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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되돌아보는 이승만 대통령의 위업

이영일 전 국회의원

이영일 전 국회의원

1. 들어가면서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의 삶과 죽음, 그 속에 담긴 독립운동지도자로서의 면모, 대한민국 건국과 개혁, 6.25 전쟁과 극복, 한미동맹과 경제발전 등 한국 현대사의 구비 구비들을 시계열 방식으로 새롭게 파헤친 김덕영 감독의 다큐 영화 ‘건국전쟁’이 요 즘 한국 영화가에서 뜻밖에도 관객동원에 큰 성공을 보이고 있다. 
이 영화가 높은 시청률 을 보이면서 롱런(Long Run)할 전망을 갖게 해주는 것은 감독과 제작진들의 노력의 결과 이다. 하지만 지난 60여 년 동안 역사 속에서 지워졌거나 잊혔던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 사를 우리 삶 속으로 다시 살려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생존 인구의 20%가량을 차지하는 70, 80대의 연령층은 이승만 박사를 다소 아는 분들이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조국 광복과 건국, 6.25 전쟁과 한미동맹 등 한국의 오늘을 있게 만든 역사의 재단사로서의 진실을 제대로 아는 분들은 의외로 적다.  
특히 4.19혁명 이후에 태어난 세대(윤석열 대통령도 1960년생)들은 이승만을 부정하는 선전이 압도적인 상황 속에서 생장했다. 또 이후 역대 대통령들은 학력, 경륜, 지성 면에서 자기보다 훨씬 출중한 이승만 박사를 일부러 무시하거나 외면했고 독립운동 지도자들 중에서도 자기와 비교해서 꿀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지도자들을 골라 우대했다.
영화 ‘건국전쟁’의 우위성은 한국의 현대를 살면서도 현대사의 진실이 무엇이었던가를 배우지 않았거나 지워져서 잘못 알았거나 바르게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궁금증, 갈증을 채워주고 무엇이 역사의 진실인가를 사실(Facts)로 알려주기 때문이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에 관해 왜곡되거나 잘못 알려진 진실을 실증 자료를 통해서 바로 잡아주고 그 의미를 제대로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모처럼 한국의 다큐 영화가 폐가입진(廢假立眞: 가짜를 폐하고 진실을 세운다)의 진실을 증언하는 것 같아 반갑다. 영화를 제작한 김덕영 감독은 시청자가 100만을 넘어서면 비로소 현대사를 보는 국민의 정치의식에 큰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2. 김일성의 대남 심리전
이승만 대통령이 역사 속에서 철저히 짓밟혀진 것은 대한민국 역대 정권들의 건국 대통령을 무시, 외면이라는 졸렬한 정책 때문만은 아니었다. 북한의 김일성의 반이승만(反李承晩) 음모가 가장 큰 원인이다. 김일성은 자기 정권이 1948년 8월 15일에 건국된 대한민국보다 2년 앞선 1946년 2월 소련의 괴뢰정권으로 출발,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단시켰고 더 나아가 전 한반도를 초토화시킨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한 전쟁범죄의 모든 책임을 져야 할 존재였다.  
김일성은 이러한 엄청난 범죄의 책임을 모면하고 그가 세운 북한 정권을 한반도의 정통정부로 조작하기 위해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로 대한민국을 세우고 유엔 등 국제사회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자기 죄과를 덮어씌우고 철저히 부정해야 했다.  
또 북한의 남침을 유엔이 합법적으로 세운 정통정부에 대한 침략으로 간주, 유엔군의 힘으로 북한의 남침을 물리친 이승만 대통령의 지도력을 역사 속에서 지워버릴 필요성을 절감했다. 1948년부터 시작된 북한 대남 심리전의 핵심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는 이 심리전 공작을 당시 소련이 운영하는 국제공산주의지휘부인 콤민테른 (Comintern)과 제휴하여 펼쳤다. 당시 북한의 심리전 구호는 “독재자 이승만, 남한만의 단독 정부수립으로 민족을 분열시킨 원흉, 동족상잔의 원인을 제공한 이승만”으로 만들고 이승만을 매도하는 물심양면의 심리전에 총력을 경주했다.  
제주 4•3폭동, 여순 반란사건 역시 고강도 심리전의 일환이었다. 유엔감시하의 남북 총선거 방안이 유엔총회에서 통과된 그 순간부터 오늘날까지 북한의 대남 심리전은 이승만 대통령을 매도하고 지우고 부정하는 일을 하루도 멈추지 않았다. 북한의 반이승만(反李承晩) 심리전은 1960년 4.19로 이승만이 하야한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역대 대통령들은 자기에 대한 북한의 지명공격이 아니고 이승만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에 이를 맞받아 치지 않고 방관하거나 외면했다.  
