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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독립운동가들…그 흔적을 찾아서

제79주년 광복절을 맞아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이곳 미국 땅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숨은 영웅들이 있었다. 무명의 독립운동가,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루스벨트대통령의 뉴욕 롱아일랜드 별장에서 생긴 일   1905년 8월 4일자 뉴욕타임스(NYT)는 이승만 박사의 루스벨트 대통령 방문기를 보도했다. 이때 이승만의 옆에는 숨은 독립 영웅, 윤병구 씨가 있었다.     1903년 하와이에 목사로 파견된 윤병구 씨는, 한인 대표로 1905년 7월 하와이에 잠시 들른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와 만나 루스벨트 대통령을 접견하기 위한 소개장을 받게 됐다. 이를 한국의 독립을 위한 중요한 계기라고 생각한 윤 씨는, 소개장을 받은 즉시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공부 중이었던 이승만을 찾아가 뉴욕 롱아일랜드 오이스터베이 별장에 머물던 루스벨트 대통령 방문 계획을 상의했다.     당시 NYT 기사에 따르면, 윤 씨와 이승만은 루스벨트 대통령과 사전에 약속도 없이 오이스터베이에 도착해 인근 호텔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이 호텔에 들어가 등록하는 데는 적지 않은 설명이 필요했다. 실랑이가 계속되자 기자들이 모여들었고, 윤 씨는 방문 목적을 미국 언론에 알릴 기회를 갖게 됐다.     그 결과 윤 씨는 호텔 대기실에서 장장 1시간에 걸쳐 한국의 어려운 실정을 설명하고, “나와 이승만은 자주독립을 갈구하는 모든 한인들을 대표해 루스벨트 대통령을 접견하러 왔다”고 전했다. 그는 외신 기자들에게 “한미간의 수호조약은 아직 유효하며, 따라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우리가 미국에 도움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우리가 미국 대통령과 국민들에게 원하는 것은 한국문제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NYT는 다음날인 8월 5일에도 〈대통령을 접견한 한인들(Koreans See the President)〉이라는 기사를 보도했는데, 이에 따르면 윤 씨와 이승만은 약 30분간 루스벨트를 접견하고 청원서를 제출했다.     윤 씨는 이후에도 ‘대한인국민회’의 지방외교원으로 임명돼 미국 여러 도시를 순회하며 한국의 상황을 언론에 소개했고,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자유대회에서 미국정부에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하는 청원서를 작성한 3인 중 1인이기도 했다. 그는 해방 직전인 1945년 4월 25일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평화회의에 이승만과 함께 한인대표로 참석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노력했다.     ◆1936년 일본영사관 앞에는 그가 있었다   1936년 8월 9일,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순간이 탄생했다. 독일의 베를린올림픽에서 한국의 손기정 선수가 올림픽신기록을 기록하며 우승을 차지한 것. 한국의 언론들은 이 역사적인 순간을 앞다퉈 보도했는데, 손기정 선수의 유니폼에 부착된 일장기를 삭제한 사진을 신문에 게재했다. 이에 일본당국은 두 신문을 강제로 폐간시켰고, 이에 분노한 뉴욕의 한인들은 일본영사관 앞에 나가 열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때 시위를 주도한 인물이 숨겨진 독립 영웅, 임창영 씨다. 뉴욕한인교회의 4대 담임목사였던 임창영 씨는 신문 폐간 소식을 듣고 뉴욕의 한인들을 이끌고 5애비뉴에 위치한 일본영사관 앞에서 항의시위를 했다. 이후 1937년 일본이 한국어 사용을 금지시키는 강경한 탄압정책을 쓰자, 또 한인들을 이끌고 일본영사관에 나가 “일본상품을 보이콧하자”며 시위를 벌였다. 이때 시위에는 5애비뉴의 교통을 1시간가량 차단시킬 정도로 많은 인원이 참가했고, 다수의 미국 시민들도 동화돼 함께 한국 독립을 위한 목소리를 냈다.     ◆대한민국의 확성기   1896년 워싱턴 한국공사관 직원으로 도미한 김헌식 씨는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한국이 일본에 외교권을 뺏기자, 미국에 주저앉아 맹렬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1910년 8월 26일 NYT는 그를 “105인 사건(1911년 일제가 항일세력에 대한 통제를 위해 데라우치총독 암살모의사건을 조작, 105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한 사건)에 대해 항의하는 서한을 미국 언론에 보내거나, 미국 국무장관에게 진정서를 자주 보내는 뉴욕의 대표적인 한인 인사”라고 소개했다. 이후 김 씨는 1917년 뉴욕에서 개최된 소약국동맹회 집행위원회 임원으로 선출돼 “일본의 한국 합병은 위헌이고, 윌슨 대통령의 약소국자결권 부여선언은 지켜져야 한다”는 결의문을 미국 국무부에 제출하는 등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확성기 역할을 했다.   글·사진=윤지혜 기자일본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그들 루스벨트 대통령 한국 독립

