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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 오페라 ‘투란도트’에 홀리다

  한국에 와서 좋은 것 중 하나는 하고 싶은 생각만 있으면 문화생활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가 볼 만한 미술관이 많고 높은 수준의 음악회도, 뮤지컬이나 연극 공연도 심심찮게 열린다. 지하철이 서울 시내, 서울이 아니더라도 가까운 지방까지 안 닿는 곳이 없으니 차가 없어도 어디든지 갈 수 있다.  LA에서도 다양한 문화 행사가 있기는 하지만 내 취향에 맞는 행사는 그리 많지 않다. 혹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 하더라도 멀리 있고 운전을 잘 못 하니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투란도트 아레나 디 베로나 오리지널 내한공연’이라는 광고를 봤다.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무조건 봐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몇 달 후에 있을 공연을 위해 일찌감치 티켓을 예매했다. 티켓 값이 만만치 않았지만 대신 다른  비용을 절약하기로 마음먹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집에서 일찌감치 출발했다. 지하철을 몇 번 환승하며 국내 최대 규모의 실내 공연장인 올림픽체조경기장 KSPO 돔 안으로 들어갔다.         평일이라 그런지 객석이 꽉 차지는 않았지만 그 큰 공간에 상당히 많은 관객이 앉아 있었다. “못살겠다, 힘들다”는 아우성은 다 현실과 동떨어진 말 같았다. 한국은 식당이나 콘서트장 등 어디를 가나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다.  트럼프가 “한국은 머니 머신”이라며 주한미군 주둔 비용 분담액을 올리겠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무대에 불이 켜지고 공연이 시작되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압도적인 스케일에 입이 벌어졌다. 웅장하고 화려한 무대장치와 무대 위에 오른 수백 명의 출연진에 내 눈을 의심했다. 무대 위에서 펼쳐진 화려한 중국풍 의상과 세트는 실제 베이징 황궁을 연상케 했다.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는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오페라 중 하나이다. 많은 작곡가의 작품들이 있지만 투란도트가 한국인들에게 특히 유명한 이유는 대표곡 ‘Nessun dorma(아무도 잠들지 말라)’  때문일 것이다.   아리아 네순 도르마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경기 내내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된 데다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결승전 전날 전 세계에 방영된 ‘쓰리 테너 콘서트’에서 부르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다.   ‘투란도트’는 자코모 푸치니의 유작으로 그가 작곡 중 숨지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마지막 두 장면은 푸치니의 스케치에 따라 제자에 의해 완성된 작품이다. 이에 관해 작곡가 푸치니와 지휘자 토스카니니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둘은 친한 사이였지만 다툼도 잦았다. 크리스마스 즈음 푸치니가 친구들에게 빵을 선물했는데 잘못해서 토스카니니에게도 보냈다. 토스카니니는 푸치니가 보낸 줄도 모르고 그 빵을 먹어 버렸다. 푸치니는 토스카니니에게 ‘크리스마스 빵, 잘못 보냈음’ 이라는 전보를 보냈고, 이에 토스카니니는 ‘크리스마스 빵, 잘못 알고 먹어 버렸음’이라는 답변을 보냈다. 이 사건 이후 둘은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훗날 초연에서 토스카니니가 투란도트를 연주하게 되었는데 그는 완성된 곡을 거부하고 푸치니가 작곡한 마지막 부분인 ‘류의 죽음’까지만 공연했다. 그리고 청중들을 향해 “이 오페라는 여기서 끝납니다. 원작자가 사망하여 뒷부분을 완성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을 하고 퇴장해 버렸다고 한다.   시대적 배경은 고대 중국의 베이징이지만 고증이 없는 판타지에 가깝다.  내용도 다소 진부하다. 하지만 용감한 왕자가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 흠모하는 왕자님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노비의 순수한 사랑, 냉담한 공주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 등 강렬한 사랑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많이 알려졌지만 줄거리를 간략히 소개한다.  남자에 대한 혐오와 복수심으로 얼음같이 차가운 투란도트 공주는 자신에게 청혼하러 온 남자들에게 세 가지 수수께끼를 낸다. 모두 맞추는 사람과는 결혼하겠지만 만일 맞추지 못하면 참수형에 처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남성이 그녀의 미모에 반해 도전했다가 참수형을 당하고 만다.   그 무렵 전쟁으로 나라를 잃은 칼라프라는 용감한 왕자가 투란도트에게 한눈에 반한다. 수수께끼에 도전해 세 가지를 다 풀지만 투란도트는 분노하며 그와의 결혼을 거부한다. 칼라프는 만약 동이 트기 전까지 자신의 이름을 맞히면 기꺼이 죽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자신과 결혼해야 한다고 공주에게 역으로 제안한다.     투란도트는 칼라프 왕자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혈안이 된다. 칼라프 아버지와 노비인 류를 잡아 와 고문한다. 칼라프를 흠모하는 류는 모진 고문에도 그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자결한다.  칼라프는 투란도트에게 분노하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공주를 아내로 맞지 않겠다며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밝힌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류를 통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공주는 결국 칼라프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 둘은 모든 사람의 축복을 받으며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이번 ‘투란도트’ 한국 공연은 푸치니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서 열렸다.  ‘아레나 디 베로나 페스티벌’팀이 이탈리아 베로나에서만 볼 수 있었던 웅장한 오페라 무대를 서울로 옮겨왔다는 자체만으로도 큰 화제가 됐다. 베로나 축제팀 100년 역사상 해외 공연은 한국이 처음이라고 하니 이번 공연은 한국 오페라 역사의 한순간으로 기록될 것이다.     세계적인 명작 오페라에 걸맞게 캐스팅도 초호화였다. 월드 클래스 성악가들의 폭발적인 가창력과 연기력, 아름답고 장엄한 오케스트라 음악은 관객들에게 큰 기쁨을 선사했다. 특히 트란도트의 하이라이트 ‘아무도 잠들지 말라(Nessun dorma)’를 현장에서 듣고  가슴에서 뜨거운 감동이 몰아쳤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의 엄청난 환호와 박수갈채 속에서 출연진이 무대인사를 할 때 나도 오랫동안 손이 아프도록 손뼉을 쳤다. 목이 터져라 환호성도 질렀다. 순간 마음속에 쌓였던 모든 스트레스가 사라졌다. 한 아름 선물을 안은 듯 기쁨이 충만했다.   공연장을 빠져나오니 날은 저물어 어둑어둑해졌다. 10월 중순의 휘영청 달 밝은 가을밤에 마음은 이탈리아 고대도시 베로나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잊지 못할 소중한 경험을 안고 서둘러 집에 오니 밤 12시였다. 마음은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으나 이틀을 꼼짝 못 하고 집에서 쉬었다. 한국이 아무리 갈 곳이 많고 즐길 거리가 많으면 뭣하랴! 이제는 체력이 달리는걸.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투란도트 오페라 투란도트 공주 투란도트 아레나 오페라 무대

