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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절' 아닌 '건국절'로 확대-기념해야

    '일제 치하 36년을 끝내며 다시 빛을 찾은 날'. 8.15 광복절 78주년을 맞았다.  그리고 8월15일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75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날이기도 하다. 1945년 해방 이후 1948년 7월17일 헌법이 제정되고 세 달 후인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8월15일이 언제까지 광복절로 불려야 합니까."   지난 10일 본보를 찾은 양동자 박사의 자조 섞인 물음이었다. 광복절을 맞는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양 박사는 "앞으로 8월15일은 건국기념일, 대한민국 건국절로 국민은 물론 전세계인들에게 각인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양 박사가 이렇게 언급한 이유는 한국에서 한창인 '건국절 논란' 때문이다.  전임 문재인 정부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임시정부에 두고 있으며 건국 원년을 1919년으로 보았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친일파, 친미제국주의자 등으로 몰아세우며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공산주의자들을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으로 승격시켰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가 시작된 이래 정부는 '이승만 기념관' 건립 사업에 힘을 싣는 가운데, '1948년 건국'을 공식화 하는 모양새다. 이에 더해 지난 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독립유공자 및 유족 158명과 8•15 광복절 기념 오찬을 하면서 윤 대통령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위한 건국 운동‘" 이라고 표현했다.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과도기적 형태의 정부이며 "1948년 8월15일이 대한민국의 건국일"이라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반면에 '광복회'는 정반대의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종찬 광복회 회장은 지난 6월 "대한민국의 원년은 1919년"이라고 발언하며 기념관이 "이승만을 신격화 하는 '괴물 기념관'"이라고 말해 물의를 빚었다. 이는 지난해 10월 사망한 김원웅 전 광복회 회장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그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친일정권'으로 규정하며 1948년 건국을 부정했다. 이에 대해 양동자 박사는 "이런 망언을 하는 '광복회'를 과연 대한민국을 위하고,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애국자들을 기리 단체라고 봐야 할 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광복절'인 8월15일이 우리가 스스로 독립을 이룬 날도 아닌데, '일제로부터의 해방'보다는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건국일을 기념하는 게 올바른 일"이라며 "워싱턴 등에서 열리는 각종 기념식에서도 '광복'보다는 '건국'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양 박사는 1967년부터 2007년까지 하워드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미국 태권도연맹 및 팬 아메리카연맹 회장, 세계 태권도연맹 법사위원장, 미국 올림픽위원회(USOC) 상임위원, 세계체육학회(ICHPER-SD) 회장 등을 역임한 워싱턴 한인 1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런 양 박사가 현재 가장 힘쓰는 일은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독립운동 거점이자, 한미동맹의 기초를 다졌던 워싱턴에 그를 기리는 대통령 기념관을 세우는 일이다.     한국에서는 벌써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추진이 한창 진행 중이다. 지난 6월  말, 김황식 전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추진위원회’가 발족하면서 서울에 기념관 건립을 추진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인수, 박지만, 노재헌, 김현철, 김홍업 등 이승만, 박정희,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자제들이 추진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됐으며 한화갑 한반도평화재단 총재를 비롯한 진보, 보수진영의 많은 원로가 기념관 건립 추진에 뜻을 같이하고 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의 기념관이 논란 속에서 아직도 추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영화인 신영균 회장은 서울 한강 변 개인 부지 4000평을 기념관 건립을 위해 기부한다고 밝혀 '이승만 기념관' 사업은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워싱턴에서 지난 2016년 '이승만 기념 연구 교육 재단'을 창립한 양동자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 연구에 정통한 전문가다. 