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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삶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

살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수많은 일 속에 갇혀 있습니다. 머릿속에는 어제 일과 오늘 일, 심지어 다가오지 않은 내일 일까지 가득합니다. 삶이 괴롭다는 말은 머릿속에 괴로운 일만 가득 담고 살기에 생긴 말일 겁니다. 인간의 머리는 제한적이어서 한 가지를 생각하면 동시에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괴로운 생각을 하면 즐거울 수 없습니다. 울던 아이가 금방 깔깔대고 웃는 것도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만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두 가지 감정과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참 다행입니다.   어제의 괴로운 기억을 되살려 곱씹고 살아가는데 삶이 즐거울 리가 없겠지요? 지금 나에게 닥친 일 중에서 힘든 일만 골라 생각하고 있는데 현재가 기쁠 리 없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 그럼에도 오고 있는 내일을 걱정, 근심, 초조로 채우고 있는데 삶에 대해 설렘이란 있을 수 없겠죠. 사는 게 괴로움이라는 말은 어쩌면 내 머리와 감정의 편향성을 보여줍니다. 한쪽으로 생각이 가득 차 있는 겁니다. 세상을 사는 게 참 쉽지 않습니다.   저 역시 괴로움에 집중하는 편입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모두 제 이야기일 겁니다. 굳이 안 좋은 쪽을 바라보고, 그쪽에 온 마음을 빼앗길 이유가 없음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리되고 맙니다. 그런 자신을 보며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내보이기도 하고, 허탈한 감정을 속으로 쌓기도 합니다. 어쩌면 제 괴로움과 성장이라는 두 갈래 길은 고통에 대한 집중에서 비롯되는 듯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일어날 뭔가를 두려워하고 걱정합니다. 예를 들면 죽음이 그렇습니다. 반드시 누군가에게나 죽음의 시간은 옵니다. 영생을 이야기한 수많은 이도 일단은 모두 죽음의 시간을 맞았습니다. 누구나 죽는다는 것, 그러므로 나도 죽는다는 논리는 심한 공포를 줍니다. 사랑하는 이와 영원히 헤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생각만으로도 슬픕니다. 세상이 온통 괴로움의 바다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보면 금세 걱정의 바다로 흘러가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이 생각을 바꿔야 하는 순간입니다. 세상에는 꼭 일어나는 일이 있는가 하면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말장난 같은 이야기지만 일어나는 일과 일어나지 않는 일은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 어느 누구나 죽는 게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라면, 죽지 않는 일은 절대로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살면서 누구나 아프기에 아프지 않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이나 미워하는 이와 만나야 하는 고통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일은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일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내 괴로움의 근원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 달리 말하면 내가 피할 수 없는 일에 꽂혀있다는 겁니다. 그 깊숙이 박힌 칼을 바라보지 않는 이상, 괴로움은 그대로 남아있는 겁니다. 무리하게 괴로움의 칼을 빼내려고 하면 할수록 마음은 다시 그 괴로움을 향합니다.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어디를 바라봐야 할까요? 되돌아가고픈 기억은 나를 괴로움에서 그리움으로 옮겨줍니다. 내가 의식조차 못 한 상태에서 나를 순간 이동시킵니다. 내가 가고픈 곳에 대한 바람은 나를 괴로움에서 그리움으로 옮겨줍니다. 내 의식의 한 점은 금방 다른 점으로 옮아가는 겁니다.     즐거움이 있기에 괴로움도 있는 거라 말하지만, 이는 반대로 말하면 괴로움이 있기에 즐거움도 있는 겁니다. 생각을 괴로움에서 즐거움으로 옮기면 세상이 밝아집니다. 살면서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은 괴로움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기에 내 마음의 점을 잘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점을 엷은 미소 속으로 옮기는 수정이 필요합니다. 하루 종일 나를 괴롭혔던 생각의 점이 이 글을 쓰는 동안, 글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괴로움을 잊고 글을 쓰고 있었네요. 좋아하는 일, 기쁜 생각을 하면 괴로움의 크기는 줄어듭니다.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는 일, 좋아하는 말로 생각의 점을 옮겨보세요.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이상 괴로움 걱정 근심 모두 죽음

