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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1000년 중국 황실 최고의 보물은?

삼겹살 한 점과 배추 한 포기, 1000년 동안 중국을 지배했던 왕조(송,원,명,청)의 보물 70만 점 중 사람들이 뽑은 최고 인기 품목이 겨우 요거라고?   육형석과 취옥백채. 어른 손바닥 2/3 크기의 고기 모양 옥돌, 그리고 비취색 옥으로 만든 백채가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에 가면 꼭 보아야 할 보물이라고 한다. 이 두 물건이 있는 전시실은 항상 관람객이 빼곡하다.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전시실 마냥.   육형석은 먹음직스러운 동파육처럼 보인다. 송나라 때 문장가 소동파가 만들기 시작했다는 푹 쫄인 돼지고기. 쫀득한 껍질과 밑에 붙은 부드러운 살코기, 대륙의 여유가 느껴지는 요리다. 돌로 돼지 껍질의 질감과 미감까지 만들어 낸 걸작은 걸작이다.     취옥백채. 백채는 배추. 한국에서 보는 통통한 김장용 배추는 아니다. 홀쭉한 복초이 비슷하다. 아래쪽은 하얀색 ,그리고 위쪽은 진초록이다. 하얀 쪽은 줄기, 그리고 초록색 부분은 잎사귀. 잎새에는 여치와 귀뚜라미까지 새겨져 있다. 살짝 데쳐서 고추장 찍어 먹고 싶을 만큼 사실적이다.     육형석은 청나라 황제가 가지고 놀던 물건이라고 한다. 아마도 장난기가 심했던 건륭제가 밤참을 먹고 싶을 때 환관에게 슬쩍 보여주던 것이 아닐까?  중국 시대극을 보면 중국 역사상 천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다는 명군 강희제나 그의 손자 건륭은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취옥백채, 이것은 청나라 말기 슬픈 역사적 맥락에서 나온 소품이다. 청나라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황제 광서제, 그는 황후 이외에 두 명의 비가 있었다. 그 중 한명 근비(瑾妃)가 혼수로 가져온 물건 중의 하나라는 설이 있다. 근비의 역사적 의미는 그것뿐.   광서제가 실제 사랑했던 여인은 진비(珍妃)다. 근비의 배다른 동생이다. 33년을 황제의 자리에 있었지만 실권이 없었던 광서제는 진비에게 “내가 청나라의 황제인데 너 하나를 못 지키겠나”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된 것인지 그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당시 중국의 최고 실권자 서태후는 진비를 우물에 빠뜨려 죽여버린다.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서태후와 광서제가 베이징을 버리고 서안으로 피난 갈 때 일이다. 광서제를 따라가겠다고 고집하던 진비는 우물 속으로 던져진다. 당시 24살. 지금도 자금성 한 구석에 그 우물과 그 슬픈 기록이 남아있다.     서태후는 중국 역사상 3대 악녀 중 한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광서제에게는 이모이자, 백모, 그리고 처 고모(광서제가 싫어했던 황후의 고모)도 된다. 서태후는 자기 아들 동치제가 후사가 없이 죽자 자신의 섭정을 연장하기 위해 어린 광서제를 아들로 입양한다. 그리고 광서제의 어머니로서 섭정.  죽을 때까지 50여 년을 중국의 최고 실권자로 군림한다.     서태후 밑에서 광서제는 기를 펴지 못한다. 개화파들과 한 번 중국의 운명을 걸고 서태후에게 대들다가 실패한 후 유폐 생활을 하다가 39세에 독살당한다. 1908년 그가 죽고 이틀 후 서태후도 죽는다. 서태후가 마지막 한 일은 광서제 이복동생의 아들 부의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만든 것이었다. 서태후와 광서가 죽고 3년 만에 청나라가 망한다.   비취백채는 역사의 그 은밀한 현장에 있었다. 그 사연들은 죽은 이의 혼백처럼 다 흩어지고 돌멩이 하나만 후세인들의 호기심대상으로 남아있다. 오늘도 청나라 황실의 삼겹살 한 점과 배추 한 포기를 감상하기 위한 인파가 밀린다. 나도 그중의 하나. 김지영 / 변호사이 아침에 중국 황실 황제 광서제 광서제 이복동생 청나라 황제