양 박사는 "국부 이승만 대통령의 지도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다"고 단언하며 "미국의 민주주의를 직접 겪으며 학습한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이 된 것이 민족의 역사를 바꾼 '하나님의 한 수'"라고 표현했다.    1894년 개화사상에 눈을 떠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한 이승만은 '천재'로 불릴만한 인재였다.    서재필 등 운동가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 '매일신문' 창간에 함께한 이승만은 독립협회 관련 투옥된 후 기독교로 개종했다. 감옥에서 영어공부에 몰두한 이승만은 미완성 상태이지만 사실상 최초의 '영한사전'을 만들기도 했다.    이승만의 감옥 생활은 장장 5년7개월이나 계속됐다. 석방된 이승만은 유학을 결심하고 미국으로 향한다. 인터뷰 과정을 거쳐 조지 워싱턴 대학 3학년에 파격 편입한 이승만은 독립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며, 조지 워싱턴대 학사, 하버드 대 석사, 프린스턴 대 박사 학위를 받는다. 한국인 최초의 미국 박사학위 취득자였다.       미국을 주무대로 독립운동에 힘쓴 이승만 박사의 명성은 한반도 땅에서도 자자했다. 1919년 3.1운동을 통해 각성한 애국지사들을 중심으로 국내외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선포됐는데, 그 중 8군데의 임시정부에서 이승만 박사를 국무총리 이상의 자리에 추대했다. 이중 상해임시정부는 '초대 국무총리'를, 한성정부는 '집정관'으로 추대했다.     이승만의 미국내 영향력은 일본의 진주만 침공으로 확대됐다. 그때까지만해도 이승만의 외교활동에 마지못해 대응 해줬던 미국정부는 이승만 박사의 저서 'Japan Inside Out'이 일본제국주의의 미국 침공을 '예언'한 책으로 선풍적인 관심을 모으자, 그를 인정했다.     해방을 맞이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이승만 박사는 선거를 통해 건국 대통령에 취임한다. 공산주의를 혐오했던 이 대통령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와 미국 중심의 '민주주의'의 대결에 있어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도 일찍 주목했으며, '한미동맹'만이 대한민국을 발전시킬 유일한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미국의 힘과 미국민들의 생각, 그리고 미국을 움직이는 기업인들과 정치인들의 정서를 이해했기에 가능한 분석이었다.     한국전쟁 중 '북진통일'만을 주장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이 1953년 6월 휴전에 사실상 잠정 합의하자 3만여명의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하며 맞섰다. 미국은 '이승만 제거 작전'까지 검토했으나 의회가 "반공투사 이승만을 버릴 수 없다"고 반대하자 물러섰다. 그 대신 역사적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2억 달러 원조, 한국군 강화 등 거의 모든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를 들어준다.  이런 내용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사실상 한국과 미국을 거의 모든 분야에서 결속시키는 힘을 발휘하며 대한민국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양동자 박사는 "이 업적 하나만으로도 이 대통령은 '국부'로 추앙받을 충분한 역할을 한 셈"이라고 강조한다.    양 박사는 "40년의 대미 외교 경험, 고급 영어 구사 능력, 그리고 누구보다도 투철한 애국심이 그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가졌던 건국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양 박사는 "그런 이 대통령의 주무대였던 워싱턴에 기념관을 설립하고, 미국의 차세대, 차차세대 동포들이 이 대통령을 배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나는 물론 우리 세대의 사명"이라고 역설했다.     범동포적인 '워싱턴 이승만 기념관' 건립 추진을 구상하고 있는 양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구미위원회 및 주거지로 사용한 워싱턴 DC 16가의 건물을 구입해 기념관으로 세운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현재 교회로 사용중인 건물의 구입을 위해 양 박사는 구체적인 협상을 진행중이라고 알렸다. 현재까지 한국 정부의 지원을 타진한 바 없으나, 워싱턴 DC의 주미대한제국 공사관의 구입해 성공적으로 개관한 국외소재 문화재 재단의 협조도 구상할 수 있다고 밝혔다.     대학 시절 4.19를 겪었다는 양동자 박사는 그 당시에도 이승만 박사의 동상을 끌어내리는 성난 시위대를 보고 "이해할 수 없었고, 일말 분노했다"고 회상했다. 이기붕 부통령을 중심으로 부패한 자유당 정권이 진행한  3.15 부정선거에 노령의 '국부'는 모든 책임을 떠안고, 하야했고, 미국으로 떠나 쓸쓸히 생을 마쳤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애잔함은 단순히 양 박사 뿐만이 아닌 그 당시 평범한 다수의 국민들이 느낀 공통적인 안쓰러움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이 된지 1년 만에 워싱턴을 방문했다.  7월28일 상하원합동회의에서 이승만은 다음같이 말했다.  "나도 여러분처럼 워싱턴이나 제퍼슨이나 링컨에게서 영감을 받아왔다. 나도 여러분처럼 여러분의 영광스러운 선조들이 전인류를 위해 추구했던 자유를 수호하겠다고 스스로 맹세해 온 사람이다."     미국의 자유민주주주의를 대한민국에 도입한 건국 대통령. 5000년 역사에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 한민족의 영광을 사실상 설계해 실현시킨 이 대통령의 빛나는 업적을 되새길 '기념관' 하나 쯤 워싱턴에 반드시 세워져야 한다고, 노구의 이승만 연구가 양동자 박사는 힘주어 말했다. 박세용 기자 spark.jdaily@gmail.com광복절 건국절 건국기념일 대한민국 기념관 건립 건국 대통령

