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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사 발간한 대한인국민회

“대한인국민회는 한인사회 이민 역사의 시작이자 독립운동의 산실입니다. 차세대에게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를 다함께 알립시다.”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이사장 클라라 원)이 ‘대한인국민회 100년사 발간 및 115주년 창립’을 기념하는 기금모금 갈라 행사를 연다.  29일 오후 5시 LA한인타운 옥스포드 팔래스 호텔에서 열리는 갈라 행사에서는 1세기 전 미주 한인사회 구심점으로 뭉쳤던 대한인국민회 역사와 의의를 되새길 예정이다.     클라라 원 이사장은 “100년 전 이민 선조들이 미 전역에서 대한인국민회로 뭉쳐 애국애족 정신으로 뭉쳐 이민생활 정착에 힘쓰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다”며 “대한인국민회를 이끈 도산 안창호 선생 정신은 오늘날까지 한인사회에 큰 울림을 준다. 한인사회가 차세대에게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를 가르치고, 다함께 주인의식을 갖고 선열들의 정신을 계승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초기 이민사회 구심점 역할을 한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은 USC 인근에 자리한다. 지난해에만 4000명 이상이 방문해 초기 이민사회와 선조들의 독립활동 역사를 둘러봤다. 한국에도 독립운동 산실로 알려져 매년 방문객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지난 2021년 기념관을 재단장하고 역사교육 등 전시물도 확충했다. 현재 기념재단은 사적지인 기념관 관리, 차세대 뿌리교육, 이민역사 세미나, 독립유공자 발굴 등 역사지키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대한인국민회 100년사 발간도 한인사회 역사인식을 고취하기 위해 진행됐다. 이번 기금모금 갈라에서는 ▶대한인국민회 115년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 ▶AI를 활용한 도산 안창호 축사 ▶기념재단 주요 활동 및 신규회원 모집 등 여러 프로그램이 준비됐다.   미셸 윤 사무총장은 “100년사 발간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하자는 취지”라며 “차세대 청소년 뿌리교육이 중요한 시기다. 기념재단은 대면행사를 확대하고 애국단원도 모집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은 50~60대 이사 16명이 참여해 이사회를 쇄신했다.     권영신 상임고문은 “1세대는 대한인국민회를 잘 알고 있지만, 2~3세대에게 역사를 교육하지 않으면 우리의 이민역사와 민족정신 계승이 어렵다. 우리 모두 뜻을 모아 선조들이 남긴 위대한 유산을 지켜나가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문의: (323)733-7350   김형재 기자 [email protected]대한인국민회 게시판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대한인국민회 역사 대한인국민회 기념관

2024-08-26

빼앗긴 조국, 타국에서 피땀흘렸던 그들의 기록

  제79주년 광복절을 맞았다.  빼앗긴 들에도 결국 봄은 찾아왔고, 7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그날까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피, 땀, 눈물이 흘렀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일제의 핍박을 고스란히 느끼며 앞장서 싸웠다면, 그 뒤에는 먼 미국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한인들이 있었다. 몸은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었지만 독립을 향한 염원만큼은 더없이 간절했다. 머나먼 타지에서 미주의 한인들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랐던 미주의 독립투사들. 오늘은 그들의 행적을 조명하고자 한다.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 거점지, 뉴욕한인교회 맨해튼 115스트리트에는 당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싶었던 미주 한인들의 염원이 가득 담긴 공간이 있다. 바로 한인들의 독립운동 거점지로 사용됐던 뉴욕한인교회다. 1921년 3월 2일 맨해튼 웨스트 43스트리트에 위치한 타운홀에서 서재필 박사를 필두로 열린 3·1독립만세운동 대회 개최를 계기로, 미주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될 뉴욕한인교회가 탄생했다. 