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6.29 직전 미대사관 피신 검토했다"
제2기 트럼프 정부 출범을 앞두고 한미 관계에 대한 전망이 분분하다. 걱정과 우려가 더 커 보인다. 민감한 안보와 무역 정책에서 적잖은 변화가 예고돼 있어서다. 그렇다고 한미 관계가 곧 결딴이라도 날 듯 비관할 필요는 없다. 과거에도 한미 관계가 늘 순탄했던 건 아니다. 신뢰보다 의심이, 존중보다 압박이 앞설 때도 있었다. 평화와 번영이라는 목적지는 같지만, 그로 향하는 길은 말끔한 신작로가 아닌 울퉁불퉁한 돌길이었다. 그래도 한미 동맹은 이어졌고, 이게 한국의 번영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한미 관계의 역정을 되돌아보면 자연스레 미래도 엿볼 수 있다. 최근 워싱턴DC의 싱크탱크 한미경제연구소(KEI)가 발간한 『한미의 외교적 기로(U.S.-Korean Diplomatic Crossroads)』가 그에 안성맞춤이다. 2009년 출간된 『대사들의 회고록: 대사들 눈으로 본 한미관계』를 대폭 개정 증보한 책이다. 양국 대사 9명씩 모두 18명이 외교 일선에서의 경험을 번갈아 기록하는 식으로 편집됐다. 그 외 대사들의 활동상은 파이낸셜타임스 서울 지국장을 지낸 존 버튼 등이 정리했다. 남에게 듣거나 물어서 쓴 게 아니라 양국 대사들이 각자의 경험담을 일인칭 시점에서 기술했다. 그런 면에서 568쪽에 달하는 이 영문판은 사료적 가치가 크다. 한국 현대사의 중대 전환점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비화도 많다. 워싱턴포스트 돈 오버도퍼의 베스트셀러 『두 개의 한국』 못지 않은 생동감과 현장감을 전해준다. 1948년 이승만•트루먼 대통령부터 문재인•트럼프 대통령까지 약 70년의 외교사 가운데 관심 있는 이슈만 찾아볼 수도 있지만, 시간 순서대로 읽는 게 큰 흐름을 따라가기 좋다. 박정희•전두환 시절 민주화를 종용했던 미국의 역할,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에 대한 지원, 북한의 핵 개발과 한미의 대응, 반미감정의 분출과 외교 갈등, 그리고 트럼프 정부의 대북 접촉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와 안보 사이의 고민 1986년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존 케리 의원이 주한 대사로 지명된 제임스 릴리에게 물었다. “안보와 민주주의 가운데 무엇을 우선시하는가.”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투박한 질문에 릴리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남한에 민주주의가 도래하는 데 전적으로 찬성한다. 그러나 먼저 북측과의 안보를 안정시키고, 한국에겐 미국이 지원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민주화 이전 주한 미국대사들은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안보 사이에 어떻게 균형을 취할지 고민해야 했다. 민주화를 유도하기 위해 강하게 압박하거나, 반대로 독재를 묵인하다 각각 역효과를 낸 경험들이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핵 개발 시도, 북한의 도발, 한국인들의 반미 감정… 박정희•전두환 시절의 필립 하비브(1971~74), 러처드 스나이더(1974~78), 윌리엄 글라이스틴(1978~81), 리처드 워커(1981~86), 제임스 릴리(1986~89) 대사가 등장하는 제2~6장엔 그런 고충과 좌절의 사례들이 상세히 나온다. 물론 미국이 군부독재를 묵인했다고 보는 한국인들이 아직도 많다. 좌파는 그런 음모론을 기정사실로 믿는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 말기 6.29 선언이 나오는 데 미국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다. 당시 전두환은 제2의 광주사태를 불사하고라도 민주화 항쟁을 진압할 태세였다. 책에는 이를 막기 위한 릴리 대사(1986~89)의 활동이 드라마처럼 전개된다. 릴리는 민주화를 점잖게 권하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전두환을 찾아갔다. 1987년 6월 19일이었다. 친서를 전두환에게 직접 쥐어주면서 ‘계엄령 선포와 무력진압은 한미 관계를 훼손시킬 것’이라는 취지로 강하게 못박아야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김경원 주미대사(1985~88)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김경원은 주미대사에 앞서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청와대에서 전두환을 보좌한 경험이 있었다. 