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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가슴에 묻은 친구

솔솔 부는 바람, 친구와 알라모아나 비치로 산책하러 나갔다. 초저녁부터 동쪽 하늘의 구름 사이를 비집고 커다란 금 쟁반이 떠오르고 있다. 서쪽 마루에 걸려 있는 석양빛에 곁들여 하늘과 땅 사이에 바닷물은 황혼빛으로 물들고 있다. 넘실거리는 바닷물 위에선 은과 금 자락의 댄스파티가 한창이다. 마주 보고 있는 와이키키 비치에 즐비하게 늘어선 빌딩들은 빛의 반사로 황금빛을 띠며 반짝이고 있다. 잠시 후면 사라질 휘황찬란한 풍경이다.     이 아름다운 저녁을 바라보며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 처음 하와이에 와 지상천국이라고 느껴져 이곳으로 초청하고 싶었던 사랑하는 친구이다. 50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 잊을 만도 하건만, 좋을 때나, 슬플 때나 생각나는 그리운 친구이다. 같이 웃고 울던 단짝이었던 친구의 얼굴이 달과 해 사이를 넘나들며, 어른거리는 파도를 타고 다가오고 있다. 항상 내 곁에 있을 것 같은, 손을 내밀면 잡힐 듯이 느껴지는, 어디에선가 나를 바라보고 있을 듯하여 하늘을 쳐다보기도 한다.     나보다 훨씬 키가 큰 그녀는 늘 나를 ‘꼬마야’라고 불렀다. 찬 바람이 불던 부산 기차역에서 홀로 나를 배웅하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아 눈앞이 흐려진다.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그 자체가 마음을 아리게 한다.   한국에서의 일이다. 친구는 시외에 살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이었다. 친구가 시외버스를 타고 집에 가려는데, 사람이 버스에 오르기도 전에 버스가 급히 출발하는 바람에 버스 바퀴에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했다. 친구는 석 달 동안 누워 있으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았다.     천주교를 믿는 그녀는 청순한 마음으로 성스러운 수녀가 되겠다는 꿈을 꾸며 수녀원에 들어갔다. 몹시도 추운 겨울이었다. 숙대 근처에 있는 수녀원이었다. 훈련받는 동안 방한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뜨거운 핫팩을 안고 자다가 다쳤던 다리에 화상을 입어 고생하기도 했다. 내가 방문했을 때 자색 저고리에 검은색 짧은 치마를 입은 그녀의 모습이 몹시도 추워 보였다. 그런데 몇 달 동안 훈련을 다 받고 수녀원을 나온 후 그녀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수녀원에서의 생활이 바깥세상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했다. 그녀는 수녀원을 나온 후 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그 후 결혼을 하고 귀여운 두 왕자를 낳았다. 첫아들을 안고 찍은 사진을 보내온 것이 마지막 사진이었다. 그녀는 ‘임신성 고혈압’으로 고생하였다고 한다. 둘째를 낳으면서 고혈압이 극도로 악화해 반신 마비까지 와서 친정에서 3개월 동안 치료를 받으면서 회복했지만 한쪽 손의 마비는 풀리지 않았다. 그녀는 육체적으로도 괴로웠고, 기대에 어긋난 남편에 대한 불만족 등으로 힘들어했다. 그래도 버티고 견디어야 하지 않았을까, 고물거리는 어린 것들 때문에라도 살아야 하지 않았을까?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 나의 생각이지만, 나는 그녀의 마음을 백번 이해하고 감싸주고 안아주고 싶다.   헤르만 헤세의 ‘사랑이나 지성보다도 더 귀하고 나를 행복하게 해 준 것은 우정이다’라는 말이 내 가슴을 두드리고 있다. 친구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는가. 자책해 보지만 곁에 있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핑계일 뿐이다. 그 당시 나도 미국생활에 적응하느라 무척이나 힘든 기간이었다.     가버린 친구를 잊어버리려, 지워버리려 노력하기보다는 그를 기억하고 그와 같이 지냈던 일들을 가슴에 담고 그리워하련다.   손녀가 뮤지컬 해밀턴에 나오는 노래를 부르는데 유독 내 귀에 남는 가사가 있다. ‘When my time is up, have I done enough?/Will they tell my story?/Will they tell your story?/Who tells your story?(내 시간이 다 되었을 때, 나는 충분히 이뤄낸 걸까?/사람들이 나의 이야기를 할까?/사람들이 너의 이야기를 할까?/누가 당신의 이야기를 전할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며 웃고 살기에도 부족한 인생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사람들은 미소를 잃고, 에너지를 소진하며 힘들게 살고 있다. 언젠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를 사랑했던 주위 사람들이 우리를 아름답게 기억되고 회자될 가치가 있는 삶이 되기를 바라는 작은 소원이다.   김평화 / 수필가문예 마당 가슴 친구 버스 바퀴 임신성 고혈압 your story

2024-05-16

[문예 마당] “99% 폐암입니다”

