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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어머님의 해리 현상

늦은 오후, 약국에 갔다. 약을 기다리고 있는데 남자 직원 분이, 어머님, 이거 드세요, 하며 쌍화탕을 하나 내미신다. 일단, 나 쌍화탕 못 먹는다. 한약 맛 나는 건 아무리 몸에 좋대도 홍삼, 쌍화탕, 활명수도 못 먹는 초딩 입맛이다. 내가 사양을 하자, 어머님, 따뜻해요, 드세요, 하며 강권을 한다. 속으로, 아니, 진짜 못 먹는다구요, 하며 거듭 사양하던 중, 앗, 이 약국 또 나보고 어머님이라? 그것도, 나와 열 살 차이도 안 나 보이는 이 분의 입에서? 아, 급 기분이 나빠지려고 한다.     집에 돌아오신 이 어머님, 거울을 곰곰히 들여다 본다. 그래, 좀 많이 피곤해보이기는 하다. 아침 일찍부터 움직이던 늦은 오후였으니. 그렇다고 내가 어머님? 옷을 너무 편히 입었나? 머리스타일이 좀? 다크써클이 무리하게 내려오셨나? 하긴, 언제부턴가 거울 속의 나를 보기가 점점 고통스러워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분명 나일텐데 나라고 믿고싶지 않은,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울 엄마 비스므리한 이 여사님은 누구?     어느 멋진 대학생이, 가끔 거울 속 자신이 마치 다른 사람 같고 자신의 환경이 낯선 느낌이 들어 불편하다며 찾아온 적이 있다. 정신의학에서 해리 장애(Dissociative Disorder)가 있다. 의식, 기억, 정체감, 행동들이 정상적으로 통합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붕괴되어 단절되는 질환이다. 충격적 트라우마나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고통에서 주로 발생하는 안타까운 현상이다. 해리성 기억상실(dissociative amnesia), 주체장애(depersonalization disorder), 그리고 다중인격 장애라고 불리던 정체성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로 분류되는데, 그 학생은 아마 약간의 주체 장애를 겪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살면서 갑자기 또는 점차적으로 겪는 힘든 일들은 우리에게 불안하고 우울한 감정들을 불러 일으킨다. 힘들더라도 이 감정들을 직면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숙제같은 우리 삶이다. 그런데 감정 직면이라는 것이 보통 힘든 게 아니라서, 우리 무의식은 방어기제를 사용 감정들을 일단 눌러놓는다. 그러다가 때로, 무의식에 심하게 억압된 감정과 경험이 의식 단계에 이르지 못하면서, 드물지만 해리라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나이 들어감은 힘들다. 외모의 변화도 그렇다. 짜증 지대로 난다. 어머님이라는 좋은 호칭에도 이리 예민하게 되니 말이다. 그래도, 아무나 어머님,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건 좀 그렇다. 결혼 안한 사람도 요즘 많고, 결혼해도 자녀가 없는 사람도 많다. 다 어머님, 아버님은 아닌 것이다. 하긴 얼마 전, 어머님, 어머님하는 약국 직원 말에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나의 미혼 친구를 보며, 나의 과민함을 살짝 반성하기는 했다.     한국 갔을 때 필라테스를 했는데, 어린 강사님은 나를 “선주님”이라고 불렀다. 첨엔 좀 어색했다. 하지만, 어머님보다는 백 배 나은 호칭이었다. 누구누구 씨/님 이렇게 부르던지, 이름을 모르면, 손님, 환자분, 고객님이라고 하면 되는데, 누구 어머님도 아니고 그냥 어머님이라고 하면, 이 어머님, 또 거울 속 얼굴을 한없이 째려보게 만든다.     육십 대에 들어선 난, 솔직히 참 행복하다. 하고싶은 일들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여유가 좋다. 살면서 얻게 된 삶의 지혜 또한 세상 어느 것과도 바꾸고 싶지 않다. 에휴, 까짓거, 어머님이라고 불러도 쿨하게 웃어주어야겠다! 김선주 / NJ 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살며 생각하며 어머님 해리 어머님 거울 어머님 아버님 누구 어머님도

