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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에서] 외모 지상주의

요즈음 한국에서는 초등학교 아이들도 부모에게 쌍까풀 수술을 해 달라고 졸라댄다고 한다. 수술을 안 해주면 이쑤시개를 눈 가에 붙여 억지로 쌍꺼풀을 만들어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에 부모들은 할 수 없이 수술을 해 준다고 한다. 그러나 수술이 끝나면 곧 이어 다이어트 약을 사달라고 졸라 댄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 같은 외모 지상주의로 인해 심지어 "머리 나쁜 것은 용서해도 못생긴 것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한 연구에 의하면 요즈음 청소년들의 자존감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공부 잘하는 것에서 잘 생기고 날씬한 외모로 바뀌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연예인처럼 자신의 몸을 가꾸거나 아예 연예인이 되려고 공부를 중단하고 가수 수업이나 연기자 수업을 받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에는 자기 몸매에 만족하는 사람이 100명이면 1명에 불과다고 한다. 그만큼 자기 몸매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가 되고 있다. 그래서 요즈음 한국인들이 몸매 관리에 쓰는 비용이 해마다 2조원 이상 된다고 한다. 살 1kg 빼는데 평균 100만원 정도 든다고 하니까 10kg 빼려면 1000만 원이나 필요할 것이다. 불과 얼마 전만해도 세끼 밥만 잘 먹어도 감사했는데 이제는 몸매 걱정을 하는 나라가 되고 있다. 이렇게 현대인들은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외모의 가치를 가꾸는데 올인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사람에 대한 시각은 무엇인가? 성경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보실 때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 여기 '중심'이라는 것은 물론 사람의 마음을 뜻한다. 따라서 사람이 아무리 외모를 잘 가꾸어도 그 마음이 아름답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교회 일꾼을 세울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칭찬 듣는 사람'을 택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어떤 외모 어떤 배경을 갖고 있는가?" 보다는 "그 사람 됨됨이가 어떤 사람이냐?"를 더 중요하게 본 것이다. 이 같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크리스천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외모로 취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외모보다 마음 관리에 집중해야 한다. 물론 크리스천들도 자신의 외모를 깔끔하고 단정하게 관리해야 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외모를 잘 관리한다고 모든 단장이 끝난 것은 아니다. 사도 베드로는 크리스천들에게 무엇보다 '마음에 숨은 사람'을 단장하라고 하였다. 우리가 '마음에 숨은 사람'을 아름답게 단장하려면 가장 좋은 방법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한 마디로 '온유와 겸손'이다. 누구든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단장할 수 있다면 그는 어디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변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진정한 매력은 외모가 아니라 내면에서 은은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2010-07-27

[변화] '강할 때 약함 되시네'

인간은 모두 연약함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 누구도 연약함이 없는 사람은 없다. 어떤 사람은 돈에 유난히 약한 사람이 있다. 호주머니에 돈이 떨어지면 금단현상을 겪는 사람처럼 마음이 불안해지고 사시나무 떨듯 떠는 사람이 있다. 명예에 약한 사람이 있다. 사람들이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맛에 온통 자신을 다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성에 약한 사람들이 있다. 유독 성적인 것을 탐닉하고 좋아하고 밝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다 그럴만한 이유에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다. 생각해보라. 내가 약점을 일부러 갖고 싶어서 갖게 된 사람이 얼마나 되나? 바울은 눈의 가시를 놓고 3번씩 간구했다. 유대인들의 표현법으로 3번씩 기도했다는 것은 죽을 힘을 다했다는 의미라고 한다. 바울은 그 약점을 통해 '약할 때 강함주시는 주님'(딤13:9)이라는 고백을 하기에 이른다. 한국의 한 국회의원이 대학생들에게 쏟아낸 '어록'(?)이 연일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가 쏟아낸 말들을 들어보면 하버드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의 이미지 보다는 성적인 것을 탐닉하는 위기의 한 중년 남성을 보고있는 것 같다. 깊은 성찰을 통해 나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한다.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도 많은 상처를 입게 만든다. 약점을 잘 관리하지 못하면 반드시 큰 화를 당하게된다. 건강을 위해 기도만 하면 무조건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듯 약점을 위해 기도만 한다고 약점이 관리되는 것이 아니다. 건강을 관리하듯 약점도 관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약점은 반드시 은혜로 가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약점을 허락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리더들은 자신의 약점을 잘 발견하고 관리해서 약점이 오히려 은혜의 통로가 되게 해야 한다. 약점 없는 목회자는 없다. 그러나 자신의 약점을 잘 모르는 목회자들이 '성공하는 목회'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자신의 상처도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남의 상처를 보듬다보면 얘기치 않은 많은 사건 사고가 발생한다. 목회자들의 치료되지 않은 열등의식과 약점이 더 이상 하나님 나라에 폐를 끼치지 못하도록 중보해야 한다.