뉴욕은 미주 다른 지역에 비해 한인들이 많지 않았지만, 국제사회에 한인의 독립의지를 알리는 주요 도시였기에 이승만·서재필·안창호 등 뉴욕한인교회의 문턱을 넘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라를 잃고 해외살이를 하는 동포들은 이곳에 모여 서로의 향수를 달래고 독립정신을 북돋아주며 독립운동을 논의했다.     ◆살구 농장에서 생긴 일   1910년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를 시작한 일본은 해외에 사는 한인들까지도 지배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그 야심은 1913년 6월 뉴욕의 살구농장에서 드러났다. 당시 살구 따는 일을 하러 갔던 100여명의 한인들은 그곳에서 주민들의 배척을 받았다. 당시 미국, 특히 뉴욕에서는 배일사상(일본인 배척 사상)이 팽배했는데, 미국인들이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착각해서 생긴 불상사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 영사는 한인들을 찾아가 미국정부와 교섭해 배상금을 받아주겠다고 제안했고, 이에 한인들은 분노하며 해외 한인들까지 지배하려는 일본의 야망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대한인국민회’에 통보했다. 대한인국민회는 1910년 조국 독립을 목적으로 결성된 당시 유일한 해외 한인단체였다. 대한인국민회는 일본의 음모에 대해 미국 국무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항의했고, 이에 국무부는 “한인은 일인이 아니며, 이제부터 재미한인과 관련된 일은 일본 정부를 통하지 않고 대한인국민회와 직접 교섭할 것이다”라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는 미국 사회에 한국이 일본의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후 뉴욕에서는 ▶18명의 한인들이 규합해 결성된 민간외교 독립운동단체 ‘신한회’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 ▶안창호의 ‘흥사단’과 이승만의 ‘동지회’ 뉴욕지부 ▶여성독립운동단체 ‘근화회’ 등의 단체들이 생겨났고, 이를 중심으로 활발한 독립운동이 이뤄졌다.     ◆한국을 넘어, 전세계에 독립 염원을 외치다   1919년 3월 1일 한국에서는 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다.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였던 서재필 박사는 “3·1운동의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한라산을 넘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까지 들렸다”는 말을 남겼다. 이에 미주의 한인들도 전세계에 독립 염원 목소리를 전하기 시작했다. 1919년 4월 14일 3·1운동에 자극을 받은 한인들은 서재필 박사의 주도하에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해 일제의 폭압적 식민 지배를 폭로하고, 한인의 자유 독립 의지를 담은 결의문과 호소문을 미국 정부와 파리강화회의에 보냈다. 뉴욕에서는 매년 3·1운동 기념식을 진행했는데, 1921년 3월 2일 맨해튼 타운홀에서 개최된 제2주년 기념식에는 100여명의 한인들과 1200여명의 친한파 미국인들이 비를 뚫고 참석해 한국의 독립 의지를 과시했다.         ━   1945년 8월 15일, 뉴욕에 울려퍼진 뜨거운 함성     피 같은 돈 모아 상해임시정부로 3·1운동 후 10년간 18만불 전달   조국 독립 위해 미군 자원하기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인들의 모금 운동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미주 한인들은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승만은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미국과 유럽에 한국의 독립운동을 선전하며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추진했다.     나라를 뺏기고 타지에서 생활하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한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 같은 돈을 내놨다. 기록에 따르면 미주 한인들은 3·1운동 이후 10년 동안 약 18만 달러라는 거액의 현금을 상해임시정부에 바쳤다. 10년 넘게 뉴욕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쫓아온 뉴욕한인교회 장철우 전 담임목사는 “당시 뉴욕 한인들의 유일한 소원은 조국에 돌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열심히 노동해서 번 돈을 모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고 전했다.     ◆이승만의 뉴욕 도착   1932년 3월호 〈Korean Student Bulletin〉(3·1운동에 자극을 받아 조직된 북미유학생총회가 미국에서 발간한 영문잡지) 1면에는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이 컬럼비아대학에서 뉴욕 한인들과 찍은 사진이 실렸다. 