  내가 60대 중반이었던 2018년 8월 중순의 일이다. 그때 가슴이 답답하고 제대로 소화도 되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몸에 이상이 있음을 느꼈다. 주치의를 찾아가 증세를 설명하고 CT 촬영을 할 수 있게 리퍼(refer)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어디 봅시다” 하며 청진기를 여기저기 대 보고는 “에잇! 암이 아닙니다” 라며 리퍼를 해주지 않았다.   며칠 후, 주치의를 다시 찾아가 간절히 사정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며칠 고민한 끝에 위장내과를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예전과는 달리 의사의 허락이 있어야 CT 사진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의사에게 위내시경을 두 번 받은 적이 있었기에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흔쾌히 의뢰서를 발급해 주어 CT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촬영 후 2일이 지났을 때 주치의 사무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주치의 선생님이 만나자고 하니 빨리 오시라”는 연락을 받고 불안한 마음으로 클리닉에 갔다. 주치의는 거두절미하고 “CT 촬영 결과 99%, 폐암입니다”라고 말하며 “왼쪽 폐에 손바닥만 한 종양이 있다”는 것이었다. CT 담당자가 주치의에게 결과를 통보해 준 것이었다. 화가 치밀어 오른 나는 멱살잡이라도 하며 “그런데 왜 CT 촬영을 허락해 주지 않았냐?”고 따지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그는 “보험은 있느냐?” 고 묻더니 보험이 없다는 대답에 “어허! 큰일 났구먼, 집 팔아먹겠네”하는 것이었다. 걱정해 주는 것인지 비아냥거리는 것인지 모르게 중얼거렸다. 의사라면 환자에게 이런 투로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나는 “그렇다면 폐암 몇기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정확한 것은  큰 병원에 가서 조직 검사를 해 봐야 알 수 있다” 는 것이었다. 폐암 진단을 받고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였기 때문에 그저 덤덤할 뿐이었다.     ‘99% 폐암’이라는 진단은 ‘폐암이 아닐 가능성이 1%’라는 의미도 된다. 나는 그 1%에 희망을 걸기로 했다. 옛말에 병은 널리 알리라고 해지 않았는가?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병세를 알렸다. 그중 한 명이 모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자기도 그 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았는데 성공적이었고 수술비도 조금밖에 부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병원의 응급실을 거쳐 정밀검사를 했다. 그리고 수술 절차가 진행됐다. 조직검사 결과 다행히 폐암은 아니지만 양성 종양이 너무 빨리 자라 빨리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CT 사진을 찍은지 두 달 만에 수술을 하게 되었다. 집도의는 일본계 여의사였다. 오전 8시에 시작된 수술은 오후 4시가 다 되어서 성공적으로 끝났다. 수술 후 안 사실이지만 종양이 너무 커서 6번 갈비뼈 일부를 절단하고 제거할 수 있었단다. 중환자실에서 5일간 입원 치료를 받고 퇴원했다. 치료비는 10회 정도의 통원 치료를 포함하여 25만 달러가 넘게 청구되었지만 병원 자체 내 저소득층 도움센터를 활용해 내 월수입에 맞는 보험료를 부담하는 보험에 가입한 결과 의료비는 2000달러 정도만 지불했다.     회복 후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위장내과 의사였다. 그에게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고 평생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겠다”고 고마워했더니 “의사로서 응당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겸손해했다.   수술 후 1년에 한 번씩 하는 CT 검사를 올해 여섯 번째로 받았다. 모든 게 정상이고 수술 부위도 잘 아물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할 뿐이다.   나는 주치의가 왜 의뢰서 발급을 거절했는지 그 이유를 지금도 알 수 없다. 단지 귀찮다는 이유에서였다면 그는 의사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임무에 소홀했던 것이다. 주치의 암이 아니라는 오진을 믿고 있다가 막상 암으로 발전했다면 어찌 되었을 것인가?     주치의는 환자의 건강을 위해 진찰, 검사, 진단 등 일련의 과정을 성실하게 수행해 환자의 건강 상태를 파악하고 필요에 따라 적절한 치료 방법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99%, 폐암’ 이라고 오진 한 그 의사를 더는 신뢰할 수 없어 나는 그를 떠났다. 그리고 지금까지 건강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이진용 / 수필가문예 마당 폐암 수필 폐암 진단 수술 부위도 수술 절차

2024-05-16

[독자 마당] 치매 예방

손가락 운동이 치매 예방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피아노 연주에 관심을 보이는 시니어가 많다. 하지만 치매는 손가락 때문에 생기는 질환이 아니다. 나이가 들면 인체 모든 기관의 기능이 떨어지고 뇌도 늙는다. 뇌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치매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손가락 운동이 왜 치매 예방에 효과가 있는 것일까? 손가락을 사용하는 일들을 생각해보면 거의 모두 눈과 뇌를 함께 사용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이든 사용하지 않으면 녹이 슬고 결국은 사용하지 못하게 되기 마련이다. 우리의 뇌도 마찬가지다. 뇌를 자극하는 손가락 사용이 치매 예방에 효과가 있는 이유다.     따라서 피아노 연주도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 피아노 연주는 손가락으로 건반만 두드리면 되는 것이 아니다. 악보도 봐야 하고 연주를 하며 노래도 부를 수 있다.     음악은 뇌를 많이 사용해야 하는 분야다. 따라서 피아노뿐만 아니라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것도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악기를 연주하려면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원한다고 단 기간에 누구나 악기 연주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손가락을 많이 사용할 수 있는 다른 것은 없을까? 악기 연주 외에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뜨개질도 뇌운동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호미를 들고 정원을 가꾸는 것도, 음식을 요리하는 것도 손을 사용하는 일들에 해당한다.     일상에서 잘 찾아보면 그렇게 많은 힘들이지 않고 손과 손가락을 사용해 뇌에 자극을 줄 수 있는 방법이 많이 있을 것이다. 글을 쓰는 것도 좋은 뇌운동이 될 수 있다. 치매가 불치병이라고 하지만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예방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서효원·LA독자 마당 치매 예방 치매 예방 손가락 사용 피아노 연주

