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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 아래서] 절망 속에 빛나는 별들

매일 나보다 앞서 출근하던 현관문은 간 곳이 없고 하루의 피곤을 아무 불평 없이 안아주던 소파는 찾을 길이 없습니다. 깔깔대며 아이들이 밟고 내리던 계단은 손잡이 끝만 남아 그을음을 토합니다. 기억이 많을수록 슬픔도 깊어집니다. 도시라는 삭막한 콘크리트 덩어리 속에서 쉼터가 되어주던 자리는 이제 주소지만 남은 아픔이 되었습니다.   놀란 가슴은 어찌해야 할지 불안해하며, 허탈한 마음은 분노에 신음합니다. 어둠이 우리를 덮고 절망이 노을빛조차 감추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늘이 어둠에 깊이 물들어 갈수록 별들도 하나 둘 나타납니다. 그리고 더 많이 더 깊이 빛나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둠 속에 별이 반짝이며 버티는 것 같지만 실은 별들 속에서 어둠이 힘겹게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별들이 새벽 햇살을 마중 나갑니다. 서쪽 하늘에는 도무지 물러설 것 같지 않은 어둠이 버티고 있었지만, 푸른 하늘과 함께 동은 트고야 맙니다. 절망은 우리를 삼킬 수 없고 소망 앞에 겨우 버틸 뿐입니다. 소망은 절망보다 강하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쓰며, 쥐어짜기도 하고 심심하면 손목을 비틀었던 자연이 실은 얼마나 무서우며 그 앞에 우리가 참으로 연약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도 다시 생각합니다. 바람 속에 모든 것이 사그라질 때, 우리는 사라지지 않는 것을 준비하고 살았는지도 묻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소망은 사랑을 먹고 자라며, 위로는 함께 흘리는 눈물과 기댈 곳을 주는 따뜻한 어깨와 말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재난에 온 힘을 다해 맞서주는 소방대원들의 수고와 용기가, 잠시라도 지친 몸과 마음을 위해 소파가 되어주려고 달려오는 이웃들의 사랑이, 힘든 이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가 우는 분들과 함께 우는 눈물이 되고, 버텨주는 위로가 됩니다. 그 속에 다시 일어서는 당신이 우리의 감사입니다.     다시 손을 모읍니다. 하나님이시여 그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에게 향하소서. 우리의 힘이시여 우리를 도우소서. 곤고한 자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며 외면하지 않으시니 우리의 곤고와 눈물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물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고통 속에, 그 고통과 함께하시는 주님.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의 구원이시여.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절망 서쪽 하늘 콘크리트 덩어리 자의 고통