2024-11-28

디즈니, 공주와 개구리 테마 놀이기구 개장

        플로리다 올랜도 디즈니월드가 새로운 놀이기구 티아나의 베이유 어드벤처를 선보였다.   티아나의 베이유 어드벤처는 2009년 개봉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공주와 개구리를 기반으로 해 만들어졌다. 공주와 개구리는 디즈니가 제작한 영화 중 최초로 아프리카계 주인공을 내세웠으며 영화의 배경인 뉴올리언스 특유의 재즈 풍 사운드트랙이 특징이다.   디즈니월드 섀넌 스미스-콘래드 앰버서더는 “놀이기구를 이용하는 동안 관객들이 만나는 동물들이 신나는 재즈풍 테마음악과 잘 어울린다”며 “티아나 공주, 네이빈 왕자, 마마 오디, 루이스 등 영화 속 친숙한 등장인물들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라고 설명했다. 놀이기구 탑승 막바지엔 뉴올리언스 태생의 가수 PJ 모턴 등이 참여한 신규 음악이 끝을 장식한다.   티아나의 베이유 어드벤처는 인종 관련 이슈로 운행이 중단된 놀이기구인 스플래시 마운틴을 대체했다. 스플래시 마운틴은 노예제를 미화하고 흑인을 희화화한다는 비판에 휩싸인 끝에 2019년 운행을 중단됐다.   한편 가주의 디즈니랜드도 올해 내로 티아나의 베이유 어드벤처의 개장을 앞둔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정확한 개장일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서재선 기자 [email protected]디즈니월드 공주 놀이기구 티아나 디즈니월드 섀넌

