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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내 영혼의 집은 어딘가?

책을 읽다가 ‘영적 홈리스’라는 낱말 앞에서 딱 멈추었다. 나도 ‘영적 홈리스’가 아닐까? 라는 고약한 생각에 심각해진 것이다. 내 영혼의 집은 어딘가?   노숙자 문제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다. LA같은 대도시는 그야말로 치명적인 골칫거리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나빠지는데 대책은 거의 없는 답답한 현실이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낱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우스 리스’가 아니고 ‘홈 리스’다. 생존과 사랑의 문제, 생명의 문제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걱정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물질적 공간의 문제가 고작이다. ‘홈리스’의 아픔을 돌보기까지는 멀고도 멀었다. 정신세계에선 더 말할 것도 없다.   내 영혼의 집은 어딘가? 현실적으로 가장 근본적이고 많은 대답은 신앙일 것이다. 교회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고, 절에 가서 절하는 일…. 하지만 그것으로 끝일까? 그럴까? 성직자가 아닌 사람이 언제나 절대자에 기대어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영혼의 집은 어디인가? 내 마음의 고향은? 혹시 예술이 영혼의 안식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야무진 꿈을 꾸어보지만 이 또한 충분치 않다.   내 영혼의 집, 내 마음의 고향은 어디인가?   “몸이 많이 아팠던 작년 겨울 어느 날, 그가 서재에 있는 어머니 사진 앞에 망연히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 죽음이 바짝바짝 쫓아오는 그 암담한 시기에도 어머니는 여전히 그의 기댈 언덕이었던 모양이다. 아내도 자식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그런 절박한 시간에 그는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령 선생의 부인 강인숙 관장이 고인을 기리며 쓴 책 ‘만남’의 한 구절이다. 기독교 세례를 받기 전의 이어령 선생에게 어머니는 신성(神性)을 지닌 절대적 존재였다는 것이다. 선생의 어머니는 그가 11세 소년일 때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몸은 70년 전에 떠나가셨지만, 어머니는 평생 아들의 영혼의 집, 마음의 고향으로 살아 있었던 것이다.   강인숙 관장이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를 어느새 잊어가는 자신을 한탄하자, 이어령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감동적이다.   “걱정 마, 어머니는 다시 돌아와. 와서 영원히 안 떠나셔.”   어머니를 구원의 상징으로 그린 예술작품은 많다. 러시아 한인(韓人) 화가 변월룡(1916~1990) 화백의 어머니 초상화도 좋은 예다. 그는 죽기 얼마 전에 어머니를 그렸다. 이미 40년 전에 세상 떠나신 어머니를 그림으로 살려냈다. 울면서 그렸다, 미술전문가들이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이 그림은 변월룡 화백의 거의 마지막 작품이다. 화가는 이 그림을 그린 지 얼마 안 돼서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5년 뒤 숨졌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어머니를 그린 것이다.   화가 변월룡은 러시아 최고의 레핀미술대학을 수석 졸업하고, 이 대학의 정교수가 된 당대 최고 수준의 화가이며, 리얼리즘 미술에서는 단연 한국 최고의 작가로 꼽히는 존재였다.   그가 그리움을 담아 그린 ‘어머니’는 참으로 많은 것을 말해준다. 화가는 왜 말년에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렸을까? 그림 맨 밑 오른쪽 귀퉁이에 한글로 ‘어머니’라고 적었다. 평생 타향살이를 한 화가에게 어머니는 고국과도 같은 말일 것이다. 디아스포라 예술가에게 어머니는 조국 같은 존재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든다. 비틀비틀 흐느적거리며 거리를 헤매는 ‘홈리스’들에게 잠시라도 어머니를 떠올리게 해주면 정신 차리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혹시 예술이 그런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야무진 헛꿈인가?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영혼 어머니 초상화 어머니 사진 이어령 선생