2010-07-27

[사목의 향기] 참된 '자랑거리'를 만들자

월드컵으로 여름을 시작하면서 뜨거운 열정을 느꼈던 지난 한 달이었습니다. 한국의 16강 진출을 희망하며 관전하다가 친구들끼리 저녁 내기를 하는 재미가 또한 쏠쏠했습니다. 6월 11일부터 시작하고 7월 12일 스페인이 결승전에서 승리하게 될 때까지 참 그랬습니다. 스페인의 승리를 점쳐준 문어가 스페인 시민권을 얻었다던가 뭐 그런 재미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신자들의 가족 이야기 또한 흥미로웠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우리 교포 자녀들이 대개는 어려서는 잘 모르다가 고학년이 되고 대학에 가고 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묻게 되고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찾아 갖게 되는데 이런 월드컵 같은 것이 그런 경우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붉은 색 티셔츠를 입고 얼굴에 분장을 하고"대~한민국"을 외치는 동포의 무리 중에 섞여있는 자기를 발견하면서'자기'가 된다고 합니다. 색깔 때문에 언어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는 피해의식도 저 응원에 참여하고 나면 별 것 아닌 것이 되고 '한국인'인 것이 어느새 자랑거리가 되고 기가 살아난답니다. 그렇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랑거리가 있어야 하는가 봅니다. 어떤 사람은 양반 가문과 혈통을 자랑하고 명문 학벌을 자랑하고 가지고 있는 재물을 자랑하고 직업을 자랑하고 아이비 리그( Ivy League)에 입학한 자식이 자랑이고 한국이 월드컵에서 16강에 들어서 자랑이고 현대 삼성 같은 기업이 한국 기업이라서 그렇고. 그런데 생각할 것이 있지 싶었습니다.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초반에 어이없이 실점을 당하고나서 장탄식과 더불어 비판이 시작되더군요. 감독이 왜 누구를 빼고 누구를 출전시켰느냐 이것이 한계다 아직 멀었다. 그러다가 자긍심은 조바심으로 바뀌고 새벽에 일어나 관전하느라 잠이 모자란 탓인지 패배로 인한 자괴감 때문인지 하루가 우울해지고 뭐 그렇게 재미없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묻게 됩니다."깨져버리기 쉬운 이런 것 말고 우리 인생을 변함없이 튼튼하게 버텨줄 자랑거리를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그렇다면"그것은 어떤 것일까?"이리 저리 두리번거리며 찾아보지만 세상의 것들은 다 고만하게 한계가 있습니다. 건강도 명예도 부도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릴 것들이니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책 중의 책인 성경에서 답을 찾다가 사도 바오로를 길잡이로 삼아 보았습니다. 갈라티아서 6장 14-15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겠다는 열정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여기 사용된 '자랑하다'는 동사는 그의 인생전체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단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의 사도적 열정 그의 활동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드높은 긍지가"허풍떨기"와 달라 보이는 것은 그가 예수님에게서 배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루카 복음의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십니다."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장 18절) 우리가 받은 능력을 자랑하지 말고 업적을 자랑하지 말고 우리가 하느님께 속한"하느님의 것"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자랑거리로 삼으라는 가르침입니다. 과연 변치 않을 참된 자랑거리는 이것뿐이고 이를 자랑거리로 삼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습니다. 이것이 지난 한 달간 마음 설레다가 얻은 영혼의 양식이라서 여러분과 나누고자 했습니다.

