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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인간의 숨결, 온기 2

지난번에 김기현의 ‘인간다움’을 읽고 ‘인간의 숨결, 온기’라는 제목으로 한 페이지의 글을 올렸다. 책 내용이 인류사를 고대부터 미래까지 총망라한 방대한 내용으로 그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인간다움의 의미가 어떻게 변화되어왔고 또 변화되어가고 있는가를 거시적으로 살펴본 지적 여행을 담고 있다. 한 페이지로 적어놓고 끝내기에는 너무 주옥같은 내용이어서 총 4편에 걸쳐 진정 작가의 심중을 헤아려보고자 한다.     작가는 인간다운 삶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조건으로 공감, 이성, 자유(자율)라고 학문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풀어나간다. 쉽게 한 마디로 풀이하면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가 바로 인간다움의 기본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타인을 나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대하지 않고 나와 같은 인격적 존재로 존중하는 모습이 인간적이라고 한다. 고대 철학자들은 이끌리는 삶과 개척하는 삶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한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 비로소 신의 명령에 따라 행위를 하는 수동적이고 운명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자기 능력으로 삶을 가꾸어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불과 도구의 사용, 손가락 사용 능력, 직립보행, 언어사용, 지능으로 자신을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는 지위에 올려놓았다. 수렵 생활을 접고 협력과 협동 같은 효율적인 결집력으로 대규모 집단을 만든다. 농업혁명, 물물교환을 통하여 내부의 결속을 위하고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앞세우고 사회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칭송하게 된다. 신화의 세계관에서 완전한 개인은 없다. 제사 문화, 가부장의 권위, 그리스 문화와 유교 문화 모두 가부장 사회다. 가족 중심의 유대관계는 점차 공존의 단위가 확대됨에 따라 씨족과 부족을 거쳐 고대의 도시국가 형태로 발전한다. 국가란 확대된 가족이다. 운명론과 신에게 자리를 내주고 인간이 조연으로 밀려난다.     BC 7~8세기경부터 인간도 삶의 주역이 될 수 있다는 수동적 위치에서 개척자의 위치로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성’이다. 이성은 Logos로, 인간은 이성을 통해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고 스스로 삶을 개척할 수 있다는 적극적 관심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성의 도전은 운명에 이끌리는 삶을 거부한다. 소크라테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는 성찰이 없는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겨왔다. 좋은 삶이란 성찰을 통해 영혼을 돌보는 일, 이성의 지휘 아래 욕망과 기개를 절제하는 삶이며, 진정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현명한 행동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능력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고 믿었다. 그 후 인간은 내면세계라는 집을 짓는 기나긴 여정을 시작한다. 평등의 정신이 향상되고 내면세계에 관한 관심이 점차 깊어질 때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기획하고 성취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 또한 성장한다.     전쟁은 인간의 이성을 위축시킨다. 그리스 시대는 이성의 전성기였다. 전쟁이 유럽을 휘몰아치면서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이성이 두려움과 불안을 통제할 수 있다는 신념은 소실된다. 로마가 유럽을 군사적으로 지배하면서 만들어진 문명을 로마 문명이라 부르지 않고 그레코- 로마 문명이라 부른다. 그리스 문명의 영향력이 그만큼 강했음을 의미한다. 중세 시대는 처세의 철학이 되어 스토아학파도 현실적 욕망 너머의 이성적 덕을 추구하고 에피쿠로스학파는 고통과 쾌락을 넘어선 영속적인 쾌락을 추구한다.     유럽 전체에 전쟁이 그치지 않으면서 혼란과 폭력의 세계에 위대한 신이 등장하게 된다. 유대교의 여호와는 그리스, 로마의 신들과 달리 압도적이다. 그리스, 로마의 신들은 Logos(법칙)를 지배하지 못하고 물리계의 자연법칙에 종속되는 존재들이다. 유대교는 다르다. Logos 위에 선다. 암흑 같은 혼돈 속에서 구원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할 때 사람들은 자연의 질서에 종속되는 신보다는 그것을 뛰어넘어 질서 자체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신에게 의지하고 싶어진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숨결 온기 숨결 온기 그리스 로마 그리스 문명

