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멈추고 다시 숨고르기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마음 따뜻한 일인가. 다시 시작할 무엇이 남아 있는 삶, 하고 싶은 무엇인가를 품고 사는 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지.   시골 촌뜨기가 도시로 이사 온 뒤 방학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삼거리 골목을 쏘다녔다. 치마 양쪽에 새하얀 줄을 단 명문학교 교복 입고 동네를 한 바퀴 돌면 동네 어른들이 “현풍댁 딸래미 잘 건사 했네. 고생한 보람 있구만” 하며 쌈지 주머니에서 격려금(?) 몇 푼을 꺼내주기도 했다.     ‘큰 칼 옆에 차고’ 이순신 장군처럼 나라 지킨 영웅은 아니라도 일류 학교를 상징하는 ‘흰 칼(하얀 줄이 있는 교복 치마)’은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받기에 충분했다. 그 기대는 평생토록 올가미가 되기도 했지만 나락에 빠질 때마다 절망에서 건져주는 동아줄이 된다.     기대(Expectations)는 어떤 일이나 대상이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다림이다. 기대는 동기를 유발시킨다. 긍정적인 측면으로는 인물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거나 역경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된다.     기대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높아지면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폐인이 되거나 타락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자존감은 ‘자아 존중감(自我尊重感)’이다. 자신을 존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고 인식하는 마음이다. 자존심은 타인이 자신을 존중하거나 받들어 주길 바라는 감정이지만 자존감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감정이다.   나이 들면 힘차게 달려오던 생의 깃발 멈추고 숨고르기를 해야 한다.     너무 힘들게 달리면 객사한다. 자존심이 센 사람은 상처를 입기 쉽다. 자존감은 상처입고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시킨다. 자존감은 스스로 무너트리기 전에는 살아 갈 인생의 지표가 된다.     나이 드신 어른 몇 분이 사업과 집을 정리하고 자녀들이 사는 타 주로 이사할 준비를 한다. 청춘을 바쳐 힘들게 지탱해 온 사업과 직장을 접고 땀 흘려 마련한 둥지를 버리고 떠날 준비를 한다.     뻐꾸기는 둥지를 짓지 않고 다른 새가 둥지를 비우는 틈을 타서 몰래 알을 낳고 원래 있던 알을 둥지 밖으로 밀어낸다. 붉은머리오목눈이는 알이 바뀐 줄도 모르고 버꾸기 알을 정성스레 키운다. 어미 뻐꾸기가 탁란을 하는 이유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나누어 낳으면 둥지 하나가 없어지더라도 다른 둥지에 낳은 새끼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남의 둥지에서 자란 새는 슬퍼도 울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삶에 길들여진다. 불행하게도 기대가 무너지고 멍에가 되면 고삐 메인 소처럼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내일이 오늘 같고 내일은 오늘의 반복인 삶을 산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내일을 믿지 않고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긋고 가치 있는 삶을 포기하며 대충 사는 일이다. 자신의 가치를 폄하하고 기대치를 낮추면 남은 시간을 허둥지둥 허비하며 산다.   힘들었던 시간 멈추고 다시 생의 고삐를 움켜쥐면 남은 시간이 소중하게 보인다.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염려하지 말고, 어떤 것을 하고 싶은 지 고심할 때다.     하릴없이 서성이는 허무의 발길이 아니라 정말로 하고 싶었단 일에 포커스를 맞추면 해가 서산으로 기울기 전, 황혼이 쏘아 올린 빛은 찬란하고 눈부시다. (Q7 Fine Art 대표)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둥지 하나 자아 존중감 명문학교 교복