이승만이 뉴욕에 온 것은 미국 NBC방송의 초청을 받아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한 라디오 연설을 하기 위해서였다. 연설에 대한 소식이 보도되자 이승만은 위협 전화를 여러 차례 받았다. 당시 뉴욕시경(NYPD) 커미셔너가 이승만의 신변을 염려한 나머지 형사 2명을 파견해 이승만을 보호할 정도였다. 2분 남짓한 연설이었지만, 그 효과는 엄청났다. 이승만은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이래 자행해 온 갖가지 불법행위를 밝혔다. 〈K.S.B〉는 “연설이 끝나자마자 미 전역으로부터 방송국으로 온 축하편지가 홍수를 이룰 만큼 쇄도했다”고 보도했다. 이후에도 이 박사는 뉴욕에 머물며 기자회견을 갖고 “일본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국제연맹의 규약 16조에 있는 대로 경제적인 보이콧을 할 것”을 역설했다.    ◆실낱같은 희망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과 일본 사이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주 한인들은 처음으로 독립에 대한 가능성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실낱같은 희망이 보이자 한인들은 1942년 2월 워싱턴에서 ‘한인자유궐기대회’를 열고 미국 정부가 한국의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과, 유엔가입을 도와줄 것 등 5개항이 담긴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승만은 이때 연설을 통해 “일본이 미국의 적인 이상 한인들이 미국을 도와 적을 무찔러야 한다”고 호소했으나, 미주의 한인들은 이미 이전에 미국을 지원하는 뜻으로 6만 달러에 달하는 방위채권을 샀다. 젊은 한인들은 자원해서 미군에 지원했으며, 캘리포니아에서는 총 110명으로 구성된 한국인 예비부대가 창설되기도 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대동단결한 여성들   정치 문제는 남성에게 일임하는 것이 상례였던 시대였지만, 뉴욕의 여성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과감히 나섰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뉴욕의 여성들은 ‘미주동부대한부인회’를 창설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주말마다 한복을 입고 뉴욕의 중심지에서 애국가를 부르며 모금운동을 했고, 그 돈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후원하기도 하고, 뉴욕 지역에서 미군으로 출전한 한국 청년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마침내 그날   1945년 8월 15일, 뉴욕에서도 뜨거운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뉴욕한인교회 60년사에는 “마침내 그날이 오자 뉴욕시는 사방에서 울리는 종소리로 종일 요란했다”고 기록돼 있다. 평화의 날이 왔음을 고하는 우렁찬 승리의 노래는 뉴욕 시민들의 고막을 울렸다.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광복절 79주년을 맞아 뉴욕중앙일보는 1920~1950년대 뉴욕한인교회 교인명부를 통해서 동부지역 독립운동가들의 명단을 확보했다. 머나먼 미국 땅에서 조국의 해방을 위해 피땀 흘렸던 이들의 이야기를 뉴욕한인교회 60·70년사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가나다 순)     김경(상해임시정부에 재정 보조)     김도연(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 YMCA에 모여 독립선언 논의)   김마리아(뉴욕에서 한인 여성독립운동단체 ‘근화회’ 조직. 악랄한 일본 식민정책 미국에 알림)     김준성(뉴욕한인교회 목사로 일하며 한국 광복군, 임시정부 후원에 큰 역할)     김헌식(1905년 을사조약 이후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체류하며 독립운동)   김형린(뉴욕 조국광복사업추진회 회장)     박용만(한인 대표해 뉴욕 소약국동맹회의 참석한 독립운동가)   박인덕(1919년 3·1운동시 학생들 선동. 미국 돌며 3·1운동 관련 강연)   배민수(‘국민회’라는 단체 만들어 독립운동하다가 체포)   신성구(1910년대 김헌식과 함께 독립운동)     송종익(도산 안창호와 가까운 관계로 독립운동 물질적으로 협조)     윤병구(이승만과 뉴욕 오이스터베이 별장에서 휴양 중이던 루스벨트대통령 찾아가 청원서 제출)     윤헬렌(1921년 뉴욕 타운홀대회 참가해 외국인들에게 한국 실정 전달)     이봉수(1919년 만주에서 독립운동)   이병두(서재필 박사 도와 미주의 학생운동, 독립운동 주도)     이승만(1919년부터 광복 때까지 구미위원부 위원장.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     이원익(1919년 상해임시정부 요원)     임창영(뉴욕 한인들을 규합해 일본영사관 앞에 나가 항의 시위)     임초(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인회의에서 일본 국민에게 보내는 결의안을 작성한 3인 중 하나. 