2024-10-07

동물로 사육된 남자가 던진 슬픈 문명 비판

인간이 만약 언어 교육과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않고 신체만 어른인 상태로 성장한다면 사회는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The Enigma of Kaspar Hauser)’는 독일 역사의 기이한 실화를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 특유의 실존주의적 시각으로 재해석한 걸작이다. 1960년대 라이너 베르너 파스판버, 빔 벤더스와 함께 독일 영화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뉴저먼시네마’ 운동의 3대 명장 중 한명인 헤어조크는 광기에 가까운 실존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감독이다. 그의 독특한 영화 방식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영화는 미스터리, 생존과 죽음의 본질, 비애와 비밀을 간결하고도 리얼하게 표현한다. 1975년 칸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돕는다.’   성경 구절인 듯 들리는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속담에서 유래됐다. 영화의 독일어 원제 ‘Jeder fur sich und Gott gegen alle’를 번역하면,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살고 신은 그에 반한다’(Every Man for Himself and God Against All)이고, 이를 좀 더 풀어 말하면 ‘모든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살고 신은 모든 사람을 상대로 그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뜻이 담겨 있다. 1974년 이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될 때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다. 기존 속담의 반어법적 효과와 헤어조크의 실존주의적 성향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1828년 오순절 일요일 독일의 뉘른베르크 길가에 한 아이가 버려진다. 그의 이름이 ‘카스퍼하우저’이고 군인으로 징집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 한 장을 들고 있다. 모든 게 미스터리한 이 아이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어느 가난한 농부에 의해 지하실에 갇혀 동물처럼 사슬에 묶여 살다가, 그마저도 농부의 형편이 좋지 않아 버려졌다고 말한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의 기이한 모습에 의아해했지만 그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완전히 문명과 격리된 그의 백지상태는 사람들의 호기심 또는 지식인층의 실험의 대상으로 취급받는다. 서커스의 구경거리가 되어버린 카스파는 어느 교수의 집으로 도망을 한다.     교수는 몇 마디 말과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던 그에게 학문과 음악, 미술, 종교 등을 가르친다. 빠른 학습에 점차 ‘문명’에 눈을 뜨게 된 카스파의 말과 행동은 나름의 자아 세계를 형성한다. 곧 자서전을 쓰고 피아노를 연주하게 된 카스파의 존재는 정치적으로 상류사회에 당혹스러운 존재로 떠오른다.   그가 귀족 출신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카스파를 마을에 버린 망토를 두른 인물이 다시 등장한다. 사악한 이 자는 언어를 구사하게 된 카스파가 자신을 기억하고 사람들에게 말을 할지도 몰라 두려워한다.     세상은 카스파를 발견하고 카스파는 세상을 발견한다. 세상에 낯선 사람으로 온 현명한 바보 카스파는 사회를 받아들이고 싶어하지만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사회이다.  카스파에게 문명이란 사람들의 시야를 가리는 도구이고 사람들은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그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들일 뿐이다.     학문과 논리의 대상이 아니라 ‘삶’을 살고자 했던 카스파는 교수와의 대화 중에 그에게 모든 사람이 늑대였다고 토로한다. 그는 교회 회중의 침묵이 오히려 비명을 지르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왜 피아노를 호흡처럼 연주할 수 없나, 라고 반문한다. 토론에서 종교와 합리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며 오만한 논리학자를 제압한다. 그는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과 마찰을 빚는다.   카스파는 1833년 두 번째 폭행을 당하고 가슴 깊숙이 칼에 찔린 채 살해된다. 사람들은 그의 기형성 또는 비정상성을 분석하기 위해 시체를 해부한다. 자신들의 지적 욕구를 위해서다. 공증인은 카스파의 뇌의 어느 한 부분이 변형됐다고 기록한다. 변형이라는 말 외에 더 나은 설명을 찾을 수 없던 독일 지식인들의 위선을 상징하는 듯, 영화는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공증인의 뒷모습으로 끝이 난다.     헤어조크는 카스파의 음울한 우화를 구체적이고 철학적인 탐문으로 이어간다. 그는 카스파에게 놀라운 통찰력을 제공함으로 서구 문명의 큰 축인 이성과 종교에 도전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문명을 조롱하는 ‘문명화된 카스파’와 문명화의 비극을 목도한다. 헤어조크는 문명과 비문명의 경계에서 인간의 순수성을 포착해 낸다.     헤어조크 감독은 카스파 역에 브루노 슐라인슈타인이라는 43세의 비전문 배우를 기용했다. 그는 평생 보호 시설에서 보냈고,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음악적 재능이 있었다. 그의 삶을 다룬 TV 다큐멘터리를 통해 익히 알려진 인물이었다.     슐라인슈타인은 연기 이상의 것을 연기한다. 순수하고 교활한, 그리고 선량하고 악의적인 카스파의 장난기를 과장하지 않고 침착하게 표현한다. 젊은 카스파를 연기하기엔 나이가 좀 많긴 했지만 카스파 만큼이나 수수께끼 같은 인물인 이 배우는 코믹한 카스파 역을 이질감 없이 잘 소화해 냈다. 낯선 세계에 휘둥그레진 어린 그의 눈은 영화의 중심 이미지이다.   헤어조크는 50년 전 사회 제도 또는 체제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사람들이 감수해야 하는 고통, 그리고 권력에 대한 민중의 두려운 심리를 리얼하게 파헤쳤다. 상상력과 지성에 기반한 이 영화는 후세대 거장들인 데이비드 린치의 ‘엘리펀트 맨’(1980), 라르스 폰 트리에의 ‘바보들’(1998),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최근 작품 ‘푸어 씽스’(2023) 등의 영화들에 영감을 주었다. 상류층 엘리트 계급이 주도하는 사회 제도가 그들 외 다른 계층의 사람들에게 고통의 삶을 안겨 주고 있음을 비판한 영화들이다.     명상적이며 가슴 아픈 담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는, 예의 바른척하는 지성인들의 학문과 이성은 문명의 오만함이며 혼돈이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다. 헤어조크는 이 영화를 통해 삶을 살고자 했던 카스파를 ‘학문적 창조물’로 인식했던 상류사회의 오만을 반성하고자 했다.     유튜브에서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김정 영화평론가비판 문명 바보 카스파 칸영화제 그랑프리 서구 문명