2023-08-21

“친일 역사 청산 뜻 모으자”

친일 역사 청산에 해외동포들도 힘을 모으기 위해 민족문제연구소 워싱턴 지부가 발족한다.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과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을 비롯 워싱턴 지부 이사로 내정된 워싱턴 민주평통 윤흥노 회장은 9일 애난데일 소재 설악가든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민족문제연구소 워싱턴 지부 설립의 배경과 의의 등을 설명했다. 임헌영 소장은 “지난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는 등 식민지시대 청산을 통한 대한민국의 발전을 도모해온 민족문제연구소는 적폐청산을 위한 국민교육, 동아시아 평화정착이라는 목표를 위해 7500만 전세계 한민족의 힘과 뜻을 모은다는 의미로 해외지부를 설립하게 됐다”면서 “그 첫 시도로 세계의 수도 워싱턴에 지부를 설치하게 된 점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특히 민족문제연구소는 워싱턴 지부를 통해 미국에 존재하는 일제시대 당시의 각종 역사적 기록물을 판독, 분류해 식민지 시대의 잔재를 청사하고 증거하는 소중한 사료로 사용한다는 방침이다. 또 이같은 사료를 개관을 앞둔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하는 등 교육에도 사용할 예정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워싱턴 지부장을 맡는 박진영 교수(아메리칸 대학)는 인턴십 프로그램 등으로 워싱턴 지역에서 연구를 펼치는 동아시아 역사학자와 전공학생들의 참여를 이끌 계획이다. 박한용 실장은 “식민지 시대의 실상과 문제를 제대로 기록해야 하는 이유는 그 당시의 어둠을 알려야 그 어둠을 밝혔던 독립운동가와 선각자들의 위대함을 후손들에게 바르게 인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면서 “미주에 설립되는 지부들이 해외의 한인과 차세대에게 바른 역사를 알리고 교육할 수 있는 장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워싱턴 지부 창립총회는 오는 11일 오후 6시부터 타이슨스 코너 한미과학협력센터에서 열린다. 이날 창립식에서 박한용 실장은 ‘우리시대 역사 적폐를 말하다’를 주제로 특별강연 할 예정이다. 박 실장은 이에 앞서 오늘(10일) 오후 6시부터 같은 장소에서 워싱턴 민주평통 자문위원들을 대상으로 ‘우리시대 분단과 통일이야기’를 주제로 강연한다. 윤흥노 회장은 “지난 10여년간 워싱턴 민주평통이 지나치게 보수의 틀에 갇혀 각종 세미나와 행사를 진행한 점은 아쉽다”면서 “과거에서 빠져나와 동포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기위해 좌우,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화합과 발전을 도모하는 각종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개최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윤 회장은 “민족문제연구소 워싱턴 지부는 3년의 준비를 걸쳐 결실을 맺게 됐으며, 미주에 산재한 역사적 자료 수집 등에 최선의 노력을 펼칠 것”이라고 알렸다. 한편 1991년 설립된 민족문제연구소는 한국 근현대사의 쟁점과 과제를 연구 해명하고, 한일 과거사 청산을 통해 굴절된 역사를 바로 세우며, 친일인명사전 편찬 등 일제 잔재의 청산 활동을 펼치고 있다. 박세용 기자

2017-11-09

‘국뽕’인가, ‘친일’인가?

