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엄하여라 우국의 황혼이여
장엄하여라 우국의 황혼이여/
김건흡
MDC시니어센터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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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이 가고 있다. 15일은 광복절이다. 무엇으로부터 광복인가. 일본 압제로부터 해방이다. 8월 29일이 무슨 날인지 아는가. 국치일이다. 8월이 오면, 광복절은 생각하지만, 국치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왜 그럴까. 부끄럽기 때문에, 내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먼지를 털고 국치일을 역사의 창고에서 불러내야 한다. 와신상담. 1년에 한 번이라도 쓰디쓴 쓸개를 꺼내어 핥아 보아야 한다. 그것이 국민된 도리다. 기억하지 않으면 역사는 되풀이된다.
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을, 정미 7조약으로 내정감독권을 뺏은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려는 계획을 치밀하게 추진했다. 1910년 7월 23일 신임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와 총리대신 이완용은 한일합방에 관한 협의를 시작했다. 8월 16일 데라우치 통감은 이완용에게 합방조약안을 내밀고 수락을 독촉했다. 이틀 후 각의가 열리고 22일에는 어전회의가 열렸다. 그날 이완용과 데라우치는 합방조약에 조인했다. 일주일 후 마지막 황제 순종은 대한제국과 일본의 합방조약을 발표했다. 그날 한국 정부에 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제에 양여할 것을 규정한 합방조약에 따라 조선왕조는 27대 519년 만에 막을 내렸다. 한국은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데라우치는 자신의 일기에서 이때의 소회를 이렇게 적었다. (1910년 8월 22일) “오후 4시, 한국 합병의 조약을 통감 관저에서 조인하여 마쳤다. 합병문제는 이와 같이 용이하게 조인을 끝냈다. 하하하!”
원래 이토 히로부미가 작성해온 을사늑약은 4개조 뿐이었다. 조약안을 내밀자 고종은 대신들에게 떠넘겼고, 대신들은 황실의 안녕을 보장하는 조항을 넣자고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 자리에서 제 5조에 “일본은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 유지를 보증한다”는 내용을 써넣었다. 주권을 빼앗겨도 황실만 보호하면 된다는 태도였다. 병합조약도 마찬가지다. 8개 조 중 제1조와 2조는 한국 황제는 한국에 관한 통치권을 양여한다는 것과 일본 황제는 양여를 수락한다는 내용이고, 제 8조는 공포일로부터 시행된다는 조항이다. 나머지 5개 조항은 무엇 무엇을 해주겠다는 내용이다. 즉, 황제 태황제 황태자를 비롯한 황실과 황족, 그리고 공훈이 있는 자 등에게 그 직위에 맞는 대우와 세비 및 은사금 지급 등을 약속한 내용이다. 일제는 약속을 지켰다. 순종 황제는 왕으로, 고종은 이태왕(李太王)으로 봉해졌고, 황실을 비롯하여 전현직 대신들 76명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은사금도 지급했다. 이들 중 2명만 작위를 거부했고, 6명은 후에 반납했다. 나머지는 귀족 신분으로 살았다. 또 나라가 망하기 3일 전인 1910년 8월 26일, 순종 황제는 이완용과 궁내부대신 민병석에게 대한제국 최고훈장인 금척대수훈장을 수여했다. 또 황후 윤 씨는 황실 및 종친, 이완용의 부인 등 40여명에게 서봉훈장을 수여했다. 500년 사직이 망하는 마지막 순간, 군주와 대신들은 나라를 넘겨준 공로로 훈장을 주고받은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날 이후 망국의 치욕을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가 적지 않았다. 죽음은 흔히 치열한 절망 쯤으로 치부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은 오히려 목숨과 자기표현을 맞바꾼 장엄한 선택이 아니겠는가. 항거든 분노든 그것은 영혼을 위해 육체를 버리는 일인 까닭이다. “나는 죽어야 할 이유가 없지만, 다만 국가나 선비를 기른지 500년이 되어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난국에 죽지 않는다면 오히려 애통하지 않겠는가.”9월 10일 전남 구례에서 망국의 소식을 접한 한 유생이 유서와 절명시 네 수를 남기고 아편덩이를 삼켜 목숨을 끊었다. 한말의 대시인 매천(梅天) 황현(黃玹)이었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마감하기 전에 성찰한 것은 지식인의 삶이었다. 절명시는 모든 글 중에서 가장 비장한 제목을 가진 작품이라고 말할 만하다. “이 세상에서 글 아는 사람 되기는 어렵기만 하다”는 마지막 구절은 나라가 속절없이 무너진 상황에 부딪친 지식인의 아픔과 고뇌를 함축하고 있다.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실존적 결단이 뒤따라야 하는 일이다. 그것은 행위에 대한 확신을 전제로 하지만, 그 행위의 결과가 특정한 성취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불분명한 결과를 위해 존재의 전부를 버리는 고독한 선택이다. 따라서 자정(自靖)이란 그 방식이 어떠하든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독을 삼키든 곡기를 끊든 어떤 방법도 더 가볍거나 수월하지 않다. 그럼에도 많은 지사가 스스로 목숨을 버려 일제의 침략에 저항했다. 나라를 구하려고 목숨 바쳐 싸운 이들도 있었다. 일반 백성이었다. 이들은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항전했다. 무기는 기껏해야 화승총이나 사냥총이었다. 이들은 근대식 무기를 가진 일본군과 싸워 이기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일제와 싸웠고, 수만 명이 죽었다. 조선이, 아니 대한제국이 왕의 나라라면 마땅히 임금과 그 일가가 망국의 책임과 죄업을 져야 할 것이로되 이 씨 성의 왕족 중에 스스로 책임을 다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을사년(1905) 이래 경술년을 지나면서 선비 등 많은 분들이 스스로 왕토에 사는 신민의 도리를 다했다.