2024-05-14

[문예 마당] 인순이 예찬

  요즘 왕년의 한국 최고 디바 4명이 결성한 ‘골든걸스’라는 그룹이 화제다. 그중 맏언니 격인 인순이는 67세로 70을 바라보고, 나머지 3명도 환갑이 눈앞이다. 하지만 이들의 에너지 넘치는 공연은 탄성을 불러일으킨다. 그 중심의 인순이가 특히 눈길을 끈다.         그래서인지 이곳저곳에서 인순이 인터뷰 내용이 많이 나온다. 얼마 전엔 한 TV프로그램에서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그녀는 가수로 성공한 지금까지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살고 있다고 했다. 그 인터뷰를 본 후 인순이에 대해 새로운 평가를 하게 됐다.     인순이는 한국인 어머니와 주한 미군이었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흑인인 아버지는 복무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인순이는 “10살쯤에 아버지가 미국으로 오라는 연락을 했다. 그런데 안 갔다. 왜냐하면, 미국에 아버지 가족이 있을 거고, 내가 가서 그 가정을 흔들기가 싫었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또 홀로 남게 될 어머니 걱정도 했다고 덧붙였다. 인순이는 “다름으로 인한 모진 시선을 받았던 딸을 매서운 바람에도 꽃이 필 수 있도록 끝까지 잘 지켜준 어머니,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잘 견뎌준 어머니께 무한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인순이는 남들보다 오랜 사춘기를 겪었다.  어머니는 어머니 나라가 있고 아버지는 아버지 나라가 있다.  그럼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라는 정체성 혼란으로 방황했다고 한다.  사춘기 시절 버스를 탔는데 짓궂은 남학생들이 외모를 놀리며 괴롭혔다. 그때 주위에서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남학생들이 놀리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결심하고 “그래 너희들 말이 맞다”고 당당하게 맞서니 그들이 할 말이 없는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고 한다.       과거 ‘신정아 게이트’로 한국 예술·문화계가 학력위조 사건으로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때 인순이 이름도 도마에 올랐다. 인순이는 서강대학교에서 자신의 히트곡인 ‘거위의 꿈’을 주제로 연 특별강연에서 ‘대한민국에서 혼혈아로 산다는 것, 혼혈가수로 살면서 어려웠던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강연 끝에 “가정 형편상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고 겨우 중학교 졸업장을 받았다”고 밝혔다.     얼마 전 기자로부터 학력을 묻는 전화가 왔길래 날 비껴갔으면 했던 것이 결국 왔구나 생각했단다. 하지만 솔직하게 다 말하고 웃는 사진 넣어주고, 욕을 먹을지언정 동정받지 않게 써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어 “사람들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알고 있어 잠시 나도 착각하고 살아왔던 것 같다”며 그동안 잘못 기재된 나의 학력을 고칠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야 밝히게 됐다고 덧붙였다. 인순이는 한국 최고의 가수이다. 그녀에게 학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순이는 도전의 아이콘이다.  2015년 메르스 사태 때 가수들은 무대를 잃어 설 자리가 없었다. 자신에게 동기부여를 하려고 보디빌딩 대회에 도전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거울 앞에 접착 메모지를 수십장 붙였다. ‘이러다가 잊힌다’ ‘나를 컨트롤 하고 싶다’ ‘나를 이기고 싶다’ 등 3개월 동안 지독하게 운동하고 대회에 나갔다. 등수는 처음부터 안중에 없었다. 막상 무대에 올라가기 20분 전에는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것도 내 인생, 이미 피할 수 없는 일이면 즐겨야 한다고 생각하며 무대에 올라섰다고 한다. 지금 여기서 포기하면 난 아무것도 못 한다. 한발 내딛지 않으면 완주도 없다. 차라리 즐기자고 결심했다. 아버지 피부를 닮아 남이 10번 선텐 할 때 3번 아버지 체형을 닮아 궁둥이가 튀어나와 오리 궁둥이라 놀림당하여 감추려 노력했는데 그게 보디빌딩에서는 힘 안 들이고 애플힙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인순이는 2013년 강원도 홍천군에 다문화 대안학교인 해밀학교를 설립해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해밀의 뜻은 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이란 순 우리말이다. 여태껏은 자신을 지키고 세우는데도 힘들었지만 이제는 누구에게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어 줄 형편이 되었다. 그 아픔을 알기에 상처받고 소외된 아이들이 겪을 아픔을 빨리 털어내도록 그들 옆에 있어 줘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해밀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그녀는 동화책을 쓰고 싶다고 했다. 단점인 줄 알았던 자신의 다름이 장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려서 겪었던 일들을 소재로 ‘미운 오리 새끼’ 같은 동화책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사실 나는 인순이를 30여년 전 가까이서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노래하는 무대가 아니라 모 대학 대학원 최고위 과정에서다. 그녀는 남편과 같은 과정이었고 졸업 파티를 할 때 나도 가족으로 참석했었다. 첫인상은 수더분하고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가 입지전적 여성임을 알게 됐다. 편모슬하에서 혼혈아로 자라며 정체성 혼란과 갈등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꿈을 키워 나갔고, 차별과 멸시를 극복하고 가수로 성공한 용기와 노력, 아버지의 부름을 거부하고 어머니를 택한 현명한 결단, 자기의 약점을 감추지 않는 솔직함, 남을 의식하지 않는 도전정신, 대안학교를 세우는 등 사회를 위한 공헌 등….       ‘난 꿈이 있었죠’라는 노랫말로 시작되는 ‘거위의 꿈’이라는 그녀의 히트곡은  본인의  삶을 노래로 표현한 듯하다. 인순이는 학식 높은 사람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 못지않은 VVIP 라는 생각이 든다. ‘골든걸스’에 이어 인순이의 또 다른 도전을 기대해 본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 마당 인순 예찬 한국인 어머니 아버지 나라 아버지 가족

