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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2035] “방콕에 이런 곳 없어요” 생성AI시대의 여행

 “브루노 마스가 언제 ‘하입보이’를 불렀어?” 며칠 전 아내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AI(인공지능)가 부른 노래였다. AI가 브루노 마스의 어설픈 한국어 발음까지 그럴듯하게 포착했다는 얘기를 하다 지난 2월 태국 방콕에서 보낸 휴가가 떠올랐다.   “방콕에 이런 곳은 없어요.” ‘왓아룬’(새벽사원) 앞에서 내가 내민 사진을 본 현지 가이드가 말했다. 그럴 리가…. 방콕에 온 이유 중 하나는 세계적인 석학이자 작가인 이안 부루마가 페이스북에 올린 이 사진 때문이었다. ‘방콕의 믿을 수 없는 불교 사원’이라며 그가 올린 경관을 늦은 밤 퇴근길에 보고는 불교 신자도 아닌데 가슴이 뛰었다. 방콕 날씨를 확인한 뒤 비행기표를 끊었다. ‘세계적인 석학도 생성AI에 낚이는구나. 그래도 며칠 간 즐거웠으니 괜찮다’고 마음을 다독이며 이안 부루마의 SNS를 다시 확인했다.   “방콕에 사는데 이런 곳은 본 적 없다. 이 사진은 사기다. 생성AI 달리(Dall-E)가 만든 이미지”라는 주장과 “진짜 있는 곳이다. 며칠 전에도 가봤다”는 쪽으로 나뉘어 방콕 체류자, 방콕 좀 안다는 세계인이 댓글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반가운 건, 한 사진가가 올린 ‘내가 찍은 것’ 이란 댓글이었다. 맥락을 파악해보니, 해당 사원은 유명 관광지가 아니었고, 생긴 지 오래되지 않은 곳이라 방콕 시민들도 잘 모르는 곳이었다.   지난 3월 얼룩말 세로가 동물원을 탈출했을 때, 나도 비슷한 반응을 보인 적이 있다. 보도를 접하기 전 메신저 단체방에 올라온 사진을 보고는 “요즘 AI 대단하다”고 말했다. 진위를 의심하고 경험에 기반한 판단을 내리는 건, 진짜와 가짜가 헷갈리는 세상에서의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 믿었다가 속는 것과 믿지 않는 것 중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일까. 한 친구는 챗GPT가 추천한 나트랑 현지 맛집이 대부분 가짜였다면서 AI가 주는 정보는 믿기 어렵다고 했다.   리나 칸 미국 연방거래위원회 위원장은 3일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생성AI의 잠재력은 매우 파괴적일 수 있다”며 생성AI가 사기를 부추길 수 있고, 사기꾼이 진실해 보이는 메시지를 만드는데 이를 활용해 소비자를 기만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종종 신문·방송업이 사양산업이란 말을 동료들과 자조적으로 했지만, 의심하는 태도와 검증의 능력, 언론의 사실 확인 역할은 앞으로 더 중요해지지 않을까. 18세기 철학자 볼테르는 “의심하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지만 확신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했다. AI시대에 이 말은 더 무겁게 다가온다.   참, 방콕에서 본 일몰의 불상은 어땠느냐고. 진짜임을 확인하고 여유를 부리다 이동하니 방콕 퇴근길 교통체증과 겹쳐 근처를 지날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진 뒤였다. 어둠 속 희미한 불상의 윤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의심과 검증만큼 중요한 건 역시 제때의 마감, 시간 엄수구나. 여성국 / 한국 IT산업부 기자시선2035 생성ai시대 방콕 방콕 퇴근길 방콕 체류자 태국 방콕

