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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며느리 단상

거의 30년을 어머님 며느리로 살았다. 26년간은 우리 집에서였다. 이민 초기, 첫아들을 낳고 난 뉴욕 브라이언트 하이스쿨에서 보조교사로 일하고 남편은 한 교회의 교육전도사로 일했다. 우리의 작디작은 월급을 아무리 합쳐도 매월 생활비를 맞추기 힘들던 시절, 집 앞 가게 1불짜리 도넛을 들고 살까 말까 고민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큰아들 돌이 될 무렵, 어머님이 다니러 오시겠다고 했을 때, 가장 걱정되었던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어머님과 어떻게 시간을 보내드려야 하나 하는 것이었다. 집에 오면 너무 피곤해서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어머님과 대화를 나누고 상대를 해드려야 할 것이 가장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 어머님은 아들 여섯과 딸 하나를 기르신 씩씩한 내공으로 시간을 나름 잘 보내셨다. 그리고 둘째까지 두 아이를 다 길러주시고,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 오랜 기간을 우리와 함께 사셨다.  
 
나는 어떤 며느리였을까. 여름이면 여행도 모시고 다니고, 틈나는 대로 백화점, 공원 등에도 모셔다드렸다. 괜찮은 쿨한 며느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머님이 우리 집에 계속 계시는 거라고, 아이들이 너무 예뻐서 한국에 못 돌아가시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머님이 사실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알게 된 것은, 내가 시어머니가 되고 손주들이 생기면서였다. 정신을 홀딱 납치할 정도로 귀여운 손주들, 글을 쓰는 지금도 7개월 막내 자는 모습을 카메라 앱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하지만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몰입해서 놀아줄 수 있는 내 체력의 한계가 딱 두 시간이라는 것이다. 두 시간 지나면 걍 집에 가서 쉬고 싶어진다.  
 
그러니, 남편과 내가 정신없이 바쁘게 밖으로 나돌아야 했던 그 긴 하루하루를, 어린 두 손자를 데리고 어머님은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젊은 시절은 찬란하지만 그 빛 때문에 못 보는 것도 많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힘드시겠지 했지만 이 정도로 힘드실 줄을 몰랐다. 어머님이 우리 집이 편해서, 미국 생활이 좋아서 우리와 사시는 거라고 생각했던 철없음도 내 나이의 한계였다. 힘듦을 알아드리지 못한 미안함을 말씀드릴 수 있게 된 나이, 어머님은 옆에 계시지 않는다.  
 


‘고부’ 하면 ‘갈등’이란 말이 절로 나오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 지난 칼럼에 시어머니들이 기대를 내려놓고 자녀의 가정을 존중해주고 작은 것에도 감사할 때 좋은 관계가 된다고 썼다. 요즘 현명한 시어머니들, 진짜 많이 그렇게 사신다. 아주 그렇게 사시려고 발버둥을 치신다. 그 길만이, 자신들의 기대치와 경계(boundaries)를 확실히 가지고 있는 것이 요즘 자녀들과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라고들 하신다. 하지만 이런 자세가 꼭 시어머니에게만 필요한 걸까. 며느리들도 같은 마음으로 시어머님을 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환상적일까!  
 
젊은 며느님들이여, 무리한 기대일랑 내려놓자. 어머님에게도 어머님의 삶이 있다. 강해 보여도, 두 시간이면 급 피곤해지는 체력 약화와 노년기에 대한 불안은 기본이다. 이 어머님의 행복한 남은 삶에 대한 필요성을 존중해주자. 어머님이 해주시는 작은 것에도 격하게 감사해보자. 감사를 표현해보자. 현명한 그대들에게 몇 배로 돌아올 것이다.  
 
어느 날 선물처럼 내 삶에 들어온 내 아들의 소중한 여자 며느리, 그리고 또 하나의 어머니로 내 인생에 찾아오신 내 남편의 소중한 엄마 시어머니,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찐 가족이다!

김선주 / NJ 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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