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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 아래서] 헌신도 함정이 있다

어느 마을에 농부가 있었다. 마침,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두 마리를 낳았다. 너무 기뻤던 농부는 아내에게 "이렇게 복을 받았으니 한 마리는 하나님께 드리자"고 말했다. 몇 개월이 지나 송아지를 모두 장에 내다 팔려고 가는 길에 그만 한 마리가 웅덩이에 빠져 죽고 말았다. 농부가 가슴을 치며 말했다. "아 하필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다니"   조금은 치사한 우리의 마음을 보여주는 우스개다. 그럼 "모든 것을 드린다"는 말은 어떤가. 이야말로 참된 신앙의 표현이 아닌가? 믿음의 대상에게 무언가를 바치는 일과 이를 받은 신이 바라는 바를 이루어주는 일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제물을 가져가서 제사를 드리는 모습을 보며 신에게 비는 인간의 모습을 상상한다. 성전을 짓고 제물을 바치는 것이 신을 섬기는 방식인 것이다.   정말 하나님은 제물이 필요할까? "내가 설령 배가 고프더라도 너희에게 달라고 말하겠느냐? 온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다 나의 것이다." (시편 50:10-12) 말하자면 하나님은 우리를 내보내서 제물 만들어 오라고 시키는 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 왜 읽기도 어려운 제사 이야기를 성경에 적어놓았을까? 제사와 제물은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쪼개지고 태워지는 제물처럼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리고 이 약속을 십자가에서 지키셨다.     우리는 갖다 바치면서 신을 섬기는 일에 익숙해 있다. 왜냐하면 두렵고 불안해서 우리가 만든 신들이기 때문이다. 신앙을 지닌 이들조차도 갖기 쉬운 오해는 우리에게 생명을 포함해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손으로 섬기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예배당을 화려하게 짓고 우리의 정성이라고 부른다. 아닌 것처럼 기도하면서도 봉사와 선교를 하나님 앞에 천국 가는 보험처럼 바친다.     격화소양이라는 말이 있다. 신발을 신고 가려운 곳을 긁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살피지 않고 우리의 최고를 바치려는 모든 시도는 다름 아닌 격화소양이다. 시원할 리가 없다.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분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 우리 안에 오신 분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물은 우리의 상한 심령이다. 주님께 나아오는 유일한 조건은 아픈 마음이요, 지친 어깨요, 자신의 연약을 보는 눈물이며 말조차 하기 힘든 탄식이다.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와 부활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살게 하는 이유이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헌신도 함정 헌신도 함정 농부가 가슴 제사 이야기