2024-05-09

[독자 마당] 맏며느리의 무게

스물네 살에 맏며느리이자 교회 사모가 되었다. 보릿고개가 심했던 1960년대 초 읍소재지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생활비는 겨우 두 식구 입에 풀칠할 정도였는데 고등학생, 중학생, 초등학생인 3명의 시동생·시누이와  함께 살았다. 결혼하면 동생들을 본댁으로 보낼 줄 알았는데 남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인 막내를 집에 보내면 매일 장에 나가시는 부모님이 어려우니 나보고 키우라고 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셋을 떠맡게 되었다. 험난한 시집살이의 시작이었다. 다섯 식구 밥 먹기도 힘든데 학비 문제는 나에겐 태산 같았다.     쌀값을 받으면 싼 보리를 샀다. 쌀은 한 주먹만큼만 넣어 도시락을 쌌고 나는 늘 눌은밥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그래도 배가 고프면 고구마 한 개 구워 먹고 물 한잔 마시는 것이 식사의 전부였다. 그 와중에 아이를 셋이나 낳았다. 내 입엔 사과 한 쪽 들어오지 않았으니 내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시동생·시누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전문직을 가졌다. 그리고 모두 미국으로 이민 왔다. 전문직 종사자였던 시동생들과 시누이는 여유롭게 살았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 넷에 시모까지 모시고 남편 수입으로 여유로움이란 있을 수 없었다. 3베드룸 아파트에서  일곱 식구가 복닥거리며 살았다. 그렇게 5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스라엘 백성이 40여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직접 먹여 살렸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매일 그 날 먹을 것만 걷으라”고 하셨다. 그런데도 욕심이 많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걷었지만 썩어버렸다.   무엇이 행복인가? 많은 재물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하루 24시간, 공기, 햇볕 등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것들을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셨다. 뒤돌아보니 행복하게 잘 살았다. 재물이 많은 사람도 남는 것이 없었다. 노영자·풋힐랜치독자 마당 맏며느리 무게 고등학생 중학생 남편 수입 3베드룸 아파트

2024-05-07

[문예 마당] 1.5도 마지노선

  매주 토요일 새벽이면 바다에 나갈 채비를 서두른다. 물 한잔을 마시고 사과와 바나나를 챙긴다. 두어 시간 모래 위를 걸어 다니려면 땅에서 걷는 것 보다 두 배의 힘이 필요하다. 한 주가 다르게 배구공이 파도에 휩쓸려 나갈 우려가 들 만큼, 모래사장의 폭이 아주 좁아지고 있다.   그래선가? 공놀이하는 그룹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도 해수면 높낮이에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을까 싶다. 바닷가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가 하면 운동을 못 하게 될까 봐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여전히 걷고 뛰면서 젊음의 기량을 뽐내는 것은 원초적인 특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는 이 특권이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다. 청지기의 특권을 남용했고 돌보는 마음을 잃어버린 탓이 아닌가 한다.   해수면 상승이 빈말이 아니다. 모래사장 가운데에 놓여있던 쓰레기통들이 파도에 휩쓸려 나가는 일들이 빈번해져 아예 걷어가 버렸다. 배구장 네트에 가까이 넘어들어온 바닷물이 저러다가 때가 되면 빠져나가겠지 하는 느긋함 또한 사람들의 마음인 것 같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그런데 빠져나갈 기미가 없이 점점 쓰레기통이 줄어들며 나머지는 해변 내려오는 입구 쪽으로 옮겨놔 버렸다. 주워 모은 쓰레기가 무거워지면 한 블록 이상을 걸어가서 버려야 한다. 크고 튼튼한 바스켓을 사용하는 것도 봉지보다는 무겁지만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편리함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어느 누가 귀찮은 짓을 자청하겠는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쓰레기를 줍기 위해 일주에 한 날은 새벽잠을 설치며 청소부 여자를 따라 운전을 해주는 한 남자는 해수면 범람으로 모래사장 폭이 좁아져 가는 현실을, 그윽한 눈빛으로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바로 저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거든. 바다야~ 바다야~ 빨리빨리 덮어라~.” 헥, 무슨 심보람 “운동하고 산책하는 저 사람들은 어떡하라고.” “어떡하긴 인간들이 바다에 가까이 해봐야 쓰레기밖에 더 버려? 먼발치에서 내려다보는 게 바다를 위해서 더 좋은 거야.” “내 할 일이 없어지는 데 좋긴 뭐가 좋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가 이렇게 따라다니는 거 좋아서 하는 줄 알아? 남의 쓰레기 치우고 다니느라 강산이 두 번 변했어.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계산 좀 하고나 살지.”   해수면 상승을 보고 쾌재를 부르는 그 회심의 미소에는 이유가 있다. 바닷물이 모래밭을 덮으면 여자는 청소부 노릇을 그만둘 것이고 남자는 제대로 새벽잠을 자게 된다. 남자의 각본이 임박해진 현실을 예고하듯 기후 학자들도 2050년쯤이면 캘리포니아 반경 1200마일이 바닷물에 잠길 거라는 예상과 사막화를 경고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에서도 기후난민 대이동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예상이 그냥 기우로 끝나기를 숨죽여 기다리는 일밖에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작은 일들뿐이다. 그야말로 쓰레기를 주우며 작은 일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이루어질 수 있어서 행복을 누리는 것도 좋겠지만 자기만족과 행복감에 담긴 의미가 다르다.   때로는 만족스럽지 않아도 행복해질 수가 있다. 조건이 붙는 행복은 자기만족을 위해 원하는 것을 구하고 채우는 과정을 감수해야 한다.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 될 때가 있는데 기후를 상승시키고 생태계를 파괴하며 온실효과를 가중해 지구 공동체를 희생양으로 삼아 자기만족을 꾀하는 행복은 행복이 아니다. 누구나가 이것을 성찰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좋은 일로 받아들였으면 하는 소망이다.   나는 나에게 주워진 특권을 많이 포기했다. 아니, 지구와 자연에 반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지구와 자연이 치유될 때 우리의 후손들 또한 고통을 겪지 않고 안전한 환경 속에서 그들의 삶을 지속시키도록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조건이 붙을 때 그것이 진정한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자기만족에 갇혀있게 되면 특권 의식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이기심의 고질병을 앓게 된다. 지구 공동체가 피폐해지지 않도록 삶의 도덕적인 측면을 고려할 수 있는 자비심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마음을 지켜내지 못하면 우리의 삶과 지구는 더 많은 고통을 겪게 된다. 남태평양의 가난한 섬나라들은 해수면 상승 때문에 섬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주어진 특권을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서 쓰는 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시대의 요청에 귀 막고 살기에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1. 5도의 마지노선을 꼭 붙잡아 두려면 자기만족을 반납하는 용기와 측은지심이 최선일 것이다. 최경애 / 수필가문예 마당 마지노선 수필 지구 공동체 특권 의식 기후난민 대이동

