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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이 칼럼 4

      건국 초기나 지금이나 공산주의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 설치고 있다. 우리는 지금부터 목숨을 걸고 이 나라를 바로 세우는 작업에 총 궐기 해야 한다. 그 우선순위는, 이승만 대통령을 국부로 바로세우고 대한민국 건국 기념일을 제정할 것이며, 제주도 4.3폭동과 광주 5.18 국가변란의 역사를 바르게 다시 써야하며, 잘못된 역사인식을 바로 잡아야 한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북에 가서 저질은 6.15선언이나 10.4합의는 김구-김일성 방식의 남북합작을 위한 망국적 망상의 반복이며 우리나라 정계에서 이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철저하게 척결 되어야 한다. 2009. 3. 1에 기독교 성직자 831명이 시국선언을 했는데 6.15 선언과 10.4합의를 실천하라고 주장하였다.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가 그동안 수없이 많은 국난을 겪으면서 생존을 하였지만 교회들이 부패하고 역사인식을 바르게 하지 못하였으며 북한의 대남공작에 오염되었던 사실을 깨닫고 이제부터는 이승만 대통령이 기독교정신으로 건국한 이 나라를 지키는 일에 앞장서야한다.     이승만 바로세우기 운동을 우리는 서둘러야한다. 북한해방을 통한 민족통일이 임박한 이때에 그 일을 다그쳐야 하는 이유는 김일성 일가의 집단이 붕괴된 후 나라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그날을 새로운 국가의 탄생으로 처리할 가능성이 없지 않기 때문에, 소위 통일이 달성 된다고 해도 그것은 대한민국의 잘못된 현실을 바로 정리한 것뿐이며 새로운 국가의 탄생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연속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의 국호는 대한민국이고, 우리의 건국 국부는 이승만 대통령이며, 국기는 태극기이고, 국가는 지금의 애국가로 고정해야한다.   대한민국은 건국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유일한 나라다. 우리의 건국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너무나 위대하고 감동적인 사례가 발견되며 그 역사의 주도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다. 5000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탄생되는 민주주의 국민국가 건설을 위하여 1948년 5월 10일에 국민이 투표하여 198명의 제헌 국회의원들이 선출되고 국회의장에 선출된 이승만은 개원 연설에서 〈우리나라에 민주주의 국가가 탄생하게된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도우심으로 성취 되었다〉고 하였고, 종로 갑 구에서 당선된 이윤영 의원 (감리교 목사)을 불러내어 개원 기도를 시켰는데 그분의 긴 기도 내용은 국회 개원이 아니라 교회 부흥회를 방불케 하였다. 이 기도 내용은 미국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에 버금가는 훌륭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건국이념이 담겨 있다. 1948년 8월 15일 건국기념식에서도 대통령 이승만은 헌법 책 위에 성경책을 올려놓고 그 위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할 때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삼천만 동포 앞에서 헌법을 준수하는 충실한 대통령 직을 이행 하겠다〉고 선서하였다. 이처럼 대한민국은 기독교정신을 밑에 깔고 건국된 나라다.  이처럼 훌륭한 우리의 건국역사를 무시하고 종북 세력과 전교조는 지금 철저하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그런 인간들이 대한민국의 정부와 법조계와 언론계 연예계 사회 구석구석에 포진되어 있다.    마이클 칼럼 이승만 대통령 대통령 이승만 대한민국 건국

2024-04-19

[기고] 민주주의 그 꽃

고은 시인의 작품 가운데 ‘그 꽃’이란 유명한 시가 있다. 시인을 노벨문학상 후보에오르게 한 시다.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아주 짧은 시이지만 무궁무진한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오늘날 한국은 세계 10위 권의 강국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진 숱한 고난과 역경, 애환이 있었다. 35년간의 일제강점기 지난하게 독립운동을 하며 상해임시정부를 세웠고, 이어 광복과 건국, 6·25전쟁, 4·19, 광부와 간호사 서독 파견, 월남전쟁 참전, 그리고 조국 근대화 등 숱한 굴곡이 도도한 역사의 물결 속에 있다. 그런데 짓밟혀도 일어서고 다시 핀 끈질긴 ‘그 꽃’을 오늘에야 여유 있게 살펴볼 수 있었고 비로소 아름다운 꽃인 줄 알게 된 것 같다.   이승만 대통령만 하더라도 부정적인 것들이 진실을 호도하고 있었다. 호구지책이 우선이라 제대로 따져볼 겨를도 없이 잊혀 가는 역사가 되었었다. 하지만 ‘건국 전쟁’이란 다큐멘터리를 통해 진실한 대한민국 건국 과정을 재조명해 볼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도 잘살아 보자’며 3차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 산업화를 추진했고 그 결과 조국 근대화의 토대가 마련되지 않았는가.   국가부도라는 난생처음 겪어보는 IMF(국제통화기금)사태 앞에 나라를 구하겠다고 ‘금 모으기 운동’까지 벌였던 국민의 열화와 같은 마음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오늘에야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진실 된 역사의 그 꽃을 이제라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대한민국의 건국과 경제부흥, 근대화 등 애환과 희생의 꽃이 피어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그 꽃, 삶의 여유를 찾고서야 그 꽃을 발견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그것도 잠깐, 작금 한국의 총체적 난국은 활짝 핀 그 꽃을 안개로 덮어버린 것 같아 내심 불안과 초조함이 가슴을 졸이게 한다. 집단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환자를 볼모로 의료대란을 초래하고 있는 의사들, 그리고 국가의 근간을 책임져야 할 일꾼을 뽑는 총선도 범죄와의 전쟁으로 비하되고, 극명하게 갈라진 유권자의 마음은 외줄 타기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하다.     개인의 자유와 의무, 질서는 법에 의해 엄연히 존재한다. 자유 민주주의의 근간은 법치주의이기 때문이다. 법을 어겨가며 정치를 해서도 안 되고 법을 짓밟고 인권을 외쳐서도 안 된다. 법치국가는 법에 의해 개인이나 집단의 자유가 존중된다.   일부 총선후보자 면면을 보면 가관인 것이 각양각색의 전과자들이라는 점이다. 각종 형사법,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은 것을 비롯해 자녀 편·입학 서류 위변조, 선거에 돈봉투 살포, 성금기금 횡령, 부동산투기 및 불법 거래, 불법 코인 거래 등 다양한 종류의 범법자들이 국민의 대표가 되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 아닌가. 더는 사회악이 뿌리내리지 못 하게 해야 하는데 사회 분위기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 민주주의는 법치주의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또다시 그 꽃을 보지 못하고 올라가야 하나. 참담한 현실 속에 이번 총선만은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국민의 선택이 과연 어떨 것인지는 안갯속이지만 그래도 올라갈 때 보지 못한 민주주의 그 꽃을 정상에서 내려올 때 보길 원하다.   국민의 옳은 선택만이 대한민국을 온전한 법치국가로 세울 수 있다. 미래 세대가 꿈과 희망을 펼치게 할 수 있는 것도 이번 총선에서의 올바른 선택에서 시작된다. 민주주의 그 꽃을 모두가 보며 평화를 만끽하길 기대해 본다. 박철웅 / 일사회 회장기고 민주주의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 건국 건국과 경제부흥

