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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MZ세대 잡았다

대한인국민회가 낡은 역사유물 전시관 이미지에서 벗어나 MZ 세대의 발걸음을 끌어들이는 핫플레이스로 탈바꿈하고 있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이사장 클라라 원)에 따르면 올해에만 약 1800명의 초·중·고교 학생들이 국민회관을 방문해 역사를 배우고 돌아갔다. 남가주 지역 공립학교 및 주말 한글학교들은 물론 한국에서 방문한 학생들과 각종 연수 프로그램 참여자들이 포함한 숫자다.     웹사이트 방문자도 신기록을 내고 있다.     재단에 따르면 올해 들어 2만7000명이 넘게 웹사이트를 방문했다. 지난해 방문자가 7000여 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무려 3배 이상 증가한 숫자다.   재단이 2003년 웹사이트를 처음 개설한 후 지금까지 방문한 숫자는 24만4000여명으로, 그동안 연평균 1만2000여명 수준에 그쳤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다.     이러한 변화는 차세대를 대상으로 한 교육 프로그램과 홍보 확대로 인지도를 높여나가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 예로 104주년을 맞은 삼일절을 기해 시작한 청소년 역사교육 프로그램은 단순히 전시관을 관람하는 시간으로만 꾸미지 않고 역사퀴즈 대회, 대형태극기 그리기 등을 통해 학생들의 참여도를 높였다.     사적지 탐방 프로그램의 경우 자녀와 학부모가 함께 참가할 수 있게 재구성하는 한편 장학금을 내세운 사진 및 동영상 콘테스트를 열고 수상작은 홈페이지에 올려 한인 이민사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꾸준히 이어질 수 있도록 했다.   현재 재단은 내년 봄부터 새롭게 가르칠 수 있는 역사교육 커리큘럼을 짜고 있다. 새 프로그램은 총 3시간짜리 교육 프로그램으로, 타깃 연령대에 맞춰 학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강의와 특별 활동을 섞어서 진행할 예정이다.   또한 교육 프로그램 장소로 활용했던 국민회관 로비 공간이 다소 협소한 만큼 교회 측에 강의실을 빌리는 안도 검토하고 있다.   웹사이트의 경우 젊은 청소년들도 쉽게 사이트를 탐색하고 인물정보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디자인을 개선했다. 최근 사적지 방문 영상부터 방문자들을 소개하는 사진 등 재단의 활동 내용도 웹사이트를 활용해 자세히 홍보하는 중이다.     클라라 원 재단 이사장은 “학생들이 한인 이민사에 관심을 갖도록 이것저것 시도하고 있는데 조금씩 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다”며 “웹사이트의 경우 차세대들과 함께 경축일 행사를 하면서 지속해서 홍보한 게 방문자 수를 늘린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의 역할은 후손들이 뚜렷한 정체성을 갖고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라며 “앞으로도 학생들과 성인들에게도 유익한 교육현장으로 남을 수 있도록 일하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1938년 신축된 국민회관은 지난 2021년 두 번째 건물 내부 리모델링 작업을 통해 최첨단 전시시설을 갖춘 역사관으로 탈바꿈한 후 청소년 및 성인을 위한 역사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관련 행사들을 개최해왔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대한인국민회 프로그램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웹사이트 방문자 청소년 역사교육

