상태가 점점 심해져 걷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병원엘 갔더니 X-레이를 찍자고 한다. 그런데 별 이상이 없단다. 울트라 사운드 검사를 해도 별 이상이 없어 이번엔 MRI를 찍었다. 한 달째 계속 검사만 했다. 그리고 정형외과로 옮겨졌다. MRI 결과 무릎 연골이 찢어졌다고 한다. 검사 한 달 만에야 정형외과 의사를 만났다. MRI 사진을 자세히 본 의사는 수술할 정도는 아니고 약물치료와 물리치료를 계속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주사를 놓아주겠다고 한다.   그동안 나는 유튜브와 책을 통해 관절염에 대해 많이 공부하게 됐다. 시니어들의 관절염, 결코 쉽게 생각할 게 아니다. 겉은 멀쩡한데 걷지 못하고 아프니 얼마나 괴로운지 말할 수가 없다. 특히 70대 이상 여성의  70~80%가 관절염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한다.     의사에게 우선 통증이 멈추도록 주사를 부탁했다. 집에 오는 길 식당에 들렀다. 차에서 내릴 때만 해도 아들이 부축했다. 그런데 식당에서 나올 땐 나도 모르게 걷고 있었다. 너무나도 신기했다. 한 달 반만의 일이다.     “나 지금 걷고 있니?” 부축하려고 손을 내밀던 아들에게 한 말이다. 내 다리로 걸을 수 있다는 것,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있겠나.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고령의 시니어들, 걸을 수 있을 때 걸어 다니는 복에 새삼 감사한다. 노영자·풋힐랜치독자 마당 관절염 정형외과 의사 보통 축복 울트라 사운드

2023-05-02

[발언대] 축복을 망각한 백성은 망한다

초등학생 손주들과 함께  2주간의 어려운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서부와 중부 14개 주에 있는 20개의 공원을 돌아보는 여행이었는데 85세의 나이에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내게 귀중한 교육여행의 기회가 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여행을 통해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나의 인식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미국이라는 나라가 축복받은 곳임을 새삼 느꼈다. 아름다운 경치뿐만 아니라 차로 종일 달리고 또 달려도 끝도 없이 펼쳐진 기름지고 광활한 빈 땅, 물도 많고 기후도 좋아 씨앗만 뿌리면 농장이 되고 가축만 풀어 놓으면 목장이 될 것 같았다. 이렇게 축복받은 미국을 보면서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1776년 미국이 탄생하기 전 이 땅에도 나라가 있었던가?  전세계 모든 땅은 주인이 바뀌기는 했지만 수 천 년 전부터 나라들이 존재했는데 이 아름다운 땅에는 왜 나라가 없었던가?     1492년 콜럼버스가 이 대륙을 발견했지만 미국 건국의 본격적인 시발점은 1620년 청교도의 이주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성경을 통한 참 복음을 깨달았다는 이유로 같은 기독교 조직의 박해를 받다 이를 피해 온 사람들로 인해 세워진 국가라는 의미다. 그러기에 미국이라는 나라는 하나님이 특별한 계획을 위해 준비해 두셨던 ‘축복의 땅’이라고 생각한다.     김인수 전 장로교 신학교 총장은 매일 ‘오늘의 묵상’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김 전 총장은 지금의 미국과 같은 역할을 했던 유럽의 기독교가 성경에서 떠나 변질의 길을 간 결과 오늘날에는 거의 몰락한 것처럼 미국 교회도 제2의 종교개혁을 하지 않는다면 그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     미국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대조되는 것이 도심 노숙자들의 모습이다. 도심에는 눈길 닿는 곳 어디에나 십자가가 달린 화려한 교회당이 있고, 예배를 드린다며 들락거리는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있지만 그 밖에는 많은 노숙자가 있다.       성경적 기독교의 임무와 목적은 ‘생명 구출’ 이지 교회라는 건물에 들어앉아 ‘종교의식’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이 문제는 정부의 책임 이전에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본분인데 만약 무관심하게 계속 이대로 간다면 미국도 교회도 언젠가는 유럽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노숙자 문제는 기독교라 이름하는 모든 곳이 함께 나서서 힘을 합하기만 한다면 어렵지 않게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미국의 교회 수는 38만 개, 홈리스 숫자는 55만명이라고 한다. 교회 한 곳이 홈리스 1.5명씩만 담당하면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돈이 아닌 관심의 문제인 셈이다.     만약 교회들이 공짜로 받은 이 축복을 망각하고 모른 척 방관만 한다면 머지않아 유럽 교회들이 먼저 보여준 것처럼 내리막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게 이번 여행에서 얻은 결론이다.   그런데 만약 이 일을 한인 교회들이 먼저 나서 모범을 보인다면 미국에 엄청난 ‘코리아(Korea)’의 바람을 일으키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홍식발언대 축복 망각 유럽 교회들 한인 교회들 성경적 기독교