2024-04-08

[기고] 나라를 세우고 지킨 사람 바로알기

미국의 대륙군(미국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가장 존경한다. 그의 일생이 나라를 사랑하는 지도자로서 너무 훌륭했기 때문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전쟁 영웅이자 독립운동가로 미국이 세계 제1의 강대국으로 발전하는 토대를 닦았다.     최근 화제를 불러온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기록이다. 영화를 관람하며 가슴이 찡해 오는 감동을 받았고 주인공인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진 면목도 새삼 알게 되었다. 영화는 그의 인생을 조명하며 생을 마감할 때까지 시종일관 조국을 사랑했던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를 존경하는 관람객은 상영 도중 눈물까지 흘리는 모습이었다.     아무튼 영화 덕분에 건국 대통령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한층 더 반듯하게 이루어져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이다. 그동안 잊혔던 이승만 대통령의 많은 업적이 국민 사이에서 집단기억의 형태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는 이승만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1, 2, 3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75년에 태어나 1965년 별세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주로 미국에 체류하면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유학 중에도 정치활동을 했다. 광복 후 귀국해 분단된 38선 이남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고, 1948년 최초로 시행한 총선거를 거쳐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임기 중이던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UN에 제소, 미군을 비롯한 UN군의 참전을 끌어냈다. UN군 참전 덕에 국군을 서울을 탈환했으며 북진을 할 수 있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52년 대통령 직선제 개선을 통해 2대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이후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3선과 4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3·15 부정선거로 인해 4·19혁명이 발발하자 “국민이 원하면 하야한다”라며 성난 시위군중을 피해 하와이로 망명했다   영화 건국전쟁은 개봉 27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 영화를 보고 “역사를 올바르게 알 기회”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시행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농지개혁 등이 대한민국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세력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사사오입 개헌’과 3·15 부정선거 등 부정적인 것들만 부각한다. 이를 통해 이 전 대통령이 장기 집권을 통해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고 주장한다.     돌이켜보면 1949년 6월 발생한 이른바 ‘남로당 프락치’ 사건으로 막 출발한 제1공화국의 이승만 자유민주주의 철학에 제동이 걸렸다. ‘남로당 프락치 사건’은 제헌국회의 김약수 부의장을 비롯해 13명의 현역 의원이 김일성과 내통한 혐의로 체포된 사건이다.     어느 책에서 이승만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일상이 소개된 내용을 본 적이 있다. 해방 후 전력 부족으로 전기가 시간제로 공급될 당시 프란체스카 여사가 촛불을 켜 놓고 남편의 낡은 양말을 손수 꿰맸다는 글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다. 그 장면을 그려보면서 그 시절 시골 가난한 농부의 생활과 다름이 없다고 느껴졌다.   대한민국 건국의 기원을 1948년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세운 망명 임시정부 시절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국가라는 것은 국민, 국토 및 주권의 3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역사를 입맛에 따라 평가하고 양념을 치는 것은 배격해야 한다. 모름지기 찬란한 역사와 빛나는 문화에 왜곡과 혐오의 언어들이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는지 자문해 보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기고 나라 이승만 대통령 건국 대통령 초대 대통령

2024-04-01

"대한민국 국부 위한 사업에 충실"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의 신임회장에 정인량 목사가 선출됐다.     기념사업회의 정기총회가 열린 지난 23일, 애난데일 소재 설악가든에는 30여명 이사 및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총회와 더불어 이・취임식이 진행됐다.   정 신임회장은 “선배 회장들이 이룩해 온 일을 이어받아 기념사업회를 이끌어 갈 것”이라며 “이사들, 특히 여성이사들을 확충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의 국부이자 대표 지성인 이승만 박사는 특유의 담대함으로 당시 세계 지도자들과 교류하면서 대한민국 건국을 이끄는데 큰 이바지를 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앞으로 젊은 세대를 영입・육성해 이승만 박사의 건국 이념을 후세대에 계승해 나가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한편 기념 사업회의 전직 회장 및 임원들로 구성된 공천위원회는 이달부로 임기가 만료되는 시점에 정세권 전회장이 연임의사를 밝히지 않음에 따라 만장일치로 정인량 신임회장을 추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세권 전회장은 “기념사업회를 위해 도움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한인사회 지도자들의 꾸준한 협력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올해 77세의 신임 정인량 회장은 1988년 도미해 워싱턴영광장로교회를 설립, 30년 목회후 은퇴했다. 25대 워싱턴지역한인교회협의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2022년 기념사업회 회장 직무를 3개월간 수행하다,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한 바 있다. 이번에 다시 재취임하게 된 정 회장의 임기는 2026년 3월까지다.     김윤미 기자 kimyoonmi09@gmail.com대한민국 국부 대한민국 국부 기념사업회 회장 대한민국 건국

2024-03-28

"대한민국 국부 위한 사업에 충실"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의 신임회장에 정인량 목사가 선출됐다.     기념사업회의 정기총회가 열린 지난 23일, 애난데일 소재 설악가든에는 30여명 이사 및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총회와 더불어 이・취임식이 진행됐다.     정 신임회장은 “선배 회장들이 이룩해 온 일을 이어받아 기념사업회를 이끌어 갈 것”이라며 “이사들, 특히 여성이사들을 확충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의 국부이자 대표 지성인 이승만 박사는 특유의 담대함으로 당시 세계 지도자들과 교류하면서 대한민국 건국을 이끄는데 큰 이바지를 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앞으로 젊은 세대를 영입・육성해 이승만 박사의 건국 이념을 후세대에 계승해 나가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한편 기념 사업회의 전직 회장 및 임원들로 구성된 공천위원회는 이달부로 임기가 만료되는 시점에 정세권 전회장이 연임의사를 밝히지 않음에 따라 만장일치로 정인량 신임회장을 추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세권 전회장은 “기념사업회를 위해 도움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한인사회 지도자들의 꾸준한 협력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올해 77세의 신임 정인량 회장은 1988년 도미해 워싱턴영광장로교회를 설립, 30년 목회후 은퇴했다. 25대 워싱턴지역한인교회협의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2022년 기념사업회 회장 직무를 3개월간 수행하다,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한 바 있다. 이번에 다시 재취임하게 된 정 회장의 임기는 2026년 3월까지다.     김윤미 기자 kimyoonmi09@gmail.com대한민국 국부 대한민국 국부 기념사업회 회장 대한민국 건국