뉴욕 흥사단의 주요 인물)   정애경(3·1운동 당시 한국에서 독립운동 하다가 상해로 탈출. 뉴욕한인교회 부인회 회장)     조병옥(수양동우회사건으로 안창호와 투옥. 흥사단 주요 인물)   한승인(수양동우회사건으로 안창호, 조병옥과 투옥. 1923년 일본의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의 한인학살 모면 후 일본의 만행 폭로)   허정(일제강점기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 미국에서 독립운동하던 이승만 보좌)     천세헌(시카고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며 많은 돈을 상해임시정부에 전달)   윤지혜 기자기록 타국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 민간외교 독립운동단체 미주 독립운동

2024-08-14

[중앙시론] ‘파차파 캠프’ 미국 순회 전시회 여는 이유

커뮤니티 활동 지원 단체인 멜론재단의 도움으로 파차파 캠프 미국 순회 전시회를 열고 있다. 전시회 첫 번째 장소는 샌프란시스코로 지난 6월 29일 개막식에 특강 차 다녀왔다. 요즘 여러 곳에 강연을 많이 다닌다. 지난 5월에는 서울대에서 개최된 다문화 학회에서 기조 강연을 했고, 샌프란시스코에 이어 7월 필라델피아, 10월엔 버지니아·워싱턴 DC를 다녀와야 한다.   샌프란시스코 전시회는 최근 리모델링 한 샌프란시스코 코리아센터 (전 한인회관)에서 열리는데 개막일부터 성황을 이뤘다. 임정택 샌프란시스코 총영사 부부, 최점균 샌프란시스코 평통 회장 등 약 100여명이 참석했다. 임 총영사는 축사 이후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필자의 특강을 끝까지 경청해 인상적이었다.     샌프란시스코는 초기 한인 독립운동의 성지다. 도산 안창호 선생 부부도 1902년 10월14일 이곳에 도착했으며, 많은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을 했던 곳이다. 대한인국민회 본부가 있었으며 하와이에서 본토로 이주한 한인 대부분이 이곳에 정착했다.       특히 대한인국민회 회장을 역임한 이대위 목사는 미국 정부를 상대로 많은 활동을 했다. 이 목사는 1913년 리버사이드 헤멧 지역에서 발생한 ‘헤멧 밸리 사건’때 당시 국무장관이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얀트에게 ‘한국인은 일본 식민 국민이 아니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낸 인물이다. 이를 통해 일본 정부가 미주 한인 사회에 간섭하는 것을 원천 봉쇄했다.     ‘헤멧 밸리 사건’은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에 거주하던 11명의 한인이 근처 헤멧 밸리 복숭아 농장에 취업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들이 기차로 헤멧역에 도착하자 당시 아시안 배척이 심했던 분위기에서 백인 노동자 200여명이 “돌아가라고” 위협했고, 한인들은 리버사이드로 쫓겨오게 된 사건이다.      당시 일본 측은 이 사건을 핑계 삼아 미국 내 한인들도 ‘일본 식민국민’이라고 주장하며 일본 대사가 미국 정부에 공식 항의하면서 외교 문제로 번졌다. 브라얀트 국무장관은 사태 파악을 지시하고 문제 해결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 목사의 전보를 받게 됐다. 이에 브라얀트 장관은 “미국 거주 한인은 일본 식민 국민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며 일본 정부에는 간섭할 권리가 없다는 입장을 전했다. 이로써 미국 거주 한인은 일본 식민국민이 아니라 당당히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한인들은 지속해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대한인국민회는 한인 대표 단체로 부상했다.     파차파 캠프는 한인 독립운동의 메카 역할을 했던 곳이며,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본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대한인국민회 지방회가 제일 먼저 생긴 곳이 바로 파차파 캠프이다. 또한 상해 임시정부에서 민주공화정을 선포했는데, 그 전인 1911년 12월 삼권분립에 의한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고 실험한 곳이 파차파 캠프다. 이는 파차파 캠프가 ‘민주주의의 씨앗이 뿌려진 역사적 장소’라는 것을 설명한다.   이런 내용의 특강에 만족스러워하는 참석자들 반응에 필자도 보람을 느꼈다. 다음날 이번 전시회를 총괄한 김한일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장의 전화를 받았다. 7월 말까지로 예정된 전시회를 9월 말까지 연장이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다음 전시회는 10월19일 버지니아·워싱턴DC에서 예정되어 있어 일단 연장이 가능하다고 답을 했다.   