북한 대남공격의 본질은 자연인 이승만에 대한 공격이 아니고 대한민국 성립의 정당성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런데도 역대 정권들은 북한의 이승만 공격을 빙자한 건국 정당성에 대한 공격을 건성으로 넘기거나 무방비로 방치했다. 역대 정권들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북한의 심리전 공세를 주목하지 않는 무방비 상태를 틈타서 북한의 사론에 오염된 국내의 좌파 역사학자들은 김일성이 북한에서 만든 ‘조선통사’(朝鮮通史)를 마치 정설인 양 받아들이는 학문적 모반에 나섰다.  
‘분단시대의 현실인식’(姜萬吉 집필)은 “모든 통일은 옳다”는 논리를 조작, 통일사관을 내세우고 민족을 인권을 가진 개개 성원의 구성체로 보지 않고 ‘개인은 전체의 일부’라는 논리로 민족을 규정하면서 ‘우리민족끼리’라는 허구적 담론(민족사관)을 꺼내 들어 한국 현대사 왜곡에 앞장섰다. 이들은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지우고 부정하는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역사 반란을 일으켰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조지 오웰 (George Owell)의 ‘1984년’의 좌익 사관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국사학계의 이러한 움직임을 묵인하거나 방관했다. 역사 교과서 문제가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시절에 제기되었다. 하지만 전교조 패당들의 반발에 밀려 단호히 대처하지 못했다. 역사교과서 문제를 놓고 정부는 확고한 입장을 세우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다가 문제 자체를 사실상 방기했다. 그러면 역대 정권들의 현대사를 보는 안이한 태도와 철학의 빈곤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3. 주사파 세력의 등장  
김일성의 대남 심리전은 1980년에 이르러 한국 대학가에 주사파들이 활개를 치고 등장할 여건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일부 좌파 사학자들이 떠드는 통일사관은 ‘어떤 통일’인지를 묻지 않는다. 통일은 무조건 좋다는 것이다. 공산화 통일도 좋다는 의미다. 공산화 통일을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주창한 세력은 하나같이 반통일세력이 되고 민족 분열세력이거나 친일파로 몰았다.  
김일성이 민족해방전쟁이라면서 일으킨 6•25남침도 통일을 겨냥한 것이기 때문에 정당하며 유엔감시하의 자유 총선거로 세워지는 대한민국을 반대하기 위해 제주에서 일어난 4•3폭동도 공산통일을 지지한 것이므로 민족통일운동의 범주에 포함시킨다는 것이다.  
회고컨대 1980년대는 한국이 제2차 산업혁명에 성공, 대기업이 중심이 되어 수출입국을 통한 비약적인 경제발전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으로는 빈부격차가 벌어지면서 평등가치의 요구가 부상하였다. 이런 상황을 틈타 북한의 대남공작기구들은 김일성의 이른바 주체사상을 적극 보급, 선전하고, 이에 오염된 주사파 대학생들은 북한의 대남방송을 들으면서 “대한민국을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라는 북한의 대남 심리전에 말려들었다.  
대한민국의 우파 세력들은 이러한 상황변화에 적절히 대응할 철학과 합당한 통치 경륜을 갖추지 못하고 좌파 공세에 밀리다가 급기야는 광우병 파동에 크게 흔들렸고, 뒤이어 튀어나온 탄핵 시위를 표방한 촛불 테러에 걸려 정권을 좌파 수중에 넘겨주고 말았다. 환경이 이러할데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한국 현대사 속에서 살아날 수 없을 정도로 국민 기억 속에서 지워졌던 것이다.  
김일성 대남전략은 일단 그 성공의 절정에 도달한 것 같았다. 주사파들의 공세를 업고 집권에 성공한 문재인 정권은 오른쪽 깜박이를 켜고 계속 자동차를 왼쪽으로 몰아가는 해괴한 정치를 펴나갔다. 적폐청산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우파의 경제적 기초를 잠식하고 정권유지를 위한 축재에 광분하는 등 공정과 상식의 척도에 비추어 가히 ‘암흑시대’라고 규정해도 좋을 만큼 불량 실패정권의 길을 걸었다.  
한편 국가 주권을 수령이 쥐고 있는 북한의 독재자 김정은은 모든 수령독재정권들이 당면하는 숙명처럼 북한을 지구 최빈국으로 만들어 지구촌의 누구도 가서 살고 싶지 않은 불량국가(Rogue State)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선동 선전을 앞세워 간신히 선거로 집권에 성공했던 한국의 좌파 정권은 다시 우파 정권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현대사에서 매우 희귀한 사태다. 이어서 윤석열 정권이 탄생했다.  
 
