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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노예는 투쟁할 줄 모른다

얼마 전 신문에서 공감이 가는 글을 만났다. 현대 사회를 분석하며 ‘우리는 이미 지구라는 정신 병동에 함께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는 정신과 의사의 진단이었다. 그래서 갇혀버리지 않는 일상이 되기를 꿈꾼다.   잘못된 습관에 저항하지 않아 결국은 악습이 된 두 번째 본성과, 존재로 지향하는 참된 자아로서의 본성이 대치 상태로 싸우는 것은 두 본성의 결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과 존재가 지향하는 자유는 확연히 갈라지는 길이다. 이 길을 뒤섞어 놓고 원하는 대로 선택하게 된 것은 판도라의 빗장이 풀렸음을 의미한다.   판도라는 끝을 모르는 욕망이다. 통제가 되지 않을 때는 파괴의 위력으로 다가온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공포 또한 점진적으로 높아져 미친 놀이판의 면적 또한 넓어져만 간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을 잠식하고 있는 이 사회적 불안감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밤의 어두움은 더 기괴한 느낌이다. 창조적인 영감을 주던 그때의 그 밤이 아닌 것 같아서 저녁 시간 교회에 나가는 일도 망설인다. 새벽에도, 대축일 늦은 밤에도 걸어가서 참석하곤 했는데….모든 스케줄이 태양이 떠 있을 때까지로 고정되어 버린 듯하다.   나 역시 태양의 빛을 따라서 일상을 시작하고 끝내기로 했다. 새벽 다섯시쯤에 일어나 명상 1시간, 스트레칭 40분, 그리고 아침 식사 준비를 한다. 삶은 계란과 치킨 소시지, 전날 만들어 둔 샐러드와 커피 한잔이다. 9시쯤이면 손빨래를 하고 손글씨를 쓰고 신문을 읽는다. 점심 전까지 손과 두뇌를 움직이기 위해 꼭 하는 것이 필사와 독서다. 필사는 속도가 느리긴 해도 독서보다 기억의 기능이 좋아진다. 오후 3시쯤엔 요구르트와 넛 종류로 이른 저녁식사를 한다. 중간중간 레몬수를 마시고, 과일과 집에서 구운 팥 소가 든 홀그레인 호떡도 먹는다. 먹는 일이 심플해지면 삶의 짐에서도 가벼워진다.   자유는 끊임없이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덜어내는 행위이다. 소유하려는 것은 탐욕의 반복일 뿐 자신의 모든 것을 쓰레기통으로 만들게 된다. 정신병동의 면적이 넓어지도록 놔두고 싶지 않다. 너무 풍요로워서 불행해진다면 가던 길을 바꿀 것이다.   나에게는 가난과 자유가 터닝 포인트였다. 정신병동이나 다름없었던 늪을 빠져나오도록 다그치는 각성의 소리를 따르게 되었는데, 사막으로의 여정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텐트의 역할 그 이상이 되어주지 못하는 육신을 끌어안고, 적게 먹고, 쓰고 사용하는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고 공동의 유산임을 한시도 잊지 않아야 했다.   지구촌의 기후변화가 얼마나 심각한지 마실 물 조차 모자라는 실정이다. 선진국의 미래는 생태학적 빚더미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자성하도록 만든다. 개개인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자업자득이기에 그렇다.   온전해진 내면의 힘이야말로 창조목적으로 이끄는 것을 더욱 원하고 선택하게 한다. 파괴의 목적을 멈추고 생명 창조로의 전환을 위해서 정신병동에 갇히지 않으려면 생활 방식에 투쟁이 있어야 한다. 최경애 / 수필가이 아침에 노예 투쟁 본성과 존재 정신 병동 사회적 불안감

2024-10-31

[아름다운 우리말] 무시, 무시하다

무시(無視)한다는 말은 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달리 말하면 상대를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상태를 깔본다고 합니다. 내려다본다는 말도 비슷합니다. 물론 아예 보려고조차 하지 않는 것이니 강도는 훨씬 셉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무시를 ①사물의 존재 의의나 가치를 알아주지 아니함. ②사람을 깔보거나 업신여김이라고 설명합니다. 무시가 안 보는 것이 원래의 뜻이지만 실제로는 내려 보는 느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시하다는 말을 한국말로 하면 못 본 척이 아닐까 합니다. 봐도 못 본 척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겠습니다. 나를 본 것이 분명한데도 모르는 척하고 지나가면 기분이 상합니다. 인사는 사람의 일이라는 뜻인데, 인사를 안 했다는 것은 사람의 일을 안 한 것이고, 나를 사람 취급 안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저 사람은 무시해도 좋다는 말을 들으면 참을 수가 없을 겁니다. 저를 없는 사람 취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방식으로 말하자면 투명 인간 취급한 겁니다.     무시하다에 해당하는 우리말인 ‘업신여기다’는 방언에 ‘업시여기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말은 ‘없이 여기다’로 볼 수 있습니다. 무시하다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분명히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생각하니 그렇습니다. 본 척도 안 하고, 들은 척도 안 하고, 아는 척도 안 하는 것은 모두 무시하는 겁니다. 무시하는 게 안 좋은 거죠.   그런데 무시해도 좋은 게 있습니다. 보고도 못 본 척해야 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것을 무시하면 좋을까요? 우선 상대가 숨기고 싶은 것이라면 못 본 척해주는 게 좋을 겁니다. 혹시라도 봤다면 아예 잊으면 더 좋을 겁니다. 굳이 아는 척해서 상대에게 상처를 줄 필요는 없을 겁니다. 내가 본 것을 상대가 알아차린다면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하여도 좋습니다. 모르는 척도 배려입니다.     저는 무시의 상반되는 상황을 보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보다’에 해당하는 우리말 표현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깔보다와내려다보다도 있습니다만, 반대로 올려보다나치켜뜨다도 있습니다. 반항의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화가 났을 때는 노려보다, 째려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보는 게 감정을 싣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보는 것 중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살펴보다와돌보다입니다. 살피는 것도 보는 것이기에 살펴보는 것은 같은 의미의 단어가 겹쳐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조의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살피는 것과 두리번거리는 것은 다르다고 봅니다. 무엇을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살펴보는 것은 혹시 불편한 점이 있는지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보다는 돌아보다가 줄어든 말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말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는 돌보다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찾아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을을 돌아보거나 건물을 돌아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곳까지 살피는 것입니다. 따라서 돌본다는 말에서는 세밀한 관심이 느껴집니다. 아이를 돌보는 것은 그런 느낌의 표현입니다.   무시하지 않는 삶을 꿈꿉니다. 하지만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보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화가 나서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 살피고 보이지 않는 곳까지 돌보는 삶이기 바랍니다.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세상은 달라집니다. 내 눈의 온도를 생각해 보세요.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무시 우리말 표현 사람 취급 존재 의의

