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독립운동가들…그 흔적을 찾아서
[광복절 기획] 숨겨진 미주 한인 독립운동사
(3) 독립 위해 헌신한 숨은 영웅들의 발자취
윤병구 씨, 이승만 박사와 루스벨트 면담
임창영 씨, 뉴욕 일본영사관 앞 시위 주도
이곳 미국 땅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숨은 영웅들이 있었다. 무명의 독립운동가,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1905년 8월 4일자 뉴욕타임스(NYT)는 이승만 박사의 루스벨트 대통령 방문기를 보도했다. 이때 이승만의 옆에는 숨은 독립 영웅, 윤병구 씨가 있었다.
1903년 하와이에 목사로 파견된 윤병구 씨는, 한인 대표로 1905년 7월 하와이에 잠시 들른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와 만나 루스벨트 대통령을 접견하기 위한 소개장을 받게 됐다. 이를 한국의 독립을 위한 중요한 계기라고 생각한 윤 씨는, 소개장을 받은 즉시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공부 중이었던 이승만을 찾아가 뉴욕 롱아일랜드 오이스터베이 별장에 머물던 루스벨트 대통령 방문 계획을 상의했다.
당시 NYT 기사에 따르면, 윤 씨와 이승만은 루스벨트 대통령과 사전에 약속도 없이 오이스터베이에 도착해 인근 호텔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이 호텔에 들어가 등록하는 데는 적지 않은 설명이 필요했다. 실랑이가 계속되자 기자들이 모여들었고, 윤 씨는 방문 목적을 미국 언론에 알릴 기회를 갖게 됐다.
그 결과 윤 씨는 호텔 대기실에서 장장 1시간에 걸쳐 한국의 어려운 실정을 설명하고, “나와 이승만은 자주독립을 갈구하는 모든 한인들을 대표해 루스벨트 대통령을 접견하러 왔다”고 전했다. 그는 외신 기자들에게 “한미간의 수호조약은 아직 유효하며, 따라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우리가 미국에 도움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우리가 미국 대통령과 국민들에게 원하는 것은 한국문제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NYT는 다음날인 8월 5일에도 〈대통령을 접견한 한인들(Koreans See the President)〉이라는 기사를 보도했는데, 이에 따르면 윤 씨와 이승만은 약 30분간 루스벨트를 접견하고 청원서를 제출했다.
윤 씨는 이후에도 ‘대한인국민회’의 지방외교원으로 임명돼 미국 여러 도시를 순회하며 한국의 상황을 언론에 소개했고,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자유대회에서 미국정부에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하는 청원서를 작성한 3인 중 1인이기도 했다. 그는 해방 직전인 1945년 4월 25일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평화회의에 이승만과 함께 한인대표로 참석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노력했다.
◆ 1936년 일본영사관 앞에는 그가 있었다
1936년 8월 9일,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순간이 탄생했다. 독일의 베를린올림픽에서 한국의 손기정 선수가 올림픽신기록을 기록하며 우승을 차지한 것. 한국의 언론들은 이 역사적인 순간을 앞다퉈 보도했는데, 손기정 선수의 유니폼에 부착된 일장기를 삭제한 사진을 신문에 게재했다. 이에 일본당국은 두 신문을 강제로 폐간시켰고, 이에 분노한 뉴욕의 한인들은 일본영사관 앞에 나가 열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때 시위를 주도한 인물이 숨겨진 독립 영웅, 임창영 씨다. 뉴욕한인교회의 4대 담임목사였던 임창영 씨는 신문 폐간 소식을 듣고 뉴욕의 한인들을 이끌고 5애비뉴에 위치한 일본영사관 앞에서 항의시위를 했다. 이후 1937년 일본이 한국어 사용을 금지시키는 강경한 탄압정책을 쓰자, 또 한인들을 이끌고 일본영사관에 나가 “일본상품을 보이콧하자”며 시위를 벌였다. 이때 시위에는 5애비뉴의 교통을 1시간가량 차단시킬 정도로 많은 인원이 참가했고, 다수의 미국 시민들도 동화돼 함께 한국 독립을 위한 목소리를 냈다.
◆ 대한민국의 확성기
1896년 워싱턴 한국공사관 직원으로 도미한 김헌식 씨는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한국이 일본에 외교권을 뺏기자, 미국에 주저앉아 맹렬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1910년 8월 26일 NYT는 그를 “105인 사건(1911년 일제가 항일세력에 대한 통제를 위해 데라우치총독 암살모의사건을 조작, 105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한 사건)에 대해 항의하는 서한을 미국 언론에 보내거나, 미국 국무장관에게 진정서를 자주 보내는 뉴욕의 대표적인 한인 인사”라고 소개했다. 이후 김 씨는 1917년 뉴욕에서 개최된 소약국동맹회 집행위원회 임원으로 선출돼 “일본의 한국 합병은 위헌이고, 윌슨 대통령의 약소국자결권 부여선언은 지켜져야 한다”는 결의문을 미국 국무부에 제출하는 등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확성기 역할을 했다.
글·사진=윤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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