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미주 첫 한인촌 역사 샌프란시스코서 조명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 한인들이 1900년대 초기 한인 이민자의 삶과 도산 안창호 선생의 발자취를 되새겼다.   샌프란시스코베이지역한인회(회장 김한일)는 지난달 29일 한인회관에서 ‘파차파 캠프와 도산 선생의 발자취’ 강연회와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날 북가주 한인 100여명은 1900년대 초기 한인 이민선조들의 정착기와 독립운동, 한인사회 역사와 업적 등을 배웠다. 특히 UC리버사이드 산하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장인 장태한(사진) 박사를 초청해 도산 안창호 선생의 활약상과 당시 리버사이드에 세워진 한인 노동자들의 숙소 겸 공동체 타운인 파차파캠프의 의미를 짚어봤다.   장태한 박사는 “미주 한인들의 이민 역사와 선조들의 활동을 북가주 한인사회에 알리게 돼 기쁘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현지 사회도 한인사회의 역사와 업적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한일 회장은 “이번 강연회와 전시회를 통해 이민 선조들이 강조한 한민족의 자긍심과 공동체 정신을 가슴에 새기는 소중한 시간을 얻었다”고 말했다.   한편 샌프란시스코베이지역한인회는 7월 31일까지 파차파 캠프 전시회를 통해 이민선조의 활약상, 도산 선생의 업적 관련 자료를 알리고 사진을 전시한다.  김형재 기자 kim.ian@koreadaily.com게시판 한인촌 역사 조명 박사 역사 미주 한인들

2024-07-04

'미주 최초 한인타운' 발굴이 큰 의미

파차파 캠프는 단순한 타운 아니고 미주 한인 독립운동 중심지 역할 도산 안창호의 업적 재조명도 보람 진보와 보수 통합하는 지도력 갖춰 연재에 보내준 독자들 성원에 감사 먼곳서 파차파 찾는 한인들도 많아 도산 안창호가 1904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리버사이드로 이주하여 개척한 미국 최초, 그리고 그 당시 최대의 한인타운인 파차파 캠프 또는 도산 공화국에 관한 연재를 지난 35주 동안 무사히 마쳤다. 우선 매주 월요일 전면을 할애해 준 중앙일보에 감사드린다. 지난 35주 동안 연재하면서 많은 분들께서 "잘 읽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자료들을 찾으셨나요?"라며 격려와 관심을 보여 주었다. 대한인국민회 주최 세미나에서도 초청을 받아 파차파 캠프 특강시간도 가졌고, 멀리 샌디에이고 독자들이 도산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리버사이드를 방문하여 도산의 동상이 있는 곳과 옛 파차파 캠프 지역을 둘러보기도 했다. 이 연재를 통해 초기 한인 사회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페이스북에도 연재했는데 독자들이 "다음 연재 기대할께요" "교수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열정적인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등 격려의 글들을 남겼다. 개인적으로 참 보람 있는 연구 작업이었다. 새로운 자료 하나 하나를 발굴하면서 희열을 느꼈고 초기 한인 이민자들의 숨결을 느끼는 듯했다. 역사는 "객관적 자료 또는 사료"가 있어야 증빙되지만 또한 중요한 것은 연구자의 관점이다. 역사는 역사 학자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연구 작업의 가장 큰 의미는 단연 미국 최초의 한인 타운을 발굴했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하와이 또는 샌프란시스코에 한인 타운이 최초로 형성됐을 것이라는 통설을 깨고 리버사이드에 미주 최초의 한인 타운이 형성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 자료로 증명했다는 큰 의미가 있다. 또한 한인들이 모여 사는 타 지역과는 달리 리버사이드 도산 공화국 또는 파차파 캠프는 가족 중심의 한인 타운이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또한 그것은 우연이 아닌 도산 안창호와 공립협회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도 발굴했다. 또한 파차파 캠프는 단순히 미국 최초의 한인 타운이 아닌, 초기 미주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는 것도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1905년 공립협회 창립의 중심 역할을 한 인물들 중 상당수가 파차파 캠프에 거주했으며, 1906년 신민회가 파차파 캠프에서 발기되었다. 또한 1907년 독립운동을 위해 한국으로 건너간 도산 안창호가 1911년 리버사이드에 다시 돌아온 후, 파차파 캠프에서 대한인국민회 북미 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이 회의에 최초로 북미 지방회장 전원이 참석했다는 놀라운 사실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도산 안창호와 부인 이혜련 여사 그리고 이혜련 여사의 외오촌숙인 김인수가 초기 파차파 캠프 형성에 큰 기여를 했으며, 김인수의 장남 김용련과 그의 가족들은 리버사이드에 계속 거주했다. 김용련의 막내 딸 바이올렛 김은 1922년 리버사이드에서 출생했는데 UCLA를 졸업하고 줄곧 리버사이드에 거주하면서 교사가 되었다가 1984년 은퇴했다. 올해 4월 23일 별세했다. 다행히 그녀가 소장하고 있던 사진과 자료들을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에 기증했는데 이 자료들을 분석할 예정이다. 1905년 도산 안창호는 백인 농장주인 코널리어스 럼지로부터 1500달러를 빌려 한인 노동국, 즉 직업 알선소를 설립했다. 한인 노동국 설립 후 취업의 문호가 열리자 많은 한인 노동자들이 파차파 캠프로 이주해 왔다. 럼지는 뉴욕에서 거주하다가 겨울이 되자 따뜻한 리버사이드에 방문하여 현재의 미션 인 호텔에 머물렀다가 1901년에는 리버사이드로 이주해 왔다. 1911년 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리버사이드에 거주하면서 한인, 멕시칸, 그리고 일본인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는 일본인들을 집 하인으로 고용했는데 1907년 일본인 하인들끼리 시기하여 총으로 상대방을 죽이고 자살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리버사이드는 동부의 부자들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려고 이주해 와 정착하여 만든 도시이다. 도산 안창호의 일대기에는 도산 안창호가 "하변"에서 잠시 일했던 것으로만 취급되었다. 도산 안창호의 미주에서의 활동은 주로 샌프란시스코 또는 로스앤젤레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이번 연구를 통해서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 또는 도산 공화국이 초기 미주 한인 사회의 중심이었다는 것이 새롭게 밝혀진 것이다. 도산 안창호의 일대기에 많은 부분 빠져 있어 새로운 사실들을 보충할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근현대사 그리고 독립운동사에도 수정 및 보완이 필요하다. 도산 안창호는 주로 점진주의자, 개량주의자, 또는 기독교인 등의 수식어로 표현되고 있다. 보수적인 성향의 기독교인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연구를 통해 도산 안창호는 진보와 보수를 통합하는 지도자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필요할 때는 무력항쟁도 지지했으며 사회주의자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함께 할 수 있다는 통합론자였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이번 연구를 통해 리버사이드시는 옛 파차파 캠프 거주 지역을 리버사이드시 문화 관심지 1호로 지정했다. 도산 안창호의 막내 아들 랄프 안의 적극적인 지지와 한인 사회의 관심과 지지로 이루어낸 쾌거이다. 그러나 도산 안창호의 외손자 필립 안은 지금까지도 필자가 거짓말하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반대하고 있다. 도산 안창호의 업적을 기리는 연구이며 사업인데 왜 반대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중앙일보에 지난 2017년 9월 25일부터 2018년 5월 21일까지 35주 동안 연재한 파차파 캠프 스토리는 이번 여름 책으로 출판될 예정이다. 책이 출판된 후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모여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공립신보와 신한민보에서 귀중한 자료들을 찾아 준 고려대학교의 주혜린과 윤지아 대학원생에게 고맙고 지난 35주 동안 필자의 글을 읽어주고, 격려해 주고, 관심을 보여준 독자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끝>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2018-05-28

