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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트렌드] 영화 '듄'과 종교적 단상

최근 영화 '듄(Dune) 2'가 관객들의 인기를 끌고 있는 가운데 필자도 관람을 하였다.     예전에 본 1편을 유튜브로 복습하면서 큰 줄거리를 머리에 넣고 보았다. 영화 '듄(Dune)'은 프랭크 허버트가 1965년에 발표한 소설을 최근에 영화화한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종교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1만191년 미래 우주에서 황제의 계략으로 인해 멸문한 아트레이더스 가문 후계자 폴이 제국의 식민지인  '아라키스'행성에서 메시아로 거듭나며 원주민 프레멘 반군과 힘을 합쳐 복수에 나선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몇 가지 기독교에서 모티브로 했음직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후계자 폴이 아라키스 프레멘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인지에 대한 프레멘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마치 성경에 예수님이 구약에서 얘기한 메시아가 맞는지에 대한 그 당시 사람들의 논쟁과도 비슷한 듯하다.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부류는 폴의 무심한 행동하나 하나에도 'As written(경전에 써 있는 대로)'라며 폴이 메시아임을 확신해 가지만 다른 부류는 폴이 메시아임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은 폴은 사람들의 기대와 자신의 예지력을 통해서 자신이 멸문한 가문과 프레멘족의 희망임을 깨닫고 그들을 구원하고자 메시아 같은 리더가 되기로 한다.     폴을 메시아로서 가문의 재건과 프레멘인들의 리더를 만들고자 하는 모습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아들을 후원하고 먼 발치에서 후원했다면, 폴의 엄마, 제시카는 아들을 어떻게든 리더로 만들려고 하는 극성 엄마로 나온다.     제시카는 우주의 주요 세력 중 하나이자 초능력자 집단인 베네게세릭트 멤버이다.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인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들은 구원자를 만드는 교배계획을 세우며 자신들의 교리를 퍼뜨려 자신들이 만든 메시아가 구원자임을 믿도록 만들어 세계를 지배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제시카는 프레멘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맞다고 여론을 몰아가고 아들에게도 사람들의 구원자가 되라고 설득한다.     작가는 종교와 신화는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허구일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보낸다. 나는 특별히 이단들과 사이비들이 한국인들에게 잘 통하는 것을 보면서 질문과 사고 없이 믿는 종교를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도 성도들이 교조적 (어떤 원리나 이론, 사상 등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리처럼 여겨 덮어놓고 그대로 지키려 하는 것)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한다. 특히 선거철 되면 종교와 정치가 결탁하여 하나님에 보낸 메시아로 보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한다.     또 영화에서 메시아인지 테스트하는 것으로 폴이 파란 생명수을 먹도록 제시카는 권한다. 메시아이면 죽지않고 깨어나서 큰 깨달음(각성)을 얻는다. 마치 창세기에 선악과를 따먹으라는 사탄의 유혹을 연상시킨다. 인간이 AI 시대를 맞아 신의 전지전능한 수준으로 올라가는 시대인데 어리석은 인간에게 너무나 과한 능력이 주어지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아무튼, 듄의 대서사시에서 종교, 미래, 정치 모든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jay@jnbfoodconsulting.com 이종찬 / J&B 푸드 컨설팅 대표종교와 트렌드 영화 종교 종교적 단상 종교 미래 최근 영화