2024-05-07

[손원임의 마주보기] 자아-네잎클로버

사람은 인식과 느낌, 행동의 주체로서 자아를 갖는다. 이 자아(自我)는 영어로는 에고(ego)라 하며, ‘나’라는 의미다. 우리 자아는 의식의 통일체로서 일관성을 보이며, 태어나 아동기와 소년기를 거쳐 청년기, 성인 초기에 대부분 확립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간이란 평생 동안 ‘자아’, 즉 “나는 누구인가?”를 찾아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자신의 행동을 갈고 닦아가며, 자신을 변화시키며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존재다. 이에 자아라는 개념은 철학적으로도, 심리학적으로도, 그리고 의학적으로도 딱히 ‘이것이다’라고 정의하기가 애매하다. 우리는 자아를 개개인을 대상으로 제한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 범위를 넓혀 세상과 만물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바라보고 확대 적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도덕적인 초자아(superego)라는 개념과 본능(id)과 자아의 균형을 이루는 중용의 도와 법칙이 등장한 게 아닌가.     사실상 자아는 좀 더 세부적으로 말해서, 4가지 구성 요소로 구분해서 이해할 수 있다. 쉽게 생각하자면, 자아를 네잎클로버(four-leaf clover)나 4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직소퍼즐(jigsaw puzzle)에 비유할 수 있다. 첫번째는 ‘자아 인식(self-awareness)’이다. 두번째는 ‘자아 개념(self-concept)’이다. 세번째는 ‘자아 통제(self-control)’다. 네번째는 ‘자아 존중(self-esteem)’이다.     ‘자아인식’은 자신을 타자와 별개의 존재로 자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어린이가 자기 가족을 도화지에 크레용으로 그리고 나서, “우리 가족은 아빠, 엄마, 그리고 나 세 명이예요”라고 말하는 경우다. ‘자아개념’은 자아에 대한 정보의 축적이다. 주로 인지발달과 함께 이루어지며, 이는 자존감의 기초를 형성한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식들이 이렇게 하는 말들을 들어봤을 것이다. “나는 얼굴이 우리 아빠/엄마랑 진짜로 많이 닮았어요!” 혹은 “나는 여자가 아니라 아빠처럼 남자라서 힘이 무척 세요.” ‘자아통제’는 자기조절 능력이다. 이는 충동 조절력, 만족지연능력, 좌절감과 분노 조절력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사탕을 먹고 싶어도 참을 수 있거나, 화가 나도 소리지르지 않고 친절한 말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아동의 발달지표에 따르면, 어린이는 이미 두 살부터 자아통제력을 보이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자아존중’이다. 자아존중감은 자신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로서, 자신을 가치 있고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는 정도에 따라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경향을 낳는다. 결국 아이가 부모에게서 사랑 받는다고 느끼고, 학교에서도 인정받고, 자신을 이 사회의 필요한 존재로서 인식해야 자존감이 향상되고, 이런 판단은 아이의 올바른 정체감의 형성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항상 이렇게 말하고 우울해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 엄마가 내 성적표를 보고, 내게 ‘바보’라고 큰소리치면서 화내셨어. 나는 정말 ‘멍청해’!”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자아의 네가지 하위 개념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꾸준한 발전과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우리 자신에게도 그렇지만, 특히 우리 자녀의 바람직한 자아 형성을 막거나 방해하지 않도록 하자. 말하자면,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혹은 ‘내 아이는 별 수 없어’ 하는 식으로 단념하고 마음의 귀를 닫아버리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나는 어린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행운의 네잎클로버를 찾아 이곳 저곳을 헤매던 적이 많았다. 하지만 제대로 된 ‘정형의’ 네잎클로버를 발견한 기억은 거의 없다. 아마도 우리는 영원히 우리 삶이 질 때까지 우리 자신의 ‘완전한’ 자아를 이루지도 찾지도 못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아이들에게 너무 완벽을 요구하지도 너무 재촉하지도 말자. 아이들은 숨을 고르고 쉴 공간이 필요하다. 어린이는 자신의 시간표에 따라서, 그들 고유의 재능을 찾아 자신감을 갖고, 사회인으로서 의사 표현의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그런 “자아의 네잎클로버”를 아름답게 그려가야 한다. (전 위스콘신대 교육학과 교수, 교육학 박사)   손원임손원임의 마주보기 네잎클로버 자아 생각하자면 자아 자아 개념 자아 형성