2024-06-06

비평가 이어령 선생 탐구 줌강의…미주문인협 방민호 교수 초빙

미주한국문인협회(회장 오연희)가 오는 11일 오후 6시 서울대학교 방민호(사진) 교수를 초빙해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 고 이어령 교수와 시대를 앞서간 박인환 시인의 인생과 문학을 다루는 줌 특별 강연회를 개최한다.     강의 주제는 ‘비평가 이어령과 시인 박인환 1950년대’이다.     고 이어령 교수는 문학 평론가, 작가, 교육자, 정치인으로, 한국 현대 문학과 문화에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문화부 장관으로 재직하며 한국 문화의 세계화에 힘썼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조화를 강조하는 ‘디지로그’ 개념을 제시해 새로운 문화 패러다임을 제안하기도 했다.   박인환 시인은 1950년대, 모더니즘 시풍을 도입해 한국 현대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표작인 ‘세월이 가면’, ‘목마와 숙녀’는 섬세한 감성과 시대적 아픔을 표현한 시로 평가받고 있다.     오연희 미주한국문인협회 회장은 “방민호 교수의 줌 강의를 통해 이어령 교수와 박인환 시인의 작품과 그들이 살아낸 시대적 맥락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방민호 교수는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하고 현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평론집 ‘문학사의 비평적 탐구’, ‘행인의 독법, 시집’ '숨은 벽',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단편 소설집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답함', 장편 소설 '대전스토리, 겨울', 산문집 '서울 문학기행' 등이 있다.     줌 미팅 ID: 909 103 2605, 패스 코드: 123456이다.     ▶문의:(310)938-1621   이은영 기자비평가 이어령 비평가 이어령 비평적 탐구 서울대 국어국문학

2024-06-02

[세상만사] ‘눈물 한방울’

고 이어령 교수가 암 선고를 받고 2022년 88세로 별세하기 전까지 4년간 쓴 글을 모은 문집이 ‘눈물 한 방울’이다. 생전 160권의 저서를 남긴 우리 시대 최고 지성은 마지막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의문으로 그 책을 정독했었다.   마지막 낙서는 누구에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자.    “누구에게나 마지막 남은 말/사랑이라든가 무슨 별 이름이라든가 /혹은 고향 이름이라든가?/나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말은 무엇인가?/시인들이 만들어낸 말은 아닐 것이다./이 지상에 없는 말, 흙으로 된 말이 아니라/어느 맑은 영혼이 새벽 잡초에 떨어진 그런 말일 것이다./하지만 그런 말이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내 몸이 바로 흙으로 빚어졌기에 /나는 그 말을 모른다./죽음이 죽는 순간/알게 될 것이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흐르는 톤으로는 내생을 신에 기탁하며 부탁하는 논조의 말은 없다. 그 대신 어머님을 그리워하는 간절한 기구의 말은 있다. 또 53세의 젊은 나이로 갑상선암과 위암 진단을 받고 본인보다 먼저 세상을 등진 딸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다. 그의 딸 이민아씨는 이혼 후 미국에서 변호사로 일하다 말년에는 신학교에 입학해 목사가 된 사람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어느 세미나에서 이어령 교수는 신의 사랑은 아가페적인 것이 아니라 우정을 의미하는 ‘필리아’라고 했다. 바이오필리아는 생명 간에 공생하고자 하는 의지와 사랑으로 모든 생명체는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숙명을 지닌 대상으로 그 사랑이 중요하고,  또 포토필리아는 장소에 대한 사랑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말하는 것이고, 네오필리아는 인간이 경험하지 못한 영역을 탐구하여 서로 공생하는 세상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또 ‘메멘토모리’, 즉 우리는 죽음을 뛰어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진 운명이기에  늘 숙명처럼 죽음을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그는 책 서문에 인생에 대해 이렇게 썼다.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간 게 내 인생이다. 물음표가 씨앗이라면 느낌표는 꽃이다. 품었던 수수께끼가 풀리는 순간의 희열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호기심을 갖는 것, 그리고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대목도 있다. “눈물만이 우리가 인간이란 걸 증명해준다. 이제 인간은 박쥐가 걸린 코로나도 닭이 걸린 조류인플루엔자도 걸린다. 그럼 무엇으로 짐승과 사람을 구별할 수 있을까? 눈물이다. 낙타도 코끼리도 눈물을 흘린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서적 눈물은 사람만이 흘릴 수 있다. 로봇이 아무리 잘 만들어도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   한때 이어령 교수의 책을 닥치는 대로 사서 주마간산 격으로 읽고는 책장에 모셔두는 버릇이 있었다. 삼가 그분의 명복을 빈다. 김호길 / 시인세상만사 한방울 눈물 눈물 한방울 정서적 눈물 이어령 교수