2024-09-09

[살며 생각하며] 비슷하면서 전혀 다른 두 이야기

오늘이 입춘, 내일은 정월 대보름이다. 뉴욕·뉴저지는 아직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도 안 되었다 싶은데 벌써 입춘? 헛발질하는 음력을 무안케 하려 함인지 연일 이상기온이 계속 중이다. 아무튼 내일은 상원(上元) 또는 오기일(烏忌日)이라 부르는 계묘년 정월 대보름날이다. 정월 대보름을 오기일(烏忌日) 즉 ‘까마귀 제삿날’로 지킴은 삼국유사가 아래와 같이 그 기원을 설명하고 있다.   신라 소지왕이 정월 대보름날, 궁을 나와 천천정으로 행차를 하는데 갑자기 까마귀와 쥐떼가 나와 시끄럽게 울더라는 것이다. 그런 뒤 쥐 한마리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 가는 곳을 따라가 보라” 하자 왕이 하도 신기하고 놀라워 한 신하에게 눈짓으로 그렇게 하라고 명한다. 명을 받은 신하가 까마귀를 따라 어느 연못에 이르자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는데 그 모습을 구경하다 아차! 까마귀 행방을 놓쳐버렸다. 당황해하는 신하 앞에 한 노인이 연못에서 올라와 봉투 하나를 건네며 “만약 봉투를 열어 내용을 읽으면 둘이 죽고 읽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는 이상한 말을 남긴 뒤 사라졌다.   궁으로 돌아온 신하가 왕에게 노인이 남긴 말과 함께 문제의 봉투를 건넸다. 이에 임금은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며 편지 읽기를 주저하는데 옆에 있던 일관이 “전하! 두 사람이라 함은 일반인이고 한 사람이라 함은 전하를 말함이니 편지를 읽어심이 좋을 듯하나이다” 하는 것 아닌가. 왕이 옳게 여겨 봉투를 열어 보니 “사금갑(射琴匣) 즉 거문고 갑(케이스)을 쏘세요” 라고 적혀 있다. 왕이 활을 집어 온 힘을 다해 쏘니 화살이 거문고 갑을 관통하였고 시신 둘이 나왔는데 왕비와 인근 사찰의 중이었다. 왕비가 중과 간통한 것도 모자라 이날 밤 왕을 시해코자 거문고 갑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후 정월 대보름이 되면 신라에서는 찰밥을 지어 까마귀를 제사(烏忌日)하는 풍습이 생겼다.   성경에도 까마귀가 등장하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북왕국 왕 아합이 눈이 멀어 이방여자이세벨을 왕비로 삼고 그녀가 가져온 바알을 위해 신당을 세워 제사하는 등 언약 백성의 도를 배반하자 이에 격노하신 하나님이 선지자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 수년 동안 극심한 가뭄이 올 것을 경고케 하신다. 그런 뒤 엘리야에게는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어 그곳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하셨고, 실제로 까마귀들이 아침과 저녁에 떡과 고기를 물어와 그를 공궤케 함으로 훗날 갈멜산에서 하나님이 그를 통해 바알이 가짜 신임을 증명케 하신 뒤 바알선지자 450명을 몰살케 하시는 통쾌한 이야기다.   소지왕 이야기는 까마귀의 영험함이 불의한 두 사람을 죽이고 지고지순한 왕의 목숨을 건졌음을 들어 까마귀 제사의 당위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엘리야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까마귀 같은 미물일지라도 당신 사람의 목숨을 보전케 하는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음을 선보인 사랑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비슷한 이야기 같지만 의미는 전혀 다르다. 전자가 까마귀를 주연 삼아 ‘임금의 목숨은 하늘이 보호한다’ 같은 뭐? 세뇌성이야기라면, 후자는 창조주 하나님이 우주 만물의 주인 되시니 ‘예배는 하나님 한 분으로 족하다’는 기독교 신앙의 기본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이야기 정월 대보름날 소지왕 이야기 까마귀 제사

2023-02-03

[글마당] 남의 제사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천정이 높고 넓은 창고에서 사람들이 둘러앉아 조각 작품을 만들고 있다. 선생님이 퇴근하면서 나보고 뒷정리하라고 했다. 주위 사람들과 잡담하느라 뒷정리가 더뎌지는 와중에 옆방에서 친구가 도와달란다. 친구를 도와주고 돌아오니 전등불을 꺼 놓고 모두 떠나고 없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퍼붓는다. 전등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번갯불로 더듬으며 버릴 것을 쓰레기통에 넣으며 정리한다. 일 진행이 느려서 마음이 조급하다.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뭔가 튀어나올 것 같은 무서움이 엄습했다.     평상시 내 주위환경과 너무 다르다. 비정상이다.     ‘이건 내가 처한 현실 세계가 아니야.’     눈을 떴다. 불안하거나 복잡한 일상을 만들지 않고 피해 가려고 애쓰는 나로서는 꿈이라는 것을 꿈속에서 알아차렸다. 너무 좋아도 내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꿈속에서 직감적으로 안다. ‘이건 꿈이야. 이렇게 좋을 수가! 깨지 말고 좀 더. 조금만 더’ 하는 순간, 그야말로 깨어진 꿈이 된다.     누군들 좋아하련만, 나는 복잡한 것을 질색한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자면서도 꿈이라고 깨닫고 깨어나듯이 현실에서도 가담하지 않는다. 물론 여간해서는 끼어들지도 않지만, 간단한 일이겠지 하고 가담했다가도 뭔가 엉기는 분위기가 되면 발을 뺀다.     간단해야 반복하기 쉽다. 재미까지 보태진다면 더욱더 오래 하며 즐길 수 있다. 한번 시작한 일은 불평불만 없이 죽~ 아주 오랜 기간 재미 붙여서 한다. 간단하기 때문에 신경 쓸 일이 없어서다. 그래서 혼자서 하는 일을 선호한다.     여러 사람과 함께하는 일은 셋만 모이면 패가 갈리듯 문제가 생길 확률이 높다. 물론 리더를 잘 만나면 다행이지만, 아무리 리더가 능력이 있어도 주위에서 초 치는 인간이 있기 마련이다. 비틀기를 즐기는 인간은 앞장서서 시작도 잘하고 일이 잘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주도권을 쥐려고 혼란에 빠뜨린다.   복잡한 것을 질색하는 내 성격에 보조라도 하듯 팬데믹 핑계로 사람들을 멀리하며 혼자서 평화로운 삶을 즐겼다. 그런데 바이러스를 감기 정도로 취급하는 요즈음 다시 주위에서 번잡한 일들이 꿈틀대서 그런 개꿈을 꾼 것 같다.     3년이란 격리 기간을 잘 적응했다. 팬데믹 이전으로는 돌아가기는 그리 쉽지 않다. 유튜브나 구글을 통해 각자의 문제나 외로움을 해결하기 쉬운 세상도 한몫한다.     팬데믹이 끝나고 사람들을 만나도 남의 제사에 밤 놓아라. 대추 놓아라 지적질하면서 인간관계를 복잡하게 뒤틀지 않게 오지랖 떨지 말아야지 스스로 다짐한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제사 기간 재미 격리 기간 주위 사람들