2010-07-27

[지혜의 향기] 기본 계율 지키기와 시대적인 부조화

우리가 만약 불교의 계율이나 기독교의 계명을 곧이곧대로 에누리 없이 지키고자 한다면 세상 살아가기가 참 힘들 것이다. 일반 불자들만 하더라도 지켜야 할 5계가 있고 비구 스님은 250계 비구니 스님에게는 348계가 있다. 비구계 중에는 가죽신을 신은 자에게는 불교를 가르쳐 주지 말라는 것도 있다. 대부분 구두를 신고 사는 요즘 사람들에 대한 포교는 일찌감치 포기하든지 비구니 스님만 맡아야 한다. 아니면 비구 스님을 만나 뵐 때는 모두 고무신이나 짚신을 신든지 아니면 아예 맨발로 가든지. 이렇듯 그 당시에는 타당성이 있어 생겨났던 계율일지라도 시대가 변하여 전혀 맞지 않는 것도 드물지 않다. 당연히 고치거나 버려야 할 것이다. 본래 계율이란 어떤 정신을 지키기 위해 필요해서 보편적인 행동 지침으로 마련된 것이 아니겠나. 정신은 잊어먹은 채 화석화한 양식에만 얽매인다면 형식주의요 율법주의로서 도리어 부처님의 가르침에 크게 어긋날 것이다. 오늘은 이런 시대적인 부조화 말고 기본적인 계율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근본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생각을 좀 해 보자. 5계의 첫째가 '죽이지 말라' 이다. 그런데 정말 아무 것도 안 죽이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식물이나 눈에 잘 안 보이는 미생물은 제쳐 두고도 우리는 날마다 엄청난 숫자의 살생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도살장 담당자 같은 직접 살생도 있고 소고기 국밥을 사먹는 것 같은 간접 살생도 있다. 두 번째 계율은 '훔치지 말라'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훔치는 것이고 어디서부터가 정당하게 얻어 가는 것인지 따지기 어려울 때도 있을 것이다. 관계 법령이 없더라도 예를 들어 개울바닥에서 예쁜 조약돌 하나를 집어 주머니에 넣어 왔다면 도둑질일까 아닐까? 개인사이든 국가 간이든 정말 서로 간에 아무 훔침이나 도둑맞음도 없이 순수한 빈부격차라는 것이 생겨날 수도 있는 것일까? '거짓말 하지 말라'도 마찬가지. 손님의 묻는 말에 영업 비밀을 지켜 둘러대는 것은 어떨까? '음탕한 짓 하지 말라 술 마시지 말라'도 그렇다. 이러한 계율들이 지켜졌다 범해졌다고 하는 그 경계선은 어디일까? 이렇게 따지자면 정말 모호해진다. 자기 쾌락이나 이익을 위해 계율을 잘도 범하는 약삭빠른 자들이 이용하기에 딱 좋다. 근본주의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상대론의 맹점이다. 그러니 불자들도 일단은 부처님이 주신 계율을 잘 지키도록 힘씀이 마땅하다. 그러나 지키고자 해도 도저히 인간적으로 지키기 어려운 경우라든지 이것을 지키자니 저것을 범해야만 하는 일이 많다는 게 문제다. 그래선지 불교에는 열고 닫는 법 혹은 열어서 미리 막는 법이라고 할 수 있는 개차법이 알려져 있다. 나그네가 산길을 가는데 사슴이 피를 흘리며 뛰어와 근처 수풀에 숨었다. 곧바로 사냥꾼이 달려와 사슴을 보았느냐고 묻는다. 못 보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요 보았다고 하면 사슴이 죽을 것이다. 묘한 상황이다. 어느 계가 더 중요한가? 목숨이다. 나그네는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스스로 나서서 불망어계를 범함으로서 불살생계를 지켰다. 자비의 문을 엶으로서 살생의 문을 차단한 것이다. 이렇듯 상대적으로 가벼운 계를 범하여 더 큰 불행과 심각한 잘못을 미리 막는 것이 개차법인데 만약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에 거꾸로 헷갈려 버린다면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을 것이다.