2024-02-20

마지막 대화 기록 ‘이어령 읽기’…“이어령 교수의 유언집”

‘이어령 읽기(사진)’가 민음사에서 출간됐다. 부제는 인공지능과 생명 사상 시대의 문명, 문화, 문학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으로 손꼽혔던 문화비평가 고 이어령(1933~2022) 선생은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성곤 다트머스대학교 교수를 지적, 정신적 후계자로 정하고 생전에 자신의 마지막 생각들을 대화하며 정리해줄 사람으로 지목했다.     서문에서 이어령 선생은 “나는 학문을 한다기보다는 문학을 하고, 지식을 논한다기보다는 신바람이나 디지로그나 생명 자본처럼 개념이나 키워드를 만들어 내는 문화 비평가지요. 학자들은 기존에 나와 있는 것들을 종합해서 비판하고 정리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아무도 말하지 않은 것들을 말하려고 하는 사람이에요.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내가 20대부터 80대까지 죽 생각하고 연구해온 것들이어서 떠나기 전에 그걸 남기고 싶은 겁니다”라고 밝혔다.     ‘이어령 읽기’는 김성곤 교수가 문학, 문화, 문명, 예술, 인생이라는 주제를 놓고 이어령 선생과 나눈 대화의 기록이다. 이어령 선생이 암 투병 중일 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기적으로 만나 대화한 내용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정리해 완성한 이어령론이다.     김성곤 교수는 “이어령 선생님은 죽음을 앞두고 나를 부르시더니, 나를 당신의 지적, 정신적 후계자로 정했다고 하시면서 생전에 못다 한 말들을 남기려고 하니 그걸 세상에 전해달라고 부탁하셨다”며 “그런 의미에서 ‘이어령 읽기’는 이어령 교수의 유언집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멘토와도 같았던 이어령 선생을 김성곤 교수는 국문학자의 범주를 넘어서는 탁월한 문화비평가라고 회고했다. 그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글로벌한 시각으로 바라본 독창적인 문화평론가였고, 동서양의 차이를 이해하고 연결하는 뛰어난 비교 문학자였으며, 디지로그나 생명 자본 같은 새로운 문화적 키워드를 만들어내는 창의적인 문화연구자였다”고 말했다.     이어령 선생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의연한 태도로 성찰과 혜안이 깃든 비교문화론, 인류 문명론, 동서 문학론을 펼쳤다.     김 교수는 “이어령 선생님은 하늘이 이 땅에 내려주신 축복”이라며 “그분이 계심으로 인해 한국 문화는 빛이 났고, 한국문학은 세계문학이 되었으며, 한국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워졌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이은영 기자 [email protected]이어령 유언집 이어령 선생님 이어령 교수 김성곤 교수