2024-03-24

다시 되돌아보는 이승만 대통령의 위업

1. 들어가면서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의 삶과 죽음, 그 속에 담긴 독립운동지도자로서의 면모, 대한민국 건국과 개혁, 6.25 전쟁과 극복, 한미동맹과 경제발전 등 한국 현대사의 구비 구비들을 시계열 방식으로 새롭게 파헤친 김덕영 감독의 다큐 영화 ‘건국전쟁’이 요 즘 한국 영화가에서 뜻밖에도 관객동원에 큰 성공을 보이고 있다.  이 영화가 높은 시청률 을 보이면서 롱런(Long Run)할 전망을 갖게 해주는 것은 감독과 제작진들의 노력의 결과 이다. 하지만 지난 60여 년 동안 역사 속에서 지워졌거나 잊혔던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 사를 우리 삶 속으로 다시 살려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생존 인구의 20%가량을 차지하는 70, 80대의 연령층은 이승만 박사를 다소 아는 분들이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조국 광복과 건국, 6.25 전쟁과 한미동맹 등 한국의 오늘을 있게 만든 역사의 재단사로서의 진실을 제대로 아는 분들은 의외로 적다.   특히 4.19혁명 이후에 태어난 세대(윤석열 대통령도 1960년생)들은 이승만을 부정하는 선전이 압도적인 상황 속에서 생장했다. 또 이후 역대 대통령들은 학력, 경륜, 지성 면에서 자기보다 훨씬 출중한 이승만 박사를 일부러 무시하거나 외면했고 독립운동 지도자들 중에서도 자기와 비교해서 꿀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지도자들을 골라 우대했다. 영화 ‘건국전쟁’의 우위성은 한국의 현대를 살면서도 현대사의 진실이 무엇이었던가를 배우지 않았거나 지워져서 잘못 알았거나 바르게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궁금증, 갈증을 채워주고 무엇이 역사의 진실인가를 사실(Facts)로 알려주기 때문이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에 관해 왜곡되거나 잘못 알려진 진실을 실증 자료를 통해서 바로 잡아주고 그 의미를 제대로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모처럼 한국의 다큐 영화가 폐가입진(廢假立眞: 가짜를 폐하고 진실을 세운다)의 진실을 증언하는 것 같아 반갑다. 영화를 제작한 김덕영 감독은 시청자가 100만을 넘어서면 비로소 현대사를 보는 국민의 정치의식에 큰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2. 김일성의 대남 심리전 이승만 대통령이 역사 속에서 철저히 짓밟혀진 것은 대한민국 역대 정권들의 건국 대통령을 무시, 외면이라는 졸렬한 정책 때문만은 아니었다. 북한의 김일성의 반이승만(反李承晩) 음모가 가장 큰 원인이다. 김일성은 자기 정권이 1948년 8월 15일에 건국된 대한민국보다 2년 앞선 1946년 2월 소련의 괴뢰정권으로 출발,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단시켰고 더 나아가 전 한반도를 초토화시킨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한 전쟁범죄의 모든 책임을 져야 할 존재였다.   김일성은 이러한 엄청난 범죄의 책임을 모면하고 그가 세운 북한 정권을 한반도의 정통정부로 조작하기 위해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로 대한민국을 세우고 유엔 등 국제사회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자기 죄과를 덮어씌우고 철저히 부정해야 했다.   또 북한의 남침을 유엔이 합법적으로 세운 정통정부에 대한 침략으로 간주, 유엔군의 힘으로 북한의 남침을 물리친 이승만 대통령의 지도력을 역사 속에서 지워버릴 필요성을 절감했다. 1948년부터 시작된 북한 대남 심리전의 핵심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는 이 심리전 공작을 당시 소련이 운영하는 국제공산주의지휘부인 콤민테른 (Comintern)과 제휴하여 펼쳤다. 당시 북한의 심리전 구호는 “독재자 이승만, 남한만의 단독 정부수립으로 민족을 분열시킨 원흉, 동족상잔의 원인을 제공한 이승만”으로 만들고 이승만을 매도하는 물심양면의 심리전에 총력을 경주했다.   제주 4•3폭동, 여순 반란사건 역시 고강도 심리전의 일환이었다. 유엔감시하의 남북 총선거 방안이 유엔총회에서 통과된 그 순간부터 오늘날까지 북한의 대남 심리전은 이승만 대통령을 매도하고 지우고 부정하는 일을 하루도 멈추지 않았다. 북한의 반이승만(反李承晩) 심리전은 1960년 4.19로 이승만이 하야한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역대 대통령들은 자기에 대한 북한의 지명공격이 아니고 이승만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에 이를 맞받아 치지 않고 방관하거나 외면했다.   북한 대남공격의 본질은 자연인 이승만에 대한 공격이 아니고 대한민국 성립의 정당성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런데도 역대 정권들은 북한의 이승만 공격을 빙자한 건국 정당성에 대한 공격을 건성으로 넘기거나 무방비로 방치했다. 역대 정권들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북한의 심리전 공세를 주목하지 않는 무방비 상태를 틈타서 북한의 사론에 오염된 국내의 좌파 역사학자들은 김일성이 북한에서 만든 ‘조선통사’(朝鮮通史)를 마치 정설인 양 받아들이는 학문적 모반에 나섰다.   ‘분단시대의 현실인식’(姜萬吉 집필)은 “모든 통일은 옳다”는 논리를 조작, 통일사관을 내세우고 민족을 인권을 가진 개개 성원의 구성체로 보지 않고 ‘개인은 전체의 일부’라는 논리로 민족을 규정하면서 ‘우리민족끼리’라는 허구적 담론(민족사관)을 꺼내 들어 한국 현대사 왜곡에 앞장섰다. 이들은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지우고 부정하는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역사 반란을 일으켰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조지 오웰 (George Owell)의 ‘1984년’의 좌익 사관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국사학계의 이러한 움직임을 묵인하거나 방관했다. 역사 교과서 문제가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시절에 제기되었다. 하지만 전교조 패당들의 반발에 밀려 단호히 대처하지 못했다. 역사교과서 문제를 놓고 정부는 확고한 입장을 세우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다가 문제 자체를 사실상 방기했다. 그러면 역대 정권들의 현대사를 보는 안이한 태도와 철학의 빈곤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3. 주사파 세력의 등장   김일성의 대남 심리전은 1980년에 이르러 한국 대학가에 주사파들이 활개를 치고 등장할 여건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일부 좌파 사학자들이 떠드는 통일사관은 ‘어떤 통일’인지를 묻지 않는다. 통일은 무조건 좋다는 것이다. 공산화 통일도 좋다는 의미다. 공산화 통일을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주창한 세력은 하나같이 반통일세력이 되고 민족 분열세력이거나 친일파로 몰았다.   김일성이 민족해방전쟁이라면서 일으킨 6•25남침도 통일을 겨냥한 것이기 때문에 정당하며 유엔감시하의 자유 총선거로 세워지는 대한민국을 반대하기 위해 제주에서 일어난 4•3폭동도 공산통일을 지지한 것이므로 민족통일운동의 범주에 포함시킨다는 것이다.   회고컨대 1980년대는 한국이 제2차 산업혁명에 성공, 대기업이 중심이 되어 수출입국을 통한 비약적인 경제발전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으로는 빈부격차가 벌어지면서 평등가치의 요구가 부상하였다. 이런 상황을 틈타 북한의 대남공작기구들은 김일성의 이른바 주체사상을 적극 보급, 선전하고, 이에 오염된 주사파 대학생들은 북한의 대남방송을 들으면서 “대한민국을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라는 북한의 대남 심리전에 말려들었다.   대한민국의 우파 세력들은 이러한 상황변화에 적절히 대응할 철학과 합당한 통치 경륜을 갖추지 못하고 좌파 공세에 밀리다가 급기야는 광우병 파동에 크게 흔들렸고, 뒤이어 튀어나온 탄핵 시위를 표방한 촛불 테러에 걸려 정권을 좌파 수중에 넘겨주고 말았다. 환경이 이러할데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한국 현대사 속에서 살아날 수 없을 정도로 국민 기억 속에서 지워졌던 것이다.   김일성 대남전략은 일단 그 성공의 절정에 도달한 것 같았다. 주사파들의 공세를 업고 집권에 성공한 문재인 정권은 오른쪽 깜박이를 켜고 계속 자동차를 왼쪽으로 몰아가는 해괴한 정치를 펴나갔다. 적폐청산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우파의 경제적 기초를 잠식하고 정권유지를 위한 축재에 광분하는 등 공정과 상식의 척도에 비추어 가히 ‘암흑시대’라고 규정해도 좋을 만큼 불량 실패정권의 길을 걸었다.   한편 국가 주권을 수령이 쥐고 있는 북한의 독재자 김정은은 모든 수령독재정권들이 당면하는 숙명처럼 북한을 지구 최빈국으로 만들어 지구촌의 누구도 가서 살고 싶지 않은 불량국가(Rogue State)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선동 선전을 앞세워 간신히 선거로 집권에 성공했던 한국의 좌파 정권은 다시 우파 정권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현대사에서 매우 희귀한 사태다. 이어서 윤석열 정권이 탄생했다.       4. 역사 속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재생(再生)   문재인 정권이 퇴진하고 윤석열 정권이 등장하면서 문재인 시대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들이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우선 역사 면에서 나타난 사건은 2023년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148주년 탄신일에 각 대학의 4•19 노장 세대들 60여 명이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치된 이승만 대통령 묘소를 참배, 묵념함으로써 그분의 명복을 빌었다. 4•19세대와 이승만 대통령 사이에 놓인 역사적인 아픔의 다리를 건너뛰면서 화해의 역사에 나선 것이다.   이 행사는 국민들로부터 큰 공감을 얻었다. 같은 날 오후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이승만 대통령기념사업회가 주최한 탄신기념행사에 정부를 대표해서 참석한 국가보훈부 박민식 장관은 이승만 박사기념관을 만들 필요성을 역설했다. 