2022-10-21

[이 아침에] 생일파티

부모님 살아계실 때는 모든 가족행사가 두 분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설을 시작으로 어머니날, 아버지날, 부모님 생신, 추수감사절, 그리고 크리스마스로 한 해가 끝이 났다.     7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해 가을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나니, 가족행사의 구심점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부모님 제사를 모셔 가족이 모였는데, 3년 상을 끝으로 성당의 연미사로 대신하게 되니 형제들이 모일 핑곗거리가 사라졌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생일에 모이자는 것이었다. 생일을 맞는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날 가고 싶은 식당으로 가족을 초대하는 방식이다.     생일이 흩어져 있어 한 달에 두 번 모이는 일도 없고, 어린 날의 추억을 함께 나눈 동시대 또래들의 모임인지라 제법 재미있게 잘 돌아갔다. 그러다 갑자기 맞게 된 코로나 펜데믹. 2년 넘게 모이지 못했다. 코로나 사태가 진정이 되고, 경제활동이 재개되었지만 우리들의 생일 파티는 쉽게 다시 시작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시작하기는 힘들고 끝내기는 쉬운 모양이다. 중단한 일을 다시 시작하려면 계기가 필요하다.     누님은 동부에 사니 이곳에서는 5남매 중 둘째인 내가 가장 손 위가 된다. 내가 칼을 빼 들어야 할 것 같아 생일이 다가오자 초대의 메시지를 보냈다. 장소는 부모님 살아생전부터 자주 갔던 타운의 중식당 Y.     4남매와 우리 아이들, 손자 손녀 모두 모였다. 식사를 기다리며 선물은 이미 다 풀어 보았고, 손녀딸과 케이크의 촛불도 끄고 나니 문득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는 이렇게 가족이 모이면 이때쯤 꼭 한마디 말씀을 하시곤 했다. 자식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에서 하는 이야기지만, 아버지의 말씀은 대개는 한두 명의 심기를 건드려 어색한 자리가 되곤 했다.     나이가 들며 말이 많아지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 같은 모양이다. 이런 현상을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노인이 말이 많은 이유는 살면서 배우고 익힌 것을 후손들에게 가르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발전하기를 기대하는 본능적 행위라는 것이다. 무엇이 먹으면 죽는 독버섯인지, 어떤 약초를 먹거나 바르면 병이 낫고 상처가 아무는지 등의 지혜를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다.  이제 이런 지식은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으로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우리의 DNA에 각인된 본능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인생이란 누가 가르친다고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살며 겪어 보아야 깨닫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을 열어라’는 유대인 속담대로 나는 입을 굳게 닫았다. 다음에도 열지 않을 작정이다. 곁에서 지켜보며 응원만 해줄 생각이다. 그리고 그날 지갑은 아내가 열었다.     저녁을 먹은 Y 식당은 우리 가족에게는 특별한 장소다. 부모님의 환갑잔치, 결혼기념일, 두 분의 칠순 등 큼지막한 가족행사는 모두 이곳에서 했다. 음식 맛이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들이 앉았던 상을 보니 빈 접시만 남았다. 나이가 들면 입맛도 까다로워지는 모양이다.   이 식당도 재개발로 곧 문을 닫을 것이라고 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이렇게 식당도 우리 집도 세대교체를 맞고 있다. 고동운 / 전 가주공무원이 아침에 생일파티 어머니날 아버지날 생일 파티 부모님 제사