2023-11-19

[이 아침에] 섣달 그믐밤이 서글픈 까닭

섣달에 접어들었다. 어느새 한 해의 끝이 시나브로 다가오고 있다.     지금은 눈물의 시대라 한다. 문학평론가 이어령은 말했다. 피의 시대에서 땀의 시대를 지나, 이제는 눈물의 시대를 맞이했다고. 위로와 공감, 누군가 함께 흘려주는 눈물이 필요한 시대라는 얘기다.     날씨마저 쌀쌀해진 요즈음 어느 때보다 따뜻한 손길이 필요한 때다. 이 한 해, 나는 누구에게 위로와 공감을 주는 사람이었는가. 힘들고 어려운 이웃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함께 울어준 적이 있는가. 울어주기는커녕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려 좌절하게 하지는 않았는가. 조용히 되돌아보는 시간이다.   계절 탓일까. 외롭다는 사람이 많다. 고독하다고 한다. 외로움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 소외로 생기는 것이고, 고독은 내가 나를 스스로 소외시킬 때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는 말은 외로움이고, 혼자 있는 즐거움을 표현하는 말은 고독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나만 외롭고 고독할까.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외롭게 태어나 고독하게 살다가 혼자 생을 마감한다. 그래서 시인은 산그늘도 외로워 저물녘 마을을 찾아 내려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2000리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일이다. 혼자 걷는 길은 때로 외롭다. 너무 외로워 제 발자국을 벗 삼아 사막을 걸었다는 어떤 이의 말에 공감이 갔다. 그때마다 내 안에 있는 나를 불러내어 얘기를 나누었다. 어느 골목에서 훌쩍거리는 안쓰러운 어린 나를 데려와 쓰다듬어주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내 속에 앙금으로 남은 사람들을 불러내어 지난 일을 사과받고 누군가에게는 용서를 빌기도 했다. 새가 바람에 몸을 맡기듯 길바닥에 나를 맡기고 걸었다. 넘어지면 넘어진 곳에 쓰러지면 쓰러진 곳에 나를 맡겨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 길에서 눈보라 치는 날이 있었다. 눈이 내리는 하늘의 길은 있어도 내가 가야 할 길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걷는 길이 바로 내 길이었다. 내 길은 내가 만들어 나가야만 하는 것이었다. 가볍게 걷기 위해서는 가벼워져야 한다. 몸도 마음도 가벼워져야 한다. 자신이 가진 것을 비워야 한다. 덜어내고 털어내야 한다. 그리고 난 다음에야 홀가분하게 길을 걸어갈 수가 있었다. 빈집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모두 이 해를 열심히 걸어왔다. 걸어오는 동안 뒤처진 사람도 넘어진 친구도 있고, 섭섭하고 원망스러운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서로 위로하고 보듬어 주어야 할 때. 상처받은 누군가를 위해 함께 울어주어야 할 시간이다. 이 눈물의 시대에.     섣달이다. 이즈음 느껴오는 사람들의 정서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모양이다. ‘섣달 그믐밤의 서글픔,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조 30대 광해군이 재임 8년, 과거시험에 출제했던 문제다. 책문(策問), 일종의 논술시험 문제다. 같은 문제가 지금 나에게 주어진다면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곰곰 생각해보는 중이다. 정찬열 / 시인이 아침에 그믐밤 섣달 섣달 그믐밤 문학평론가 이어령 산티아고 순례길