2024-06-28

[삶의 뜨락에서] 공주는 잠 못 이루고

오늘은 오페라 아리아로 산책하러 나가 보려고 합니다. 이민자로 산다는 것이 뭔지, 먹고 사는 것이 뭔지 통 생활에 여유가 없어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하다가 실로 오랜만에 수필을 쓰는 것 같습니다.   작곡가 푸치니는 많은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투란도트는 그의 유작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아리아 Nessun Dorma는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로 많이 불렸고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투란도트는 고대 중국의 공주 이름인데 공주는 절세미인입니다. 그러나 차갑고 냉혹한 얼음 공주로 나옵니다. 이제 공주가 결혼해야 하는데 맘에 차는 사람이 주위에 도무지 없습니다. 그래서 공주는 전국에 공포해서 멋진 남자를 찾습니다.   공주가 낸 수수께끼 세 개를 다 맞추면 그 청년과 결혼하겠다. 그러나 만일 맞추지 못하면 죽이겠다고 공포합니다. 용감한 청년들이 많이 도전했지만 모두 맞추지 못하고 참수형을 당합니다. 그들의 목이 거리에 많이 걸려 있습니다. 이런 공포 속에서 용감히 등장하는 왕자 칼리프. 칼리프는 공주의 수수께끼 세 개를 다 맞춥니다. 약속대로라면 공주는 칼리프와 결혼해야 합니다. 그러나 공주는 거절합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이때 왕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내가 수수께끼를 하나만 내겠습니다. 공주가 맞추면 내가 사형당하고 맞추지 못하면 나와 결혼해야 합니다. 내 이름이 무엇입니까. 단 이 밤이 새기 전에 맞추어야 합니다.” 이에 공주는 시녀들에게 선포합니다. 아무도 잠들지 말라. 이 밤이 새기 전에 왕자의 이름을 알아 오라. 만일 알아오지 못하면 모두 죽이겠다.   이때 부르는 왕자의 노래가 Nessun Dorma 입니다.   아무도 잠들지 말라. 아무도 잠들지 말라. 그러나 공주의 수고는 헛될 뿐.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오직 나만 알고 있을 뿐.   이 밤이 가고 새벽이 오면 나는 승리하리라. 나는 승리하리라.   진짜 멋진 아리아입니다. 이 아리아 배경으로 여성 합창이 정말 아름답게 울려 퍼집니다.     이제 새벽이 오면 우리는 다 죽는구나. 우리는 다 죽는구나.   이 오페라에서 공주는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이것을 식언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한 말을 자기가 먹어서 없던 말로 해버렸습니다. 또 공주는 힘의 논리를 폅니다. 공주는 힘이 있고 왕자는 없으며 공주에게는 생사여탈권이 있으나 시녀들에게는 없습니다. 한쪽은 정의는 있지만 힘은 없고 한쪽은 정의는 없지만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왕자는 공주의 불의에 당당하게 저항합니다. 작곡가는 이 모습을 남성의 최고 음으로 표현했습니다.     시녀들은 이제 날이 밝으면 죽어야 합니다. 정의 편에 서 있지만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녀들은 비록 죽음이 앞에 있지만 저항 세력을 응원하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릅니다. 정의를 위하여 싸우는 투사의 노래와 너무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룹니다.   Nessun Dorma는 이렇게 호소합니다.     힘없는 정의가 이긴 역사는 없다. 그러나 불의에 저항하는 정의는 있고 이를 지원하는 여성의 절규가 있다. 저항과 절규는 아름답습니다. 이 아침 이 노래를 들어 보세요. 나는 승리하리라고 외치는 남성 최고 음을 감상하시며 오늘도 승리의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중간 부분에 있는 여성의 합창(절규)을 놓치지 마세요. 이강민 / 관세사삶의 뜨락에서 공주 왕자 칼리프 오페라 아리아 아리아 배경

