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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한국 첫 노벨문학상…아시아 여성으로도 최초 수상

소설가 한강(사진)이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의 영예를 안았다. 2016년 소설 '채식주의자'로 부커상을 수상한 지 8년 만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10일(현지시간) 수상자로 한강의 이름을 호명하며 “역사적 트라우마와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하면서도 시적인 소설”을 쓴 작가라고 소개했다.     아시아 여성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인의 노벨상 수상은 지난 2000년 평화상을 탄 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로, 24년 만이다. 〈관계기사 3면〉   한강은 유려한 문장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으로 일찍부터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그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은 작가다.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근무하던 중 1993년 ‘문학과사회’에 ‘서울의 겨울’ 등 시 4편을 실으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이듬해인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붉은 닻’이 당선되며 소설가로 첫발을 내디뎠고, 1995년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을 출간했다.   2005년 ‘몽고반점’이 이상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2007년 발표한 '채식주의자'다. '채식주의자'는 육식을 멀리하는 주인공을 통해 욕망과 폭력의 본질을 탐구한 작품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16년 이 책을 영어로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와 함께 맨부커 국제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2014년 발표한 '소년이 온다'는 또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역사의 한 가운데 선 개인의 고통과 내면을 섬세하게 그린 작품이다. 한강은 한 인터뷰에서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았다”며 “광주에서 학살된 이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첩은 내가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된 비밀스러운 계기가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작별하지 않는다'로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수상했다. 부커상에 이은 또 한 번의 ‘한국인 최초’ 타이틀이었다.     맨부커상 수상 이후 한강은 노벨문학상의 유력 후보로 꼽혀 왔다. 특히 올해는 아시아의 여성 작가가 수상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면서 중국의 찬쉐 등과 함께 주요 후보로 거론됐다.   매츠 말름 노벨상 종신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작가의 “역사의 상처와 직면하고 인간 삶의 부서지기 쉬움을 노정한 강렬한 시적 산문”을 높이 샀다고 말했다. 말름 위원장은 또 1시간 전 수상자 통보 전화에서 한강은 “다른 날처럼 보낸 뒤 막 아들과 저녁을 마쳤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한강은 이날 수상자 발표 후 노벨위원회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매우 놀랍고 영광스럽다”는 소감을 밝혔다. 또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여러 작가의 “모든 노력과 힘이 나에게 영감을 줬다”고 말했다. 한강은 앞서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전하며 “Thanks!?Thanks! Thanks!(감사 감사 감사하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노벨문학상은 1901년부터 올해까지 총 117차례 수여됐으며, 상을 받은 사람은 121명이다. 한강은 여성 작가로서는 역대 18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됐다. 아시아 국가 국적의 작가가 수상한 것은 이번이 2012년 중국 작가 모옌 이후 12년 만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에게는 상금 1100만 크로나(약 13억4000만원)와 메달, 증서가 수여된다. 노벨상 시상식은 알프레드 노벨의 기일인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생리의학·물리·화학·문학·경제상)과 노르웨이 오슬로(평화상)에서 열린다. 이영희 기자김대중 노벨문학상 노벨문학상 수상 이상문학상 수상작 국제상 수상자