2024-08-15

“빛바랜 역사책에서 아버지의 항일운동 기록 발견”

제79주년 광복절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뉴욕 맨해튼 어퍼웨스트에 위치한 한 아파트. 이곳에는 1945년 8월 15일, 그날의 함성이 귀에 생생하다는 한 한인이 살고 있다. 바로 조선 왕실의 마지막 왕녀이자 의친왕의 딸인 이해경 씨다.   고종의 손녀이자 의친왕의 5녀로 태어난 이해경 씨에게 8월 15일은 유달리 특별하다.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은 날이기도 하지만, 아버지 의친왕이 세상을 떠나기 전날이기도 하고, 이복 오빠인 ‘이우’ 왕자의 장례식을 치른 날이기도 하기 때문. 이 씨는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자 폭탄에 피폭돼 사망한 이복 오빠의 장례를 운현궁에서 치르고 있는 도중 일본 천황이 광복 방송을 했다”며 “장사를 지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모든 국민이 길거리에서 외치던 만세 함성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고 전했다. 이후 해방 10주년을 맞은 1955년 8월 16일, 의친왕은 딸 이 씨의 곁에서 눈을 감았다.     한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아예 지워 버리려고 노력했을 정도로 아버지를 원망했다던 그는 어쩌다 의친왕의 명예회복 운동을 추진하게 됐을까. 마지막까지 일제에 굽히지 않았던 황실의 독립투사, 의친왕의 항일운동에 대해 해경왕녀에게 물었다.     ◆빛바랜 역사책에서 아버지의 항일운동 기록을 찾다   현재 살아있는 의친왕의 자녀 중 가장 연장자인 이해경 씨. 그가 아버지의 행적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 건 의친왕 서거 이후 오랜 시간이 흘러 컬럼비아대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부터다. 이 씨는 “궁의 법도 때문에 아버지에게 먼저 말을 걸 수도 없었고, 내게 아버지는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며 “술과 여자만 탐하던 무책임한 황자라는 평가를 많이 들어서,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컸다”고 전했다. 의친왕이 별세한 다음 해인 1956년 전쟁으로 혼란한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유학 온 이 씨는, 텍사스에서 성악 공부를 마친 뒤 생계를 위해 식당과 보육원에서 일하다가 1969년 뉴욕 컬럼비아대 한국학 도서관 사서로 취직했다. 사서로 일하며 아버지 의친왕의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자료를 많이 발굴했고, 은퇴 이후 아버지에 대한 왜곡된 평가를 바로잡기 위해 의친왕의 명예회복 운동을 추진했다.     ◆미국 유학길에서 시작된 김규식, 안창호와의 인연   1877년 고종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난 의친왕은 1899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버지니아주의 로아노크대학에 다녔다. 그곳에서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을 만나 친분을 쌓았다. 1902년에는 LA를 방문해 김규식을 통해 알게 된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미국에 있는 한인들을 위해 써달라”며 격려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비밀리에 독립운동 지원   귀국한 의친왕은 한일합방 이후 일본의 삼엄한 감시 속에 살았지만, 그 속에서도 비밀리에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해 이를 지원했다. 1909년 의친왕은 경남 거창에 한 달간 머물며 이를 장차 의병의 근거지로 삼으려고 일부 땅을 사들이다가 일본 헌병에게 탄로돼 호송되다시피 서울로 돌아갔다. 이후 1911년 손병희(3·1운동의 주역인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와 극비리에 만나 우이동 땅 3만 평을 매입하고 그곳에 봉황각을 세웠다. 이 봉황각에서 여러 사람들과 만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모의를 하기도, 3·1운동을 구상하기도 했다. 이 씨는 아버지와 가장 오래 함께 산 후실 수인당에게 “의친왕께서 잔치를 벌인다고 기생들을 불러올 때마다 기생을 태운 인력거꾼들이 독립군 밀사였고, 이들은 의친왕과 골방에서 밀담을 나누셨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   “일본의 귀족이 아닌 조국의 평민으로 살겠다”   상해임시정부 망명 시도하다 실패   비밀 독립운동단 ‘대동단’ 총재 추대     ◆상해임시정부 합류 위해 탈출 감행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의친왕은 평화로운 방법으로는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최진동(봉오동전투에서 사령관으로 활약) 장군과 서신을 교류하며 독립운동 전략에 대해 논의했는데, 이때 “일제를 몰아내려면 무력 독립투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전했다. 3·1운동 직후인 4월, 여러 독립운동 세력들은 뜻을 모아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대동단실기〉에 따르면, 당시 상해 임시정부 내무 총장 안창호는 의친왕을 상해로 망명시키려는 계획을 했다. 의친왕이 임시정부에 합류하면 내부적인 구심점 역할을 해주고, 국내외적으로 큰 효과를 불러일으켜 독립운동이 더욱 활성화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의친왕은 상해임시정부에 “나는 독립된 한국의 평민이 될지언정 일본의 귀족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임시정부에 합류해 독립운동에 몸 바치고자 한다”는 친서를 보내고 망명 결심을 굳혔다. 하지만 의친왕의 망명 시도는 일본 경찰들에게 발각돼 실패로 돌아갔다.     ◆33인의 민족지도자들과 독립선언서에 서명   상해 탈출 시도 이후 의친왕은 사동궁에서 연금 생활을 하게 됐다. 이 씨는 “아버지 방 안에 조그만 유리창이 있어 어머니 의친왕비에게 물었더니, 일본 헌병들이 수시로 방안을 감시하기 위한 장치라는 답을 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의친왕은 멈추지 않았다. 1919년 3월 결성된 비밀 독립운동단 ‘대동단’의 총재로 추대됐고, 그해 11월 의친왕 등 33인의 명의로 〈대한민족대표 의친왕 등의 독립선언서〉를 공표했다. 여기서 의친왕은 “우리나라가 독립국임을 전 세계에 선언한다”며 “일본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면 최후의 순간까지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주미대한제국공사관 국가 사적지 등재에 숨겨진 노력   나라를 위하는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덕일까. “한국에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던 이해경 씨였지만, 그 역시 조국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역사 바로잡기 운동, 잃어버린 문화유산 찾기 운동 등에 앞장섰다.     그중 하나가 주미대한제국공사관 환수운동이다. 공사관은 고종의 사비로 한국 역사상 최초로 서양 국가에 설치된 외교공관이었으나, 일본의 개입으로 1910년 단돈 5달러에 강제 매입됐다. 이에 이해경 씨는 뉴저지에 거주 중인 재미교포 윤기원 씨와 함께 모금활동을 벌이고 불법매각의 증거를 입수하는 등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을 준비했다. 그리고 지난 7일, 국립공원관리청(NPS)은 워싱턴DC에 위치한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을 국립사적지로 지정하는 방안에 대한 의견을 수렴한다고 밝혔다. 인터뷰 도중 이 소식을 들은 이 씨는 “감개무량하다”며 미소를 보였다.         어릴 적 “내가 죽어야지”라며 장판을 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밤새 들었다는 해경왕녀. 그는 어렵게 얻은 독립의 중요성을 점차 잊어가는 듯한 오늘날 한국의 모습에 “지나간 일은 공부해야 하고, 어떻게 해서 지금의 대한민국이 됐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하고픈 말을 묻는 질문에 그는 “어렵게 되찾은 나라를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지키면서 살 수 있을지에 대해 함께 고민해야 한다”며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라고 강조했다. 글·사진=윤지혜 기자아버지 항일운동 아버지 의친왕 독립운동가 김규식 항일운동 기록