2025-01-20

[삶의 뜨락에서] 절망 다음은 희망

내가 나가고 있는 Y에 얼마 동안 공석이었던 요가 강사 자리에 샛별이 나타났다. 여느 직장에서처럼 일찍 정착해 오래 머무는 강사가 있지만, 2~3개월 만에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 첫 수업 시간에 그녀는 머리를 올백으로 단정하게 빗어 묶고 왼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하고 있었다. 내 머릿속은 의구심으로 가득했으나 고도의 몰입으로 한 시간의 클래스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렇게 누구도 그녀의 검은 안대에 대해 질문도 설명도 없이 거의 일 년이 지나갔다. 그녀 클래스는 나날이 인기도가 높아 회원 수가 계속 늘어나 이제는 하루에 두세 시간씩 가르친다. 가끔 멘트 중에 전문용어가 나와 그녀의 전직이 물리치료사임을 알게 되었다.     미국인들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요가 강사와 학생의 관계는 얼마나 성의 있게 가르치고 얼마나 열심히 따라 하는가이지 그 이상의 질문은 사생활 침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요가를 끝내고 그녀와 함께 주차장으로 걷고 있었다. 난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 용기를 내서 “혹시 사고로 눈을 다치셨어요?”하고 물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안대를 벗었고 왼쪽 눈은 하얀 피부로 덮여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큰 상처가 난 오른팔을 보여주며 여기 피부를 떼서 눈두덩을 덮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아래 눈꺼풀에 악성 암이 생겨 안구 속으로 계속 침범해 들어가고 암의 진행 속도가 너무 빨라 얼굴 전체로 전이되기 전에 안구 적출술이 최고의 선택이었단다.     너무도 솔직하고 덤덤하게 말하는 그녀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몸의 어느 한 부분도 소홀하게 다룰 수는 없지만 한쪽 눈을 잃는다는 사실은 어마어마한 상실이다. 아니 절망이다. 종종 시력을 잃어도 눈은 그대로 갖고 있지 않은가. 안구 적출 후 그 공간은 어떻게 되는가. 그녀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을 줬다. 인공눈 아니면 자신의 피부이식으로 그 공간을 덮는 경우, 그녀는 후자를 택했다.     평생을 물리치료사로 많은 환자의 재활을 도와주었던 그녀가 지난 일 년 동안 겪어야 했던 신체적, 정신적, 감정적 경험과 트라우마는 그녀를 아득하고 황망한 세계로 데려갔다. 처음에 시력을 잃고 눈을 잃고 격심한 통증에 신체적 이미지의 변화를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내려가고 꺼져가고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멈춰버린 지점, 절망의 뿌리에 몸을 비벼대던 찰나, 한 줄기 희망의 빛이 피어났다. 어쩌면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그 임계점에서 가느다란 희망의 빛을 조우할 수 있다는 것은 건강한 자아의 본능이 아닐까. 다행이야, 운이 좋은 거야, 그래도 나에게는 또 하나의 건강한 눈이 있잖아. 만약 우리 몸에 하나밖에 없는 장기에 큰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이 바로 절망인 거야. 희망과 긍정의 자세로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니 아픔도 희열로 변화되어 갔다.     본인 스스로 열심히 재활에 참여했다. 첫 번째 부딪힌 장애는 한 눈으로는 원근감이 없고 몸의 중심을 잡는 데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원근감이 중요한 구기 종목 같은 운동은 상당히 어렵다. 그녀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요가, 필라테스 같은 운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을 위해 운동 삼아 요가를 시작했으나 전직이 물리치료사였던 만큼 그녀는 신체를 단련해서 유연하게 만들고 녹슬지 않게 보존하는 그녀만의 클래스, 토탈 바디와 스트레치 클래스를 개발했다. 이 클래스는 가장 인기가 있다. 예약해야만 자리를 확보할 수 있을 정도이다. 수술한 지 2년이 되어 가는 지금 그녀는 원근감도 재습득해 운전도 이제 익숙해졌고 평면의 세계에서 입체의 세계까지 한 눈으로 두 눈을 가진 사람과 동등한 능력으로 하루하루 감사하며 새로운 나날을 살고 있다. 그녀의 모든 클래스 마지막 5분은 항상 누워서 명상하게 한다. 각자 감사할 일을 찾아 스스로에게 고마움을 전달하도록 한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으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은 무한대이다. 역시 인간은 아름다운 존재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절망 희망 지점 절망 줄기 희망 스트레치 클래스