2024-10-10

'김대중재단' 애틀랜타지회 출범

민주, 인권, 평화를 지향하는 ‘김대중 정신’을 계승하는 김대중재단(이사장 권노갑)의 애틀랜타 지회가 18일 둘루스 1818클럽에서 기념식을 갖고 출범했다.   김대중재단은 지난해 한국에서 설립됐으며, 올해 ‘김대중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국 각 지역에서 지회가 출범한다. 동남부의 애틀랜타, 플로리다, 테네시주 멤피스를 포함, 24개 지회가 미국에서 결성된다.   김대중재단 재외동포위원회의 김성곤 위원장은 지난 12일 샌프란시스코를 시작으로 애틀랜타를 5번째로 방문해 애틀랜타지회 회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기념강연을 가졌다. 김 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을 설명하고 한반도 평화운동을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미국은 한반도 평화통일의 열쇠를 갖고 있다. 시민권이 있는 한인 동포들이 김대중 대통령의 정신을 이어받아 미 정부를 움직여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애틀랜타 지회의 회장은 김경호 전 호남향우회장이 맡는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상과 철학을 계승하고 업적을 선양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타민족에게까지 전하고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미주 전 지회를 관리하는 중앙본부도 이날 출범했다. 김형률 미주한인상공회의소 총연합회 이사장이 회장직을 맡는다. 김형률 회장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위하는 정신은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고 말했다.   재단 측은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연구, 국제교류 및 연대사업 진행, 장학사업을 통한 인재 양성에 기여, 사회복지 사업 전개 등의 주요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에는 김백규 전 애틀랜타 한인회장, 이경철 미주한인상공회의소 총연합회장, 한오동 애틀랜타-조지아 한인상공회의소 회장, 미쉘 강 조지아 주 하원 99지역구 후보 등이 참석해 축사를 전했다. 윤지아 기자김대중 애틀랜타지회 애틀랜타지회 회장 미주한인상공회의소 총연합회장 한반도 평화통일

2024-08-19

김대중 재단 OC지부 출범…장정숙씨 ‘초대 지부장’

김대중 재단 오렌지카운티 지부(이하 OC지부)가 지난 14일 출범했다.   OC지부는 이날 부에나파크의 더 소스 몰 내 OC한인상공회의소(회장 짐 구) 사무실에서 진행된 김대중 재단(이사장 권노갑) 미 서부 본부(본부장 김동수) 출범식을 〈본지 8월 15일자 A-4면〉 통해 첫 걸음을 내디뎠다.   김성곤 김대중 재단 재외동포위원장은 출범식에서 김동수 서부 본부장과 장정숙(전정숙) OC지부장, 밀리 남 LA지부장, 배석준 애리조나 지부장 등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또 차종환 박사와 정창문 전 OC법보선원장에게 재단 상임고문 위촉장을 전달했다.   장 지부장은 “앞으로 미 서부본부의 활동을 지원하면서 오렌지카운티 지부의 독자적인 활동 방안도 마련하도록 하겠다”라고 밝혔다. 부회장은 김형덕씨, 제니스 박씨, 사무국장은 미나 김씨가 맡는다. OC지부는 정찬열 시인을 고문으로 위촉했다.   장 지부장에 따르면 OC지부의 등록 회원은 현재 20여 명이다. OC호남향우회장을 지낸 장 지부장은 “미 서부 본부 출범식과 겹쳐 좌석이 모자라 회원 일부만 참석했다. 현재 회원 중 호남 출신이 다수인데 앞으로 비호남 출신 회원을 더 늘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장 지부장은 올해 초 부에나파크 커뮤니티 센터에서 김대중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영화 ‘길위에 김대중(감독 민환기)’ 무료 상영회를 연 바 있다. 장 지부장은 “내년 초에 ‘길위에 김대중’ 후속작이 나오면 또 무료 상영회를 열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날 출범식은 김대중 대통령 서거 15주년 추모식과 탄생 100주년 기념 강연회에 이어 열렸다.   행사 참석자들은 김대중 대통령의 생애를 담은 동영상을 시청했다. 김성곤 위원장은 ‘인간 김대중과 한반도 평화’란 제목으로 강연했다.     OC지부 관련 문의는 전화(714-822-7744)로 하면 된다. 글·사진=임상환 기자김대중 재단 la지부장 배석준 오렌지카운티 지부 재단 오렌지카운티