2022-09-09

[살며 생각하며] 잊어버린다는 것은 축복이다

십여 년 전 일이다. 이사 온 집, 뒤뜰 모퉁이의 모양새 없는 아름드리나무 한그루가 눈에 거슬려 없앨 기회를 엿보던 중 마침 아내가 교회 행사로 집을 비운다는 낭보(?)를 접했다. 떠밀다시피 버스 정류장까지 모셔다드리는 친절을 과시한 뒤 곧장 홈디포에 들러 전기톱을 빌렸다.   어디를 어떻게 톱질할까 생각하다 그루터기는 너무 굵어 힘에 부칠 것 같아 가슴높이 부분을 자르기로 하고 무섭게 회전하는 톱날을 갖다 대자 사방이 휘날리는 톱밥으로 정신이 없다. 잘린 나무는 톱날 방향으로 넘어지기 마련이다. 먼저 넘어질 방향으로 톱질하다 적당한 순간 반대편을 가격하면 원했던 방향으로 넘어질 것이라고 계산하니 희열이 넘쳤다. 그런데 인간의 계산은 항상 오류가 동반하기 마련인가 보다. 이날이 그랬다. 한참 톱질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큰 나무가 위아래로 죽 갈라지며 몸통 전체가 반대방향으로 밀리며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순간의 아찔함 가운데도 얼굴 부분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고개부터 깊이 숙인 채 한쪽 어깨를 나무쪽으로 뒤 밀었다.   그리고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조용히 어깨를 움직여본다. 아프지 않다. 분명 어깨로 넘어지는 나무둥치를 막았는데 하며 손을 보니 여전히 톱을 움켜쥐고 있다. 대신 톱날 부분은 나무둥치에 깔려 처참하다. 이날 이후 눈만 감으면 가상상황 즉, 단 몇 센티만 내 어깨가 나무쪽으로 다가갔었다면 단 몇 인치만 톱을 쥔 내 손이… 하며 끔찍했던 순간의 파편들이 트라우마가 되어 밤잠을 괴롭혔다.   사실 이렇게 편한 마음으로 그때의 상황을 묘사함은 시간이라는 치료제 덕택이다. 시간은 놀랍게도 뇌의 신경 수준에 영향을 끼치며 몸과 마음에 남겼던 흔적들을 조금씩 지워 없애는 모양이다. 그렇다 보니 지금은 당시의 위험을 거울삼아 나무 한 그루를 자르는데 1시간을 예상한다면 2~3시간 이상의 안전조치를 강구하며 도움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신이 사람에게 준 선물 중 특별한 것은 ‘잊혀짐’이 아닐까? 세월호 사건과 같은 악몽도 시간이 지나면 잊을 수 있다는 것은 사람만이 갖는 축복일 것이다. 물론 기억을 떨치지 못하고 어렵게 사는 분들이 있다고 한다. 이름하여 ‘과잉 기억 증후군’ 환자로 전 세계에 80여 명이란다. 이분들은 지나간 일들이 마치 녹화영상처럼 생생하게 살아 기억케 함에 더해 기쁨, 슬픔, 위험, 우울한 감정까지라니 안타깝다.   ‘신은 죽었다. (Gottisttot.)’ 라는 독설로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 프레드리히 니체는 그의 저서 ‘도덕의 계보’에서 ‘인간은 본성상 망각의 동물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는 ‘망각은 단순한 타성력이나이성 능력의 부재가 아니라 삶을 기능하게 하는 하나의 동력이자 적극적인 장치다’라면서 ‘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을 수 있으며 잊어버림이 있기 때문에 현재에 이르러 행복할 수 있다’는 멋진 해설까지 곁들였다.   성경 인물 가운데 ‘므낫세’라는 사람이 있다. 애굽에 종으로 팔려왔으나 대기만성하여 제국의 총리가 된 요셉의 두 아들 가운데 장남이다. 이름의 뜻은 ‘그러므로 하나님이 잊어버리게 하셨다’이다. 자신을 흙구덩이에 파묻어 죽이려다 종으로 팔아넘긴 이복형들의 범행을 생각하면 치를 떨었지만, 므낫세를 얻은 뒤 깨달은 하나님의 뜻은 잊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한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축복 아름드리나무 한그루가 톱날 방향 본성상 망각