2024-12-30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죽지 못해 산다고 해도

눈물이 난다. 자꾸 난다. 요즘 자주 눈물을 흘린다. 오래 말라있던 눈물샘이한꺼번에 용솟음치는 걸까. 소소한 일에도 가슴 떨리고 작은 일에도 감동 받는다.   그동안 내 인생과 전혀 상관없이 지나친 일들이 내 일처럼 마음이 쓰라린다. 팔순이 넘은 할머니는 죽을 수가 없어 산다. 남편은 대 이을 아들을 얻기 위해 일곱살 정도 정신연령을 가진, 스무살이나 나이 어린 여자를 후실로 데려오고 세상을 떠난다. 할머니는 둘째 부인이 낳은 자식 셋 뒷바라지 하며 장애를 가진 둘째 부인을 친 자매처럼 돌본다. ‘오래 살아야지. 내가 죽으면 둘째는 누가 돌보겠노.’ 그 대목에서 눈물이 쏱아져 휴지로 코를 풀었다. 가난에 찌든 시골 살림의 가장이 되어 억척 같이 씩씩하게 살아가는 할머니 인생은 감동을 준다.   가난하지만 착실한 구두세공 세묜은 외상값을 받아 그동안 아내와 돌려입던 외출용 털외투를 장만하려고 마음 먹는데 뜻대로 안 된다. 팍팍한 세상살이에 화가 난 세묜은 보드카를 마시고 돌아오면서 알몸으로 떨고 있는 사람이 불쌍해 집으로 데려온다. ‘살려면 일을 해야 된다’며 미하일에게 구두 수선공 일을 가르친다. 톨스토이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도입 부분이다.   어느 날 오만한 부자가 일년이 지나도 모양이 안 변하고 실밥이 터지지 않는 고급장화를 주문하면서 실패하면 감옥에 넣겠다고 협박한다. 왠지 미하일은 멋진장화 대신 슬리퍼용 실로 신을 만든다. 세묜이 대경실색 하는데 그 때 부자의 시종이 황급히 와서 장화 대신 망자에게 신기는 슬리퍼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을 바꾼다. 부자가 집으로 가는 길에 죽은 것이다.     사람의 운명은 한 치 앞도 모른다. 원래 미하일은 하나님을 모시던 대천사였는데 가련한 여인의 영혼을 거두라는 명령에 불복해 지상으로 내동댕이 쳐진다. 미하일은 남편이 죽고 갓 태어난 아이둘이 클 때까지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여인의 목숨을 거둘 수 없었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톨스토이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사랑이 있고,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라는 결론을 제시한다.   우리는 왜 사는 지, 무엇 때문에 사는 지 모르고 산다. 사는 게 만만치 않아서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 죽지 못해 사는 걸까 살기 위해 죽지 못하는 것일까.   고통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아무도 대신해 주지 않는다. 눈물을 닦아주고 아파해 주지만 내 짐을 대신 져주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고통과 절망은 모난 돌뿌리처럼 생의 곳곳에 지뢰로 숨어 있다.   맨발로 걸어가면 발바닥이 덜 아프겠지만 멋진 장화를 신었다고 피해가지 못한다. 인생의 환희와 절망, 고통과 가쁨을 번갈아 마주하며 산다.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이유도 모른 체 산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발버둥치며 죽지 않고 산다.   남은 날이 살아온 시간보다 적다 해도 슬퍼하지 않기로 한다. 길이에 연연하지 않고 시간의 바구니에 담을 일기장을 채울 생각을 한다. 손잡고 서로 띠를 만들거나 홀로 반짝이는 별들을 올려다본다. 별자리 이름을 다 까먹었다.   아름드리 핀 코스모스 향기 맡으며 새벽의 문을 연다. 이토록 소중한, 멈출 수 없는 시간 속에 살아있다는 경이로운 축복에 목이 메인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할머니 인생 절망 고통 멋진장화 대신

2024-08-20

[삶의 뜨락에서] 절망에서 희망을

지난주는 나에게 아주 힘든 한 주였다. 직장에서 한꺼번에 3명의 죽음을 마주쳐야만 했다.     첫 번째 환자는 76세로 40년을 신경외과 중환자실(neurosurgery intensive care unit)에서 근무하다가 72세에 은퇴한 간호사였다. 은퇴하고 여유 있는 생활을 즐기기 시작한 후 일 년 만에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항상 남편의 돌봄이 필요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 병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고 지난주에는 그녀가 갑자기 쓰러지면서 뇌전증 발작(seizure)을 일으켜 앰뷸런스에서 응급실로,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왔다. CT 스캔 결과 평소에 고혈압이 있었던 그녀는 뇌혈관이 터졌고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 뇌부종과 뇌사로 판정이 났다. 평생 열심히 살아왔던 그녀는 그렇게 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거의 실성하다시피 환자의 남편은 계속 울다 웃기를 반복하며 그동안 제대로 못 해준 것에 대해 후회하며 사과했다. 보통 환자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자주 보는 시나리오이다. 환자가 죽고 나면 남아있는 사람들은 그동안 잘해주었던 일은 다 잊고 못 해준 일, 서운하게 해주었던 일들을 후회한다.     두 번째 환자는 32세의 여자 환자로 백혈병 치료 과정 중에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러시아에서 의대를 마친 후 미국에서 수련의 과정을 밟고자 4년 전에 어렵게 비자를 받아 뉴욕에 왔다.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그녀는 올 7월부터 우리 병원에 수련의 자리를 따냈다. 준비 과정 중 신체검사에서 5월에 백혈병을 진단받았다. 바로 항암 치료에 들어갔고 두 번째 사이클을 마친 후 항암 약 합병증의 하나인 심근병증(cadiomyopathy)을 겪게 되었다. 증상은 날로 악화하여 심부전의 결과로 호흡 곤란, 피로, 다리부종이 오고 심근의 수축력이 떨어져 펌프 기능을 잃게 되었다.   환자의 전 가족은 러시아에 있고 여기는 지난 4년 동안 사귀게 된 지인들이 전부였다. 의료진은 최선을 다해 심근 강화제와 혈관 수축제 6종류나 투여했지만 환자의 장기는 하나둘씩 기능을 잃어갔다. 마지막으로 호흡 곤란이 왔다. 이제 인공호흡기 꽂을 일만 남았다. 하지만 인공호흡기는 그녀의 폐 기능을 일시적으로 대신해줄 뿐 환자를 정상으로 돌아오게 할 수는 없었다. 의사는 러시아에 있는 환자의 어머니와 화상통화를 한 후 더는 치료를 계속하지 않기로 했다. 환자는 점점 의식을 잃어서 우리는 날마다 화상통화로 러시아에 있는 가족들에게 그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환자는 결국 토요일에 숨이 멎었다. 토요일은 유대인의 안식일로 러시아 유대인인 그녀는 방문객 한 명 없이 홀로 쓸쓸히 떠났다. 임종이 임박하여 랍비와 지인들에게 전화 통화를 해도 누구 하나 전화를 받는 사람이 없었다. 병원 규칙상 환자의 시신은 냉동실로 옮겨갔다. 32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 했던 안타까운 상황, 또 쓸쓸히 홀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지리적인 또한 종교적인 이유가 나를 혼미하게 했다.     세 번째 죽음은 현재 우리와 함께 중환자실에서 15년간 일해 왔던 주임 의사였다. 49세인 그녀는 토요일 아침 주거지인 맨해튼 자신의 콘도에서 발견되었다. 금요일 정상 근무를 마친 후 심한 두통으로 집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곧장 퇴근했다고 한다. 사인은 구형 뇌동맥류(Saccular Brain Aneurysm)으로 판명 났다. 결국 뇌동맥류가 터져 과다 출혈로 인한 사망이다. 그녀는 싱글이었고 의대 교수와 중환자실 주임 의를 겸직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충격에 빠졌다. 정말 애석하고 믿기지 않았다.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른다는 말이 이 경우가 아닌가 한다. 이 세 명의 죽음은 나를 가로막고 잠시 내 뒤를 돌아보게 했다.     오늘이 내 생의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고 있을까. 나에게 소중한 것이 과연 무엇인가. 오늘 하지 않으면 분명 후회할 일을 뒤로 미루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절망 희망 신경외과 중환자실 여자 환자 보통 환자