2010-07-27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종교의 강에서 몸을 씻을 때

# 풍경 1 : 도마복음(예수의 가르침을 담았다는 영지주의 문헌으로 그리스도교 정경에는 포함되지 않음)의 한 대목입니다. 누군가 예수에게 물었죠. "주님 천국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에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바다에 있는 것입니까?" 이 말을 들은 예수가 답했습니다. "천국이 하늘에 있는 것이라면 공중을 나는 저 새가 먼저 닿을 것이고 천국이 바다에 있는 것이라면 물속을 헤엄치는 저 물고기가 먼저 닿을 것이다. 천국은 하늘에도 있지 않고 바다에도 있지 않다. 천국은 차라리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바깥에 있다." 무슨 뜻일까요? 천국이 너희 안에 있다니. 우리의 마음은 늘 지지고 볶고 허덕대는데 말이죠. 대체 어디에 천국이 있다는 걸까요? # 풍경 2 : 인도 사람들에겐 소원이 있죠. 죽기 전에 갠지스강에 가서 목욕을 하는 겁니다.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들은 갠지스의 강물이 죄를 씻어준다고 믿기 때문이죠. 옛날에도 그랬습니다. 불교의 한 여성 출가자가 갠지스강에 갔습니다. 거기서 몸을 씻고 있는 힌두교의 바라문을 봤죠. 승려가 물었습니다. "왜 강물에 몸을 씻는 겁니까?" 바라문이 답했죠. "나의 죄를 씻기 위해서요. 이 신성한 강물이 인간의 죄를 씻어주니까요. 그렇게 죄를 씻어서 해탈을 이루고자 함이오." 그 말을 들은 승려가 말했습니다. "저 강물이 진정으로 죄를 씻어준다면 갠지스강의 물고기는 모두 해탈을 이루었겠소." 이 말을 들은 바라문은 뭐라고 답했을까요. 승려를 바라보는 그의 멍한 표정이 눈에 선하군요. 갠지스강에서 몸을 씻는 건 종교적 형식이죠. 여기에는 '죄를 씻는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럼 갠지스강에 몸을 담근다고 정말 죄가 씻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죄는 '몸 씻기'가 아니라 '마음 씻기'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갠지스강이냐 센강이냐 낙동강이냐는 중요치 않죠. 몸을 씻는가 마음을 씻는가가 포인트죠. 그리스도교의 세례도 종교적 형식이죠. 거기에도 '죄를 씻는다 죄사함'이라는 상징이 담겨 있죠. 예수도 세례 요한에게서 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물에서 나왔을 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마태복음 3장16절)고 성경에는 기록돼 있습니다. '현문우답'은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는 대목에 주목합니다. 왜냐고요? 하늘이 열릴 때 우리는 비로소 천국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럼 물음이 날아옵니다. "어떡해야 하늘이 열리고 어떡해야 신을 만나고 어떡해야 천국을 보는가?"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좌절하고 말죠. 그런데 예수는 이미 여기에 답을 했습니다. 2000년 전 갈릴리 호숫가의 언덕에서 예수는 귀를 쫑긋 세운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복음 5장8절) 그렇군요. 마음이 깨끗할 때 하늘이 열리는군요. 그래서 도마복음은 "천국은 네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안팎이 둘이 아니죠. 천국이 내 안에 있을 때 천국은 내 밖에도 있죠. 그래서 나의 고집 나의 착각으로 범벅 된 '나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겁니다. 그게 천국을 가리기 때문이죠. 그런데 우리는 '갠지스강'에만 집착합니다. "갠지스강에서 몇 번이나 목욕을 했나?" "출석하는 교회에 몇 번이나 봉사를 했나?" "법당에서 몇 번이나 시주를 했나?"를 따지며 수치와 횟수에 매달립니다. 이젠 물음을 바꿔야 합니다. 종교의 강에서 나는 몸을 씻고 있나 마음을 씻고 있나.

2010-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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