2024-04-22

[이 아침에] 장미꽃을 받는 날의 단상

2월은 다른 달에 비해 2,3일이 부족한 달이기에 애잔하고 허전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2월은 사랑의 달이다. 2월14일이 아름다운 사랑이 꽃피는 ‘발렌타인스 데이’ 이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만큼 값지고 보람 있는 것은 없으리라. 사랑한다는 일은 절대의 신앙이요, 순수한 아름다움이다. 사랑을 전하는 발렌타인스 데이는 사랑하는 대상에게 담아 두었던 마음을 표현하는 날이다. ‘사랑한다’는 말은 기분 좋은 말이며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말을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모두 행복하다.   사랑이 없는 인간관계란 공기 없는 동굴과도 같다.  그렇기 때문에 더 사랑을 찾고, 사랑에 기대고, 사랑에 몰입하는 모습을 천만 가지로 그려내며 산다.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 사랑 때문에 울고 웃고, 고통받는다 하더라도 사랑은 인생에 불을 지펴주는 황홀한 연소이며 갱신의 불이다. 불 꺼진 삭막한 인생길 보다는 불타는 행복한 시간을 갖는 것이 낫다.     남편 생전에 꽃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나는 남편에게 꽃을 받는 기분이 어떨까 궁금했다. 그래서 지인들에게 “기분이 어땠냐?”고 물었다. 말로는 안 하던 짓 갑자기 왜 하냐고, 꽃 살돈 있으면 현찰로 주든가, 저녁이나 살 것이지라고 핀잔을 줬지만 속으로는 로맨틱한 기분이 들어 좋았다고 한다.     야구에서 투수가 아무리 스트라이크를 던져도 포수가 잘 받아주지 못하면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지 못한다.  두 사람의 호흡이 잘 맞아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 세대는 발렌타인스 데이가 무엇을 하는 날인지 모르고 살았다. 우리 문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남편들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들 나름대로 아내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은은한 언어가 있다. 반면 미국인 남편들은 아내에게 끊임없이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 말이 뜸해지면 애정이 식은 것으로 간주한다.     레이건 전 대통령이 아내 낸시 여사에게 보낸 발렌타인스 데이 카드를 보면 구구절절 애정이 넘쳐난다. “당신은 나의 행복 그 자체요. 내가 당신을 스윗 하트라고 부르는 이유는 당신처럼 달콤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오. 나에게는 하루하루가 발렌타인스 데이요. 내가 왜 당신을 사랑하는지 아오? 당신은 항상 당신답기 때문이오. 내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서 배우자를 선택하라면 주저 없이 당신을 또 택할 것이오. 당신과의 삶은 정말 후회가 없었소.”     발렌타인스 데이 장미꽃에는 이 정도의 사랑 고백이 담긴 카드도 함께 보내야 한다. 덜렁 꽃만 보낸다면 쓸데없는 짓 한다는 핀잔을 듣기 십상일 것이다. 선물에는 마음이 담겨야 하는데 마음 표시는 없고 비싼 꽃만 전달되면 효과가 떨어진다.   사랑은 아름다운 삶의 주제이며 원천이다. 설사 죽음 같은 아픔이 올지라도 영원히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물을 마시며 살 수밖에 없다. 사랑의 샘물은 나를 키우고, 내 영혼을 빛내고, 내 인생을 영롱한 꽃 빛으로 물들이는 생명수다. 우리는 누구나 신비로운 그 샘물을 마시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인생을 사랑하는 길인 것이다.   사랑의 날을 맞아, 사랑을 돌아본다. 짧은 인생에서 나는 지금 어떤 사랑을 가꾸며 표현하고 있는가.   김영중 / 수필가이 아침에 장미꽃 단상 사랑 고백 사랑 때문 발렌타인스 데이

2024-02-08

[살며 생각하며] 며느리 단상

거의 30년을 어머님 며느리로 살았다. 26년간은 우리 집에서였다. 이민 초기, 첫아들을 낳고 난 뉴욕 브라이언트 하이스쿨에서 보조교사로 일하고 남편은 한 교회의 교육전도사로 일했다. 우리의 작디작은 월급을 아무리 합쳐도 매월 생활비를 맞추기 힘들던 시절, 집 앞 가게 1불짜리 도넛을 들고 살까 말까 고민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큰아들 돌이 될 무렵, 어머님이 다니러 오시겠다고 했을 때, 가장 걱정되었던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어머님과 어떻게 시간을 보내드려야 하나 하는 것이었다. 집에 오면 너무 피곤해서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어머님과 대화를 나누고 상대를 해드려야 할 것이 가장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 어머님은 아들 여섯과 딸 하나를 기르신 씩씩한 내공으로 시간을 나름 잘 보내셨다. 그리고 둘째까지 두 아이를 다 길러주시고,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 오랜 기간을 우리와 함께 사셨다.     나는 어떤 며느리였을까. 여름이면 여행도 모시고 다니고, 틈나는 대로 백화점, 공원 등에도 모셔다드렸다. 괜찮은 쿨한 며느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머님이 우리 집에 계속 계시는 거라고, 아이들이 너무 예뻐서 한국에 못 돌아가시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머님이 사실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알게 된 것은, 내가 시어머니가 되고 손주들이 생기면서였다. 정신을 홀딱 납치할 정도로 귀여운 손주들, 글을 쓰는 지금도 7개월 막내 자는 모습을 카메라 앱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하지만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몰입해서 놀아줄 수 있는 내 체력의 한계가 딱 두 시간이라는 것이다. 두 시간 지나면 걍 집에 가서 쉬고 싶어진다.     그러니, 남편과 내가 정신없이 바쁘게 밖으로 나돌아야 했던 그 긴 하루하루를, 어린 두 손자를 데리고 어머님은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젊은 시절은 찬란하지만 그 빛 때문에 못 보는 것도 많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힘드시겠지 했지만 이 정도로 힘드실 줄을 몰랐다. 어머님이 우리 집이 편해서, 미국 생활이 좋아서 우리와 사시는 거라고 생각했던 철없음도 내 나이의 한계였다. 힘듦을 알아드리지 못한 미안함을 말씀드릴 수 있게 된 나이, 어머님은 옆에 계시지 않는다.     ‘고부’ 하면 ‘갈등’이란 말이 절로 나오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 지난 칼럼에 시어머니들이 기대를 내려놓고 자녀의 가정을 존중해주고 작은 것에도 감사할 때 좋은 관계가 된다고 썼다. 요즘 현명한 시어머니들, 진짜 많이 그렇게 사신다. 아주 그렇게 사시려고 발버둥을 치신다. 그 길만이, 자신들의 기대치와 경계(boundaries)를 확실히 가지고 있는 것이 요즘 자녀들과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라고들 하신다. 하지만 이런 자세가 꼭 시어머니에게만 필요한 걸까. 며느리들도 같은 마음으로 시어머님을 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환상적일까!     젊은 며느님들이여, 무리한 기대일랑 내려놓자. 어머님에게도 어머님의 삶이 있다. 강해 보여도, 두 시간이면 급 피곤해지는 체력 약화와 노년기에 대한 불안은 기본이다. 이 어머님의 행복한 남은 삶에 대한 필요성을 존중해주자. 어머님이 해주시는 작은 것에도 격하게 감사해보자. 감사를 표현해보자. 현명한 그대들에게 몇 배로 돌아올 것이다.     어느 날 선물처럼 내 삶에 들어온 내 아들의 소중한 여자 며느리, 그리고 또 하나의 어머니로 내 인생에 찾아오신 내 남편의 소중한 엄마 시어머니,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찐 가족이다! 김선주 / NJ 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살며 생각하며 며느리 단상 어머님 며느리로 며느리 단상 어머님과 대화