전시회는 뉴저지·뉴욕 (2025년 1월 18일), 시카고 (2025년 6월 1일), 그리고 리버사이드(2025년 8월 3일부터 11월 23일까지)로 이어질 예정이다.  미국 내 다른 도시와 한국에서도 전시회가 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번 전시회는 미주 한인 사회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현재 리버사이드에 추진 중인 도산기념관 건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차세대들에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체성을 심어주고 자긍심을 심어주는데 동참할 필요가 있다.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중앙시론 미국 전시회 샌프란시스코 전시회 대한인국민회 회장 대한인국민회 본부

2024-07-07

대한인국민회, MZ세대 잡았다

대한인국민회가 낡은 역사유물 전시관 이미지에서 벗어나 MZ 세대의 발걸음을 끌어들이는 핫플레이스로 탈바꿈하고 있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이사장 클라라 원)에 따르면 올해에만 약 1800명의 초·중·고교 학생들이 국민회관을 방문해 역사를 배우고 돌아갔다. 남가주 지역 공립학교 및 주말 한글학교들은 물론 한국에서 방문한 학생들과 각종 연수 프로그램 참여자들이 포함한 숫자다.     웹사이트 방문자도 신기록을 내고 있다.     재단에 따르면 올해 들어 2만7000명이 넘게 웹사이트를 방문했다. 지난해 방문자가 7000여 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무려 3배 이상 증가한 숫자다.   재단이 2003년 웹사이트를 처음 개설한 후 지금까지 방문한 숫자는 24만4000여명으로, 그동안 연평균 1만2000여명 수준에 그쳤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다.     이러한 변화는 차세대를 대상으로 한 교육 프로그램과 홍보 확대로 인지도를 높여나가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 예로 104주년을 맞은 삼일절을 기해 시작한 청소년 역사교육 프로그램은 단순히 전시관을 관람하는 시간으로만 꾸미지 않고 역사퀴즈 대회, 대형태극기 그리기 등을 통해 학생들의 참여도를 높였다.     사적지 탐방 프로그램의 경우 자녀와 학부모가 함께 참가할 수 있게 재구성하는 한편 장학금을 내세운 사진 및 동영상 콘테스트를 열고 수상작은 홈페이지에 올려 한인 이민사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꾸준히 이어질 수 있도록 했다.   현재 재단은 내년 봄부터 새롭게 가르칠 수 있는 역사교육 커리큘럼을 짜고 있다. 새 프로그램은 총 3시간짜리 교육 프로그램으로, 타깃 연령대에 맞춰 학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강의와 특별 활동을 섞어서 진행할 예정이다.   또한 교육 프로그램 장소로 활용했던 국민회관 로비 공간이 다소 협소한 만큼 교회 측에 강의실을 빌리는 안도 검토하고 있다.   웹사이트의 경우 젊은 청소년들도 쉽게 사이트를 탐색하고 인물정보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디자인을 개선했다. 최근 사적지 방문 영상부터 방문자들을 소개하는 사진 등 재단의 활동 내용도 웹사이트를 활용해 자세히 홍보하는 중이다.     클라라 원 재단 이사장은 “학생들이 한인 이민사에 관심을 갖도록 이것저것 시도하고 있는데 조금씩 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다”며 “웹사이트의 경우 차세대들과 함께 경축일 행사를 하면서 지속해서 홍보한 게 방문자 수를 늘린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의 역할은 후손들이 뚜렷한 정체성을 갖고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라며 “앞으로도 학생들과 성인들에게도 유익한 교육현장으로 남을 수 있도록 일하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1938년 신축된 국민회관은 지난 2021년 두 번째 건물 내부 리모델링 작업을 통해 최첨단 전시시설을 갖춘 역사관으로 탈바꿈한 후 청소년 및 성인을 위한 역사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관련 행사들을 개최해왔다.  장연화 기자 [email protected]대한인국민회 프로그램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웹사이트 방문자 청소년 역사교육

2023-12-06

여성 독립유공자 652명 중 55명이 미주서 활동