'건국전쟁' 영화 포스터

'건국전쟁' 영화 포스터

 
4. 역사 속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재생(再生)  
문재인 정권이 퇴진하고 윤석열 정권이 등장하면서 문재인 시대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들이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우선 역사 면에서 나타난 사건은 2023년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148주년 탄신일에 각 대학의 4•19 노장 세대들 60여 명이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치된 이승만 대통령 묘소를 참배, 묵념함으로써 그분의 명복을 빌었다. 4•19세대와 이승만 대통령 사이에 놓인 역사적인 아픔의 다리를 건너뛰면서 화해의 역사에 나선 것이다.  
이 행사는 국민들로부터 큰 공감을 얻었다. 같은 날 오후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이승만 대통령기념사업회가 주최한 탄신기념행사에 정부를 대표해서 참석한 국가보훈부 박민식 장관은 이승만 박사기념관을 만들 필요성을 역설했다. 뒤이어 윤석열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을 독립유공자로서 보다는 대한민국 초대 건국 대통령으로서 그분의 기념관을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민 성금으로 건립하고 그 분의 공과에 관해서는 공(功)은 공대로, 과(過)는 과대로 공정히 평가하여 역사의 귀감을 삼자고 주창했다.  
이에 건국 대통령 이승만 기념관 건립위원회가 민간에서 조직되고 모금운동이 시작되었다. 또 같은 해 9월 1일에는 이승만 박사 양자인 이인수(李仁秀) 박사가 4•19 묘소를 참배, 4•19 유족들과 부상자 가족들에게 유족 대표로 사과하였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이인수 박사가 4•19 묘소를 참배하면서 밝힌 사과 발언에 대해 4•19단체들은 사과의 진정성이 인정된다면서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4•19혁명과 이승만 대통령 사이에 놓여있던 모든 걸림막들은 일거에 걷히고 일단 화해 국면이 펼쳐졌다.  
이에 연(沿)하여 이승만 박사를 바라보는 국민적 시각도 새롭게 정향(定向)되는 분위기 속에서 몇 편의 다큐 영화들이 나왔다. 권순도 감독의 영화 ‘기적의 탄생’은 이승만 박사의 생애를 그분의 업적 중심으로 잘 엮었다. 또 이승만 포럼의 인보길, 대표와 김효선 사무총장이 주도한 ‘독립 외교 33년’은 외교 독립노선을 내세운 이승만의 독립외교에 중점을 두고 제작되었다.  
그리고 요즘 영화가에서 상승세를 타 조만간 관객이 100만을 넘을 것으로 보이는 김덕영 감독의 ‘건국전쟁’(영문명: 대한민국의 탄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자료화면을 충실히 모아 보여주었고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나레이터들을 적절히 배치, 자료화면으로 부족한 부분을 잘 메꿔 나갔다. 전문성이 뛰어난 분들을 잘 배치했으며 특히 외국인 중에서 이승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을 나레이터에 포함시켜 원어로 발언한 내용을 자막으로 옮겨 설명함으로써 자료의 신빙성도 높였다. 다만 선명치 못한 자막이나 나레이터를 활용해야 할 부분과 자막으로 처리되어야 할 부분이 엇바뀐 부분들은 개선의 여지를 남겼다.  
어떻든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승만 건국 대통령이 우리 역사 속에서 재평가되고, 다 시 살아난 것은 축하할 일이다. 북한의 김일성 일가가 70여 년을 공들여 성공시켜 온 이승만 지우기, 이승만 죽이기가 한국사에서 다시 뒤집혀 이승만 대통령의 진면목이 역사 속에서 되살아난다면 김일성과 DPRK는 우리 역사 속에서 ‘옛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소련의 위성국가가 됨으로써 민족분열, 국토분단, 동족상잔의 모든 책임을 지는 원흉집단’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김정은이 2023년 말 지난 80년 간의 모든 대남공작이 완전 실패였다고 평가하면서 “한국을 교전 중인 적대국가로 규정하고 침공 정복 대상”이라고 말하면서 “남북한은 민족도 같지 않다”고 발언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역사적 부활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5. 기억되어야 할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업적  
이승만 대통령은 그 업적을 독립노선과 건국 및 호국 노선의 양면에서 살피기로 한다.  
 