2023-06-07

[발언대] 민주평통에 대한 단상

대한민국의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민주평통)는 민족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대통령에게 통일정책을 건의하고, 자문에도 응하는 기구이다. 민주평통은 1981년 전두환 전 대통령에 의해 구상되었고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에 대응하는 범국민적 구성체로 조직됐다.     민주평통은 헌법 제92조, ‘평화통일 정책의 수립에 관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며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를 둘 수 있다’는 조항에 설치 목적을 명시하고 있다. 처음에는 평통위원 임명을 한국 내로 한정했지만, 한국이 글로벌 국가로 발돋움하면서 해외동포의 증가, 특히 미국에 대한 한국 정부의 통일정책을 널리 홍보하고, 고취 시키기 위해 미주지역에 평통 해외지부를 만들었다.     필자는 1989년 3월 LA한인상공회의소 회장 시절 북한 초청으로 7박8일 동안 북한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 당시 해외단체 중에서는 LA한인상공회의소가 처음으로 북한 당국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 방문 기간 군사지역을 제외하고 북한의 이곳저곳을 둘러 볼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을 안내했던 북한 당국자들은 차관급을 대표로 대부분 김일성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그들의 주장)들이었다. 그들은 주체사상과 남북통일에 관해 철저히 무장된 통일관을 갖고 우리를 설득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통일을 말했지만 인민들의 궁핍한 삶은 아랑곳하지 않고 군비 확장과 사상 교육에 총력을 다하는 분위기였다.     북한 당국이 말하는 자주적인 ‘연방제 통일방안’은,  1960년대 김일성의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대를 이어가며 앵무새처럼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남한의 국가정보원(당시 중앙정보부)과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신무기(아마 핵무기)를 만들어 한반도를 적화통일한다는 생각밖에 없는 듯했다.     북한 방문 후 북경을 거쳐 서울로 돌아와 남한의 고위 정치인과 중앙정보부 간부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당시 남한 고위층들의 생각은 너무 순진하고 단순해 조금은 실망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그동안 한국의 일부 진보적 정치인들은 북한의 연방제 통일 주장에 유화적인 제스쳐를 보내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했다. 이런 통일에 대한 오해와 위험한 인식을 바로 잡아주는 것이 평통위원들의 의무이고, 존재 이유라 생각한다.     한국 정부는 2년마다 미주에서도 평통위원 인선을 한다. 이때가 되면 계절풍처럼 일어나는 것이 투서와 각종 잡음의 병폐다. 이런 행동은 민주평통의 근본적인 목적을 흐리게 하는 일이다. 이제는 좌와 우, 보수와 진보를 떠나 통일된 조국을 만드는 것이 우리 모두의 지상과제라 생각한다. 이를 위해 자라나는 한인 후손들에게 북한의 실상을 알리고 한반도가 평화통일을 이룰 때까지 확고한 통일이론 및 통일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이영송 / 민주평통 LA지역 협의회 8대회장발언대 민주평통 단상 고려연방제 통일방안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평화통일 정책