2023-07-05

[살며 생각하며] 며느리 단상

거의 30년을 어머님 며느리로 살았다. 26년간은 우리 집에서였다. 이민 초기, 첫아들을 낳고 난 뉴욕 브라이언트 하이스쿨에서 보조교사로 일하고 남편은 한 교회의 교육전도사로 일했다. 우리의 작디작은 월급을 아무리 합쳐도 매월 생활비를 맞추기 힘들던 시절, 집 앞 가게 1불짜리 도넛을 들고 살까 말까 고민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큰아들 돌이 될 무렵, 어머님이 다니러 오시겠다고 했을 때, 가장 걱정되었던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어머님과 어떻게 시간을 보내드려야 하나 하는 것이었다. 집에 오면 너무 피곤해서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어머님과 대화를 나누고 상대를 해드려야 할 것이 가장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 어머님은 아들 여섯과 딸 하나를 기르신 씩씩한 내공으로 시간을 나름 잘 보내셨다. 그리고 둘째까지 두 아이를 다 길러주시고,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 오랜 기간을 우리와 함께 사셨다.     나는 어떤 며느리였을까. 여름이면 여행도 모시고 다니고, 틈나는 대로 백화점, 공원 등에도 모셔다드렸다. 괜찮은 쿨한 며느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머님이 우리 집에 계속 계시는 거라고, 아이들이 너무 예뻐서 한국에 못 돌아가시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머님이 사실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알게 된 것은, 내가 시어머니가 되고 손주들이 생기면서였다. 정신을 홀딱 납치할 정도로 귀여운 손주들, 글을 쓰는 지금도 7개월 막내 자는 모습을 카메라 앱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하지만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몰입해서 놀아줄 수 있는 내 체력의 한계가 딱 두 시간이라는 것이다. 두 시간 지나면 걍 집에 가서 쉬고 싶어진다.     그러니, 남편과 내가 정신없이 바쁘게 밖으로 나돌아야 했던 그 긴 하루하루를, 어린 두 손자를 데리고 어머님은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젊은 시절은 찬란하지만 그 빛 때문에 못 보는 것도 많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힘드시겠지 했지만 이 정도로 힘드실 줄을 몰랐다. 어머님이 우리 집이 편해서, 미국 생활이 좋아서 우리와 사시는 거라고 생각했던 철없음도 내 나이의 한계였다. 힘듦을 알아드리지 못한 미안함을 말씀드릴 수 있게 된 나이, 어머님은 옆에 계시지 않는다.     ‘고부’ 하면 ‘갈등’이란 말이 절로 나오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 지난 칼럼에 시어머니들이 기대를 내려놓고 자녀의 가정을 존중해주고 작은 것에도 감사할 때 좋은 관계가 된다고 썼다. 요즘 현명한 시어머니들, 진짜 많이 그렇게 사신다. 아주 그렇게 사시려고 발버둥을 치신다. 그 길만이, 자신들의 기대치와 경계(boundaries)를 확실히 가지고 있는 것이 요즘 자녀들과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라고들 하신다. 하지만 이런 자세가 꼭 시어머니에게만 필요한 걸까. 며느리들도 같은 마음으로 시어머님을 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환상적일까!     젊은 며느님들이여, 무리한 기대일랑 내려놓자. 어머님에게도 어머님의 삶이 있다. 강해 보여도, 두 시간이면 급 피곤해지는 체력 약화와 노년기에 대한 불안은 기본이다. 이 어머님의 행복한 남은 삶에 대한 필요성을 존중해주자. 어머님이 해주시는 작은 것에도 격하게 감사해보자. 감사를 표현해보자. 현명한 그대들에게 몇 배로 돌아올 것이다.     어느 날 선물처럼 내 삶에 들어온 내 아들의 소중한 여자 며느리, 그리고 또 하나의 어머니로 내 인생에 찾아오신 내 남편의 소중한 엄마 시어머니,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찐 가족이다! 김선주 / NJ 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살며 생각하며 며느리 단상 어머님 며느리로 며느리 단상 어머님과 대화