뒤이어 윤석열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을 독립유공자로서 보다는 대한민국 초대 건국 대통령으로서 그분의 기념관을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민 성금으로 건립하고 그 분의 공과에 관해서는 공(功)은 공대로, 과(過)는 과대로 공정히 평가하여 역사의 귀감을 삼자고 주창했다.   이에 건국 대통령 이승만 기념관 건립위원회가 민간에서 조직되고 모금운동이 시작되었다. 또 같은 해 9월 1일에는 이승만 박사 양자인 이인수(李仁秀) 박사가 4•19 묘소를 참배, 4•19 유족들과 부상자 가족들에게 유족 대표로 사과하였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이인수 박사가 4•19 묘소를 참배하면서 밝힌 사과 발언에 대해 4•19단체들은 사과의 진정성이 인정된다면서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4•19혁명과 이승만 대통령 사이에 놓여있던 모든 걸림막들은 일거에 걷히고 일단 화해 국면이 펼쳐졌다.   이에 연(沿)하여 이승만 박사를 바라보는 국민적 시각도 새롭게 정향(定向)되는 분위기 속에서 몇 편의 다큐 영화들이 나왔다. 권순도 감독의 영화 ‘기적의 탄생’은 이승만 박사의 생애를 그분의 업적 중심으로 잘 엮었다. 또 이승만 포럼의 인보길, 대표와 김효선 사무총장이 주도한 ‘독립 외교 33년’은 외교 독립노선을 내세운 이승만의 독립외교에 중점을 두고 제작되었다.   그리고 요즘 영화가에서 상승세를 타 조만간 관객이 100만을 넘을 것으로 보이는 김덕영 감독의 ‘건국전쟁’(영문명: 대한민국의 탄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자료화면을 충실히 모아 보여주었고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나레이터들을 적절히 배치, 자료화면으로 부족한 부분을 잘 메꿔 나갔다. 전문성이 뛰어난 분들을 잘 배치했으며 특히 외국인 중에서 이승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을 나레이터에 포함시켜 원어로 발언한 내용을 자막으로 옮겨 설명함으로써 자료의 신빙성도 높였다. 다만 선명치 못한 자막이나 나레이터를 활용해야 할 부분과 자막으로 처리되어야 할 부분이 엇바뀐 부분들은 개선의 여지를 남겼다.   어떻든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승만 건국 대통령이 우리 역사 속에서 재평가되고, 다 시 살아난 것은 축하할 일이다. 북한의 김일성 일가가 70여 년을 공들여 성공시켜 온 이승만 지우기, 이승만 죽이기가 한국사에서 다시 뒤집혀 이승만 대통령의 진면목이 역사 속에서 되살아난다면 김일성과 DPRK는 우리 역사 속에서 ‘옛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소련의 위성국가가 됨으로써 민족분열, 국토분단, 동족상잔의 모든 책임을 지는 원흉집단’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김정은이 2023년 말 지난 80년 간의 모든 대남공작이 완전 실패였다고 평가하면서 “한국을 교전 중인 적대국가로 규정하고 침공 정복 대상”이라고 말하면서 “남북한은 민족도 같지 않다”고 발언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역사적 부활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5. 기억되어야 할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업적   이승만 대통령은 그 업적을 독립노선과 건국 및 호국 노선의 양면에서 살피기로 한다.     가. 독립노선 이승만이 남긴 큰 공헌은 두 가지다.   ⑴ 외교를 통한 독립노선을 시종일관 견지했다. 그는 일본을 상대로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성취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국제사회가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의 부당성을 인정하고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도록 외교활동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해방은 무장투쟁으로 성취되지 않았다. 3•1 독립운동도 무장투쟁이 아닌 세계 여론을 향한 민족의 독립 의지를 발산한 것이었다. 우리의 해방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선언으로 길이 열렸다. 그는 해외 망명 생활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언론을 통해 한국독립 운동의 대의를 밝히고 연합국 지도층을 상대로 한국의 독립 지지를 호소하는 서신 외교, 독립을 호소하는 강연, 조선의 독립을 호소할 국제회의 참가 시도, 재외동포의 결속과 교육에 헌신했다. 미국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출간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는 일본의 미국침공을 예측한 책으로 발간 6개월 후 일본의 진주만 침공이 가시화되자 그의 예측 능력이 평가되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노벨문학상 수상자 펄 벅(Pearl Sydenstricker Buck) 여사의 서평으로 한국 사정에 대한 미국사회의 이해를 제고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미국 대통령 특별보좌관이었던 홉킨스(Harry L. Hopkins)가 카이로선언에 한국 독립조항을 포함시키는데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한 학자는 말했다.     ⑵ 이승만의 건국 지정학이다. 그는 미국의 하와이에서 머나먼 조국 하늘을 바라보면서 한반도를 대륙 세력의 꼬리로 간주, 북방의 대륙 세력을 섬기면서 살아야 한다는 지정학적 숙명론에서 탈피했다. 한반도를 해양 세력의 대륙진출 교두보로 인식하면서 해양 세력들을 한반도로 끌어들일 자유민주체제로 독립 국가를 세울 것을 꿈꾸었다. 그는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강대국들의 신탁통치를 반대했고,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를 통한 독립 국가건설 노선을 관철시켰다. 오늘날 대륙세력의 꼬리가 된 북한은 지구 최빈국에 머물고 한국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이승만의 건국 지정학의 선견이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나. 건국과 호국노선   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보장한 헌법제정   1948년 5월 10일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에서 선출된 198명의 의원들과 더불어 이승만은 초대 국회의장으로서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제정하였다. 103개 조의 헌법 초안을 매 개 조마다 투표로서 확정, 민의를 반영한 민주헌법을 제정하였다. 북한이 소련의 위성국가들과 국호와 수도만 다르게 표현하고 내용을 모두 똑같이 한 위성국 헌법을 채택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북한은 지금 주권이 수령에게 있고 한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⑵농지개혁 관철   해방당시 한국농민의 90%가 소작농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유상매입(有償 買入), 유상분배(有償分配)라는 획기적 방식으로 농지개혁법을 마련, 전국의 농민을 자영농민으로 만들었다. 지주가 소유한 3정보를 초과하는 농지를 모두 국가가 지가증권으로 매입한 후 이를 소작농들에게 분배하고 농지를 받은 농민들이 매년 소출의 모두 20%씩을 5년간 상환하면 분배받은 농지를 자기 소유로 전환해주는 농업혁명을 일으켰다. 다른 나라 예컨대, 브라질이나 필리핀은 지주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지만 3,274정보의 농지를 개인이 소유한 한반도 최대 지주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선생이 이승만의 농지개혁을 지지함으로써 사유재산 침해라고 저항할 지주들을 설득, 농지개혁을 완수했다. 이로써 농민들은 6•25동란을 겪으면서도 공산당의 선전, 선동에 넘어가지 않고 자기 토지를 지키는 것처럼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실히 수호하였다.     ⑶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이 조약은 이승만 안보외교의 금자탑이다. 외교사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협상을 통해 지구 최약(最弱)국가의 대통령이 지구 최강자인 미국 대통령을 상대로 벼랑 끝 외교를 벌인 끝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승만은 이를 ‘한미공수동맹’이라면서 만족해 하였다. 한국은 이 조약을 통해 미군을 지난 70년 이상 한반도에 주둔시켜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유지했고 현재도 주둔이 계속되고 있다. 이 바탕 위에서 한국은 경제발전에 전념, 2차대전 후 신생독립국가 중에서 처음으로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당시 이런 안전장치 없이 미국의 요구대로 휴전에 동의했더라면 한반도의 휴전도 키신저(Kissinger)가 만든 베트남 평화조약처럼 공산당의 협상전략에 휘둘려 중국과 소련이 포함된 북방 공산세력의 재침을 막지 못하고 베트남처럼 공산화되었을지도 모른다. 한미 방위 조약이 체결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매우 인상적인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는 한미간에 체결된 “이 조약 덕분에 앞으로 우리 후대들까지도 안보의 큰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담화는 아직까지 유효하다. 올해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양국간에 비준된 지 70주년을 맞는다. 앞으로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반도의 평화와 평화통일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 칼럼은 한반도선진화재단이 2월 20일자로 발행한 Hansun Brief 제287호에 게재된 글로, 재단의 허락을 받아 이곳에 옮겨 실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 아버지 이승만 건국 대통령