2023-01-30

[시로 읽는 삶] 명절 단상

흙냄새 나는 나의 사투리가 열무맛처럼 담백했다/잘 익은 호박 같은 빛깔을 내었고/ 벼 냄새처럼 새뜻했다/ 우시장에 모인 아버지들의 텁텁한 안부인사 같았고/ 돈이 든 지갑처럼 든든했다   -맹문재 시인의 ‘추석 무렵’ 부분       명절은 전통적으로 해마다 지켜오는 날로 조상에게 차례를 올리는 큰 의미가 있다. 이즈음에 와서는 멀리 떨어져 있던 가족들을 명절을 계기로 만나는 가족 모임의 의미가 더 커져 간다.   명절이 되면 두통을 호소하는 여자들이 많아진다. 제사라는 고유한 형식을 치러야 하므로 그에 맞은 음식을 장만해야 한다. 이즈음엔 많이 간소화되기도 하고 차례 음식을 시장에서 만들어 파는 곳이 있어 수월해졌지만 그래도 아직 많은 이들에게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주는 것 같다. 명절을 치르고 나면 이혼소송이 늘어난다는 말도 있는 걸 보면 명절 후유증이 생각보다는 큰 모양이다.   얼마 전 추석을 앞두고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라는 기관에서 차례상 표준안을 내놓았다. 설문조사, 예법 등을 두루 고려하여 표준안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차례상의 간소화를 제시한다.   삼색나물, 과일(사과, 배, 밤), 송편, 적, 물김치를 표준안으로 내놓았다. 흔히 명절에 먹던 전(어전, 육전, 소전)이 제외되었다. 전이 제외된 이유는 전을 부치는 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번거롭기도 하다는 것이다. 원래는 제사에 전은 올리지 않았었다는 설명이다.     여자들의 명절후유증이크다 보니 성균관에서까지 나서야 했다는 게 웃음이 난다. 요즘은 명절날 해외여행을 가는 가족들도 있고 여행지에서 조상께 술 한 잔을 올리는 것으로 제사를 대신하는 가족들도 있다고 하던데, 아직도 명절 스트레스가 여자들에게 두통을 유발하다니.   성균관에서 내놓은 차례상 표준안을 보자니 상이 좀 빈약해 보인다. 제사음식이란 게 산 사람 먹는 것이고 풍성하고 넉넉함으로 북적대고 나눈다는 의미의 명절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어쩐지 씁쓸하다.     제사상의 간소화로 여자들의 수고를 덜 수 있다면 다행이긴 하겠으나 정작 명절 때 여자들이 두통을 일으키는 것은 음식의 가짓수 때문은 아닐 것이다.   여자들이 명절을 기피하는 이유는 가족들의 동참이 없다는 데 있는 것 아닐까 싶다. 보통 가정의 명절 풍경을 보자. 여자들은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할 때 남자들은 오랜만에 동기간이 만났다고 술상에 모여 앉거나 차를 마시며 담소를 즐긴다. 며느리라면 음식을 먹고 뒷일까지 마무리해야 한다. 여자는 가족이 모인 곳에 동참도 못 해보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다.   가족들이 음식 만드는 일을 거들어 주고 설거지도 함께 해주면 여자들이 전을 부치니 마네 하며 투덜대지는 않을 것이다. 명절이 여자들에게도 즐거운 날이 되려면 남자들의 생각이 조금만 바뀌어도 될 것 같다.     명절 때마다 갈등을 겪는 것도 오육십 대가 마지막인 것 같다. 젊은 세대들은 명절을 연휴 정도로 생각할 뿐이고 이미 남성과 여성의 가사일 분담이 자연스러워져 가고 있다.   명절은 가족의 유대를 이어주는 좋은 풍속이다. 여자건 남자건 명절이 즐겁고 반가운 날이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명절의 분위기를 그르치지 않도록 가족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여자가 행복해야 가정이 행복하고 세상도 평화로워 진다. 전통이라는 아름다운 풍속도 지켜가려는 행복한 여자들이 많을 때 보존될 것이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명절 단상 명절 단상 명절날 해외여행 명절 스트레스