‘사진신부’로 대표되는 한인 이민선조 1세대 여성들은 1903년 1월 13일 첫 이민 생활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미국 전역에서 조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2023년 8월 기준 여성 독립유공자 총 652명 중 미주 지역에서만 55명이 포함됐다. 〈19면 표 참조〉   이들은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며 여러 활동에 동참했던 수많은 1세대 여성을 대표한다. 당시 모든 한인 여성은 한마음 한뜻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미국에서 자녀의 민족교육에 앞장섰다.   일제강점기 한인 이민선조 1세대 여성들은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LA, 필라델피아 등 미 전역에서 여성단체를 만들고 1945년 8월 15일 광복 순간까지 조국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이들은 광복 후에도 조국이 어려울 때마다 구호품 지원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일제강점기 한인 여성들은 남편의 조국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역할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들은 미주 각 지역에서 부인회를 결성하고, 연합단체인 '대한여자애국단’을 조직해 여성 주도 독립운동 체계를 구축했다. 남편과 대등한 위치에서 독립운동에 나섰고, 피땀어린 노동의 대가로 얻은 귀한 돈을 40년 넘도록 독립자금으로 보탰다. 한인 차세대 정체성 함양을 위한 뿌리교육의 기틀도 120년 전부터 다졌다. 한인 1세대 여성들의 삶을 대변한 주요 독립유공자를 짚어봤다.   ※자료: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미주독립유공자 전집 애국지사의 꿈 민병용 저     ━   3불씩 모아 4만6천불 독립자금 지원      ■강(김)혜원(1885.11~1982.5)   2020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된 강혜원 선생은 평남 평양 사람이다. 1905년 5월 남동생 강영승(후일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등 가족과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이민한 한인 이민선조 1세대다.   1912년 본토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김성권(후일 흥사단 이사장)과 결혼했다.   이후 강혜원 선생은 중가주 다뉴바로 이주했다. 이곳 포도농장에서 일하던 강 선생은 올케 강원신을 비롯, 한성선, 한영숙, 한신애, 김경애 등과 1919년 3월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를 조직했다. 같은 해 8월 2일 새크라멘토, LA, 샌프란시스코, 윌로우스 부인회 대표들과 여성단체 통합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을 창립했다.     초대 총단장 겸 총부 위원으로 1920년 2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통해 독립운동자금 500달러를 임시정부에 전달, 꾸준하게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당시 단원들은 매달 3달러 단비를 임시정부에 송금, 임시정부와 민족운동단체에 총 4만6298달러를 후원했다.     1930년 LA로 이주해 대한여자애국단, 흥사단, 대한인국민회를 후원, 한인 자녀 민족교육 등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강 선생의 가족 5명 또한 건국훈장에 추서됐다.       ━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에 앞장서     ■심영신(1882.07~1975.02)   2021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된 심영신 선생은 황해도 송화 사람이다. 이민선조 1세대로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심 선생은 1913년 4월 19일 하와이에서 황마리아 등과 함께 여성운동단체인 대한인부인회(大韓人婦人會)를 결성했다. 2세 자녀 한국어교육 장려, 일제용품 구매 거부운동, 교회와 사회단체 후원, 재난동포 구제를 주요 활동으로 삼았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조국독립운동 지원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심 선생은 하와이 각 지방의 부녀대표자를 소집해 부녀공동대회를 개최 독립운동 후원을 결의했다.     심 선생은 1920년대 말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재정부족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자 하와이 한인 동포사회에 이 사실을 알리고 모금에 나섰다. 1941년 4월에는 하와이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에 대한부인구제회 대표로 참석했다. 임시정부 후원과 대미외교 및 선전사업에 앞장섰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필라 회의서 식민통치 부당성 고발     ■김노디(1898.10~1972.05)   김노디 선생은 황해도 곡산 사람이다. 