2024-02-21

[발언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에 사는 사람치고 이 말을 싫어할 사람은 없다. 특히 조국을 뒤로하고 삶의 둥지를 미국으로 옮긴 이민자들에게 이 구호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해 주는 매력적인 구호다.       이는 올해 치러지는 미국 46대 대통령 선거에 나선 도널드 트럼프의 구호다. 그는 44대 대선 때 처음으로 이 구호를 사용해 당선됐다. 이후 재선에 도전했지만 바이든 대통령에게 패했다.   그의 임기 4년 동안 미국은 ‘다시 위대하게’ 되었나?  국내에선 분열이 조장됐고, 국제적으로는 국가 위신이 추락한 어두운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퇴임 후에도 온갖 법적 문제로 법정을 들락거리고 있다.  이런 그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고 대선에 나섰다.     목표는 중요하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방법이다. 목표는 좋지만, 어떤 방법으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것인가? 미국은 지금도 어떤 나라보다 위대하다고 볼 수 있다. 위대하게 되기 위해서는 과거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었던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한 국가를 위대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국토의 크기와 위치, 자원이고, 또 하나는 건국 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국토의 크기나 자원보다는 국가에 뿌리를 내린 건국 정신이 그 나라의 흥망성쇠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의 건국 정신은 자유를 신봉하고 타락과 부패를 멀리하는 청교도 정신, 개방과 포용, 그리고 민주적 절차로 만들어진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봉사 정신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미국의 건국 정신이 유감없이 발휘되었을 때 미국은 위대한 국가로서 인정받으며 세계의 리더 국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트럼프 전 대통령은 44대 대통령 재임 시절, 미국의 건국 정신 실현 노력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본인 이익을 위한 허위 주장들로 신의를 저버렸고 개방과 포용 대신 폐쇄와 배척으로 국제적 고립을 불러왔다. 국내적으로도 이해 집단 간 분열이 심화했으며, 그는 민주적이기보다는 권위적인 리더십을 행사했다. 또 대통령 선거 결과에 불복함으로써 의사당 폭도 난입 사태를 불러왔다는 책임론이 불거지기도 했다.     트럼프는 퇴임 후 여러 민형사상 문제에 휘말리며 구치소에서 머그샷까지 찍는 불명예도 경험했다.     결국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트럼프의 구호는 말뿐이었다.   갑진년인 올해는 세계 76개국에서 전국 규모의 선거가 치러지는 소위 ‘슈퍼 정치의 해’라고 한다. 유능한 정치인을 선택하기 위해 전 세계 유권자 40억 명이 귀중한 한표를 행사하는 해다.     훌륭한 정치인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말’ 보다 그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미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유권자들이 말보다는 마음이 훌륭한 정치인을 선택해 올해가 세계 평화와 번영의 원년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권영무 / 샌디에이고 에이스 대표발언대 미국 건국 정신 대통령 선거 청교도 정신

2024-02-11

"이승만 건국 대통령 위한 사업들, 적법한 단체가 주도해야"

    워싱턴 주미 한국 대사관에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동상 건립이 추진중인 가운데, 한미 정-재계, 학계 저명인사들이 주축 돼 지난 11월2일 발족한 '이승만 동상 건립 추진 모임'에 양동자 이승만 대통령 기념연구 교육재단 이사장이 주도적인 역할로 관심 받고 있다. 이런 가운데 본보를 찾은 양동자 박사는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재평가가 이뤄지는 가운데 펼쳐지는 각종 기금모금 및 사업들은 동포들을 호도하지 않도록 '투명'하고 '적법'한 단체들만이 주도해야 한다"는 뜻을 명확히 밝혔다.     '이승만 동상 건립 추진 모임'에는 한국에서 정운찬 전 국무총리, 정의화 전 국회의장,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 김장환 극동방송 이사장, 류진 풍산그룹 회장, 백성학 영안모자 명예회장, 윤석열 대통령의 지도교수였던 송상현 서울대 법대 명예교수 등이 함께 하고 있다.     미국에선 양동자 이사장을 비롯 한국 전쟁 당시 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의 외손자 조셉 맥크리스천 주니어, 흥남철수의 영웅 에드워드 포니 대령의 증손자 벤자민 포니가 참여했다. 양동자 박사는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당시 발족 모임을 설명하며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 박사의 별세소식과 함께 워싱턴 주미대사관의 동상 건립이 확정돼 참석자들의 만감이 교차됐다"고 전했다.    동상은 민간이 추진모임을 주도하며 정부가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속도감 있게 추진될 전망이다. 양 박사는 "보훈부와 대사관과 직접 긴밀히 소통하고 동상건립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명예회복을 위해 미주 한인들과 전 대한민국이 하나 되어서 업적을 기려야 하며, 이 대통령을 숭모하는 국민 감사 사상이 확립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가운데 양동자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을 숭모하는 모든 적법한 단체들은 '이화장'을 중심으로 고 이인수 박사의 뜻에 따라서 지시 받으며 활동한다"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중심적인 역할을 해온 이승만 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이사장 황교안 전 국무총리)는 미국에 워싱턴, 필라델피아, LA, 시애틀 등에 지부를 두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까닭에 양 박사는 "최근 워싱턴에 대대적인 언론 광고를 내고 워싱턴에 '이승만 기념관 건립기금 모금 본부'를 발대 했다는 단체가 어떤 적법성을 갖고 운영되는지, 투명하고 확실하게 밝혀져야 한다"는 우려를 전했다.     특히, 김황식 전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올 초 '기념관 건립'을 목적으로 발족한 '방계조직'인 재단법인 이승만 대통령 기념재단에 많은 관심이 쏠리는 가운데 "어떤 루트로 해외동포지도자협의회라는 모호한 조직이 기념재단과 관계를 맺고 미주에 '기념모금을 위한 단체'를 조직하게 됐는지... 이 과정이 명확해야 한다"고 양 박사는 힘주어 말했다.     양 박사는 또한 "미국서 모금운동을 하려면 비영리단체로 공인된 조직이어야 가능하다"면서 "'모금 본부'라는 타이틀이 얼마나 엄중한 책임감을 갖는지 모르는가? 급조된 단체가 비영리단체 지위로 동포들에게서 걷어낸 성금을 제대로 IRS에 밝혀 한국으로 보낼 역량이 되는지, 단체는 제대로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끝으로 양동자 박사는 수십년간 '독재자'로 매도 되었던 이승만 대통령이야말로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대한민국의 오늘날을 가능케 한 한미동맹의 주역이었으며, 새롭게 재평가 된 건국 대통령의 역사적 업적들이 앞으로 들어서는 한국 정권들의 이념에 좌우되지 않고 '변치 않는 역사'로 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미국의 수도인 주미 한국 대사관에 들어설 '이승만 동상'과 차후에 마련될 워싱턴의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이 그 증거가 될 것이란 바람을 전했다.  박세용 기자 spark.jdaily@gmail.com대통령 이승 이승만 대통령 건국 대통령 양동자 이승만

2023-12-05

[기고]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 딜레마

지난 17일 가자시티의 병원에 폭탄이 떨어져 많은 환자와 피난민이 목숨을 잃었다. 이날은 가자지구를 통치하는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한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하마스는 기회를 잡은 듯 참사를 이스라엘의 대학살 행위라고 규탄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또 다른 무장 정파 이슬라믹 지하드가 쏜 로켓 오발탄에 의한 것이라 맞섰다.     다음 날 조 바이든 대통령은 예정대로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방문 목적은 폭력을 통제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강력한 지지 표명, 가자지구와 서안 지역에 1억 달러 지원 약속. 가자지구에 구호물자 전달 등 이었다. 또한, 미국의 자체 정보 분석 결과 병원을 폭격한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공개 표명했다. 바이든의 방문은 이스라엘에는 구원의 손길이었지만, 아프가니스탄 및 중동에서 철수한 후 중국과 러시아 견제에 집중하려던 미국에는 9·11 사태의 연장선이 될 수 있는 긴장된 순간이었다.   가자지구는 로마 시대부터 16세기까지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그 뒤로 오토만제국이 통치하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자 영국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를 시작했다. 1948년 5월, 영국의 위임통치가 종료되면서 이스라엘이 건국됐다. 가자지구는 1967년의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에 점령됐다가 2005년 팔레스타인에 반환됐다. 하지만, 이 지역의 복잡한 역사는 이민자 나라인 미국에까지 분열과 갈등을 주고 있다.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 역사는 대략 75년 정도 된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세계 주요 리더 중에서 가장 먼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했다. 이스라엘 건국 이전인 1947년 11월, 미국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지역을 유대 국가와 아랍국가로 분할하는 유엔 결의안에 찬성했다. 또한, 미국은 이스라엘의 건국 다음 날 시작된 1948년 제 1차 중동전쟁 때도 무기를 지원했다.     트루먼 이후에도 미국 대통령들의 이스라엘 지원은 계속됐다. 린든 존슨 대통령은 1967년의 ‘6일 전쟁’을, 리차드 닉슨 대통령은 1973년의 ‘욤키푸르 전쟁’을 지원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평화를 중재하고,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1982년 ‘레바논 1차 전쟁’ 때 미해병대를 평화유지군으로 파병했으며, 이 중 241명이 헤즈볼라의 공격으로 사망했다. 빌 클린튼 대통령은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과 팔레스타인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의 화해를 성공적으로 추진했지만 라빈이 암살을 당하는 바람에 수포로 끝났다. 바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스라엘을 지지했지만 서안지구의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에는 반대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2개 국가 공존 정책’을 폐기하고 이스라엘의 서안지구 합병을 찬성했다.     이스라엘은 미국 군사지원의 최대 수혜국으로 매년 수십억 달러의 지원을 받고 있다. 미국 국회연구위원회(CRS)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1948년부터 2022년까지 이스라엘에 1500억 달러 규모의 군사 지원을 했다.     미국 정부의 친이스라엘 정책과 달리 미국인의 반응은 연령과 정치 성향에 따라 다양하다. 65세 이상의 노년층은 이스라엘 지지가 강했지만, 35세 미만 연령대는 반 정도에 불과하다. 최근 하마스의 공격 이후 하버드 대학을 포함한 여러 대학에서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가 벌어진 것이 이런 상황을 반영한다. 이에 많은 기업의 경영진이 시위 참여자의 고용금지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바이든은 동맹국들의 지원을 위해 연방의회에 1050억 달러의 예산을 요청한 상태다. 그러나 종교와 민족, 생존권이 얽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해결은 불가능해 보인다. 전쟁은 단지 양측의 고통, 분노, 애환을 외부에 드러내는 기회가 될 뿐이다.     지상전이 준비된 이스라엘의 공습은 멈춤이 없고,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예맨의 후티 반란군들은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있다. 이들 뒤에는 미국의 영향력에 분노하는 이란이 있다. 하지만 긴박한 외교전으로도 확전을 막을 수 없는 것이 미국의 딜레마다. 전쟁에는 말려들지 않고 인도적 지원에 주력하는 것이 미국에 남겨진 선택인 것 같다. 정 레지나기고 미국 이스라엘 이스라엘 지원 이스라엘 건국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2023-10-24