2024-08-15

김대중 재단 북미주 지부 출범…탄생 100주년·서거 15주년에

북미주 지부는 ‘민주·인권·평화’ 등 김대중 정신을 계승하며 한인사회 단합과 한반도 평화 운동을 펼쳐나갈 예정이다.   14일 오렌지카운티 한인상공회의소에서는 김대중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및 서거 15주년 추모식이 열렸다.     김대중 재단 상임고문 차종환 박사는 추모사를 통해 김대중 대통령이 남긴 공동체 정신과 평화를 되새겼다.     또한 추모식이 끝난 뒤 참석자들은 김대중 재단 미국 서부본부 출범식을 진행했다. 김대중 재단은 지난해 한국에서 출범했다. 김대중 재단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상과 철학, 민주화 및 남북평화 업적을 알리고 국내외 교류 협력을 활동 목표로 삼고 있다.     권노갑 전 국회의원이 이사장, 문희상 전 국회의장이 수석부이사장, 김성곤 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이 재외동포위원장을 맡았다.     이날 김대중 재단은 미국 서부본부 출범식에서 LA, 뉴욕, 애틀랜타, 워싱턴DC, 샌프란시스코, 캐나다 토론토 등 24개 지부 설립 및 임명장을 수여한다고 밝혔다. 미국 본부장은 한인상공회의소 총연합회 이사장인 김형률씨가 서부 본부장은 김동수 전 민주평통 오렌지·샌디에이고 카운티 회장이 맡는다.     미주 지부 출범을 위해 LA를 방문한 김성곤 재외동포위원장은 “요즘 한국 정치권은 선거가 끝나면 이긴 쪽이 패배한 쪽을 정치 보복하는 등 사회 전반에 갈등이 심하다”면서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을 탄압했던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을 세웠고,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에게도 정치 보복을 하지 않았다. 국내외적으로 평화와 화합의 정신을 몸소 실천한 김대중 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이어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에서 2년 6개월 동안 망명생활을 할 때 도와주신 분들이 매우 많다. 그분들을 중심으로 북미주 지부를 출범했고, 한인사회가 한민족 번영을 위해 다 함께 협력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서부본부는 남가주 지역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인권 중시 및 민주주의 정신을 알리고 한반도 평화운동을 펼쳐나갈 방침이다.     김동수 서부본부장은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 근대화를,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화를 이뤘다”며 “인권, 민주주의, 평화의 가치를 알리는 강연회와 김대중 대통령 일대기 영화 상영 등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중 재단 북미주 서부본부는 15일(오늘) LA에서도 간담회를 진행한다. 김형재 기자 kim.ian@koreadaily.com김대중 북미주 북미주 재단 북미주 지부 서부본부 출범식

2024-08-14

[부고] 아시아 전문 언론인 플레이트 별세

아시아와 미중관계 전문가로 알려진 톰 플레이트(사진) 전 LA타임스 편집장이 지난달 23일 별세했다. 항년 79세.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앰허스트대에서 학내 신문 제작에 참여하며 언론인의 삶을 시작했다. 이후 뉴스위크, 워싱턴 포스트 인턴을 거쳐 1967년 국무부 연설문 작성자로도 일했다. 뉴욕 매거진, LA 헤럴드 이그제미너, 타임 등을 거친 그는 1989년부터 LA타임스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로널드 레이건, 빌 클린턴, 존 메이어, 토니 블레어 등 리더들을 인터뷰했으며 한국의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 인터뷰했다. 그는 동시에 미국 언론인 중 가장 오래 아시아 문제에 대한 칼럼을 게재한 인물로도 기록됐다.   특히 그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 정책’을 높이 평가하고 한국과 미국이 북한과 지속적인 대화 통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언론을 떠난 후에 그는 로욜라메리마운트대 등 남가주 주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왔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는 연세대 학생들을 화상으로 지도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아내 안드레아, 딸 애리 키스가 있다. 최인성 기자 ichoi@koreadaily.com부고 김대중 플레이트 플레이트 별세 아시아 전문 아시아 문제