2023-05-10

[시선2035] 공허한 논란

주로 의혹이란 단어로 시작한다. 짧게는 2~3일, 길게는 일주일 정도 화제가 된다.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가 손가락질받고 퇴출당하며 한 사이클이 끝난다. 한국 사회에는 논란이 소비되는 전형적인 패턴이 있다.   작곡가 유희열이 대중 속에서 사라졌다. 표절 의혹이 일었고 저명 작곡가가 몰락했다. 따져볼 여지가 없지는 않았다. 부활의 리더 김태원이 ‘100분 토론’에 출연해 “이게 병이라면 치료하기 전에 방관한 것”이라며 쐐기를 박았다. 유희열은 “안 그래도 힘든 세상, 저까지 힘들게 해드려 죄송하다”며 방송에서 떠났다. 똑똑한 그는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사라져야 이 논란이 끝난다는 것을.   누군가에겐 통쾌한 과정인데 뒷맛이 씁쓸하다. 유희열이 사라지며 K팝의 고질적인 유사성 문제는 해결되고 표절과 재해석의 경계를 나누는 명확한 기준이 세워졌을까. 논란을 넘어 조금 더 깊숙한 논의를 해야 할 시점에선 모두가 멈춰버렸다. 무엇을 위해 그를 그리 몰아붙였던 것일까. 김봉현 음악평론가는 ‘얼룩소’에 기고한 글에서 “사람들이 유희열에게 가한 공격은 음악적인 것이라 보기 힘들다. 유희열에게서 도덕을 빼앗은 후 ‘도덕이 부재한 인간은 당해도 싼’ 응징을 가하는 과정이었다”고 썼다.   만 5세 조기입학 논란 속 취임 34일 만에 사퇴한 박순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그가 물러나며 학제개편 정책도 함께 사라졌다. 박 장관은 “학제개편 등 모든 논란은 제 불찰”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 뒤 정부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사실상 정책을 폐기했다. 누군가는 책임을 진 것이라고 하는데,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무의미한 논란만 반복되며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논란을 일으킨 특정인은 그가 초래한 문제의 원인이나 해결책이 아닐 때가 많다. 오히려 그 문제의 모순이 반영된 반사체에 가깝다. 개인은 구조의 문제를 가리는 연막처럼 작용해왔다. 한 사람이 여론에 짓눌리며 끝나는 논란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건졌나. 반복되는 수많은 논란이 공허하단 생각이 든다.   미국 연방의회엔 지난해 1월 6일 발생한 의회 난입사건을 조사 중인 하원 특별위원회가 있다. 난입을 선동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책임을 밝히려 그의 가족과 측근을 포함해 1년간 1000여 명을 인터뷰했다. 트럼프는 여전히 ‘선거 조작’을 주장하지만, 이 지난한 과정이 미국 민주주의의 근본적 위기를 진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역사가 앤 애플바움은 “거대한 팩트체킹”이라고 했다. 이런 방식은 어떨까. 제자리로 돌아오는 공허한 논란보다 한 걸음씩 내딛는 제대로 된 논의 말이다. 박태인 / 한국 정치팀 기자시선2035 공허 논란 조기입학 논란 작곡가 유희열 유사성 문제