가족 두고 돈벌러 타지 다녀오기도

아들 윌리암은 포병 소위 활약 종군 기록인 '청년용사록' 올라 1943년엔 워싱턴 주립 대학서 군인들에게 한국어 가르치기도 ▶김씨리는 어머니 1926년 1월 21일에 사망한 김씨리(Kimpsie Lee)는 리운경의 어머니이다. '신한민보' 1926년 1월 28일자에는 "사망. 리운경씨 모친(라성). 1월 19일 별세"라고 나타나 있다. 리운경은 1926년 당시 LA에 있었고 리운경 모친도 '나성'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리버사이드 에버그린 묘지에서 "리운경 모친묘"를 찾았는데 당시 리운경 가족들의 본거지는 리버사이드였던 것 같다. 딸 이순희는 1925년에 나성이 아닌 리버사이드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자녀는 리버사이드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를 비롯한 일부 가족들은 사회활동이나 노동을 위해 주거지인 '리버사이드'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신한민보' 1943년 6월 10일자 내용이다. "이윌리암 군의 승직. 리버사이드 바인 스추리에 거류하는 리운경씨와 동부인의 령윤 윌리암 군은 그간 오드 캐롤리나 주 떼비스 영문에 있는 항공 포병학교에서 공부하더니 지난 5월 13일 그 학교를 졸업하는 동시에 연안 포병대 소위로 승직하였다. 그는 잠깐 동안 휴가를 얻어 귀성하였다가 새로 임명을 받은 곳으로 가서 새로운 직무에 복무한다더라." 1918년 11월에 대한인국민회 리버사이드 지방회가 근처 바인 스트리트(Vine Street)로 이전했는데 이운경은 1918년부터 1919년까지 리버사이드 지방회에서 대의원으로 일했었다. 그러므로 바인 스트리트는 리운경에게 친숙한 곳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리운경은 1943년에 세월이 흘러서 나이가 들자 다시 가족들이 살던 리버사이드로 돌아왔던 것 같다. 리운경이 죽자, 본거지인 리버사이드에 묻혔을 것이다. ▶리운경의 자녀들 리운경이 리버사이드에 살았던 1918년에 딸 이순희는 리버사이드 국어학교 갑반이었다. 또한 을반의 리윌링, 리에디, 리이시다, 병반의 리계선 모두 리운경의 자녀이다. 1917년 리버사이드에서 리윌리엄은 그랜쓰 관립학교 1학년을 다녔고, 리순희는 로학교 3학년을 다녔다. 모두 소학교이다. 리운경은 새크라멘토, LA로 이주 했다가 말년은 리버사이드에서 보낸다. 리운경은 1920년에는 북가주 새크라멘토에서 1400에이커의 농원을 류명선 등 6인 공동으로 운영했다. '신한민보' 1920년 8월 26일자는 "북가주 순행기. 리운경 씨의 주장하는 농원에 당도하니 이곳은 리운경 류명선 씨 등 6인의 10분 병작하는 곳이라…"고 적고 있다. 1923년에는 LA로 이주하여 리영수와 합자하여 식물 상점을 경영했다. 1923년 9월 27일자는 "남가주 동포 심방"이라는 기사에서 리운경의 일터와 사택이 각각 다른 도시에 있었음이 나타난다. 리운경은 LA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했고 사택은 리버사이드에 있었다. '신한민보' 1923년 9월 27일자 내용이다. "남가주 동포 심방. (제2면에서 이어옴) 박기란씨의 그로셰리와 홍치범씨의 그로셰리와 리운경씨의 그로셰리와 차정석 한승은 양 씨의 동업인 실과상점과 송현주씨의 자사업인 그로셰리를 차례로 심방하니 이곳이 28일의 심방의 마지막이오, 상업처소의 삼방도 마지막이라. 느즉하여 처소에 돌아와 밤을 지나고 그 익일 즉 29일 아침에 박일우씨와 동반하여 스테지를 잡아타고 나성에서 약 30마일 가량 되는 휫들리어에 당도하니 이곳은 윤필건 리전 량씨의 실과 상점이라. … 리버사이드에 당도하여 구정섭씨의 실과 상점 김용련 리운경 구정섭씨의 사택을 일일히 심방하고 김태선씨의 유숙처를 심방하였으며 박영섭씨의 유숙처도 심방하고 동일 하오 7시 30분에 스테지를 잡아타고 LA에 돌아와서 밤을 지나니 이날은 즉 초2일 예뱃날이라." 1924년에 LA에서 중앙 총회장 최진하씨를 위한 환영회를 열었다. 이때 이운경의 요릿집에서 만찬회가 개최되었고 특별히 청요리를 대접하였다. '신한민보' 1924년 8월 28일자는 "LA 지방회에서 총회장 환영회. 제2회 만찬회의 성황, 다년간 적공이 많은 총회장 최진하 씨를 위하여 만찬회를 17일 하오 7시 35분에 윤필건, 리운경 양 씨의 동업인 찬관에서 개최하였는데 특별히 준비한 청요리로써 빈주가 즐겁게 나누고 해산하였다더라"고 적고 있다. 리운경은 1934년 LA에 있는 여자애국단 신임원 취임식에서 리운경이 축사를 하기도 했다. 딸 이순희는 1925년에 리버사이드 중학 4년생으로 나타난다. 아버지 리운경이 LA에 있었던 1925년에도 이순희는 리버사이드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리버사이드가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신한민보' 1925년 5월 21일자에 "미주 한인 대중소 학생. 리순희 하변 중학…4년생"으로 나타난다. 1927년 이순희는 나성 중학교에 다녔고, 리웰리는 팔리 중학에 다녔다. 리웰리는 이운경의 아들 리윌리엄일 수도 있다. 모두 학년은 알 수 없다. 리운경의 아들 이윌리엄은 1943년에 종군했다. '신한민보' 1943년 1일 14일자 보도 내용이다. "종군 한인 청년회. 본보는 재미 한인 제2세들이 미한 양국 동원령하에 무장을 떨치고 북미 대륙에 종군한 '청년 용사록'을 만들기 위하여 나성으로부터 각지에서 종군한 제2세의 방명을 차례로 게재하겠고, 재미 한족 연합 위원회 집행부 사무과에서는 이 기록에 근거하여 '종군기'를 만들어 국민 총회관 벽상에 걸고 용사 '스타―'를 부처 광영의 숫자를 표시합니다. 리윌리암 군(리운경 씨 동부인의 령윤), 손폴(손숭조 씨의 령윤), 현재호(현승길 씨 동부인의 3자), 현재윤(현승걸 씨 동부인의 4자), 김쪼(김영근 씨 동부인의 령윤) 이상 1백 10인." 1943년에 리운경은 리버사이드 바인 스트리트에 살았다. 그의 아들 이윌리엄은 포병대 소위로 승직했다. '신한민보' 1943년 6월 10일자는 "이윌리암 군의 승직. 리버사이드 바인 스추리에 거류하는 리운경 씨와 동부인의 령윤 윌리암 군은 그간 오드 캐롤니나 주 떼비스 영문에 있는 항공 포병학교에서 공부하더니 지난 5월 13일 그 학교를 졸업하는 동시에 연안 포병대 소위로 승직하였다. 그는 잠깐 동안 휴가를 얻어 귀성하였다가 새로 임명을 받은 곳으로 가서 새로운 직무에 복무한다더라"고 보도했다. 1943년 리운경은 워싱턴 주립 대학에서 군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는데 그 임무를 마치고 LA로 돌아왔다. '신한민보' 1943년 10월 7일자는 "지방 통신. 와싱톤 주립 대학에서 군인들에게 한어를 교수하던 리운경 씨는 그 임무를 마치고 지난 2일에 나성에 래도하여 체류중이라더라"라고 게재했다. <끝>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2018-05-20