어릴 때 부모를 따라 하와이에 이민했다. 사탕수수 노동자였던 부모 헌신으로 오하이오주 오벌린대학에 입학했다.     재학생이던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대표자회의(First Korean Congress)’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김 선생은 한국 여성들이 일제 식민 통치하에 겪는 고난, 해방과 자유를 위한 투쟁에 대해 연설했다.     1919년 10월부터는 매주 1~2차례 또는 3~4차례 미국 각지를 돌았고, 미국사회에 한국의 사정을 알리고 일제의 반인도적인 행위를 고발했다.   김 선생은 1921년 3월 1일 오벌린대학 3·1독립선언 축하 연설, 6월 1일 오벌린 한인구제회 지회를 조직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1923~1935년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여학생 감독, 1930년 9월부터 교감, 1935년 교장으로 교육사업에 매진했다. 1926~1945년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에서 활동하며 독립자금 모금 및 독립자금 납부에 앞장섰다. 해방 후에는 한국으로 들어가 1953년 11월 24일 외자구매처장에 임명됐고, 1955년 8월까지 재직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2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한인사회 단합과 국권 회복운동 주도       ■이(안)혜련(1884.04~1969.04)   평안남도 강서 사람인 이혜련 선생은 1902년 9월 3일 도산 안창호와 결혼했다. 결혼 직후 도산과 미국에 이민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도산을 도와 ‘공립협회’를 결성해 한인사회 단합과 국권회복운동을 주도했다. 공립협회는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통합해 ‘대한인국민회’를 창설,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이 됐다.     이 선생은 도산의 독립운동을 전폭 지원했고, 대한인국민회를 위한 ‘의연금, 국민의무금, 특별의연금’ 등 독립자금 모금에 앞장섰다.     1919년 3·1운동으로 도산이 중국으로 떠난 뒤, 이 선생은 LA에서 ‘부인친애회’를 조직해 독립의연금 모금에 솔선수범했다. 1919년 5월 18일 중가주 다뉴바에서 열린 부인회 통합 대한여자애국단 창설 당시 LA대표로 참석했다. 1938년 3월 10일 도산 순국 후에도 여자애국단을 통한 항일전에 매진했다. 해방 후에도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 LA한인사회 발전에 온 힘을 기울였다. 2008년 건군훈장 애족장 추서.   독립운동 단체 조직에 주도적 역할      ━   서재필 워싱턴 회의 참가경비 모금       ■한성선(1864.04~미상)   한성선 선생은 1919~1945년 중가주 다뉴바에서 신한부인회 대표, 대한여자애국단 총부위원·총단장 등으로 활동하며 조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강원신, 강혜원 등과 한인부녀자회를 이끌고 한인 자녀 민족교육에도 앞장섰다.     1919년 11월 중가주리들리에서 제1차 세계대전 휴전기념일 행사 준비위원으로 선정됐고, 워싱턴회의에 참여할 서재필의 경비를 모금해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로 송금했다. 1921년 11월 25일 다뉴바에서 국민대표회의기성회를 조직했다. 이후 딜라노로 이주한 뒤1931~1932년 3·1절 기념식 참여 등 1918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자금을 지원하였다.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한인 자녀 민족교육 실시에 매진     ■박(강)원신(1887~1977.02)   박원신 선생은 평안남도 평양 사람이다. 1904년 강영승(후일 대한인국민회 총회장)과 결혼 뒤, 1905년 5월 남편 가족과 함께 하와이에 이민했다. 사탕수수 농장 일을 하다 시누이 강혜원과 중가주 다뉴마로 이주해 시간당 15센트 노임을 받고 남편 학업을 뒷바라지했다. 동시에 강혜원과 여성독립운동에 나섰다.     1919년 3월 2일 다뉴바 지방에서 신한부인회를 결성해 회장에 선출됐다. 같은 해 미주 내 부인회를 통합한 대한여자애국단 창설에 나서 제3대 총단장을 역임했다. 이후 미주항일민족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 민족독립운동, 한인 자녀 대상 민족교육, 일본상품 불매운동에도 앞장섰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 독려       ■양제현(1892~1959.06)   양제현 선생은 1917, 1919년 새크라멘토부인회 회장, 1929~1930년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 1925년, 1928년, 1941~1942년, 1944년 대한여자애국단 샌프란시스코지부 단장, 1931~1932년, 1934~1938년, 1940년, 1942년,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이처럼 양 선생은 1917~1945년까지 독립자금 모금 등 조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20년 3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3·1절 기념식에서 ‘여자의 일생’이란 제목으로 독립군을 따라 생을 마칠 것을 연설했다.