2022-12-20

[수필] 아름다운 삶

지난 2월 26일 89세로 30여권의 책을 남기고 이어령 교수는 조용히 떠났다. 유튜브를 통해 몇 달 전 준비한 그의 따듯한 마지막 작별인사도 가슴 뭉클하게 보았다. 언젠가는 나도 우리도 모두 떠나겠지만 그는 3년의 병고를 침착하게 헤치면서 그가 지닌 지식들을 목이 마른 사람들을 위해 마지막까지 나누어 주고 갔다. 부인(강인숙 교수)과 살던 평창동 자택을 영인문학관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는 자신 서재의 침상에 누워 몸은 비록 앙상하게 되어도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생전에 모른 척하던 여러 정치인들이 영전에 찾아와 애도하고 갔다고 한다.   이어령 교수는 어느 누구 못지않게 대한민국을 사랑하던 언론인, 교육자(이화여대 석좌교수), 철학자, 정치인이었다. 3년 가까이 투병하고 병석에 누워서도 아니 마지막 두어 주 전까지도 한 기자와 인터뷰를 주고 받으며 그의 구수한 인생 철학 이야기를 남겨주었다고 한다.   그의 말을 정리하던 기자는 바로 작고하기 전에도 고비를 넘겼다는 말을 듣고 따스한 봄이 오면 회복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듣기를 기원했었다. 하지만 3일 전 인터뷰를 마지막으로 아쉬움을 남긴 채 세상과 이별했다.   지난 인터뷰 중에서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생전에 물었다던 24가지 질문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삶과 죽음을 생각하게 됐다.   암 투병 중이라 통증도 심했을 텐데 “그런데 말이야”라며 때로는 힘이 없어도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갈 수 있었던 대단한 열정과 의지가 놀랍기만 하다. 그렇게 어렵게 금년 1월에 태어난 책이 ‘메멘토 모리’ 이다. 그의 명강의 중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많다. 우리나라 말 중에 ‘죽을 맛이다’ ‘살 맛 난다’라는 표현, 사람의 성격을 ‘싱거운 놈, 매운 놈’이라고 하는 말들을 분석하던 지혜로움, 짜고 달고 시고 맵고 쓴 다섯 가지 맛 외에도 ‘밍밍하고 슴슴하다’는 라는 말까지…. 그만의 해학적인 한국인에 대한 철학이 매우 흥미롭다. 된장과 고추장처럼 곰팡이를 피워 띄우고, 식혜와 김치는 한국인의 삭혀 먹는 음식문화로 멋지게 파헤치는 삶의 철학. 한자 ‘어질 인’을 ‘사이좋게 놀아라’라고 해석하면서 당파싸움 좋아하는 어리석은 국민인 우리에게 따끔하게 일침을 놓기도 한다. 감성과 지성의 아이큐로 살아가란다.   또 초대 문화부 장관을 맡아 귀여운 호돌이 상징 마크와 함께 알려진 자랑스러운 88올림픽을 기획했던 분이 아닌가. 한국종합예술학교를 세우게 하여 수많은 한국의 예술인들을 발굴하고 키워낼 수 있도록 무진 애를 썼다. 지금의 한류 열풍 바람을 일으키게 하는 단단한 기초를 마련해 놓은 어른이었다.   그리고 이어령 교수는 11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니 어린 시절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아마도 그래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벌써 철학적인 삶을 논하는 멋진 시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보통사람은 아니었다. 1년 전에는 ‘영원한 제국’을 집필한 소설가 이인화 교수에게 평전을 부탁하여 완성했기에 곧 출간 될 예정이라 한다. 또 그의 유고작들이 지금 출판사에서 줄줄이 출간될 예정이라니 반갑다.   아쉬움이라면 생전에 아버지로서 젊은 딸의 이혼과 죽음의 아픔을 가슴에 새겼던 일은 그에게 가장 큰 상처가 아니었을까. 딸의 10주기 맞아 준비한 그의 시집에서 미국에 사는 딸을 그리워하며 쓴 시를 읽으면 참 허탈하고 눈시울이 찡, 뜨거워진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이어령 교수는 고해바다 같은 생사고락을 넘어 심오한 종교적인 의미까지 통달해 버리고 마침내 기독교인이 되었다. 부디 천국에서만 영생하지 말고 다음 생애가 있다면 또 한국인으로 태어나 대한민국에 오시기를 바란다. 최미자 / 수필가수필 이어령 교수 이화여대 석좌교수 강인숙 교수