통상적인 외교채널로 청와대에 친서만 보내면 효과가 떨어진다는 김경원의 노련하고도 직관적인 판단을 릴리는 높이 평가했다. 배석한 최광수 외무장관(1986~88)이 면담을 마치고 나오면서 릴리에게 “잘 될 것 같다”고 귀뜸해줬다. 그 뒤 전두환은 계엄령 카드를 접었고, 민주화를 향한 수레바퀴가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 뉴스가 전해지자 미국 대사관의 한국인 여비서는 감격한 나머지 관저 복도에서 릴리를 부둥켜안고 “(제2의 광주사태를)막아줘 감사하다”고 인사했다고 한다. “노태우, 6.29 직전 미대사관 피신 검토” 그 뒤에도 6.29 선언이 나오기까지 하루하루 긴박한 상황은 계속됐다. 혼란한 시국 속에서 전두환 눈 밖에 났다고 벌벌 떨던 노태우가 심지어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을 검토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릴리가 6월 25일 비공개로 노태우와 만난 뒤 그의 측근에게서 들었다며 공개한 내용이다. “다른 이들은 이를 부인한다”고도 덧붙였다. 릴리는 노태우의 피신 계획을 직접 확인하진 못했으나 ‘노태우 입지가 불안해지는 것 같다’고 본국에 타전했다. 6.29 선언은 본질적으로 한국 국민의 민주화 요구에 따른 것이지만, 실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힘이 작용했다. 릴리를 통한 미국의 개입도 그 중 하나였다. 릴리는 1988년 12월 사임을 앞둔 조지 슐츠 국무장관에게서 받은 작별 전문의 일부를 소개했다. “대사가 특정한 날에 특정한 행동을 통해 역사적 기여를 한다는 건 매우 드문데, 바로 당신이 그 일을 해냈소.(중략) 1987년 계엄령이 내려질 것이라는 비극적 전망 속에서 한국 대통령을 상대로 직접 나선 당신의 행동은 칼을 거둬야겠다는 그의 결심을 이끌어내는 데 의심의 여지 없이 심대한 기여를 했소.” 릴리에 이어 한국에 부임한 도널드 그레그(1989-93)는 노태우의 북방정책을 전폭 지원했다. 중앙정보국(CIA) 경력으로 쌓은 인맥과 조지 W. 부시 대통령과의 친분은 한국의 북방외교에 큰 힘이 됐다. 부시는 199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와 고르바초프의 만남을 주선했고, 이게 이듬해 한국의 러시아 승인으로 이어졌다는 게 그레그의 설명이다. 또 1992년 중국의 한국 승인 역시 부시가 중국을 강하게 설득해 이뤄졌다고 한다. 이 같은 긴밀한 한미 공조엔 노태우와 부시의 친분이 크게 작용했는데, 이는 두 대통령의 테니스 외교에서도 잘 나타난다. 1991년 7월 미국을 방문한 노태우가 부시와 테니스를 치는 일정이 잡히자 게임 방식을 놓고 외교협의가 진행됐다. 이때 그레그는 두 대통령을 한 팀으로, 양국 대사를 또 한 팀으로 묶어 복식 경기를 하기로 현홍주 주미대사(1991~93)와 합의했다. 대통령끼리 맞상대하면, 누가 이기든 어색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게임은 두 대사가 눈에 띄지 않게 져주는 식으로 마무리됐다. 이를 본 댄 퀘일 부통령이 “두 대사가 경력관리를 잘하는군”이라고 농담했다. 현홍주의 회고도 그레그와 일치한다. 대북 정책을 둘러싼 미묘한 엇박자 북한을 대하는 한미의 입장엔 어쩔 수 없는 차이가 있다. 특히 북핵에 대해 그렇다. 현홍주와 제임스 레이니 대사(1993~97)에 따르면 미국은 핵 비확산 체제라는 글로벌한 틀에서 다루는 데 비해, 한국은 남북 간의 안보 이슈로 간주한다. 이게 북핵에 대한 한미 간 접근방식의 차이를 초래하고, 때론 오해와 갈등의 씨앗이 되곤 했다. 이에 더해 그레그는 미국 정부의 실책을 지적한다. 그는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로 시작될 것 같았던 화해 무드가 깨진 책임은 미국에 있다고 봤다. 한미 양국은 북한이 거부감을 보이는 합동 군사훈련 ‘팀 스피릿’을 1992년엔 하지 않기로 했는데, 미 국방부가 이를 깼다는 것이다. 1992년 가을 팀 스피릿 재개 발표는 “딕 체니 국방장관이 국무부나 나와 상의 없이 결정했다”는 게 그레그의 회고다. 그레그는 이를 “대사 재임 중 미국 정부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였다”고 썼다. 나아가 “이후 체니는 부통령이 돼서도 북한과의 화해 무드를 막는 여러 파괴적 행동을 했으며, 이것(팀 스피릿 재개)은 시작에 불과했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대사 출신 답지 않게 실명을 거론하며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그의 말대로 이후 남북 관계는 급격히 악화됐고, 1993년 북한은 핵비확산조약을 탈퇴했다. 