2023-12-06

여성 독립유공자 652명 중 55명이 미주서 활동

‘사진신부’로 대표되는 한인 이민선조 1세대 여성들은 1903년 1월 13일 첫 이민 생활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미국 전역에서 조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2023년 8월 기준 여성 독립유공자 총 652명 중 미주 지역에서만 55명이 포함됐다. 〈19면 표 참조〉   이들은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며 여러 활동에 동참했던 수많은 1세대 여성을 대표한다. 당시 모든 한인 여성은 한마음 한뜻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미국에서 자녀의 민족교육에 앞장섰다.   일제강점기 한인 이민선조 1세대 여성들은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LA, 필라델피아 등 미 전역에서 여성단체를 만들고 1945년 8월 15일 광복 순간까지 조국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이들은 광복 후에도 조국이 어려울 때마다 구호품 지원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일제강점기 한인 여성들은 남편의 조국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역할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들은 미주 각 지역에서 부인회를 결성하고, 연합단체인 '대한여자애국단’을 조직해 여성 주도 독립운동 체계를 구축했다. 남편과 대등한 위치에서 독립운동에 나섰고, 피땀어린 노동의 대가로 얻은 귀한 돈을 40년 넘도록 독립자금으로 보탰다. 한인 차세대 정체성 함양을 위한 뿌리교육의 기틀도 120년 전부터 다졌다. 한인 1세대 여성들의 삶을 대변한 주요 독립유공자를 짚어봤다.   ※자료: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미주독립유공자 전집 애국지사의 꿈 민병용 저     ━   3불씩 모아 4만6천불 독립자금 지원      ■강(김)혜원(1885.11~1982.5)   2020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된 강혜원 선생은 평남 평양 사람이다. 1905년 5월 남동생 강영승(후일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등 가족과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이민한 한인 이민선조 1세대다.   1912년 본토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김성권(후일 흥사단 이사장)과 결혼했다.   이후 강혜원 선생은 중가주 다뉴바로 이주했다. 이곳 포도농장에서 일하던 강 선생은 올케 강원신을 비롯, 한성선, 한영숙, 한신애, 김경애 등과 1919년 3월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를 조직했다. 같은 해 8월 2일 새크라멘토, LA, 샌프란시스코, 윌로우스 부인회 대표들과 여성단체 통합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을 창립했다.     초대 총단장 겸 총부 위원으로 1920년 2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통해 독립운동자금 500달러를 임시정부에 전달, 꾸준하게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당시 단원들은 매달 3달러 단비를 임시정부에 송금, 임시정부와 민족운동단체에 총 4만6298달러를 후원했다.     1930년 LA로 이주해 대한여자애국단, 흥사단, 대한인국민회를 후원, 한인 자녀 민족교육 등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강 선생의 가족 5명 또한 건국훈장에 추서됐다.       ━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에 앞장서     ■심영신(1882.07~1975.02)   2021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된 심영신 선생은 황해도 송화 사람이다. 이민선조 1세대로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심 선생은 1913년 4월 19일 하와이에서 황마리아 등과 함께 여성운동단체인 대한인부인회(大韓人婦人會)를 결성했다. 2세 자녀 한국어교육 장려, 일제용품 구매 거부운동, 교회와 사회단체 후원, 재난동포 구제를 주요 활동으로 삼았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조국독립운동 지원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심 선생은 하와이 각 지방의 부녀대표자를 소집해 부녀공동대회를 개최 독립운동 후원을 결의했다.     심 선생은 1920년대 말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재정부족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자 하와이 한인 동포사회에 이 사실을 알리고 모금에 나섰다. 1941년 4월에는 하와이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에 대한부인구제회 대표로 참석했다. 