2023-10-08

[신 영웅전] ‘기도하는 손’의 뒤러

인간의 삶에 어디 양지만 있으랴. 서럽게 살던 젊은 시절에는 소망의 기도를 많이 하고, 먹고 살 만할 때는 감사의 기도를 많이 하고, 인생의 황혼에 서서는 참회의 기도를 많이 한다. 그 가운데에도 인생에는 소망의 기도를 드릴 날이 그치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그런 소망마저도 없는 사람이 많다.   믿음 생활을 하든 하지 않든 성화(聖畵) ‘기도하는 손’은 큰 감동을 준다. 그 가운데 헝가리 세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독일(신성로마제국)에 이민 가서 활동한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의 ‘기도하는 손’(Betende Hande)이 특히 유명하다.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그림은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바라보는 사도들의 손을 그린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그림의 모티프에 대해 여러 일화가 있다.   뒤러에게는 평생 고락을 함께한 친구 프란츠 나이슈타인이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가난해서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제비뽑기로 나이슈타인이 먼저 돈을 벌어 뒤러의 학비를 대고, 뒤러의 공부가 끝나면 뒤러가 번 돈으로 나이슈타인이 그림 공부를 하기로 약속했다.   친구가 보내준 학비로 공부한 뒤러는 천재성을 인정받아 황실 화가가 될 정도로 성공했다. 뒤러가 빚을 갚으러 찾아갔을 때 나이슈타인은 목수(일설엔 식당 종업원)로 일하면서 뒤러의 성공을 위해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 친구는 이미 오랜 잡일로 손이 굳어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미안하고 슬픈 마음에 뒤러가 그 친구의 손을 그린 것이 바로 ‘기도하는 손’이다. 화구도 없이 푸른 잉크로 그린 단색 데생이다. 지금도 오스트리아 빈의 알베르티나 박물관에 보관돼 500년 동안 관객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동양의 관포지교(管鮑之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있습니까.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기도 그림 공부 친구 프란츠 황실 화가

2023-05-31

강도, 대한제국 황실 후손 차량에 총격

대한제국 황실 후손 소유 차량을 운전하던 래퍼 J머니가 LA한인타운 럭셔리 아파트 앞에서 2인조 강도의 총격을 받고 중태에 빠졌다.   지난 19일 LA경찰국(LAPD)에 따르면 전날인 18일 오후 4시 15분쯤 LA한인타운 윌셔 불러바드와 후버 스트리트 인근 한 럭셔리 아파트(2801 선셋플레이스) 입구 앞에서 한 남성이 총격을 받았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LAPD 측은 사건 당시 아파트 콤플렉스 앞에서 강도 용의자 2명이 롤스로이스를 몰던 남성에게 접근해 총격을 가하고 롤렉스 시계 1개와 귀금속(gold chains) 3개를 빼앗은 뒤 도주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출동 현장에서 총격 피해자를 발견해 병원으로 이송했다. 피해자는 현재 중태로 알려졌다. 경찰은 피해 남성이 아파트 건물 앞에서 총격을 받았고, 총격에 사용된 총기는 권총 두 정이라고 밝혔다. 용의자 2명은 범행 후 귀중품을 강탈해 도주했다.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아파트 입구 앞을 차단하고 수사에 나섰다. 이 아파트는 최근 완공된 주상복합 럭셔리 아파트다.   ABC뉴스는 피해자가 타고 있던 롤스로이스 팬텀 세단 소유주는 대한제국 황실 후계자인 앤드루 이(38)씨라고 18일 보도했다.   20일 LAPD는 대한제국 황실 후손 소유 차량 안에서 총격을 당한 피해자는 애틀랜타의 래퍼 J머니(J Money)라고 밝혔다. 이씨 소유의 롤스로이스 팬텀을 J머니가 빌린 것으로 LAPD는 추정하고 있다. 이씨는 지난달 28일 래퍼 활동명 ‘킹 리’로 J머니와 함께 ‘던잇올(Dun It All)’이라는 음원을 발매하는 등 그와 친분을 쌓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현재 용의자들을 추적하는 중이며 목격자 제보(213-382-9102)를 받고 있다.       이씨는 대한제국 황실 후손으로 지난 2018년 고종 황제 손자이자 의친왕의 10번째 아들인 이석 황실문화재단 이사장 후계자로 지명됐다. 황실 후계자로 지명된 이씨는 VPN 서비스를 제공하는 미 IT기업 PIA(Private Internet Access)와 런던 트러스트 미디어(London Trust Media) 설립자다. 김형재·홍희정 기자대한제국 강도 대한제국 황실 이석 황실문화재단 출동 총격