2024-04-16

[이 아침에] 내 탓이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하던가. 불통의 원인이 자신이 아닌 남에게 있다고 믿는, 한 고집 센 사람을 가까이서 본다. 그는 모든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자신은 언제나 잘못이 없다. 그에게서 건설적인 참여 의식이란 찾아 볼 수 없으며 매사에 피동적이고 불평불만을 일삼으며 사고는 항상 자기중심적이다. 필자는 자아 성찰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언제부터인가 이런저런 일을 타산지석으로 삼는 버릇이 생겼다.     ‘너 자신을 알라’ 고 한다. 자신을 앎으로써 내가 객관적으로 어떻게 투영되는지를 제대로 인지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소극적이냐 적극적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효과 면에서는 부작위(omission)도 작위(commission)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내 입에서 나오는 정제되지 않은 언사를 남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며, 오만과 독선으로 포장된 얼굴 모습과 인정미 없는 차가운 눈매는 사람들의 접근을 어렵게 할 것이다. ‘나이 40이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링컨의 말에 수긍이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 말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작자 미상의 옛시조가 떠오른다. 한번 입 밖으로 내뱉은 독설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을 뿐 더러 상대의 마음속에 큰 상처로 오랫동안 남게 될 것이다.       미국의 제 33대 대통령 해리 트르먼의 책상 위에는 ‘The buck stops here’ 라는 싸인 판이 항상 놓여 있었다고 한다. ‘모든 책임은 최종적으로 나에게 있다’라는 뜻이다. 약 20년 전 한국에서는 고 김수환 추기경이 주동이 된 ‘내 탓이오’라는 사회 운동이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사랑과 화해로 남의 잘못을 보듬어 용서하고, 자아 반성과 자기 성찰로 모든 것을 나의 탓으로 돌리자는 운동은 사람들의 영혼을 정화하는 순결 한 울림으로 다가섰던 것이다. 혹 나의 불찰이 원인이 되어 본의 아니게 피해를 본 분에게 용서를 비는 인류애적 정신에 호소하는 초 종교적 정신 운동이었다.     정치인들이 스캔들에 휘말려 사과문을 발표할 때 ‘Mea Culpa’라는 말을 인용하는 것을 가끔 본다. 사전을 찾아보니 라틴어인 이 말은 가톨릭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나의 탓으로 돌리는 말로서, 영어의 ‘culpable’ 이나 ‘culpit’ 등도 ‘culpa’에서 유래 됐다고 한다.     여기서 분명히 밝히고 싶은 것이 한가지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자기 성찰과 자아 반성에 역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나 아닌 남을 비방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다.     그물망처럼 서로 얽히고설켜서 돌아가는 현실의 사회 구조에서 때로는 자의 반 타의 반의 원인 제공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 과정에 직접 간접으로 연루되기도 하는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이 지녀야 할 공동 책임감을 느끼며 모든 것을 나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겠다.     라만섭 / 전 회계사이 아침에 공동 책임감 사회 운동 자아 성찰