2022-09-13

[수필] 5월의 단상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헌신과 희생   그 자체이고…”   지난 5월 8일은 ‘어머니 날’이었다. 한국에서의 이날은 ‘어버이 날’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미국에서는 마더스데이(mother's day)와 파더스데이(fathef's day)가 다르다. 왜일까? 솔직히 나는 그 이유를 잘 모른다. 그냥 미국 사람들이 심심(?)해서 부모를 갈라 놓았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 둘을 따로 떼어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의 마더스데이는 그 역사가 깊다. 자료에 따르면 1872년 보스턴 지역 교회를 중심으로 '어머니 날'이 제안되었고 그 후 범국가적인 '어머니 날'의 제정 움직임은 1907년부터였다고 한다. 당시 필라델피아 출신 여성인 아나 자비스가 그녀의 어머니 2주기 추모식에서 흰 카네이션을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어머니 날'의 제정을 촉구한 것이 시초라고 전해진다.   우리나라도 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930년 무렵부터 구세군 가정단에서 어머니 주일을 지키기 시작하였고, 1932년에는 감리교 연합회에서 5월 둘째 주일을 부모님 주일로 지킬 것을 결의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해방 이후 1956년에 국가에서 매년 5월 8일을 '어머니 날'로 제정하여 기념하다가 1973년부터 '어버이 날'로 그 명칭을 바꾸어서 지금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이제는 그 '어머니 날'의 히스토리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후대들에겐 '어버이'라는 뜻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자라나는 아이들이 왜 이 날을 지켜야 하는지, 그 근본인 '親(친)'과 '孝(효)'의 참뜻을 제대로 일러주어야 한다. 어버이를 한자로 쓰면 '親(친)'이라 한다, 그리고 부모를 잘 모시는 것을 '孝(효)'라고 쓴다.     이 말에는 유래가 있다고 한다. 그 '親(친)'과 '孝(효)'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아보았다.     옛날에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나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해가 지도록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어머니는 애타는 마음으로 동구 밖 나무 위에 올라서서 기다렸다. 멀리서 오는 아들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을까 해서였다. 이를 한자로 풀어 쓰면 아들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나무(木) 위에 올라서서(立) 아들을 기다리며 바라보는(見) 어머니의 모습이 '어버이 친(親)'이다.     그렇다면 효(孝)는 무엇을 표현한 것일까? 이야기는 이어진다. 나무를 팔아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반찬과 선물을 사 오던 아들은 추운 날씨에 밖에 나와 자신을 기다리는 어머니께 너무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자신의 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온다. 아들(子)이 늙으신(老) 어머니를 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오는 글자가 '효도 효(孝)'자이다.     부모는 늘 자식을 걱정하고 자식이 잘되기만을 바란다. 자식이 어른이 되고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부모는 60이 넘은 자식에게도 '차 조심하고, 밥 꼭 챙겨 먹고 다녀라'고 염려하는 말을 한다. 이러한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헌신과 희생 그 자체이고 부모의 마음이다. 하나 자식들은 그에 비해 반의반도 따라가지 못한다.     누구나 자주 인용하는 부모님 효(孝)에 관련된 공자님 말씀에 이런 말이 있다. “子欲孝而 親不待(자욕효이 친부대·자식은 효를 다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즉, 부모님 살아 계실 때 효를 다하라는 얘기다. 이제 철이 들어 부모님께 잘해 드리고자 하나 이미 때는 늦다. 부모님  돌아가신 후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말이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날도 있고 어버이날도 있고 스승의 날도 있지만, 그 중에서도 으뜸은 '어버이 날'이다. 모두 늦기 전에 효도하자. 꼭 어버이날이 되어 부모님께 선물을 사준다 식사를 대접한다 등 이런 것들도 물론 좋은 일이긴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부모님을 잊지 말고 평소 챙겨드리는 마음이 더 따뜻하다.     그냥 자주 안부하고 찾아뵙기만 해도 된다. 부모님들은 그 한 가지만으로도 너무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행에 옮기기에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식들 각자 마음먹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효자 효녀 되기가 뭐 별 것이겠나? 손용상 / 소설가수필 단상 범국가적인 어머니 어머니 주일 부모님 주일