2024-08-13

독립유공자 서훈, 후손들도 몰랐다

사망 76년이 지나서야 국가로부터 2023년 독립유공자로 공적을 인정받은 안순필(페드로 안) 선생의 후손들이 표창 전수는커녕, 서훈 사실도 알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고인의 아들은 흥사단 동남부지회 등에서 공로패를 받을 정도로 잘 알려진 지역 인사였다는 점에서 보훈처와 관할 공관인 애틀랜타 총영사관에 대한 소극적·면피적 행정에 대한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멕시코와 쿠바 일대의 대표적 독립운동가로 꼽히는 안순필 선생의 손자 로렌조 주니어 안은 지난 21일 본지와 통화에서 지난해 국가보훈처가 제104주년 3.1절을 맞아 안순필 선생에 건국포장을 수여한 바에 대해 “가족 누구도 들은 바가 없다”고 밝혔다. 안 선생의 아들이자 쿠바 아바나의 통합 한인회 격인 재쿠한족단 부단장 등을 역임하며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한 안수명(영어명 로렌조)씨  역시 추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저자 이자경·1998)’와 김재기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안순필 선생은 1905년 멕시코로 이주해 에네켄(선박용 밧줄의 원료로 쓰이던 다육식물 용설란의 일종) 공장과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며 모은 돈을 독립운동에 보탰다. 아바나에서 대한인국민회와 국어학교도 설립했다. 1918~1941년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고 보훈처는 밝히고 있다.   이후 1924년 쿠바에서 태어난 안 선생의 아들 안수명씨는 부친에 이어 아바나 한인청년단 고문 등을 맡으며 현지 한인사회의 부흥과 독립운동을 위해 힘썼다. 흥사단 동남부 지회와 민주평통 애틀랜타 협의회가 2015년 안순필 선생의 공적에 대해 수여한 공로패와 감사패를 아들인 그가 대신 받았다.   안순필 선생의 부인 김원정씨 역시 한국학교에서 교육상담을 운영하고 대한여자애국단 아바나 지부를 설립해 초대 단장으로 일한 독립운동가다. 모두 독립 유공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잊혀졌다.     이후 2017년 이자경 연구가가 당시 재외한인학회 회장인 김재기 교수에게 국가유공자 신청을 문의했지만, 수년째 서훈이 답보상태였다가 지난해야 포상이 이뤄진 것이다.     이 연구가는 “쿠바 독립기념일이나 미국 국경일마다 손에 태극기를 들고 나와 독립을 부르짖으며 시가행진을 펼친 게 이분들”이라며 “안순필 가계는 대한민국 해외항일운동사에 길이 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서훈을 받지 못한 재외한인 독립유공자의 후손을 찾아야 할 기관은 정작 손을 놓고 있다. 안 씨 가족은 모두 쿠바 공산당을 피해 1961년 플로리다주로 망명해 살고 있지만, 관할 공관인 주애틀랜타 총영사관은 이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최종희 보훈 담당 영사는 “(후손이)국가보훈부에 직접 신청해야 한다”며 “공관에서는 후손 중 생존자가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책임을 회피했다.     최 영사는 보건복지부 소속으로 2022년 애틀랜타에 본부를 둔 연방 질병통제예방센터(CDC)와의 업무 협조를 위해 파견됐지만, 코로나19 비상사태 종료 이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업무 연관성이 떨어지는 보훈 영사 업무를 맡고 있다. 그는 “업무 지정은 공관장의 영역”이라며 “보훈 영사는 주로 묘지 관리 등을 맡아한다”고 말했다.   안 선생의 손자 로렌조 주니어 안은 “올해 9월 아버지께서 100세 생신을 맞는다”며 “이미 돌아가신 애국지사 할아버지를 만나기 전에 아버지께서 꼭 희생과 공헌에 대한 명예 훈장을 받길 바란다”고 말했다. 장채원 기자독립유공자 서훈 애틀랜타 총영사관 대표적 독립운동가 쿠바 아바나