땅 매입해 농장 경영…사회 활동도 적극 참여

1910년 인구센서스에 W. K Lee 6명 가족 기록 샌라파엘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살아 1917년까지 레드랜드 지방회서 서기로 근무 회관 건립 후 매주일 두번 씩 모여 성경 강론 도산의 헌신과 노력에 감사하는 연설자로 나서 지진 났을 때는 중국인 일본인도 공립관에 피신 ▶리운경의 본명 리운경의 본명은 리원길인데 1910년 리운경으로 개명했다. 신한민보 1910년 1월 12일자에 "개명 광고. 본인의 성명 이원길(李元吉)을 고쳐 이운경(李雲卿)이라 행세하오니 동포들께서는 조량하시압. 1월 10일 이운경 고백"이라고 보도됐다. 1910년 인구 센서스 파차파 캠프 거주자 명단에 따르면 W. K. 리(W K Lee)아래에 총 6명이 있다. 미시즈 W. K. 리(Mrs. W K Lee), 숨니 리(Shumney Lee), 윌리엄 리(William Lee), 에스더 리(Esther Lee), 에디 리(Addie Lee), 캐더린 리(Kathrine Lee), 김씨 리(Kimpsi Lee)이다. 김씨 리는 이운경의 어머니이고 미시즈 W. K. 리는 이운경의 부인이다. 나머지는 이운경의 자녀들인데, 리버사이드 국어학교를 다녔던 리순희, 리윌링, 리이시다, 리에디, 리계선이다. ▶샌라파엘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동 1905년 이원길(이운경)은 샌라파엘(San Rafael)에 있었다. 공립신보사를 위하여 5원을 연보했다. 공립신보 1905년 12월 6일자는 "最受新聞. 산르에팰에 류하는 리원길 씨가 공립신보사를 위하여 금 5원을 연보하였더라"라고 적도고 있다. 1906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했다. 1906년 3월 샌프란시스코 학생회에서 리원길은 영어로 연설했다. 연설의 주제는 죽은 학문이 아닌 산 학문에 힘쓰라는 것이었다. 공립신보 1906년 3월 28일자 내용이다. "학생연설. 상항 학생회 학생들이 금월 제3 토요일 석에 개회하고 연설하였는데, 죽은 학문을 힘쓰지 말고 산 학문을 힘쓰라는 문제를 대하여 영어로 연설한 이는 리원길, 김관유 양 씨오 한어 연설한 이는 이재렬 씨인데 연설이 재미가 있었더라." 1906년 4월 5일 공립협회 창립 기념 제1차 연환회가 열렸다. 이 행사에서 태극기와 미국 별기를 서로 어긋나게 높이 달았다. 이원길은 애국가를 노래했다. ▶안창호와의 만남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 오자, 이원길은 샌프란시스코 학생회 서기로서, 안창호에 대한 감사 연설을 했다. 공립신보 1906년 4월 14일자 내용이다. "총장 환영. 공립협회 총회장 안창호 씨가 상항에 온다는 말은 전호에 기재하였거니와 거월 25일에 LA로부터 화륜차를 타고 상항에 도착하였는데 상항 지방회와 학생회에서 이교담, 이원길, 방화중, 이성우 4씨로 영접위원을 선정하여 정거장으로 마조 가서 일등마차에 총회장을 인도하여 공립관으로 처소를 정하고 그날 밤에 모든 회원이 일제히 모여 환영회를 열고 예식원 김찬일 씨가 예식을 지휘하고 먼저 환영회의 취지를 설명한 후에 학생회 서기 이원길 씨가 연설하기를, 안창호 씨는 우리의 대표자로 여러 동포를 위하여 각처로 순행하며 매우 수고하므로 한인의 사회가 오늘날에 이렇듯한 좋은 형편을 이루었으니 우리는 해씨를 대하여 감사하노라 하였고, 그 후에 모든 회원들이 일제히 노래를 화답하였고, 그 후에 총회장 안창호 씨가 연설한 대개는 LA와 레드랜드와 리버사이드 각 지방회에 매우 재미있고 많이 진취됨을 설명하고 지방회 없는 각 지방에 있는 회원들도 그 정형이 날로 새롭다 하고 그중에 LA는 지금 한인의 수효도 적지 않거니와 한인의 사회를 위하여 튼튼한 단체를 이루었고 열심이 매우 많으며 레드랜드도 전일에 비하면 서로 사랑하고 단합됨이 괄목상대하겠고 대저 오늘날 형편을 보게 되면 우리 공립협회에 효력이 매우 많다하였더라. 그 후에 송석준 방화중 양 씨도 연설하였고 하오 12점에 폐회하였더라." 1906년에는 지진이 나서 한인들이 무사한지 조사했다. 중국 사람과 일본 사람도 불을 피하여 공립관으로 찾아왔다고 한다. 공립신보 1906년 4월 25일에는 이렇게 보도돼 있다. "화재혹어지진(火災酷於地震). 상항에 한인 공립관은 4월 18일 오전 5시 15분에 지동할 때에는 손해를 면하였으나 종시 화재를 면치 못하고 전수히 소화가 되었너라. 지동할 때에 공립관에 있던 한인 무사하나 한인 미션과 미국 집에 있는 한인들이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김관유, 서정우, 리교담, 리원길 4씨로 하여금 각처에 탐지하고 각처에 있는 한인들도 회관으로 와서 안부를 무르니 상항에 있는 한인은 다 무고하더라. 그러나 각 찬관이 전폐되고 각 식물가 가에는 식물이 절종되매 면보 떡 한 개에 50전으로 1원까지 하나, 또한 살 수 없고, 또한 불 피우는 것을 금하는 고로 여간한 쌀과 물은 있었으나 밥도 지어 먹을 수 없고 사처로 다니다 못하여 겨우 조그마한 과자 4개를 사다가 한 개씩 먹고 그날 밤을 지날새 청국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이 불을 피하여 공립관으로 찾아와서 같이…." ▶레드랜드 지방회 활동과 실업 1906년부터 1917년까지 이원길은 레드랜드에서 살았다. 레드랜드 지방회에서 서기로 일했다. '공립신보 1907년 5월 10일자 내용이다. "자지동회보고에 의하면 이운경은 레드랜드 지방회에서 대리 회장으로도 일했다. 1910년에는 레드랜드에서 흥업주식회사에서 서기를 맡았다. 1910년 이운경은 레드 랜드에서 이원석, 이무경과 함께 3300원 가치의 전토를 매입하였다." '신한민보' 1910년 10월 05일 "안위원의 순행기. 13. 레드랜드 지방. 이곳은 본인의 거류하는 지방이온바 그간에 출타한 지 40여 일만에 돌아와 보온즉 동중이 전보다 새롭게 되는 각항 사업이 진보되었사옵기로 기쁨을 이기지 못하옵거니와 본원의 출타한 동안에 이같이 진취되었사오니 본원이 있을 때에 사업에 진흥치 못함은 본원의 허물로 아나이다. 그동안 동포의 사업을 대강 말하건대 박창호, 리운경, 리원석, 리무경 제씨가 3300원 가치의 전토를 매입하였고 장학천 씨는 황찬일 씨와 세탁업을 동사하였고 김영근 씨는 박인환 씨와 생업을 동사하였기로 계약되었고…." 신한민보 기자는 레드랜드 지방은 실업 활동과 가산이 타 지역보다 우수하다고 평했다. 그러나 교육시설이 부족하다고 했다. 기사에 따르면 1911년 이운경은 레드랜즈에서 3천 원짜리 전토가 있었다. 신한민보 1911년 6월 7일자 보도다. "남방 동포의 정형. 으레들랜드에는 동포의 생활 정도와 실업 발전과 가산 배고파 타 지방보다 우승한 점이 많으니, 리운경 씨의 3천 원짜리 전토와 안석중 씨의 4천 원짜리 황무지와 리치완 씨의 1천 5백 원짜리 가대와 안석중 씨의 1천 2백 원짜리 두 가대와 정지영 씨의 1천 2백 원짜리 가대와 최인성 씨의 8백 5십 원짜리 가대와 박경환 씨의 신축한 가옥과 김영근 황찬일 씨 등의 두 빨래집과 김룡호 박창호 박능선 씨 등의 자농하는 농장이며 기외에 여러 가지로 실업의 경영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작년에 큰 화재를 당하였지만은 분별하는 마음이 더욱히 왕성하여 300여 원을 들여 회관을 새로 건축하였으며 서양 교회에서 허여한 회당이 있어 매주일에 두 번씩 모여 성경을 강론하는데 다만 한 가지 부족한 것은 교육상에 관하여 특별히 설비한바가 없으나 다른 일에 발달된 것을 미루어 보면 이도 또한 오래지 아니하여 마련될 줄 알겠으며…" <34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2018-05-06