2022-05-12

[살며 생각하며] 늦가을의 단상

입동 초입의 새벽 한기가 오스스 옷깃을 파고든다. 숲속에서 스 멀 스 멀  피어오르는 옅은 안개가 숲길을 점령해 발길을 옮길 때마다 온몸을 휘감는다. 미명 속에서 몽환적인 기분으로 조심조심 적요의 산책로를 홀로 걷는다. 발밑에서 바스러지는 낙엽들의 울림이 온몸으로 전해져 늦가을을 전율하게 한다. 이런 호젓한 시간에 홀로 산책을 하는 것이 얼마 만인가. 참으로 값지고 소중한 축복의 시간이다.      나는 늦가을을 사랑한다. 지난여름 탕자처럼 쏘다니며 질탕하게 삶을 연주했던 나무들이 잎새들을 다 떨구고 빈 손 들고 하늘의 품에 안긴 늦가을을 나는 더 없이 사랑한다. 늦가을은 그 풍요하고 왁자지껄하던 여름의 기차에서 나만이 덩그렇게 낯선 역사(驛舍)에 남겨놓고 모두 어디론가 떠나버린 것만 같은 허전함과 삭막함이 마른 바람으로 살갗을 스치는 계절이다.    이 황량한 늦가을의 스산한 바람조차 따습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이미 노년의 나이이기 때문일까. 돌아온 탕자의 모습처럼 아무 것도 걸친 것 없이 맨손 들고 서있는 나무들이 가슴에 포근히 안겨온다. 위험한 계곡에서 서성이며 물결 따라 춤추며 야음을 타고 유혹의 속삭임도 던졌던 젊은 날의 푸르른 잎새들도 하나 둘 물살에 떠내려 보내고, 그 분망했던 삶의 질곡에서 벗어나 서서히 산 아래로 내려온 나목들은 이제사 겸손히 자기 자리에 서있다. 하늘을 향해 빈손을 높이 들어 자비를 구하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나목들의 마음을 나는 느낀다.    이제는 떠나가는 것들에 미련도 두지 말자. 떠날 때 떠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 것을. 떠남을 애달파 내 또한 그 얼마만한 세월을 아픈 자국 남기며 살아왔던가. 떠날 때 미련 없이 떠날 줄 아는 것도, 떠날 때 서슴없이 떠나보낼 줄 아는 것도 또한 깊고 큰 사랑인 것을. 내 철없고 어리석음은 언제나 떠날 때 떠나야 할 줄도 몰라 허둥대며, 떠날 사람 서슴없이 떠나보내지 못하여 연연해하며 살아왔던 부질없음이여!   가을 나무의 잎새를 보라. 정처없이 흔들리면서도 한줌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제 한 몸을 기꺼이 불태우는 소망의 잎새. 언제부터인가 나는 열매보다 나뭇잎을 더 소중히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이지 가을날 탐스러운 열매가 맺히기까지는 그야말로 수많은 나뭇잎의 헌신적인 봉사가 있었지 않았는가. 여름철, 그 따가운 햇볕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때로는 시들고 말라죽기까지 한 잎새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가을날, 살찐 열매가 탐스럽게 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나뭇잎의 수고로움이 없었다면 어찌 조그마한 열매라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자기의 할 일을 다한 잎새는 가을이 다하면 결국 빈손만 가지고 흙으로 돌아간다. 결코 열매를 시샘하거나 남아있겠다고 고집부리지 않고 미련없이 제 한 몸을 떨군다. 스스로를 다 내어주고도 말 한마디 없이 떠날 때와 떠날 장소를 아는 잎새를 보면 나는 괜스리 부끄러워진다. 일찌기 젊은 나이에 일제 치하에게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꽃처럼 꺾인 윤동주 시인은 그래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부끄러워했던가.    이제는 허욕의 무성했던 잎새들을 버리고 오만스러웠던 여름의 푸르름도 버리고,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시간. 그것은 늦가을이 우리 인간에게 베푸는 마지막 은총이기도 하다. 이제사 푸른 하늘을 가슴에 끌어들여 정말 겸손히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계절이다. 나를 내려놓고 떠나버린 젊음의 기차는 아직도 기적 소리 요란히 남기고 사라졌지만, 그 기적 소리는 아직도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 레일 위를 서성이며 놓친 기차를 아쉬워만 할 수는 없다.     이제 나를 위해 차비를 해야 할 차례이다. 이제까지 떠나보내는 아픔과 떠나야 하는 이별의 아픔 속에 머물러 지내면서 방황했다면 이제 감연히 내가 나로 돌아오는 이 계절을 나는 사랑한다. 이제껏 거짓된 자기로 살아왔던 잎새들의 나불댐이나 그 허황된 춤추기에서 벗어나서 참으로 나의 본연의 모습으로 남는 시각에 하늘은 내려와 내 품안에 안길 것이다. 그리고 이제라도 단아한 자기 모습을 보며 겸손히 엎드려 인생의 겨울을 맞이해야겠다.     인생의 겨울은 어느 날 느닷없이 들이닥칠 것이다. 개미 같은 곤충도  그 겨울을 위해 여름날 부지런히 일해 왔고, 벌들도 꿀을 따다 예축을 했고, 철새들은 남쪽으로 날아갔고, 그리고 맹수조차도 동면을 위해 여름날 충족히 양식을 예비했으니 우리는 우리의 겨울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예비할 것인가. 나는 아직도 여름이 내려놓은 낯선 역에서 미아처럼 어리둥절하고 철부지처럼 두려워 떨면서 서서히 추워지는 가을날의 나목처럼 그렇게 서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울지 않으련다. 늦가을에 늦둥이로 태어난 아이처럼 아직도 철들기 멀었지만, 나는 이 가을을 사랑하련다. 원망을 쌓지 말고 분노를 쌓지 말며 내려 쌓이는 눈처럼 포근한 사랑을 쌓자. 집착도 미련도 훌훌 벗어던지고 두둥실 떠가는 구름의 마음이 되자. 좋을 때도 궂은 날도 있게 마련이거니, 찼다가는 비울 줄 아는 달을 본받자.   떠나보낼 것 다 보내고 나서 느끼는 허전함보다는 이제사 누리는 참 평안의 행복을 피부를 스쳐가는 스산한 바람에도 나누어주며, 따뜻하게 실어 보내자. 내 마음 실려 떠나간 그 바람, 엄동설한 돌고 돌아 탕자처럼 다시 돌아오면, 새 봄엔 나의 가지에도 꽃이 피리라.     1시간이 조금 넘는 산책을 마치고 산책로 입구로 돌아왔다. 소슬바람에 얼마 남지 않은 나무 잎들이 아침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대지에 나풀나풀 별빛처럼 내린다. 이제 나무들은 잎이 다 떨어지고 나무의 몸통이 드러나는 가을바람, 온 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돌아올 봄을 기다릴 것이다.    그러고 보니 모든 생명이 낮은 곳으로 내려 근원을 찾아 돌아가는 계절이다. 떠날 때를 알고 대지 위로 내려와 흙으로 돌아가는 나뭇잎들의 순회가 자연스러워 숙연하다. 온몸과 마음에 계절이 사무친다. 물처럼 바람처럼 시처럼 살고 싶다. 그렇게 살다 가리라.     살며 생각하며 늦가을 단상 가을 나무 산책로 입구 온몸과 마음