2024-10-27

13세 소년의 엄마를 사랑하는 방법

대만계 신인 감독 션 왕의 데뷔작. 올해 선댄스영화제가 발굴해낸 최고의 영화라는 평가와 함께 시상 시즌이 다가오면서 조용히 작품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달콤한 꿈을 꾼 듯한, 그러면서도 아픔의 묘사가 현실적이고 감상하고 나서의 울림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영화다.   영화 ‘디디’는 밀레니엄 세대인 크리스(아이작 왕)가 13세의 나이인 2008년, 캘리포니아 프리몬트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춘기 소년의 성장 이야기다.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시기,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직전의 마지막 한 달을 섬세하고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대만계 이민자로 싱글맘이며 화가인 청싱(조안 첸), 할머니, 누나와 살고 있는 크리스, 집에서는 그를 남동생을 뜻하는 디디라 부른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보내는 하루하루의 일상에는 사춘기 십대 소년의 부끄러운 모습이 더 많다.     크리스는 터프한 말투에 대마초도 익숙한 듯 피워댄다. 스케이트 보드를 멋지게 타고 싶어 하지만 서툴기만 하고 누나와 죽일 듯이 싸우면서도 좋아하는 여학생 앞에서는 수줍어서 말도 제대로 못한다. 크리스가 유일하게 열심인 동영상 촬영, 그리고 유튜브에 올리기, 그마저도 조회 수는 두 자리를 넘지 않는다.   어른처럼 행동해도 사춘기 소년의 어수룩함과 앳된 티를 숨길 수 없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아이 취급을 할 뿐이다. 특히 집안의 세 여자가 그렇다. 엄마, 누나, 그리고 디디의 도발을 편들어주는 유일한 사람 할머니.   소년의 인생에서 가장 격동적인 시간에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 예를 들면 스케이트 보드를 잘 타는 방법, 이성 친구와 멋있게 썸타는 방법. 말을 하지 않지만 디디의 마음속 감정들은 이런 것들로 차있다.   불안하고 고민하는 소년 디디, 혼란기의 크리스는 엄마로부터 느껴오던 소외감과 거리감을 원망과 분노로 표현한다. 집을 뛰쳐나가는 아들과 조용히 아들을 기다리는 엄마 사이에 그간 말로 표현할 수 없던 내적 갈등이 드러난다. 가장 좌절했을 때 찾아가는 엄마라는 존재, 엄마의 포옹은 모든 걸 녹여 내린다.   영화는 션 왕 감독의 실제 어린 시절을 바탕으로, 많은 부분을 그가 살던 집에서 촬영했다. 엄마에 대한 회고를 통해 사춘기 시절 그가 배웠던 가장 소중한 가치는 엄마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모두 성장한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어린 시절을 되돌아 본다. 크리스의 모든 행동들은 때로는 부끄럽고 어리석을지라도 순수하고 아름답다. 사춘기에 마침표를 찍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배워가는 크리스의 성장통이 너무 사랑스럽다. ‘나의 사춘기 시절’을 보는 듯 공감하게 되는 영화다. 김정 영화평론가소년 엄마 사춘기 소년 엄마 누나 존재 엄마

2024-10-16

[열린광장] 형형색색의 미의식

“다양성은 아름답다.(Variety is beautiful)”  미국의 이름난 하버드 크리스천 교회 그렉 로리 목사의 말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일 년 열두달의 이름이 가지각색인 것도 아름답다. 8월(八月)을 중국인은 “빠위에”, 일본인들은 “하찌가쓰”, 한국 사람은 “팔월” 라고 하는 것도 그렇다.  그리고 사람이 태어난 날은 같지만 해가 다른  것도, 발생한 해는 다르지만 날이 같은 일도 아름다움의 결과다.    1945년 미군 폭격기의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끼 원자탄 투하로 많은 생명이 숨지고 도시가 파괴되는 비극이 일어났지만 한국인에게는 해방의 기쁨을 안겨 주었다. 슬픔과 기쁨의 다양성이 아름답게 이뤄졌다. 그런가 하면 1769년 8월15일엔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이 태어났고, 1914년 8월15일은 파나마 운하가 개통된 날이다.     만물은 다 다르게 생겼다. 이 다르게 생긴 것 때문에  땅덩이는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만 살펴봐도 그렇다.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로 남자와 여자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다른 생물도 그렇지만 사람의 남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면 지구는 참으로 삶을 이룩할 가치가 없는 천체가 될 것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창조주는 남녀가 다른 점을 지닌 사람을 만드셨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람은 피부색에 따라서 백인,황인,흑인으로 나뉘었고, 같은 황인이라도 나라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한 나라 안에서도 말씨와 풍속, 사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이런 다른 것 때문에 우리는 아름다운 삶을 살 수가 있다.        그런데 아름다운 것들을 추하게 만드는 일들도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동성 부부의 합법화라고 생각한다. 이 법은 남녀 존재의 중앙값에도 미치지 못하였음을 느끼게 되어 가슴이 아프다.    사나운 비바람이 그치고 따스한 햇볕이 비칠 때 곡선을 그리며 나타나는 무지개는 참으로 아름답다. 일곱 가지 색깔을 뚜렷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느 한 색깔도 다른 색깔에 가려지지 않는다. 일곱 가지 색깔이 앙상블을 이룰 때 무지개는 비로소 그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사람은 하나의 몸이다.  이 몸을 해부해 보면 머리, 심장, 위, 혈관, 피, 또한 피의 체액이 아니겠는가!”   파스칼의 말이다.  사람의 몸은 색깔이 다양한 기관들이 살아 움직여야 제구실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 몸의 한쪽이 병들어 있으면 몸이 앙상블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그 몸은 아름답지 못하다.     국가는 사람의 몸과 같다. 몸의 기관이 병들면 몸도 병이 드는 것처럼  한 고장이라도 병들어 있으면 나라가 병들어 있는 꼴이다.  나라가 병들어 있으면 이는 색맹과 같다. 색맹이 되면 무지개의 일곱 가지 색을 가려내지 못한다.  앙상블의 묘미를 터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지각색의 아름다움에 대한 의식이 뚜렷해야 한다. 윤경중 / 목회학박사·연목회 창설위원열린광장 형형색색 미의식 남녀 존재 가지 색깔 히로시마 나가사끼