2024-03-25

" 3.1운동으로 발현된 KDNA, 세계에 알려야"

    워싱턴 미주통일연대(회장 김유숙)가 3.1절 기념 특별 강연회를 개최했다.    김유숙 회장은 "세계적 평화운동으로 평가 받는 3.1운동을 오늘날의 통일운동으로 승화시켜, 한반도는 물론 세계평화에도 중요한 역사적 포인트가 될 '남북평화통일'의 원동력으로 삼자"고 말했다.     3일 워싱턴 한인 커뮤니티 센터에서 열린 강연회에는 일요일 낮 시간임에도 120여명이 모여 성황을 이뤘다. 김유숙 회장은 인사말을 겸한 연설을 통해 "KDNA를 통일 한국의 원동력으로 삼자"고 주장했다. 김 회장은 "반만년 역사동안 타국을 침략한 적 없는 평화지향적 민족성, 효와 열, 충을 도덕적 신념으로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자유경제체제로 법과 질서를 지키는 모범적 민족성 등이 함축된 우리들의 DNA, 한민족의 정체성을 세계에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통일을 위해 주변국들의 협조와 지지를 견인하고, 통일 한국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KDNA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진 강연에서는 장태한 UC 리버사이드 대학교 교수가 원격으로 '안창호 선생과 미국내 최초 한인촌 차퍄파 캠프'라는 주제로, 전 CIA 요원 미아클 이 박사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대한민국 건국'을 강연했다. 또한 '서재필 박사의 미국내 독립운동과 그것이 젊은 세대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 최정수 서재필기념재단 회장이 강의했다.  특히 이 자리에는 글로벌 평화재단 짐 플린 세계회장이 참석해 '독립운동가 박용만 선생의 통일운동'에 대해 강연해 참석자들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박세용 기자 spark.jdaily@gmail.com운동 발현 세계적 평화운동 플린 세계회장 독립운동가 박용만

2024-03-05

[시조가 있는 아침] 길림추(吉林秋) -안확(1886~1946)

강파(江波)에 바람 치니, 밝은 달이 구으른다   단풍이 서두르니, 도처마다 낙엽이라   만 리에 객의 수심이, 새로 수선하고나   -자산시선(自山詩選)   시조로 편 독립운동   일제강점기에 『조선문명사』 『조선문학사』 『조선문법』 등을 저술한 독립운동가 자산 안확(安廓)의 시조다. 안확은 고종의 해외 망명 유치 계획에 관여하고, 3.1운동 당시 마산 지역의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1930년대 들어 일본의 식민지배가 무단통치로 바뀌어 학문적 탐구가 어렵게 되자 국내를 벗어나 만주와 중국, 노령의 연해주 지역과 하와이를 유랑하였다.   바람이 강의 수면을 치니 물결이 일고, 밝은 달이 굴러간다는 표현이 재미있다. 나무들은 서둘러 단풍을 떨어뜨리니 도처에 낙엽이다. 수난의 고국을 떠나 어언 만 리, 나그네의 수심이 새록새록 쌓인다.   안자산은 7년 동안의 유랑을 마치고 귀국해 어학과 고구려 문학, 시조.향가.미술사 등에 관한 글을 발표하였다. 일본어 쓰기를 강요하던 1940년 이후에는 아예 붓을 꺾었다. 그는 240수에 이르는 시조 작품과 이론을 발표했으니 거의 독립운동 수준이었다. 오늘의 우리는 이런 선열들의 피땀 위에 서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유자효 / 한국시인협회장시조가 있는 아침 길림 독립운동가 자산 시조 작품 연해주 지역