2023-06-07

[이 아침에] 기억의 소실점

한국의 어버이날 아들이 사진 한장을 보냈다. 92세의 노모가 휠체어에 앉아 하늘을 보시고, 72세의 아들이 시선을 내린 채 휠체어를 미는 사진. 3년 만에 삼대가 한자리에 모인 날, 5월 1일에 찍었다. 아들은 다음 날 태국으로, 나는 엿새 후 미국으로, 엄마는 여전히 고향 요양병원에.     엄마가 요양병원에 들어 가신지 10년째. 이제 엄마는 거기를 ‘집’으로 생각하신다. 긴 복도는 동네 ‘고샅’, 그리고 간호사 스테이션 부근의 넓은 휴게실은 ‘큰 마당’으로 이해하신다.  고샅을 지나 동네 큰 마당으로 마실도 가신다. 오랜만에 나를 만나면 아들에게 ‘집’에서 밥 한 끼 못 해주신다고 걱정을 하신다.     이번 방문길에는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엄마를 모시고 나왔다. 삼십리 길 공주까지 오는 동안에도 “얘, 멀리 가지 마라” 걱정하신다. 식당에서 만난 나의 사촌들, 한참 설명한 후에야 자신이 키웠던 그들을 알아보신다. 이제 90세 가까운 이모, 엄마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도 금방 알아보지 못하신다.     다행히 아들인 나는 단박에 알아보신다.  서서히 사라지는 기억의 창고 속에 가장 깊숙이 남아 있는 것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겠지. 아들은 기억하지만 아들의 상황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셨다. 가끔 전화 드리면 똑같은 질문을 하신다. “워디여?” 미국이라고 대답을 하면 “거긴 왜 갔니?” 하고 되물으신다.     나이가 들면 기억의 공간이 오그라드는 것도 좋은 일인 듯. 잊히는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서운하고 서럽기도 하지만 잊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짐이 가벼워지는 일이다. 어머님은 젊은 시절부터 생계 문제를 혼자 떠안으셨고 어떻게 든 해결을 하신 분이다. 지금도 이러저러한 세상사를 인식한다면 그 해결책을 고민하실 터.  차라리 그런 문제를 기억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 마음 편할 일이다.   “손톱으로 바위를 긁듯 살아왔다.” 오래전 어머님께서 하신 말씀. 그런 어머님의 일생을 바탕으로 나의 인생이 펼쳐졌다. 항상 꽃길만은 아니었지만 봄바람처럼 가볍게 흘러온 시간이 더 많았던 게 나의 70평생이다. 때때로 가시에 찔려 쩔둑 거릴 경우 어머님의 손톱을 생각하며 내 나름 세상을 살아왔다.     미국에 오기 전날 어머님을 찾아뵀다. 아직도 면회가 제한적이라서 지정된 면회 장소로 내려오셨다. 워커에 의지해서 걸어오시면서 반가운 웃음을 지신다. “워티기 왔어? 내가 여기 있는 줄을 어찌 알고.” 항상 하시는 말씀. 당신 아들이 남들이 못하는 큰일이나 한 듯 대견스러워하신다.  그리고 같이 내려온 간호인에게 “우리 아들여” 하고 자랑을 하신다.     이틀 전에 만났던 사실은 어머님의 기억 속에 지워졌다. “며칠 전 손자하고 같이 왔잖어” 내가 말했다. “그랬나?” 엄마의 대답. 엄마의 손을 잡는다. “손이 따뜻하다.” 엄마가 말씀하신다.  엄마와 이런 대화를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을까? 엄마의  바싹 마른 손가락 수에 나의 아직 통통한 손가락 수를 더한 만큼만….   미국에 돌아와서 나의 아들이 보내준 사진을 다시 들여다본다.  이 십년 후 비슷한 사진을 상상한다. 휠체어에 앉을 사람은 나, 밀어줄 사람은 아들, 사진을 찍어 줄 사람은? “미래는 과거다” 종범 스님의 법문을 생각한다.  김지영 / 변호사이 아침에 소실점 기억 어버이날 아들 이모 엄마 오래전 어머님

2023-05-21

[수필] “밥 먹고 가요”