사진신부 출신 부인 박정경 여성단체 주도

델라노서 일인상점 보이콧 주도 국민회 델라노 집행위원장 활약 동생 박영섭 결혼에 아버지 역할 아들 결혼에는 델라노서 큰 잔치 ◆박충섭 가족 박충섭은 1931년 LA로 이주하였는데 그 곳에서도 과채 상점을 운영했다. 박충섭이 이주하면서 노동한 상황을 통해 당시 한인 노동자들의 삶을 살펴 볼 수 있다. 대부분의 한인 노동자들은 계절 이주 노동자들로서 농작물을 따라 이주하면서 노동을 했다. 박충섭은 1908년 리버사이드에서 핸포드로 이주했다가 잠깐 프레즈노에서 포도를 땄다. 그리고 다시 핸포드에서 실업회사를 설립했다. 또 다시 레드랜드로 이주했다가 1910년 리버사이드에 정착했다가 또 다시 1931년 LA로 이주해서 과일과 야채 상점을 운영했다. 1938년 중가주 델레노로 이주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박충섭은 대한인국민회 델라노(Delano)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고 여관도 운영했다. 델라노에서 박충섭은 델라노 지방회 총무를 맡았고 일인 상점의 보이콧에 앞장섰다. ◆아내 이정경(박정경) 1915년 박충섭은 이정경과 결혼하는데 아마 사진 신부가 아닌가 추측된다. 이정경이 만주리아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했다는 '신한민보' 기사가 있다. 이정경은 박충섭의 '새색시(신인)'라고 쓰여 있다. '신한민보' 1915년 8월 5일자는 박충섭과 이정경의 결혼식과 신혼여행 소식을 전하고 있다. "박 씨의 신혼과 여행. 리버사이드에서 다년 노동 주선에 종사하는 박충섭 씨는 내지로써 신도한 이정경 여사로 더불어 7월 28일에 본 항 한인 예배당에서 혼례식을 행하고, 그 밤에는 본 항 일반 부인 신사를 청하여 연회를 성대히 열었으며, 본월 1일에는 그 신부를 대동하고 본 항을 떠나 남방으로 행하여 리버사이드에 가서 본월 7일에 당지 동포와 외국 빈객을 청하여 다시 성대한 잔치를 할 예정이라더라." 박충섭의 부인이 해산 후 별증과 맹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신한민보' 기사도 눈에 띈다. 박정경은 1930, 1940년대에 대한 독립을 위한 여성단체에서 활동하고 기금을 연조했다. 1933년에는 나성 여자 청년회가 만둣국을 비롯한 한국식의 성대한 만찬을 차리고 국제 여자 청년회 임원과 장로교회에 도움을 주는 부인들을 초대하여 식사했다. 이때 박정경은 안혜련을 비롯한 부인들과 더불어 음식을 손수 장만했다. 박정경은 여자 애국단 나성 지부에서 재무를 맡았다. 또한 박정경은 대한 여자 기독 청년회에서 서기를 맡았다. 박정경은 장병들의 겨울 솜옷을 위해 기금을 의연했다는 '신한민보' 1939년 12월 7일의 보도도 눈에 띈다. ◆남동생 박영섭 박충섭의 남동생 박영섭은 1917년 중국 선편을 타고 입항했다. 박영섭은 리버사이드에 있는 중학교에서 전기과와 목공과를 공부했는데 성적이 좋았다고 신한민보는 보도했다. 박영섭은 1924년 LA로 이주하여 공부를 계속했다. 1927년에 있었던 박영섭과 김윤원의 결혼식은 상세하게 보도되었다. 이 결혼식 때 박영섭의 형인 박충섭이 감사말을 내빈에게 드렸는데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한 것이다. 박충섭의 부인 박정경은 신부를 돕는 보모 역할을 하였다. 결혼식이 추수감사절에 있어서 터키를 저녁으로 먹었다고 한다. 박영섭은 리버사이드에서 1928년에 딸을 보고 1930년에 아들을 보았다. '신한민보' 1928년 9월 6일 보도에는 "박영섭 씨의 농와지경. 리버사이드에 거류하는 박영섭 씨는 그의 귀로운 첫딸을 보았다더라"라고 적고 있다. 또 '신한민보' 1930년 12월 25일자는 "리버사이드 박영섭씨 득남"이라고 보도했다. ◆박충섭의 자녀들 박충섭의 장자 박운하는 1943년 한시대의 딸 한유희와 혼인했다. 아들의 결혼으로, 박충섭과 박정경은 델라노에 사는 이웃 전체에 큰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에게 한국 음식을 대접하였는데 이 음식은 이웃들이 도와서 함께 만든 것이다. 박충섭의 첫째 아들 박운하와 둘째 아들 박운용은 모두 군에서 복무했다. 박운하는 결혼 직후 미군에 입대하여 부인과 함께 상항에 있다가 델라노로 귀환했고 박충섭의 셋째 아들 박운선도 징병에 뽑혀갔다가 휴가를 얻어서 델라노에 돌아왔었다. 박충섭의 둘째 아들 박운용과 딸 박인숙이 자동차 사고를 입었다. '신한민보' 1941년 2월 13일자에는 "박충섭씨 동부인 염려. 뗄레노에 재류하는 박충섭 씨 동부인의 차자 운용 군과 령애 인숙 여사의 자동차 충돌의 피상은 일찍이 보도한바 운용 군은 그동안 완치를 얻어 퇴원하였고 인숙 여사는 아직도 위경에 있으므로 박충섭 씨 동부인은 염려를 말지 않는다더라. 뗄레노 통신. 전하는 것은 점점 차도가 있으므로 불원간 퇴원할 터이라고 한다"라고 보도했다. <33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2018-04-29