2022-04-21

[문화 산책] 자유인 이어령의 창조적 생각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이어령 선생은 여러 면에서 시대를 앞서가는 지성인, 무엇보다도 창의력에 빛나는 지성인이었다.   요새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참 많고, 이들 ‘스타 지식인’의 영향력도 상당하지만 그중의 으뜸은 단연 이어령 교수였다. 말도 참 잘하고 글솜씨 빼어나고 생각도 깊고 근본적이다. 무엇보다도 새롭고 신선해서 매력적이다. 젊은이들보다 훨씬 젊은 청년이었다.   말을 잘 한다는 것은 말을 많이 하거나 아무 말이나 마구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말을 잘 한다는 것은 알아듣기 쉽고, 재미있어서 오래 기억에 남고, 본질의 핵심을 정확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하는 내용을 정확하고 깊게 이해해야 하고, 속에 든 것이 많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는 진심 어린 배려심이다.   그런 점에서 이어령 선생은 단연 탁월하다. 꼭 알맞은 비유와 예시를 활용하여 사물과 진리의 핵심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매우 어렵고 까다로운 논리도 아주 쉽고 명쾌하게 설명하는 능력은 단연 뛰어나다. ‘언어의 마술사’라는 칭호가 잘 어울렸다.   더욱 소중한 것은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것들에서 사물의 본질을 짚어내 앞날 위한 방향을 제시하는 재능은 정말 탁월하고 소중하다. 축소지향의 일본인, 가위바위보 미학, 보자기론, 생명경제론, 디지로그 등등… 참으로 참신하고 기발한 발상이다.   세상을 떠나기 전, 죽음을 앞두고 절실하게 토해낸 말들을 인터뷰 형식으로 모은 ‘이어령의 80년 생각’이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등의 책에 그런 창의적 생각이 가득하다. 특히 죽음에 대한 생각, 죽음을 기다리며 탄생의 신비를 이야기하는 통찰력은 인간 존재에 대해 깊게 생각하도록 이끌어준다. 죽음이 생의 한가운데 있다는 가르침을 준다.   이어령 선생의 통찰력은 알아듣기 쉽다. 예를 들자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를 뱀과 도마뱀에 비유해서 설명하는 내용 같은 것은 절묘하다. 이 우주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즉 입자와 파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디지털은 셀 수 있게 분할이 되어 있어 계량화된 수치 즉 입자이고, 아날로그는 연속된 흐름 즉 파장이라는 설명이다.   “더 쉽게 얘기해볼까. 산동네 위의 집이라도 올라가는 방법이 다르지. 언덕으로 올라가면 동선이 죽 이어져서 흐르니 그건 아날로그야. 계단으로 올라가면 정확한 계단의 숫자가 나오니 그건 디지털이네. 만약 언덕과 계단이 동시에 있다면 그게 디지로그야.”(‘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이어령 선생의 평생 목마른 사람들을 위해 우물 파는 일에 외롭게 앞장서온 치열한 도전정신, 쓰고 싶은 글을 쓰기 위해서 병원 치료를 거부하는 고집 등은 우리 시대 참 스승의 모습을 행동과 실천으로 보여줬다.   특히 서양문명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의 해답을 동양과 한국의 생각과 철학에서 찾는 지혜는 대단히 소중하다. 이런 지혜는 인문학의 기본자세인 것은 물론이고, 예술가들이 꼭 배워야 할 교훈으로 여겨진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지침으로 삼아야 할 가르침이다. 예를 들어 88서울올림픽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굴렁쇠 굴리는 소년이 보여준 침묵의 미학 같은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막다른 골목에서 돌파구를 찾는 서양 문화가 동양 예술의 미학에 주목하는 추세가 강해지는 요즈음 이어령 선생이 남긴 창의적인 시각은 더욱 소중하게 빛을 발할 것이다.   고인의 뒤를 이어 지혜의 우물을 팔 사람은 누구일까?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 산책 이어령 자유 이어령 선생 창조적 생각 생각 죽음

2022-03-01

"교를 믿는 것과 신을 믿는 것은 달라"