2022-08-17

[시선2035] 공허한 논란

주로 의혹이란 단어로 시작한다. 짧게는 2~3일, 길게는 일주일 정도 화제가 된다.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가 손가락질받고 퇴출당하며 한 사이클이 끝난다. 한국 사회에는 논란이 소비되는 전형적인 패턴이 있다.   작곡가 유희열이 대중 속에서 사라졌다. 표절 의혹이 일었고 저명 작곡가가 몰락했다. 따져볼 여지가 없지는 않았다. 부활의 리더 김태원이 ‘100분 토론’에 출연해 “이게 병이라면 치료하기 전에 방관한 것”이라며 쐐기를 박았다. 유희열은 “안 그래도 힘든 세상, 저까지 힘들게 해드려 죄송하다”며 방송에서 떠났다. 똑똑한 그는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사라져야 이 논란이 끝난다는 것을.   누군가에겐 통쾌한 과정인데 뒷맛이 씁쓸하다. 유희열이 사라지며 K팝의 고질적인 유사성 문제는 해결되고 표절과 재해석의 경계를 나누는 명확한 기준이 세워졌을까. 논란을 넘어 조금 더 깊숙한 논의를 해야 할 시점에선 모두가 멈춰버렸다. 무엇을 위해 그를 그리 몰아붙였던 것일까. 김봉현 음악평론가는 ‘얼룩소’에 기고한 글에서 “사람들이 유희열에게 가한 공격은 음악적인 것이라 보기 힘들다. 유희열에게서 도덕을 빼앗은 후 ‘도덕이 부재한 인간은 당해도 싼’ 응징을 가하는 과정이었다”고 썼다.   만 5세 조기입학 논란 속 취임 34일 만에 사퇴한 박순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그가 물러나며 학제개편 정책도 함께 사라졌다. 박 장관은 “학제개편 등 모든 논란은 제 불찰”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 뒤 정부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사실상 정책을 폐기했다. 누군가는 책임을 진 것이라고 하는데,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무의미한 논란만 반복되며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논란을 일으킨 특정인은 그가 초래한 문제의 원인이나 해결책이 아닐 때가 많다. 오히려 그 문제의 모순이 반영된 반사체에 가깝다. 개인은 구조의 문제를 가리는 연막처럼 작용해왔다. 한 사람이 여론에 짓눌리며 끝나는 논란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건졌나. 반복되는 수많은 논란이 공허하단 생각이 든다.   미국 연방의회엔 지난해 1월 6일 발생한 의회 난입사건을 조사 중인 하원 특별위원회가 있다. 난입을 선동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책임을 밝히려 그의 가족과 측근을 포함해 1년간 1000여 명을 인터뷰했다. 트럼프는 여전히 ‘선거 조작’을 주장하지만, 이 지난한 과정이 미국 민주주의의 근본적 위기를 진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역사가 앤 애플바움은 “거대한 팩트체킹”이라고 했다. 이런 방식은 어떨까. 제자리로 돌아오는 공허한 논란보다 한 걸음씩 내딛는 제대로 된 논의 말이다. 박태인 / 한국 정치팀 기자시선2035 공허 논란 조기입학 논란 작곡가 유희열 유사성 문제