2023-10-06

[기자의 눈] 시련에서 얻어야 할 것

“계속 울래? 원한다면 그래도 돼. 하지만 웃으면서 다시 뛰어놀 수도 있어. 너의 선택이야.” 우연히 한 아이를 달래는 선생님의 얘기를 들었다. 친구와 놀다가 넘어져 씩씩대는 아이에게 선생님은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라는 평범한 위로가 아닌 선택지를 줬다. 선생님의 얘기를 들은 아이는 아직 분이 가라앉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동시에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곤 뒤로 돌아 재밌게 노는 아이들을 한번 쳐다보더니 다시 가서 놀겠다고 얘기했다. 선생님은 미소를 띠며 “그래? 다시 돌아갈 때는 눈물 그치고 웃으면서 가야 해. 그럴 수 있겠어?”라고  물었고 아이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뛰어갔다.     선생님과 아이의 대화에서 ‘선택’이란 흔한 단어가 ‘감정’과 함께 놓이니 낯설게 느껴졌다. 나름 시련일 저 상황에서 아이는 ‘슬픔’ 대신 ‘행복’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가온 시련에 어떤 반응을 하는가. 거기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     마음에 짐이 되는 무거운 상황들이 잇따를 때 자연스레 낙담과 절망이 뒤따라오곤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누군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지도, 부추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저항 없이 그 감정들을 받아들인다. 이따금 머릿속에선 갖가지 상상의 가지들이 세차게 뻗어 나가고 감정은 배로 증폭된다. 이 과정에서 감정의 주체는 자기 자신임을 쉽게 잊어버리곤 한다.     상황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거기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만 있을 뿐이다. 미국의 저명한 설교가인 찰스 스윈돌 목사는 “우리 인생은 사건 10%와 그 사건을 대하는 우리의 반응 90%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사건 그 자체보다 삶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해석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지만,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에 주어진다.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체험을 통해 얻은 교훈을 담은 에세이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이런 인간의 선택과 자유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굶주리고 매 맞으며 고된 노역을 이어가는 곳, 병이 들거나 일을 할 수 없으면 가차 없이 개스실로 보내지며 말 그대로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하루하루를 버텼던 저자 플랭클은 책에서 “나는 살아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의 의지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이어 플랭클은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고 덧붙였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가 삶의 시련을 대하는 태도가 남들과 다른 것이라고 한다. 리더십 분야의 권위자인 존 맥스웰은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와 좌절의 과정에서 절망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라고 스스로 되묻는다며 이것이 실패한 사람들과의 차이라고 설명했다.     누구에게나 시련은 주어진다. 하지만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느냐는 각자의 선택이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 ‘프랭크 vs 갓’에 나오는 한 성직자의 말은 시련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묵직한 의미를 던진다. “강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니 신은 나를 더 강하게 해줄 시련을 주셨습니다. 지혜를 달라고 요청하니 풀어야 하는 문제들을 주셨습니다.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니 신은 극복해야 하는 위험한 일들을 겪게 하셨습니다. 사랑을 달라고 기도하니 내가 도울 수 있는 어려운 사람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제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다가올 시련에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낙담과 절망인가 아니면 배움과 도전인가.  장수아 / 사회부기자의 눈 시련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낙담과 절망 로맨틱 코미디