2024-09-18

[문주한 세금/회계] 회계사 35년, 부자 되는 길

남들과 다른, 차별화(differentiation)된 상상력을 가진 1%가 세상을 움직인다. 그리고 그들을 재빨리 알아채고, 함께 그 성공의 배에 올라타는 또 다른 1%가 있다. 나머지 98%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면서 산다.   동굴 밖에 지금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모르면서 말이다. 그런데 혹시 이런 끔찍한 생각을 해봤나? 나중에 우리 애들이 커서 내게 물을지도 모른다. ‘아빠, 아마존이 클라우드를 시작한, 그리고 구글이 Gmail을 만든 2004년, 아빠는 그때 무엇을 하셨나요?’   130년 전, 포드가 자동차를 처음 만들었을 때 모두 비웃었다. 워싱턴포스트 신문은 포드가 자동차를 머리에 거꾸로 이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만화까지 실었다. 그러나 그 옆에 있던 라커펠러는 달랐다. 자동차 한 대 다니지 않는 전국의 큰길에 주유소부터 세우기 시작했고, 그는 결국 석유 재벌이 되었다.     창조적인 상상력을 가진 이런 사람들 1%, 그리고 그것에 재빨리 공감하고 동승할 수 있는 극소수의 1% 사람들. 그들의 주머니로 세상의 돈은 깔때기처럼 모인다. 캄캄한 미지의 땅에 첫 불을 밝히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알아챈 눈이 뜨인 사람들이 있다. 나 같이 그저 보통의 눈만 가진 사람들이 앞을 못 볼 때, 극소수의 사람들이 인류 문명의 발전과 편익을 갖다 주고, 그 보상으로 돈방석에 앉는다.  나머지 98%는 그들을 억만장자로 만드는 데 자신들의 없는 지갑을 열 뿐이다. 그들 98%의 보통 사람들은 정부에서 받은 지원금을 잠시 보관하다가, 그 2%의 특별한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돈 배달부’ 역할만 할 뿐이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횃불의 맨 앞에 설 수는 없다. 그러나 주변을 살필 눈은 2개씩 갖고 있지 않은가? 애플을 보자. 아이폰을 사면 내 돈은 그 회사로 들어간다. 그나마 내가 발을 담글 수 있는, 아니 새끼발가락의 발톱이라도 걸칠 수 있는 방법은, 돈 아껴서 그 회사의 주식을 한 주씩이라도 사 모으는 것. 그것이 그나마 나 같은 98%가 그들만의 파티에 숟가락이라도 올려놓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애플이 휴대폰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2007년. 그 사이에 주가는 30배 올랐다. 전화기 하나만 산 사람과 주식까지 함께 산 사람이 갖는 부(wealth)의 차이는 악어의 입보다 더 크게, 잘못 쏜 화살만큼 더 넓게, 계속 벌어지게 마련이다.   우리가 비록 차별화된 1%의 재주와 용기는 없어도, 그리고 그 1%의 진짜를 찾은 첫 번째 사람은 아니더라도, 그 진짜 2%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세 번째 1%이기만 하면 된다. 세상의 모든 전설에는 작은 시작이 있는 법. 세상의 모든 가문에는 그 씨앗이 있는 법. 오늘이 그 전설, 그 가문을 시작하는, 바로 그 날 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어차피 행동하는 자들의 것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움직이고 보자.   문주한 한국 공인 회계사 / 미국 공인 회계사, 세무사   www.cpamoon.com회계사 세무사 워싱턴포스트 신문 인류 문명 문주한 문주한 회계사

2024-02-16

[투어멘토 박평식의 여행 이야기] 세계 최대의 야외 박물관

