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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마당] 잠들기 전의 회상

오늘 하루도 바쁘게 혹은 땀 흘리며 살아내고 이제 나만의 조용한 시간이다. 잠들기조차 아까운 시간이다. 고요하고 좋기 만한 이 시간이다. 나는 세상 속에서 시달린 내 몸을 눕힐 이불의 먼지를 깨끗이 걷어내고 가뿐한 숨을 토해내며 눕는다.     잠시 지난날을 회상해 본다. 이민의 시간들이다. 나는 계절로 치면 씨 뿌리는 봄쯤에 이땅에 와서 한 여름, 가을 동안 땀 흘리며 살았다. 그 시간 동안 자식 농사도 지었다. 이제는 그들은 잘 자라서 한 걱정을 놓고 살아가고 있다.     봄, 여름, 가을을 지나 이젠 황량하고 시들은 벌판을 40년을 같이 땀 흘렸던 동반자와 바라보며 초겨울쯤에 서 있다.   잘 자라준 씨앗들은 열매를 맺고 또 새 씨앗들을 만들어가며 우리의 발자취를 이어갈 테니 우리가 흘렸던 그 땀방울들이 힘겨웠을지언정 부질 없었던 것은 아니었겠지!   이제 머지않아 계절의 문도 닫히고 시간의 흐름도 멈추는 날이 오겠지만 그저 담담한 마음으로 그때까지 걸어갈 뿐이다.   억겁의 세월 중에 70년, 80년, 길면 90년이란 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을 것인지도 모른다. 장자가 말했듯이 인생은 짧기가 문짝 사이로 백말이 훌쩍 지나는 순간일진데 무엇을 아쉬워하고 무엇에 미련을 두겠는가.     인간미 있고 얄팍함 없는 사나이들과 교제하고 여인들 냄새 풍기는 끌림 있는 여인들과 차 한 잔 나누고 싶은 바람도 안 잡혀지는 재미 없는 나날이다. 하지만 이래 살아도 저래 살아도 한 세상이다.     숨이 멈추는 날 재미있게 살았다고 하면, 원하는 것을 하고 살았다 하면 그것이 그 무슨 대단한 의미를 남길 것인가.     그때까지 열매들이 떨어져 나간 나무지만 마음속의 두터운 옷을 입고 바람결에 추워 말며 버텨야겠다. 그 누가 쇠약해진 고목을 멍청하게 한 세상 살았다 하겠는가.  정진형 / 샌디에이고독자 마당 회상 시간 동안 여름 가을 입고 바람결

2022-05-04

[수필] 랑나우를 회상하다

“자기 고장을 깨끗이 가꾸고 지켜가는 현장은 스위스 사람들이 자연과 소통하면서 그들의 문명과 꿈을 바른 자리로 잡아가는 축제와도 같았다”   외아들이 세 살 되던 해 스위스 주재 발령이 나서 취리히에서 18km쯤 되는 ‘랑나우’라는 작은 도시 변두리에 거처를 정했다. 알프스와 주라기 양대 산맥 사이 고원지대에 자리 잡은 스위스의 하늘은 푸르고 태양은 빛났다.     어느 날 밖으로 나가자고 졸라대는 아들을 앞세우고 아내는 집 앞 잔디밭으로 나갔다가 마침 7~8세 여자 애를 데리고 산책 나온 여성을 만났다. 초면이었다. 서로 웃으며 ‘굿텐탁’하고 인사를 나눴다. 엄마는 ‘아이린’ 딸은 ‘니콜’이라 했다.     수줍은 듯 엄마 주위를 맴돌던 아들은 아까부터 잔디밭 한가운데 키 작은 사과나무에 관심을 보였다. 쪼글쪼글 말라버린 작은 열매가 거기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려보던 녀석이 갑자기 달려가 깡충 뛰어 그중 하나를 냉큼 낚아챘다. 단번에 손아귀에 거머쥔 자신을 보란 듯이 엄마 앞에 열매를 내밀었다.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동양 애를 보고만 있던 니콜이 순간 큰 소리를 치며 달려들어 그 열매를 가로챘다. 전리품을 빼앗긴 아들은 울상이 되었고, 독일어를 모르는 아내는 그렇다고 잠자코 있을 수만도 없어 “왜 그러느냐?”하고 영어로 따지듯 물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태를 보고 놀란 아이린이 다가와 영어로 딸의 무례에 대해 용서를 구하며 니콜이 함부로 나뭇가지를 꺾거나 열매를 따는 것은 나쁜 일이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천연 자원이라곤 풍광뿐인 스위스 사람은 전통적으로 어려서부터 자연 사랑의 중요한 가치를 배운다며, 길가의 그 흔한 돌멩이도 함부로 손대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 딸을 이해해 달라고 덧붙였다.     다정한 목소리와 수정같이 맑은 눈동자가 따스하고 넉넉한 사람임을 직감할 수 있었단다. 잠시 짜증스럽게 반응한 것을 부끄럽게 느낀 아내는 “잘 설명해 주어 정말 고맙다”며 손을 내밀었다. 아이린은 환하게 웃으며 허그로 화답해주었다.   그날 그 사건(?) 뒤 아이린과 니콜은 아내와 아들의 다정한 이웃 친구가 되어 함께 마켓도 가고 아들의 치과 병원도 소개해 주었다. 그뿐인가 우리 가족을 가끔 가까운 취리히 호수로  불러내 준비해온 스낵도 나누고, 베른, 루체른 등 유명 관광지도 동행하였다. 남한의 반도 안 되는 크기의 스위스가 생각보다 가볼 곳이 많은 아주 큰 나라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그해 여름, 니콜 아버지 밀란은 나를 동네 계곡 물길 따라 플라스틱 병, 깡통 또는 유리병과 버려진 옷가지 등을 수거하는 행사에 초대해 주었다. 어린이로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연령층도 다양했다. 수영복, 반바지에 셔츠 등 차림새도 각양각색이었다. 계곡에서 바라보는 푸르른 산세와 바위들의 하모니는 신이 빚어낸 조각품처럼 신선했다. 계곡 양옆 산기슭에 꽉 들어 찬 나무 숲은 그 기품이 마치 고매한 인성을 갖춘 동양의 성현처럼 빈틈이 없어 보였다.     자기 고장을 깨끗이 가꾸고 지켜나가는 현장은 스위스 사람이 자연과 소통하면서 그들의 문명과 꿈을 바른 자리로 잡아가는 축제 같았다.   도대체 이런 쓰레기는 누가 버린 것이었을까 궁금했으나 물어보지는 못했다. ‘아마도 외국인 등산객 또는 관광객이 아닐까’라고 답하면 낭패일 것만 같아서였다. 계곡 청소에 참가한 경험은 잊을 수 없는 가장 값진 추억이다.     40년 전의 랑나우 마을을 회상한다. 잔디밭 사과나무도, 꽃으로 단장한 아이린네 통나무집 샬레(Chalet)가 보인다. 알프스의 산울림으로 영감 받은 요들송, 신령의 알프호른 소리가 들린다.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이 같지 않아도 인간은 스위스 풍광만큼이나 아름다울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준 그들이 그리워지는 날이다.  이종운 / 수필가수필 회상 잔디밭 사과나무 스위스 주재 스위스 사람들

2022-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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