2023-01-08

희망과 절망 사이, 당나귀가 관찰한 인간세상

매번 자신에게 불리하게 달라지는 순간의 주어진 운명을 순순하게 받아들이는 당나귀에게서 인생을 배운다. 당나귀의 울음소리에서 따온 EO라는 이름의 당나귀가 주인공이다. 그의 슬픈 눈동자에 비치는 세상은 동물의 세상이 아닌 인간들의 세상이다. 사람들의 탐욕이 그를 우울하게 하고 그에게 상처를 준다. EO는 상황의 서술자가 아닌 신중한 관찰자다.     당나귀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상징한다. 영화는 많은 부분, 예수를 태우고 그와 수난을 함께 했던 성경 속 당나귀를 연상시킨다. 폴란드에서 이탈리아로 이어지는 EO의 여정은 흡사 예수 수난 때처럼 시련의 연속이다.       영화 ‘EO’는 붉은 조명 아래 당나귀와 여자가 교감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들 사이의 기류에는 묘한 성적 함의가 느껴진다. 트레이너인 카산드라와 EO는 서커스단에서 함께 생활하고 함께 무대에 올라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서커스장 밖에는 동물권 운동가들의 동물 서커스 반대 시위가 한창이다. 때마침 당국은 서커스단 주인의 세금 문제로 EO를 동물 보호소로 이동시킨다. 카산드라와의 이별.     프랑스의 거장 로버트 브레송 감독의 1966년작 ‘당나귀 발타자르(Au hasard, Balthazar)’를 모티브로 한 ‘EO’는 60년대에 로만 폴란스키와 함께 ‘폴란드 학파’ 세대를 대표하던 폴란드의 거장 예르지스콜리모프스키 작품이다. 지난 5월, 33년 만에 칸영화제에 최고령감독으로 컴백하여 이 작품으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폴란드의 95회 아카데미상 국제영화 부문 출품작.       ‘EO’는 당나귀가 주인공이지만 어린이들에게 교훈을 주는 ‘옥자’나 ‘베이브(Babe)’와 같은 류의 동물영화는 아니다.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이 동원하는 상상력은 오히려 인간이 동물 학대에 있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폴란드를 순회하는 삶의 여정에서 EO는 선한 사람들보다 악하고 짓궂은 사람들을 만나 재앙과 절망을 경험한다. 축구경기장 밖을 배회하던 EO는 술 취한 훌리건에게 무자비하게 얻어맞고 의식을 잃는다. 초현실적인 이미지 창출의 대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은 죽음의 순간을 오가는 EO의 무의식을 마치 연옥의 한 장면인 것처럼 표현한다.     프랑스의 대배우 이자벨위베르가 후반부에 예기치 않은 역으로 등장하고 동물 보호 차원에서 6마리의 당나귀가 번갈아 가며, 절망의 굴레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EO를 연기한다. 김정 영화평론가온라인 영화 당나귀가 인간세상 재앙과 절망 당나귀 발타자르 절망 사이