2024-08-18

[아름다운 우리말] 부부유은(夫婦有恩)이라는 말

부부라는 말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말입니다. 일단 부부(夫婦)라는 한자어를 나누어 보면 지아비 부(夫)와 지어미 부(婦)가 만나서 이루어진 말입니다. 지아비와 지어미, 두 단어에 보이는 ‘지’는 ‘집’과 관련이 있습니다. 어원적으로 보면 짓다와 관련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중세 국어에서는 ‘짓아비’라는 말이 나옵니다. 지아비의 ‘지’가 ‘짓다, 집’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집에 사는 사람이 부부인 셈입니다. 요즘은 집사람이 아내를 의미하지만 원래 ‘집’이란 함께하는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원래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남편도 아내도 모두 집사람입니다.     한편 지어미와 지아비에서 눈에 뜨이는 것은 바로 ‘어미’와 ‘아비’입니다. 부부는 근본적으로는 아이의 엄마와 아빠를 의미하였습니다. 요즘에는 그렇지 않을지 모르나 예전에는 부부의 매개는 아이였음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아이가 없으면 부부의 존재 의미까지 없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보통 3을 완벽한 숫자로 보는 경우가 많은데 3은 부모와 나를 의미하는 숫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나는 가장 기본적인 숫자이면서 완벽한 숫자입니다.   부부의 순서를 보면서 남자가 앞에 있음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남자가 앞에 나오는 것이 무슨 대수냐,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할지도 모릅니다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한자어에서는 거의 남자가 앞에 나옵니다. 부모라는 말이나 남녀라는 말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순우리말에서는 순서가 다릅니다. 엄마아빠가 대표적입니다. 비하의 표현처럼 보이기는 하나 암수나 연놈도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아들딸보다 ‘딸아들’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부의 순우리말이 가시버시라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가시는 아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에서는 남자보다 여자에 해당하는 말이 앞에 온다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자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부부라는 말과 함께 쓰이는 말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아마도 대부분이 ‘관계’나 ‘유별’을 떠올렸을 겁니다. 그중에서 부부유별이라는 말은 오륜에도 등장하는 말이니 자연스러울 수 있을 겁니다. 남녀도, 부부도 서로 가장 다른 존재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다르다는 표현을 쓴 것이겠죠. 맞습니다. 부부만큼 다른 존재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다름이야말로 특별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겁니다. 유별은 특별의 다른 말입니다. 유별을 차별로 잘못 해석하는 순간 세상은 엉망이 됩니다.   그런데 요즘 번역소학을 공부하다가 부부에 관한 어떤 표현에 놀랐습니다. 바로 부부 유은(有恩)입니다. 여기에서 은(恩)은 은혜라는 뜻입니다. 은의 뜻을 찾아보니 사랑하고 예쁘게 여긴다는 뜻도 나와 있습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고마워하고 은혜로워하는 존재입니다. 참 귀한 사이지요. 아버지는 의(義), 어머니는 자(慈), 형은 우(友), 아우는 공(恭), 자식은 효(孝)하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새길만한 이야기입니다. 번역소학에서는 의를 ‘씩씩하다’로 번역하였습니다. 자는 어엿비 여기는 것으로, 우는 사랑하는 것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씩씩하고 의롭고, 어머니는 자애롭고 따뜻하며, 형제간에는 서로를 아끼는 사랑과 온공함, 자식은 효도함이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부는 서로를 은혜로워하고 고마워하고 예쁘게 여기기 바랍니다. 소학은 어린아이가 배우는 책입니다만, 이렇게만 살면 도리에 어긋남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배워야 할 것은 소학에서 모두 배운 셈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남녀도 부부 존재 의미 요즘 번역소학

2024-06-30

[우리말 바루기] 진천에 살아? 진천에서 살아?

친구가 말했다. “진천은 말이야 생거진천이라고 하지. 살기 좋은 곳이라는 뜻여. 그런데 나는 ‘진천에 산다’고 하는데, 서울에 사는 친구는 ‘서울에서 산다’고도 자주 그러데. 서울 사람들은 ‘서울에서 산다’고 그러는 겨? 서울하고 말이 달라서 그런 겨, 아니면 둘 중 누가 틀린 겨?”   나는 “둘 다 맞는 겨”라고 했다. ‘살다’는 말 앞에는 그 장소 뒤에 ‘에’도, ‘에서’도 붙는다. ‘진천에 산다’고도, ‘진천에서 산다’고도 할 수 있다. 둘 다 자연스럽게 오간다. 다만 이때 어감은 조금 다르다. ‘진천에 산다’고 하면 단순히 거주하거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달된다. 정적이어서 ‘움직임’이 잘 안 느껴진다. 그렇지만 ‘진천에서 산다’고 말하면 ‘움직임’ 같은 게 다가온다.   존재 여부를 나타내는 말 ‘있다’와 ‘없다’가 쓰인 문장에서는 ‘에’가 자연스럽고, ‘에서’는 아주 부자연스럽다. 누구나 ‘공원에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공원에서 사람이 있다’고 하면 어색해한다. ‘공원에서’ 뒤에 어떤 동작이 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원에서 사람이 없다’고도 하지 않는다. ‘없다’에도 움직임이 없어서 망설임 없이 ‘공원에’를 선택하게 된다. ‘산책한다’는 움직임이 뚜렷한 말이다. 그래서 ‘공원에서 산책한다’고 한다.  이렇듯 ‘에서’는 움직임이 분명한 말, ‘에’는 그렇지 않은 말과 잘 어울린다.우리말 바루기 진천 서울 사람들 존재 여부 이때 어감

2024-06-26

[우리말 바루기] ‘한 끝 차이’는 없다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나 팀의 경기를 보며 마음을 졸여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응원하는 팀이 이길 듯 말 듯 애태우다 질 때가 있다. 이럴 때 “한 끗 차이로 져서 너무 아쉽다”고 말하곤 한다. 이처럼 ‘한 끗 차이’는 아슬아슬한 차이를 나타낼 때 관용적으로 쓰이는 말이다. 그런데 이를 막상 글로 적으면 ‘한 끝 차이’로 쓰는 사람이 많다.   ‘한 끗 차이’를 ‘한 끝 차이’로 잘못 적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끗’이라는 단어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거나 ‘끗’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라 생각된다.   ‘끗’은 화투나 투전과 같은 노름 등에서 셈을 치는 점수를 나타내는 단위를 뜻한다. 즉 ‘끗’은 화투를 친 뒤 점수를 계산할 때 ‘한 끗, 두 끗, 세 끗…’과 같이 셈을 하기 위한 단위라 할 수 있다. ‘끗’이 점수를 세는 단위이므로 ‘한 끗 차이’는 승부를 가르는 점수 차이가 단 1점밖에 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매우 아쉬운 상황이나 아주 적은 차이를 나타낼 때 습관적으로 ‘한 끗 차이’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다.   비슷한 현상은 “끗발 좋다”는 표현에서도 나타난다. “끗발 좋다” 대신 “끝발 좋다”고 쓰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 역시 ‘끗’과 ‘끝’을 구분하지 못해 생긴 일이라 할 수 있다. ‘끗발’은 노름 등에서 좋은 끗수가 잇따라 나오는 기세를 의미한다.  “그는 끗발이 대단하다” 등에서와 같이 ‘끗발’은 아주 당당한 권세나 기세로 의미가 확장돼 사용되기도 한다.우리말 바루기 점수 차이 스포츠 선수 존재 자체