2024-02-01

[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닥치고 기다려라

‘시네마 천국’이라는 영화 속에는 어느 공주와 병사의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 속에서 영사기를 돌리는 알프레도가 주인공 토토에게 들려주는 사랑이야기다.   ‘어느 공주를 보고 호위병사는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병사는 공주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공주는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100일동안 공주의 방 발코니 아래에서 매일 공주를 기다린다면 병사와 결혼하겠노라고 약속한다. 병사는 공주의 방 발코니 아래로 달려간다. 그날부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병사는 공주를 기다린다. 그러다가 99일째가 되었다. 하루만 더 기다리면 공주와 약속한 100일째가 된다. 하지만 병사는 단 하루를 남겨놓고 홀연히 그 자리를 떠나 버린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야기를 전해주는 알프레도는 병사가 떠난 이유를 자신은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니 나중에 토토가 알게 되면 좀 알려달라고 한다.     1988년에 내가 본 극장판에서, 영화는 병사가 떠난 이유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하지만 훗날 찾아본 감독판에서 토토는 자기가 알아낸 이유를 말한다. “처음부터 이룰 수 없는 사랑이었다. 99일동안 병사는 희망을 가지고 사랑을 기다릴 수 있었지만, 100일째가 되어 공주가 약속을 지킬 수 없다면, 병사는 너무 마음이 아플 것 같아서 미리 떠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1988년 당시 감독판을 보지 못했던 나는 다르게 해석했다. 병사가 90일을 넘게 기다리는 동안 그는 잠도 못 자고 지쳐갔다. 하지만, 공주는 매일 창밖을 바라보면서도 병사에게 물 한모금 가져다 주지 않는다. 짝사랑을 잘못하면 스토커가 된다. 나는 병사가 공주의 이기심에 자신의 사랑을 접고 떠났다고 해석했다.       ‘천년이 가도 난 너를 잊을 수 없어. 사랑했기 때문에’라는 노래구절이 있다. 제목은 “천년의 사랑”이다. 거짓말이다. 아무도 천년을 기다릴 수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 상대도 변하고 나도 변한다. 모습도 변하지만, 생각이 변한다. 하지만, 우리는 진정으로 믿을 수만 있다면 평생을 기다릴 수 있다.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든, 사건이든, 확실한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평생을 기다릴 수 있다. 병사는 공주를 믿지 못했다.   성공한 많은 투자자들이 말한다.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다림’이라고 말이다. 어떤 종목을, 언제 살 지, 신중하게 기다려야 한다고 말이다. 많은 투자자들이 손이 근질거려서 아무 때고 덤벼들어서 아무거나 사버린다. 그리고는 후회를 한다. ‘조금 더 기다릴 걸’ 하고 말이다. 하지만 더 어려운 기다림은 투자하고 난 후에 찾아 온다. 자신이 투자한 종목은 어김없이 곤두박질 치기 때문이다. 자신의 종목만 떨어지든, 아니면, 시장이 전부 좋지 않든, 우리는 대부분 투자한 후에 손해를 본다. 이때, 과연 누가 얼마나 기다릴 수 있는 지가 승부처다. 많은 사람들이 빌린 돈으로 투자를 한다. 이런 경우에는 이자부담이 커서 어쩔 수없이 손실을 안고 매각한다. 손절하는 것이다. 투자실패다. 엄청난 손실을 보았을 때 버틸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시장은 언젠가 반등한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기다리지 못한다. 돈 쓸 곳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기다림은 아직 오지 않았다. 투자한 금액이 손실을 만회하고 어느 정도 회복한 후에 진정한 ‘기다림’의 시험이 닥친다. 손실을 만회하자마자 대부분의 투자자는 재빨리 팔아 치운다. 손해를 봤던 기간이 길면 길수록 회복과 동시에 더 빨리 팔아 치운다. 만회한 후에 최대한 이익을 실현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진정한 승자를 가리는 승부처다. 저렇게 많은 시중의 투자서적들이 하고 싶어하는 단 한마디는 이렇다. “닥치고 기다려라.” 그렇다. ‘나는 너를 평생 기다릴 수 있다. 믿기 때문에.’  (변호사, 공인회계사)       손헌수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사랑 이야기 99일동안 병사 100일동안 공주