2023-11-10

[기고] 한인 독립운동가 김종림 재평가 필요하다

2023년은 미주 한인 이민 120주년이자, 한국 공군의 상징적 기원이 되는 캘리포니아 소재 ‘윌로우스 비행학교’ 설립 103주년이 되는 해다. 미주 한인 독립운동가 가운데 도산 안창호,노백린,박희성,이용근 선생 등은 잘 알려져 있지만 윌로우스 비행학교 설립에 전폭적인 재정지원을 했던 김종림 선생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쌀농사로 부를 축적한 그의 재정 지원이 있었기에 비행학교 설립도 가능했다. 그런데 1920년 4월 문을 열었던 비행학교는 얼마 되지 않아 불운을 겪게 된다. 이맘때 쯤인 그해 11월 초 윌로우스 지역에 100년 만의 폭우가 쏟아지면서 후원자인 김종림의 쌀농사가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비행학교 재정 지원에 어려움이 생긴 것이다.   김종림(1886~1973)은 대한인국민회,북미지방동지회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하와이로 이민 와 1907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으며, 이후 유타주 솔트레이크시에서 철도 건설 노동자로도 일했다. 당시 공립협회에 가입했고 다시 캘리포니아주의 바실리아, 프레즈노,리들리 등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1908년 전명운, 장인환 의사의 스티븐슨 저격 의거가 일어나자 직접 공립신보 인쇄원이 되어 동포 사회에 이 소식을 알리기도 했다. 1909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 후엔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했다. 대한인국민회는 1909년 2월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박용만,이승만 등에 의해 창설된 미국 최대 독립운동 단체였다. 지난 2004년에는 기념재단이 출범해 지금도 선조들의 독립정신과 나라 사랑의 마음을 차세대에게 알리고 있다.     그는 1912년 무렵 프린스톤에서 벼농사를 시작했고 이후 윌로우스 지역으로 확대했다. 1914-1916년까지 계속된 풍년과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전쟁 특수로 인해 쌀값이 폭등하면서 김종림은 ‘쌀의 대왕’으로 불리우며 한인 최초의 백만장자 명성을 얻었다. 자연히 그는 지역사회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1920년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의 해’를 선포하고 비행대 편성의 방침을 세웠다. 이 소식을 접한 김종림은 1920년 초 노백린 임시정부 군무총장을 만나면서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자 한국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결정을 내린다. 공군 양성 계획에 흔쾌히 동참해 설립 자금 2만 달러와 월 3000달러의 운영비를 지원했다. 그해 6월에는 실제로 비행기 2대를 구입해 비행 실습훈련까지 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100년 만의 폭우로 쌀농사가 실패하면서 재정 지원에 차질이 생겼고 비행학교는 결국 문을 닫게 된다. 비록 짧은 기간 이었지만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조국 독립을 위한 가장 획기적인 발상과 실천을 한 것이었다   당시 공군을 양성해 일본군을 공격한다는 것은 다소 비현실적인 방법으로도 생각된다. 그러나 조국독립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용기 있게 행동으로 옮긴 선조들의 노력은 후손들에게 큰 자부심으로 기억된다.    사재를 털어 윌로우스 비행학교를 지원한  애국지사 김종림, 그리고 비행기 조종사가 되기 위해 죽음을 각오했던 대담하고 진취적인 조선 청년들의 기상에 우리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특기할 만한 점은 김종림은 주로 재정 지원을 담당하며  안창호계와 이승만계 양쪽 진영 모두에서 활약한 애국지사라는 점이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조국의 독립이었으며, 어떤 경우에도 이를 포기하지 않고 행동함으로써 한인 사회에 희망을 주는 삶이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열정을 다한 그의 애국적 삶에 존경을 표하며, 그의 업적과 삶에 대해  좀더 적극적인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심인태 / 공군전우회 LA지회장기고 독립운동가 김종림 김종림 선생 비행학교 재정 비행학교 설립