“그런 할머니를 가만히   쳐다보던 큰애가   할머니의 노랫가락에   맞추어 노래로   대화를 시도했다”   얼마 전에 ‘수상한 그녀’라는 영화를 보았다. 주인공은 70세 노인이다. 신혼 초에 독일에 광부로 떠났던 남편이 사고로 죽어, 태중에 있던 아들을 혼자 낳고 힘들게 키워 대학교수를 만든 노모의 이야기이다. 거친 세상에 홀로 아기를 키워내야 했기에 성격은 강하고 거칠다. 하나뿐인 아들에 대한 집착 또한 강해서 그 틈에 서 있는 며느리는 심장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한다.     남편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엄마는 홀어머니인데 괜찮겠냐고 물으셨다. 명랑하고 외향적인 성격인 나는 한 분인 어머니 모시는 게 뭐 어려울까 하여 괜찮다고 대답했다. 엄마는 ‘그럼 됐다’라고 하시고는 그 이후로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엄마가 염려하신 것이 무엇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시아버님은 남편이 중학교 1학년 때 주무시다가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한다. 어린 세 남매와 아버님께서 막 시작해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식당이 시어머니에게 남겨졌다. 그때까지 집에만 계시던 어머니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생활전선에 나서야만 했다. 살아생전에 아버님은 어려운 친척들을 잘 도우셨다고 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줄 모르는 친척들이 계속 도움을 청하러 찾아왔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홀로 살아남아야 했던 어머님은 모든 친척과의 관계를 매정하게 끊었다. 아낄 수 있는 모든 것을 아꼈고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서 돈을 모았다. 당신이 과부라는 사실도 철저히 숨기고 본인을 위해서는 한 푼도, 한 시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아이들만 바라보고 살아내셨다.     미국으로 오기 전 신혼생활을 어머님 집에서 했다. 그 6개월 동안 내가 만난 어머니의 모습은 힘겹고 거친 삶을 살아내 마침내 승리한 전사의 모습이었다. 아무도 믿지 않고 모든 것을 의심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부정적이고 차가웠다. 맏아들인 남편에 대한 집착 또한 대단해 온다는 시간에 도착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거실과 베란다를 수없이 왔다갔다 하셨다. 무슨 일을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움트기 시작하면 그것은 빠른 속도로 자라 어머님을 지옥 속으로 밀어 넣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공황상태가 되어 방에서 쉬고 있던 내게 날벼락이 떨어지곤 했다. 그러다 남편이 나타나면 어머니의 얼굴은 거짓말처럼 평온한 얼굴로 변한다. 그래서 남편은 내가 본 어머니의 그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미국 생활이 어느 정도 자리 잡자 한국에서 어머님을 모셔와 같이 살았다. 혼자 지내는 것에 익숙한 어머님은 근처에 사는 한국 노인들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하루종일 집에 계시며 수시로 남편에게 전화하셨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불안해지기 시작해 목소리라도 들어야 마음을 놓으셨다. 통화한 지 한 시간 내에 그가 집에 오지 않거나 전화를 받지 않으면 다시 안절부절 못하시며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볶아댔다.     나는 이런 어머님을 성격이 괴팍한 분이라고만 생각하였다. 남편 없이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내느라 그런 성격이 굳어진 것이라 여기고 혼자 참고 지내왔다. 그러다 우리가 플로리다로 이사 왔을 때 어머님의 증세가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15년을 넘게 지냈던 친숙한 환경을 떠나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 지내는 것이 어머님께 그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어머님은 시간이 갈수록 더 거칠어지셨고 때론 폭력적이 되었다.     그 지경이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어머님께서 의학적인 도움이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혹시 치매일지도 몰라 그 증상을 검색해 보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성격 장애 증상을 나타내는 목록에 어머님의 행동 패턴이 다 들어 있었다.     그런 성격의 어머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많은 순간 어머님을 들여다보기보다는 회피하는 쪽을 택했다. 그 때는 내가 숨을 쉬고 살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돌아가시고 안 계신 지금은 그 당시에 어머님을 좀 더 찬찬히 살피지 않았던 것이 큰 회한이 되어 자주 밀려온다. 왜 한 번도 어머님께서 아픈 사람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까? 아파서 도와 달라는 외침이라는 생각은 왜 못했을까?     ‘수상한 그녀’에서 주인공은 손자 손녀들이 자기 엄마를 걱정하느라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자고 하는 소리를 듣는다. 쓸쓸히 가출한 그녀는 이상한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때문에 20대로 돌아간다. 집 나간 어머니를 찾아 헤매던 아들이 20대의 모습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하며 당당하게 사는 어머니를 찾아낸다.  손자에게 수혈해 주기 위해 그 젊음을 버리고 노인으로 다시 돌아오려는 어머니에게 아들은 돌아오지 말라고 권한다. 다시 사는 그 세계에서는 일찍 죽는 남편도 만나지 말고 병약해서 붙들고 있어야 하는 아들도 낳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며 오로지 엄마만을 위한 삶을 살라고 한다. 그 부분에서 난 쏟아지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다. 어머님의 모습이 영화 장면과 오버랩 되었다. 난 주저앉아서 소리 내 엉엉 울었다. 그 아들처럼 어머님을 헤아리지 못했던 나에 대한 큰 회한이요, 어머님을 찬찬히 들여다보지 않고 내버려둔 것에 대한 뼈 아픈 후회였다.     치매로 요양원에 들어가신 어머님은 말문을 닫으셨다. 그 대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허밍처럼 잔잔하게. 어린 시절 노래인 듯 간혹 일본 노래도 불렀다. 늘 화난 얼굴로 계시다 소리를 버럭 지르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우리가 가도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뭘 물어도 아무 답도 없이 그저 하시던 노래만 계속하셨다.     그런 할머니를 가만히 쳐다보던 큰애가 할머니의 노랫가락에 맞추어 노래로 대화를 시도했다. “할머니 나래가 왔어요. 할머니 손녀딸이에요” 그러자 신기하게 노래로 묻는 말에 어머님께서 답을 하셨다. 깜짝 놀란 우리는 새로 발견한 이 대화법을 시도해 보려고 서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 소란 가운데 어머님의 시선은 자주 남편의 얼굴에 머물렀다. 그러다 가만히 남편을 쳐다보시더니 노래가 아닌 말로 한마디 하셨다.     “밥 먹고 가요.”   얼굴은 기억하지 못해도 어머니 가슴은 그를 느낄 수 있었나 보다. 가슴 깊은 곳에 담겨있던 아들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밥 먹고 가라는 한 마디 말로 풀려 나왔다. 나 자신이 힘든 것만 보느라 헤아리지 못했던 것들이 얼마나 많이 어머님 가슴 안에 쌓여 있었을까? 나에게로만 향했던 시선을 조금만 더 어머님께 돌렸더라면 하는 후회가 지금도 마음을 아리게 한다.   허경옥 / 수필가수필 어머님 가슴 순간 어머님 어머니 가슴