2023-10-19

[아름다운 우리말] 웅녀와 유화, 알영 그리고 허황옥

역사를 읽는 방법은 다양할 것입니다. 어떤 것은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어야 하며, 어떤 내용은 해석이 필요합니다. 특히 신화, 설화로 포장되어 있는 역사에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저는 우리나라 역사를 읽고, 공부하면서 해석이 필요한 부분을 봅니다. 나라를 세우는 사람의 이야기는 더욱 그렇습니다. 보통은 하늘에서 온 사람이 땅이나 물의 사람을 만나는 모습이 나옵니다.   역사를 보면 주로 이동해 오는 민족은 자신은 하늘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하늘의 아들이니, 하늘에서 왔다느니 하는 말은 주로 내가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을 태양이라고 하는 경우도 비슷합니다. 한편 자신을 땅의 신이라든지, 물의 자손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그곳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땅이나 물이 옮겨 다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일 겁니다.   하늘이라든가 해는 주로 낮을 의미하고, 낮은 주로 남성으로 상징됩니다. 해가 꼭 남성일 필요는 없으나 신화 속에서는 해는 주로 남성입니다. 달이나 밤이 여성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구별이 적은 원시공산사회가 모계사회이고 그래서 밤으로 상징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한편 부계사회는 주로 사유재산의 형성과 관련이 됩니다. 당연히 신분제 등과도 관련을 맺습니다. 구별과 차별이 이루어지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일수록 상징은 태양이 됩니다. 밝은 사회이지만 구별이 있는 사회입니다. 개인의 능력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밤은 여성을, 낮은 남성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밤낮이라는 표현은 흥미롭습니다. 밤이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 있는 것은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언어는 대부분 낮이 앞에 있습니다.   우리 역사의 기록을 보면 대부분 이 구조에 들어맞습니다. 고조선을 세우는 환웅은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죠. 남자입니다. 하늘의 아들과 결혼하는 여자는 땅에 살고 있던 곰이 변하였습니다. 어둠을 상징하는 굴속에서 지내는 시간이 나옵니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탄생도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물을 상징하는 하백의 딸이 만납니다. 물론 해모수는 남자이고 하백의 딸 유화 부인은 여자입니다. 웅심산(熊心山)에서 만나는 장면이 나와서 흥미롭습니다. 여기에서도 곰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곰은 토템으로 볼 수도 있지만, 우리 민족을 나타내는 개념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백제에도 웅진(熊津)이 나옵니다.   박혁거세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납니다. 알은 태양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늘이 기원입니다. 당연히 혁거세도 남자입니다. 부인인 알영은 용의 딸입니다. 우물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용은 주로 물의 상징입니다. 바다의 주인은 용입니다. 그래서 용왕은 주로 바다에 있습니다.   가야의 수로왕도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납니다. 하늘과 알의 상징이 모두 쓰였습니다. 수로왕의 부인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옵니다.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으로 나옵니다. 물의 상징과 여성의 상징이 쓰입니다. 다만 진짜로 아유타국에서 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습니다. 상징으로 보면 바다는 물로 보는 게 맞습니다. 물과 여성의 상징이니 토착민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또 다른 이주민으로 보아야 할지 궁금해지는 부분입니다.   건국신화의 시작은 하늘에서 내려온 남성과 땅, 물에 있는 여성의 만남입니다. 우리 신화의 특징은 조화입니다. 하늘과 땅, 남성과 여성의 조화로 새로운 세상을 만듭니다. 그래서 싸움이 없는 홍익인간(弘益人間),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펼치게 됩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허황옥 웅녀 수로왕도 하늘 유화 부인 공주 허황옥