2022-11-25

[법률리뷰] 험악한 인생

내 친구 중 뇌수술이 전공인 외과 전문의가 있다. 뇌를 수시로 열어야 하니 정말 힘들겠다고 했더니 “상담이 수술보다 더 힘들다”라고 말해 놀랐던 기억이 난다. 외상을 치료하는 것보다 마음을 다루는 게 더 힘든 모양이다. 공감이 갔다. 변호사가 힘든 이유도 분노, 슬픔, 수치, 혐오, 절망, 두려움의 6가지 감정에 휩싸인 사람들을 상대하기 때문이다. 나도 타인의 인생에 깊이 개입하고, 처절한 고뇌 가운데 뛰어들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인생이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렇다. 인생은 생각보다 험악하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숨어 있고, 돌파해야 할 난관은 끝이 없다.   정말 괴로운 건 뭐니 뭐니 해도 사람으로부터 받는 깊은 상처다. 모욕과 배신, 비방과 누명 등 ‘막장 드라마’ 못지않은 현실이 꽤 많다. 피해자·가해자가 뒤바뀌기도 하고, 아니 땐 굴뚝에 연기도 난다. 절망에 둘러싸여 우울증에 시달리는 의뢰인이 꽤 많았고, 집요한 비방과 모함을 견디지 못해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도 있었다. 때론 후한 선의를 독한 악의로 돌려받은 사람도 만난다. 배은망덕과 적반하장, 가끔은 나도 의뢰인과 같이 운다.   나는 인간의 선과 악에 얼굴을 맞대고 살다 보니 인생의 부조리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인간은 가장 고상하고 고결할 수 있는 동시에 가장 천박하고 잔인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런데 악의 핵심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있다. 바로 강한 자기중심성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아’라는 감옥에 갇혀 지낸다. 하다못해 중독이란 감옥에서 한평생 노예로 살기도 한다. 갇힌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고, 갇혀 있는 걸 알아도 출소하는 방법을 모른다. 의외로 인간은 자기 자신도 잘 모른다. 한데, 길이 없진 않다. 고통의 해석에 인생의 해답이 있다. 고통은 감옥을 벗어나는 열쇠고, 자신을 알아가는 각성이다. 나를 쇠사슬로 동여맨 자기중심성으로부터, 나를 꼼짝 못 하게 옥죄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하는 지름길이다.   나의 일상은 송사에 휘말려 고통받는 사람과의 만남이다. 사람마다 고통에 대처하는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조그만 고통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극히 드물지만, 엄청난 고통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상황이든 돌파해 나간다. 가장 큰 특징은 절대 남 탓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지어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마저 인생의 스승으로 여긴다. 내 경험이 알려준 건, 원망과 불평이 많은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삶이 피동적이니 희망도 적다. 그러나, 말문이 딱 막히는 억울한 상황도 ‘나’로부터 해결책을 찾으려는 사람은 고통을 아름답게 뛰어넘는다. 이들이 인생의 고난을 통과한 후 달라진 모습은 감탄을 자아내기도 한다. 보통은 자신을 깊이 돌아보고, 깨어진 과거를 털어낸다. ‘나’로 가득 찬 마음을 비워내고,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이 되기도 한다.   오래전, 의붓딸을 강간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8년을 선고받은 사람이 있었다. 누명을 썼으니 접견이라도 해달라는 노모의 간절한 부탁을 받고, 차분하게 대화를 나눴다. 진실은 신의 영역이지만, 죄를 뒤집어썼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대법원 문턱은 높았다. 긴 세월, 편지를 주고받고 안부를 물었다. 고통이 처절해 보였지만, 원망과 분노는 입에 담지 않았고, 작은 호의도 크게 감사했다. 그리고 ‘고통이 낭비라 생각하지 않는다. 눈물을 통해 본 세상은 보이지 않던 게 많이 보인다’라고 말했다. 최근 출소해 노모를 모시고 산다.   나는 이제 고통이 ‘신의 축복’이란 말을 조금 이해한다. 인간은 확실히 잘 변하지 않는다. 잔소리로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이 변하는 건 결국 고난에 반응하면서다. 보통 2가지다. 더 피폐해지거나, 더 고결해진다. 주어진 상황을 확 받아들이고, 고통을 잘 해석하는 사람이 후자에 속한다. 이런 사람의 뒷모습은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답다. 고통이 신비스러운 이유다.   변호사는 의뢰인의 고통 곁에 의뢰인과 같이 머문다. 이들이 고통을 통과할 때 변호사가 하는 일도 다양하다. 고통을 잘 해석할 수 있게 돕는 건 변호사의 특권이기도 하다. 살아보니 인생이 험악한 건 상수(常數)였다. 그러나 실존의 고통에 대한 나의 답은 이것이다.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 이은경 / 법무법인 산지 대표변호사법률리뷰 인생 험악 배은망덕과 적반하장 혐오 절망 분노 슬픔

2022-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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