2023-06-25

[잠망경] 우리가 원하는 것들

병동 직원들에게 환자들과 우리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직원들은 별로 공감하지 않는 눈치다. 상상해 보라.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외과 의사처럼정신과 의사가 자신이라는 주체와 환자라는 객체를 완전 별개로 취급하는 정경을.   정신과에서는 주체와 객체 사이에 간극이 심하면 치료가 힘들어진다. 나나 환자나 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우는 똑같은 인간이다. 그래서 나는 우울한 감정에 휩싸여 있는 환자를 대할 때 함부로 웃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창한 수사학의 3대 요소를 생각한다. 에토스(Ethos, 도덕). 로고스(Logos, 논리). 파토스(Pathos, 감성). 그는 이 셋을 잘 운용하면 대중을 설득시키는 훌륭한 웅변이 된다고 가르쳤다.   셋 중에서 제일 강력한 것은 파토스. 고린도 전서 13장 13절에 나오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 셋 중에서 가장 유력한 것이 사랑이라는 말과 상통한다. 파토스와 사랑은 한국과 미국 정치가들이 애지중지 활용하는 대중선동술 또는 수법이다.   프로이트의 자아, 초자아, 본능(id)이라는 정신의 3대 요소에 견주어 보면 ‘love’를 본능에 비유해도 될 것 같다. 모든 인간의 생존을 좌지우지하는 돈을 자아에, 권력을 권위 있는 초자아에 결부시켜도 크게 억지스럽게 들리지 않는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론. ‘Holy Trinity’!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몸이라는 강론. 불경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때도 성부를 초자아, 성자를 자아, 그리고 성령을 고귀한 차원에서의 본능이라는 가설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 병동직원이 사람이 원하는 것은 돈과 섹스와 권력, ‘Money, Sex, Power’라 농담 비슷하게 말한다. 잠시 생각에 잠긴 후에 ‘sex’를 ‘love’로 바꾸어 다시 말한다. - ‘Money, Love, and Power’. - 나는 그와 동의하면서 얼른 덧붙인다. 환자들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다!   목요일 아침 병동 ‘Community Meeting’ 시간! 매일을 예식처럼 치르는 ‘조회’다. 오후에 용돈을 지급한다는 발표가 있자 환자들이 모두 흥분한다. 비즈니스 오피스에서 운영하는 각자의 금전 상태에 따라서 지급되는 포켓머니의 액수가 다들 다르다. 서로 간 액수 차이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소리를 지르며 덤벼드는 오후쯤 파토스가 활개를 친다.   돈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설명이 잘 통한다. 너는 지난주에 얼마만큼 받았으니까 이번 주에는 이 정도다, 하면 알아듣는다. 로고스 만세! 알파벳 순서로 이름을 부르니까 규칙대로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직원에게 가까이 오지 말아라, 하는 규범을 척척 지킨다. 에토스 만점! 긴장감 넘치는 목요일 오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의 꽃이 피는 병동이다.   ‘money’는 로마의 여신 ‘Juno’의 별칭 ‘Moneta’에서 유래했다 한다. 주노는 숱한 신들의 최고 데빵 주피터의 아내로서 돈과 자본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Moneta’는 고대 라틴어로 ‘상기하다, 경고하다’라는 뜻이었는데 아직 그 잔재가 ‘monitor, 모니터하다’에 남아 있다. ‘화폐’의 형용사 ‘monetary’는 여신 이름과 거의 같은 발음이다.   로마 신화 시대에 돈 관리를 여신이 맡았다는 발상이 재미있다. 목요일 오후에도 남성보다는 여성 보조간호사가 용돈을 지급할 때 병동의 분위기가 훨씬 더 원활하다. 그 예식을 모니터하는 간호사도 여성이 하면 환자들의 삶에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더욱더돈독해진다. 삼위일체!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초자아 성자 자아 초자아 병동 직원들