2023-04-23

[수필] 내 사랑 백설 공주

볼사치카 산책길을 정신없이 달렸다. 거무죽죽한 고목에 털썩 주저앉았다. 파도처럼 출렁대던 가슴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공주께서 잠드셨습니다.” 한 생명을 지상에서 지워버리며 무표정하게 내뱉던 수의사의 말이 계속 귓전에서 맴돌았다.     자그마치 15년, 백설 공주가 나와 함께한 세월이었다. 개의 일 년 수명이 인간의 7년에 해당한다니 100세를 훨 넘긴 셈이다. 백세를 넘게 살았으니 너무 섭섭해하지 말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가슴 저 밑바닥에서 화산처럼 치고 올라오는 이 슬픔은 무엇일까. 시냇물 흐르듯 내 뒤를 졸졸 따라붙던 공주가 눈앞에 선하다. 잘 가라 백설 공주. 생명이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은 것은 한 번 왔다 가는 것을, 누가 그것을 비껴갈 수 있으랴. 이별은 헤어짐이 아니라 또 다른 만남의 시작이라고 달래본다.     공주는 친구의 아들이 준 개였다. 그는 중국산 피크니스 종을 여러 마리 키웠다. 개들이 새끼를 낳자 그들을 입양할 사람을 찾았다. 애완견 센터에 내다 팔아도 되련만 그는 돈이 아닌 강아지의 부모를 찾았다. 친구가 내게 한사코 입양을 권했다.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일했고 이미 ‘미스 티’란 개가 한 마리 있었다. 싫다는 나를 친구는 구경이나 하라며 그녀의 아들 집으로 데리고 갔다.     목화송이 같은 털, 땡글땡글 반짝이는 까만 눈과 마주친 순간, 나는 이미 공주를 품에 안고 있었다. 공주는 여느 강아지처럼 부접을 떨지도, 귀가 따갑게 짖거나 코가 미어지게 땅을 파지도 않았다. 있는 듯 없는 듯 흐르는 시냇물처럼 내 뒤를 따라붙었다. 나는 그녀를 ‘스노우 화이트-백설공주’라 불렀다. 공주는 화단의 꽃향기를 즐기고 새의 노랫소리를 줄기는 내 친구요 동생이며 사랑스러운 딸이었다.     남편은 나만 따르는 공주를 좋아하지 않았다. 남편은 공주를 보면 일부러 ‘왕’하고 장난을 치고 그러면 공주가 놀라서 달아났다. 그는 그런 공주를 보며 허허허,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렸고 그때마다 나는 그런 남편에게 눈을 흘겼다. 어쩌면 남편은 정말 공주를 질투했는지도 모른다. 남편이 밥을 줘도 공주는 가지 않았는데 공주가 그렇게 외골수인 것은 나를 닮은 것 같았다. 공주와 나의 유전이라면 우습지만 우리가 의식적으로 어떤 것을 되풀이하는 것을 유전성이라 하지 않던가? 나는 공주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공주 또한 내 마음을 충분히 읽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공주를 질투한 식구는 남편만이 아니었다. 공주보다 먼저 온 ‘미스 티’도 공주를 싫어하고 심한 텃세를 했다. 개도 사람처럼 사랑할 줄 알고 미워하고 질투한다. 미스 티는 앙증스런 외모와는 달리 사납고 식탐이 세고 의심이 많았다. 한번은 자기 밥을 재빨리 먹어치우고 공주의 밥을 뺏어 먹다 고기가 목구멍에 걸렸다. 켁켁 대는 미스 티의 입을 벌려 목에 걸린 고기를 겨우 빼냈다. 미스 티는 우리 집에 오는 손님도 가만히 지켜보다 맘에 안 들면 와락 발뒤꿈치를 물어뜯곤 했다.     우리 큰 며느리도 미스 티에게 발뒤꿈치를 물린 적이 있다. 아마 우리 남편이 나처럼 공주를 편애했다면 그의 발도 물어 뜯겼을 것이다. 그런 미스 티도 내게는 고분고분했다.  내게 잘 보여야 대접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런 것을 보면 미스 티는 영리한 개다. 미스 티의 텃세와 식탐에도 불구하고 백설 공주와 미스 티, 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그것은 공주가 미스 티를 자극하지 않고 양보하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미스 티가 자기 밥을 급하게 먹고 공주의 것을 뺏어 먹다 고기가 목에 걸려 켁켁대는 미스 티의 입을 벌려 목에 걸린 고기를 가까스로 빼냈었다.     오래전 2주간의 여행을 떠나며 공주를 올케한테 맡긴 적이 있었다. “고모가 없는 동안 백설공주는 물만 마셨어요. 실연한 여인처럼 하늘만 보고 울어서 불쌍했어요. 다시는 공주의 개 시터(dog sitter) 시키지 말아요.” 라며 올케는 백설 공주에게 눈을 흘겼다. 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미친 듯 내 품을 파고들며 흘리던 공주의 눈물. 그 눈물의 의미는 다시는 자기 곁을 떠나지 말라는 애원이었을 터, 그런데 이제 공주가 나를 떠나려 한다.     공주가 우리 집에 온 이듬해 첫 손자가 태어났다. 내 침대에서 자던 공주를 차고로 내보냈다. 집안에 날아다니는 개털 때문이었다. 공주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가슴을 쓸어주다 츄잉 껌만 한 딱지를 발견했다. 진찰결과 암이었다. 가슴 아픈 사랑의 상처일까. 나 때문인 것 같았다. 손자를 보는 재미에 공주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의사는 공주의 나이를 생각해 수술 대신 약을 처방해주었다. 그때 공주에게 4년이란 삶이 남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수술을 해 줄 것을. 몹시 후회된다.     공주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공주가 비실비실 일어나 오줌을 눈 뒤 시멘트 바닥에 쓰러진다. 푸시시 한 머리털이 툭 불거진 갈비뼈 위에서 새털처럼 날렸다. 공주를 허벅지에 눕히고 살살 등을 문질러 주었다. 공주야, 기운 차려, 그래야 산책도 하고 바닷가도 가지. 빨리 일어나. 공주가 알았다는 듯 실눈을 가늘게 떴다. 공주의 눈에 말라붙은 눈곱을 젖은 타월로 살살 닦아주었다. 너도 나만큼 슬프구나. 공주를 꼭 끌어안았다.     공주와 미스 티는 나와 함께 볼사치카 산책길을 매일 걸었다. 미스 티는 씩씩거리면서도 잘 따라왔지만 공주는 코스를 반쯤 돌면 주저앉았다. 나는 미스 티의 끈을 손에 쥐고 공주를 안고 산책을 마치곤 했다. 그럴 때면 공주는 내 손에 뜨거운 키스를 마구 퍼부었다.     3년 전 미스 티가 세상을 떠나자 작은아들이 공주를 그의 개 쿠키 곁으로 데려갔다. 그 뒤 공주는 가끔 아들과 쿠키랑 우리 집에 왔지만 전처럼 살갑게 굴지 않았다. 몸 따라 마음도 멀어졌나 했지만 공주는 그때 암과 투병 중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 공주를 우리 집으로 다시 데려왔지만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갈비를 삶아 스푼으로 국물을 한 입 한 입 흘려 넣어주었다.     마침내 남편이 공주의 안락사를 말하며 그녀를 차에 태웠다. 나는 노(no)하고 소리 지르며 쫓아나갔다. 숨도 못 쉬는 공주를 안고 한없이 울었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멀리멀리 흘러간다. 구름 속에서 공주가 손을 흔든다.   임지나 / 수필가수필 사랑 백설 동안 백설공주 백설 공주 그때 공주