2021-11-30

[이 아침에] 가을 밤의 단상

마른풀 냄새가 난다. 풀 냄새는 머지않아 무서리가 찾아온다는 숲에서 보내는 아픈 시그널이다.   늦은 밤 책상 앞에 동그랗게 웅크리고 앉아 있는 등 뒤에서 갑자기 귀뚜라미 우는 소리. 이맘때가 되면 매년 찾아와 발등을 툭 건들고는 폴짝 뛰어 마룻바닥에 배를 까뒤집고 곤두박질치던 놈. 나는 의자에서 돌아 앉아 두리번거린다.   적막 속에 갇혀있는 나를 찾아온 먼 그리움. 적요의 시공(時空)이 잠시 출렁인다. 놈을 보면 아련한 소리가 먼 기억의 저편으로부터 들린다.   장독대 뒤에 숨어 다투어 울던 귀뚜라미 소리는 내 유년에 껴안고 자던 자장가였다.   교복에 단정을 차리던 무렵 감이 익어가는 뒤뜰에서 들리던 귀뚜리 울음소리. 그런 날은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를 펼쳐 놓고 책 위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백로 지나고 추분이 가까워오자 귀뚜라미 우는 소리도 멎었다. 찻길에서 들리는 모터사이클 소리가 다듬질 소리 같이 들린다. 다듬질 소리는 이제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전설 속의 소리로만 남아 있다.   청년이 된 어느 날의 입동 근처. 저녁에 뜰로 나서는데 어디선가 들리는 다듬이질 소리. 뜰에는 몇 남지 않은 은행잎이 가지에 매달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또, 닥. 또, 닥. 또닥또닥또닥또닥. 먼 곳으로부터 아득하게 들리던 소리. 어느 정숙한 여인이 한복 저고리 단정히 차려입고 다듬돌 앞에 앉은 고운 모습을 나는 상상했다. 다듬질 소리는 장단에 가락을 얹어 운율적으로 들려 소리가 그친 후에도 긴 여음을 남겼다. 그 소리는 잊을만하면 들렸다. 늦은 밤에 들리던 다듬이질 소리는 큰길 건너 애자네 엄마가 만들어 내는 소리였음을 뒤늦게 알았다. 새 봄에 대학에 들어갈 애자는 그때로부터 다섯 해 전에 아버지를 월남 전선에서 여의었다. 앞길이 창창한 장교였던 그의 죽음에 이웃들은 한 겨울보다 더 시린 여름을 보냈다.   낭만적으로만 느꼈던 그때 다듬이질 소리의 의미를 50년이 다 된 지금에서야 알 것도 같다. 다듬이질 소리는 육자배기 타령이었고, 아니리로 풀어내는 한탄조의 중모리와 한의 절정을 휘모리장단으로 토해내는 청상이 된 한 미망인의 하소연이었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고즈넉이 눈을 감고 졸지에 청상이 된 한 여인의 애끓듯 풀어내는 다듬이질 가락 한 토막을 베고 밤을 뒤척였을지도 모른다.   단풍을 보면 여리거나 짙은 얘기가 채색되어 있어 사연이 많은 잎일수록 곱다. 인생의 가을을 맞은 사람의 얼굴에도 아팠거나 슬펐던 한때의 모습이 수채화로 그려져 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서정주 시인의 시처럼 생의 가을을 맞은 당신도 그래서 더 아름답다. 조성환 / 시인