원폭 투하로 유명한 나가사키에서 불과 18km 떨어진 섬, 하시마. 모양이 군함을 닮았다 해서 ‘군함도’라고 불렸다. 이곳에 양질의 석탄이 매장돼 있음이 알려지고, 19세기 말 미쓰비시가 섬을 사들여 석탄 채굴을 시작한다. 영화 ‘군함도’는 2차대전이 막바지로 접어든 때, 징용된 조선인들이 이곳 광부로 투입돼, 해저 천 미터까지 내려가는 열악한 환경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 하며 증노동에 시달린 사실을 폭로한다고 했다. 영화는 군함도에서 탈출하려다 실패하는 소년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군함도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들어온다. 강제 징용된 사람이 있고, 속아서 온 사람이 있으며, 돈 벌러 온 사람도 있다. 경성 반도호텔 악단장인 이강옥 (황정민 분)과 그 악단원들이나 위안부 오말년 (이정현 분)은 속아서 온 경우고, 깡패 최칠성 (소지섭 분)은 돈 벌러 온 경우다.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은 강제 징용된 듯하다. 섬에 도착과 동시에 그들은 매우 거칠게 다뤄진다. 특히 더 심하게 구는 자는 같은 조선인인 노무계 송종구 (김민재 분)다. 방송으로 나오는 임금 및 규칙 내용은 이곳이 바로 노동착취 현장임을 알려준다. 각종 사고가 끊이지 않던 중, 조선인 작업구역에서 가스 폭발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자 일본 관리들은 화재가 번지는 걸 막기 위해 그 구역으로 통하는 갱도를 차단키로 결정한다. 그러나 조선인 광부들의 지도자 역할을 하는 윤석철 (이경영 분)도 함께 갇혀 있음을 알게 되자 곧바로 결정을 바꿔 구출 지시를 내린다. 한편 OSS (미국 전략정보국)에서는 군함도 탄광에 갇혀 있는 독립운동가 윤학철을 탈출시키기 위해 엘리트 광복군 박무영 (송중기 분)을 군함도로 투입한다. 막대한 제작비가 투자되고, 스타 배우들이 여럿 등장하고, 일류 스탭이 참여한 가운데 평가 받는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으니 영화는 유려하다. 초기 흥행기록을 보면 천만 관객 달성도 시간 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스크린 독과점 (전국 스크린의 80% 이상 점유) 문제가 불거지더니, ‘국뽕’ (지나친 애국주의를 비꼬는 표현)이란 지적에 이어서 정반대인 ‘친일영화’라는 논란까지 함께 제기되며 영화 흥행이 한풀 꺾였다. 게다가 바로 1주 후에 ‘택시운전사’가 개봉하면서 계속 밀리는 중이다. ‘친일’이란 논란에 기름을 부은 건 류승완 감독의 “일본인은 다 나쁘다는 이분법을 피하고 싶었다.”는 발언이다. 영화 내용도 기대했던 만큼 일본인의 만행을 보여주지 못 하고 흥행을 의식한 듯 픽션 부분에 치중한 인상인데, 이 부분이 문제다. 갱도가 좁아서 광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정도로 큰 몸을 가진 스타 배우들이 악단장과 깡패 역으로 등장해 일인들에게 갖은 아부를 떨며 조선인 비하 발언을 입에 달거나, 일인 관리들 앞에서 겁도 없이 노무계를 자처하고 나서는 등, 전혀 비참함과는 동떨어진 모습들을 보여준다. 탄광의 작업환경이 열악함을 보여주는 장면은 잠시뿐이고, 정작 조선인을 괴롭히고 착취하는 건 죄다 조선인의 짓으로 묘사돼, 감독이 폭로하고자 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의아하게 만든다. 또 다른 픽션인 광복군 정예요원의 투입도 송중기라는 한류 스타를 억지로 끼워넣으려는 설정에 불과해 보일 뿐, 군함도의 실상을 전하려는 노력과는 전혀 상관 없어 보인다. ‘군함도’로 포장해 애국에 호소하지만 않았어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도리어 ‘친일’이란 오명을 쓰고 불매운동 운운하는 반응까지 야기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최인화 (영화 칼럼니스트)

2017-08-24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부르는 아들의 '사부곡'