2023-06-02

[김창준] 김대중 대통령의 의회 연설, 감동의 기립박수

 1998년 6월 10일. 김대중 대통령이 연방의회에서 상하원 합동 연설을 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합동 연설 때는 내가 직접 관여했다. 그래서 연설문 내용을 상세히 알았고, 비교적 잘 해내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는 분위기가 달랐다. 우선 합동 연설 참석 의원 수가 적었다. 하원의원 435명 중 공화당 의원 20명과 민주당 의원 30명 등 50여명 정도만 참석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도 한국 대통령 연설인데 그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직접 나섰다. 더 꽉 찬 느낌을 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각 사무실 인턴들과 보좌관들에게 연락했다. 상원에서는 100명 의원 중 15명 정도만 참석했다. 이래저래 수소문해 350명 이상 의회에 나오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일단 TV화면으로 의사당이 꽉 차 보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2층에는 가족과 수행원들이 빈자리를 채웠다. 대충 사람이 많아 보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열렬한 기립박수를 받으며 입장했다. 간단한 인사 뒤 연단에 오른 김 전 대통령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당연히 한국어로 할 줄 알았는데 영어로 연설했다.     외국 대통령이 연방의회 합동 연설에서 영어로 연설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스라엘 수상 베냐민 네타냐후는 14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에 와 펜실베이니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은 MIT에서 건축학을 전공해 영어가 모국어처럼 유창하지만 의회 연설 만큼은 이스라엘어로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과감하게 영어를 택했다. 연방 의원과 인턴, 보좌관 등 참석자들은 이미 영어로 쓴 연설문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따라 읽어 내려가면서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연설문 내용은 근사했다. 그런데 영어로 연설한 데 대한 부정적 반응도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김 대통령 발음이 썩 좋지 않아 연설문 없이 2층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연설 내용을 거의 못 알아들었다는 불평이 나왔다. 김 대통령의 영어 실력은 출중하지만, 발음에 악센트가 강했다.     어려서부터 미국에서 자란 내 처제도 2층에서 경청했지만, 못 알아들었다고 불평했다. 왜 우리 말로 하지 않고 서툰 영어로 했는지 사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도 기억하는 걸 보면 그의 연설 내용은 분명 좋았다.     과거 한국 군사정권이 자기를 바다에 던져 죽이려는 순간 미군 헬리콥터가 와서 살려줬다면서 “미국은 내게 생명의 은인”이라고 한 대목이 하이라이트였다. 본인도 감격에 벅차 잠시 말을 멈추었고, 참석자들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모두 벌떡 일어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나도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박수에 동참했다. 2층 방청석에서도 그 말은 알아들었는지, 열렬한 박수가 쏟아졌다.     김 대통령은 탄탄한 한미 우호 관계를 약속하면서 합동 연설을 마쳤다.     김영삼 전 대통령 연설이 오버랩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 연설도 내용이 좋아 박수는 많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 때의 감동적인 기립박수는 나오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 연설은 의회에서 한동안 화제가 됐다. 워싱턴 정가는 앞으로의 한미관계를 낙관하면서 한국은 역시 미국과 피를 나눈, 아시아의 가장 믿을 수 있는 동맹국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불행히도 대통령에 취임한 뒤 불과 1년이 채 안 돼 한미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으로 불린 대북정책 때문이었다. 한국 정부가 북한에 보내는 식량이 굶주린 주민들에게 가지 않고 군용으로 전용된다는 증거를 확보한 미국 측은 불평을 제기했다. 그러면서도 자칫 잘못 대응했다가는 내정간섭이라는 비판이 나올까 매우 신중한 태도였다. 증거가 있는 만큼 이런 미국 정부 입장을 김 대통령 측에 조심스럽게 전달했다.     당시 김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여부도 큰 주목을 받았다. 미국 정부는 김 대통령의 수상을 방해한다는 인상을 극히 꺼렸다. 미국은 햇볕정책에 대한 의사 표명을 중단했다. 김대중 대통령도 햇볕정책에 힘입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이었다. 햇볕정책에 대한 찬반을 떠나 평생 민주화를 위해 몸을 바친 그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미주 한인들도 너무도 기뻐했고 자랑스러워 했다. 미국 정부도 축하문을 보냈다.   햇볕정책 성공 여부는 역사가 판명할 일이다. 미국은 햇볕정책에 공식적으로 반대한 적은 없다. 연방의회 안에서 햇볕정책을 공격하는 의원들을 본 기억이 없다. 다만 북한에 지원한 식량이 의도와 달리 북한 군부에 넘어가는 데 우려를 표명했고, 미국과 긴밀한 협의 없이 김 대통령이 거의 일방적으로 정책을 추진한 데에 실망한 것 또한 사실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반미 친북 인사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말이 들려 우려가 됐다. 미국에선 특히 ‘우리는 하나’라면서 금세라도 통일이 될 듯 국민을 들뜨게 하는 반미 친북 인사들과 말끝마다 민족주의를 부르짖는 이들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한미 동맹관계가 심각하게 금이 가기 시작한 건 김대중 정부가 아니라 노무현 정부 때였다.   의회 내 일각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반미정서를 타고 당선됐다는 비판이 공공연하게 나왔다. 미국 대통령보다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한국 방문을 더욱 갈망하는 이들을 보며 앞으로의 한미관계가 걱정됐다. 일본은 이 틈에 미국에 바짝 붙어 동맹관계를 튼튼히 다졌다. 결국 이때 미국의 도움으로 세계 제1의 자동차 생산국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원용석 기자김대중 기립박수 대통령 연설도 한국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 남기고 싶은 이야기 김창준