2024-05-02

[독자 마당] 색소폰 연주와 건강

최근 노후의 취미 활동으로 악기를 배우려는 시니어들이 늘고 있다. 악기를 배우는 것은 100세 시대를 사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악기 연주는 취미 활동은 물론 건강 유지에도 도움이 되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색소폰도 많은 시니어가 취미로 배우고 싶어하고 또 관심을 가진 악기다. 내 경험상 색소폰을 연주하다 보면 하루의 스트레스가 모두 해소되는 느낌이다.  또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 만나 함께 연주하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외로움과 우울함도 사라진다. 이 밖에도 연습을 위해 악보를 익히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지 능력이 향상되고 집중력도 생겨 치매 예방에도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색소폰은 연주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폐 기능 향상에 좋다. 색소폰을 연주하려면 복식 호흡을 해야 하고 장시간 고른 호흡을 하다 보면 폐활량이 늘어난다. 폐활량이 좋아지면  폐 기능 향상의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런 색소폰을 배우고 싶다면 먼저 색소폰의 종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본인에게 맞는 색소폰의 선택이 가능하고 흥미도 더 생기기 때문이다.                 색소폰은 크게 소프라노,알토,테너 등 3가지 종류가 있다. 소프라노 섹소폰은 높고 감미로운 소리를 내고, 알토는 중간 및 고음 연주가 가능하다. 그리고 테너 색소폰은 중저음의 호소력 있는 소리를 낸다.         색소폰은 누구나 배울 수 있는 악기다. 주변에 찾아보면 무료 혹은 저렴한 가격에 배울 수 있는 강좌도 있다. 은퇴 후 취미 생활을 위해 악기를 배우고 싶다면 색소폰만큼 좋은 악기도 없다고 생각하다. 색소폰을 배워 취미생활도 하고 개인의 건강관리도 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멋진 색소포니스트가 돼보자.  리처드 정독자 마당 색소폰 연주 색소폰 연주 경험상 색소폰 테너 색소폰