2024-06-18

[이슈 진단] 경찰의 존재 이유

6월 2일 오후 2시 LA 한인타운 내 윌셔 잔디광장(3700 Wilshire Bl.)에서 양용씨 경찰 총격 피살 사건 규탄 집회가 열렸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던 양용씨를 병원으로 이송을 요청하기 위해 부른 경찰에 의해 총격 피살된 어처구니없는 사건에 대해 LAPD를 규탄하기 위해 가족과 한인들, 타인종 단체와 흑인 교회 관계자 등 100여명이 모였다.     예상보다 참석자가 적었다. 특히, 참석할 것으로 예상했던 한인 단체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한인 정치인은 그레이스 유(LA 시의원 10지구 후보)와 데이비드 김(연방하원 34지구 후보) 2명 만이 참석했다. 존 이 LA시의원(12지구)과 영 김, 미셸 박 스틸 연방하원의원 등 현역 정치인들은 집회에 나타나지 않았다. 게다가 사건 발생 40여일이 지나도록 양용씨 사건에 대해서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충격적인 사건임에도 한인 단체와 한인 정치인들이 이렇게나 무관심할 수 있을까?     LAPD(LA경찰국)가 5월16일 사건 현장이 담긴 보디캠 영상을 공개한 이후 한인들의 반응이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영상은 양용씨가 칼을 들고 있는 장면을 빨간색 원으로 표시해서 눈에 띄게 편집했다. 양용씨가 칼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총격을 가했다는 입장을 강조하기 위한 LAPD의 의도적 편집이다.   이 영상이 공개된 이후 의외로 많은 한인이 “양용씨가 칼을 들고 있었고, ‘칼을 버리라’는 경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 총격이 발생했다”는 LAPD의 설명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건 본말이 전도된 설명이다. 만약 강도나 인질극을 벌이는 범죄자를 제압하려는 상황이었다면 LAPD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양용씨는 부모님 집 거실에 혼자 있었고, 누구에게도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경찰이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도 아무런 범죄행위를 하지 않았다.   치료를 위해 병원으로 이송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경찰이 정신질환자인 양용씨를 범죄자로 보고 체포작전에 들어간 것부터 잘못된 판단이다. 도움이 필요한 시민을 범죄자로 보고 대응한 경찰의 마음가짐부터 잘못됐다.   이 사건은 경찰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LAPD 공식웹사이트 홈페이지에는 “To protect and to serve”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누구를 보호하고 누구에게 봉사한다는 것일까? 당연히 시민을 보호하고 시민에게 봉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시민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경찰의 사명이다.   그런데도 경찰이 시민의 안전은 전혀 고려하지 않아 무고한 희생을 초래하는 사례들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 총기를 사용하는 범죄가 다반사이기 때문에 경관의 대응에 총기사용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감안해도 그렇다.   지난 2018년 7월21일 실버레이크 지역 트레이더 조 마켓에서 매니저로 근무하고 있었던 멜리 코라도(당시 27세)는 경찰의 오인 사격으로 숨졌다. 경찰 추격을 피해 트레이더 조 마켓으로 뛰어든 진 에빈 애트킨스(당시 28세)를 향해 경관 2명이 여러 차례 총을 발사했고 코라도가 그중 한 발에 맞아 현장에서 숨졌다. 당시 마켓 안과 밖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경관들은 범죄자를 잡는데 집중해 시민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여동생을 잃은 알버트 코라도씨는 “시민의 세금으로 10만 달러나 되는 연봉을 받으면서 정작 시민을 보호해야 할 때를 구분 못 하고 무조건 총부터 쏘는 LAPD는 양용씨 사건을 계기로 반드시 총기 사용 정책부터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찰의 과도한 총기 사용 문제는 양씨 가족과 코라도씨 가족 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인 사회뿐만 아니라 전체 커뮤니티가 대응해야 할 문제이다. LAPD는 양용씨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책임자를 처벌해 “시민을 보호하고 시민에게 봉사하는” 경찰의 존재 이유를 바로 세워야 한다. 경찰의 존재 이유를 불신하는 시민이 더 늘어나기 전에. 이무영 / 뉴미디어 국장이슈 진단 경찰 존재 한인 정치인들 경찰 총격 경찰 추격

2024-06-11

[음악으로 읽는 세상] 광대여 그 슬픔을 웃어라

자신이 처한 현실과 상관없이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관객을 웃겨야 하는 것이 광대의 운명이다. 레온카발로의 오페라 ‘광대’는 이런 애환을 그린 오페라다. 주인공 카니오는 유랑극단의 광대이다. 그에게는 네다라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다. 하지만 네다는 실비오라는 남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고, 이번 공연이 끝나면 실비오와 함께 도망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카니오는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고 있지만, 그 상대가 누구인지 아직 모른다. 그래서 네다에게 연인의 이름을 대라고 다그치지만, 네다는 끝내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공교롭게도 네다와 카니오가 출연한 공연의 내용이 그들의 상황과 비슷하다. 네다가 맡은 컬럼비나 역은 남편을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역이다.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카니오는 극 중 상황과 실제의 상황을 혼동한다. 그래서 컬럼비나가 정부 아르레치노에게 “나는 항상 당신의 것이에요”라고 말하는 순간 이성을 잃고 만다.   카니오는 무대에 등장해 네다에게 애인의 이름을 말하라고 윽박지른다. 그러나 네다는 자신은 절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외친다. 분노한 카니오는 칼로 네다를 찌른다. 네다는 죽어가면서 “도와줘요, 실비오”라고 말하고, 그제서야 실비오가 정부라는 것을 안 카니오는 실비오도 칼로 찔러 죽인다. 그리고는 객석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희극은 끝났소.”   이것은 정녕 희극일까? 아니면 희극의 외피를 입은 비극일까?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른다. 광대라는 존재 자체가 그런 것이니까. 카니오가 부르는 ‘의상을 입어라’는 이런 광대의 처지를 토로한 것이다. “이제 공연이 시작된다. 의상을 입어라. 그리고 얼굴에 분칠을 해라. 아! 웃어라! 광대여! 그대의 깨어진 사랑을! 네 가슴을 쓰라리게 하는 그 슬픔을 웃어라!”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광대 슬픔 이번 공연 입고 관객 존재 자체