2023-11-05

[디아스포라 시선] 홍범도와 헤로니모

독립운동가인 홍범도 장군의 과거 공산당 입당 경력과 이로 인한 흉상 이전 문제로 나라가 떠들썩하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논란 가운데 재외동포 역사의 특수성에 대한 담론은 없다는 사실이다.       작년 12월, 필자는 젊은 고려인들 행사에 초청을 받아 카자흐스탄을 방문했었다. 카자흐스탄을 비롯해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에서 모인 수십명의 한인들은 각자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했던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고려인들의 특수한 서사와 역사가 어떻게 창조적으로 표현될 수 있을지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했다.   참석자들은 러시아의 전설적 가수인 빅토르 최와 몇 년 전 안타깝게 피살된 카자흐스탄 스케이트 영웅이자 독립운동가 후손인 데니스 텐의 동상을 찾았다. 이어 방문한 고려극장의 전시실에 들어서자 홍범도 장군의 초상화가 우리를 맞았다. 홍 장군이 수위장으로 말년을 보낸 역사적 공간이다. 고려극장은 몇 년 전부터 카자흐스탄 국립극장으로 지정되어 국가 보조를 받기 시작했지만 오직 고려인들의 노력으로 90년간 그 명맥을 유지했다.       홍범도 장군은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분적 억압과 착취를 경험했다. 홍범도 연구 권위자인 반병률 교수는 이런 배경이 그의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이 그에게는 다분히 이상적 대안으로 보일 수 있지 않았을까. 비록 지금은 그것이 실패한 사회적 실험으로 밝혀졌지만….   만약 공산당 가입 사실로 인해 홍범도 장군의 삶과 업적이 부정되어야 한다면 과거 소련에 살았던 수많은 고려인과 그들의 후손,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 그리고 쿠바 한인들의 복잡한 이주사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그들도 ‘공산주의자’ 혹은 ‘공산주의 동조자’ 로 분류되어야 할까.   지난 2015년 12월 쿠바를 여행했던 필자는 우연히 한인 3세 택시 기사인 패트리샤를 만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쿠바 혁명에 참가했으며 나중에 차관보까지 지낸 임은조(헤로니모 임) 선생이었고, 할아버지는 쿠바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로 보냈던 독립운동가 임천택 선생이다. 임천택 선생은 3살 때인 1905년 제물포에서 홀어머니의 손을 잡고 멕시코행 선박에 올랐다. 하지만 1000여명의 조선인이 도착한 멕시코는 지상낙원이 아니었다. 그중 일부가 더 나은 삶을 위해 쿠바로 이주했다.   쿠바의 한인들은 1959년 쿠바 혁명 전까지 온갖 차별을 받는 3등 시민이었다. 나라를 잃은 무국적자 신분으로 대부분 가난했다. 하지만 혁명 이후 한인들도 동등한 시민으로 대접받았고 실제 삶의 질도 나아졌다. 적어도 카스트로의 독재와 소련의 붕괴로 인해 큰 시련을 맞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헤로니모 선생은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정부 초청으로 조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부친이 일생 간절히 염원했던 쿠바 한인 공동체 복원이라는 사명감을 갖게 됐다. 이후 헤로니모 선생은 10여년 간 쿠바 전역에 흩어졌던 한인들을 찾아 한인회 설립을 추진하고 선조들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는 등 한인 정체성 부활에 힘쓴다.   홍범도 장군과 헤로니모 선생의 삶은 격동의 한반도 근대사는 물론 자신이 뿌리를 내렸던 국가의 정치적 운명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자신을 보호해 줄 조국이 없는 상황에서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소련과 쿠바의 소수민족으로, 한인 사회의 리더로, 디아스포라의 여러 정체성 사이에서 자신의 역할과 조국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들이 선택한 삶의 방향은 한두 개의 수식어로 평가할 수 없는 깊고 복잡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다.   재외동포들의 다양한 서사는 분단 이념을 초월하는 한반도사의 풍부한 자산이 될 수 있다. 그들을 공산주의자와 자유민주주의자로 나누려는 퇴행적 발상을 지적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플 뿐이다. 카자흐스탄에 모였던 젊은 고려인들은 전쟁으로 인해 출신국의 편이 갈릴 수 있는 민감한 시기에도 불구하고 선조들의 역사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공유하며 화합과 연대를 선택했다. 디아스포라적 사유를 실천하는 그들의 존재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전후석 / 다큐멘터리 감독디아스포라 시선 홍범도 독립운동가인 홍범 쿠바 한인들 독립운동가 임천택