2022-08-19

[살며 생각하며] 잊어버린다는 것은 축복이다

십여 년 전 일이다. 이사 온 집, 뒤뜰 모퉁이의 모양새 없는 아름드리나무 한그루가 눈에 거슬려 없앨 기회를 엿보고 있던 중 마침 아내가 교회 행사로 집을 비운다는 낭보(?)를 접했다. 떠밀다시피 버스 정류장까지 모셔다드리는 친절을 과시한 뒤 곧장 홈디포에 들러 전기톱을 빌렸다.   어디를 어떻게 톱질할까 생각하다 그루터기는 너무 굵어 힘에 부칠 것 같아 가슴높이 부분을 자르기로 하고 무섭게 회전하는 톱날을 갖다 대자 사방이 휘날리는 톱밥으로 정신이 없다. 잘린 나무는 톱날 방향으로 넘어지기 마련이다. 먼저 넘어질 방향으로 톱질하다 적당한 순간 반대편을 가격하면 원했던 방향으로 넘어질 것이라고 계산하니 희열이 넘쳤다. 그런데 인간의 계산은 항상 오류가 동반하기 마련인가 보다. 이날이 그랬다. 한참 톱질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큰 나무가 위아래로 죽 갈라지며 몸통 전체가 반대방향으로 밀리며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순간의 아찔함 가운데도 얼굴 부분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고개부터 깊이 숙인 채 한쪽 어깨를 나무쪽으로 뒤 밀었다.   그리고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조용히 어깨를 움직여본다. 아프지 않다. 분명 어깨로 넘어지는 나무둥치를 막았는데 하며 손을 보니 여전히 톱을 움켜쥐고 있다. 대신 톱날 부분은 나무둥치에 깔려 처참하다. 이날 이후 눈만 감으면 가상상황 즉, 단 몇 센티만 내 어깨가 나무쪽으로 다가갔었다면 단 몇 인치만 톱을 쥔 내 손이… 하며 끔찍했던 순간의 파편들이 트라우마가 되어 밤잠을 괴롭혔다.   사실 이렇게 편한 마음으로 그때의 상황을 묘사함은 시간이라는 치료제 덕택이다. 시간은 놀랍게도 뇌의 신경 수준에 영향을 끼치며 몸과 마음에 남겼던 흔적들을 조금씩 지워 없애는 모양이다. 그렇다 보니 지금은 당시의 위험을 거울삼아 나무 한 그루를 자르는데 1시간을 예상한다면 2~3시간 이상의 안전조치를 강구하며 도움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신이 사람에게 준 선물 중 특별한 것은 ‘잊혀짐’이 아닐까? 세월호 사건과 같은 악몽도 시간이 지나면 잊을 수 있다는 것은 사람만이 갖는 축복일 것이다. 물론 기억을 떨치지 못하고 어렵게 사는 분들이 있다고 한다. 이름하여 ‘과잉 기억 증후군’ 환자로 전 세계에 80여 명이란다. 이분들은 지나간 일들이 마치 녹화영상처럼 생생하게 살아 기억케 함에 더해 기쁨, 슬픔, 위험, 우울한 감정까지라니 안타깝다.   ‘신은 죽었다. (Gottisttot.)’ 라는 독설로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 프레드리히 니체는 그의 저서 ‘도덕의 계보’에서 ‘인간은 본성상 망각의 동물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는 ‘망각은 단순한 타성력이 나이성 능력의 부재가 아니라 삶을 기능하게 하는 하나의 동력이자 적극적인 장치다’라면서 ‘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을 수 있으며 잊어버림이 있기 때문에 현재에 이르러 행복할 수 있다’는 멋진 해설까지 곁들였다.   성경 인물 가운데 ‘므낫세’라는 사람이 있다. 애굽에 종으로 팔려왔으나 대기만성하여 제국의 총리가 된 요셉의 두 아들 가운데 장남이다. 이름의 뜻은 ‘그러므로 하나님이 잊어버리게 하셨다’이다. 자신을 흙구덩이에 파묻어 죽이려다 종으로 팔아넘긴 이복형들의 범행을 생각하면 치를 떨었지만, 므낫세를 얻은 뒤 깨달은 하나님의 뜻은 잊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한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축복 아름드리나무 한그루가 톱날 방향 본성상 망각