2024-05-06

숲·사슴 그리고 인간들…악은 이토록 모호하다

세계 3대 영화제와 아카데미상을 모두 수상한 일본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를 거론하지 않고 일본영화를 얘기할 수 없다. 2021년 칸영화제와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수상작 ‘드라이브 마이 카’에 이은 하마구치의 최근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난해 베니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경제 발전과 환경 보호가 충돌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인류와 자연의 괴로운 관계에 대한 심도 깊은 관찰이며 환경문제에 대한 하마구치의 성찰이기도 하다.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인간사회의 구차한 현상을 하마구치 감독은 신비주의를 동원해 조명한다.     도쿄 근교의 산촌. 6000명에 불과한 주민들은 모두 2차 대전 이후 이 마을로 들어와 새로운 삶을 개척한 정착민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일군 땅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으로 목가적 삶을 살아간다. 이곳에 ‘플레이모드’라는 도쿄의 연예기획사가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명분으로 캠핑촌을 설립하려 하고 파견 나온 두 명의 직원이 설명회를 개최한다.     언덕 꼭대기에 우물을 파 여름 캠핑족들의 식수를 공급하겠다는 플레이모드의 계획은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맑은 물이 오염될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도시 사람들이 몰려와 마을 사람들의 삶이 영향받을 게 두렵다.     캠핑촌 설립에 반대하는 분노의 선봉에 타구미(오마카 히토시)가 서 있다. 8살짜리 딸 하나와 살고 있는 그는 말이 없고 무뚝뚝하다. 학교 수업을 마친 딸을 데리러 가야 하는 걸 반복적으로 잊어버리는 아빠의 건망증을 알고 있는 하나는 산길을 걸어 혼자 집으로 돌아온다.     아빠와 딸은 중간에서 만나 눈길을 걸으며 나무를 관찰하고 사슴에 관해 이야기한다. 사냥 나온 도시 사람들이 사슴을 향해 발사하는 총소리가 자주 들여온다.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안톤 체호프의 총 이론. “1장에서 총이 등장했다면 2장, 3장에서 반드시 발사되어야 한다"는.     타쿠미는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사슴은 절대로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딸에게, 그리고 플레이모드의 두 직원에게 말한다. 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하는데 3분의 2를 소비한 영화는 후반부에 들어 하나가 실종되는 사건을 맞는다. 사슴에 얽힌 신비주의가 영화를 덮어버리고 충격적 결말로 이어진다.     관객은 그제야 감독이 영화 제목에서 암시했던 악마의 존재를 상기한다. 시골 사람들을 돈으로 회유해 테마파크 사업으로 이윤을 챙기려던 도시 사업가들, 그들이 악마? 시골은 선하고 도시는 악하다? 하마구치의 의미는 악마는 결코 그런 일차원적 의미에 있지 않다. 악마의 모호한 존재, 존재하지 않음으로 존재를 드러내는 그런 악마. 방금 지나간 장면, 그게 뭐였을까? 결론 없이 끝나는 영화, 그래서 토론이 필요한 영화다.     김정 영화평론가 ckkim22@gmail.com사슴 존재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신비주의가 영화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2024-05-01

[열린광장] 봉사단체의 존재 목적

한인 사회에도 많은 ‘조직’이 있다. 조직은 목적에 따라 형태나 구성원의 역할, 활동 방향 등도 달라져야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많은 한인 단체에서 잡음이 발생하곤 한다고 생각한다.       이윤 추구가 목적인 기업은 소유주가 직원을 채용해 업무를 지시하고 이를 감독한다. 반면, 봉사단체는 구성원들이 대가 없이 자기를 희생하며 봉사를 하기 위해 모인 조직이다. 그런데 일부 한인 봉사단체에서는 목적에 대한 고려 없이 기업의 운영 방식을 따르려다 보니 잡음이 생기는 것 같다.     한인회·노인회 같은 단체의 존재 목적도 봉사에 있다. 이런 단체에도 이사회가 있지만 기업의 이사회와는 성격이 다르다. 봉사단체 이사회는 임원진의 활동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재정 등 필요한 후원을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일반 회원들도 봉사하는 임원진에 고마움을 표하는 게 마땅한 태도인데 오히려 원망의 대상으로 착각하는 것이 문제의 원인이다.   ‘선교’가 목적인 교회는 그 주인이 하나님이요, 성경이라는 절대적 정관에 따라야 하는 특수 조직이다. 그 정관에는 주인인 하나님이 지도자 한 사람을 임명하면 그는 함께 일할 일꾼들을 뽑고, 그들은 그의 인도에 순종하며 따르게 되어있는 구조다. 그런데 지도자가 주인 행세를 하는 등 잘못이 있을 경우 주인은 언젠가는 그를 퇴출할 것이다.     많은 한인 단체들의 문제는 목적의 차이에 대한 고려 없이 단순히 ‘지금까지 그래 왔으니까’, ‘다른 곳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하는 타성적 사고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관여하고 있는 라구나우즈 한인회도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최근 많은 토론을 거쳤다. 그리고 봉사단체임을 재확인하며 과거 관행을 과감히 깨고 모든 것을 목적에 맞게 고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앞으로는 실질적으로 활동하는 회장 등 임원진이 단체의 중심이 되고, 이사들은 감독이 아니라 재정 등 임원진의 활동을 후원하는 봉사자의 역할을 하기로 했다. 또한 주요 업무도 과시용 행사 대신 각종 도와야 하는 분들을 돕는 활동에 역점을 두기로 의견을 모았다.   요즘 한인 단체들의 내부 갈등 소식을 종종 접한다. 대부분 단체의 존재 목적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목적의식을 공유해야 과감한 개선도 가능하다. 이번 라구나우즈 한인회의 변화가 다른 단체들에 본보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홍식 / 은퇴의사열린광장 봉사단체 존재 봉사단체 이사회 반면 봉사단체 한인 단체들