2022-10-12

[이 아침에] ‘조상님, 그냥 편히 쉬세요’

 이번에도 엉터리 제사를 지냈다. 우리 집 제사는 가족의 사정에 따라 날짜와 시간이 달라진다. 이를테면 설날 아침에 차례를 지내는 것이 맞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저녁으로 미루는 식이다.    제사상을 아무리 간단하게 차린다 해도 일 요령이 없는 나에게는 쉽지 않다. 명절 며칠 전 청소를 시작하고 거울도 말갛게 닦아 놓는다.   마켓은 전날부터 조금씩 본다. 누군가는 만들어진 것 사서 놓기만 하는 요즈음 제사가 무어 그리 힘드냐고 눈치 없는 소리를 한다. 물론 떡하고, 술 빚던 옛날에 비할 수는 없지만 소소하게 신경 쓸 일이 많다. 고기와 생선, 과일은 두세 군데 마켓을 돌아 좋은 것을 고른다.     음식은 몇 가지 생략하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했다. 몇 가지는 사오기도 하지만 식구들이 좋아하는 것은 집에서 한다. 갈비찜을 하고 조기를 굽고 전 한 가지를 부쳤다. 밥을 하고 탕국도 끓였다. 떡은 금방 해놓은 따끈한 것으로 골라왔다.         제상에 올릴 그릇은 제기는 아니지만 흰 도자기 그릇으로 꺼내 음식을 푸짐히 담았다. 홍동백서니 어동육서니 하는 것은 무시하고 내가 놓고 싶은 대로 보기 좋게 놓았다. 밤은 까기 힘들어 생략하고 북어와 곶감도 먹을 사람이 없어 뺐다. 음식을 차린 후 해마다 재탕해서 쓰는 지방을 붙이고 촛불을 켰다. 향 몇 가닥에 불을 붙이니 온 집안에 향내가 퍼진다.     처음 제사를 지내게 되었을 때, 조금은 피곤하고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여러 해 지나면서 꼭 해야 할 것만 골라 하는 요령이 생겼다. 오랜만에 돌아오는 가족들 먹일 생각으로 준비하니 마음도 편하고 인색하지도 않게 되었다. 조상님 덕분에 내 입이 호강하니 그것도 좋은 일이다.     나물을 그득히 담고 생선 위에 젓가락 올려놓고 자식들 잘 보살펴 달라고 해마다 빌었다. 조상님 위한 제사가 아니라 내 욕심 차리자고 지내는 일이 되었다. 우리 식구 잘 봐 달라는 뇌물성 제사이다.   제사상 앞에서 삶과 죽음의 길 중간 어디쯤 가고 있는 나를 돌아보았다. 어느 날 부모의 죽음을 마주하고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보며 늙어 갈 것이다. 그 아이들에게서 새로운 힘을 얻고 그렇게 세상은 이어지겠지. 죽은 자를 위한 음식을 상 가득 쌓아 놓고 산 자는 천 년을 살 것처럼 다투며 산다.     어린 시절 하느님은 그 많은 사람들 기도를 어떻게 다 들어줄 수 있을까 궁금했다. 하느님 자리는 너무 피곤하겠다는 짠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열심히 원하는 것을 달라고 기도했다. 곰곰 생각해보니 이승 떠나 저승에서도 편히 쉬지 못하고 늘 자식 걱정에 시달릴 부모님이 애잔하다. 말하지 않는다고 자식이 원하는 것을 부모님이 모르실까 싶기도 했다.     이번에는 절을 하면서 조상님께 더 이상 내 요구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자식들 걱정 말고 “그냥 편히 쉬세요” 하며 절을 했다. 박연실 / 수필가이 아침에 조상 조상님 덕분 엉터리 제사 자식들 걱정

