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 돕다 노숙자로 생 마감한 이강원 목사의 비극
약물중독 홈리스들에게 등대 같은 사역자
운영하던 셸터 2014년 강제 폐쇄된 후 몰락
코리아타운 길거리에 방치된 채 쓸쓸히 사망
시 정부 대책, 정신질환 노숙자 문제엔 무기력
[편집자 주: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LA 한인타운. 이곳에서 이강원 목사는 2024년 7월 노숙자로 굴곡진 삶을 마감했다. 그는 과거 노숙자를 지원하는 사역을 했던 목회자였다. 미주중앙일보 탐사보도팀은 그가 노숙자가 된 뒤 갑작스럽게 사망하기까지 그의 험난한 행로를 기록했다. 그의 삶과 죽음이 시사하는 바를 더욱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그의 죽음 이후에도 추가 취재를 진행했다.]
[이 기사는 미주중앙일보의 영어 매체 코리아데일리US(www.koreadailyus.com)에 11월12일 게재한 기사를 국문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영어 원문 링크]
한인타운에서의 암울한 발견
한인타운 곳곳에 펼쳐진 텐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삶은 날마다 생존을 위한 싸움이다. 두 건물 사이에 자리 잡았던 텐트 중 하나는 절망 속에서도 존엄성을 잃지 않았던 이강원 목사가 살던 곳이다.
이강원 목사의 텐트 근처에서 생활하는 신소영 씨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은 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상한 냄새가 났다”며 “며칠 동안 그런 냄새가 동네에서 진동했다”고 말했다.
경찰이 도착했고 어떤 상황인지 확인됐다. 1년 가까이 이웃으로 지내던 이 목사가 사망한 것이었다. 7월 초였다. 그의 시신은 신 씨의 텐트에서 불과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소리 없이 부패하고 있었다.
신 씨는 “죽음은 이곳에서 우리와 늘 함께하는 동반자”라며 “또 한 명의 영혼을 그렇게 잃었다”고 했다.
이 목사의 시신은 며칠 동안 발견되지 않았다. 이런 일은 LA 노숙자 사이에서 드문 일이 아니다.
그는 약물 중독과 노숙 생활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수년을 노력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막아서려 했던 바로 그 운명에 휘말리게 됐다.
본지 취재팀은 지난 4월 22일 이 목사를 처음 만났다. 한인타운에서 노숙자 셸터를 운영하는 세인트 제임스 교회의 김요한 신부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또 한 명의 한인 남성이 길거리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취재팀이 10번가에 위치한 LA 중앙루터교회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비극적 사건의 증거가 대부분 사라진 상태였다. 안태홍(65) 씨의 시신은 영안실로 옮겨졌고 빈 텐트와 그가 숨지기 전 토한 피의 자국들만 남겨져 있었다. 그는 김 신부의 셸터를 떠난 지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안 씨는 길거리 생활의 가혹한 현실에 굴복했다. 피를 토하며 마지막 나날을 보냈다. 노숙자들의 심각한 건강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였다.
취재팀은 안씨가 머물던 텐트 근처를 지나던 중 접이식 의자 위에 쓰러져 있는 한 노인을 발견했다. 그 역시 노숙자였다. 취재팀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안 씨의 죽음에 관해 물었다.
이 남성은 중얼거리며 뭐라 말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려웠다. 몇 개 남지 않은 치아 상태도 좋지 않아 말이 어눌했다. 깊게 파인 주름과 햇볕에 그을린 피부, 정돈되지 않은 수염, 초점 없는 눈빛은 거리에서 살아온 그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였다.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게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 남성은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제 이름은 이강원입니다”라고.
이 목사는 개인적 경험을 통해 노숙자들을 이해하고 도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거리에서 생활하는 이들에 대한 연민과 목회자로서의 헌신은 많은 찬사를 받기도 했다.
울타리선교회의 나주옥 목사를 비롯해, 노숙자 사역과 관련한 인물들은 이 목사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는 “이 목사는 내 친구였다”며 “노숙자와 중독자들을 향한 그의 진실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김 씨는 “내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이 목사를 만났다”고 했다. “그의 보살핌이 없었으면 마약을 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오늘날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한인타운 한복판인 사우스 호바트 불러바드에 위치했던 이 목사의 셸터는 삶의 나락에서 추락해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등대 같은 존재였다. 많을 때는 80여 명이 이 셸터에서 생활하며 다시 일어서려 했다.
이 목사는 과거 마약에 빠져본 적이 있었기에 노숙자들을 더 잘 이해했다. 그는 노숙자들을 위한 정부의 시스템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노숙자들에 대한 그의 연민은 결국 셸터가 몰락하는 단초로 이어졌다. 셸터 규모가 확장되면서 시 정부 규정을 준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 목사는 자신이 거주하던 집을 개조해 셸터로 사용했다. 셸터에서 풍기는 악취와 소음 탓에 이웃들의 민원이 계속 제기되던 상황이었다.