2022-08-05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죽음 뒤에 매기는 삶의 점수

4월 중순에 눈이 내리다니. 부활절이 지났는데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 듣고 날씨가 미쳤구나 생각한다. 하긴 요즘 미치지 않고 제 정신으로 돌아가는 일이 있기나 한 지. 새집으로 이사 와서 지난 주부터 큰맘 먹고 일찌감치 나무도 심고 정원에 알록달록 꽃을 심었다.     원래는 아무 것도 심지 않고 자연 그대로 두기로 했다. 살아있는 것들에 집착하면 그 집착의 노예가 되고 평생을 끌려다니며 살게 되는 게 두렵다. 근데 너무 허전했다. 아직도 살아갈 날들이 아득한데 생명 있는 것들과 손절하며 나무숲으로 둘러 쌓인 황량한 뒷마당을 보는 것은 쓸쓸했다. 힘들고 부대껴도 사는 동안은 생명 있는 것들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   밤새 걱정돼서 잠을 설치고 새벽에 둘러보니 하얀 눈이 소록소록 쌓인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갓 피어난 목련꽃처럼 흔들리며 하얀 솜이불로 대지를 덮는다. 새하얀 이불 덮고 속살 드러내며 누운 잔디는 평화롭다. 살고 죽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꽃들이 얼어죽을까 걱정하던 시름 접고 김이 서리는 창가에서 커피를 마신다.   요즘 아프거나 죽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지 더 이상 놀라지도 않는다. 때가 되면 가는구나 생각해도 죽음의 그림자는 해질녘 불타오르는 태양을 검은 먹물이 대지를 적시며, 캄캄한 어둠으로 한치의 앞도 볼 수 없을 때처럼 두렵다.   ‘있을 때 잘하지’는 살아있을 때 하는 말이다. 되돌릴 수 없다 해도 살아있으면 그나마 후회하고 반성할 기회도 있다. ‘살아있을 때 좀 잘 하지’라고 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죽고 나면 어떤 방법으로도 보상하거나 돌아갈 수 없다. 죽은 자의 평가는 자신의 자서전을 타인이 기록하는 일일 것이다. 그 판단이 틀리거나 정당하지 못해도 스스로 변명하거나 구걸할 여지가 없다. 살아 생전 부귀영화 누려도 죽고 난 뒤 평판은 엇갈릴 수 있다.     힘없고 비천한 죽음이 위대한 등불이 되기도 한다. 모든 사람에게 칭송 받는 죽음은 흔치 않다. 죽은 자에 대한 조의는 관대하지만 한 인간에게 매겨지는 삶의 점수는 매섭고 예리하다. 사람은 저마다 제 기준으로 타인의 죽음을 재단한다. 어쩌면 죽음 뒤에 남은, 가장 낮은 자의 가슴에 새겨진, 작은 판단이 그 사람의 생애를 요약하는 것일 수 있다.   “겉으로는 가난한 사람 도와주는 척 했지만 실은 잘난 체하고 무시했어.” 못 배운 사람, 덜 가진 자, 힘 없는 사람들은 눈치로 읽고 가슴으로 말한다. “평생 한 푼도 남 위해 쓰지 않고 제 것만 챙겼지. 집 여러 채 가진 부자라고 자랑했는데 갈 때 아무 것도 못 가져갔잖아.” 잘 사는 것보다 잘 죽는 것이 더 힘들다. 살고 죽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죄와 벌’은 누가 받는 것일까. “업보는 내가 다 지고 간다. 너희는 대대손손 축복 받을 것이다”라고 어머니는 말씀 하셨다. 부모도 그 누구도 스스로 지은 죄와 벌을 감당하지 못한다.   ‘성난 파도가 제방을 때린다 해도, 여기는 천국 같은 땅이 될 거야. 파도가 밀려와 제방을 갈아 먹는다 해도, 자유와 생명은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누릴 자격이 있지.’ 파우스트는 지상에서 최고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면 자신의 영혼을 가져가도 좋다고 메피스토펠레스와 내기를 한다. 계약대로 악마가 파우스트의 영혼을 지옥으로 데려가려는 순간 ‘영원히 갈망하는 자, 그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다’라고 천사들은 노래하며 파우스트의 영혼을 천상으로 데려간다.   살아있다는 것은 소망의 꽃씨 묻으며 스스로 죽음의 자서전을 집필하는 일이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점수 생전 부귀영화 대대손손 축복 fine art