2022-11-20

무장강도 LA한인타운서 대한제국 황실 후손 차량에 총격

대한제국 황실 후계자 소유의 차량 운전자가 LA한인타운 럭셔리 아파트 앞에서 2인조 강도의 총격을 받고 중태에 빠졌다.   19일 LA경찰국(LAPD)에 따르면 전날 오후 4시15분쯤 LA한인타운 윌셔 불러바드와 후버 스트리트 인근 한 럭셔리 아파트(2801 선셋 플레이스) 입구 앞에서 한 남성이 총격을 받았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LAPD 측은 사건 당시 아파트 컴플렉스 앞에서 강도 용의자 2명이 롤스로이스를 몰던 남성에게 접근해 총격을 가하고 롤렉스 시계 1개와 귀금속(gold chains) 3개를 빼앗은 뒤 도주했다고 전했다. 경찰은 출동 현장에서 총격 피해자를 발견해 병원으로 이송했다. 피해자는 현재 중태로 알려졌다. 경찰은 피해 남성이 아파트 건물 앞에서 총격을 받았고, 총격에 사용된 총기는 권총 두 정이라고 밝혔다. 용의자 두 명은 범행 후 귀중품을 강탈해 도주했다.      사건 직후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아파트 입구 앞을 차단하고 수사에 나섰다. 이 아파트는 최근 완공된 주상복합 럭셔리 아파트다.   한편 ABC뉴스는 피해자가 타고 있던 롤르로스이 팬텀 세단 소유주는 앤드류 이(38)씨라고 보도했다. 19일 LAPD 측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피해자 이름을 아직 밝힐 순 없지만, 분명한건 피해자는 황실과 전혀 관련이 없다"라고 말했다. 앤드류 이씨는 대한제국 황실 후손으로 지난 2018년 고종 황제 손자이자 의친왕의 10번째 아들인 이석 황실문화재단 이사장 후계자로 지명됐다. 황실 후계자로 지명된 이씨는 VPN 서비스를 제공하는 미국 IT기업 PIA(Private Internet Access)와 런던 트러스트 미디어(London Trust Media) 설립자다.   LAPD 올림픽 경찰서는 목격자 제보(213-382-9102)를 받고 있다.       김형재, 홍희정 기자 김형재, 홍희정 기자무장강도 la한인타운 대한제국 황실 la한인타운 럭셔리 황실 후계자