2023-02-21

[문화산책] 몽골 밤하늘은 커다란 음악

올 더위가 정점을 찍을 무렵 동료 음악가들과 함께 몽골로 피서를 갔다. 도시의 빛 공해 없는 새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알래스카에서 자란 나는 어릴 적 자주 올려다보던 별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새삼 깨달았다. 도시 불빛에 가려져 별을 못 보게 되면 하늘이 주는 교훈도 쉽게 잊어버린다. 몽골의 빛나는 은하수를 바라보던 나는 마음이 겸허해지면서, 같은 행성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과 내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했다.   50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우주를 지구보다 조금 큰 정도로 여겼다. 중국 한나라 천문학자였던 장형(張衡·78~139)은 성표(星表)에 별자리 100여 개를 포함한 2500여 별들과 둥근 모양의 달을 묘사했다. 삼국시대(220~280)에는 별자리 283개와 1464개 별이 추가되었다.   한국의 경우 고려시대(918~1392) 역사서인 『고려사』는 1073년과 1074년의 신성폭발에 대해 세계적으로 유일한 기록을 남겼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을 때부터 17세기까지 조선은 명나라와 마찬가지로 ‘우주’보다 ‘하늘과 땅’에 더 관심이 많았다.   선야설(宣夜說)에 따르면 우주는 천체가 떠돌아다니는 무한한 공간으로, 인간은 우주의 심오한 법칙을 이해할 수 없다. 중국과 한국에서는 육안으로, 관측 도구로 볼 수 있었던 것을 기록하는 정도로 충분했다. 17세기 중반 명나라 사신으로 파견된 정두원이 예수회 선교사 로드리게스에게 받은 천리경은 조선의 첫 망원경이었다.   지난 7월,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에서 전송된 첫 사진이 공개되었다. 한동안 잊고 있던 우주의 광대함과 그 역사가 되살아났다. 우주에는 최소 반경 460억 광년에 2조 개의 은하와 1024개의 별이 있고, 우리 은하만 해도 4000억 개의 별이 있다. 그러나 선조들에게 배운 바와 같이, 우주의 깊은 비밀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우주에 대한 지식이 넓어질수록 인간은 이 광활한 세계에서 현재 속한 장소와 목적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된다. 1990년대에 ‘신(新) 유교적 휴머니즘’으로 유명한 뚜웨이밍(杜維明·82)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뚜웨이밍은 가족·공동체·국가·우주로 확장되는 자아의 물결을 동심원으로 표현했다. “각 사람은 개인적인 정체성, 즉 열려 있고 창의적으로 변형되는 개성을 찾는 과제를 풀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 노력은 역설적으로, 이기심과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는 능력에 근거를 두어야 합니다.” 가족의 과제는 족벌주의를 초월해 공동체적 결속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뚜웨이밍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민족중심주의와 문화우월주의를 극복할 때 사회적 통합을 이루며 부강해질 수 있습니다. 국가적 단결에 헌신하면서도 공격적인 국수주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류의 번영에 고취되지만 인류중심주의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인류애(humanity)의 참 의미는 인간-우주애(anthropocosmic)입니다. 인간-우주애적 정신을 가질 때 자아와 공동체가 소통하고,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고, 인류와 하늘이 상호 관계를 맺습니다. 이런 이상에 근거한 수양이 유교 인본주의 사상의 핵심입니다.”   내 속에 뿌리를 내린 이 사상은 내가 자연에, 또는 음악이라는 인간의 본성에 심취할 때 밖으로 표현된다. 음악(音樂)은 동양에서는 ‘건전한 소리’, 서양에서는 ‘뮤즈의 기예’(music)를 뜻한다. 현재 나는 네덜란드계 독일 작곡가 코드 마이어링과 가야금 연주곡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가 최근에 이런 말을 했다.   “악기는 우리 몸의 일부, 영혼의 일부와 같습니다. 우리는 악기를 만들어 신체적인 가능성을 확장하고 우리 내면의 상상, 미(美)에 대한 갈망과 열정을 표현합니다. 악기를 연습하는 무수한 시간 동안 우리는 악기의 도움을 받아 자신에게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꿈과 미에 대한 생각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음악으로 인간-우주애적 자아에 도달함으로써 내면의 상상과 꿈을 공유하는 것. 나는 이것이 한국 풍류의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몽골 자작나무 숲속에서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으며 거닐었던 어느 날, 우리는 사우나에서 몸을 녹이고 염소고기 만찬을 즐긴 뒤 부른 배를 안고 난롯가에 모여 앉아 악기를 조율하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동심원으로 퍼져 나가는 소리의 물결이 서로에게, 숙소를 둘러싼 산맥으로, 산자락의 목초지로, 산 너머 하늘로 확장되었다. 해 저물 무렵 세 쌍의 무지개가 떴고 구름이 곧 걷혔다. 맑게 갠 밤하늘에 수십억 개의 별이 펼쳐졌다. 은하수는 우리의 음악에 맞춰 진동했다. 조세린 / 클라크 배재대 동양학 교수문화산책 밤하늘 몽골 우주애적 자아 우주애적 정신 동료 음악가들