2022-08-17

[시선2035] 그를 이해하려면

대소변은 스스로 해결하지만 밥을 먹을 땐 도와줘야 함. 소리를 지르거나 도로변에 드러눕는 경우가 있음. 침을 자주 뱉음. 사람들이 절대 이해해주지 않음.   정용준의 소설 『선릉산책』에서 한두운을 설명하는 문장들이다. 한두운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다. 그는 한여름 낮에 헤드기어를 쓴 채 걸으며 오리나무·화살나무·자귀나무·전나무 등 공원에 있는 나무의 이름을 모두 맞힌다. 1인칭 화자는 얼떨결에 시간당 1만원을 받는 조건으로 하루 동안 두운을 봐주기로 한다. 처음엔 두운이 ‘열 걸음 정도 앞서 걸었다’. 그러다 책의 중간부터 그들은 ‘나란히 걸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워낙 많이 회자되다 보니 우영우 얘기만큼은 안 쓰려고 했다. 그러다 끝내 온갖 기사에서 볼 수 있는 장애 이야기를 쓰게 된 건 대학생 때의 기억이 계속 맴돌아서다. 그중 하나는 자폐가 있는 학생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내가 맡은 K는 중3 남학생이었는데 성인인 나보다 덩치가 컸다. 봉사활동 계획상 학교 교과 과정을 가르치는 일종의 과외를 해야 했지만 제대로 된 수업을 하는 일은 없었다. 수학책을 펴놓고 몇 번 가르치기를 시도하다가 포기했다. 과외교사론 아주 무능했지만, K의 어머니는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1주일에 한 번 학교가 끝난 오후 4시쯤부터 저녁까지 K를 만나는 날은 어머니가 저녁까지 식당일을 할 수 있는 날이었다.   K와의 시간을 보내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했는데 어떤 말에 그다음 질문을 자연스럽게 이어갈 만한 답변이 돌아온 기억이 없다. 때로 무언가를 같이 먹을 때면 그는 놀랍도록 빨리, 많이 먹었다. 친해져 보겠다는 이유로 눈 맞추기를 시도했지만 계속 실패했다.   자폐가 있는 사람 상당수가 타인과 눈을 맞추는 것을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친해지기 위해선 눈을 자주 맞춰야 한다’는 말이 수학 문제의 정답처럼 당연한 줄 알았는데 비장애인에게만 참인 명제였다. 교환학생으로 한국을 떠나면서 K와의 과외가 끝나고 나서야 그를 내게 맞추려고만 했다는 걸 알았다. 만날 때마다 K는 나름의 아는 체를 했는데, 나는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숙여야만 인사인 줄 알았다.   장재숙 동국대 교수는 『지금 사랑을 시작하는 그대에게』에서 “한 사람만 표현하고 다른 한 사람은 참아내는 소통은 탈이 난다”고 말한다. 서로 맞춰가야 한다는 뜻이다. 맞춰가야 할 사람이 있을 뿐 우리가 일방적으로 원하는 장애인의 모습은 현실에 없다. 『선릉산책』의 마지막에 한두운과 한나절을 보낸 화자는 자문한다. ‘오늘 만난 한두운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나’. 이해의 시작으로, 그를 궁금해한다. 정진호 / 한국 경제정책팀 기자시선2035 자폐 스펙트럼 장애 이야기 봉사활동 계획상

2022-07-31

[시선2035] 피케티의 가르침

 올해 들어 재테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부동산을 중심으로 한 자산가격 폭등 기사를 쓰다가 “내 집 마련을 못 할 수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어서다. 애초 부귀영화를 누릴 생각은 없었지만, 만 4년이 넘도록 열심히 일했는데 내 월세방 평수는 한 치도 늘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지난주 경기도 수원에 집을 장만한 친구(31)의 집들이에 초대받았다. 12칸짜리 그 집 책장 절반은 재테크 관련 서적이 차지하고 있었다. 부동산·주식·투자·부자… 친구의 추천으로 책장에 있던 책 중 한 권을 빌렸다. 집주인은 책을 빌려주면서 “이론을 익히기 전에 마인드부터 바꿔야 해서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덧붙였다.   온갖 경제학자의 이론으로 구성된 이 책의 주제는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되는가다. 책은 재산 상위 20%가 전체 부의 80%를 차지하고 있다는 ‘20대 80의 법칙’을 소개한다. 대학생 시절 우리를 분개하게 했던 이 같은 현실과 법칙에 저자는 “불편해하든 말든 세상은 원래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20%에 속하라는 가르침이다. 이 책은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총·균·쇠』와 함께 스테디셀러에 올라있다.(교보문고)   자산가격 상승으로 인한 불평등을 지적한 토마 피케티의 연구는 “그러니까 자산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피케티는 부동산과 금융자산을 통한 자본이익이 늘어나는 속도가 임금이 증가하는 비율보다 더 크다는 것을 밝혀냈다. 저자는 이를 인용하면서 “부자가 되는 비결은 월급이 아니라 투자에 달려 있다. 피케티가 통계로 증명한다”고 했다.   피케티가 300년간의 통계를 추적한 건 그런 결론을 도출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는 2013년 『21세기 자본』이라는 책을 내고 “자본소득으로 인한 불평등은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위협”이라고 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또래 친구들은 분개했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자본을 통제하리라고 기대했다. 그렇게 믿었다.   현실이 피케티의 연구를 엉뚱한 방향으로 소비하게 만들었다. 자본 축적 열풍은 20대에도 불어 닥쳤다. 고려대 도서관의 대출 인기도서 10위권 내 책 중 6권이 재테크 관련 서적이다. 『경제적 자유 얻는 법』『돈 되는 메타버스』『돈 버는 NFT』 등이다. 한양대 도서관의 지난해 12월 대출횟수 6·8위를 부동산 투자 책이 차지하고 있다. 1위는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이다.   2020년 초까지만 해도 이들 대학 도서관 대출 순위권엔 재테크 책이 한 권도 없었다. 최근 2년 사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전국 부동산값 폭등, 암호화폐와 주식 가격 상승이 나타났다. 청년세대에 허탈함과 위기감이 닥쳤다. 어느새 이상(理想)을 말하는 게 이상(異常)한 일이 됐다. 정진호 / 한국 경제정책팀 기자시선2035 피케티 가르침 전국 부동산값 부동산 투자 자산가격 폭등