아가페 미션 하우스의 몰락
2014년이 되자 아가페 미션 하우스에 대한 민원은 더욱 늘었다. 이웃들의 민원을 접수한 LA 소방국, 주택국, LA 카운티 공공보건국, 정신건강국 등이 셸터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이 목사는 셸터 거주자들에 대한 학대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이로써 노숙자 지원이라는 그의 일은 끝이 났다. 일부 한인 언론은 그를 타락한 구원자로 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셸터에서 거주했던 최광옥 씨는 그를 안타깝게 생각했다. 현재 김요한 신부의 셸터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최 씨는 “이 목사는 셸터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김밥 사업까지 시작했다”며 그를 회상했다.
셸터가 폐쇄된 후 이 목사는 길을 잃었다. 구원의 손길을 내밀던 그가 이젠 노숙자가 돼 길거리로 나앉았다. 관공서나 큰 조직의 배경 없이 개인 차원에서 노숙자를 도우려는 사람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목사의 부인 이정환 씨는 “기소로 힘들어하던 남편이 밤길을 걷다가 튀어나온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다”고 말했다. 이어 “넘어지면서 머리를 심하게 다쳐 3주 동안 의식불명 상태로 있다가 병원에서 겨우 깨어났다”고 했다.
그의 머리 부상은 고난의 시작에 불과했다. 이정환 씨는 “남편은 이후 매우 폭력적으로 변했다”며 “탄압을 받고 있다는 망상과 심각한 정신 질환 증세를 보였다”고 설명했다.
온화했던 이 목사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는 각종 폭행 혐의로 여러 번 수감됐고 감옥에서 다른 수감자들과 싸우기도 했다.
이 목사는 2012년에 저지른 범죄로 2017년 두 건의 절도죄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16년에는 가정 폭력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사망하기 전까지 약 3년에서 4년을 감옥을 옮겨 다니며 복역했던 것으로 보인다.
법원 기록에 따르면, 그는 2017년 비상업적 목적의 건물에 무단 침입한 혐의로 기소된 것으로 파악됐다. 그게 마지막 기소 기록이었다. 그 시점부터 이 목사가 노숙자 생활을 하게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정환 씨는 “그에게는 두 딸이 있었고 친척들도 모두 이곳에 살았지만 가족조차 그를 돌볼 수 없었다”며 “결국 그는 길거리에 나앉게 됐다”고 했다.
“나는 크리스탈을 해요”
그의 사역지였던 한인타운 거리는 그에게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됐다. 이런 현실 속에서 그는 한때 다른 사람들에게 끊으라고 조언했던 약물에 다시 빠지게 됐다.
그의 길거리 이웃이었던 신 씨는 “이 씨는 1년 전쯤부터 내 텐트 옆에서 생활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폭력적이고 망상 증세를 보인 사람이었다”며 “여기 오기 전에는 누군가 자신을 살해할까 두려워 LA 경찰국 올림픽경찰서 근처에서 살았다고 들었다”고 설명했다.
이 목사가 한인타운에 다시 나타나게 되는 데까지는 수년이 걸렸다. 돌아온 그는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암울한 그림자만이 남았다.
어느 무더운 오후, 지나가던 사람들은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옷을 반쯤 벗은 채 길거리에 서서 하늘을 향해 소리치는 이강원 목사의 모습이었다.
취재팀이 그에게 다가가자 그는 불안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직설적으로 이야기했다. 떨리는 손으로 파이프에 불을 붙이면서 “나 지금 크리스탈(메스암페타민)을 한다”고 말했다. 취재팀은 그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자 시도했지만 일관성 없고 횡설수설하며 대답을 이어갔다.
한인타운의 냉혹한 정글에서 이 목사는 소박한 것에 위안을 얻었다. 바로 한국산 인스턴트 라면이었다.
그가 텐트에서 라면을 끓여 막 먹으려 할 때, 취재팀이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이 음식을 내게 가져다준 모든 분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며 기도를 올렸다.
본지 기사에 간략하게 소개된 이 목사의 사연은 LA 시장의 관심을 끌어냈다. 시장실 홍보 담당 김지은 씨는 “캐런 배스 시장이 이 목사의 사연을 듣고 직접 그를 찾아가 셸터 입소를 돕겠다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노숙 생활의 역설
이 목사는 배스 시장이 추진한 핵심 프로젝트인 ‘인사이드 세이프’의 도움을 받게 됐다. LA에 증가하는 노숙자 인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들을 근처 모텔 등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다. 쉼터뿐만 아니라 음식 등의 지원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노숙자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해결하고자 한 배스 시장의 야심 찬 정책이었다.
6월 18일, 시 정부 직원들이 이 목사가 노숙하던 장소를 찾았다. 이 목사는 그가 가진 물건들을 가방 몇 개에 싸서 셸터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가 갖고 있던 가장 깔끔한 옷을 차려입은 이 목사는 취재팀 카메라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게 이 목사의 영정 사진이 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셸터에 도착한 지 하루도 안 돼 그는 길거리로 다시 돌아왔다. 자신을 보호해주는 셸터에서의 생활을 외려 부자유스럽다고 느끼는 노숙 생활의 역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상황이었다. 많은 사람, 특히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셸터에서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규칙을 어려워한다. 그보다는 차라리 거리의 자유가 더 편하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왜 다시 길거리로 나왔느냐는 취재팀의 질문에 그는 또 횡설수설했다. 말은 어눌했고 생각도 또렷하지 않았다.