2022-10-23

[시로 읽는 삶] 잘 가요, 2021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마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천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마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황인숙 시인의 ‘강’ 부분       시를 처음 읽을 때는 시적 화자가 성가신 인간관계에 대한 피로감을 토로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연거푸 몇 번 읽다 보니 마음의 곤궁을 겪고 있는 화자 자신을 향한 질타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일인칭인 나와 당신이라는 이인칭을 쓰고 있지만 서정적 주체 안에서 나와 당신은 하나로, 내적 자아가 다른 자아를 향해 단호함을 보이는 것이라고요. “인생은 어긋나기 일쑤이고 저미는 애간장은 다반사인데 엄살 그만 떨라고 하려거든 강으로 가라 강에 가서 실컷 투덜거려라”라고 말하는 건 아닐까요.     나이가 좀 든 사람들이 모이면 아픔을 호소하는 일이 많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불편함이 커지는 것 아닌가 싶네요. 세월이 남기고 간 것이 몸과 마음의 아픔이기도 해서 몸의 이상 증상이 여기저기서 나타납니다. 젊었을 적에 없던 증상들이 나타나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지요. 특별한 지병이 없다 해도 한두 군데 병적 징후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소연이 길어집니다.     병은 소문을 내라고 했습니다. 아픔에 관해 이야기를나누다 보면 치료법에 대한 정보도 얻게 되고 민간에서 전해지는 섭생법도 전해 듣게 되어 도움이 되곤 합니다. 그러나 세월의 그늘 같은 노화 현상은 특별한 방법이 없는 것 아닌가요. 다만 받아들이고 취약한 부분을 보듬는 길밖에 도리가 없다 싶습니다.   그런데도 노화 현상을 너무 큰 병으로 받아들여 우울감에 시달리기도 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 앞에 좌절하기도 합니다. 좀 담대하게 받아들이면 좋으련만 대개는 그렇지 못합니다. 나만의 고난, 나만의 역경, 나만의 실패로 여겨 마음의 병으로까지 번집니다.   팬데믹 시대를 사는 요즘엔 나 남 할 것 없이 피로감이 더 커집니다. 염려만 늘어가고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다 심드렁합니다. 내 사정에만 갇혀 점점 좁아집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말만 하게 됩니다. 애초부터 누가 들어줄 걸 기대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단지 내 안에 누적된 고통의 잔여물들을 털어 내고 싶은 것일 뿐.   실내공기를 환기하기 위해선 창문을 활짝 열어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내부도 통풍이 필요합니다. 몸과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신선한 공기를 들여야 합니다. 얼마나 괴로운지, 얼마나 외로운지 관자놀이를 눌러가며 병을 키우지 말고, 심장을 갉아먹는 벌레에 대해 과감하게 손사래를 쳐야겠습니다.     수고했고, 고마웠고, 이만해서 다행이었던 2021년. 짧은 작별인사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시간의 바통을 건네받아야 합니다. 내일이란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발명품이라고도 합니다.     미지의 날들은 ‘미지’라는 모호함만으로도 기대가 큽니다. 내일의 태양은 분명 오늘과는 다를 것입니다. 나약해지지 말고, 주눅 들지 말고 명년을 위해 단단히 채비해야겠습니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가요 노화 현상 황인숙 시인 내적 자아

2021-12-21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