2021-11-03

"'바보' 노무현을 기억합니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절대 권력에 당당히 맞섰던 '바보' 노무현을 기억합니다. 약한 사람을 위해서 매일 싸웠던 그를 기억하면서 저희의 나아갈 바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겠지요." 오는 22일(금) 한인타운 아로마윌셔센터 5층 뱅큇홀에서는 '내일을 여는 사람들'(대표 윤은영)과 'LA 사람 사는 세상'(대표 김인숙)의 공동 주최로 노무현 대통령 6주기 추모행사와 정연주 전 KBS사장의 강연회가 열린다. 주최측인 '내일을 여는 사람들'은 원래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에서 시작해 노대통령이 뜻을 살려서 미국 문제와 한국 문제 등을 같이 생각해보자는 모임으로 발전해 현재까지 활동해 오고 있다. 다른 주최자인 'LA 사람 사는 세상'도 노무현 대통령 서거후 자발적으로 조직됐던 자원봉사자 모임이 이어져온 것으로, 안희정 충남 도지사, 조국 서울대 교수 등 저명한 인사들의 남가주 강연회를 주최해오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날 행사는 오후 6시부터 열리지만 행사장 입구에는 노대통령의 생전의 모습을 담은 사진전시회, LA추모제를 담은 영상과 노대통령의 활동을 담은 '노무현의 말, 웃음, 그리고 노래'라는 동영상도 함께 상영된다. 특히 사진전시회에는 미공개 사진과 노무현 대통령이 출마했던 각종 선거에 사용되었던 포스터도 전시될 예정이다. 추도 행사가 끝나면 정연주 전 KBS사장이 '한국 언론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강연에 나선다. 일평생 언론인으로 살아온 정연주 사장은 군사독재 정권 아래서의 언론의 투쟁, 노무현 정부와 언론의 관계, 언론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나눌 예정이다. 또한 현장에서는 정연주 전 사장의 저서 '동아투위에서 노무현까지: 정연주의 기록'이 20달러에 판매된다. ▶주소: 3680 Wilshire Blvd 5 Floor LA ▶문의:info@peace21.org 글·사진=장병희 기자