2022-11-19

장엄하여라 우국의 황혼이여

장엄하여라 우국의 황혼이여 /  김건흡 MDC시니어센터회원 / 8월이 가고 있다. 15일은 광복절이다. 무엇으로부터 광복인가. 일본 압제로부터 해방이다. 8월 29일이 무슨 날인지 아는가. 국치일이다. 8월이 오면, 광복절은 생각하지만, 국치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왜 그럴까. 부끄럽기 때문에, 내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먼지를 털고 국치일을 역사의 창고에서 불러내야 한다. 와신상담. 1년에 한 번이라도 쓰디쓴 쓸개를 꺼내어 핥아 보아야 한다. 그것이 국민된 도리다. 기억하지 않으면 역사는 되풀이된다.   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을, 정미 7조약으로 내정감독권을 뺏은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려는 계획을 치밀하게 추진했다. 1910년 7월 23일 신임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와 총리대신 이완용은 한일합방에 관한 협의를 시작했다. 8월 16일 데라우치 통감은 이완용에게 합방조약안을 내밀고 수락을 독촉했다. 이틀 후 각의가 열리고 22일에는 어전회의가 열렸다. 그날 이완용과 데라우치는 합방조약에 조인했다. 일주일 후 마지막 황제 순종은 대한제국과 일본의 합방조약을 발표했다. 그날 한국 정부에 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제에 양여할 것을 규정한 합방조약에 따라 조선왕조는 27대 519년 만에 막을 내렸다. 한국은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데라우치는 자신의 일기에서 이때의 소회를 이렇게 적었다. (1910년 8월 22일) “오후 4시, 한국 합병의 조약을 통감 관저에서 조인하여 마쳤다. 합병문제는 이와 같이 용이하게 조인을 끝냈다. 하하하!” 원래 이토 히로부미가 작성해온 을사늑약은 4개조 뿐이었다. 조약안을 내밀자 고종은 대신들에게 떠넘겼고, 대신들은 황실의 안녕을 보장하는 조항을 넣자고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 자리에서 제 5조에 “일본은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 유지를 보증한다”는 내용을 써넣었다. 주권을 빼앗겨도 황실만 보호하면 된다는 태도였다. 병합조약도 마찬가지다. 8개 조 중 제1조와 2조는 한국 황제는 한국에 관한 통치권을 양여한다는 것과 일본 황제는 양여를 수락한다는 내용이고, 제 8조는 공포일로부터 시행된다는 조항이다. 나머지 5개 조항은 무엇 무엇을 해주겠다는 내용이다. 즉, 황제 태황제 황태자를 비롯한 황실과 황족, 그리고 공훈이 있는 자 등에게 그 직위에 맞는 대우와 세비 및 은사금 지급 등을 약속한 내용이다. 일제는 약속을 지켰다. 순종 황제는 왕으로, 고종은 이태왕(李太王)으로 봉해졌고, 황실을 비롯하여 전현직 대신들 76명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은사금도 지급했다. 이들 중 2명만 작위를 거부했고, 6명은 후에 반납했다. 나머지는 귀족 신분으로 살았다. 또 나라가 망하기 3일 전인 1910년 8월 26일, 순종 황제는 이완용과 궁내부대신 민병석에게 대한제국 최고훈장인 금척대수훈장을 수여했다. 또 황후 윤 씨는 황실 및 종친, 이완용의 부인 등 40여명에게 서봉훈장을 수여했다. 500년 사직이 망하는 마지막 순간, 군주와 대신들은 나라를 넘겨준 공로로 훈장을 주고받은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날 이후 망국의 치욕을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가 적지 않았다. 죽음은 흔히 치열한 절망 쯤으로 치부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은 오히려 목숨과 자기표현을 맞바꾼 장엄한 선택이 아니겠는가. 항거든 분노든 그것은 영혼을 위해 육체를 버리는 일인 까닭이다. “나는 죽어야 할 이유가 없지만, 다만 국가나 선비를 기른지 500년이 되어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난국에 죽지 않는다면 오히려 애통하지 않겠는가.”9월 10일 전남 구례에서 망국의 소식을 접한 한 유생이 유서와 절명시 네 수를 남기고 아편덩이를 삼켜 목숨을 끊었다. 한말의 대시인 매천(梅天) 황현(黃玹)이었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마감하기 전에 성찰한 것은 지식인의 삶이었다. 절명시는 모든 글 중에서 가장 비장한 제목을 가진 작품이라고 말할 만하다. “이 세상에서 글 아는 사람 되기는 어렵기만 하다”는 마지막 구절은 나라가 속절없이 무너진 상황에 부딪친 지식인의 아픔과 고뇌를 함축하고 있다.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실존적 결단이 뒤따라야 하는 일이다. 그것은 행위에 대한 확신을 전제로 하지만, 그 행위의 결과가 특정한 성취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불분명한 결과를 위해 존재의 전부를 버리는 고독한 선택이다. 따라서 자정(自靖)이란 그 방식이 어떠하든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독을 삼키든 곡기를 끊든 어떤 방법도 더 가볍거나 수월하지 않다.  