2024-04-30

[문예 마당] 4·19혁명과 어머니

이 우울은 언제부터 스며들었을까. 바닷바람에 소리 없이 흘러가는 산안개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나와 함께 한 지 꽤 오래되었다. 산안개처럼 가기도 하고, 때로는 갔다가 다시 오기도 한다. 6·25 전쟁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4월을 돌고 돌아 우리 형제들을 치마폭에 안으셨던 어머니 생각에 우울한가 보다. 아니, 어쩌면 이십여 년 전, 오피스 근방 길거리에서 살다가 우리 집으로 입양되어 살았던 두 마리 고양이와 친구도, 배필도 없이 그리피스 공원에서 십여 년을 맴돌던 외톨이 산사자 P-22의 외롭고 아팠던 삶과 죽음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사람도 죽는데, 마음 쓰지 말거라’ 하실 것이다.     숱한 일을 겪으셨던 어머니는 4월이 되면 다시 이생을 방문하신다. 나는 학생들이 주동이 되었던 데모가 정권을 뒤엎을 수 있었던 ‘4·19 혁명’의 정치적 관념과 멀리 있었다. 그저 쫓기는 흑백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이들을 뒤쫓는 경찰들, 희뿌연 최루탄 연기가 기억 속에 멈추어 있을 뿐이다. 범벅의 카오스 가운데 엄마가 있고, 엄마는 엄마의 특수했던 그 날의 동선(動線)과 함께 되돌아온다.   엄마의 동선은 이랬다. ‘4·19 혁명’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지 두어 달이 지났을 때 터졌다. 정치인들의 부패를 규탄하는 데모가 혁명 이전부터 거의 매일 광화문을 중심으로 있었는데, 밥상머리에서 주워듣던 신문보도에 의하면 데모는 나날이 격앙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꽤 많은 초, 중고교 캠퍼스가 사대문 안에, 주로 광화문을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 중에는 큰 조카와 내가 각각 다른 여자 중학교에, 작은 오빠는 근처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산재한 학교들과 학생들에게 경계를 이루지 않는 매운 최루탄 연기는 아비규환의 전쟁 아닌 전쟁터를 넓히고 있었다. 계엄령 선포로 학생들은 즉시 퇴교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날, 엄마는 나를 데리러 오지 않으시고 조카의 학교로 향하셨다고 한다. 6·25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은 조카는 자기 엄마와 분가해서 다른 곳에 살고 있었다. 그 애는 나보다 한 학년이 위였다. 나는 혼자 걸어서 집에 갔다.     그랬던 4월은 내 기억에 회색과 검은색으로 희미하게 채색되어 남아있다. TS 엘리엇(1888-1965)은 ‘황무지’라는 무려 434행으로 구성된 시에서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시작한다. 이 부분은 인기가 많다. 시 ‘황무지’는 나에게는 철학 논문 같기도 하다. 그의 개인적 삶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나에게는 난해하고 지루한 글이다. 엘리엇도 4월에 전사한 친구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을 시로 쓴 것이었고, 죽음이라는 자연의 섭리가 끝이 아니라 부활의 시작이라는 희망을 준다. 어디 4월만 잔인하랴. 어디 죽음만 있으랴.   뮤지컬 ‘캣츠’로 많은 이에게 친근한 엘리엇은 미국 출생이었지만 영국에 귀화했다. 하버드 대학에서 학사, 석사학위를 받았고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도 재학한 적이 있었다. 그에게 영국은 편안한 곳이었나 보다. 시, 희곡, 소설 등 다작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였던 그는 평론가이며 출판가이기도 했다. 그의 시 ‘황무지’의 서두가, 월트 휘트먼과 제프리 차우서의 시와 많이 닮았다는 혹평도 있다. 그 외에도 기독교, 인도 철학, 로마나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내용으로 짜깁기도 많이 했다고 알려져 있다.     ‘4·19 학생운동’ 계엄령이 선포되고, 서울 안에 있는 모든 학교가 강제로 폐교되었을 때, 나를 뒷 전으로 하셨던 어머니, 쌔~애 한 최루탄 연기 속에서 서둘러 조카를 찾아 그 애의 학교로 향하셨던 어머니가 카오스의 광화문 광장 중심에 있는 나를 염두에 두지 않으셨을 리는 없다. 그저 내가 우선순위가 아니었을 뿐이었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10년이 지났던 그때에도 조카의 아버지를 잃어서 생겼던, 아물기를 거절하고 있던 생채기가 세상을 향해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어제는 칼라바사스에 있는 킹 질렛 커뮤니티 파크 센터에서 하는 소품 전시회에 들렸다. 소박하고 유명세에 관심이 없는 화가들의 작품은 평화로웠다. 전시 센터에서 P-22의 얼굴이 새겨진 9″x 12″x 0.5″ 크기의 우드버닝(pyrography) 작품을 발견했다. 녀석의 약간은 두려우면서도 강렬했던 눈빛이 좀 온순하게 표현되기는 했어도, 마음에 들었다. 녀석은 P-22라는 이름표를 달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사람도 죽는데, 마음 쓰지 말거라’ 하시던 어머니도 P-22를 아끼실 것 같다.   류 모니카 / 수필가문예 마당 어머니 혁명 어머니 생각 여자 중학교 혁명 이전