2024-07-28

[삶과 믿음] 근심, 잡념과 수양

한국말에 ‘오만가지’ 생각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생각과 잡념을 비유한 말입니다. 우리 뇌는 육신 체중의 2%를 차지하지만, 몸의 에너지 20% 이상을 사용합니다. 많은 생각과 염려는 우리의 행복과 자유를 빼앗아 갈 뿐 아니라 우리를 지치게 하고 육신 건강을 상하게 합니다.     원불교 3대 종법사 대산 종사님의 법문입니다. “현대 위기의 세 가지를 원유문제, 식량문제, 공해문제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현대의 위기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우리의 정신에 기름이 고갈되어 가고 있는 문제이다. 우리는 우리 교당이나 기관이나 총부를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먼저 책임져야 할 일은 전 인류의 정신에 기름이 고갈되어 가고 있는 문제이다. 선인의 말씀에 ‘비막비어정산(悲莫悲於精散)’이라, 슬픈 것은 정신을 소비해서 흩는 것 만큼 슬픈 것이 없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기름 고갈의 문제다. 우리는 인류의 숨통이 되어서 인류의 정신에 기름을 보급하는 보급소가 되어주고, 인류의 머리에 불을 꺼주는 소방수가 될 수 있는 그 기운을 갖추어야 되겠다.”   정신 수양의 목적은 “온전한 정신을 얻어 자주력(自主力)을 양성”하는 것이라고 원불교 경전에 나와 있습니다. 양성(養性)은 영기진성(養其眞性)의 준말로서 ‘참 성품을 가꾸고 기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욕심을 제거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려 마음먹는다고 바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가 밭의 작물을 가꾸듯, 우리도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우리 정신과 마음 밭을 가꾸어야 합니다. 마음도 건강해지면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잘 견디고 낙도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기도, 명상 등을 통해 평상시에 수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신 수양의 결과’는 경전에 다음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정신 수양 공부를 오래 계속하면 정신이 철석같이 견고하여, 천만 경계를 응용할 때에 마음에 자주(自主)의 힘이 생겨 결국 수양력(修養力)을 얻을 것이니라.”   ‘자주(自主)의 힘’이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필자 친구는 몇 년 전 부인에게 쏘나타 차를 사 주었습니다. 그러나 2년 뒤 그녀는 자기와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벤츠를 산 것을 보고 남편에게 차를 바꿔 달라고 졸랐습니다. 필자 친구는 아내의 제의를 거절했는데 그 후로 아내는 왠지 모든 것에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 부인이 나쁜 사람이라기보다 남과 비교하며 물질, 돈, 남의 안목 등 수많은 외적인 환경에 끌려 자기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외경에 노예생활을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노예가 힘이 세지면 손과 발에 묶인 밧줄을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정신수양을 잘하면 “마음에 자주(自主)의 힘이 생겨 결국 수양력(修養力)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우리 정신을 쉬게 하고 수양을 잘해서 마음의 힘이 강해지면, 그 힘으로 여러 가지 착심과 욕심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자유로운 낙도생활을 할 수 있으며, 그 자주의 힘으로 우리는 우리 인생의 주권을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정신의 힘을 얻지 않고 여러 가지 착심의 사슬을 벗어나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나 경전에 “우리가 정신 수양 공부를 ‘오래오래’ 계속하라”고 말합니다.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우리가 좌선하고 염불을 하면 차차 마음의 힘이 세지고 영단이 뭉쳐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알뜰한 염불 한 마디에 영단이 좁쌀 하나 만큼씩은 뭉쳐질 것이다.” “사심 없는 염불 한 번에 좁쌀만큼씩 영단(靈丹)이 커진다. 한 동네, 한 나라, 전 세계를 다 비출 수 있는 영단을 길러라. 성현의 영단은 동서고금과 삼세를 다 비추는 영단이다.”    한술 밥에 배가 부르지 않지만 계속 먹으면 반드시 배가 부르듯, 끊임없이 좌선, 명상, 기도, 염불 등에 공들이면 우리 인생은 반드시 변하고 크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유도성 / 원불교 원달마센터 교무삶과 믿음 잡념과 근심 정신 수양 근심 잡념과 우리 정신과