파차파 캠프에서 노동 알선사로 큰 활약

핸포드서 활동하다가 리버사이드로 이주 LA로 다시 이주할 때까지 파차파서 살아 숙식제공하고 일도 많다고 노동자에 광고 정간 위기 맞은 신한민보 돕기에도 앞장서 매부와 동업해 대형 식료품점 운영하기도 수년간 노력해 한국 모친 미국행 꿈 이뤄 박충섭 박충섭에 대한 최초의 기사는 '공립신보' 1907년 5월 10일 '하변회 보고'다. '공립신보' 1907년 5월 10일 하변회보고는 "리버사이드회 대리회장 김열일씨의 보고를 거한즉 연한회에 총회를 위하여 연보한 이의 씨명과 금액의 수효는 왼쪽과 같고, 본회 회원 박영순씨가 상항 회원 최춘흥씨와 쟁투한 일에 대하여 박씨를 벌금 5원에 처하였고 또 본 회관을 이설하고 간사는 김기만씨가 피임이라"라고 적고 있다. '위총회 의연 제씨' 명단에 박충섭이 1원을 냈다고 되어 있다. 또한 공립신보 1907년 6월 14일자는 "하변회보고. 리버사이드 지방회장 김영일씨의 보고를 거한즉 신입한 회원은 리근술.김순학 양 씨오, 상항회에서 이래한 회원은 김달노.마춘봉.박충섭 3씨오…"라고 게재했다. 박충섭은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다가 리버사이드로 이주했다. 이후 박충섭은 핸포드 지방 재류 회원으로서 핸포드 지방회 신설 청원에 참여했다. 그는 근처의 프레즈노에서 일하기도 했다. 박충섭은 핸포드에 있는 동안 그곳 지방회에서 활동했다. 1909년 초에 박충섭은 레드랜즈로 이주한다. 박충섭은 1910년 무렵 다시 리버사이드로 이주했다. 신한민보 1910년 5월 11일자 "광고. 화재에 구제한 여러분 하변" 기사에서 레드랜즈 화재에 리버사이드 지방회에서 연조를 모금했는데 박충섭은 기부자들 중 가장 많은 금액인 10원을 기부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클레어몬트 학생양성소에 풍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박충섭은 이후 나성으로 이주할 때까지 리버사이드에 거주한다. 1913년부터는 파차파 캠프에서 노동 알선사로 활동했다. 신한민보는 박충 씨가 노동 주선인으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신한민보 1913년 11월 28일자에는 "노동 주선 광고. 본인이 금년부터 리버사이드에서 노동 주선을 하는바 숙식도 편리하옵고 일도 많이 얻을 터이오니, 노동에 주의하시는 동포들은 다 오시기를 바라나이다. 리버사이드 노동 주선인 박충섭 고백"이라고 게재돼 있다. 리버사이드 지방회는 1915년 신한민보의 재정이 궁핍하여 정간할 위기에 처하자 공동회를 열고 그 일에 대한 의논했다. 리버사이드 동포들은 일자리 문제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고 노동 주선인 박충섭 또한 그러한 동포들을 돕느라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신한민보가 정간 위기를 맞자 동포들로부터 의무금을 받아내는 역할을 맡는다. 신한민보 기사를 통해서 당시 박충섭씨는 당시 파차파 캠프 한인 노동국 노동알선사로 일하면서 큰 역할을 담당한 것을 알 수 있다. 박충섭은 리버사이드에서도 사업을 크게 했다. 박충섭은 매부인 구정섭과 동업하여 리버사이드에서 식료품 상점을 크게 운영했다고 신한민보 1927년 8월 11일자는 보도했다. 모친 박상순 구애주의 어머니이며 구애주의 오빠 박충섭의 어머니는 전주 사람으로, 이름은 박상순이다. 박충섭은 모친을 1922년 한국에서 리버사이드로 모셔 오기도 했다. 신한민보 1922년 10월 19일자는 "박충섭 씨 모친 도미. 리버사이드에 다년 류하며 농업을 하는 박충섭 씨의 모친은 거월에 상항에 무사히 상륙하여 수일 본 항에서 류하다가 리버사이드로 나아갔더라. 씨의 모친은 당년이 60여라. 그 노친을 모셔 오기로 다년 뇌심하며 재정을 소비하며 여러 방편으로 주선하였고, 그 모친도 십여 년 동안 이별한 자제를 만나기를 일구월심에 생각하던바 월전에야 비로소 여행권을 얻어 도미하게 되었더라"라고 적고 있다. 박충섭의 모친은 박상순으로 1926년 리버사이드에서 찍은 생일잔치 사진이 LA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신한민보 1943년 11월 11일자는 박상순의 장례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18세에 남편의 박홍식과 혼인하여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다고 했다. 중년에 과부로 살면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어머니 박상순 여사의 장례는 "장로교 예배당으로부터 발인하여 수십 대 자동차와 백여 인 호상" 속에서 이루어졌고 관은 '로스데일' 묘지에 묻혔다. <32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2018-04-22

"아버지가 직접 재료 사서 코트 만들어줘"