지금은 그리스와 튀르키예가 견원지간처럼 사이가 좋지 않지만 고대 로마 시대에는 같은 뿌리였다. 그래서 두 나라에는 공통적으로 고대 로마 시대의 유적이 많다. 튀르키예는 나라 자체가 거대한 박물관이자 세계 문명의 용광로다. 로마 유적은 로마보다도 터키에 더 많이 남아있고 '그리스 문명'이 발생하고 꽃피운 지역도 대부분 튀르키예에 속해 있다. 필자가 '유럽 여행은 튀르키예부터'라는 지론을 가지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아니톨리아 고유의 문화에 동로마와 비잔틴 문화, 오스만 제국의 유적까지 더해진 튀르키예는 매년 500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세계 6대 관광대국으로 성장했다.   튀르키예는 이스탄불과 카파도키아, 콘야, 안탈야, 파묵칼레, 에페소, 아이발륵 코스로 여행하면 제일 좋다. 여행길은 카파도키아에 이르러 감동하는 이들이 많다. 육중한 바위와 까마득한 협곡 아래로 형형색색의 수없이 많은 열기구가 두둥실 떠오르는 곳! 발아래 각양각색의 기암괴석이 끝도 없는 황야 속에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대표적인 곳은 파샤바. '요정의 굴뚝'이라 부르는 거대한 버섯 모양 바위들이 늘어서 있다.   첩첩이 쌓인 거대한 바위들이 가득한 이곳에서 카파도키아 초기 정착민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로마제국의 종교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이들은 응회암 바위를 동굴처럼 파고들어가 자신들만의 은신처를 만들어냈다. 끝없이 늘어선 기암괴석이 교회와 성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유네스코는 자연과 인간의 손길이 어우러진 이곳에 주목해 1985년 카파도키아 지역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또한 터키 여행의 핵심이 되는 이스탄불은 터키 그 자체를 상징하는 도시다. 이슬람 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톱카프 궁전부터 세계 최고, 최대 규모이자 비잔틴 양식을 대표하는 아야소피아 박물관, 오스만튀르크 고전기 건축의 진수라고 평가받는 블루 모스크, 로마시대 전차 경기장으로 사용됐던 히포드롬 광장, 4500개 상점이 자리한 실크로드의 종착지 그랜드 바자르, 336개 기둥이 받치고 있는 지하 저수지 등은 터키의 옛 영화를 여과없이 보여준다.   도시 전체가 눈에 덮인 듯 새하얀 파묵칼레는 석회층은 세계 자연유산, 유적들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다. 하얀 석회암 지대에 하늘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온천의 색이 대비돼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클레오파트라와 로마 황제들이 다녀갔던 파묵칼레 이곳저곳에 맨발로 발자국을 남기고, 온천물에 발을 담그는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파묵칼레에서 남서쪽으로 세 시간 남짓 달리면 고대 도시 에페소다. 1만 년에 걸쳐 20여 개의 문명이 탄생한 화려한 역사의 현장은 아직도 영광을 간직한 채 그 위엄을 자랑한다. 2만 5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 화려한 건축미를 자랑하는 셀수스 도서관, 여신 테티스와 메두사의 부조가 새겨진 하드리아누스 신전 등 찬란한 인류의 유산을 두 눈으로 마주할 수 있다.   자연을, 유적을 벗 삼아 튀르키예에 머무는 것만으로 찬란한 인류의 신비를 조금은 깨우치는 기분이다. 박평식 / US아주투어 대표·동아대 겸임교수투어멘토 박평식의 여행 이야기 박물관 세계 아야소피아 박물관 세계 문명 세계 최고