2015-05-17

[칼럼]한국의 노무현, 미국의 로날드 레이건

한국대통령 선호도 여론조사에서 지난 10년간 1일등을 차지해오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밀려 2등을 차지한 결과에 대해 여야진영의 해석이 서로 달라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12일 여론조사업체인 한국갤럽이 지난해 10월 한달간 만13세 한국인 1700명에게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에 대한 선호도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전·현직 대통령 1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는 노무현 32%와 박정희 28%였다. 김대중 16%, 박근혜 5%, 이명박 3%, 전두환 1.9%, 김영삼 1.6%, 노태우 0.8%, 이승만 0.8%, 윤보선 0.1%, 최규하 0. 01% 순위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번 조사는 사회학 교수의 입장에서 볼 때 표본추출방법과 조사방법에 대해 많은 의구심을 남겼으며 미국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큰 차이를 보였다. 한국 갤럽이 10년 전인 2004년에 같은 질문으로 조사한 결과를 이번 조사와 비교해 보자. 이번 조사에서는 조사대상 연령층을 13세 이상으로 초등 및 중등학생층을 포함시켰으나 10년 전에는 15세 이상으로 중등학생층 이상으로 했다. 결과로 10년 전에는 박정희 47.9%, 김대중 14.3%, 노무현 6.7%를 기록했다. 갤럽은 왜 조사연령층을 이번에 달리했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데일리한국과 주간한국의 의뢰로 리서치앤리서치가 지난 1월 20~21일 19세 이상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역대 대통령 가운데 어느 대통령이 임기 중 가장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박정희 53.8%로 압도적으로 1등, 노무현 18.4% 2등을 기록했다. 갤럽의 ‘좋아하는 대통령’과 리서치앤리서치의 ‘업적을 남긴 대통령’이라는 질문이 주는 의미와 조사연령대의 차이에서 온 결과인것 같다.   그러면 갤럽의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과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가장 좋아하는 국가지도자’를 물었던 한겨레신문의 광복 70년 기념 신년 여론조사의 결과는 어떠했을까? 같은 질문을 13세 이상이 아닌 19세 이상 성인을 대상으로 물었을 때의 결과는 박정희 38.5%, 노무현 32.1%로 나타났다.   이번 갤럽조사는 작년 10월에 조사한 결과를 5개월이 지난 시점에 발표된 배경에도 의심을 품게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여론조사는 집계 즉시 발표하기 때문이다. 리서치앤리서치는 집계 즉시 지난달에 발표한 데 비해 갤럽은 리서치앤리서치보다 2개월 앞서 조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12일에 발표했다.   현행한국법은 만14년 미만인 사람은 형사미성년자로, 19세 이하인 사람은 선거연령미달자로 정치적 의사결정을 성숙하게 할 수 없는 연령층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때문에 대부분의 여론조사기관이 조사대상 연령층을 객관적인 국사관과 성숙한 사리판단을 할 수 있는 성인유권자로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현 한국교육제도 아래서는 미성년자들이 전교조 선생의 교육을 받아 객관적 사실(史實)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도(誤導)받기 쉽기 때문이다. 더구나 13세짜리 미성년이 어떻게 50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판단할 수 있겠는가? 또 이번 조사방법이 대면조사인지 전화조사인지도 알려지지 않아 조사방법에도 석연치 않은 점들을 보였다.   한국갤럽은 미국 갤럽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여론조사기관이 미국갤럽이라는 사실은 자타가 인정하며 국제적인 공신력을 가지고 있다. 미국갤럽은 여러해 동안 미국대통령 선호도 여론조사를 해왔기 때문에 대통령 선호도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는 미국인들에게 일반상식으로 되어 있다. 미국갤럽 조사결과에 최근 이변이 일어났다. 거의 매년 1위를 달리던 링컨 전 대통령에게 예기치 못했던 이변이 몇 번 일어난 것이다. 2001년과 2005년을 이어 2011년에도 로날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링컨전 대통령을 제치고 1등을 장식한 것이다. 미국갤럽의 표본추출과 조사방법은 이 조사를 시작한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미국갤럽은 유권자인 성인 18세 이상을 전화면접방식으로 진행해 왔다. 미국의 성인기준은 18세 이상이다.   이번 한국갤럽 발표는 그동안 이 조사기관이 가지고 있던 공신력을 손상시킨 계기가 되지 않았나 하는 걱정을 자아냈다. 물론 모든 여론조사가 조사대상 인구의 마음을 정확하게 측정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의 대선 출구조사에서 보듯이 여론조사 결과가 실제 결과와 빗나가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여론조사기관이 정치적 이념에 편향되어 결과를 미리 ‘결정’해 놓고 조사를 실시하는 경우가 있어서는 절대로 안되다. 한국갤럽은 미국갤럽에서 본보기를 찾는 것이 어떨런지?

