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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이미 불 끄고 커튼 내린 상태

[기획] ‘북핵, 그 결정적 순간’ <5> 로버트 칼린 인터뷰<하>

북 대화 끊어 예측 곤란 상태
‘움직임 있을 것’ 소문만 돌아
시간 갖고 지켜봐야 할 상황
북핵, 현실로 간주 대응 필요
핵ICBM 발사, 핵실험보다 위험
미국도 좌시 않고 행동 나설 것
 
미주중앙일보는 중앙정보국(CIA) 출신의 북한 전문가 로버트 칼린 스탠퍼드대 국제안보협력연구소 초빙교수의 인터뷰를 6일(2면)에 이어 게재합니다.  
 
-한반도에 가장 평화로운 시기가 있었다면 언제로 기억하는가. 역시 제네바 합의 때인가.
 
“물론이다. 시작할 시기뿐 아니라 합의 기간 내내 평화로웠다. 물론 이런저런 사건들은 있었지만 당시 제네바 합의는 모든 일을 만나서 해결하는 일종의 ‘우산’ 역할을 했다. 이 우산(제네바 합의)은 오히려 나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줬다. 하지만 이런 시기는 2001년 이후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북한은 KEDO 시기에도 핵무기 개발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제네바 합의 기간에도 핵무기를 만들고 있었다는 뜻 아닌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일성은 외교적으로 미국과의 평상적인 관계를 원했고 이런 관계는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자신들을 보존하는 일종의 보호막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북한은 스스로 약소하고 왜소한 국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약하게만 보이고 싶지 않았다. 2004년 이후에 지속적으로 전문가를 북한에 초대한 것은 위협이 아니라 대화를 하자는 제안이었다. ‘우리는 강해지고 있는데 그래도 대화를 하지 않을 거냐’는 대미 메시지였다. 하지만 대화는 열리지 않았다. 상황은 하노이 이후에 완전히 달라졌다. 그런 형태의 대화와 접촉에 북한은 더이상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중국이라는 강한 동맹이 생긴 상황이다.”
2006년 10월 31일 민간인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로버트 칼린 교수가 방문단원들과 조선노동당 창건 기념비 앞에 섰다. 왼쪽부터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 존 루이스 스탠퍼드대 교수(2018년 작고), 칼린 교수, 잭 프리처드 워싱턴 한국경제연구소 소장.

2006년 10월 31일 민간인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로버트 칼린 교수가 방문단원들과 조선노동당 창건 기념비 앞에 섰다. 왼쪽부터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 존 루이스 스탠퍼드대 교수(2018년 작고), 칼린 교수, 잭 프리처드 워싱턴 한국경제연구소 소장.

 


-보수 진영은 대북 강경 방침을 주장한다.
 
“(트럼프 정부의)폼페이오 전 국무부 장관은 자신의 책에서 재임 당시 하고자 했던 것들에 대해서 언급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북한은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미국이 하면 다른 나라들은 그냥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은 이제 그렇지 않다.”
 
-워싱턴이 영변이나 다른 시설에 군사공격을 고려한 적은 없었나.
 
“1994년 6월에 상황이 악화되면서 워싱턴이 영변 공격을 고려했었다. 하지만 당시 북한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대화에 나섰다는 점을 미국은 이해하지 못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일이 더욱 악화됐을 것이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 시기도 위기였다. 하지만 많은 미국인들의 우려와는 달리 북한은 무리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워싱턴이 무력을 동원하지 않으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고위 공직자 중엔 아무 생각이 없거나 상식만으로 판단하는 이가 적잖다. 때로는 말도 안되는 미디어의 주장에 휘둘리는 이들도 있다. 한국의 외교통상부장관도 ‘북핵이 있는 한 평화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정말로 평화는 없는 셈이다. 하지만 북핵은 현실로 봐야 한다. 무력 행사나 공격의 명분에는 선이 있다. 만약 북한이 핵탄두를 장착한 ICBM을 태평양 한가운데로 쏘아 올린다면 미국은 행동에 나설 수도 있다. 실제 이런 상황은 7번째 핵실험보다 더 엄중한 상황이 될 것이다. 워싱턴은 중국의 풍선을 두고도 이렇게 난리법석 아닌가. 그런 일이 없길 바랄 뿐이다.”
 
-외교 현장을 통틀어 50년 동안 북과 남의 관리들을 만나고 대화했다. 양측 모두 대결을 종식하는 통일에 대한 기대나 열정이 있어 보였나.
 
“양측 모두 그런 느낌은 주지 않았다. 그들 마음 속 깊이 그런 열망이 있을 수는 있지만 단기간 내에 이뤄질 것으로 내다보지는 않았다. 북한은 알다시피 통일의 개념을 바꿨다. 이전에는 영토가 하나로 통합되는 통일이었다면 80년대 이후에는 남쪽을 협상 파트너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남쪽은 북을 늘 ‘북한’이라고만 불렀다. 요즘 그런 표현이 더 많이 나온다. 아마도 악화된 관계 탓이 아닌가 싶다.”
 
칼린 교수(왼쪽)가 2007년 북한을 방문해 가진 만찬에서 북한의 리근 전 대사와 함께 대화하고 있다. 리 전 대사는 1~6차 6자회담 차석대표로 일했고 2005년에 외무성 미국국 국장을 지낸 미국통이다. [헤커박사 제공]

칼린 교수(왼쪽)가 2007년 북한을 방문해 가진 만찬에서 북한의 리근 전 대사와 함께 대화하고 있다. 리 전 대사는 1~6차 6자회담 차석대표로 일했고 2005년에 외무성 미국국 국장을 지낸 미국통이다. [헤커박사 제공]

-아직 북의 지인들 또는 관료나 학자들과 연락하고 정보도 주고 받나.
 
“북한은 이미 불을 끄고 커튼을 내린 상태다. 어떤 미국인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여전히 친절하고 상냥하지만 대화하거나 만나려는 의지는 전혀 없다고 말한다. 노동신문은 외국 소식을 대폭 줄였으며, 정부 기관도 외교적으로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고 있다. 무슨 생각과 입장인지 모르면 예측이 어렵고 대화는 불가능해진다. 만약에 내부 상황이 달라져 대표단을 내보내거나 문을 열면 그때 뭔가 좀 들여다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럼 곧 뭔가 북에서 움직임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인가.
 
“소문은 그렇다. 북이 핵실험 끝에 서너달 후 대표단을 내보내 외교채널을 가동할 것이라고. 그런 소문은 작년에도 있었다. 기다려 봐야 한다.”
 
-미국에선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낸 팀이 모두 은퇴해 인력 측면에서도 난관이 있을 수 있겠다.
 
“사실 그렇다. 북한에선 당시 합의 테이블에 있었던 인물들이 모두 승진해서 고위층이 됐다. 그때 경험이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선 오히려 모두 은퇴하거나 현장을 대부분 떠났다. 물론 새로운 신진들이 잘 배워가면 되겠지만 시간이 많이 걸린다. 실제로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 ‘내 임기 내 한반도에 어떤 문제도 발생하면 안된다’고 말해야 하는데, 2001년 이후 그런 대통령이 없다. 그래서 문제다.”
 
-제네바 합의와 같은 합의는 이제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인가.
 
“1974년의 50년 전이면 1924년이다. 그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 보라.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수 십년 전 만든 협정을 바꾸지 못하고 지키고 있다. 왜 아직까지 그때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지내야 하는가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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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성 기자 ichoi@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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