2024-04-29

[발언대] 봉사단체의 존재 목적

한인 사회에도 많은 단체들이 있다. 단체는 목적에 따라 형태나 구성원의 역할, 활동 방향 등도 달라져야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많은 한인 단체에서 잡음이 발생하곤 한다고 생각한다.       이윤 추구가 목적인 기업은 소유주가 직원을 채용해 업무를 지시하고 이를 감독한다. 반면, 봉사단체는 구성원들이 대가 없이 자기를 희생하며 봉사를 하기 위해 모인 조직이다. 그런데 일부 한인 봉사단체에서는 목적에 대한 고려 없이 기업의 운영 방식을 따르려다 보니 잡음이 생기는 것 같다.      한인회·노인회 같은 단체의 존재 목적도 봉사에 있다. 이런 단체에도 이사회가 있지만 기업의 이사회와는 성격이 다르다. 봉사단체 이사회는 임원진의 활동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재정 등 필요한 후원을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일반 회원들도 봉사하는 임원진에 고마움을 표하는 게 마땅한 태도인데 오히려 원망의 대상으로 착각하는 것이 문제의 원인이다.   ‘선교’가 목적인 교회는 그 주인이 하나님이요, 성경이라는 절대적 정관에 따라야 하는 특수 조직이다. 그 정관에는 주인인 하나님이 지도자 한 사람을 임명하면 그는 함께 일할 일꾼들을 뽑고, 그들은 그의 인도에 순종하며 따르게 되어있는 구조다. 그런데 지도자가 주인 행세를 하는 등 잘못이 있을 경우 주인은 언젠가는 그를 퇴출할 것이다.     많은 한인 단체들의 문제는 목적의 차이에 대한 고려 없이 단순히 ‘지금까지 그래 왔으니까’, ‘다른 곳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하는 타성적 사고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관여하고 있는 라구나우즈 한인회도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최근 많은 토론을 거쳤다. 그리고 봉사단체임을 재확인하며 과거 관행을 과감히 깨고 모든 것을 목적에 맞게 고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앞으로는 실질적으로 활동하는 회장 등 임원진이 단체의 중심이 되고, 이사들은 감독이 아니라 재정 등 임원진의 활동을 후원하는 봉사자의 역할을 하기로 했다. 또한 주요 업무도 과시용 행사 대신 각종 도와야 하는 분들을 돕는 활동에 역점을 두기로 의견을 모았다.   요즘 한인 단체들의 내부 갈등 소식을 종종 접한다. 대부분 단체의 존재 목적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구성원들이 목적의식을 공유해야 과감한 개선도 가능하다. 이번 라구나우즈 한인회의 변화가 다른 단체들에 본보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홍식 / 은퇴의사발언대 봉사단체 존재 봉사단체 이사회 반면 봉사단체 한인 단체들

2024-04-18

[신년기획] 2024년, 한인 세대간 소통 넓히는 한 해로

#. 뉴저지주에 거주하는 30대 직장인 서 모씨는 지난해 큰맘 먹고 대학동문모임을 찾았다가 실망만 안고 돌아왔다. 그는 “세대차는 큰 문제가 아니라 생각했지만, 막상 가 보니 한국 특유의 선후배 문화가 있었고 후배를 일꾼으로 쓴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독서그룹에도 참여했는데, 후배들에게 영문 책을 안겨주며 ‘번역을 해 오면 그걸 토대로 토론하자’고 제안하셨다”며 황당해했다.   #. 한인단체에서 오래 일한 김 모씨는 젊은 층에 대한 이민 1세대의 마음이 짝사랑처럼 느껴져 안쓰럽다고 했다. 그는 “1세대들은 모이기만 하면 단체를 물려줘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시는데, 정작 함께 봉사할 차세대 한인은 없다”며 “한인이민 역사를 모르는 경우도 많고, 기본적으로 한국어를 못하는 경우도 많아 소통이 어렵다”고 말했다.   한인사회의 오랜 숙제 ‘세대 간 화합’. 하지만 늘 말만 나올 뿐, 제대로 된 소통은 어려웠던 것이 현실이다. 각종 한인 단체장의 신년 목표가 ‘차세대 영입과 육성’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왜 차세대 한인은 한인사회에서 점점 멀어질까. 어떻게 하면 올해엔 한인들 간 소통을 넓힐 수 있을까.   ◆젊은 한인들은 어디에= 뉴욕한인회·동문회·각종 경제단체협의회…. 주요 단체장들의 대화에서 빠지지 않는 말은 ‘차세대 영입’이다. 안타깝게도 20~30대 한인들은 단체 이름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뉴욕한인회 존재조차 몰랐다는 컬럼비아대 한인 유학생은 “홍보가 잘 안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투자은행(IB)에서 일하는 조 모씨(38)는 젊은 한인들이 참여할 프로그램이 마땅치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행사가 재미있든, 아니면 네트워킹 기회가 있든 해야 하는데 한인단체 행사는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커뮤니티에 참여하려다 상처만 받은 경우도 있다. 뉴욕시 공립교 교사로 일하는 30대 한인 여성은 “모임에 나갔더니 어르신들께서 타민족 학생 비하 발언을 하셨는데, 다양한 학생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한인회 활동을 하고 있다는 한 한인은 “할아버지와도 소통이 안 되는데, 거길 들어가면 얼마나 답답할지 벌써 상상된다”고 밝혔다.   ◆1세대 “젊은층도 우리를 존중해줬으면”= 하지만 1세대 한인들도 할 말은 많다. 공들여 꾸려놓은 단체, 커뮤니티를 마치 ‘꼰대 집합소’로 여기는 분위기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뉴욕에서 수십년째 아티스트 활동을 하고 있는 강 모씨는 “젊은 학생들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한국어로 말을 걸었고, 한인 아티스트 단체를 소개했지만, 확 경계하며 선을 긋는 느낌을 받았다”며 “나도 모르게 ‘요즘 젊은 아티스트는 절실하지 않구나’라는 옛날식 사고를 하게 됐다”고 전했다. 뉴욕 한인 이민역사와 함께한 단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는 경우도 많다. 최윤희 뉴욕한인학부모협회 회장은 “여기서 나고자란 한인들의 언어적, 태도적 장점도 있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1세대 한인들의 강한 면모도 분명한 장점”이라며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땐 커뮤니티의 힘을 이용해야 한다”고 전했다. 아예 세대 차이를 인정해버린 안타까운 경우도 많아졌다. 문용철 롱아일랜드한인회장은 “저희 행사에선 우리 세대 유행가를 떼창하곤 하는데, 젊은층이 와도 섞이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세대구분보단 시스템 만드는 게 우선= 세대교체를 화두로 삼다 한인사회가 양분된 사례도 있다. 바로 지난해 치러진 제38대 뉴욕한인회장 선거다. 1세대와 2세대 후보가 치열하게 맞붙으면서 일각에선 ‘구세대가 모두 물러나야 한다’는 극단적 얘기까지 나왔다. 하지만 많은 한인은 극단적 세대교체나 구분은 정답이 될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최 회장은 “소모적 세대교체 언급은 그만하고, 다져놓은 기반을 정비해 젊은 층이 자연스럽게 오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단순 친목모임보다는, 커뮤니티에서 어젠다를 갖고 외부로 목소리를 내야 젊은 층도 유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퀸즈에 거주하는 이수진씨는 “공직 등 주류사회에 진출한 차세대도 그 다음세대를 끌어주는 리더 역할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활동을 뒷받침할 개인·기업의 펀딩도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김재연 이노비 사무총장은 다양한 행사를 조성해 여러 차례 섞이도록 유도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또 김광희 뉴욕가정상담소 설립자는 “‘세대’라는 단어 자체가 세대간 벽을 더 만든다”며 “너무 의식하지 말되 내 자신이, 내 옆 사람이 즐거울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편집국 취재팀신년기획 한인 소통 한인단체 행사 뉴욕한인회 존재 최윤희 뉴욕한인학부모협회