시 정부 직원들은 그런데도 이강원 목사를 셸터로 이전하기 위해 그를 다시 한번 찾았다. 6월 25일, 이 목사는 또다시 입소 24시간 만에 퇴소했다. 시장실 김지은 씨는 “그는 (셸터의) 규칙과 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영어가 유창하지 않은 이 목사는 셸터 내에서 한국 사람들이 곁에 보이지 않자 불안감을 느낀 것으로 나중에 전해졌다.
취재팀은 이 목사에게 최후의 수단으로 개인적인 호소를 이어갔다.
“목사님, 마약을 끊고, 깨끗한 물로 샤워하고 따뜻한 음식을 먹고 딱딱한 길거리 대신 푹신한 침대에서 주무셔야죠.”
오랜 침묵이 이어졌다.
“저도 들어가고 싶어요. 너무 지쳤어요…”
그의 대답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한때 존경받았지만 쇠약해진 이 목사에게 삶의 의욕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사치가 돼버렸다.
마약과 노숙자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LA시에서 이 목사와 같은 사람들의 운명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이들의 시들어 가는 삶은 잃어버린 인간의 존엄성과 중독의 파괴력을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외로운 죽음
지난 7월, 미주중앙일보 뉴스룸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강원 목사가 숨졌다”는 김 신부의 전화였다. “어떻게 숨졌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는데 죽은 건 확인됐다”는 것이었다.
LA 카운티 검시 기록을 확인한 결과 이 목사의 사건 번호는 2024-10744였다. 이 목사는 2024년 7월 5일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거의 일주일 동안 그의 죽음은 알려지지 않았다. 노숙자들이 얼마나 고립된 곳에서 생활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LA시에서 노숙자는 길거리 어디서나 눈에 띄지만, 그들 하나하나의 삶의 궤적은 커뮤니티와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셈이다. 심지어 그들을 지원해줘야 할 관공서는 물론이고 언론의 시야에서도 벗어나 있는 존재들이다.
검시 기록에 따르면 사망 원인은 ‘메스암페타민’에 의한 것이었다. 사망 장소는 ‘텐트’로만 기재됐다.
그의 이웃이던 신소영 씨는 그의 죽음에 연신 안타깝다는 말을 했다. “남의 텐트에서 숨졌기 때문에 이 목사인 줄 몰랐어요. 누군지 알았더라면 (경찰이 출동했을 때 그의) 썩어가는 시신을 보러 가지 않았을 텐데, 참 안타깝지요.”
소박한 이별
8월 2일, 김요한 신부의 셸터에 조문객들이 모여 이 목사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장례식 참석자 중에는 노숙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도 많았다.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은 죽음이 낯설지 않은 듯 무덤덤한 표정을 보였다. 혹은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듯한 사람들도 있었다.
기독교식으로 진행된 장례엔 한국의 유교적 관습도 가미됐다. 그의 영정 사진이 놓인 상에는 낡은 성격 책과 과일, 담배, 그리고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익히 아는 소주가 올려졌다. 참석자들은 이 목사의 사진 앞에 현금을 모아 기부하기도 했다.
김요한 신부는 감정이 북받친 목소리로, “우리가 가진 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며 “고인이 좋아했던 음식이 올라야 하지만 셸터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만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한때 이 목사에게 도움을 받았고 현재는 다른 노숙자들을 돕고 있는 최광옥 씨가 다음과 같은 추도사를 읽었다.
“세상에서 두드려 맞고 만신창이가 돼 피범벅 된 육신의 전투복을 벗어버리고 주님께 갑니다. 여기 인간 이강원, 목사 이강원, 아버지 이강원, 남편 이강원, 그리고 중요한 하나님의 귀한 자녀 이강원이 주님께 갑니다. 천국에서 안식을 얻고 다시는 헤매지 않고 고통 없는 곳에서 편히 쉬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목사는 세상을 뜨기 전 취재팀에게 “나를 노숙자로 부르지 말라”고 말했다. “천국이 나의 집이고 예수가 나의 구원자”라고 했다.
이 목사의 고단했던 삶은 LA 길거리를 자신들의 집이라 부르는 수천 명의 노숙자가 직면한 가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지원할 수 있는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풀기 어려운 숙제도 남겼다.
이 목사가 운영하던 셸터에 거주했었던 김우식 씨는 “저 예수님 영접시켜 주신 분이고 마약으로 쓰러져서 여기(셸터)에 들어가 피난처를 찾았었다”며 “목사님 편히 쉬세요”라고 말했다.
이 목사의 마지막 나날들을 이웃으로 지냈던 신소영 씨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목사님에 대한 좋은 말은 많이 못 하겠다”며 “하지만 운명보다 먼저 죽는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라고 했다.
특별취재팀
글: 장열 기자, 김영남 기자 [[email protected]]
사진·영상: 김상진 기자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