임시정부 후원과 대미외교 및 선전사업에 앞장섰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필라 회의서 식민통치 부당성 고발     ■김노디(1898.10~1972.05)   김노디 선생은 황해도 곡산 사람이다. 어릴 때 부모를 따라 하와이에 이민했다. 사탕수수 노동자였던 부모 헌신으로 오하이오주 오벌린대학에 입학했다.     재학생이던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대표자회의(First Korean Congress)’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김 선생은 한국 여성들이 일제 식민 통치하에 겪는 고난, 해방과 자유를 위한 투쟁에 대해 연설했다.     1919년 10월부터는 매주 1~2차례 또는 3~4차례 미국 각지를 돌았고, 미국사회에 한국의 사정을 알리고 일제의 반인도적인 행위를 고발했다.   김 선생은 1921년 3월 1일 오벌린대학 3·1독립선언 축하 연설, 6월 1일 오벌린 한인구제회 지회를 조직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1923~1935년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여학생 감독, 1930년 9월부터 교감, 1935년 교장으로 교육사업에 매진했다. 1926~1945년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에서 활동하며 독립자금 모금 및 독립자금 납부에 앞장섰다. 해방 후에는 한국으로 들어가 1953년 11월 24일 외자구매처장에 임명됐고, 1955년 8월까지 재직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2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한인사회 단합과 국권 회복운동 주도       ■이(안)혜련(1884.04~1969.04)   평안남도 강서 사람인 이혜련 선생은 1902년 9월 3일 도산 안창호와 결혼했다. 결혼 직후 도산과 미국에 이민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도산을 도와 ‘공립협회’를 결성해 한인사회 단합과 국권회복운동을 주도했다. 공립협회는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통합해 ‘대한인국민회’를 창설,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이 됐다.     이 선생은 도산의 독립운동을 전폭 지원했고, 대한인국민회를 위한 ‘의연금, 국민의무금, 특별의연금’ 등 독립자금 모금에 앞장섰다.     1919년 3·1운동으로 도산이 중국으로 떠난 뒤, 이 선생은 LA에서 ‘부인친애회’를 조직해 독립의연금 모금에 솔선수범했다. 1919년 5월 18일 중가주 다뉴바에서 열린 부인회 통합 대한여자애국단 창설 당시 LA대표로 참석했다. 1938년 3월 10일 도산 순국 후에도 여자애국단을 통한 항일전에 매진했다. 해방 후에도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 LA한인사회 발전에 온 힘을 기울였다. 2008년 건군훈장 애족장 추서.   독립운동 단체 조직에 주도적 역할      ━   서재필 워싱턴 회의 참가경비 모금       ■한성선(1864.04~미상)   한성선 선생은 1919~1945년 중가주 다뉴바에서 신한부인회 대표, 대한여자애국단 총부위원·총단장 등으로 활동하며 조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강원신, 강혜원 등과 한인부녀자회를 이끌고 한인 자녀 민족교육에도 앞장섰다.     1919년 11월 중가주리들리에서 제1차 세계대전 휴전기념일 행사 준비위원으로 선정됐고, 워싱턴회의에 참여할 서재필의 경비를 모금해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로 송금했다. 1921년 11월 25일 다뉴바에서 국민대표회의기성회를 조직했다. 이후 딜라노로 이주한 뒤1931~1932년 3·1절 기념식 참여 등 1918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자금을 지원하였다.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한인 자녀 민족교육 실시에 매진     ■박(강)원신(1887~1977.02)   박원신 선생은 평안남도 평양 사람이다. 1904년 강영승(후일 대한인국민회 총회장)과 결혼 뒤, 1905년 5월 남편 가족과 함께 하와이에 이민했다. 사탕수수 농장 일을 하다 시누이 강혜원과 중가주 다뉴마로 이주해 시간당 15센트 노임을 받고 남편 학업을 뒷바라지했다. 동시에 강혜원과 여성독립운동에 나섰다.     1919년 3월 2일 다뉴바 지방에서 신한부인회를 결성해 회장에 선출됐다. 같은 해 미주 내 부인회를 통합한 대한여자애국단 창설에 나서 제3대 총단장을 역임했다. 