2022-04-19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고난은 축복의 통로

나는 당신께 파란하늘을 원했지만 / 당신은 나를 먹구름 아래 있게 하셨다 / 나는 이 땅의 낙원을 꿈꿨지만 / 당신은 길고 깊은 가시밭 길을 걷게 하셨다 / 그 고난의 끝에서 나는 당신을 만났다 / 손을 내민 그의 손에 못자국은 / 흔들리는 영혼의 깊은 위로가 되었다 / 당신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마다 / 내속의 불순물은 강렬히 타 올랐다 / 비극도 아닌, 그렇다고 희극도 아닌 / 고통 후 찾아드는 평안함 / 당신을 향한 소망이 자라나 / 살아도 죽고, 죽어도 사는 / 샘 할 수 없는 영원을 찾게 하셨다     천장이 높은 교회의 성가대석에서 헨델의 ‘메시아’를 노래했다. 모든 교인들이 일어나 마지막 곡인 ‘할렐루야’를 경청했다. 지휘자의 인사에 이어 성가대가 머리 숙여 인사를 했다. 솔리스트 몇명과 오케스트라의 소개가 끝난 후 박수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 앉았다. 참았던 눈물이 흘러 내렸다. 나는 교인이 다 빠져나간 텅 빈 교회에 오랫동안 앉아있었다. 눈물을 훔친 두 손이 젖을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20대의 청년이었고 시카고행을 며칠 앞두고 있었다. 그때 나를 만지셨던 못자국 난 당신의 손을 잊을 수 없다. 그 때 내 속에 머물렀던 따뜻한 감격은 매년 부활절을 맞을 때마다 오랫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펜더믹 상황으로 오랫동안 대면예배를 드리지 못했다. 올해 초부터 다시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고 있다.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영원의 위로’ 덕분이었다. ‘인생을 가까이서 바라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당면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상황과 약간의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끝을 알 수 없는 우주의 관점에서 지구, 그리고 인간은 그야말로 원자 수준에도 미치지 못할만큼 지극히 미미한 존재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내면에 소망의 씨앗을 품고 있다.   하지만 평소에는 주로 외부세계에 관심을 갖다 보니 이를 인식하지 못하다가 고난이 닥쳐왔을 때 비로소 나를 돌아볼 기회가 찾아온다. 주어진 고통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 덕분에 깊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더 많이 갖게 된다. 이처럼 고난은 영원 가까이에 잠들고 있는 내면을 깨워준다. 결과적으로 우리를 소망에 보다 가까이 가도록 이끌어 준다. 그렇다고 고난이 소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기에 고난이 소망을 주는 것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고난이 내 안에 감추어진 소망을 구해온다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그 섬세한 과정은 마치 금이 풀무불을 통해 불순물이 제거되어 순도가 높아지듯, 외부의 잡음을 제거해 우리의 영혼을 보다 청결하게 소망에 가까이 드러나도록 만들어 준다.   고난이 기쁨이 되는 이유에 대한 사유는 우리의 삶을 곧게 할 뿐만 아니라 풍성한 삶으로의 초대를 이끌어 오기도 한다. 고난을 오히려 기쁨으로 여기는 것, 더 나아가 고난을 소망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은 내 안의 하나님이 강하실 때에만 이뤄질 수 있다. 그러니까 나와 전혀 대등한 관계가 될 수 없는 전능하신 분이, 자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중요한 존재로 바꿔주셨다는 것을 인정할 때 고난은 더 이상 고난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나에게 다가온 고난은 오히려 길을 만들어 이 땅에서도 천국의 소망으로 나아갈 수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올해도 당신의 부활을 노래할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산 소망이 되신 주님을 소리 높여, 목놓아 찬양할 것이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고난 축복 이상 고난 박수 소리 오랫동안 대면예배