2022-02-07

[시선2035] 설득은 어림도 없다

 모두가 사실을 소유한 시대다. 누군가 당신을 설득하려 한다면, 반박할 재료가 한가득이다. 내 마음에 드는 정치인을 찾거나,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가진 유튜버는 검색하면 금방 나온다.   사실을 의견으로 치부하며, 설득은 어림도 없다는 다짐으로 시작하는 대화. 지난해 취재 현장에선 이런 사람들을 유독 많이 만났다. 기자는 사실을 전달하는 직업인데, 사실로도 상대방의 마음을 열지 못하니 무기력해졌다. 미국 SF작가 로버트 A 하인라인은 “편견에 호소해 천 명을 움직이는 게 논리로 한 명을 설득하는 것보다 빠르다”고 했다.   이런 ‘설득의 무효함’은 올해 대선에서도 재연되고 있다. 양당 후보 모두 지지층만 단단히 결집하려는 모습이다. 후보들의 행보를 보면 반대 진영에 대한 설득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가끔 과감한 발언도 등장하지만, 곧 다시 주워 담는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돈 룩 업(Don’t Look Up)’의 감독 아담 매케이도 비슷한 메시지를 던진다.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거대한 혜성이 6개월 뒤 지구를 멸망시킨다는, 특별한 것이 없어보이는 영화. 하지만 이 영화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메릴 스트리프, 제니퍼 로런스와 티머시 샬라메까지 잘나가는 배우들이 총출동했다.   이들은 거대한 재난조차도 ‘공통된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열하는 망가진 미국을 절실히 연기한다. 대중을 현혹하는 정치인들은 혜성이 떨어질 하늘을 올려다보지도 말라는 ‘돈 룩 업’이란 구호를 멸망 직전까지 외친다. 매케이 감독은 NYT와의 인터뷰에서 “우린 더이상 서로 대화할 수도, 심지어 동의라는 것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말했다.   지금 우린 어떨까. 과거였다면 돌이킬 수 없을 수준의 의혹과 실언에도, 대선 후보를 결정한 사람들의 마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후보와 정당을 넘어서 이젠 진영 내 지지자들 모두가 각자의 진실을 들고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각개전투 중이란 생각도 든다. 사회 분열을 연구해 온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 버지니아대 교수는 “우리는 서로를 실존적인 위협(existential threat)으로 바라보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 ‘돈 룩 업’에서 혜성을 발견한 천문학자 랜달 민디(리어나도 디캐프리오) 교수는 유명 토크쇼에 나와 이렇게 호소한다. “에베레스트 산 만한 혜성이 지구에 오는데, 우린 최소한의 합의도 못 하고 처 앉았으면 어떡해요. 어디가 망가진 거예요? 기회가 있었을 때 혜성 궤도를 틀었어야지.” 모두가 진실을 외치는 시대에 궤도를 틀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올해 우리는 지난해보다 나아질 수 있을까. 박태인 / 한국 정치팀 기자시선2035 설득 어림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혜성 궤도 대선 후보

2022-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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