평생 한의사로 살며 힘든 사람 찾아 침술 봉사 "난 이 상 받을 자격 없어, 아버지가 받아야" "일본군에게 고문 당할 때 맞아 팔을 못쓰게된 아버지는 농사를 지을 수도, 물건을 들 수도 없었지. 가족은 지독하게 가난했고 아들인 나는 공부를 잘해도 낙제점을 받았어. 빨간 줄이 그어진 호적 때문에 툭하면 불려가 사상 조사를 받아야 했지." 구미지구 3·1운동 주모자로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은 김익시 선생의 아들 김정옥(94)씨의 말이다. 15일 뉴욕 시청에서 열린 대한민국 광복 72주년 기념식에서 공로패를 수상한 김씨는 “나는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 아버지에게 이 공을 돌리겠다”고 말했다. 1970년 도미 후 한평생을 한의사로, 대뉴욕지구 광복회에서 오랜 회원으로 지냈고 모자이크교회 장로인 그는 인터뷰를 통해 반세기도 넘은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18살쯤 때인가 아버지가 돌아가셨지. 아버지는 우리가 왜 이렇게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야 했는지 돌아가시기 전이나 되어서야 말해주셨던 걸로 기억해. 고문으로 망가진 몸 때문에 가족을 제대로 부양하지 못하셨고 장남 역할도 제대로 못하셨지만 아버지는 ‘한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다’고 하셨어. 어릴 땐 이해가 안갔지만 그런 아버지가 여전히 자랑스러워.” 대구 사범대를 나와 경남 창녕 옥야고등학교에서 아내 이상인(90)씨와 교사로 활동하며 교가를 작사·작곡하기도 했던 김씨는 미국에 온 뒤에도 아버지 김익시 선생이 독립운동가로 활동할 당시 피신해 있던 용정(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있는 도시로 독립운동 본거지가 되었던 용정촌이 있던 곳)에 여러 차례 방문해 무료 진료를 펼쳤다. 김씨는 “독립운동가의 자손은 3대까지는 힘들게 산다는 인식이 지배하던 때였는데, 해방이 되고나서도 내 자식이 대학생이 될 때까지도 아버지 이야기를 함구했다”며 “말은 하지 않았지만 묵묵히 봉사하며 아버지의 뜻을 이어간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씨의 장인인 이명제씨도 상해임시정부에서 통신장교로 활동했던 감리교 목사로 김구 선생의 군 자금을 두만강으로 배달했던 장본인이지만 정작 그 후손들은 넉넉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했다. 평생을 용정, 과테말라 등 힘든 삶을 사는 이들을 찾아 침술로 의료 봉사를 전해온 김씨는 “내가 독립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자격이 없다”고 연신 말하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남은 여생을 더 많이 봉사하며 베푸는 삶을 살고 싶다는 그는 “눈 감기 전에 한국의 통일을 보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황주영 기자 hwang.jooyoung@koreadaily.com

2017-08-16

“촛불은 독립운동 정신의 계승”

광복 72주년을 맞이하여 워싱턴주에서도 기념식이 시애틀, 페더럴웨이, 타코마 한인회 공동 주최로 열렸다. 15일 오전 11시 페더럴웨이 코앰티비 공개홀에는 한인단체장을 비롯 이 지역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 후손인 박영환씨와 이성수씨, 6.25전쟁 참전용사, 베트남전 참전용사들과 한인 100여 명이 참석하여 광복절의 의미를 되새겼다. 본국 문재인 대통령은 1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2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경축사를 낭독했으며 문덕호 시애틀 총영사가 대독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제 72 주년 경축사는 “촛불혁명으로 국민주권의 시대가 열리고 첫 번째 맞는 광복절”이라고 시작, 그 동안의 정부가 한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친일에서 군사독재 그리고 비상식적인 정권으로 이어져 온 것을 암시했다. 또한 “1919년 3월, 이념과 계급과 지역을 초월한 전 민족적 항일독립운동을 거쳐, 이 선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기반이 되었다'고 밝힘으로써 그 동안 일부에서 주장하던 한국의 건국일이 1948년이라는 주장 논리를 반박했다. 또 광복이 단순히 미국 등 승전국에 의해 일본으로부터 무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름 석 자까지 모든 것을 빼앗기고도 자유와 독립의 열망을 지켜낸 삼천만이 되찾은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런 “항일운동의 정신이 한반도와 세계 곳곳에 남아 있었고 결국 우리 국민이 높이든 촛불은 독립운동 정신의 계승'이라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최근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국면에 대해 “한반도의 평화도, 분단 극복도, 우리가 우리 힘으로 만들자”는 자주정신과 자주국방의 의지도 표명했다. 그러면서도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상황을 매우 심각한 위험 요소임을 인식하고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미국과 긴밀히 협력하면서 안보위기를 타개 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북한에 평화적 대화를 촉구하고, 한일관계에 일본의 일관되게 과거사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는 진정한 태도를 촉구했다. 아울러 “국민주권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 보수, 진보의 구분이 무의미했듯이 우리 근현대사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세력으로 나누는 것도 이제 뛰어넘어야 한다”며 이념논쟁이 끝나기를 희망했다. 문 대통령은 경축사 마지막을 “대한민국 국민이 세계에서 최고라고 당당히 외치자”며 국민들의 자부심을 고취했다. 기념식에 참석한 김재욱 페더럴웨이 한인회 이사장은 축사를 통해 “1910년 합병이후 3.1 운동의 정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독립투사들이 피흘려 얻어낸 값진 독립이었다 ”고 말하고 “우리 교민들은 정치력 항상을 위해 단합해 고국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단합을 강조했다. 시애틀한인회 홍윤선 회장은 ”최근 군함도 영화를 관람했는데 국가가 주권을 잃으면 국민이 노예가 될 수 있다”고 관람소감을 밝히면서 “근래의 북미 대치로 나라가 풍전등화와 같은 이때 우리 모두가 미래를 위해 하나가 되야 한다”고 당부했다. 기념식은 피아노 트리오의 축하연주, 권다향 명창의 아리랑과 레위 합창단의 축가로 이어졌으며 축가 후 참석자 전원이 광복절 노래를 제창하고 대한민국의 번영을 기원하는 만세 삼창으로 기념식을 마쳤다. (이양우기자 (광복절 경축 기념식 참석자들이 만세삼창을 부르고 있다.