2022-04-18

[이 아침에] 감사가 가져다 주는 축복

 ‘사람은 아무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 흙 한 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가면 유럽 땅도 그만큼 줄어들지니 (중략) 누구의 죽음이든 그것은 나를 줄어들게 하는 것 (중략) 그러니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는지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마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린다.’(존 던 묵상록 17 중에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존 던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 20세기 영미권 문인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시인이다.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 수석사제였던 존 던(1572~1631)은 런던에 페스트가 유행할 당시 이 구절이 들어간 기도문을 썼다. 그는 자신에게 병증이 발견되자 병의 진행 과정과 내면 세계를 반영한 글을 기록한다.     페스트의 공포 속에서 살던 사람들은 ‘왜 우리에게 이런 고난이 닥쳤는지’를 알기 위해 사제인 그에게 몰려 왔다. 전염병을 피하는 대신 교구민 곁을 지키기로 한 던은 매일 오전 4시에 일어나 오후 10시까지 성경을 연구하며 위로의 말씀을 전했다. 그런 그에게 페스트의 징표인 반점이 생긴다.     “양떼가 저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지금 왜 저를 쓰러뜨립니까.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인간을 지켜보는 일을 즐깁니까.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입니까.” 던이 하나님께 묻던 말이다. 당시 런던은 페스트가 휩쓸어 인구 3분의 1이 죽고, 3분의 1은 타 지역으로 이주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가족과 친구, 직장을 잃고 사업이 파탄 난 사람들이 지금 던지는 질문이다. 무엇에 감사하며 무엇을 향해 누구를 위해 나의 종은 울리는가.     예전에 종소리는 하루의 시작과 마침, 마을의 대소사를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밀레의 ‘만종’ 은 황혼 녘 전원에서 종소리 들으며 삼종기도를 올리는 장면을 그렸다. 페스트가 창궐하던 시절 사람이 죽으면 종을 쳤다. 존 딘이 언급한 종은 죽음을 알리는 조종(弔鐘)이다. 산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종소리다. 어떤 자의 죽음이라도 내가 슬퍼해야 할 만큼 인류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어떤 혹독한 고난도 죽음의 경계 허물며 생명을 갈구한다. 중환자 병동에 가면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안다. 목숨줄 붙어있다는 단순한 현실이 희망이고 기쁨이다.     바람의 얼굴을 보라. 형체도 없이 그대 곁을 스쳐간다. 한때는 비상하는 꿈이었고 불타는 만남이고 비장한 슬픔이었던 어제가 바람 속에 나부낀다. 이름도 얼굴도 희미해진 사랑처럼 바람에 실려 가느다란 종소리로 사라진다. 바람은 울지 않는다. 지나간 시간에 기웃거리며 멈추지 않고 슬퍼도 애걸하며 어제에 매달리지 않는다. 바람은 눈물 닦아 줄 사람은 오직 자신 뿐이란 걸 안다.     추수감사절은 살아있는 자들이 벌이는 축제다. 남은 자들이 올리는 기도다. 마지막 종이 울릴 때까지 쓰러지지 말고 살라고 다짐하는 언약의 종소리다. 참고 견디며 살다보면 작은 것에 감사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기뻐하며 낮아지고 작아지면 쨍하고 해뜰 날 오지 않아도 생이 충만해지는 것을 알게 된다.     바람 속에 실려오는 종소리가 죽음을 알리는 타종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축복 되기를 간구한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생명의 종소리로 감사의 계절을 맞는다.  이기희 / Q7 파인아트 대표이 아침에 감사 축복 축복 되기 고난도 죽음 런던 세인트