재봉틀 없어 밤새 손으로 작업해 완성 가족들 이름으로 동족구호금 기부해 슬하 5형제 모두 2차세계대전에 참전 군입대는 조국 독립에 도움된다고 인식 백신구 딸 백광선 리버사이드에서 출생한 백신구의 딸 백광선(Mary Paik Lee)은 '조용한 방랑 여행 : 미국의 한국인 여성 개척자(Quiet Odyssey : A Pioneer Korean Woman in America'(1990)라는 자서전에 자신의 경험을 서술하고 있다. 그 책에는 리버사이드에 거주했던 자신의 가족의 모습과 이주 노동자로서 여기저기 이주하면서 살았던 모습이 담겨 있다. 이 책에 의하면 백신구의 아내 손광도는 파차파 캠프 내에 거주하고 있던 30여 명의 총각들의 하루 세 끼를 책임졌다고 한다. 백광선은 다음과 같이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의 열악했던 판자촌 생활을 설명하고 있다. 백광선은 또한 자신의 이웃에는 도산 안창호 부인과 필립이 살고 있었다고 전했다. 필립 안은 나중에 영화배우가 되어 아시안 아메리칸 최초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있는 별에 이름을 남겼다. 도산 안창호와 그녀의 아버지 백신구는 한국에서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인데 리버사이드에서 다시 이웃으로 살게 되어 기뻤다고 했다. 그녀는 또한 리버사이드에서의 생활은 매우 가난했지만 기쁜 순간도 있었다고 기억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학교에 입고 갈 코트가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아버지는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라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시내에 가서 필요한 재료를 사서 코트를 만들어 주었다. 당시에는 재봉틀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저녁 내내 손수 코트를 만든 것이다. 그 옷은 아름다운 빨간 코트였는데 그 옷을 입는 것이 행복했다. 학교에 가니 다른 아이들이 예쁜 코트를 어디서 샀는지 물어 보았다. 아버지가 손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하자 모두들 믿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백신구의 자녀들의 학업 1910년 백신구가 리버사이드에 거주하고 있었을 때 장자 백명선과 딸 백광선은 그 곳에서 소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백신구는 1911년에 업랜드로 이주하였다. 이때 백명선 소학교 6학년, 백광선 소학교 5학년, 백도선 소학교 1학년에 다녔다. 백신구 가족은 동족 구호 모금에도 적극 참여했는데 '신한민보' 1919년 8월 16일 "동족을 사랑하면 우리 적십자회에 응모하시오" 기사를 보면 '백신구, 백신구 부인, 백명선, 백도선, 백흔섭'의 이름으로 각각 5원을 냈다. 모두 백신구의 가족이다. 백신구 아들들의 2차 세계대전 종군 특히 '신한민보'(1941년 12월 25일)는 백씨 오형제 모두가 2차 세계대전 때 미군에 입대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백씨 5형제 전부가 종군. 전시 재미 한인의 진화. 휘디어에 재류하는 백신구 씨 동부인은 일즉 아들 5형제 및 딸을 길러 거의 다 장성하였고 미국이 선전하고 중한국이 또한 선전 후 백씨 5형제 중 에드워드, 아더, 스탠퍼드, 우라우드 4군은 벌써 자원 종군하였고... 특히 백영 군은 전투에서 영웅으로 활약했다"고 '신한민보'(1945년 6월 14일)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한인 청년 영웅록. 백영군은 백전 영웅. 휘티어에 재류하는 백신구 씨 동부인의 6자 영 군은 4년 동안 남태평양 전선에서 미국 비행대의 작격수로 110차를 전투하고 최근 휴가를 얻어 돌아왔고, 이는 백전 영웅의 진화이다. 백영군은 당년 35세 장년이오, 1940년에 자원 종군하여 비행대 작격수로 뉴기니 각지에서 전투하고, 1945년에 필리핀 해방전에 참가하여 전후 폭탄을 던진 수효가 85차요, 전투 통계가 110점에 달하여 해대를 얻을 공적이었고, 이로 말미암아 4개 '오리본'과 3개 '스타'의 표창을 받았고, 최근 45일 휴가를 얻어 휘티어로 돌아왔는데 휴가가 만기되면 다시 다른 전장으로 가게 될 여부는 아직 자세히 모를 일이나 많이는 해대를 얻게 될 터이오, 110차를 전투한 가운데 한번도 상해 본 적이 없는 것은 진실로 행운의 군인이며, 그는 말하기를 '지금에 원하는 것은 미군이 왜적을 때려잡는 것을 보면 그에서 더 상쾌한 일이 없겠다' "라고 했다. 당시 미주 한인들은 미군에 입대하는 것이 조국의 독립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했으며 많은 청년들이 미군에 입대했다. 2차 세계 대전 중 미군에 입대한 한인은 본토에서만 최소 200여 명으로 알려져 있고 하와이 출신 한인의 미군 입대는 더 많다. 부인 백광도와 딸 백광선의 부인회 활동 백신구의 딸은 1919년 1월 이흥만과 결혼했다. "명년 정월에 성례. 윌로우쓰 통신을 거한즉, 당지에 재류하는 리흥만 씨는 백신구 씨의 영애로 더불어 백년의 인연을 맺었는데 명년 1월 1일에 대례를 행할 예정이라더라" 이흥만의 부인이 백광선이고 백광선이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이광선이 된 것이다. 백광선은 부인애국단으로 활동하며 기금을 4원 냈다. 나란히 이름이 있는 백광도도 4원을 냈는데 백광도는 백광선의 어머니이다. 딸인 이광선(백광선)은 어머니인 백광도(손광도)와 함께 1919년 여자 애국단으로서 기금을 냈다. 백광선은 결혼 후에도 친정 어머니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독립운동에 기여한 것이다. 백신구의 장남 백명선은 박영순 양과 1929년에 결혼한다. 결혼식은 2월 27일 신부의 고향인 아이다호에 있는 미이미교 예배당에서 열렸다. 다음날 신랑의 본가인 트리몬톤 지방으로 돌아와 3월3일 주일날에 함께 모여 잔치를 벌였다. 백명선의 모친 백광도가 만들어준 오찬을 나누어 먹었다. 백에드워드는 임정구 목사의 딸인 임캐트린과 혼인하였다. 백신구의 5남 백능선 군은 김옥자 양과 연애하여 1938년에 결혼한다. 백능선은 형제들과 동업하여 과채 상점을 운영하고 신한민보 관련 일도 활발히 한다. 백랠프의 결혼에는 빈객이 매우 많았고 이때 전낙청의 조카인 전경무가 사회를 보았다. <31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2018-04-15