이후 미주항일민족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 민족독립운동, 한인 자녀 대상 민족교육, 일본상품 불매운동에도 앞장섰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 독려       ■양제현(1892~1959.06)   양제현 선생은 1917, 1919년 새크라멘토부인회 회장, 1929~1930년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 1925년, 1928년, 1941~1942년, 1944년 대한여자애국단 샌프란시스코지부 단장, 1931~1932년, 1934~1938년, 1940년, 1942년,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이처럼 양 선생은 1917~1945년까지 독립자금 모금 등 조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20년 3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3·1절 기념식에서 ‘여자의 일생’이란 제목으로 독립군을 따라 생을 마칠 것을 연설했다.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차세대 교육 위해 학교 시설 건립     ■임메불(1884.07~1987.12)     평안남도 평양 사람인 임메불 선생은 1909년부터 1945년까지 LA에서 부인친애회 대표, 대한여자애국단 LA지부 단장, LA여자청년회구제원, 대한인국민회 LA지방회 구제위원,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1942~1945년)으로 활동하며 조국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나서고 활동을 지원했다.     임 선생은 1929년 12월~1930년 1월 한인 자녀 국어교육을 위한 교육기관 설립 준비 기성위원으로도 참여했다. 1930년 3월 여자애국단 LA지부단장 때는 조선여자대학 설립 건축비 모금운동도 벌였다.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도 지원했다.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대한부인회 조직해 동포 구제       ■황마리아(1865~1937.08)   평안남도 평양 사람인 황마리아 선생은 ‘자녀 교육’을 위해 1905년 5월 장남 강영승, 강영승의 처 강원신, 차남 강영옥, 장녀 강혜원을 데리고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이민했다.     황 선생은 1913년 4월 호놀룰루에서 한인 자녀 국어교육에 앞장섰다. 일본상품 배척, 동포 구제를 목적으로 한 대한부인회도 조직했다. 1914년 부인회 재무로 서간도 재난동포에게 구제금 300달러를 송금하는 등 6년간 한국과 중국 재난동포 구제사업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부인회를 독립운동자금 모금, 재난동포 구제를 위한 대한부인구제회로 통합했다. 1930년부터 1937년 별세 때까지 임시정부 독립자금 지원, 김구에게 군자금 100달러 지원, 한인협회 조직, 한인교회 사업 등에 헌신했다.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신문 통해 독립사상 고취 전력       ■차(임)인재(1895.04~1971.04)   차인재 선생은 1920년 6월 경기도 수원군수원면삼일학교 교사로 근무 중 박선태 등이 조직한 구국민단에 참여해 ‘독립신문과 대한민보’ 등 독립사상에 관한 기사 배포 활동을 했다.   1920년 미국 이민 후 1924년 대한인국민회 맥스웰지방회 학무원으로 한인 자녀 국어교실도 운영했다. 1933년 대한여자애국단 LA지부 부단장, 1936년 여자청년회 서기로 활동했다. 1941~1945년 사이 대한인국민회 LA지방회와 여자애국단 LA지부 회장으로 활동했다.   차 선생은 1922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한국광복군에 후원금 지원       ■전그레이스(1882.06~1948.07)     전그레이스 선생은 1914년부터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활동을 시작으로 1945년까지 조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 기간 독립금, 조선여자대학 설립 기부금, 군자금 등의 명목으로 30차례 이상 독립자금을 냈다.     전 선생은 샌프란시스코 부인회 활동, 대한여자애국단 활동을 하며 독립운동 지원을 독려했다. 1934년 LA로 이주 후 이듬해 여자애국단 LA지부 단장이 됐다. 1940년 딜라노로 이주한 뒤에는 현지 지부도 결성해 단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한국광복군 후원금 모금에 앞장섰다. 202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건국훈장(建國勳章,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건국훈장’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로가 뚜렷하거나, 국기를 공고히 함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 5등급으로 1등급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 Republic of Korea Medal), 2등급 대통령장(大統領章, Presidential Medal), 3등급 독립장(獨立章, Independence Medal), 4등급 애국장(愛國章, Patriotic Medal), 5등급 애족장(愛族章, National Medal)이다.   김형재 기자독립유공자 여성 후일 대한인국민회 조국 독립운동 독립자금 지원