2017-08-16

위안부 참상 겪은 할머니들에게 "광복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해마다 8월 14일이 돌아온다. 하지만 어떤 날인지 그 의미를 정확히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광복 46주년을 하루 앞뒀던 1991년 8월 14일. 26년 전 이날 한 여성의 용기 있는 고백으로 인해 수십 년간 드러나지 않았던 위안부 피해 실상이 세상에 최초로 폭로됐다. 고 김학순 할머니는 이날 자신이 일본군 성노예였음을 처음으로 공개하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저질렀던 여성 인권 유린의 만행을 고발했다.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진실은 김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이 있었기에 공론화될 수 있었다. 증언 당시 67세였던 김 할머니는 10대 때 겪었던 위안부 참상을 말했다. 그는 “그동안 말하고 싶어도 용기가 없어 입을 열지 못했다”며 “언젠가는 밝혀질 역사적 사실이기에 털어놓기로 했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의 고백은 1990년 일본 정부가 위안부는 민간 업체의 소행이었지 일본군은 무관하다는 주장을 하자 이에 반박하기 위해 이뤄졌다. 그는 “당한 것도 너무나 치가 떨리는데 일본이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너무 기가 막혀 증언대에 서게 됐다”고 말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계속됐던 침묵이 깨졌다. 김 할머니의 증언이 도화선이 돼 다른 피해자들도 피해 사실을 밝히며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 외교 문제를 넘어 대표적인 여성인권 의제로 부상했다. 김 할머니의 용기는 미국에서도 꽃 피우고 있다. 최초 증언 후 16년이 지난 2007년 7월 30일 연방하원에서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 문제에 대한 책임있는 행동을 일본정부에 요구하는 결의안이 통과됐다. 이를 계기로 미 전역에 위안부 기림비가 세워졌다. 2010년 10월 23일 뉴저지주 팰리세이즈파크 공립도서관 앞에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가 설치됐다. 위안부 기림비로는 전 세계 최초로 설립된 것이다. 이후 캘리포니아주 가든그로브(2012년)와 뉴욕주 나소카운티(2012년), 뉴저지주 버겐카운티법원 앞(2013년)·유니온시티(2014년)·클립사이드파크(2017년),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카운티청사(2014년) 등에 기림비가 세워졌다. 또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2013년), 미시간주 사우스필드 한인문화회관(2014년), 애틀랜타(2017년) 등 3곳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져 위안부의 비극이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김학순 할머니가 지난 1997년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20년째다. 이제 위안부 생존자는 37명에 불과하다. 2014년 유니온시티 기림비 제막식에 참석한 이옥선 할머니는 “아직 우리에게 광복은 오지 않았다”고 외쳤다. 서한서 기자

2017-08-14

"항일과 친일 사이, 시대의 모순 표현했다"