2015-03-29

측근들이 DJ를 닮은 까닭…안 되면 될 때까지…

1993년 3월 7일 DJ를 만나러 영국 케임브리지대에 가면서 나는 한 통의 편지를 들고 갔다. DJ가 정계를 은퇴하고 영국으로 떠난 뒤 동교동에 온 거였다. 발신자는 대구 사는 50대 주부였다. 도착 다음 날 아침, DJ의 서재에서 국내 상황을 보고한 뒤 얘길 꺼냈다. “총재님한테 수백 통의 편지가 왔는데요, 그중 하나를 가져왔습니다.” “어디 사는 사람이 보냈죠? 읽어보세요.” 편지 내용은 구구절절했다. “평생 당신을 미워하며 살았다. 하지만 정계를 은퇴하는 모습이 쓸쓸해 보여 당신이 쓴 책을 구해 읽었는데 그동안 미워했던 게 후회가 된다. 요즘 내 주변 친구들도 비슷한 얘길 한다. 혹시 국민이 부르면 다시 복귀할 생각은 없나.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다. 답장 꼭 해달라. 가보로 보관하겠다.” 편지 낭독이 끝나도 DJ는 고개를 숙인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참 만에 DJ가 말했다. “내가 여기서 독일 통일과 유럽 통합을 연구하고 있어요. 한국 현대정치사도 정리해 볼 생각입니다. 영국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가 있죠? 그 사람은 계속되는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하면서 문명이 발전한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나도 한평생 6·25와 민주화, 대선 등 끊임없는 시련을 겪었어요. 지금 주어진 이 도전에도 잘 응전해 나갈 생각입니다.” 그러더니 편지를 달라고 해서 자신의 책 갈피 사이에 끼워놓았다. DJ가 답장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에서 그 편지를 여러 번 읽으면서 정계복귀의 힘을 얻었을 것이란 생각은 든다. 일단 말문이 터진 DJ가 까만 사인펜을 들고 벽에 걸린 지도를 가리키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장 동지, 여기에 영국, 그 옆에 프랑스가 있죠? 그런데 수도인 런던은 동남단에 위치해 있고, 파리도 센강 하구인 북서지방 끄트머리에 있죠?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대서양과 직면해 있고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는 동쪽 끝이죠? 왜 전부 수도가 중앙에 없고 최전방에 위치해 있겠어요. 그건 전쟁이 나면 국왕과 귀족이 선두에 서서 나라를 지켰기 때문이에요. 지배층이 나라를 지킨 장소가 바로 수도가 된 거죠. 우리 왕조들은 어땠어요? 신라도 삼국통일을 했으면 수도를 평양으로 갔어야죠. 고려도 개성에 수도를 두고 평양으로 가자는 묘청을 처형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왕실보존을 우선으로 하니 비(非)진취적이 된 겁니다.” DJ는 아주 한참 동안 유럽과 한국의 역사를 ‘강의’했다. DJ는 나중에 귀국한 뒤 일산으로 집을 옮겼다.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을 만들고 통일 문제, 동북아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이날 나에게 설명했던 대로 접적(接敵) 지역 쪽으로 좀 더 이동해 간 것이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를 전하는 진짜 이유는 DJ의 ‘훈장식 리더십’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DJ의 주변에는 한평생 충성스러운 측근들이 있었다. 권노갑·한화갑·한광옥·김옥두·남궁진·윤철상 같은 이들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밖에도 목숨 걸고 DJ를 추종하고 지지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물론 나도 그중 하나다. 이 대목에서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DJ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충성을 얻어낸 걸까. 그의 리더십의 요체는 뭘까. 오랫동안 DJ를 지켜보며 내가 얻은 답변이 있다. 그가 주변의 존경과 충성을 획득하는 비결은 바로 ‘설복(說服)’이다. 