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대중이는 어디 있을까?
네 살은 되었을 것 같았다. 남자아이는 많이 울었다. 간호사가 안아 주어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큰 소리로 오랫동안 울다가, 간호사 누나 가슴에 안겨 잠이 들었다. 잠 속에서도 아이는 흐느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대중’이라 했다. 한문으로 大衆(대중)이었는지, 한국의 15대 대통령 김대중 씨의 이름을 딴 對中(대중)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대(大)라는 글자는 아이가 넓은 마음으로 배포 있는 장군처럼 살라는 뜻으로 주어진 것이었을 것 같다. 오십 년 전, 겨울처럼 춥던 어느 가을밤에 경찰 아저씨의 팔에 안겨 한 살도 안 된 꼬마 아기 네 명과 함께 서울시립아동병원 문턱을 넘어왔던 아이이다. 당시 의과대학을 갓 졸업하고, 인턴이었던 나는 시립아동병원에 파견 나가 있었다. 경찰 아저씨는 그날 밤도, 여느 날처럼 길에 버려진 아이들을 걷어왔다. 대중이는 큰 첫 번째 입원실에서 며칠을 보내고, 제 나이 또래 아이들이 있는 방으로 옮겨졌다. 말을 할 수 있던 대중이는 텔레비전의 이름도 알았다. 당시 한국에는 텔레비전이 집마다 있던 때가 아니었다. 그로 보아 그 아이는 밥깨나 먹는 집에서 자라던 아이이었을 터인데, 왜 버려졌는지, 아니면 어쩌다 길을 잃었던 것인지, 그 아이를 찾으러 오는 부모가 왜 없는지, 우리는 안타까웠다. 파견 근무가 끝나고 제자리로 돌아간 햇병아리 인턴들은 계획되어 있던 전문분야의 길을 떠났다. 나도 대중이와 그의 시립아동병원 친구들을 뒤로하고 얼마 후 도미했다. 나는 미국의 동부와 서부에 살면서 어린 시절 한국에서 고아로 자랐다는 성인들, 또 고아들에게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만들어 준 양부모들도 만났다. 6·25 한국전쟁 즈음 고아가 된 분들은 전쟁 73주년이 된 올해 거의 80살이 되어가고 있고, 대중이처럼 1970년대 부모와 헤어진 아이들은 40대 중반이 되었을 것이다. 6·25 한국전쟁으로 남북한 합쳐 10여만 명의 전쟁고아가 생겼다. 대중이가 구제되었던 1972년 즈음에도 한국은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이 붙여졌다. 보건복지부에 의하면 1955년부터 2021년까지 64년간 16만 9454명이 해외로 입양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북한은? 북한 고아의 통계는 많지 않지만 윌슨센터(Wilson Center)는 1952년부터 1959년까지 6·25 전쟁고아 3만 명이 공산권 동맹국인 항가리, 로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동독, 몽고, 중국에 보내져 교육받고 양육되었다고 한다.(2020년 6월 18일, 서강대학교 홍인택) 그들은 국가 관념에 대한 교육을 중점적으로 받았다고 한다. 전원이 북한으로 돌아갔다. 그 후 그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국제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았고, AP 뉴스(김형진.Monika Scislowska 6월 23일 2020년)에 짤막한 내용이 실린 것을 보았다. 한 명은 김일성대학에서 러시아어 교수를 하고 있고, 다른 한 명은 폴랜드어 교수로 일하고 있었고, 그 외에 세 명은 폴란드 외교관을 지냈다는 내용이었다. 3만 명 중 겨우 이 정도만 소식이 있을 뿐이다. 6·25의 상흔이 깊었던 한국에서 성장하고 미국에서 디아스포라로 살아온 나에게 2023년 여름은 특별하다.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만나게 된 특수한 사람들 때문인 것 같다. 한미 두 국가 간의 연계는 6·25로 시작된 것이기에 전쟁터에서 숨진 한국과 미국의 젊은이들을 잊을 수 없지만, 이 참상에 대한 기억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전장에서 산화한 젊은이들의 남겨진 자녀들을 만났다. 평범 속에 흡수된 그들이지만, 실상 7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 젊은이들이 남기고 간 아이들은 쉬이 아물지 않는 상처를 아물게 하려고 무척이나 애썼을 것이다. 내가 만난 특별한 두 여성 중 한 분은 한국전쟁 직후, 미국 흑인 가정에 입양되었던 샌드라 윈덤 여사다. 그는 은퇴 교사이자 작가다. 다른 한 여성은 윈덤 여사와는 달리, 나의 환자 대중이처럼 1970년대에 홀트 양자회를 통해서 백인 양부모에게 입양된 분이다. 그는 DNA로 따지면 순수 한국인 여성으로 지금은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는 아내이고 엄마이다. 윈덤여사는 LA총영사관과 UCLA가 합동으로 개최한 한미동맹 7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스피커로 초대되었던 인사 중의 한 사람이었다. 누구인지 모르는 흑인 병사와 역시 누구인지 모르는 한국인 여인 사이에 태어났던 혼혈아로 삶의 첫 4~5년을 가난하고 인종차별이 심했던 한국에서 ‘깜둥이’라는 놀림을 받고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인 흑인 병사는 미국인일 수도 있고 에티오피아인일 수도 있다고 그녀는 자신의 책에 설명하고 있다. 스탠퍼드 대학을 졸업한 그녀가 쓴 ‘오케스트레이션’이라는 책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 사회의 불합리함도 지적하고 있다. 또 부모, 국가라는 테두리, 종교, 교육, 문화의 이질감 등에 대해서 숙고하게 한다. 참으로 훌륭한 사람들이다. 훌륭한 사람들은 또 있다. 미디어를 통해서 본 뉴욕 부교육감 알렉사 앨번, 부시 펠로우십 수상자 캐서린 대출러, 김 파크 넬슨, 펜실베니아 소도시 시장 제니 안토니비츠, 비키 플린켄 스미스 검사, 그리고 내셔널 풋볼리그 버펄로 빌스 공동구단주 킴 페굴라를 보라. 부모를 잃은 고아(孤兒)였는지, 부모가 버린 기아(棄兒)이었는지, 아니면 뜻하지 않게 부모를 잃은 미아(迷兒)이었는지 더는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암울했던 초창기 운명을 양부모들과 함께 반전시킨 멋진 사람들이다. 오십 즈음이 되었을 대중이도 그렇게 멋진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사랑과 신앙의 힘이 얼마나 강하고 큰지를 한국 출신 입양아 영웅들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전월화 / 수필가수필 한국전쟁 직후 백인 양부모 서울시립아동병원 문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