2023-07-13

"인류 문명 발원지는 동아시아"

최용완(84) 글샘터 명예 회장이 인류의 문화, 문명이 우리 민족에서 시작돼 세계 각지로 확산했다는 내용의 영문 장편 에세이 ‘Civilization Begins in East Asia(문명은 동아시아에서 시작됐다)’를 최근 출간했다.   영국 런던의 오스틴 매컬리 퍼블리셔스가 출판한 이 책은 그가 3년 전 펴낸 ‘동아시어는 인류 문명·문화의 어머니(도서출판 천산)’의 영역본이다. 최씨는 “천산 출판사 측의 의견에 따라 동아시아가 아닌, 동아시어라고 표기했다”고 설명했다.   최씨는 이 책에서 약 5만 년 전 구석기인들이 한반도에 정착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북상한 농경민이 만주 지역에서 유목 생활에 적응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북한과 만주 지역의 석탄을 이용, 금속 도구와 무기를 생산하며 일군 홍산문화권이 이후 황하 문명으로 이어지고 바닷길을 따라 갠지스, 인더스 문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최씨는 이런 주장의 근거로 전 세계 고인돌 약 6만 기 중 절반을 차지하는 고인돌이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에 밀집돼 있으며,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 고인돌이 분포한다는 점을 들었다. 고창, 화순, 강화 지역의 고인돌 유적은 지난 2000년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최씨는 “인류 문명이 아프리카에서 유럽을 거쳐 아시아로 왔다는 것은 백인 입장의 역사관”이라며 “세계를 지배한 인류 문명은 한반도에서 서진, 유럽과 미국을 거쳐 가까운 미래에 다시 동아시아로 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울대 건축학과를 나온 최씨는 1961년 숭례문 중수 공사 당시 도면 책임자로 활동한 것을 계기로 한국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최씨는 “1964년부터 많은 이와 대화하며 한국 역사에 관한 책을 써 세계에 널리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60년 만에 뜻을 이뤘다”고 말했다.   최씨의 책은 반스앤노블, 아마존 등에서 구입할 수 있다. 글·사진=임상환 기자동아시아 발원지 인류 문명 문화 문명 세계 고인돌