2021-11-25

[살며 생각하며] 2021년 10월을 보내며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 하고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40년 전 가수 이용을 탄생시킨 ‘잊혀진 계절’의 노랫말이다. 2021년 10월의 마지막 밤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떠났다. 한마디 사과나 위로의 언어조차 없이 수상한 비웃음만 남긴 채 말이다. 특별히 지난해 가혹한 쓴맛 이후 이제 겨우 일상 회복을 기대하며 어렵게 맞았던 10월일진대 한마디 변명이나 미안함의 내색은 할 법한데 아무 일없는 양 쓸쓸히 뒹구는 낙엽들의 호들갑만 뒤로한 채 싱겁게 가버렸다.   지난해는 생각조차 싫다. 하루 수만 명이 확진 판정을 받고 안치 못 한 시신들이 컨테이너째 버려지고 뉴욕의 어느 섬이 주검으로 가득했던 지옥 같은 계절들의 행각에 반응 자체가 사치였던 때여서다.   당시 수술 후유증으로 요양 병상에서 6개월 넘게 가족 면회조차 불허된 채 홀로 죽음과 사투를 벌이다 겨우 탈출한 지인이 혼잣말처럼 흘려보낸 말이 “생은 죽음으로 가는 길목에 지나지 않더라”다. 옆 병상에서 작으나마 미소로 살아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던 사람이 뒷날 아침 까만 비닐에 둘둘 말려 침상째 끌려나가는 모습을 하도 많이 경험하다 보니 삶과 죽음의 거리가 한치도 안 되어 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화로 온 가족을 불러 유언까지 했으나 자신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셨던지 죽음 문턱에서 건져주셨다고 간증한다.   오늘은 11월 첫 주 토요일이다. 미국에서야 11월은 연중 가장 큰 명절인 추수감사절이 있는 고맙고 귀한 달이다. 그러나 한국의 11월은 그렇지 않다. 시작도 끝도 아닌 것이 10월의 고운 단풍을 윽박질러 낙엽 시킨 뒤 천지사방으로 나뒹굴게 하는 것도 볼썽사나운데 그 흔한 공휴일 빨간 마크조차 하나 달력에 새기지 못하는 능력 없고 밋밋한 달이라고 천대받아 안쓰럽다.   지난번 칼럼 ‘아빠 아브라함’ 게재 후 주위로부터 항의성 인사를 자주 듣는다. 아브라함의 축복 이야기를 하면서 부득불 나이가 들통나 빚은 화근이지만 한편으로 고맙고 감사하다. 한국에서 산 날보다 많은 세월을 미국에 살면서 불혹의 40대를 지천명의 50,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의 60을 넘긴 것도 감사한데 공자 왈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른다는 종심의 70이 되었으니 주위 눈치를 안 보고 살아도 될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마저 생긴다.   사실 요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오죽하면 ‘백 세 인생’의 이애란은 70세는 할 일이 아직 남아, 80세는 아직 쓸만해서, 90세는 알아서 갈 테니재촉하지 말라고 성질을 부리는가 하면 100세가 되어도 좋은 날 좋은 시에 가겠다며 마치 생명의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는 양한다.   성경은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다” 하는가 하면 동양 또한 70세를 고희, 77세를 희수, 80세를 미수. 이는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이 드물고 쉽지 않다는 뜻으로 둘 다 자연의 순리가 가리키는 대로 건강하고 바르게 살라는 권면 같다. 그렇다. 인고의 삶을 강요하는 장수도 중요하지만 죽음 이후 우리가 가야 할 저 천국을 바라보며 소망 가운데 오늘도 스피노자의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이 복된 인생이 아닐까?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축복 이야기 아빠 아브라함 주위 눈치

2021-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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