2024-04-25

[문예 마당] 길을 잃은 사람들

  며칠 전 나는 연로하고 노쇠한 어른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한때는 피 끓는 청춘의 강을 건너느라 힘들고 아팠던 사연들을 저마다의 가슴에 훈장으로 새긴 채,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길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 어쩌면 저들의 모습이야말로 가장 진솔한 나의 미래가 아닐까 하는 예감에 사로잡혀 입술을 뚫고 나오는 노래는 자꾸만 속으로 잦아들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스물을 꿈꾸었다. 스물이 되었을 때는 삼십을 꿈꾸었고, 삼십일 때는 사십을 꿈꾸었다. 그러나 오십일 때는 육십을 생각하지 않았고, 육십일 때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상에 그 누구인들 나이 들어감을 꿈으로 생각하겠는가.   두 번째 노래가 끝나도록 그림 같이 앉아만 있던 어른들은 손뼉을 유도하는 몸짓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늙음과 질병이 그들의 즐거움을 느끼는 기관까지 잠식했는지 얼굴까지 무표정이다. 아파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몸이 고단하고 힘이 들 때는 그 힘들고 아픈 것에 에너지가 다하여 다른 것에는 미처 신경 쓸 겨를조차 없이 만사가 귀찮다는 것을.   4곡을 마치고 잠시 쉬었다 다시 4곡의 노래를 부를 때는 분위기가 훨씬 나아져 몇몇 어른들은 손뼉을 치면서 장단을 맞춰 주셔서 오히려 우리가 위안을 받는 기분이었다. 돌아오는 길가 망고나무에는 망고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아보카도도 이쁘고, 반질반질하게 열려 있었다. 처음치고는 별 무리 없이 공연을 마친 우리는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며 구불구불 산길을 돌아 나오는데 나는 무언가 소중한 것을 놓고 나온 것 같은 기분에 빠져 자꾸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넷째 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즈음 나는 한국에서 걸려오는 전화에 무척 예민해져 있었는데 이유는 언니 오빠가 다 칠팔십대 고령이라 불길한 소식을 접하게 될까 봐 지레 불안한 탓이다. 전화 내용을 요약하면 우리 형제의 웃 세대로는 유일하게 생존해 계신 친척분을 어제 모 요양 병원으로 모셨다는 것이다. 구십을 넘기신 분은 안 가겠다고 떼를 쓰셨다는데 별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일주일 정도는 전화와 방문을 자제해야지만 요양원에서의 생활에 적응할 것이니, 그 일주일 동안은 전화도 방문도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 바로 이것이었구나. 양로원을 떠나면서 무언가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했던 이유가….   나는 평생 그 어른을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밖에는 보지 못하고 살았지만,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단절의 고통과 상실의 아픔을 겪고 계실 그분을 생각하니 가슴 한쪽에 무거운 쇳덩이를 얹어 놓은 듯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4살 때 제 삼촌을 따라 교회 식구들과 함께 캠핑하러 간 적이 있다. 엄마와 떨어져 처음으로 밤을 보내게 되는 일이라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당시 시동생이 그 교회 전도사였기에 괜찮으려니 하고 보냈다. 그러나 밤 열두 시가 넘어 아이는 반실신 상태로 집으로 돌아왔다. 많이 보채고 힘들게 했느냐고 묻는 나에게 담당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보채지도 않고 힘들게도 안 했어요. 밤에 잘 자나 한 바퀴를 돌아보는데 아이가 얼마나 소리도 없이 많이 울었는지 베개가 다 흥건히 젖어 있더라는 것이다. 친구들과 노는 재미에 빠져,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 맞이했던 그 밤의 익숙하지 않은 방과, 침대와 엄마 없음은, 네 살배기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견딜 수 없는 두려움과 혼란과 설움이었을 것이다. 아마 지금의 그 어른 심정 또한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미루어 짐작해본다.   양로원이나 요양 병원은 매일 의사나 간호사들이 상주해 있고 간호조무사들이 정성스럽게 환자들의 일 거수 일투족을 거들어 주니 연세가 많거나 몸이 불편한 어른들께는 더없이 안락한 곳일 수 있다. 오늘 내가 다녀온 곳만 하더라도 태평양을 배경으로 세워진 최상의 시설과 서비스를 자랑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환경에 즐거운 곳이어도 연습 없이는 낯선 곳에 불과하다. 더구나 수십 년 동안 친숙했던 것들과의 갑작스러운 생이별은 심신이 허약한 노인들께 치명적인 아픔과 슬픔이 될 것이다.   자식이 태어나 서너 살이 되면 유아원이나 유치원에 보내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게 하며 공동생활에 적응하도록 훈련을 시키는 것처럼 노인들에게도 시설로 들어가기 전 어떤 준비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사는 인생에서 나 또한 앞일을 어찌 장담할 수 있을까만, 바라건대, 나부터라도 늙고 병들어 마지막으로 가는 곳이라기보다는 살아온 생을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곳이라는 사고를 마음에 새겨 좀 더 단단한 노년을 준비해 보리라 다짐을 한다.   매달 한 번의 양로원 방문은 즐거움보다는 슬픔이 앞서는 일이지만 슬픔의 돌이 슬픔에 부대껴 저 스스로 둥그러질 때, 나 또한 그 무게에서 조금씩 놓여나 조만간 이곳으로 올 때 연습이 되어있으리라는 생각이다.     다음 달에 부를 노래의 악보를 손에 들고 잘 굴러지지 않는 혀로 팝송을 부른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뼉을 친다, 노래를 부른다, 모두가 덩실덩실 춤을 춘다. 그래, 지금 저 어르신들은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길에 제대로 서 있는 것이리라. 고 옥 / 수필가문예 마당 수필 양로원 방문 어른 심정 전화 내용

2024-04-25

[독자 마당] 200번째 기고

본인이 가진 지식이나 능력을 활용해 필요한 것을 얻어가는 것이 삶의 과정이다. 그리고 우리는 삶에 필요한 정신적, 물질적 요소들을 얻기 위해 본인의 역량을 최대한 쏟아 붓는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각자의 가치관이 작용하게 된다.     필요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으면 찾아내거나 새로 만들어야 하고, 있어도 불편하거나 온전치 못하면 고치거나 채워서 완결시켜야 하는 경우도 있다. 삶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이 모든 과제는 각 개인이 해결해야 할 것이지만, 또한 사회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관심을 가져야 할 공동의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사회 공동체에서 개인의 삶은 다른 사람과도 연관을 맺고 있다. 따라서 구성원 모두 이해와 화합으로 최선의 방향을 찾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 필요한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 생각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표현 방식의 대표적인 것이 말과 글이기는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도 가능하다.  나는 그중에서 글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한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슈들에 대한 내 생각을 짧은 글로 정리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그렇게 중앙일보 오피니언면의 ‘독자 마당’ 코너에  글을 보내기 시작했고 올해로 벌써 12년째가 됐다. 그리고 이 글은 내가 200번째 보내는 것이다. 내 나름의 노력으로 쌓인 횟수다. 주변의 격려에 힘을 얻어, 틈틈이 써 온 것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매번 “이 글이 신문에 게재될만한 것인가”하는 조바심이 들었고 그런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세상의 모든 일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나의 글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윤천모·풀러턴독자 마당 사회 공동체 사회 구성원 중앙일보 오피니언면