2022-05-19

[이 아침에] 정직할 수 있는 용기

 친하게 지내는 아우가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아들아이가 미술계 학교로 진학하는 인터뷰와 포트폴리오 면접을 보고 실기시험을 치렀는데 순진한 아들 때문에 속상하다는 이야기다.     전말인즉 아이가 제출한 훌륭한 포트폴리오를 본 면접관이 전부다 너 혼자 한 작품이냐? 묻더란다. 아이는 “제가 다했지만 마지막 손질은 선생님이 도와주셨어요”하고 정직하게 말했단다.   같은 학원에서 준비하던 아이들은 모두 제가 혼자 다 했어요 했는데 눈치 없는 자기 아들만 정직하게 말해 불이익을 당할 거라며 지레 걱정이다. 나도 그 시간에 맞춰 기도했기에 그 엄마의 노심초사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정직이 최선인데 정직하게 말해 불이익을 당한다면 그건 정당한 경쟁이 아닐 것이다. 그럴 땐 “너만 못나게 왜 그랬어”하지 말고 “정직하다. 훌륭해”하고 칭찬을 해주어야 마땅하다.   우리 인생에서 받는 최고의 보상 중 하나는 개인적 성취를 위해 숨겨진 잠재력을 발견하고, 그에 맞게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직하지 못하다면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특히 예술 분야에서는 더 필요한 잠재력. 경험 많은 노 면접관도 그걸 아시지 않을까?   대학을 졸업하고 경기도의 한 도시에 있는 여학교에 가정 선생으로 부임을 했다. 그런데 엄마는 남들에게 자꾸 그 도시가 아닌 수원에 있는 학교라고 하신다. 그 이유인즉 그 도시는 기지촌이어서, 그곳에서 교사생활했다고 하면 혼삿길에 지장이 있다는 거였다. 지극히 현실적인 자기 딸을 위한 거짓말에 나는 침묵으로 동의하는 죄를 지었다. 그 학교에 근무하는 7년 동안 마음이 늘 불편했다. 미국에 오려고 학교를 그만두니 얼마나 후련하던지.   거짓말은 처음에는 사소한 것처럼 시작되지만, 일찍 근절되지 않으면 곤란 지경에 빠질 때까지 계속 힘을 행사한다. 한 번 부정직해서 뭔가 얻는 것이 생기면, 다시 부정직해지고자 하는 유혹을 떨치기가 쉽지 않다. 우선은 그 흔적을 덮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또 다른 부정직한 행동을 하게 된다. 부정직은 어두컴컴한 뒷길을 걷는 것과 같아서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이 진실해야 한다. 마치 낮이 지나면 밤이 오듯 그렇게 진실이 여러분과 늘 함께해야 한다. 그러면 누구에게도 거짓으로 대할 수 없다.”(윌리엄 셰익스피어)   정직한 사람들이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거짓말쟁이에 분노하기보다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좋은 생각을 가지고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정직하게 잘 키운 아들로 인해 아우에게 마음의 평화가 오기를 기원하며. 이정아 / 수필가이 아침에 정직 용기 미술계 학교 포트폴리오 면접 아우가 근심

2022-02-23

[열린 광장] 마지막 잎새

거실 창으로 보이는 감나무는 무성하던 잎을 모두 떨구고 이제 달랑 세 개가 남았다. 벽을 배경으로 바람에 떨고 있는 마른 잎을 보고 있노라면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가 연상된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겪는 일이다. 아침을 먹으며 아내에게 말해주니, 그녀도 같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내가 다니는 성당에는 입구 양옆으로 밭이 있다. 철 따라 토마토, 호박, 옥수수 등을 심고 거둔다. 주일 아침 성당 가는 길에 보니 앰뷸런스와 소방차가 와 있고, 밭에서는 구급대원들이 심폐소생술 하는 것이 보인다. 누군가 일을 하다 쓰러진 모양이다.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응급처치를 하는 것을 보니 상황이 꽤 다급해 보인다. 멀리서 보고 지나가는데 아내가 성호경을 긋는다.   미사를 하며 얼굴도 모르는 그 농부를 생각했다. 부디 살아나기를 기원했다. 1시간 남짓 미사를 끝내고 나오는 길에 보니 앰뷸런스가 있던 자리에는 경찰차가 와 있고, 밭 한가운데는 흰 천이 놓여있다. 주변에는 가족으로 보이는 이들이 망연자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결국 그는 소생하지 못한 모양이다.   “문 밖이 저승이다”는 말이 새삼스럽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의 죽음을 지나치며 나를 괴롭히는 욕심과 걱정이 얼마나 하찮은 일들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아무도 그 아침이 망자의 마지막 날임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그에게 건성으로 데면데면한 인사를 건넸을 것이다. 다들 그렇게 살지 않는가. 어쩌면 그는 일찍 일을 끝내고 가족과 크리스마스 쇼핑을 가거나 외식을 하기로 마음먹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젊은 아빠가 아니기를 바란다. 젊은 아내, 어린 자식을 두고 어찌 마음 편히 눈을 감았겠는가.   누구나 한 번은 가야 하는 길이지만 다들 남의 일인 양 모른 척하며 산다. 물론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 수는 없다. 죽음만 생각하며 어찌 눈앞의 즐거움을 마음껏 즐길 수 있겠나. 하지만 가끔은 우리 마음의 욕망과 질투와 근심 걱정을 죽음의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죽음 앞에서는 삶의 우선순위가 바뀐다.   다음 번 겨울비는 감나무의 마지막 잎새들을 떨굴 것이다. 그리고 봄이 되면 그 자리에는 새로운 잎이 나겠지. 달력이 바뀌고 나면 내게는 외손녀가 한 명 늘어나고 봄이 되면 백일떡을 먹게 될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나는 새로 맞는 손녀의 돌도 보고 초등학교 입학도 볼 것이다. 하지만 그건 확률일 뿐, 아무도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손녀를 만나는 일도, 아이가 걸음마를 익히고 내 뺨에 뽀뽀를 하는 일도 다 내게 주어지는 축복이다. 나이가 들어가니 조금은 겸손해진다. 내가 잘나 이룬 것은 별로 없고 어쩌다 보니 내게 주어진 것들이라는 생각이다.   그날 나는 타운에서 딸아이의 시부모님과 저녁을 먹었다. 코로나 탓에 곧 두 살이 되는 손녀의 베이비 샤워 때 보고 2년 만에 만났다. 이런 인연들이 모두 고맙게 생각된다. 이름 모르는 농부의 명복을 빈다. 고동운 / 전 주공무원열린 광장 잎새 마지막 잎새들 이의 죽음 근심 걱정