2023-09-18

독립유공자 후손 초청, 선조들의 뜻 기려…78주년 8·15 광복절 경축식

제78주년 8·15 광복절 경축식이 15일 오전 11시 LA한국교육원 강당에서 진행됐다.   이날 경축식에는 독립유공자와 유족 외에 김영완 LA총영사, 지미 고메즈 34지구 연방하원의원, 캐런 배스 LA시장이 참석했으며 제임스 안 LA한인회장, 김준배 광복회 미국서남부지회장, 클라라 원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이사장, 강전훈 LA교육원장 등 각계 대표와 주관단체 관계자 등 200명이 넘게 참석했다.   특별히 이날 경축식에는 남가주에 거주하고 있는 독립유공자 후손 27가정이 참석해 선조들의 활동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의미를 더했다. 이들은 특별순서를 통해 대형 태극기를 전달받고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경축식 특별순서에서 증조할아버지인 독립운동가 김태연 지사를 소개한 증손녀 김용혜씨는 “대한민국 독립에 모든 것을 바쳤던 증조할아버지의 업적을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소개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김태연 지사는 1919년 상해 대한인거류민단 조직 및 임시정부의 민족운동을 후원하고 대한인적십자회, 대한교육회, 구국모험단 등에서 민족교육과 군자금 모금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독립운동가이자 최초로 항일 비행사를 양성한 노백린 장군의 손녀 노영덕씨는 “할아버지는 대한민국이 힘이 없던 시절에 기죽지 않으시고 일본군 사령관의 도발에 칼을 빼 들 정도로 용감하고 담대한 분이셨다”고 설명했다. 이어 “당시 한국에 공군이 없었는데 할아버지께서 공군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 비행사 양성소를 설립하셨다. 이후 공군 용사 육성에 힘쓰셨다”고 덧붙인 노씨는 “할아버지와의 추억은 많이 없지만 늘 가슴에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흥사단 단우 수양동우회 사건 군자금 모금 독립운동가 조종완 선생의 손녀 조진숙씨는 “제 기억에 할아버지는 항상 형무소에 갇혀있으셨다”며 “독립운동가들과 소통을 하기 위해 어머니가 닭을 삶아 뼈 대신 연필을 집어넣어 형무소에 있는 할아버지께 가져다 드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들려주기도 했다. 조씨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특별하다. 험난한 세월을 지나 현재의 대한민국이 됐다. 한인 후손들이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긍지를 다지고 자랑스럽게 여겼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미주 대한여자애국단을 창립한 강혜원 선생의 증손자 콜린 김씨는 “한인 4세로써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셨던 증조할머니와 증조할아버지가 자랑스럽다”며 “매년 광복절 기념식에 참여해 조상에 대한 존경심을 표한다”고 뿌듯해했다.       1919년 공주지역에서 만세시위 운동을 주도하고 하와이에서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자금모금 운동에 기여한 안창호 목사의 증손녀인 김혜자 변호사는 “수년 전 내 딸의 학교 숙제를 통해 증조할아버지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배우면서 대한인국민회 활동의 중요성을 알게 된 후 국민회 활동에 참여하게 됐다”며 “자랑스러운 한국의 독립사를 어린 후손들에게 잘 알릴 수 있도록 더 노력할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날 고메즈 의원은 “한국이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을 되찾은 뜻깊은 날을 기리는 행사에 참석할 수 있게 돼 기쁘다”며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선조들의 후손을 만날 수 있던 뜻깊은 자리다. 그들이 LA의 곳곳에 살면서 사회와 경제 발전을 위해 기여한 데에도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편 김 총영사는 이날 윤석열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대독을 통해 “우리는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자신을 던진 선열들을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 이분들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 국가 계속성의 요체요, 핵심”이라면서 “이제는 독립운동의 정신이 세계시민의 자유, 평화, 번영을 위해 국제사회에서 책임과 기여를 다 하는 글로벌 중추 국가의 비전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한국 정부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장연화·김예진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독립유공자 광복절 독립유공자 후손 광복절 경축식이 독립운동가 김태연

2023-08-15

함삼여·백인순 선생 등 76명 독립유공자 포상

국가보훈처는 오는 17일 제83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76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고 15일 밝혔다.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애족장 15명, 건국포장 13명, 대통령표창 48명으로 포상자 중 생존 애국지사는 없으며 여성은 11명이다.   애족장이 전수되는 함삼여 선생은 1910년 7월 이후 하와이에서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통상대의원 등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군사단체를 후원했다. 백인숙 선생(애족장)은 1919년 하와이에서 대한부인구제회 결성에 참여하고 이후 대의장 등으로 활동했다.   이번 포상에서는 국가보훈처가 하와이 지역 한인 묘비 탁본 사업으로 공적을 확인한 미주지역 독립운동가 12명, 학적부 발굴로 광주학생운동 때 활동을 파악한 독립운동가 5명이 포함됐다.   보훈처는 학생운동 참여 독립유공자 발굴을 위해 학적부 총 26만9천667매를 수집하고 이 중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판단되는 2천596명을 확인했으며 자료 추가 발굴과 보완으로 포상 대상자를 계속 파악할 방침이다.   포상은 제83회 순국선열의 날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 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전수된다.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포상된 1949년부터 이번 순국선열의 날까지 총 1만7664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됐다. 건국훈장 1만1684명, 건국포장 1508명, 대통령표창 4472명이며 이 가운데 여성은 607명이다.   박민식 보훈처장은 "조국 독립을 위해 희생.헌신한 분들께 독립유공자 포상을 할 수 있게 돼 매우 뜻깊다"며 "나라를 위한 선열들의 고귀한 생애와 정신이 우리 후손들에게도 온전히 계승될 수 있도록 알려 나가겠다"고 말했다.독립유공자 백인순 독립유공자 포상 미주지역 독립운동가 포상 대상자