2024-04-23

[문예 마당] 속삭임의 삶

  ‘거룩한 천사의 음성  부드럽게 속삭이는  앞날의 그 언약이/어두운 밤  지나고 폭풍우 개이면 동녘엔 광명의 햇빛이  눈부시게 비치고/     속삭이는 앞날의 보금자리  즐거움이  눈 앞에 어린다.’   멀고 먼 추억 속 무대에서 짐 리브스의  ‘희망의 속삭임’이 맑고 구수한 음성으로 들려 온다.  이 노래는 원래 셉티머스 위너가 1868년 에 발표한 곡이라고 한다.   늘 가족들에게 미소와 사랑을 나누어 주신 처형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다. 가족들은 처형의 90세 생일 축하 특별 이벤트로 임영웅의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를 합창하기로 했다. 나 역시 이 노래를 배우려 유튜브의 노래 교실을 통해 수십번 따라  불렀다. 열심히 노력하다 보니 이제는 제법 음을 잡을 수가 있게 됐다.     잠자리에 들면서도 흥얼거리며 잠을 청하고 가사를 생각한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주위의 모든 사람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또 얼마나 필요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날 믿고 따라준 사람들 고마워요. 행복합니다.’   고진감래라는 말도 있지만 인생이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소가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는 것처럼  늘 위기의 연속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다리 밑은 강물이요, 뒤로는 갈 수가 없고 어떤 고난이 있어도 넘어야 하는 항상 아슬아슬한 것이 우리의 삶 아닌가.     노년의 삶은 더 말할 것도 없이 건강이 가장 문제다. 나는 아내의 깊은 숨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다. 물론 모든 것을 그러려니 하고 살면 된다고 하지만 어디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몇 년간 계속한 투석이 너무 힘에 겨워 중지하고 한동안 주사와 약으로, 그리고 또 다른 치료법으로 몇 년을 견디어 왔다. 팔순이 넘어 병들고 부자연스러운 몸이 되다 보니 과거의 강인한 개척 정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누군가 도움을 받을만한 인연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씨앗은 흙을 만나야 싹이 트고  물고기는 물을 만나야 숨을 쉰다고 하였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아무리 왕년에 잘 나갔다 하여 큰소리를 쳐봐도 세상엔 독불장군이 없는 것 같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만나야  행복하고 주변을 살피면서 도움을 받기도 하고 베풀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정상이  아닐까.   우리 부부도 예외 없이 건강상의 이유로 그 기고만장하던 패기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던 중 딸이 애정 어린 목소리로 “엄마, 아빠 함께 살자”고 권유했다. 우리는 곰곰이 생각하고 궁리한 끝에 딸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하고 라스베이거스 레드락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나 역시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딸의 권유가 고맙기만 할 뿐이다.   팔순이 넘다보니  왜 이리  신체의 고장이 많은지. 청력이 약해지다 보니 아내와  주고받는 대화도 늘 반문이 따르게 되고 아내는 그것이 불만이다. 아내도 몸이 쇠약하다 보니 자연히 목소리가 잦아져 좋게 말해서 우리 부부는 속삭임의 대화가 계속된다.     최근 세계는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위기를 겪었다. 당시 비대면 접촉이 권유되면서 기업들의 재택근무 도입이 늘었다. 이렇게 도입된 재택근무는 팬데믹이 끝난 요즘도 더욱 확대되는 모습이다. 미래가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집도 한 사람은 아래층에서, 또 한 사람은 이층에서  재택 근무를 하고 있어 우리 부부는 업무에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 항상 조심한다. 그러다 보니  목소리가 작아진 이유도 있지만  늘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습관이 생겼다. 늘 조용조용 사랑을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대화한다. 속삭임의 삶을 사는 셈이다.     귀가 밝은 딸은 우리 부부의 대화 내용을 다 알아듣고도  모른척 빙그레  웃곤 한다. 가끔 “네 흉보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며 딸에게 농담처럼 말하기도 한다. “젊은 사람들은 저렇게 귀가  밝은데 우리  시니어들은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나의  속삭임의 삶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반드시 우리에게  거룩한 천사의 음성이 내 귀를 두드려, 어두운 밤이 지나고 광명의 햇빛이 눈 부시게 비칠 때, 아슬아슬한 인생의 외나무다리를 무사히 건널 수 있기를 기도할 뿐이다. ‘고마워요 행복합니다. 왜 이리 눈물이 나요.’ 오늘 밤도 콧노래를 부르며 잠을 청해 본다. 백인호 / 수필가문예 마당 수필 재택근무 도입 노래 교실 건강 문제

2024-04-18

[독자 마당] 면회 장소

나는 한국공군에서 3년을 근무하고 만기 제대했다. 지금의 김포공항은 과거 한국공군 제11 전투비행단이 주둔했던 곳이다. 다른 부대처럼 정문에서 가까운 곳에 면회실이 있었다. 군 복무 중인 병사와 민간인이 만나는 곳이다. 면회 오는 사람 중에는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애인도 있었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의 그리움을 나눌 수 있었다.     샌디에이고 인근에는 미국과 멕시코 국경이 있다. 양국을 오가는 차량과 사람들로 종일 붐비는 곳이다. 그러나 미국과 멕시코에 사는 사람 누구나 국경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는 없다. 서류미비자들은 출입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미국에 사는 서류미비자와 멕시코에 사는 가족이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국경 출입국 사무소 옆 담장은 철조망으로 되어 있다. 이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양국의 가족이 만나는 것이다. 다만 철조망 구멍은 겨우 손가락 하나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다. 이쪽에서 손가락을 넣으면 저쪽에서 만져보고, 저쪽에서 손가락을 넣으면 이쪽에서 만져보는 방법밖에 없다. 때로는 엄마가 갓난아기의 손가락을 잡아 철조망 구멍 사이로 넣으면 반대편에 있는 할머니,할아버지가 손주의 손가를 만져보는 식이다.      그런데 헤어진 가족의 손가락을 만지기는커녕 생사조차 알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한국 이산가족들이다. 한반도는 이제 분단 80년이 되어 간다. 그 긴 시간 이산가족들은 많은 고통을 겪었다. 연방의회도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이산가족들이 북한의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결의안을 추진하고 있다.     나는 왜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이 만날 수 없는지 지금도 의아하다. 휴전선 부근에 면회소를 하나 마련하거나 아니면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서라도 남북한 사람들이 만날 수 있게 하는 방법은 불가능한 것인가?   서효원·LA독자 마당 면회 시간 이산가족들 한인 이산가족들 철조망 구멍

202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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