친일과 항일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내면의 정체성. 김지운 감독은 그것을 '묵직한 회색의 경계'라고 표현했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 아군과 적군 사이에서 흔들리는 내면의 정체성을 통해 그 시대의 모순을 드러내고자 한 김지운 감독의 영화가 '밀정'이다. 23일 북미 전역에서 동시 개봉을 앞두고 영화 홍보 차 뉴욕을 방문 중인 김지운 감독과 배우 한지민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다음을 일문일답. -민감한 시대의 경계를 다루는 데에 대한 부담감은. 김: "시대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대한 예민함이 있었다. 항일과 친일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겪는 인물들을 통해 그 시대의 모순을 드러나고 싶었다. 한국 국가 시스템이 정상적이지 않을 때 그것은 개인을 변질시킬 수 있는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 얘기하고 싶었다." -여성 독립운동가 현계옥 열사라는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했는데. 한: "처음엔 사실 연계순이라는 캐릭터가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당시 내 나이보다 어린 여성 독립운동가라는 캐릭터도 정말 동감하기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연기를 하는 순간까지도 사실 모르겠었다. 고문 신은 정말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 대본에 '연계순이 내는 비명은 사람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라고 써 있었는데, 정말 연기를 하면서도 공포에 질리니 그런 소리가 나오더라. 고문 신에서 컷마다 공포에 질려 눈물을 쏟아냈다." -서대문형무소 촬영은 어땠나. 김: "억울하고 거룩한 죽음과 희생이 있었던 곳이 서대문형무소다. 그래서 그런지 굉장히 차가웠다. 그리고 그날은 유독 날씨가 추웠다. 서대문형무소 신은 내내 차가웠던 조선인 일본 경찰관인 이정출 역을 맡은 송강호의 뜨거운 감정을 보여줘야 해서 아이러니하기도 했다. 차가운 시대와 뜨거운 사람이 중심인 영화다." 이조은 기자 lee.joeun@koreadaily.com

2016-09-21

친일 논란 팔봉문학상 부활…이영묵 작가 등 팔봉문학상위원회 발족

이영묵 작가 등 워싱턴 문인들이 팔봉문학상위원회(회장 박윤수·심사위원장 최연홍)를 설립하고 내달 제2회 시상식을 개최한다. 제1회 팔봉문학상 수상자인 이영묵 작가와 백순 버지니아 워싱턴대 교수, 최연홍 워싱턴문인회 초대 회장, 한인섭 전 RFA 한국어방송국장, 윤경의 공학박사, 이정렬 전 워싱턴 이화여대 동창회장은 23일 애난데일 펠리스 식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위원회 설립을 밝혔다. 지난해 팔봉 김기진 선생 작고 30주년을 맞아 이 상을 제정하고 주관했던 워싱턴문인회가 팔봉 선생의 생전 친일 행위 논란으로 상을 폐지한지 2개월 만이다. 최연홍 시인은 “팔봉 선생은 20세기 초엽 한국 근대사에 빠질 수 없는 대문호로, 당시의 인민재판식 친일인명사전만으로 그를 단정짓는 건 비도덕적인 행위”라고 폐지의 비합리성을 주장했다. 이영묵 작가는 “팔봉비평문학상은 한국에서도 지난 30여년간 가장 권위있는 비평문학상으로 명성을 떨쳐왔다”며 “현재 미주 한인사회에 독자적인 문학상이 없는 만큼 팔봉문학상을 워싱턴을 비롯한 미주 전역의 문학계를 리드하는 명성있는 상으로 성장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제2회 팔봉문학상 수상자로는 백순 교수가 선정됐다. 백 교수에게는 워싱턴 지역에 거주하는 팔봉의 친딸 김복희씨가 기탁한 500달러의 상금이 지급된다. 시상식은 6월 4일(토) 오후 6시 비엔나 소재 한미과학재단에서 가지며, 팔봉 선생의 작품 ‘해조음’의 낭독 행사 등으로 꾸며질 예정이다. 백순 교수는 “팔봉 선생은 한국 문학계의 별 중 한명으로, 이번 상을 수상하게 돼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며 “팔봉 선생은 이조 오백년의 가난한 백성들의 삶을 조명했을 뿐 이념적 프롤레타리안이 아니다. 팔봉을 반대하기보단 이해하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다음은 팔봉문학상 위원회 발기인 명단(무순·직함생략). 박윤수·이도영·조동열·린다 한·이정열·한인섭·변만식·노세웅·김용미·최인달·이정자·박양자·김행자·박앤·최연홍·민병희·허권·이영묵·권귀순·백순·염문락·이천우 유현지 기자

2016-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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