2022-11-14

LG유플러스·국가보훈처, 잊혀진 하와이 독립운동가 조명하는 광복절 캠페인 ‘당연하지 않은 일상’ 진행

          LG유플러스는 국가보훈처와 함께 오는 8월 15일 광복절 기념 캠페인 ‘당연하지 않은 일상’ 제 3장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당연하지 않은 일상은 2020년 처음 시작되어 올해로 3년째 진행하는 유플러스만의 CSR 캠페인이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소중한 일상이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 아닌,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 지켜져 온 것임을 인지하고 잊혀져 가는 독립운동가들의 존재를 재조명하고자 시행됐다.   캠페인이 처음 시작된 2020년에는 독립을 위해 활동했으나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지 못해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 9인을, 2021년에는 제주 3대 항쟁 중 하나인 ‘제주해녀항쟁(1932)’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했다. 시즌1, 시즌2 모두 연간 2만건 이상의 유저 참여를 이끌어내는 등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올해 진행하는 당연하지 않은 일상 제 3장은 해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를 돌아볼 수 있도록 ‘알로하, 독립런’이라는 게이미피케이션 콘텐츠를 구현했다. 하와이에서 독립 자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노고를 담아낸 게임으로, 8월 11일부터 만나볼 수 있다.   간단한 조작을 통해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구현했으며, 게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진행할 경우 게임 참여 건당 815원씩 기부할 예정이다. 캠페인 종료 후 모인 기부금은 사단 복지 법인 ‘따뜻한동행’을 통해 하와이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전달할 계획이다.   또한, 사용자들이 게임 종료 후 자신만의 독립운동가 캐릭터를 직접 꾸밀 수 있도록 구성하고 이를 활용한 인스타그램 공유 이벤트도 진행한다. 직접 꾸민 독립운동가 캐릭터 이미지를 개인 인스타그램에 필수 해시태그와 함께 게재하는 이벤트로, 추첨을 통해 선정된 당첨자 총 815명에게는 모나미 광복절 에디션을 경품으로 증정한다.     LG유플러스 관계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해외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독립운동가 분들이 많다”며 “이번 캠페인을 통해 우리의 소중한 역사를 기억하고 관심을 고취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LG유플러스는 고객들의 일상에 즐거움과 변화를 주도하는 디지털 혁신기업으로 나아가겠다는 비전을 세우고, 기존의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넘어 ‘선넘는 즐거움’을 제공하는 와이낫(WHY NOT) 캠페인을 진행해오고 있다.    이동희 기자 (lee.donghee.ja@gmail.com)LG 독립운동가 하와이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캐릭터 광복절 캠페인

2022-08-11

"3·1 운동은요"…글짓기 시상식…남가주 리버사이드 한국학교

 남가주 리버사이드 한국학교(교장 한보화)는 지난달 26일 제103주년 3.1절을 맞아 '3.1운동 자유와 독립을 향한 외침'이라는 주제로 각 학년별로 특별 수업과 글짓기 대회를 열었으며 이에 대한 시상식을 5일 가졌다.   한보화 교장은 "올해로 103주년을 맞은 3.1절은 독립 만세 운동으로 일본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고 독립 선언서를 발표해 전세계에 대한의 자주독립 의사를 알린 날"이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평화와 번영의 새로운 103주년을 기원하기 위해 특별 수업과 글짓기 대회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이 날 각 학년에서는 3.1절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토대가 됐다는 한국 근대사를 교육했다.     한 교장은 "민족적 긍지와 강인한 독립운동 정신을 가진 오늘날의 우리들은 이날을 기념 경축하며 역사를 잊지 않게 해주는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 진정한 애국자들의 희생에 감사함을 전하며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애국 정신을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고 말했다.   이날 유치반은 어린 학생들에게 어울리는 쉽게 설명된 3.1절 기념 동영상을 보고 왜 중요한 날인지 설명해 주고 태극 바람개비를 만들었다. 3.1절에 유관순 열사가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태극기의 태극 무늬와 흰 바탕이 잘 어울리게 오리고 붙여 대나무에 연결해 예쁜 태극 바람개비를 만들었다.     학생들은 3.1 운동의 역사적 영상이 담긴 삼일절 노래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의 동영상을 관람했다. 학생들은 삼일절에 만들어 사용했을 그 태극기를 조그마한 손으로 정성껏 만들어 대한 독립 만세를 다 같이 외쳐 보고 이어서 글짓기대회에 참가했다.     이날 특별 수업은 파워포인트로 준비된 사진을 보면서 3.1운동의 역사적 배경을 배우고 3.1운동이 독립운동의 분수령이 되어 한국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게 되었으며 이는 2차 세계대전 종식에 따른 한국 독립의 기반이 되었음을 배웠다.   3.1절 글짓기 대회 우수학생으로는 ▶유치반 나예음 이후민 최성찬 ▶1학년 윤선희 최성준 ▶2학년 조지원 최성식 ▶3학년 이준우 ▶4학년 김아인 서조이 학생이 각각 수상했다.리버사이드 한국학교 독립운동가 유관순 독립운동 정신 남가주 리버사이드

2022-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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