2023-12-31

[우리말 바루기] ‘김치소’

김치는 손이 많이 가는 음식 중 하나인데, 무를 채 썰어 파·젓갈·마늘·생강 등의 고명과 고춧가루에 버무린 뒤 배춧잎 사이사이에 넣어야 한다.   김치를 담글 때 배춧잎 사이에 넣는 양념을 이를 때 이처럼 ‘김칫속’이라고 알고 있는 이가 많다. 절인 배추의 ‘속’을 채우는 양념이라서 ‘김칫속’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김칫소’가 바른 표현이다.   ‘김칫소’를 ‘김칫속’이라 잘못 알고 쓰는 이유는 ‘소’라는 단어의 존재 자체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소’는 통김치나 오이소박이김치 등을 담글 때 속에 넣는 여러 재료로, “소를 많이 넣어서인지 김치 맛이 좋다”같이 독립된 단어로도 쓸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고기, 두부, 숙주나물을 다져 넣어 만두속을 만들었다”처럼 만두의 속에 들어가는 재료를 ‘만두속’이라고 쓰는 경우도 꽤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만두소’가 바른 표현이다.   ‘소’라는 단어가 낯설고 어색하다 보니 ‘김칫속’ ‘만두속’과 같이 잘못 알고 쓰는 경우가 많다. 소는 김치나 만두뿐 아니라 송편이나 찐빵과 같은 음식 안에 들어가는 재료를 가리킬 때도 쓰인다.     팥을 삶아 으깨 찐빵 속에 넣는 것을 ‘앙꼬’라 부르는 경우도 많지만, ‘앙꼬’는 일본어에서 온 말로, 순우리말로는 ‘팥소’라고 한다.우리말 바루기 김치소 배춧잎 사이사이 존재 자체 고기 두부

2023-12-18

[이 아침에] 사막에서 만난 순백(純白)

대륙을 섭렵하는 묘미의 으뜸은 대자연의 진수와 만나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을 맛보는 것이다. 드넓은 평야와 우람한 협곡, 그 안에서 나름의 형태로 존재하는 온갖 사물들의 의미를 음미하고 일체감을 얻을 때의 깨달음과 기쁨은 가히 희열에 가깝다. 감정은 맑고 순수하며, 성찰의 계제에 세상의 어지러움과 사악함이 파고들 틈새는 없지 싶다.       1980년대 미국에 온 이후 태평양 연안의 아름다운 풍경에 반해 101번 고속도로를 기회 있을 때마다 수없이 애용했는데, 너무 익숙해져서 근래에는 5번 고속도로를 더 선호한다. 몇 시간씩 달려도 동쪽으로는 끝없는 광야가 펼쳐져 있고, 서쪽에는 희끄무레한 화강암의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줄곧 따라온다. 뜨거운 햇볕에 메말라 죽은 풀들, 생물들이 살 것 같지 않은 박토, 구불구불 이어지는 구릉, 용암이 융기한 날카로운 바위산과 계곡은 원시의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차를 세우고 들여다보면 뜨거운 돌과 건초 사이로 이름 모를 벌레들이 스멀거리고, 선인장이 앙증스러운 꽃잎으로 반기며, 스프링클러로 연명하는 과수원에는 다람쥐가 쭈뼛거린다.     광대한 황야와 태산을 바라보고 있거나 죽음의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생명력을 만날 때면 그 장엄함과 신비함에 매료돼 자신의 존재 의미를 새삼 반추해 보게 된다. 매료되는 순간에는 마음이 백지처럼 깨끗하다. 세상살이의 난삽함은 모두 지워지고, 앞에 펼쳐진 자연의 현실과 진실만이 눈부시게 다가온다.     존 스타인벡의 명작 ‘분노의 포도’의 마지막 무대인 베이커스필드 갈림길에서 고속도로를 나와 자동차 연료를 채우고 나서 요기를 하러 바로 옆의 ‘인 앤 아웃(IN-N-OUT) 햄버거’ 가게로 들어갔다. 점심때라 길게 늘어선 줄에 서서 기다렸다. 언뜻 한 백인 부부가 음식을 들고 줄 너머 반대편으로 건너가려고 틈을 찾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좁은 공간임에도 얼른 뒷걸음질 쳐 간신히 길을 열어주었다.     “고맙습니다. 친절하시군요.” “천만에요. 당연하지요.”  정중한 감사 표시에 맞게 미소를 띠며 깍듯이 답례했다.  그들의 평소 삶의 자세가 매우 바르고 성실하겠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전해졌다. 흔한 인사지만 양측의 표정과 음성에도 진정성이 묻어 있었다.  차례가 되어 음식을 받아 아내가 잡아 놓고 있는 자리에 앉는데 아까 그 백인 부부의 옆자리였다. 그들이 파안대소하며 먼저 반겼다. 우리는 자연히 웃는 얼굴로 대화를 나눴다. 서로 여행에 관해 물었고, 여러 이야기 중에 자신들이 UC머세드 교수라는 소개가 나왔다. 낮 가리지 않고 소박한 열린 자세의 향기가 맑디맑고 향긋하게 전해졌다. 아마도 캠퍼스와 자연에서 형성된 청아한 성정이리라.     우리는 미소가 가득한 환담을 하고 교차 포옹으로 작별했다. 떠나는 그 부부의 뒷모습이 긴 여운을 남겼다. 눈빛이 형형한 두 사람의 자태가 자연의 진수가 조각한 형상이라고 여겨졌다. 인상파 화가들이 사막과 산맥을 배경으로 그 형상을 그린다면 어떤 명화가 나올까?       송장길 / 언론인·수필가이 아침에 순백 사막 백인 부부 존재 의미 베이커스필드 갈림길