가. 독립노선 이승만이 남긴 큰 공헌은 두 가지다.  
⑴ 외교를 통한 독립노선을 시종일관 견지했다. 그는 일본을 상대로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성취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국제사회가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의 부당성을 인정하고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도록 외교활동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해방은 무장투쟁으로 성취되지 않았다. 3•1 독립운동도 무장투쟁이 아닌 세계 여론을 향한 민족의 독립 의지를 발산한 것이었다. 우리의 해방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선언으로 길이 열렸다. 그는 해외 망명 생활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언론을 통해 한국독립 운동의 대의를 밝히고 연합국 지도층을 상대로 한국의 독립 지지를 호소하는 서신 외교, 독립을 호소하는 강연, 조선의 독립을 호소할 국제회의 참가 시도, 재외동포의 결속과 교육에 헌신했다. 미국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출간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는 일본의 미국침공을 예측한 책으로 발간 6개월 후 일본의 진주만 침공이 가시화되자 그의 예측 능력이 평가되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노벨문학상 수상자 펄 벅(Pearl Sydenstricker Buck) 여사의 서평으로 한국 사정에 대한 미국사회의 이해를 제고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미국 대통령 특별보좌관이었던 홉킨스(Harry L. Hopkins)가 카이로선언에 한국 독립조항을 포함시키는데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한 학자는 말했다.  
 
⑵ 이승만의 건국 지정학이다. 그는 미국의 하와이에서 머나먼 조국 하늘을 바라보면서 한반도를 대륙 세력의 꼬리로 간주, 북방의 대륙 세력을 섬기면서 살아야 한다는 지정학적 숙명론에서 탈피했다. 한반도를 해양 세력의 대륙진출 교두보로 인식하면서 해양 세력들을 한반도로 끌어들일 자유민주체제로 독립 국가를 세울 것을 꿈꾸었다. 그는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강대국들의 신탁통치를 반대했고,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를 통한 독립 국가건설 노선을 관철시켰다. 오늘날 대륙세력의 꼬리가 된 북한은 지구 최빈국에 머물고 한국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이승만의 건국 지정학의 선견이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나. 건국과 호국노선  
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보장한 헌법제정  
1948년 5월 10일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에서 선출된 198명의 의원들과 더불어 이승만은 초대 국회의장으로서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제정하였다. 103개 조의 헌법 초안을 매 개 조마다 투표로서 확정, 민의를 반영한 민주헌법을 제정하였다. 북한이 소련의 위성국가들과 국호와 수도만 다르게 표현하고 내용을 모두 똑같이 한 위성국 헌법을 채택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북한은 지금 주권이 수령에게 있고 한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⑵농지개혁 관철  
해방당시 한국농민의 90%가 소작농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유상매입(有償 買入), 유상분배(有償分配)라는 획기적 방식으로 농지개혁법을 마련, 전국의 농민을 자영농민으로 만들었다. 지주가 소유한 3정보를 초과하는 농지를 모두 국가가 지가증권으로 매입한 후 이를 소작농들에게 분배하고 농지를 받은 농민들이 매년 소출의 모두 20%씩을 5년간 상환하면 분배받은 농지를 자기 소유로 전환해주는 농업혁명을 일으켰다. 다른 나라 예컨대, 브라질이나 필리핀은 지주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지만 3,274정보의 농지를 개인이 소유한 한반도 최대 지주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선생이 이승만의 농지개혁을 지지함으로써 사유재산 침해라고 저항할 지주들을 설득, 농지개혁을 완수했다. 이로써 농민들은 6•25동란을 겪으면서도 공산당의 선전, 선동에 넘어가지 않고 자기 토지를 지키는 것처럼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실히 수호하였다.  
 
⑶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이 조약은 이승만 안보외교의 금자탑이다. 외교사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협상을 통해 지구 최약(最弱)국가의 대통령이 지구 최강자인 미국 대통령을 상대로 벼랑 끝 외교를 벌인 끝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승만은 이를 ‘한미공수동맹’이라면서 만족해 하였다. 한국은 이 조약을 통해 미군을 지난 70년 이상 한반도에 주둔시켜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유지했고 현재도 주둔이 계속되고 있다. 이 바탕 위에서 한국은 경제발전에 전념, 2차대전 후 신생독립국가 중에서 처음으로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당시 이런 안전장치 없이 미국의 요구대로 휴전에 동의했더라면 한반도의 휴전도 키신저(Kissinger)가 만든 베트남 평화조약처럼 공산당의 협상전략에 휘둘려 중국과 소련이 포함된 북방 공산세력의 재침을 막지 못하고 베트남처럼 공산화되었을지도 모른다. 한미 방위 조약이 체결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매우 인상적인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는 한미간에 체결된 “이 조약 덕분에 앞으로 우리 후대들까지도 안보의 큰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담화는 아직까지 유효하다. 올해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양국간에 비준된 지 70주년을 맞는다. 앞으로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반도의 평화와 평화통일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 칼럼은 한반도선진화재단이 2월 20일자로 발행한 Hansun Brief 제287호에 게재된 글로, 재단의 허락을 받아 이곳에 옮겨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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