북가주로 이주해 500에이커 벼농사 성공

농원의 부족한 일손 메꾸려 필리핀 노동자 고용 한인들 벼농사 경험 많아 대규모 농장주 배출 파차파 거주할 때 신한민보 사옥 건립에 거액 기부 클레몬트 학생연구소 건축위원으로 왕성한 활동 백신구 가족 (1) 백신구는 1906년 하와이에서 리버사이드로 이주했고 1909년 4월에 리버사이드 지방회 신입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초기 파차파 캠프에서 활동했다. '신한민보'에서는 백신구가 대한인국민회 리버사이드 지방회 부회장 및 서기로 임명됐다고 보도했다. 또한 백신구는 리버사이드에서 1909년 조직된 '토론회'의 학무로도 활동했다. 백신구는 리버사이드에 정착하자마자 리버사이드 지방회의 핵심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1909년 5월 12일자 '신한민보'에는 백신구 명의로 다음과 같이 "사람을 찾는 광고"가 실렸다. "본 지방회에서 여러분에게 긴요하고 절박한 통신이 있사오니 그 머물러 사는 곳을 아시는 동포는 밑에 기록한 번지대로 시급히 소식을 전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사람들의 거주지를 아는 분들은 1532 파차파 애비뉴 주소로 알려 달라는 광고이다. 40명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는데 '회원 찾는 광고'라는 점에 비추어 이들 40명의 회원들이 현재 어디서 거주하면서 일하고 있는지를 찾는 광고인 듯하다. 당시 리버사이드에 거주하면서 계절노동자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한인 노동자들은 타지역으로 잠시 이주했다가 다시 리버사이드에 오는 경우가 많았다. 명단에 있는 사람들은 리버사이드 지방회원으로 등록되어 있으나 거주지를 옮긴 사람들의 명단인 것으로 보인다. 이 명단에는 여성들 이름도 보인다. '신한민보'에 1910년 1월 12일부터 1910년 3월 9일까지 7차례 반복 게재되었던 "창건 보관 가옥 취지서. 분발하라 애국 남자, 찬성하오 동지 제군" 기사가 있다. 이 기사는 신한민보사 가옥 창건을 위한 동맹원 모집과 기금 모금을 위한 글이다. 가장 하단에 리버사이드 대표원으로 차정석, 백신구, 이석원이 있다. 백신구는 신한민보사 가옥 창건을 위한 기금 30원을 냈다. '신한민보' 1910년 7월 27일 보도 "백신구 씨의 성심. 리버사이드에 있던 백신구 씨는 현금 클래몬트에 이주하였는데, 수다 권솔의 생활이 곤란하고 사채가 불소함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빚을 얻어 신문사 가옥 고본금 30원을 판출하였으니, 과연 지극한 성심이더라." 백신구와 가족들은 1910년 근처의 클레어몬트 지역으로 이주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백신구는 클레몬트 학생양성소 건축 위원으로 모금 활동을 펼쳤다. 또한 백신구는 클레몬트 지방회 회장으로 역임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북가주에서 쌀농사 그후 백신구와 가족은 북가주로 이주한 후 쌀농사에 성공했다. 백신구는 백미 대왕으로 알려진 김종림과 함께 쌀농사에서 성공을 한 것이다. '신한민보' 1916년 8월 3일자는 "한인 벼농사의 큰 경영. 2085에이커. 가주 한인 농작계에 가장 범위가 크고 또 유망한 경영은 근년 이래 벼농사를 첫째로 치는 것이라. 이 벼농사의 세력을 잡은 김종림 씨는 작년에 큰 이익을 얻었으므로 금년에 와서는 그 계획을 일층 더 확장하며 기타의 뗄라맨, 윌로쓰 각 농원들도 또한 큰 자본을 던져 에이커 수량을 늘림으로 양 처 경영이 2085에이커에 달하였더라. 이제 각 농원 토지의 에이커 수량을 나누어 보건대 왼쪽과 같으니, 뗄라밴(김종림 1030에이커, 박영순 240에이커, 이진섭 150에이커, 황명선 80에이커, 임지성 80에이커, 백신구 75에이커). 윌로우쓰(맹정희 250에이커, 신광희 100에이커, 김두호 80에이커)"라고 보도하고 있다. 1차 세계 대전으로 쌀 값이 폭등하여 쌀 재배 한인 농장주들이 큰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백신구를 비롯한 한인이 벼농사에 성공한 큰 이유는 한인들이 벼농사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북가주의 백인들이 한인을 데려다가 감농을 시킬 정도로 한인은 벼농사에 일가견이 있었다. 1918년 가을에 벼농사도 크게 성공하였다. 