8.15... '광복절' 아닌 '건국절'로 확대-기념해야

    '일제 치하 36년을 끝내며 다시 빛을 찾은 날'. 8.15 광복절 78주년을 맞았다.  그리고 8월15일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75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날이기도 하다. 1945년 해방 이후 1948년 7월17일 헌법이 제정되고 세 달 후인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8월15일이 언제까지 광복절로 불려야 합니까."   지난 10일 본보를 찾은 양동자 박사의 자조 섞인 물음이었다. 광복절을 맞는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양 박사는 "앞으로 8월15일은 건국기념일, 대한민국 건국절로 국민은 물론 전세계인들에게 각인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양 박사가 이렇게 언급한 이유는 한국에서 한창인 '건국절 논란' 때문이다.  전임 문재인 정부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임시정부에 두고 있으며 건국 원년을 1919년으로 보았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친일파, 친미제국주의자 등으로 몰아세우며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공산주의자들을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으로 승격시켰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가 시작된 이래 정부는 '이승만 기념관' 건립 사업에 힘을 싣는 가운데, '1948년 건국'을 공식화 하는 모양새다. 이에 더해 지난 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독립유공자 및 유족 158명과 8•15 광복절 기념 오찬을 하면서 윤 대통령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위한 건국 운동‘" 이라고 표현했다.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과도기적 형태의 정부이며 "1948년 8월15일이 대한민국의 건국일"이라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반면에 '광복회'는 정반대의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종찬 광복회 회장은 지난 6월 "대한민국의 원년은 1919년"이라고 발언하며 기념관이 "이승만을 신격화 하는 '괴물 기념관'"이라고 말해 물의를 빚었다. 이는 지난해 10월 사망한 김원웅 전 광복회 회장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그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친일정권'으로 규정하며 1948년 건국을 부정했다. 이에 대해 양동자 박사는 "이런 망언을 하는 '광복회'를 과연 대한민국을 위하고,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애국자들을 기리 단체라고 봐야 할 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광복절'인 8월15일이 우리가 스스로 독립을 이룬 날도 아닌데, '일제로부터의 해방'보다는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건국일을 기념하는 게 올바른 일"이라며 "워싱턴 등에서 열리는 각종 기념식에서도 '광복'보다는 '건국'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양 박사는 1967년부터 2007년까지 하워드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미국 태권도연맹 및 팬 아메리카연맹 회장, 세계 태권도연맹 법사위원장, 미국 올림픽위원회(USOC) 상임위원, 세계체육학회(ICHPER-SD) 회장 등을 역임한 워싱턴 한인 1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런 양 박사가 현재 가장 힘쓰는 일은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독립운동 거점이자, 한미동맹의 기초를 다졌던 워싱턴에 그를 기리는 대통령 기념관을 세우는 일이다.     한국에서는 벌써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추진이 한창 진행 중이다. 지난 6월  말, 김황식 전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추진위원회’가 발족하면서 서울에 기념관 건립을 추진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인수, 박지만, 노재헌, 김현철, 김홍업 등 이승만, 박정희,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자제들이 추진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됐으며 한화갑 한반도평화재단 총재를 비롯한 진보, 보수진영의 많은 원로가 기념관 건립 추진에 뜻을 같이하고 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의 기념관이 논란 속에서 아직도 추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영화인 신영균 회장은 서울 한강 변 개인 부지 4000평을 기념관 건립을 위해 기부한다고 밝혀 '이승만 기념관' 사업은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워싱턴에서 지난 2016년 '이승만 기념 연구 교육 재단'을 창립한 양동자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 연구에 정통한 전문가다. 양 박사는 "국부 이승만 대통령의 지도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다"고 단언하며 "미국의 민주주의를 직접 겪으며 학습한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이 된 것이 민족의 역사를 바꾼 '하나님의 한 수'"라고 표현했다.    1894년 개화사상에 눈을 떠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한 이승만은 '천재'로 불릴만한 인재였다.    서재필 등 운동가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 '매일신문' 창간에 함께한 이승만은 독립협회 관련 투옥된 후 기독교로 개종했다. 감옥에서 영어공부에 몰두한 이승만은 미완성 상태이지만 사실상 최초의 '영한사전'을 만들기도 했다.    이승만의 감옥 생활은 장장 5년7개월이나 계속됐다. 석방된 이승만은 유학을 결심하고 미국으로 향한다. 인터뷰 과정을 거쳐 조지 워싱턴 대학 3학년에 파격 편입한 이승만은 독립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며, 조지 워싱턴대 학사, 하버드 대 석사, 프린스턴 대 박사 학위를 받는다. 한국인 최초의 미국 박사학위 취득자였다.       미국을 주무대로 독립운동에 힘쓴 이승만 박사의 명성은 한반도 땅에서도 자자했다. 1919년 3.1운동을 통해 각성한 애국지사들을 중심으로 국내외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선포됐는데, 그 중 8군데의 임시정부에서 이승만 박사를 국무총리 이상의 자리에 추대했다. 이중 상해임시정부는 '초대 국무총리'를, 한성정부는 '집정관'으로 추대했다.     이승만의 미국내 영향력은 일본의 진주만 침공으로 확대됐다. 그때까지만해도 이승만의 외교활동에 마지못해 대응 해줬던 미국정부는 이승만 박사의 저서 'Japan Inside Out'이 일본제국주의의 미국 침공을 '예언'한 책으로 선풍적인 관심을 모으자, 그를 인정했다.     해방을 맞이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이승만 박사는 선거를 통해 건국 대통령에 취임한다. 공산주의를 혐오했던 이 대통령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와 미국 중심의 '민주주의'의 대결에 있어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도 일찍 주목했으며, '한미동맹'만이 대한민국을 발전시킬 유일한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미국의 힘과 미국민들의 생각, 그리고 미국을 움직이는 기업인들과 정치인들의 정서를 이해했기에 가능한 분석이었다.     한국전쟁 중 '북진통일'만을 주장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이 1953년 6월 휴전에 사실상 잠정 합의하자 3만여명의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하며 맞섰다. 미국은 '이승만 제거 작전'까지 검토했으나 의회가 "반공투사 이승만을 버릴 수 없다"고 반대하자 물러섰다. 그 대신 역사적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2억 달러 원조, 한국군 강화 등 거의 모든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를 들어준다.  이런 내용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사실상 한국과 미국을 거의 모든 분야에서 결속시키는 힘을 발휘하며 대한민국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양동자 박사는 "이 업적 하나만으로도 이 대통령은 '국부'로 추앙받을 충분한 역할을 한 셈"이라고 강조한다.    양 박사는 "40년의 대미 외교 경험, 고급 영어 구사 능력, 그리고 누구보다도 투철한 애국심이 그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가졌던 건국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양 박사는 "그런 이 대통령의 주무대였던 워싱턴에 기념관을 설립하고, 미국의 차세대, 차차세대 동포들이 이 대통령을 배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나는 물론 우리 세대의 사명"이라고 역설했다.     범동포적인 '워싱턴 이승만 기념관' 건립 추진을 구상하고 있는 양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구미위원회 및 주거지로 사용한 워싱턴 DC 16가의 건물을 구입해 기념관으로 세운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현재 교회로 사용중인 건물의 구입을 위해 양 박사는 구체적인 협상을 진행중이라고 알렸다. 현재까지 한국 정부의 지원을 타진한 바 없으나, 워싱턴 DC의 주미대한제국 공사관의 구입해 성공적으로 개관한 국외소재 문화재 재단의 협조도 구상할 수 있다고 밝혔다.     대학 시절 4.19를 겪었다는 양동자 박사는 그 당시에도 이승만 박사의 동상을 끌어내리는 성난 시위대를 보고 "이해할 수 없었고, 일말 분노했다"고 회상했다. 이기붕 부통령을 중심으로 부패한 자유당 정권이 진행한  3.15 부정선거에 노령의 '국부'는 모든 책임을 떠안고, 하야했고, 미국으로 떠나 쓸쓸히 생을 마쳤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애잔함은 단순히 양 박사 뿐만이 아닌 그 당시 평범한 다수의 국민들이 느낀 공통적인 안쓰러움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이 된지 1년 만에 워싱턴을 방문했다.  7월28일 상하원합동회의에서 이승만은 다음같이 말했다.  "나도 여러분처럼 워싱턴이나 제퍼슨이나 링컨에게서 영감을 받아왔다. 나도 여러분처럼 여러분의 영광스러운 선조들이 전인류를 위해 추구했던 자유를 수호하겠다고 스스로 맹세해 온 사람이다."     미국의 자유민주주주의를 대한민국에 도입한 건국 대통령. 5000년 역사에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 한민족의 영광을 사실상 설계해 실현시킨 이 대통령의 빛나는 업적을 되새길 '기념관' 하나 쯤 워싱턴에 반드시 세워져야 한다고, 노구의 이승만 연구가 양동자 박사는 힘주어 말했다. 박세용 기자 spark.jdaily@gmail.com광복절 건국절 건국기념일 대한민국 기념관 건립 건국 대통령