그는 “남북이 화해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컸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전쟁 위기를 벗어나려는 노력 북한의 핵개발로 긴장이 고조됐던 1994년 3월. 북측 대표가 남북실무접촉 회의에서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 무렵 한반도는 1953년 휴전 이후 약 40년 만에 전쟁 위기에 가장 가까워졌다. 이를 반영하듯 제임스 레이니 대사는 글의 제목을 ‘위기를 가라앉히며(Defusing a Crisis)’로 정했다. 남북 및 북미 대화 모두 성과를 내지 못하자, 미국 강경파들은 북한 핵 시설을 폭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이니는 이에 대해 “나뿐 아니라 군 참모들도 어처구니 없는 말이라고 봤다”고 했다. 그는 북한 핵 개발의 계기를 남북 격차와 북한군의 전력 약화에서 찾았다. 재래식 전면전으론 승산이 없어진 북한에게 안전보장을 위한 유일한 길이 핵무장이라는 것이다. 북한의 핵 무장은 자존심의 원천이라는 표현도 썼다. 북핵을 정당화시켜주는 논리로 보일 수 있지만, 과민반응할 필요는 없다. 30년 전 레이니는 북한이 외부 압력에 굴해 핵을 포기하진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는데, 어차피 그게 현실이 됐다. 레이니는 당시 한미 모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이었다고 지적한다. 김영삼 정부는 북한의 도발을 자극할만한 행동도, 한국을 제치고 미국이 북한과 직거래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의 시각에서 한국은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비춰졌다. 이후의 국면전환은 잘 알려진 대로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김일성의 회담으로 이뤄진다. 레이니는 “빌 클린턴 대통령은 그리 반기지 않았으나 결국 승인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1994년 6월 평양을 방문한 카터는 김일성과 만나 북핵 동결, 핵확산방지조약 복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동결 감시, 북한 경수로 건설 등에 합의했다. 위기를 넘긴 것까진 좋았으나, 현직 대통령 클린턴이 주연에서 밀려난 게 문제였다. 레이니는 “카터 개인이 너무 앞서 간다는 시각이 있었다”며 “백악관은 카터에게 워싱턴이 아닌 조지아의 고향집으로 가길 바랬다”고 회고했다. 이에 발끈한 카터는 앨 고어 부통령과 언성을 높인 뒤, 워싱턴으로 향해 당국자들에게 방북 결과를 브리핑했으나 무시당했다고 한다. 미국대사들의 상이한 대북 인식 한국에서 근무했던 미국대사들이 북한을 보는 시각은 의외로 편차가 크다. 북한을 이해해주려는 이가 있는가 하면,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대하자는 이까지 스펙트럼이 제법 넓다. 그레그는 광주 시민들과의 만남을 통해 한국인의 한(恨)에 대한 인식을 지니게 됐고, 평양 방문에서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광주나 평양 사람들 모두 별난 광신도들이 아니라 정상적인 한국인이었고, 내가 그들을 존중하는 이상 그들도 내 인간성에 반응할 것이라고 봤다. 또 레이니는 북한을 자존심 강한 국가라고 설명한다. 국가적 자존심은 김일성으로 인격화돼 있기에, 그에 대한 모독이나 위협은 한반도에 재앙을 불러올 위험이 있다고 이해했다. 이에 비해 군 출신인 해리 해리스 대사(2018~21)는 군사적 억지력이 있어야 북한과 대화가 가능하다고 봤다. 외교는 상대의 선의나 우리의 희망에만 의존할 수 없으며, 특히 북한을 상대할 땐 더 그렇다는 입장이다. 굳이 누구 의견이 맞냐고 따질 이유는 없다. 각자 재임 시절의 상황 속에서 북한을 나름 합리적으로 분석한 결과 내린 판단이기 때문이다. 그레그와 레이니가 상대했던 과거의 북한은 이해해줘야 할 존재였을 수 있지만, 해리스가 본 최근의 북한은 힘을 바탕으로 상대해야 할 김씨 3대 세습왕조가 된 것 아닐까. 그레그•레이니처럼 북한에 포용적인 대사들은 보수정부(노태우•김영삼) 시절에, 반대로 해리스 같은 보수파는 좌파 정부(문재인) 때 부임했다는 게 역설적일 따름이다. 특히 해리스는 재임 기간 내내 서울의 진보 대통령과 워싱턴의 보수 대통령(트럼프) 사이에 끼여 매우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대북 제재 강화를 주장했고, 한국이 추진하던 남북대화에 신중론을 제시했으며, 한미 군사훈련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며 이런 이유에서 한국 정부가 자신을 불만스럽게 생각한 것 같다고 했다. 