말 그대로 설득해서 복종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정치를 하면서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가장 큰 무기가 ‘감(感)’이었다면 DJ의 경우 그것은 ‘논리’였다. 복잡한 상황이 발생하면 DJ는 일단 주변의 얘기를 돌아가며 듣는다. 그리고 혼자 꼼꼼히 정리한다. 그게 끝나면 다 함께, 혹은 따로따로 측근들을 부른다. 그들을 앉혀놓고 상대방이 자기 논리를 완전히 이해하고 승복할 때까지 끊임없이 설명하는 것이다. 일단 설복되면 측근들은 밖에 나가 마치 자기 논리인 것처럼 DJ의 논리를 전파한다. 그야말로 이구동성(異口同聲)이다. 그런 과정에서 여론이 생겨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DJ 측근들은 말투와 몸짓까지 DJ를 흉내 낸다”고 비판한다. 사실은 흉내 내기가 아니다. 이런 과정을 오랫동안 반복하고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익히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DJ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석·박사는커녕 학사 학위도 없다(1992년 모스크바 대학 외교 아카데미에서 정식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이는 논외로 하자). 한데 무슨 방법으로 자기보다 학력이 월등히 높은 사람들을 제압하는 논리력을 갖춘단 말인가. 해답은 ‘책과 사색’이다. DJ는 끊임없이 책을 읽었다. 책을 안 읽는 사람들은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냥 읽는 게 아니다. 10시간 책을 읽었으면 반드시 10시간 이상 생각해서 책의 논리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메모를 하고, 입에서 줄줄 나올 때까지 생각을 가다듬었다. DJ의 사고(思考)가 결코 간단치 않았던 건 그래서다. 내가 영국에 가 있는 동안 국내에선 복잡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3월 11일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YS정부가 출범했고, 새로운 조각(組閣)이 이뤄지는 시기인 데다 대선에서 패배한 정당의 전당대회다 보니 국민의 시선을 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DJ가 떠난 후 야당의 권력지도와 지형이 변화하는 것이어서 의미가 결코 작지 않았다. 영국에 도착하자 DJ는 나에게 “전당대회를 앞둔 당내 분위기가 어떤지 권노갑 의원에게 전화해서 파악해보라”고 지시했다. 당 대표 경선에는 3명이 나왔다. 이기택 대표와 김상현·정대철 의원이다. 선거의 핵심은 ‘김심(金心)’ 논란이었다. 영국의 DJ가 누굴 지지하느냐는 것이다. 이 대표는 ‘김심’이 자신에게 있다고 했다. 또 91년 8월에 신민당과 민주당이 합당하면서 김대중·이기택 공동대표 체제가 출범했었으니 이젠 자신이 대표가 되는 게 마땅하다는 순리론(順理論)을 덧붙였다. 반면 경쟁자인 김상현·정대철 의원은 ‘김심은 무심(無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DJ는 정말로 이 대표를 지지했던 것일까? 그런 것 같다. 우선 ‘김심’의 가늠자였던 권노갑 의원이 이 대표 지지의사를 밝혔다. 또 언론에는 “DJ의 장남인 김홍일 의원이 호남에서 김심 전도사 역할을 한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영국에서 만난 DJ도 이 대표를 지지한다는 느낌을 줬다. 하지만 ‘김심’을 등에 업고도 이 대표는 고전했다. 대다수인 호남 출신 대의원들이 ‘포스트 DJ’를 부산 출신 이 대표에게 넘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치러진 전당대회는 1차에서 승자를 가리지 못했다. 이 대표가 43.8%인 2743표를 득표했다. 절반에서 83표가 모자랐다. 김상현 1928표, 정대철 944표였다. 자정이 넘겨 치러진 2차 투표에서 정대철 의원이 김상현 지지를 선언했지만 결과는 이기택의 승리였다. 하지만 그것은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는 ‘김심’의 승리이기도 했다.

2011-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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