2023-06-01

[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외계인

오래 전에 ET라는 영화가 있었다. 비록 지어낸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감동과 꿈을 준 영화였다. 그런데 정말로 이 우주에 인류 말고 또 문명이 있을까? 그 정답은 당연히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 둘이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외계 문명이 존재한다. 그런데 왜 여태까지 단 한 번의 조우가 없었을까?     그 이유는 우주의 규모에 있다. 우주는 우리 기준으로 무한하다. 현대 물리학은 빛보다 빠른 것은 없다고 정의한다. 그런 빛의 속도로도 수천 년, 수만 년, 심지어는 수억 년을 가야 하는 데 문제가 있다.     만약 우리의 과학기술 수준이 그 장벽을 넘을 수 없어서 그렇다면 상대방의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로서라도 어떻게든 연락이라도 닿아야 하는데 우리가 사는 우주의 규모로 미루어 한 문명이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의 기간을 고려하면 두 문명 간의 교류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서로 너무 멀어서 그렇다.   그렇다면 만날 수는, 연락할 수는 없더라도 어딘가 외계인이 있기나 할까? 당연히 있다. 어떻게 생겼을까? 알 수 없다. 만약 우주 어딘가에 또 문명이 있다면 그들과 우리는 다른 물리학 체계에서 완전히 틀린 생명 현상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은하수 은하의 한쪽 귀퉁이에 있는 태양이란 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태양에서 나오는 빛과 열을 기반으로 생존, 번성하는 중이다. 그러니 우리 은하 안에서라도 다른 별의 주위를 공전하는 행성이나, 그 행성 주위를 도는 위성에 생명체가 있다면 그들은 분명 우리와 확연히 다른 에너지를 바탕으로 문명을 일궈나갔을 것이다. 태양계 밖이니 당연히 물리학의 근본이 다를 것이고 우리와 전혀 다른 생명 현상을 보일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 은하를 벗어나서 빛의 속도로 250만 년을 가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안드로메다 은하가 있는데 그 외계 은하 속에 존재하는 별은 무려 1조 개가 넘는다. 그렇게 많은 태양이 있다면 엄청나게 많은 문명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주에는 그런 은하가 수천억 개나 존재한다. 그래서 이 글 처음에 무한이라는 말을 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무수한 별들이 보인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지면 우리 눈에 들어오는 하늘은 전체 우주의 아주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그 주위에, 그리고 그 너머에 또 엄청난 세상이 있다. 태평양과 그 속에 사는 플랑크톤 관계의 비교조차도 터무니없이 못 미칠 따름이다. 이 우주의 크기는 지금 여러분이 마음속으로 상상하는 숫자에 수천억을 곱한 값보다 또 수천억 배나 크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천문학적인 숫자조차 전혀 의미가 없는 상상을 초월한 공간이다.     우리 인간을 포함해서 지구상의 모든 것은 우주에서 왔다. 태고부터 우리 인류가 하늘을 바라보고 동경하며 살았던 이유는 바로 귀소성 때문이다. 밤하늘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은 우리 모두 시작한 곳이고 결국 돌아갈 곳이다.     우주 전체를 보면 우리처럼 하늘을 쳐다보며 어딘가 또 다른 생명체가 살 것이라고 상상하며 서로 만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외계 생명체가 있을까? 있다면 어떻게 생겼을까? 그런 어린아이 같은 질문은 다른 행성에 사는 외계 생명체도 똑같이 하는 생각일 것이다.     결국, 그들과 우리는 결코 만날 수도, 연락할 수도 없는 서로가 서로에게 외계인이다. (작가)  박종진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외계인 외계 생명체 외계 문명 외계 은하

2023-01-06

[문화산책] 편해지면 정말 행복해질까?