해리스는 글 말미에 북한과의 화해를 북한 비핵화나 한미동맹보다 우선시하는 한국인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썼다. 표현은 “알게 됐다”에 그쳤지만, ‘그건 허황된 생각’이라는 뜻이 행간에 넘친다. 그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서운함을 솔직히 털어놨다. 좌파단체들이 그를 일본계라고 공격하고 ‘해리스 참수’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는데도 경찰이 강력 대처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청와대는 한국의 유일한 동맹국 대사에 대한 인종차별적 조롱을 끝내라고 강력히 요구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그는 ‘유일한’을 이탤릭체로 강조했다. 자신의 콧수염을 놓고 일제 총독이 떠오른다며 조롱한 좌파 언론의 모순도 지적했다. 그는 “그들은 많은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수염을 길렀다는 사실은 무시했다”고 했다. 정치를 이기는 외교관은 없다 정권교체로 인한 정책 변경은 일관성이 중요한 외교에 적잖은 부담이자 교란 요인이다. 주기적인 선거로 정권이 바뀌는 한국과 미국에선 불가피한 일이지만, 외교 당국자로선 좌절할만하다. 책에는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직전 이임하는 그레그 대사가 노태우 정부의 김종휘 외교안보수석(1991~93)을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면이 소개된다. 김종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1년만 더 같이 일했으면 좋았을텐데. 워싱턴과 서울에서 지금과 똑 같은 사람들이 1년만 더 북한을 상대했으면, 북핵을 해결할 수 있었을텐데.” 실용외교의 측면에서 김영삼보다 노태우를 더 높이 평가한 김종휘의 인식이 잘 드러난다. 그레그 역시 노태우와 부시의 리더십 덕분에 한미 관계가 돈독해졌고, 비록 잠시였지만 남북관계도 꽃피웠다고 평했다. 하지만 정치를 이기는 외교관은 없다. 해리스는 대사의 역할을 정책 입안자가 아닌 집행자로 규정했다. 한국어로 대사(大使)는 ‘큰 메신저’이지 무슨 큰 일을 하는 사람(big doer)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대사들이 무작정 본국 정책이나 훈령에 맹종한 것만은 아니다. 1977년 카터 정부의 주한 미군 철수 방침이 나오자, 리처드 스나이더는 본국 훈령에 맞서는 대신 집행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식으로 저항했다. 이어 윌리엄 글라이스틴은 1979년 방한한 카터 대통령의 리무진에 탑승해 미군 철수를 재고해달라고 30분간 설득했다. 본국과의 온도차를 감지한 건 주미 한국대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홍구(1998~2000)는 김대중 대통령과 그 측근의 대북 협상이 정상적인 절차를 따르지 않고 진행됐다고 지적했다. 그 탓에 주미대사인 본인도 소외돼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2000년 미국의 한 모임에서 연설하면서 북한 김정일 정권을 비판했는데, 본국 정부가 이를 탐탁찮게 봤다고 한다. 한승주(2003~05)는 “반미 하면 안됩니까”라는 노무현 대통령 밑에서 주미대사를 맡았으니 할 일이 더 많았다. 노무현은 반미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을 부시 정부에 알리느라 바빴다. ‘안보 불안이 제거되면 북한은 스스로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노무현의 의견을 미국에 이해시키는 건 더 어려웠다. 처음부터 노무현은 북핵보다 미국이 북한을 선제 타격함으로써 군사충돌이 벌어질 가능성에 더 신경썼다는 게 한승주의 설명이다. 주관을 절제하던 한승주는 노무현의 정책에 대해 “시기상조(premature)”로 규정하며 마지막 문장을 마무리했다. “기껏해야(at best)”라는 다소 가시 돋친 수식어와 함께. “반미시위에 미 대통령이 사과했어야” 이 책에는 한국인의 반미감정을 바라보는 대사들의 인식이 비중있게 다뤄진다. 몇몇 대사들은 시위대의 관저 침입을 겪었다. ‘양키 고 홈’ 구호나 대사 인형 화형식에도 익숙해져야 했다. 크게는 박정희의 유신정권, 전두환의 쿠데타와 광주사태를 미국이 승인해줬다는 대중의 반감 탓이 크다고 봤다. 그레그는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배신감을 감지하기도 했다. 