2021-10-19

[시사음식] 개 식용 단상

 개 식용 문제가 다시 공론대에 올랐다. 지난달 27일 문재인 대통령이 “이제는 개 식용 금지를 신중하게 검토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라고 언급하면서다. 오랜 논란이 재차 불거지는 모양새다. 식용견 농장주로 구성된 대한육견협회와 ‘케어’ 같은 동물복지단체가 개 식용 문제를 둘러싸고 뜨거운 법제화 논쟁을 벌이고 있다.   개 식용 논란은 복합적이다. 우선 개를 먹을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관습적 갈등이 있다. 관련법 사이의 충돌도 있다. 개를 가축으로 규정한 축산법과 개가 가축으로 규정되지 않아서 도축과 유통을 법으로 관리하지 못하는 축산물위생관리법이 상충한다. 동물단체들이 추진 중인 ‘법적 근거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동물의 살상을 금지하는 ‘동물보호법 개정안’과 ‘개를 가축에서 제외하는’ 축산법 개정안 등을 둘러싼 다툼도 얽혀 있다.     개 식용 논란은 연원이 깊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 이후에도 여러 차례 사회 문제가 됐다. 문화적 충돌 때문이다. 일례로 1954년 5월 서울경찰국장은 개장국 판매 금지 조치를 내린다. 미국에서 오래 생활한 이승만 대통령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영향이 컸다.   이후 개장국은 보신탕으로 이름을 바꾼다. 닭으로 만든 닭개장이나 닭보신탕도 새롭게 등장했다.     개 식용에 관한 첫 기록은 13세기 중반, 고려 후기 태안 마도3호의 목간에서 나온 구포(拘脯·개고기 포)다. 개장국은 ‘자궁(慈宮)에게 가장증(家獐蒸·개고기 찜) 진찬(進饌)하였다’(1795년 6월 18일, 『일성록』)처럼 왕실 행사에도 등장했고, ‘대궐 밖의 개 잡는 집에 이르러 개장국을 사 먹고’(1777년 7월 28일, 『속명의록(續明義錄)』처럼 외식으로도 먹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조선시대에 개는 복날 시식이었다. 선풍기도 아이스크림도 없던 시절, 초복에 개를 먹으면 더위를 먹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담긴, 즉 절박함이 깃든 음식이었다. 19세기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개고기를 파와 함께 푹 삶은 것을 개장(狗醬)이라고 한다. 개장국을 만들어서 산초가루를 치고 흰밥을 말면 시절 음식이 된다. 이것을 먹고 땀을 흘리면 더위도 물리치고 보신도 된다’는 대목이 있다.   하지만 당시에도 개를 꺼린 사람들이 있었다. 소고기로 개장국을 따라 만든 육개장이 등장했다. 그러나 최근 환경은 크게 바뀌었다. 영양 부족이 해결됐고, 여름 나기도 수월해졌다. 반려견 인구가 급증했고, 동물복지에 대한 사회의식도 높아졌다. 그럼에도 수천 년 이어온 개 식용이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예전과 다른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때다. 박정배 / 음식평론가

2021-10-18

[푸드 칼럼] 개 식용 단상

개 식용 문제가 다시 공론대에 올랐다. 지난달 27일 문재인 대통령이 “이제는 개 식용 금지를 신중하게 검토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라고 언급하면서다. 오랜 논란이 재차 불거지는 모양새다.     식용견 농장주로 구성된 대한육견협회와 ‘케어’ 같은 동물복지단체가 개 식용 문제를 둘러싸고 뜨거운 법제화 논쟁을 벌이고 있다.   개 식용 논란은 복합적이다. 우선 개를 먹을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관습적 갈등이 있다. 관련법 사이의 충돌도 있다. 개를 가축으로 규정한 축산법과 개가 가축으로 규정되지 않아서 도축과 유통을 법으로 관리하지 못하는 축산물위생관리법이 상충한다.     동물단체들이 추진 중인 ‘법적 근거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동물의 살상을 금지하는’  동물보호법 개정안과 ‘개를 가축에서 제외하는’ 축산법 개정안 등을 둘러싼 다툼도 얽혀 있다. 현재 약 11만7000가구로 추산되는 전국 식용개 사육농가의 생존권 문제도 걸려 있다.   개 식용 논란은 연원이 깊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 이후에도 여러 차례 사회 문제가 됐다. 문화적 충돌 때문이다. 일례로 1954년 5월 서울경찰국장은 개장국 판매 금지 조치를 내린다. 미국에서 오래 생활한 이승만 대통령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영향이 컸다.   이후 개장국은 보신탕으로 이름을 바꾼다. 닭으로 만든 닭개장이나 닭보신탕도 새롭게 등장했다. 88올림픽을 앞두고는 영국 등 해외에서 개 식용을 반대하는 여론이 거세게 일기도 했다.   개 식용에 관한 첫 기록은 13세기 중반, 고려 후기 태안 마도3호의 목간에서 나온 구포(拘脯·개고기 포)다. 개장국은 ‘자궁(慈宮)에게 가장증(家獐蒸·개고기 찜) 진찬(進饌)하였다’(1795년 6월 18일, ‘일성록’)처럼 왕실 행사에도 등장했고, ‘대궐 밖의 개 잡는 집에 이르러 개장국을 사 먹고’(1777년 7월 28일, ‘속명의록’)처럼 외식으로도 먹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조선시대에 개는 복날 시식이었다. 선풍기도 아이스크림도 없던 시절, 초복에 개를 먹으면 더위를 먹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담긴, 즉 절박함이 깃든 음식이었다.     19세기 동국세시기에는 ‘개고기를 파와 함께 푹 삶은 것을 개장(狗醬)이라고 한다. 개장국을 만들어서 산초가루를 치고 흰밥을 말면 시절 음식이 된다. 이것을 먹고 땀을 흘리면 더위도 물리치고 보신도 된다’는 대목이 있다.   하지만 당시에도 개를 꺼린 사람들이 있었다. 소고기로 개장국을 따라 만든 육개장이 등장했다.     그러나 최근 환경은 크게 바뀌었다. 영양 부족이 해결됐고, 여름 나기도 수월해졌다. 반려견 인구가 급증했고, 동물복지에 대한 사회의식도 높아졌다. 그럼에도 수천 년 이어온 개 식용이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예전과 다른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때다. 박정배 / 음식평론가

2021-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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