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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기억의 소실점

김지영 변호사

김지영 변호사

한국의 어버이날 아들이 사진 한장을 보냈다. 92세의 노모가 휠체어에 앉아 하늘을 보시고, 72세의 아들이 시선을 내린 채 휠체어를 미는 사진. 3년 만에 삼대가 한자리에 모인 날, 5월 1일에 찍었다. 아들은 다음 날 태국으로, 나는 엿새 후 미국으로, 엄마는 여전히 고향 요양병원에.  
 
엄마가 요양병원에 들어 가신지 10년째. 이제 엄마는 거기를 ‘집’으로 생각하신다. 긴 복도는 동네 ‘고샅’, 그리고 간호사 스테이션 부근의 넓은 휴게실은 ‘큰 마당’으로 이해하신다.  고샅을 지나 동네 큰 마당으로 마실도 가신다. 오랜만에 나를 만나면 아들에게 ‘집’에서 밥 한 끼 못 해주신다고 걱정을 하신다.  
 
이번 방문길에는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엄마를 모시고 나왔다. 삼십리 길 공주까지 오는 동안에도 “얘, 멀리 가지 마라” 걱정하신다. 식당에서 만난 나의 사촌들, 한참 설명한 후에야 자신이 키웠던 그들을 알아보신다. 이제 90세 가까운 이모, 엄마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도 금방 알아보지 못하신다.  
 
다행히 아들인 나는 단박에 알아보신다.  서서히 사라지는 기억의 창고 속에 가장 깊숙이 남아 있는 것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겠지. 아들은 기억하지만 아들의 상황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셨다. 가끔 전화 드리면 똑같은 질문을 하신다. “워디여?” 미국이라고 대답을 하면 “거긴 왜 갔니?” 하고 되물으신다.  
 


나이가 들면 기억의 공간이 오그라드는 것도 좋은 일인 듯. 잊히는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서운하고 서럽기도 하지만 잊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짐이 가벼워지는 일이다. 어머님은 젊은 시절부터 생계 문제를 혼자 떠안으셨고 어떻게 든 해결을 하신 분이다. 지금도 이러저러한 세상사를 인식한다면 그 해결책을 고민하실 터.  차라리 그런 문제를 기억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 마음 편할 일이다.
 
“손톱으로 바위를 긁듯 살아왔다.” 오래전 어머님께서 하신 말씀. 그런 어머님의 일생을 바탕으로 나의 인생이 펼쳐졌다. 항상 꽃길만은 아니었지만 봄바람처럼 가볍게 흘러온 시간이 더 많았던 게 나의 70평생이다. 때때로 가시에 찔려 쩔둑 거릴 경우 어머님의 손톱을 생각하며 내 나름 세상을 살아왔다.  
 
미국에 오기 전날 어머님을 찾아뵀다. 아직도 면회가 제한적이라서 지정된 면회 장소로 내려오셨다. 워커에 의지해서 걸어오시면서 반가운 웃음을 지신다. “워티기 왔어? 내가 여기 있는 줄을 어찌 알고.” 항상 하시는 말씀. 당신 아들이 남들이 못하는 큰일이나 한 듯 대견스러워하신다.  그리고 같이 내려온 간호인에게 “우리 아들여” 하고 자랑을 하신다.  
 
이틀 전에 만났던 사실은 어머님의 기억 속에 지워졌다. “며칠 전 손자하고 같이 왔잖어” 내가 말했다. “그랬나?” 엄마의 대답. 엄마의 손을 잡는다. “손이 따뜻하다.” 엄마가 말씀하신다.  엄마와 이런 대화를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을까? 엄마의  바싹 마른 손가락 수에 나의 아직 통통한 손가락 수를 더한 만큼만….
 
미국에 돌아와서 나의 아들이 보내준 사진을 다시 들여다본다.  이 십년 후 비슷한 사진을 상상한다. 휠체어에 앉을 사람은 나, 밀어줄 사람은 아들, 사진을 찍어 줄 사람은? “미래는 과거다” 종범 스님의 법문을 생각한다. 

김지영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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