2022-06-16

로랜드…"여보 어머님 댁에 공기청정기 놔야겠어요"

코로나19로 인해 가정에서라도 안전하게 숨 쉴 욕구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부모님 댁을 구석구석 깨끗하고 맑은 공기로 채우고 싶다면 '로랜드(ROLAND)'의 '아이클린(icleen)' 공기청정기가 답이다.       명품 전문 업체 로랜드가 공급하는 아이클린은 스위스 인센(Incen) 사가 특별 제작한 프리미엄 공기청정기로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맑은 공기'를 배출한다는 평을 받는다.     공기청정기는 공기를 잘 빨아들이고 걸러주는 필터와 팬의 성능이 중요한데 아이클린은 기존의 헤파필터와 차별화된 하이퍼헤파(HyperHEPA) 필터를 장착 일반 공기청정기보다 100배 작은 0.0003mm의 극초 미세먼지까지 효과적으로 제거해 준다.     또한 항균 처리된 특수 필터가 바이러스와 박테리아 휘발성 유기물(VOCs) 등을 살균 및 정화시켜 오염된 공기와 알러지 원인을 잡아주며 오존이 없는 음이온을 생성함으로써 집안 공기를 숲속과 같이 맑고 쾌적하게 만들어준다.   로랜드 측은 "올해도 극심한 가뭄으로 산불과 공기오염이 우려된다. 마더스데이를 맞아 부모님의 건강을 응원하는 의미로 아이클린 공기청정기를 5월 한 달 동안 25% 파격 할인한다"라고 밝혔다.     또한 "이제 코로나와 함께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면역력이 필수다. 로랜드가 아이클린을 비롯한 최고의 제품들로 건강한 음식을 섭취하고 충분한 숙면을 취하고 깨끗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일조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로랜드는 행사 기간 동안 아이클린 외에도 음식의 산화 및 영양소 파괴를 방지하면서 짧은 시간에 건강식을 만들 수 있는 명품 주방용품 휘슬러(Fissler) 가볍고 포근한 필파워(Fill Power) 900의 거위털을 순면 새틴으로 감싼 엠페러 이불 등 인기 있는 명품들을 20% 할인가에 제공한다. 이 밖에 쥬서기 휴롬을 비롯해 각종 주방용품 선물용품 침구류 등도 세일가에 구입 가능하다.     로랜드는 토런스에 본사가 위치하며 부에나파크 비치 불러바드 선상에 매장을 두고 있다. 웹사이트는 www.Rolandshop.com   ▶문의: (323)731-1111, (714)739-8888   19144 Van Ness Torrance CA     5307 Beach Blvd Suite 116 Buena Park CA 공기청정기 어머님 아이클린 공기청정기 프리미엄 공기청정기 산불과 공기오염

2022-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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