2023-03-16

[잠망경] 아리스토텔레스와 투란도트

대학 시절 한 여대생과 사랑에 빠졌었다. 어느 날 그녀가 “우리 이젠 그냥 친구로 지내요” 한다. ‘플라토닉 러브’ 관계 비슷하게 지내고 싶다는 것.   양파에 식초를 뿌려가며 짜장면을 먹으면서 마주 앉은 것만으로도 마음이 호되게 설레던 나에게 플라토닉 러브는 아주 이상한 외래어였다. 문학청년 티를 내며 시(詩)에 대하여 호들갑을 떨지 말았을 걸 그랬지.   플라톤의 저서 ‘The Republic, 공화국’(BC 380)에 나오는 ‘시인(詩人) 추방론’을 읽었다. 그는 진리의 원형질, ‘이데아’와 그것을 모방하는 현상계와 현상계를 재차 모방하는 예술가들, 특히 시인들이 공화국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했다. 족쇄를 찬 노예들이 관람하는 동굴 벽의 그림자놀이의 프로듀서들이 예술가라는 사연이다. 동굴 밖에 건재하는 ‘이데아, Idea, 이념(理念)’에 도달하는 것을 훼방 놓는 예술가들!   음악에 대해서도 그는 말이 많았다. 어떤 음계법은 자제력, 용기 같은 덕성을 강화하고 어떤 음계는 애처로움, 연약함을 야기한다는 둥, 흥분을 일으키는 모종의 관악기는 없애야 한다는 의견도 피력했다. 그는 ‘건전 가요’를 주창했다. 내가 색소폰으로 연주하는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들으면 그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것이야.   미켈란젤로, 다빈치와 어깨를 나란히 한 르네상스 3대 천재 화가 라파엘로의 바티칸 궁전 벽화 ‘아테네 학당’을 응시한다. 플라톤이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고 있다. 머나먼 천상을 기리는 이상주의자와 지상의 이슈에 급급하는 현실주의자의 차이가 극명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과 뜻을 달리하여 “정치는 철학이 될 수 없다”고 저서 ‘정치학’(BC 350)에서 설파하면서 자칫 독재로 빠지기 쉬운 군주정치에 반하여 다수가 운영하는 정부를 선호했다. 플라톤은 사유재산 금지, 공동거주, 공동육아를 주장했고 사회주의의 원조라는 비판을 받는다. 권력의 사유화는 왜 금지하지 않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시학’(BC 330)에서 “시는 역사보다 진실하다”라 일갈한다. 그는 플라톤이 꺼리는 ‘나쁜 음악’마저도 카타르시스를 통하여 유용하다고 가르친다. 슬플 때 슬픈 음악을 들으면 슬픔이 가시듯이.   2022년 5월 10일,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아리아 ‘네순 도르마, Nessun Dorma, 모두 잠들지 못하리’를 격한 남성 합창으로 들었다.   남성 혐오증이 심한 투란도트 공주는 청혼자가 세 개의 수수께끼 풀지 못하면 죽여버린다. 러시아 왕자 칼라프가 그녀의 수수께끼를 다 맞춘다. 테스트를 패스했지만 그녀는 이름도 모르는 왕자와의 청혼을 거절한다고 아버지에게 선포한다. 칼라프는다음 날 아침까지 자기 이름을 공주가 알아내면 목숨을 바치고 그러지 못하면 약속을 지키라는 조건을 내세운다. 그리고 내일의 결말을 다짐하며 ‘네순 도르마’를 목청껏 뽑는다. 비장한 카타르시스의 발로다.   투란도트는 왕자의 이름을 알아내려고 그를 짝사랑하는 노예를 심하게 고문한다. 노예는 자결하고 왕자가 성급하게 덤벼들어 투란도트와 짙게 키스한다. 차가운 마음이 사라지면서 정염의 불길이 솟는 공주는 왕자와의 약속을 지키고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한민국이 제시하는 세 개의 수수께끼를 풀고 국민과 사랑의 결실을 맺기를 바란다. 취임식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린 네순 도르마가 우리의 장래를 위한 카타르시스가 되기를 기원한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아리스토텔레스 투란도트 투란도트 공주 스승 플라톤 러시아 왕자