2023-09-21

[중앙시론] 도산 기념관과 파차파 캠프

2023년 2월 14일 대한민국 국회 제1 소회의실에서 리버사이드에 미주도산기념관 건립을 위한 정책 토론회가 열렸다. 왜 리버사이드에 도산기념관을 건립하려고 하는가?     필자는 최근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00년대 초 리버사이드에 설립한 파차파 캠프 연구와 관련 특강을 많이 하면서 그 역사적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게 되었다. 파차파 캠프는 우리에게 무슨 역사적 의미가 있는가?   첫째, 파차파 캠프는 미국 최초로 한인 동네(타운)가 생긴 곳이다. 1908년 뉴욕의 산본 보험회사가 제작한 지도에는 파차파 캠프를 ‘한인 동네 (Korean Settlement)’로 명확하게 표기하고 있다. 또한 1910년 10월 5일자 신한민보는 ‘미국에서 최초로 생긴 한인동네’가 파차파 캠프임을 보도하고 있다.     둘째, 파차파 캠프는 초기 미주한인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1905년 공립협회가 리버사이드 한인을 중심으로 설립되었고, 1906년에는 신민회가 발기되었다. 또 대한인국민회 지방회가 최초로 설립된 곳이다. 즉, 미주 한인사회 초기 독립운동 단체들이 파차파 캠프에서 시작되었고 본부를 샌프란시스코 또는 로스앤젤레스에 두었던 것이다.   셋째, 미주 한인들이 일본의 식민 국민이 아니고 한국인으로 미국 정부로부터 인정받게 해준 1913년 헤멧 벨리 사건의 주역들 역시 파차파 캠프 한인들이다. 윌리엄 제닝스 브랴얀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일본 식민 국민이 아니며 한국인” 임을 밝히면서 미주 한인을 대표하는 단체는 대한인국민회라고 인정해 주었다. 이로 인해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넷째, 파차파 캠프는 민주 공화제 실험에 성공한 역사적인 장소다. 대의원 제도 도입 등 민주 절차에 따라 운영됐다.  도산 안창호의 이상촌 건립은 바로 파차파 캠프에서 시작된 것이다.   2020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 논문에서 최승원 박사는 “도산의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은 파차파 캠프 성공 경험의 반복과 재생산이었다”라고 결론 내렸다. 이처럼 파차파 캠프에서의 이상촌 실험은 도산 안창호의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다섯째, 대한인국민회는 도산 안창호의 리더십으로 1918년 여성에게도 남성과 동등한 회원 입회를 허락하는 등 남녀평등을 실천했다. 실제로 파차파 캠프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등한 역할을 하겠다고 선언했고 기념회에서 강연과 기도 등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미국에서 여성들이 참정권을 획득한 것이 1920년이니 도산 안창호는 이보다 2년 앞서서 여성들에게 남성들과 동등한 지위와 권리, 그리고 의무를 부여한 것이다. 대한민국 여성사를 다시 재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섯째, 1911년 제3차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가 개최된 곳이 파차파 캠프다. 바로 이곳에서 21조 의안을 통과시켜 무형정부를 설립하고 대의원 제도와 사법제도도 도입해 삼권 분립에 의한 민주 공화제를 제도화했다. 중앙총회를 신설하면서 해외 한인은 물론 일제의 강점으로 제대로 발언하지 못하는 국내 한인들까지 대표하는 무형정부 설립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1910년 강압적으로 조국을 빼앗긴 1년 후 미주 한인들이 민주공화제를 도입하고 실천한 곳이 바로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민주공화제를 선포하는데 바로 파차파 캠프에서 통과된 21조 의안이 그 초석이 됐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대한민국 역사학계에는 어떻게, 왜 상해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정을 채택했는지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박찬승 교수는 민주공화정 도입 시 별다른 토의도, 반대도 없어 도입이 대세였다는 한국 역사학계의 입장을 알려주고 있다.     민주공화제는 이미 파차파 캠프에서 1911년 도입돼 실천하고 있었고, 추후 대동단결선언문 (1917)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따라서 상해임시정부의 민주공화제 도입에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또한 1948년 대한민국이 민주공화제를 선포하면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했는데 대한민국 민주공화제는 바로 파차파 캠프로 연결될 수 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미주 한인들은 대한민국 민주공화제의 뿌리가 바로 미국의 리버사이드였다는 자부심을 갖고 후세에게도 이런 역사를 당당히 물려주자.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중앙시론 기념관 도산 미주도산기념관 건립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리버사이드 한인

