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내 사랑 백설 공주
볼사치카 산책길을 정신없이 달렸다. 거무죽죽한 고목에 털썩 주저앉았다. 파도처럼 출렁대던 가슴이 서서히 가라앉았다.“공주께서 잠드셨습니다.” 한 생명을 지상에서 지워버리며 무표정하게 내뱉던 수의사의 말이 계속 귓전에서 맴돌았다.
자그마치 15년, 백설 공주가 나와 함께한 세월이었다. 개의 일 년 수명이 인간의 7년에 해당한다니 100세를 훨 넘긴 셈이다. 백세를 넘게 살았으니 너무 섭섭해하지 말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가슴 저 밑바닥에서 화산처럼 치고 올라오는 이 슬픔은 무엇일까. 시냇물 흐르듯 내 뒤를 졸졸 따라붙던 공주가 눈앞에 선하다. 잘 가라 백설 공주. 생명이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은 것은 한 번 왔다 가는 것을, 누가 그것을 비껴갈 수 있으랴. 이별은 헤어짐이 아니라 또 다른 만남의 시작이라고 달래본다.
공주는 친구의 아들이 준 개였다. 그는 중국산 피크니스 종을 여러 마리 키웠다. 개들이 새끼를 낳자 그들을 입양할 사람을 찾았다. 애완견 센터에 내다 팔아도 되련만 그는 돈이 아닌 강아지의 부모를 찾았다. 친구가 내게 한사코 입양을 권했다.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일했고 이미 ‘미스 티’란 개가 한 마리 있었다. 싫다는 나를 친구는 구경이나 하라며 그녀의 아들 집으로 데리고 갔다.
목화송이 같은 털, 땡글땡글 반짝이는 까만 눈과 마주친 순간, 나는 이미 공주를 품에 안고 있었다. 공주는 여느 강아지처럼 부접을 떨지도, 귀가 따갑게 짖거나 코가 미어지게 땅을 파지도 않았다. 있는 듯 없는 듯 흐르는 시냇물처럼 내 뒤를 따라붙었다. 나는 그녀를 ‘스노우 화이트-백설공주’라 불렀다. 공주는 화단의 꽃향기를 즐기고 새의 노랫소리를 줄기는 내 친구요 동생이며 사랑스러운 딸이었다.
남편은 나만 따르는 공주를 좋아하지 않았다. 남편은 공주를 보면 일부러 ‘왕’하고 장난을 치고 그러면 공주가 놀라서 달아났다. 그는 그런 공주를 보며 허허허,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렸고 그때마다 나는 그런 남편에게 눈을 흘겼다. 어쩌면 남편은 정말 공주를 질투했는지도 모른다. 남편이 밥을 줘도 공주는 가지 않았는데 공주가 그렇게 외골수인 것은 나를 닮은 것 같았다. 공주와 나의 유전이라면 우습지만 우리가 의식적으로 어떤 것을 되풀이하는 것을 유전성이라 하지 않던가? 나는 공주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공주 또한 내 마음을 충분히 읽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공주를 질투한 식구는 남편만이 아니었다. 공주보다 먼저 온 ‘미스 티’도 공주를 싫어하고 심한 텃세를 했다. 개도 사람처럼 사랑할 줄 알고 미워하고 질투한다. 미스 티는 앙증스런 외모와는 달리 사납고 식탐이 세고 의심이 많았다. 한번은 자기 밥을 재빨리 먹어치우고 공주의 밥을 뺏어 먹다 고기가 목구멍에 걸렸다. 켁켁 대는 미스 티의 입을 벌려 목에 걸린 고기를 겨우 빼냈다. 미스 티는 우리 집에 오는 손님도 가만히 지켜보다 맘에 안 들면 와락 발뒤꿈치를 물어뜯곤 했다.
우리 큰 며느리도 미스 티에게 발뒤꿈치를 물린 적이 있다. 아마 우리 남편이 나처럼 공주를 편애했다면 그의 발도 물어 뜯겼을 것이다. 그런 미스 티도 내게는 고분고분했다. 내게 잘 보여야 대접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런 것을 보면 미스 티는 영리한 개다. 미스 티의 텃세와 식탐에도 불구하고 백설 공주와 미스 티, 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그것은 공주가 미스 티를 자극하지 않고 양보하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미스 티가 자기 밥을 급하게 먹고 공주의 것을 뺏어 먹다 고기가 목에 걸려 켁켁대는 미스 티의 입을 벌려 목에 걸린 고기를 가까스로 빼냈었다.
오래전 2주간의 여행을 떠나며 공주를 올케한테 맡긴 적이 있었다. “고모가 없는 동안 백설공주는 물만 마셨어요. 실연한 여인처럼 하늘만 보고 울어서 불쌍했어요. 다시는 공주의 개 시터(dog sitter) 시키지 말아요.” 라며 올케는 백설 공주에게 눈을 흘겼다. 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미친 듯 내 품을 파고들며 흘리던 공주의 눈물. 그 눈물의 의미는 다시는 자기 곁을 떠나지 말라는 애원이었을 터, 그런데 이제 공주가 나를 떠나려 한다.
공주가 우리 집에 온 이듬해 첫 손자가 태어났다. 내 침대에서 자던 공주를 차고로 내보냈다. 집안에 날아다니는 개털 때문이었다. 공주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가슴을 쓸어주다 츄잉 껌만 한 딱지를 발견했다. 진찰결과 암이었다. 가슴 아픈 사랑의 상처일까. 나 때문인 것 같았다. 손자를 보는 재미에 공주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의사는 공주의 나이를 생각해 수술 대신 약을 처방해주었다. 그때 공주에게 4년이란 삶이 남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수술을 해 줄 것을. 몹시 후회된다.
공주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공주가 비실비실 일어나 오줌을 눈 뒤 시멘트 바닥에 쓰러진다. 푸시시 한 머리털이 툭 불거진 갈비뼈 위에서 새털처럼 날렸다. 공주를 허벅지에 눕히고 살살 등을 문질러 주었다. 공주야, 기운 차려, 그래야 산책도 하고 바닷가도 가지. 빨리 일어나. 공주가 알았다는 듯 실눈을 가늘게 떴다. 공주의 눈에 말라붙은 눈곱을 젖은 타월로 살살 닦아주었다. 너도 나만큼 슬프구나. 공주를 꼭 끌어안았다.
공주와 미스 티는 나와 함께 볼사치카 산책길을 매일 걸었다. 미스 티는 씩씩거리면서도 잘 따라왔지만 공주는 코스를 반쯤 돌면 주저앉았다. 나는 미스 티의 끈을 손에 쥐고 공주를 안고 산책을 마치곤 했다. 그럴 때면 공주는 내 손에 뜨거운 키스를 마구 퍼부었다.
3년 전 미스 티가 세상을 떠나자 작은아들이 공주를 그의 개 쿠키 곁으로 데려갔다. 그 뒤 공주는 가끔 아들과 쿠키랑 우리 집에 왔지만 전처럼 살갑게 굴지 않았다. 몸 따라 마음도 멀어졌나 했지만 공주는 그때 암과 투병 중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 공주를 우리 집으로 다시 데려왔지만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갈비를 삶아 스푼으로 국물을 한 입 한 입 흘려 넣어주었다.
마침내 남편이 공주의 안락사를 말하며 그녀를 차에 태웠다. 나는 노(no)하고 소리 지르며 쫓아나갔다. 숨도 못 쉬는 공주를 안고 한없이 울었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멀리멀리 흘러간다. 구름 속에서 공주가 손을 흔든다.
임지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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