마치 1956년 헝가리 봉기 때 자신들을 지켜주지 않은 미국에게 배신감을 느꼈던 헝가리인들처럼 말이다. 눈길을 끄는 건 토머스 허버드(2001~04)가 반미감정에 적극 대응하지 못했던 점을 후회하는 대목이다. 2002년 6월 주한미군 장갑차에 치여 여중생 신효순•심미선이 사망한 사건을 두고서다. “나의 가장 큰 후회는 부시 대통령이 사건 발생 직후 사과성명을 발표하도록 더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또 위싱턴의 한국 특파원 중 누군가 백악관 대변인에게 미 대통령의 사과를 촉구하는 질문을 하리라고 기대했는데, 아무도 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이 사건은 처음엔 월드컵 열기에 밀려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월드컵이 끝나자 뉴스가 퍼졌고, 결국 대규모 시위로 확산됐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허버드는 당시 미국을 향한 대중의 반감이 그 해 대선에서 노무현의 당선에 영향을 줬다고 봤다. 촛불시위에 참가하며 사건을 먼저 의제화한 건 이회창이었지만 덕을 본 건 노무현이었다는, 한국인들에게도 가물가물한 기억까지 되살려준다. 외교적 수사, 기억 혼동에 유의해야 읽기 전에 고려할 것들이 있다. 양국 대사들이 집필했다는 점에서 외교적 수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걸러 읽어야 하는 건 독자의 몫이다. 특히 상대국 인사의 인물평에 너무 조심한다는 인상을 준다. 한국 정치와 폭넓은 접촉면을 지녔던 미국대사들은 3김(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할 만도 한데, 찾기 어렵다. 스티븐 보스워스(1997~2001)는 햇볕정책에 대한 미국측 우려를 설명하면서 김대중을 ‘영리한 전략가(canny operator)’로 표현했다. 이게 긍정적인지, 부정적인 뉘앙스인지는 독자 판단이다. 이에 비해, 노무현과 부시의 공통점이라곤 나이(동갑)와 국제경험의 결핍이었다는 허버드의 냉소는 파격적이다. 집필자들이 많다 보니 글의 분량, 표현력에도 적잖은 차이가 나타난다. 외교현장의 역동성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한 글이 있는가 하면, 밋밋한 행정문서 같은 글도 있다.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을 두루뭉실 써놓은 이도 있고, 미공개 사실을 세세히 기록한 이도 있다. 모든 글이 팩트에 충실하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팩트를 보여주는 글의 해상도는 저마다 다르다. 주의해 읽어야 할 부분도 있다. 세월이 지나면, 기억은 다르게 적히는 법이다. 그레그는 부시의 입김으로 1992년 중국이 한국을 승인했고, 곧이어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이 성사됐다고 썼다. 실제론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이 1991년으로 중국의 한국 승인보다 1년 앞선다. 서문은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썼다. 그는 “역사의 현장에서 활동한 사람들의 시각에서 두 나라 관계를 조명했다”고 평가했다. 발행처인 KEI는 홈페이지에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양자 관계 중 하나인 한미 관계를 다룬 독특한 사례 연구”라고 책을 소개했다. 또 “양국 대사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통해 지난 75년 간 극적인 사건들을 배경으로 외교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KEI는 오는 6일 오전 6시(동부시간 오전 9시) 기고자인 크리스토퍼 힐, 토머스 허버드, 캐슬린 스티븐스, 해리 해리스 전 주한대사들을 초청해 한미 관계의 전망, 서울에서의 경험 등에 대한 토론회를 개최한다. 행사는 워싱턴DC의 KEI 사무실에서 진행되며, KEI 유튜브 채널로 생중계된다. --------- 「 미주중앙일보는 568쪽의 영문판 『한미의 외교적 기로』를 독자 1인 1부 30명에게 선착순 무료 배포합니다. 신청은 e메일 ([email protected])로만 받습니다. 성함, 주소, 전화번호를 꼭 기재하셔야 합니다. 접수 연락을 받으신 분은 본사(690 Wilshire Pl, LA, CA 90005)에서 책을 수령하십시오. 배송비($20) 부담 조건으로 미국에 한해 우송도 해드립니다. 」 김영남 기자 [[email protected]]한미외교 양국 대사들 한국 현대사 트럼프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