 "한국의 인문학이 통째로 교회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최더함 박사는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의 회심을 이렇게 회상했다.   한국 지성의 대들보인 이어령 선생이 지난 26일(한국 시각) 별세했다. 향년 88세.   그에게는 '시대의 지성'이라는 수식어만 붙는 게 아니었다. 삶과 죽음을 성찰한 기독교인이었다. 그의 족적은 울림이었다.   2년 전 그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삶을 말했다.   "인간은 태어나는 게 죽는 거다. 기저귀가 까칠한 수의와 닮지 않았나. 죽음은 인간을 멸하는 게 아니라 풍요하게 만든다."   신앙인으로서의 이어령 선생은 인생을 그렇게 관조했다.   2007년 지성에서 영성의 길로 기독교인 되고 나서 삶 변화 "혼자 바들바들하며 살았다" 인간의 오만 버린 게 큰 변화     죽음 겁내지 않고 그대로 수용 삶과 죽음 성찰했던 기독교인 이어령 선생은 지성에서 영성으로 삶을 틀었다. 지난 2007년의 일이었다. 그의 나이 일흔셋이었다.   당시 큰딸의 암 투병 스물다섯의 첫째 외손자의 죽음은 그를 신앙으로 안내했다.   당시 그는 "딸의 치유를 통해 영성의 알을 깼다면 외손자의 죽음은 시험이었다. 그 양극에 무슨 원칙이 있다는 말인가. 예단할 수 없는 시나리오 속에서 여전히 나약한 인간은 흔들거리며 영성의 문지방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세례를 받기 위해 무릎을 꿇고 나서 쓴 책이 바로 '지성에서 영성으로'였다. 무신론자로 살던 그가 신 앞에 나아가기까지 인간적인 망설임을 담은 고백록이었다.   그는 글을 통해 읊조렸다.   "오늘부터 저는 신자의 길을 걷습니다. 그동안 많은 직함을 갖고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이제 새로운 길을 떠납니다. 이 길이 외로울 수도 있지만 신자로서 한발 한발 나아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신앙인으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   기독교인이 되고 나서 삶은 급격히 변화했다. 신은 그의 시각을 바꿔놓았다.   영화감독 이장호는 그에게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물었다.   이어령 선생은 "그동안 누군가에게 몸을 맡겨본 적이 없었다. 얼마나 외로운 삶인가. 혼자 바들바들하면서 여기까지 온 내가 너무 불쌍했다"고 말했다.   이어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예로 들었다.   그는 "나는 토끼 인생이었다. 나는 잘났고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살았는데 그게 아니다"라며 "나는 거북이다. 그동안 얼마나 잘못 살아왔고 얼마나 많은 것이 부족했었는지 인간의 오만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고백했다.   그는 지난 2012년 딸 이민아 목사를 먼저 하늘로 보냈다. 딸은 아버지가 신앙의 길로 접어드는 데 있어 매개가 됐다. 이 목사는 목회의 길을 걷기 전 LA에서 검사로 활동했었다. 이후 위암 말기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뒤 항암치료를 거부하다 세상을 떴다.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의 경우는 그가 딸 이민아 목사와 주고받았던 편지들이 실려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는 그렇게 인생을 사유하며 기독교 신앙을 통해 영성을 끊임없이 글로 옮겼다.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지성과 영성의 만남' '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 등 그의 신앙적 색이 진하게 묻어난 저서는 많은 이들에게 울림이 됐다.     특히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별세 한 달 전 신부에게 물은 24가지 질문에 대해 답한 '메멘토 모리'는 그의 생에 마지막 저서가 됐다.   그는 지난 2017년 암 선고를 받았다.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를 받지 않았다. 다가오는 죽음을 있는 그대로 수용했다.     그는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지은이와의 대담을 통해 죽음을 이렇게 그렸다.   "죽음이라는 게 거창한 것 같지? 아니야. 내가 신나게 글 쓰고 있는데 신나게 애들이랑 놀고 있는데 불쑥 부르는 소리를 듣는 거야.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 이쪽으로 엄마의 세계로 건너오라는 명령이지."   그는 죽음을 겁내지 않았다. '투병(鬪病)'이란 용어를 쓰지도 않았다. 암을 '친구'로  표현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산다는 것은 꽃이었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었을 때도 또 꽃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 비로소 꽃이 보인다. 암 선고를 받고 내일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난 후에 역설적으로 가장 농밀하게 산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 2019년 그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믿음을 이렇게 구분했다.   "우리는 '너 예수교 믿어?'하고 묻는다. 그건 교(종교)를 믿느냐고 묻는 거다. '너 신을 믿어?' 하는 물음과는 다른 이야기다. 교를 믿는 것과 신을 믿는 것은 다르다. 기독교든 불교든 도교든 모든 종교의 궁극에는 저절로 굴러가는 바퀴와도 같은 게 있다. 스스로 움직이는 절대의 존재다. 인간은 단 1초도 무엇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할 수 없다."   한편 이어령 선생의 입관예배는 28일(한국 시각)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개최됐다. 서울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가 입관예배에서 추모설교를 전했다. 장열 기자이어령 신앙 기독교인이어령 선생 한국 지성 이어령 이화여대

202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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