“아! 이제 조선은 명실상부하게 멸망했다. 다시는 문자가 없고, 다시는 군주가 없고, 다시는 정부가 없고, 다시는 민족이 없고 거꾸러진 치욕적인 역사의 흔적만 남게 되었다. 나는 눈물이 눈썹에 넘쳐흐름을 금치 못하겠다. 이제 조선은 끝났다. 지금부터 세상에 조선의 역사가 다시 있을 수 없고 오직 일본 번속 일부분으로서의 역사만 있을 뿐이다.”눈물의 주인공은 조선 백성이 아니다. 눈물은 청나라 말기 변법유신파의 지도자였던 량치차오(梁啓超)의 뺨에 흘렀다. 량치차오는 캉유웨이(康有爲)의 제자로서 무술변법운동을 주도했으며, 신해혁명과 5·4운동 등 중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장면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 실천적 지식인이다. 신채호 박은식 등 조선의 애국계몽주의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왜 남의 나라 일에 눈물까지 흘리며 애통해했을까. 이 눈물은 순수한 의미의 동정이 아니다. 실은 청나라의 속국이었던 조선을 일본에 빼앗긴 데 대한 상실감이 더 짙게 배어있다. 량치차오에게 조선은 서구와의 대비 속에서 중국을 비춰볼 수 있는 특별한 타자로서 미래 중국의 모습일 수도 있는 존재였다. 당시 중국이 위기를 겪으면서 자칫 조선과 같은 비극적인 운명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인식하에 조선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드러냈다. 〈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는 중국인이 쓴 통한의 조선망국 보고서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것은 괴롭다. 조선에 대한 청나라 최고 지식인의 비뚤어진 인식을 대하는 것이 분통하고, 일제 제국주의의 호구(虎口)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간 우리 선조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는 것이 화가 난다. 량치차오는 조선이 안으로부터 무너져내려 망했다고 진단한다.
조선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이어 가던 그가 거의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평가한 인물은 독립운동가들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와 1910년 한일합방 때 국치의 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 금산군수 홍범식에 대해서는 긍정을 넘어 찬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 그는 “무릇 조선 사람 1000만 명 중에서 안중근 같은 이가 또한 한둘쯤 없지는 않았다. 내가 어찌 일률적으로 멸시하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유의 사람은 본래 1억 명 중에서 한둘에 지나지 않으며, 설령 한두 사람이 있더라도 또한 사회에서 중시되지 않는다. 대체로 조선 사회에서는 음험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자가 번성하는 처지에 놓였고, 정결하고 자애하는 자는 쇠멸하는 처지에 놓였다 .”고 말한다. 뼈아픈 지적이다. 한국인은 위기에 뭉치는 민족이라고 한다. 그렇다. 하지만 구한말 위기에서는 뭉치지 못했다. 그리고 나라를 잃었다. 당파적 분열이 임계점을 넘어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조선의 멸망으로부터 고작 10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왜 우리는 이 과오를 반복하려 드는 것일까. 우리 시대는 과거의 역사로부터 대체 무엇을 배운 걸까. 8월이 지나간다. 광복절 다음에 국치일이 온다. 금년 8월은 광복절과 국치일을 한 번씩 더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역사를 망각한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신채호 선생의 말이다.
김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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