2022-02-20

[이 아침에] ‘조상님, 그냥 편히 쉬세요’

이번에도 엉터리 제사를 지냈다. 우리 집 제사는 가족의 사정에 따라 날짜와 시간이 달라진다. 이를테면 설날 아침에 차례를 지내는 것이 맞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저녁으로 미루는 식이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때는 주말에 지내고, 대학교나 직장으로 떠나고 나서는 아이들이 오는 날에 맞춰 지낸다.   제사상을 아무리 간단하게 차린다 해도 일 요령이 없는 나에게는 쉽지 않다. 하루 이틀은 종종걸음을 치게 된다. 명절 며칠 전 청소를 시작하고 거울도 말갛게 닦아 놓는다.   마켓은 전날부터 조금씩 본다. 누군가는 만들어진 것 사서 놓기만 하는 요즈음 제사가 무어 그리 힘드냐고 눈치 없는 소리를 한다. 물론 떡하고, 술 빚던 옛날에 비할 수는 없지만 소소하게 신경 쓸 일이 많다. 고기와 생선, 과일은 두세 군데 마켓을 돌아 좋은 것을 고른다.     음식은 몇 가지 생략하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했다. 몇 가지는 사오기도 하지만 식구들이 좋아하는 것은 집에서 한다. 갈비찜을 하고 조기를 굽고 전 한 가지를 부쳤다. 밥을 하고 탕국도 끓였다. 떡은 금방 해놓은 따끈한 것으로 골라왔다.         제상에 올릴 그릇은 제기는 아니지만 흰 도자기 그릇으로 꺼내 음식을 푸짐히 담았다. 홍동백서니 어동육서니 하는 것은 무시하고 내가 놓고 싶은 대로 보기 좋게 놓았다. 밤은 까기 힘들어 생략하고 북어와 곶감도 먹을 사람이 없어 뺐다. 음식을 차린 후 해마다 재탕해서 쓰는 지방을 붙이고 촛불을 켰다. 향 몇 가닥에 불을 붙이니 온 집안에 향내가 퍼진다.     처음 제사를 지내게 되었을 때, 조금은 피곤하고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여러 해 지나면서 꼭 해야 할 것만 골라 하는 요령이 생겼다. 오랜만에 돌아오는 가족들 먹일 생각으로 준비하니 마음도 편하고 인색하지도 않게 되었다. 조상님 덕분에 내 입이 호강하니 그것도 좋은 일이다.     나물을 그득히 담고 생선 위에 젓가락 올려놓고 자식들 잘 보살펴 달라고 해마다 빌었다. 조상님 위한 제사가 아니라 내 욕심 차리자고 지내는 일이 되었다. 우리 식구 잘 봐 달라는 뇌물성 제사이다.   제사상 앞에서 삶과 죽음의 길 중간 어디쯤 가고 있는 나를 돌아보았다. 어느 날 부모의 죽음을 마주하고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보며 늙어 갈 것이다. 그 아이들에게서 새로운 힘을 얻고 그렇게 세상은 이어지겠지. 죽은 자를 위한 음식을 상 가득 쌓아 놓고 산 자는 천 년을 살 것처럼 다투며 산다.      어린 시절 하느님은 그 많은 사람들 기도를 어떻게 다 들어줄 수 있을까 궁금했다. 하느님 자리는 너무 피곤하겠다는 짠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열심히 원하는 것을 달라고 기도했다. 곰곰 생각해보니 이승 떠나 저승에서도 편히 쉬지 못하고 늘 자식 걱정에 시달릴 부모님이 애잔하다. 말하지 않는다고 자식이 원하는 것을 부모님이 모르실까 싶기도 했다.     이번에는 절을 하면서 조상님께 더 이상 내 요구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자식들 걱정 말고 “그냥 편히 쉬세요” 하며 절을 했다.   박연실 / 수필가이 아침에 조상 조상님 덕분 엉터리 제사 자식들 걱정