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차세대 교육 위해 학교 시설 건립     ■임메불(1884.07~1987.12)     평안남도 평양 사람인 임메불 선생은 1909년부터 1945년까지 LA에서 부인친애회 대표, 대한여자애국단 LA지부 단장, LA여자청년회구제원, 대한인국민회 LA지방회 구제위원,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1942~1945년)으로 활동하며 조국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나서고 활동을 지원했다.     임 선생은 1929년 12월~1930년 1월 한인 자녀 국어교육을 위한 교육기관 설립 준비 기성위원으로도 참여했다. 1930년 3월 여자애국단 LA지부단장 때는 조선여자대학 설립 건축비 모금운동도 벌였다.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도 지원했다.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대한부인회 조직해 동포 구제       ■황마리아(1865~1937.08)   평안남도 평양 사람인 황마리아 선생은 ‘자녀 교육’을 위해 1905년 5월 장남 강영승, 강영승의 처 강원신, 차남 강영옥, 장녀 강혜원을 데리고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이민했다.     황 선생은 1913년 4월 호놀룰루에서 한인 자녀 국어교육에 앞장섰다. 일본상품 배척, 동포 구제를 목적으로 한 대한부인회도 조직했다. 1914년 부인회 재무로 서간도 재난동포에게 구제금 300달러를 송금하는 등 6년간 한국과 중국 재난동포 구제사업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부인회를 독립운동자금 모금, 재난동포 구제를 위한 대한부인구제회로 통합했다. 1930년부터 1937년 별세 때까지 임시정부 독립자금 지원, 김구에게 군자금 100달러 지원, 한인협회 조직, 한인교회 사업 등에 헌신했다.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신문 통해 독립사상 고취 전력       ■차(임)인재(1895.04~1971.04)   차인재 선생은 1920년 6월 경기도 수원군수원면삼일학교 교사로 근무 중 박선태 등이 조직한 구국민단에 참여해 ‘독립신문과 대한민보’ 등 독립사상에 관한 기사 배포 활동을 했다.   1920년 미국 이민 후 1924년 대한인국민회 맥스웰지방회 학무원으로 한인 자녀 국어교실도 운영했다. 1933년 대한여자애국단 LA지부 부단장, 1936년 여자청년회 서기로 활동했다. 1941~1945년 사이 대한인국민회 LA지방회와 여자애국단 LA지부 회장으로 활동했다.   차 선생은 1922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한국광복군에 후원금 지원       ■전그레이스(1882.06~1948.07)     전그레이스 선생은 1914년부터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활동을 시작으로 1945년까지 조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 기간 독립금, 조선여자대학 설립 기부금, 군자금 등의 명목으로 30차례 이상 독립자금을 냈다.     전 선생은 샌프란시스코 부인회 활동, 대한여자애국단 활동을 하며 독립운동 지원을 독려했다. 1934년 LA로 이주 후 이듬해 여자애국단 LA지부 단장이 됐다. 1940년 딜라노로 이주한 뒤에는 현지 지부도 결성해 단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한국광복군 후원금 모금에 앞장섰다. 202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건국훈장(建國勳章,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건국훈장’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로가 뚜렷하거나, 국기를 공고히 함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 5등급으로 1등급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 Republic of Korea Medal), 2등급 대통령장(大統領章, Presidential Medal), 3등급 독립장(獨立章, Independence Medal), 4등급 애국장(愛國章, Patriotic Medal), 5등급 애족장(愛族章, National Medal)이다.   김형재 기자독립유공자 여성 후일 대한인국민회 조국 독립운동 독립자금 지원

2023-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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