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씨앗이 꽃에게
씨앗이 꽃에게 그대 한낮 뙤약볕은 견딜만 했소 퍼붓는 소낙비는 어떻고 그래 찾아드는 벌, 나비 지긋한 눈길 행복 했던 거요 얼굴 쓰담는 바람도 그대 어찌 꽃잎 떨구셨소 함부로 핀 세월 아니기에 저문 날 잠들지 못한 거요 그대 가고 그 자리에 내가 있소 보내고도 오래 잊지 못했소 여전히 내 안에 남은 숨결 까맣게 타는 내가 멋 적어 찬 바람에 곤두박질 친 눈감지 않아도 이곳에 빛은 없소 어둠은 두렵지 않소 환한 봄을 꿈꾸며 내 안에 꼭 그대를 품고 동그랗고 더 단단한 나를 만들고 있소 오늘도 소란하지 않은 하루가 천년 같이 지나가오 긴 잠을 청해야겠소 이제 나는 죽고 그대가 살아나야 할 차례 몇해 전부터 꽃씨를 받는다. 시월의 날들은 대부분의 꽃들이 지고 꽃잎이 떨어진 그 자리에 씨앗을 맺는다. 신기하게도 하나의 꽃 자리에 수백개의 씨앗을 맺는 걸 보며 바람과 햇빛, 벌과 나비, 무엇보다 꽃 자신의 결심과 수고에 머리가 절로 숙여진다. 아마도 밤하늘 달빛도, 새벽 안개도, 서쪽 하늘 지는 노을도, 보석같이 반짝이던 아침이슬도, 잘 자라달라 쓰다듬던 나의 손길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신문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검고 작은 꽃씨는 검은 비 같다. 손가락으로 잘 잡히지도 않는 작은 씨앗 속의 세상은 너무도 넓고 파한 하늘 같아서, 그 안에 담겨진 꿈들이 소중해서 하나도 헛되이 다룰 수 없다. 매년 봄 모종을 사서 심기도 하지만, 씨앗을 작은 컨테이너에 심어 모종을 낸 후 옮겨 심기도 한다. 사실 씨앗을 받고, 보관하고, 모종내고, 옮겨 심는 시간과 수고가 만만치 않지만 그렇게 얻은 꽃들을 바라보다 보면 마음에 찡한 서글픔과 함께 기쁨이 몰려온다. 꼭 뱃속에 아기를 오래 품다가 해산한 어미의 마음 같음을 부인할 수 없다. 비슷한 꽃 모양, 같은 색상의 꽃이지만 작고 늦은 봄 피기 시작하는 데이지는 들꽃에 가까우리만큼 번식이 대단하다. 뒤란의 한쪽 편을 몇해만에 다 차지하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 들녘에 앉아 있는 착각을 일으키기 충분하게 아름다웠다. 나는 작은 container에 마커로 나지막한 꽃모양을 그리고 그 옆에 white, late spring to fall이라고 적었다. 씨앗의 발아를 돕는 중요한 요소는 햇빛, 공기, 온도, 수분이라고 한다. 그러면 씨앗의 좋은 보관은 위의 네가지 요소를 제거해 주면 된다. 깊이 잠들게 하면 된다. 화사한 어느 봄 날 아름답게 피어날 그대들을 꿈꾸며…. 우리도 때론 헤어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가슴을 누르는 답답함 속에서, 불현듯 찾아오는 삶의 추위를 맞기도 하며, 마셔도 마셔도 가시지 않는 갈증이 찾아올 때가 있다. 이때 작은 씨앗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발아를 위해 잠든 씨앗처럼 봄이라는, 꽃이라는 희망 속에 살아야하지 않을까? 불평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죽어야 살겠고 살아낸 후 죽어야 하는 자연의 섭리를 겸허한 자세로 받아 들여야하지 않을까? 작은 한 톨의 씨앗에게 세상을 이기고 나를 이기는 비밀을 배우는 하루가 저문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씨앗 사실 씨앗 밤하늘 달빛도 결심과 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