그럼에도 많은 지사가 스스로 목숨을 버려 일제의 침략에 저항했다. 나라를 구하려고 목숨 바쳐 싸운 이들도 있었다. 일반 백성이었다. 이들은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항전했다. 무기는 기껏해야 화승총이나 사냥총이었다. 이들은 근대식 무기를 가진 일본군과 싸워 이기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일제와 싸웠고, 수만 명이 죽었다. 조선이, 아니 대한제국이 왕의 나라라면 마땅히 임금과 그 일가가 망국의 책임과 죄업을 져야 할 것이로되 이 씨 성의 왕족 중에 스스로 책임을 다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을사년(1905) 이래 경술년을 지나면서 선비 등 많은 분들이 스스로 왕토에 사는 신민의 도리를 다했다.   “아! 이제 조선은 명실상부하게 멸망했다. 다시는 문자가 없고, 다시는 군주가 없고, 다시는 정부가 없고, 다시는 민족이 없고 거꾸러진 치욕적인 역사의 흔적만 남게 되었다. 나는 눈물이 눈썹에 넘쳐흐름을 금치 못하겠다. 이제 조선은 끝났다. 지금부터 세상에 조선의 역사가 다시 있을 수 없고 오직 일본 번속 일부분으로서의 역사만 있을 뿐이다.”눈물의 주인공은 조선 백성이 아니다. 눈물은 청나라 말기 변법유신파의 지도자였던 량치차오(梁啓超)의 뺨에 흘렀다. 량치차오는 캉유웨이(康有爲)의 제자로서 무술변법운동을 주도했으며, 신해혁명과 5·4운동 등 중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장면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 실천적 지식인이다. 신채호 박은식 등 조선의 애국계몽주의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왜 남의 나라 일에 눈물까지 흘리며 애통해했을까. 이 눈물은 순수한 의미의 동정이 아니다. 실은 청나라의 속국이었던 조선을 일본에 빼앗긴 데 대한 상실감이 더 짙게 배어있다. 량치차오에게 조선은 서구와의 대비 속에서 중국을 비춰볼 수 있는 특별한 타자로서 미래 중국의 모습일 수도 있는 존재였다. 당시 중국이 위기를 겪으면서 자칫 조선과 같은 비극적인 운명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인식하에 조선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드러냈다. 〈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는 중국인이 쓴 통한의 조선망국 보고서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것은 괴롭다. 조선에 대한 청나라 최고 지식인의 비뚤어진 인식을 대하는 것이 분통하고, 일제 제국주의의 호구(虎口)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간 우리 선조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는 것이 화가 난다. 량치차오는 조선이 안으로부터 무너져내려 망했다고 진단한다.   조선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이어 가던 그가 거의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평가한 인물은 독립운동가들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와 1910년 한일합방 때 국치의 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 금산군수 홍범식에 대해서는 긍정을 넘어 찬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 그는 “무릇 조선 사람 1000만 명 중에서 안중근 같은 이가 또한 한둘쯤 없지는 않았다. 내가 어찌 일률적으로 멸시하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유의 사람은 본래 1억 명 중에서 한둘에 지나지 않으며, 설령 한두 사람이 있더라도 또한 사회에서 중시되지 않는다. 대체로 조선 사회에서는 음험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자가 번성하는 처지에 놓였고, 정결하고 자애하는 자는 쇠멸하는 처지에 놓였다 .”고 말한다. 뼈아픈 지적이다.  한국인은 위기에 뭉치는 민족이라고 한다. 그렇다. 하지만 구한말 위기에서는 뭉치지 못했다. 그리고 나라를 잃었다. 당파적 분열이 임계점을 넘어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조선의 멸망으로부터 고작 10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왜 우리는 이 과오를 반복하려 드는 것일까. 우리 시대는 과거의 역사로부터 대체 무엇을 배운 걸까.  8월이 지나간다. 광복절 다음에 국치일이 온다. 금년 8월은 광복절과 국치일을 한 번씩 더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역사를 망각한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신채호 선생의 말이다.     김지민 기자우국 황혼 한국 황제 한국 황실 데라우치 통감

2022-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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