2023-03-20

2·8 독립선언서 영문 필사본 104년 만에 공개

3·1운동 당시 한인들의 독립염원을 담은 ‘2·8 독립선언서 영문 필사본’이 104년 만에 공개된다.   23일(한국시간) 한국 독립기념관은 LA대한인국민회 기념관에서 받은 사료 중 2·8 독립선언서 영문 필사본을 처음 발견됐다고 밝혔다.   2·8 독립선언서의 영문 필사본과 타자본은 대한인국민회 기념관 소장자료로 6쪽 분량이다. 독립기념관 측은 현재까지 알려진 2·8 독립선언서 중 가장 먼저 작성된 것이라고 전했다.     이와 관련 1919년 2월 8일 도쿄 YMCA 강당에서 조선인 유학생 약 600명은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했다. 이번에 공개되는 영문 필사본은 당시 조선이 유학생들이 1월 말쯤 미국 대한인국민회에 발송한 영문 초고로 알려졌다.   1919년 3·1운동 당시 한국에서는 여러 독립선언서가 배포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하지만 실물이 확인되는 사례는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2·8 독립선언서와 3·1 독립선언서는 내용이 조금 다르다. 당시 전국적인 독립운동에 앞서 여러 의견이 오간 것으로 보인다.   실제 3·1 독립선언서는 비폭력 혁명 방법을 채택했으나 2·8 독립선언서는 최후의 1인까지 혈전을 불사하겠다고 선포했다.   이밖에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에 보관됐던 독립선언서로 국내 및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배포된 ‘대한독립선언서, ‘대한여자독립선언서’, ‘대한승려연합회선언서’도 공개된다.     대한승려연합회선언서는 일제문서나 상해판 ‘독립신문’에 그 내용이 소개됐지만, 원본이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긴밀하게 협력하고 임시정부의 연통제 설립과 관련해 제2의 독립선언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제작됐다.   독립기념관 측은 당시 여러 선언서가 대한인국민회 등 미주 지역에 전달돼 현재 빛을 보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지난 2003년 남가주 한인사회는 USC 인근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복원공사 중 다락에서 한인 이민선조가 남긴 유물 1만여점을 발견한 후 2019년 11월 대여 방식으로 독립기념관에 보냈다. 유물은 남가주 한인사회가 수장고를 완공하면 LA에서 보존·전시할 예정이다. 김형재 기자 kim.ian@koreadaily.com대한인국민회 독립선언 대한인국민회 사료 la대한인국민회 기념관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2023-02-22