2023-10-16

[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소유냐 존재냐

‘가진다’고 하는 것이 실제로 가지는 것일까? 인간은 모두 죽기에 무언가를 가져봐야 한평생에 불과하다. 그래서 ‘소유’라고 하는 양식을 버리고, ‘존재 양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안을 극복하는 길이라는 말이 있다.   최근에 번창하는 기업들 중에는 이렇게 ‘소유’라는 개념을 버리고 대신 ‘플랫폼’을 제공하거나 ‘공유’의 가치를 사업화한 기업들이 많다. ‘존재 양식’을 이용한 것이다.   택시회사인 우버(Uber)는 정작 택시를 한대도 보유하고 있지 않다. 승객과 택시를 연결만 해준다. 온라인에 새로운 소식을 매일 업데이트하는 메타(Meta)는 어떤가? 페이스북(Facebook)이라는 이름으로 정작 자신들의 사이트에 올라오는 콘텐츠를 자신들은 하나도 만들지 않는다. 모두 사이트의 이용자들이 매일매일 만들고 서로 공유하는 것이다. 유튜브, 역시 사용자들이 내용을 올리고 다른 사용자들이 그것을 보면서 서로 공유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전자상거래 사이트인 아마존(Amazon) 이나 알리바바(Alibaba)도 물건을 제작하는 회사가 아니다. 자신들은 상품을 중개만 하는 것이다. 넷플릭스(Netflix) 역시 영화관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용자들이 영화를 집에서 텔레비젼으로 보든지, 전화기로 본다. 이런 기세를 몰아 넷플릭스는 요즘 직접 영화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처음에 넷플릭스는 영화사로부터 영화를 구매해서 회원들에게 공급하는 역할만 했다. 이렇게 성공하자 이제는 영화를 제작해서 보급한다. 한때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컴퓨터를 판매했던 델(Dell), 역시 매장이 없다. 구매자들이 온라인으로 컴퓨터를 주문하면, 중국에서 들여온 값싼 부품들을 창고에서 조립해서 바로 배달을 한다. 휴가철에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숙박을 위해 이용하는 에어비앤비(Airbnb) 역시 자신들은 숙박시설을 하나도 보유하고 있지 않다. 이 회사 역시 빈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그 집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을 온라인으로 연결해주면서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이미 현대 시장을 지배하는 많은 기업들이 존재 양식 또는 공유라는 개념을 현실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직원 고용도 점차 이 존재 양식을 현실에 적용하는 예가 늘고 있다.   영국의 한 소프트 웨어 개발 회사에는 유능한 직원이 한명 있었다. 그는 프로그램 개발 실력을 인정받아 회사에서 12만 파운드 이상 고액의 연봉을 받아 왔다. 그런데 이 회사의 감사팀이 이상한 사실을 발견한다. 이 회사의 감사팀에서 이 직원의 인터넷 접속 기록들을 살펴 보니, 이 직원은 평소 근무 시간에 늘 페이스 북이나 뉴스를 보고 이것 저것 잡다한 개인 업무들을 처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이 직원은 회사가 시킨 소프트 웨어 개발을 언제 하는 것이었을까? 이 회사의 감사팀에서 발견한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이 직원은 회사에서 개발 업무를 맡기면 자신이 맡은 일을 인도나 중국에 있는 아웃소싱 회사에 의뢰를 했다. 중국이나 인도에는 값싸고 뛰어난 인력들이 많이 있었기에 이 직원이 의뢰한 업무를 아주 싼 값에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했던 것이었다. 이 직원은 연간 대략 2만파운드 정도의 싼 값에 자신의 업무를 외부에 맡겨 왔던 것이다. 그는 회사에서 12만 파운드의 연봉을 받았으니 자신은 일을 하나도 하지 않고 매년 10만 파운드를 남겨왔던 것이다. 게다가 이 직원은 이 회사에 다니면서 동시에 다른 소프트 웨어 회사와도 계약을 맺고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있었다. 프리랜서로서 맡은 일도 그는 역시 중국이나 인도에 있는 아웃소싱 회사에 의뢰했고, 자신은 수수료 차익을 가져갔다.     이 직원은 정규직원이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어 이 회사에서는 결국 해고되었다. 하지만, 그가 만일 자신이 고용된 회사에서 프리랜서로 일을 했다면, 그가 한 일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오늘날 많은 회사들이 이 직원과 같은 정규직원을 고용하는 대신, 아웃소싱으로 많은 일들을 처리하고 있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손헌수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소유 존재 존재 양식 아웃소싱 회사 직원 고용도

2023-10-05

[우리말 바루기] ‘한 끝 차이’는 없다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나 팀의 경기를 보며 마음을 졸여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응원하는 팀이 이길 듯 말 듯 애태우다 질 때가 있다. 이럴 때 “한 끗 차이로 져서 너무 아쉽다”고 말하곤 한다. 이처럼 ‘한 끗 차이’는 아슬아슬한 차이를 나타낼 때 관용적으로 쓰이는 말이다. 그런데 이를 막상 글로 적으면 ‘한 끝 차이’로 쓰는 사람이 많다.   ‘한 끗 차이’를 ‘한 끝 차이’로 잘못 적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끗’이라는 단어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거나 ‘끗’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라 생각된다.   ‘끗’은 화투나 투전과 같은 노름 등에서 셈을 치는 점수를 나타내는 단위를 뜻한다. 즉 ‘끗’은 화투를 친 뒤 점수를 계산할 때 ‘한 끗, 두 끗, 세 끗…’과 같이 셈을 하기 위한 단위라 할 수 있다.   ‘끗’이 점수를 세는 단위이므로 ‘한 끗 차이’는 승부를 가르는 점수 차이가 단 1점밖에 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매우 아쉬운 상황이나 아주 적은 차이를 나타낼 때 습관적으로 ‘한 끗 차이’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다.   비슷한 현상은 “끗발 좋다”는 표현에서도 나타난다. “끗발 좋다” 대신 “끝발 좋다”고 쓰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 역시 ‘끗’과 ‘끝’을 구분하지 못해 생긴 일이라 할 수 있다.우리말 바루기 점수 차이 스포츠 선수 존재 자체

2023-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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