2021-12-14

[이 아침에]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

큰 걱정이 작은 근심을 덮는다. 큰 일이 터지면 작은 근심은 사라진다. 사는 게 아무리 힘들어도 죽고 사는 일에는 밀린다. 근심의 근원은 소유와 욕망, 죽음에 대한 공포다. 욕망은 끝이 없다. 먼지처럼 몸에 달라붙은 욕망의 찌꺼기들은 세월이 갈수록 두터운 겨울 코트처럼 무거워진다. 내려 놓으려 해도 근심의 무게는 가벼워지지 않는다.     걱정, 근심도 순서가 있다. 죽고 사는 일이 생기면 작은 염려가 헛수고다. 선배 한 분이 생을 마감했다. 모진 병으로 허망하게 떠났다. 불치의 병을 선고 받고 고통으로 투병하며 사는 게 얼마나 무서웠을까. 자상하고 이웃 섬기고 하나님 믿고 의지하며 무엇보다 건강을 살뜰하게 챙기던 분이다. 어머니 담근 김치 맛있다며 몸에 안 좋은 흰밥 대신 물 마시며 먹고 삶은 계란도 흰자만 드셨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태복음을 묵상하면서도 지난 일들은 괴로워하고 마주할 오늘을 근심하며 아직 일어나지도 않는 내일을 미리 염려한다. 내 근심과 걱정은 과거집착형이고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지속형이다. 하루도 걱정 근심 내려 놓고 산 적이 없다.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김수영의 시 ‘절망’ 중에서.   구원과 평강을 꿈꾸지만 후회도 반성도 없이 근심 걱정에 매달려 허덕이며 산다. 새벽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이승인지 저승인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환상처럼 스쳐가는, 의식과 무의식이 엇갈리는, 몇 초의 희미한 이미지가 나의 하루를 지배한다. 환상과 기쁨도 있지만 걱정과 근심 거리가 대부분이다.       안반낙도(安貧樂道)로 근심 걱정 없이 사는 무수옹(無愁翁)의 길은 요원하다. 탐심을 버리면 피곤한 삶이 덜 고단해진다. 버릴 수 없는 것들은 버리면 사는 게 가벼워진다. 버티려고 발버둥칠수록 삶의 실타래는 더 꼬인다. 무수옹으로 걱정 근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사유와 집착의 욕망에서 해방 되는 길이다.     욕망의 눈을 감으며 고단함이 덜어진다. 잘 늙는다는 것은  근심 걱정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얻는 것이다. 하늘이 내려 준 복과 고통을 인간이 어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품위 있게 산다는 것은 한탄과 넋두리, 근심 걱정 대신 처지와 분수를 아는 일이다. 불가에서는 탐심, 진심, 치심의 삼독심(三毒心)을 경계한다.       세상의 모든 것, 좋아하는 것을 다 가지려는 것은 탐심이다. 진심(嗔心)은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생기는 원망과 불만, 노여움을 말한다. 치심(癡心)은 어리석음이다. 착각에서 나오는 자만과 오만 나태함이 묻어난 의심이다. 삼독심은 분별의 눈을 멀게 하고 물욕과 애착으로 마음을 병들게 해 걱정 근심의 늪에 빠지게 한다. 천복(天福)을 내리는 것은 하늘이지만 받는 자는 인간이다.   이기희 / Q7 파인아트 대표·작가

202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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