2022-05-17

[별별영어] 헝가리 공주

 고전으로 손꼽히는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My Fair Lady)’는 사회적 방언을 실감 나게 보여 줍니다. 1900년대 초 같은 런던에 살면서도 계층에 따라 말이 달라 서로 소통하기조차 어려웠기 때문이에요. 오드리 헵번(사진)이 연기한 일라이자는 길에서 꽃을 팔며 하층민의 말 코크니(Cockney)를 사용하는데 극장 앞에서 우연히 만난 음성학자 히긴스 교수가 자신의 발음을 형편없다고 지적하자 다음 날 그를 찾아갑니다. 말씨를 바꾸고 꽃집을 차려 성공하고 싶다고 하죠.   우여곡절 끝에 히긴스의 맹훈련은 성공합니다. 코크니의 여러 특징 중에  today를 ‘투다이’로 발음하는 것이 알려져 있죠. 그는 “The rain in Spain stays mainly in the plain”처럼 ‘에이[ey]’ 음이 많은 문장을 무한 반복하라는 등 갖가지 훈련을 시켜요. 결국 일라이자는 무도회에서 완벽한 상류층 언어를 구사해 정중한 대접을 받습니다. 귀족들은 그녀를 ‘헝가리 공주’라고 짐작하는데, 이 대목이 흥미롭죠. 왜 하필 헝가리 공주일까요?   헝가리에는 여러 언어를 쉽게 배우는 언어천재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헝가리인의 대다수인 마자르족은 동양인에 가까운 외모에 우랄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유럽의 언어는 대부분 인도유럽어족에 속하지만 헝가리어는 먼 동양에 뿌리를 두고 있지요.   동서양의 이질적인 문명이 교차했던 지역이라 그런지 헝가리뿐 아니라 주변의 동유럽 국가 사람들 대부분이 외국어를 쉽게 배웁니다. 서양은 물론 동양의 언어도요. 동유럽인 교수들은 전 세계 어디서 학회가 열리든 2주 전쯤 현지 언어를 미리 익힌다며 공부해요. 큰 용기를 내서가 아니라 교양인으로서 당연하다 여기면서요.   최근 러시아의 침략 때문에 미디어에 자주 나오는 우크라이나인들도 동유럽인답게 외국어 구사력이 뛰어납니다. 이들은 슬라브족이고 언어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지만 아마 적극적으로 이민족들과 소통한 조상들의 유전자가 남아 있나 봅니다.   옛날에는 전쟁을 통해 동서양 문명의 교류가 이루어졌지만, 21세기에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전쟁의 비극을 알기에 우리는 더욱 마음 아프지요.   기필코 조국을 지켜내겠다고 우크라이나로 돌아가거나 전장에 남은 이들과 피난길에 오른 이들 모두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그리고 전쟁이 얼른 끝나 동유럽인들이 빼어난 언어 능력을 바탕으로 소통하며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별별영어 헝가리 공주 헝가리 공주 상류층 언어 언어 능력

2022-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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