눈부시게 발전하는 첨단과학과 기계 덕에 우리 인간의 삶은 크게 달라졌다. 근본적 변환도 여러 번 경험했다. 우리는 그것을 문명, 발전, 진보 등의 낱말로 찬양한다. 하지만 그것이 꼭 좋은 것인지, 사람다운 것인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찰리 채플린은 핵심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기계는 우리를 풍족하게 만들었지만 더 많은 것을 갈망하게 하였고, 지식은 우리를 냉소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차갑고 불친절하게 말입니다.”   그동안 발전을 거듭한 기계문명이라는 것의 속내를 살펴보면, 결국은 땀 흘리는 힘든 노동을 줄이고 편해지려는 노력들이었다. 다시 말해, 되도록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고 애쓴 것이 문명의 핵심인 것이다.     마차, 자동차, 비행기, 전화기, 컴퓨터, 기중기, 경운기, 트랙터,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 전기밥솥, 세척기, 냉장고, 세탁기, 진공청소기 그리고 무인자동차, 인공지능 로봇에 이르기까지 계속 편해져만 왔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주겠다”는 달콤한 약속이 실현되고 ‘젖은 손이 애처로워 잡아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가 안타까운’ 슬픔도 없애주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편안해질지 알 수 없다. 계속 이런 식으로 가면, 모든 걸 기계가 다 해줄 테니 인간이 할 일은 아예 없어질 것 같다. 그러면 인간은 뭘 해야 할까? 무슨 재미로 살까? 산다는 건 무엇일까? 그렇게 편안하면 행복할까? 심심해서 미치지나 않을까? 운동 부족으로 뚱뚱이 천국이 되지 않을까? 유감스럽게도 이런 질문에 대한 시원한 대답은 아직 없는 것 같다.   게다가, 발전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보니 따라가지 못해 낙오하는 사람들도 생기게 된다. 대개 나이 많은 사람들이다. 나도 그런 딱한 중생 중의 하나인데 매정한 문명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확실한 신념과 의지로 첨단 문명을 거부하는 겁 없는 사람들도 있다. 문명의 이기라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고, 편리함 때문에 잃는 것도 많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면, 극작가 차범석(1924-2006) 선생의 ‘3무의 삶’은 좋은 예다. 여기서 3무(無)란 휴대전화, 자동차, 크레딧카드 세 가지를 말한다. 한국의 대표적 극작가요, 대한민국 예술원 원장까지 지내며 바쁘고 치열하게 사신 분이 현대인의 삶을 상징하는 세 가지를 거부하셨다니… 좀 불편하기는 했겠지만, 참 자유로우셨겠다는 생각이 든다. 편리함보다 자유를 택한 것이다. 과연 예술가답다.   ‘칼의 노래’ ‘남한산성’으로 유명한 소설가 김훈 씨는 고집스럽게 연필로 글을 쓴다. 원고지에다 지우개로 지워가며 또박또박 쓴다고 한다. 고(故) 최인호, 김홍신 같은 작가들도 컴퓨터를 쓰지 않고 고집스럽게 원고지에 손으로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슴에서 손까지의 거리를 기계로는 도저히 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개인적 이야기라서 죄송한데, 나는 글을 쓸 때 컴퓨터에 바로 치지 못하고, 종이에 연필로 초고를 쓰고 그걸 독수리 타법으로 컴퓨터에 옮기며 다듬는다.     편리하다는 것은 함정일 수 있다, 많은 경우에 그렇다. 지금 같은 기세로 휴대전화, 컴퓨터, 첨단 통신기기들이 발전하다 보면 머지않아 우리 인간들의 모습은 많이 쓰는 손가락만 굵고 길어져 ET처럼 변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으스스한 일이다.     꼭 짚어야 할 것은 감정의 문제다. 기계로는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인간과 같은 인공지능을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감정을 가진 로봇을 만드는 일이라고 한다. 다시 채플린의 말이다.   “우리는 너무 많이 생각하고, 너무 덜 느끼게 되었습니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행복 휴대전화 컴퓨터 문명 발전 무인자동차 인공지능