2022-02-15

[아름다운 우리말] 판굿을 하다

판굿은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걸립패나 두레패들이 넓은 마당에서 갖가지 풍물을 갖추고 순서대로 재주를 부리며 노는 풍물놀이’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조금 쉽게 이야기하자면 ‘넓은 마당에서 함께 풍물을 갖고 노는 놀이’ 정도로 설명하는 것도 가능하겠습니다. 굿이라는 말이 들어간 표현이므로 무속과도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판굿은 판과 굿이 합쳐진 말입니다. ‘굿판’을 거꾸로 한 말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무속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는 판굿이 아니라 굿판입니다. 어휘의 순서가 반대인데,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우선 판은 어떤 일을 하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씨름판이라든가, 난장판이라든가 하는 어휘에서 판을 찾을 수 있습니다. 판을 벌리다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또한 예술과 관련된 용어 중에서는 판소리가 있습니다. 판소리에서 판굿의 의미와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습니다. 판소리의 소리는 주로 노래를 의미합니다. 소리 한 자락이라는 말이 노래를 의미하기도 하는 겁니다. 판소리는 판을 벌이고 노래를 한다는 느낌의 어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굿은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기원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굿은 무당이 마을이나 특정한 개인을 위해서 벌이는 연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당의 연기와 노래, 춤, 연주 등이 어우러지는 종합 예술의 현장입니다. 물론 종교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종교이고 샤머니즘의 발현입니다. 굿이 지금은 미신처럼 취급되지만 사실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제사 형식이었습니다. 또한 축제의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예전에 우리 선조들이 행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행위는 전부 굿과 관련이 있었을 겁니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등 우리가 배웠던 제천의식에는 굿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 유교 등의 전래와 함께 무속이 힘을 잃어 갔고, 현대 사회에 들어오면서 미신의 취급을 받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무속만큼 우리 문화의 집합체는 없는 듯합니다.     특히 굿이 그렇습니다. 굿판은 제천의식, 제사, 염원의 자리이면서 동시에 축제의 자리였습니다. 굿판에서 흘러나오는 서사는 그대로 서사시이고 서사문학이었습니다. 구비전승의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현대까지 전해지는 민요나 춤, 농악은 무속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무속이 기원이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굿판과 판굿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판굿은 단순히 놀고 재주를 뽐내는 자리만은 아닙니다. 서로의 소원을 기원하기도 하고, 서로의 힘듦을 치유하기도 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서로의 에너지를 합하여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즉 기원을 하는 공연이며 모두가 하나가 되는 전통공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판굿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하면 참여입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공연에는 청중의 참여가 중요합니다. 실제로 앞에서 공연을 펼치는 사람 외에도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도 공연자와 끊임없이 소통을 합니다. 힘을 북돋아 주는 추임새를 하기도 합니다. 공연의 빈자리에 연주가 들어가는 것은 물론입니다. 빈틈이 없습니다. 무악에서는 빈틈이 생기면 복이 달아난다고 합니다. 끊이지 않는 연주와 음악과 추임새 등에 혼연일체의 모습을 보입니다.   판굿과 굿판에서는 복을 빌고 치유을 원하는 청중의 참여가 자연스럽습니다. 자신의 복, 가족의 복, 마을의 복, 나라의 복을 비는 것이기에 당연히 참여가 이루어집니다. 본인이나 가족이 아픈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겠지요. 판은 치유의 판입니다. 위로의 판입니다. 공감의 판입니다. 하나가 되는 판입니다. 울고 웃고 묵은 감정을 푸는 해소의 판입니다. 판굿은 모두를 하나로 잇는 치유와 에너지의 공연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제천의식 제사 음악과 추임새 현대 사회

2022-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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