'디아스포라' 역사로 정체성 일깨운다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KOWIN) 미 서부 OC지회(이하 코윈OC, 회장 홍영옥)가 내달 25일(토) 오전 10시~오후 3시까지 LA의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에서 제11회 연례 유스 콘퍼런스를 개최한다.   코윈OC 측은 OC의 7~12학년 학생 대상으로 개최할 이번 콘퍼런스에서 이민 선조들의 디아스포라(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것) 역사를 통해 차세대에게 한인 정체성을 일깨울 예정이라고 밝혔다.   홍영옥 회장은 “대한인국민회 김혜자 이사가 도산 안창호 선생 등의 독립 운동을 포함해 한인 이민 선조들의 역사에 관한 교육을 담당한다. 질의와 응답, 자유 토론 시간도 갖는다”고 밝혔다. 이어 “참가하는 학생은 기념관에 전시된 사진과 슬라이드를 통해 생생한 역사의 발자취를 통해 한인으로서의 뿌리 의식과 정체성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주디 박 홍보실장은 “참가 학생에겐 한인 정치인들 명의의 인증서를 준다”고 말했다.   코윈OC 측은 콘퍼런스가 끝난 뒤, 이민 선조들의 디아스포라를 주제로 에세이 대회도 열 예정이다.   유스 콘퍼런스 참가를 원하는 학생은 이름, 학년, 이메일 주소, 전화 번호 등을 코윈OC 이메일 (kowinoc2022@gmail.com)로 보내 신청하면 된다. 신청 마감일은 내달 15일(수)이다.     윤지나 사무국장은 “참가 정원이 50명이기 때문에 서둘러 신청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점심 도시락이 포함된 참가비는 1인당 10달러이며, 현장에서 현금으로 내야 한다.   문의는 주디 박 홍보실장(714-699-0436)에게 하면 된다.   이번 유스 콘퍼런스는 코윈OC 주최, 세계한민족여성재단(KOWINNER) 주관으로 열린다. 한국 여성가족부, LA총영사관 등이 특별 후원을, 미주도산기념사업회, 대한인국민회, 통일교육위원 LA협의회, 직지 LA홍보위원회 등이 후원을 각각 맡았다.  글·사진=임상환 기자정체성 역사 한인 정체성 대한인국민회 기념관 대한인국민회 김혜자

2023-02-21

"중가주 사적지 탐방 재개합니다"

"2세들에게 역사의식과 정체성을 심어줄 수 있는 프로그램 확대에 노력하겠습니다."   올 한해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을 끌어갈 클라라 원 신임 이사장은 "팬데믹으로 중단됐던 중가주 역사탐방을 다시 시작한다. 또 삼일절이 있는 3월 한 달 동안 매주 토요일마다 청소년들을 위한 뿌리교육 현장학습을 운영할 것"이라며 "이미 2주 예약이 완료됐다. 관심을 갖는 한인들이 많아 든든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원 이사장은 이어 "대한인국민회관은 유일한 역사교육의 현장이다. 앞으로 이 현장을 알리고 계승시켜 나가는 일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며 "이를 위해 다음 세대를 연결하는 브리지 역할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세대 교체를 이룰 수 있도록 전문직에 종사하는 이사들을 다수 보강했다"고 설명했다.   신임이사들은 미셸 윤(총무이사), 최미경(교육분과위원장), 최만규(행사분과위원장), 김혜자 변호사(학술편찬위원장), 이현주(사업분과위원장)씨다. 특히 김 신임이사는 증조할아버지가 한국에서는 공주에서 만세시위 운동을 선도하고 하와이에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도왔던 독립유공자 안창호 목사(1884~1969)로 알려져 이번 활동에 의미를 더했다.   김 신임이사는 "증조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인 건 알았지만 대한인국민회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며 "그동안 밖에서 지켜봤는데 앞으로는 내적 성장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또 배국희 전 이사장이 신임 이사들과 대한인국민회를 연결해줄 역할을 위해 부이사장으로 흔쾌히 합류했다. 배 부이사장은 "대한인국민회의 역사적 배경과 사명을 다음 세대에 잘 전달되도록 중간 다리 역할을 감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밖에 원 이사장은 오는 3월 1일 삼일절에 대한인 국민회관에서 흥사단, 광복회, 3.1여성동지회, 도산안창호기념재단과 LA한인회와 연합해 삼일절 행사를 갖는다고 알리고 "앞으로도 동포사회의 단합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며 한인 사회의 지원과 후원을 부탁했다.   한편 대한인국민회는 1909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단체다. 1938년 한인들이 몰려 살던 LA의 현 위치(1368 W. Jefferson Blvd.)에 총회관을 세워 한인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1991년 LA시가 '한국 독립기념관'으로 사적지(548호)로 지정했다. 2002년 대한인국민회관 복원위원회가 구성돼 활동을 다시 시작하면서 운영을 맡을 기념재단을 설립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장연화 기자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대한인국민회관 복원위원회 대한인국민회의 역사적

2023-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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