2022-08-04

[기고] 인간적으로 살아간다는 것

“인간적”이라는 말을 따져보자. 그러려면, 가장 밑바탕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먼저 해명해야 할 것이다. 누가 뭐래도 인간은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문명을 건설하는 존재이다. 인간을 이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다면, 누구든지 말해보기 바란다. 불가능할 것이다.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호모 파베르(homo faber),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등도 모두 문명을 건설하는 활동들의 특징을 잡아 규정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뭘 가지고 문명을 건설하는가? 생각이다. 우주선도 생각의 결과이고 칫솔도 생각의 결과이며 민주주의, 사회주의, 철학, 과학 어느 것도 생각의 결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없다. 문명을 건설하면서 사는 사람은 생각하고, 문명을 수입해서 사는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명적인 삶의 높낮이를 결정하는 잣대이다.     생각은 말이나 문자나 숫자나 음표로 표현되므로 문명은 말이나 문자나 숫자나 음표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문명을 읽는 높은 시선을 가진 사람은 말이나 문자나 음표나 숫자를 다루는 데 능숙하다. 이것들이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질서와 체계를 갖추면 우리는 그것을 지식이라고 한다.     여기서 또 지식의 생산자인가 수입자인가로 문명의 주도권을 갖느냐 못 갖느냐가 결정된다. 문명에서 주도권을 굳이 가지려고 할 필요가 있느냐고 다소 경박하게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덜 주체적이고, 덜 독립적이며, 덜 자유스러운 삶도 자기 삶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갈 필요가 있다. 문명이 말이나 문자나 숫자나 음표로 조직되어 있다면, 문명의 확실성이나 견고성은 무엇이 지켜주는가? 어차피 이것들은 신이 내려준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 그것을 지키자고 한 약속의 체계이므로, 약속을 지키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의무가 된다. 약속을 지키는 것은 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이유가 되는 정도로 절대적이다. 이처럼 문명의 견고성을 지켜주는 것은 신뢰이다. 신뢰는 문명의 주춧돌이다.     춘추전국 시대를 평정하고 소위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는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개혁을 성공시킴으로써 나라의 효율성을 극대화하여 국력을 키웠다. 천하를 통일할 힘을 가지게 한 근원적인 힘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상앙이란 재상이 출현하여 진나라 전체에 신뢰의 기풍을 회복한 것이었다.     진나라에게 패배하여 천하통일의 제물이 되었던 다른 나라들도 개혁을 시행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제도나 정책의 숨구멍이 신뢰임을 아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화폐제도, 정당제도, 교육제도, 법률제도, 의회제도 등등도 문명의 한 형태인 이상 모두 ‘신뢰 제도’이며 신뢰가 지켜져야만 유지될 수 있다. 신뢰가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문명은 길을 잃는다.   그렇다면, 신뢰를 지키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강제력은 또 무엇일까? 제도일까? 규정일까? 이익일까? 모두 제한적인 역할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외부적인 그것들이 아니라 내부적인 염치이다. 염치는 신뢰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어루만지는 매우 민감한 자각 능력이다. 수치심을 느끼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염치를 모르거나 부끄러움을 느끼는 민감성이 없으면, 제도나 법은 어느 정도의 세력만 갖추면 얼마든지 멋대로 이용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이미 많이 봤다. 진영의 이념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인간으로 살게 하는 힘이자 문명의 지킴이인 염치를 포기한다면, 격을 갖춘 인간으로 자신을 지켜내기 어렵다. 자신을 지키는 일에 실패하는 데 머물지 않고, 사회의 진보를 뒤틀고 막아 버린다.   왜 지식인들이 쉽게 부패하는가? 왜 창의적 기풍이 더딘가? 왜 정치가 줄곧 실패하는가? 왜 진영에 갇혀 꼼작 못하는가? 왜 천박해지고도 당당한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사전에 먼저 배웠어야 할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양심, 염치, 수치심 등과 같은 ‘인간적인 것’들이다.     이런 보물들이 담긴 상자가 바로 생각하는 능력이다. 인생 짧다. 잠시 멈춰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인간적으로 살다 가는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최진석 / 새말새몸짓 이사장기고 신뢰 제도 모두 문명 교육제도 법률제도

2022-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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