2023-08-21

[중앙시론] 연방대법원의 문화전쟁

흔히 미국을 청교도가 세운 기독교 국가라고 한다. 그런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온 건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신대륙으로 이주해온 초기 이민자들이 전부 영국 출신도 아니었고 많은 사람이 청교도 이외의 다른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었다.     특히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정치인들은 청교도가 아니었다. 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고 계몽철학이었다. 계몽철학은 르네상스 이후 근대로 들어가는 유럽의 지식인 사회를 파고든 인본주의 사상을 뿌리로 한다.     개인적으로 계몽철학은 기독교 신앙과 조화되는 면도 있지만 충돌하는 지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독립전쟁 때 만들어진 모든 정치 및 법률 서류들은 계몽철학에 근거해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헌법이다. 연방헌법에선 기독교 신앙을 언급하지도 않는다. 정교분리에 따른 신앙의 자유를 못 박았음으로써 기독교 신정 국가 체제를 거부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특정 종교가 다른 종교를 핍박하지 못하게 한 것은 인본주의 계몽철학의 핵심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계몽철학자였고 헌법이 계몽철학에 근거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건국 시기부터 미국인 대부분은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었다. 이로 인해 미국이 청교도가 건국한 기독교 국가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19세기 중반부터 개신교 복음주의가 중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화산처럼 타올라 오히려 건국 초기보다 더 기독교적인 나라로 변했다.  건국 초기 대통령들은 겉으론 기독교 신자고 정신세계는 계몽철학자였다면 19세기 중반부터는 신앙심이 깊은 대통령들이 배출됐다.     다양성이 제한되던 20세기까지만 해도 개신교 복음주의에서 많은 표가 나오니 정치인들은 신앙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인 개신교 복음주의는 미국문화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하나의 거대한 벽을 만들었다. 같은 기독교지만 가톨릭 신자가 대통령이나 주지사 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고 이혼을 하면 대통령이 되거나 정계 입문조차 어려웠던 것을 보면 그 벽이 얼마나 두꺼웠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벽도 점차 흔들리다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면서 내려앉기 시작한다. 역작용으로 양 진영의 ‘문화전쟁(culture war)’이 거세게 진행된다.  한쪽은 다양성을 앞세워 기존의 문화를 부숴버리려고 하고 다른 쪽은 과거로의 회기를 시도한다.     현재 문화전쟁의 뜨거운 이슈가 종교의 자유다.  이 와중에  종교와 관련된 두 건의 판결이 연방대법원에서 나왔다. 하나는 직장 내 종교의 자유와 관련된 거다. 종교적 이유로 일요일 근무를 거부한 직원에 대한 해고는 부당해고이고 고용주는 직원의  이런 요구에 대해 무리가 없다면 맞춰져야 한다는 판결이다.  진보 보수가 3대6으로 나뉜 대법원에서 만장일치로 직원 편을 들어준 것이다. 종교의 자유에 대해선 해석이 틀려도 작업장에서의 개별 직원의 신앙 보호가 고용주의 권리에 앞선다는 데는 의견일치를 본 것이다.       다른 케이스는  종교의 자유를 이유로 동성애자 고객에 대한 서비스를 거부한 한 웹디자이너의 차별금지법 위반 문제였다.  종교의 자유란 같은 이슈를 놓고 이번엔 보수와 진보 판사가 각각의 색채를 명확히 드러냈다. 결과는 6대 3으로 동성애자 고객에 대한 서비스를 거부한 웹디자이너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종교의 자유에 대한 판결이었지만 보수 판사들은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에 근거해 판결을 내렸다.  동성애자에게 서비스 금지를 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 표현의 자유에 위반한다는 논리였다. 지난해 낙태권 판결에 이어 이번 판결까지 앞으로도 대법원은 문화전쟁의 최전선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윤상 / 변호사중앙시론 연방대법원 문화전쟁 기독교 신앙 현재 문화전쟁 건국 초기

2023-07-16

[특별기고]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올해는 한국과 미국이 역사성을 지닌 뜻 있는 해다. 한미동맹이 70년을 맞아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국빈 방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윤석열의 대미외교’에 국민 시선이 쏠렸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자유’를 선택한 윤 대통령의 국제외교다.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는 당당함이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미 의회 연설과 2023년의 윤석열 대통령 연설의 키워드는 ‘자유’였다. 자유란 쉽게 얻어지는 상품이 아니다. 자유에는 피를 먹고 자라는 섬뜩함이 있고, 자유란 얻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어렵다. 끊임없는 도전을 받기 때문이다.   21세기는 ‘외교(外交)’로 빛나는 시대다. 외교가 전략이라면 국격(國格)에 걸맞은 외교활동은 지도자의 몫이다. 대한민국은 1940년대 열악한 국제환경을 딛고 건국한 나라다. 독립에서 건국에 이르는 건국 지도자 이승만 외교는 국제환경에 걸맞은 ‘전략외교’로 점철되어 있다.   “외교정책(外交政策)에서 가장 우선시할 것은 생존(生存)과 국가안보(國家安保)다…대표적인 수단이 동맹(同盟)이다!” 신현실주의(New-realism) 이론가인 국제 정치학자인 케네스월츠 박사의 주장이다.   우리 국민 대다수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잘 모르고 있다. 건국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왜일까?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에 대하여 아는 게 없다. 분명한 사실은 그는 왕의 나라를 백성에게 돌려준 공(功)이 있다. 더 소중한 일은 그가 공산주의의 대척점에서 자유를 신봉하며 ‘자유민주주의 뿌리’로 각인되었다는 점이다.   1954년 미국의 국빈 방문(State Visit) 때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이 워싱턴 정치인들을 향하여 ‘워싱턴 겁쟁이들(Cold feet)’이라며 일갈(一喝)했다. 자유(Freedom)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임을 역설한 것이다. 그의 반공주의(反共主義), 멸공(滅共)에의 의지를 미국에 던지는 경구(警句)이기도 했다. 미국인들은 현재도 이승만을 ‘아시아의 반공 지도자’로 인식한다. 1923년 그가 설파한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은 시공(時空)을 초월한 메시지로 통한다.   이승만 외교의 분수령은 무엇보다 대륙문명권에서 해양문명권으로의 변화였다. 문명사적인 대전환은 우리에게 역사적인 사건이었고 동맹문화라는 새로운 지평(地平)을 열어줬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의 대미외교는 ‘대등한 외교’가 축(軸)을 이뤘으며, ‘한미동맹’의 주역은 이승만이었다. 약소국이라는 약점을 딛고 미국 측을 설득하며, 움츠러들거나 물러섬 없이 담대한 전략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성사시켰다.   1953년 휴전 반대를 선언하며 북진을 외치던 이승만 대통령의 벼랑 끝 전술(Brinkmanship)은 자유를 쟁취하려는 몸부림이면서 한미동맹을 견인하는 지렛대로 작용했다. 미국이 ‘눈엣가시’인 이승만을 축출하려는 계획인 ‘에버레디 플랜(Ever Ready Plan)’을 세웠다 내린 것은 반공 지도자 이승만의 진솔한 움직임을 확인했기 때문이었으리라. 1954년 7월 28일 오후 5시 이승만 대통령이 의회 연설에 나서자 조셉 마틴 주니어 하원의장이 이승만 대통령을 소개했다. “미국 국민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자유를 위한 불굴의 투쟁가’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 때 도와서 함께 싸운 미국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워싱턴 의회 연설에서는 미국의 어머니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한미 인사들이 함께한 뉴욕 월도프아스토리아 호텔 행사에서는 이 대통령의 눈물로 숙연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전혀 알지 못했던 우리나라의 전쟁터에서 자유를 위해 피 흘리며 산화한 것에 대한 감사함을 여과 없이 표시한 것이다. 1954년 7월 28일 미 상하원 양원 합동 회의장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건국 대통령. 기립박수를 포함해 모두 33회의 박수를 받았다.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 성과 성명도 인상적이다. “세계 최강국 미국과의 70년 동맹…고마우면 고맙다고 말해야 한다”고 했다. 한미동맹을 주도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구상이나 윤석열 대통령이 지닌 한미동맹에 대한 인식은 무엇일까? 6·25와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한 항구적인 안전핀 구축이면서, 자유를 지키려는 한미 양국의 돈독한 의지의 결집(結集)으로 보인다.   윤석열 정부에 들어서면서 이승만 지우기가 멈췄다. 좌 편향된 교육에다 보수 정권의 무관심으로 이승만 지우기는 끝 간 데가 없었다. 국민은 권력 이동과 더불어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국론분열의 심각함을 체감하고 있다.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자유민주주의 뿌리인 이승만 현상이다. 황일봉 /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미주총회 사무총장 장로특별기고 한미동맹 이승만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 건국 대통령

2023-06-26

"대한민국의 DNA, 이승만 건국 대통령이 심었다"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 워싱턴 지회(회장 정세권)가 지난 25일 버지니아 애난데일 소재 설악가든에서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탄신 148주년 기념식 및 정기총회를 열었다.   회원 및 내빈 30여명이 참석한 기념식에서 정세권 회장은 “이승만 박사 탄신 140주년을 기념한 자리에 함께 해 주어 감사하다”면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일당백 활약으로 한민족 모두가 서로 힘을 모은 헌신이 있어 오늘날 대한민국이 안전하고 독립적인 나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특히 "한국이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게 된 기반인 한미동맹을 가능케 한 이 박사의 업적은, 대한민국 역사상 그 누구와도 비견될 수 없이 훌륭한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행사는 신용진 목사의 개회기도로 시작해 ‘이승만 박사의 미국유학시절과 외교정책’을 주제로 한 존 리 씨의 강연, 워싱턴 글로리아 크로마하프단(단장 김영란)의 축하연주, 김명옥 재무부장의 재무 보고 순서로 진행됐다.   행사에는 손경준 6.25참전유공자회장, 박상철 한미나라사랑기도회장, 강필원 전 한미자유연맹총재, 유흥주 자유연합총재, 송재성 한미자유연맹총재 등이 참석했다.     김윤미 기자 kimyoonmi09@gmail.com대한민국 대통령 건국대통령 이승 대한민국 역사상 건국 대통령

2023-03-27

[기고] 헌병과 군사경찰의 차이

한국에선 새 정권으로 바뀔 때 마다 정부 부서 또는 직활 기관의 명칭이 자주 바뀐다. 흔히 명칭과 호칭은 단어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정서와 관계가 깊다. 한국의 경우, 인물과 사물의 시대 배경에 따라 그 변화 양상이 심하다. 특히 정부조직 부서가 그렇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 당시 첫 내각의 각 부처 명칭은 필요 이상으로 자주 바뀌었다. 살펴보면 1948년 정부 출범 당시 사용한 부서명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국방부와 법무부밖에 없다. 내무부가 행정안전부, 상공부가 산업통상자원부, 체신부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으로 그야말로 총천연색 짜깁기식 명칭으로 변경돼 국민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명칭 때문에 전문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군 정보기관인 군사안보지원사령부의 명칭이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면서 국군방첩사령부로 변경됐다. 본래 방첩부대에서 특무부대(CIC)를 시초로 국군 보안사령부, 기무사령부로 이어져 오다가 전 정권에서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바뀌었었다.     전 정권은 또 헌병의 명칭을 군사경찰로 바꿨다. 따지고 보면 지난 정권에서 일본은 매우 불편한 이웃 나라였다. 일제 강점 36년, 철천지원수였던 제국주의 일본의 잔재를 뿌리 뽑기 위해 일본 군국주의 시대에 악명 높았던 헌병을 대속물로 삼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실은 헌병보다 일본어 ‘겐빼이’로 더 악명이 높았는데 말이다.       우리 독립투사를 체포, 감금, 고문, 투옥 등을 일삼던 일본강점기를 현 자유민주 대한민국에 대입시킨 것 같다. 잔인하고 포악한 일본군의 겐뻬이(헌병)를 시대가 바뀐 지금까지 증오하고 원수처럼 여긴다면 왜 그보다 더 포악했던 일본 고등경찰의 잔재는 그대로 경찰이란 용어로 계승 사용한단 말인가.     역사적으로 헌병이란 명칭은 1900년 대한제국 육군헌병조례에 따라 120년 전 이미 헌병이란 명칭을 사용해서 편제를 이뤄 현 군사경찰의 역활을 다했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전 조선경비대 시절엔 군기대 또는 군감대라는 명칭을 사용하다 건국 이후 옛 명칭인 헌병으로 조직을 개편 6·25전쟁 중에는 보병 못지않은 공훈을 세웠다. 헌병은 최고의 학력과 최고의 신체조건을 갖춘 우수한 병과로 명성을 날렸다.     가끔 TV 뉴스에서 보면 군사분계선 상에 철책을 적군과 맞대고 순찰하는 우리 군은 정전협정 때문에 헌병 완장을 차고 GP에서 근무하는 장병들을 국민들은 마음 든든하게 바라보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헌병 완장을 군사경찰이란 표식으로 갈아붙이고 근무지역을 순찰하는 군사경찰병을 보면서 75년 역사의 빛나는 전통을 자랑하는 헌병을 뭇 사람들은 명칭부터 재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물론 용어와 호칭에서 어느 시골에 착한 경찰아저씨와 전선에 씩씩한 군인 오빠의 느낌이 서로 달갑지 않다는 얘기다.     군은 작전을 기본 임무로 한다. 고로 군은 착한 게 아니라 용감하게 싸우는 존재다. 정권에 따라 정치색을 입혀 명칭부터 오락가락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정치색으로 심판한 지휘관의 희생을 적잖이 경험했던 국민은 고약한 구시대의 잔재를 배격하며 본래의 명칭으로 환원하기를 바란다.     헌병이 영어로 MP (Military Police)를 의미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건국 당시부터 사용해 온  명칭이다. 현대화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국군의 행사 때마다 행렬 선두에 길잡이 헌병의 늠름한 모습은 꿈많은 어린이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위정자는 숱한 전사에 기록된 대한민국 헌병이 일본 군국주의 시대의 겐뻬이로 오해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기고 군사경찰 헌병과 명칭인 헌병 대한제국 육군헌병조례 대한민국 건국

2023-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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