김종림이 1800에이커, 백신구는 500에이커를 농사지었고 빠인드라는 기계로 벼 베기를 시작했다. 한편, 비가 온 후 기계를 쓸 수 없게 되자, 벼농사에 능한 한인을 일꾼으로 쓰려는 백인이 많아서 노동의 호황이었고 한인의 농원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필리핀인을 노동자로 쓰는 일도 있었다고 보도했다. '신한민보' 1918년 10월 10일자는 "북가주 깊은 가을, 동포 벼 농장은 일시 수확을 착수, 수확미 21만 뿌술을 예상. 공정 가격으로 쳐도 통계가 90만 7천여 원이로다"라는 제목으로 긴 기사를 보도했다. '신한민보' 1918년 11월 7일자는 "벼농사 수확이 거의 끝남 … 백신구 씨의 농사도 풍작. 지방 소식을 의지하건대 동포 벼농사의 수확은 한동안 날기지가 좋았음으로 아무 장애 없이 거의 다 거두어 들였고, 일시 실망에 있던 백신구 씨의 벼농사도 천기의 좋은 혜택을 입어 의외의 풍작을 얻었다더라"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30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2018-04-08

대한인국민회 1918년부터 여성 입회 가능

차정석·정성 부부 슬하 자녀 없어 차정성은 교회와 사회 위해 분투 1944년 59세로 샌프란에서 별세 사촌 차의석 자서전 '금산' 남겨 차정성의 국민회 활동 1918년부터 여성의 대한인 국민회 입회가 허락되었는데, 차정성은 대한인 국민회원으로서 지속적으로 모금 운동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신한민보' 1931년 2월 5일 "국민회 제22회 창립기념일에 대성황" 이라는 보도에서 1931년 2월1일에 부인들이 국민회에 입회하였다고 보도했다. 이 날은 제22회 국민회 창립 기념일이었는데, LA에서는 80명이 참석했고 차정성의 시누이 동생들인 황보석(차보석), 백락희(차락희)가 입회했고 차정성은 남편 차정석과 함께 각각 1원씩 연조하였다. 황보석(차보석)의 남편 황사선이 이 행사에서 기도하였고, 백락희(차락희)의 남편 백일규는 연설하였다. 차정성은 1944년에 사망하였다. 신한민보 1944년 3월 30일 보도. "사망. 상항 차부인 정성 씨 3월 26일 별세" 했다고 다음과 같이 자세히 보도했다. "차정성은 향년 59세로, 평양 동촌 출신이다. 1902년에 차정석과 결혼하였고 남편이 1904년에 하와이로 떠나자 1905년에 따라왔다. 이후 1906년에 남편과 같이 미국 본토에 들어와서 5년간 리버사이드에 있었다. 차정성은 차정석과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그녀는 또한 교회와 사회를 위하여 일했고 화평한 성품으로 이웃의 존경을 받았다고 평가받았다." 신한민보 1944년 4월 6일 보도. "지방 소식. 차부인 정성 씨의 장의 후문, 상항에 재류하는 차정석 씨의 부인 정성 씨의 별세는 일찍이 본보에 보도한바 장의 거행에 관한 상항 통신이 아래와 같다. 부인은 반생을 미국에 있는 동안 그 남편과 분투 생활을 같이 하는 동시 교회와 사회를 위하여 노력을 더하였고, 아울러 처세가 평화로워 린리의 경의를 받고 있다가 이제 세상을 떠나매 친척 친우가 다 같이 애도하고 남편 차정석 씨는 부인과 청년에 결혼하여 멀리 바다를 건너 와서 같이 늙는 가운데 다만 한 가지 유감 되는 것은 자녀가 없어 슬하가 비인 것이오, 이로 말미암아 쓸쓸한 백발이 서로 의지하고 있다가 외로운 남편을 두고 먼저 가매 내조를 잃어버린 차정석 씨는 다시 마음을 둘 곳이 없고 그 경상을 보는 친척 친우는 씨를 위하여 더욱 부인의 서세를 슬퍼한다더라. 상항 통신." 차정석의 사촌 형제, 차의석 차의석은 겨울 오렌지 농장 시즌인 크리스마스 직전부터 봄까지 10주 정도 리버사이드로 와서 농장 일을 했다고 자신의 자서전 '금산'에서 밝히고 있다. 또한 자신의 사촌인 차정석과 그의 부인도 하와이에서 리버사이드로 이주했는데 공교롭게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직후 1906년 대지진이 발생하여 걱정을 많이 했다. 다행히 드류 박사의 도움을 얻어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한 후 리버사이드로 무사히 이주했다고 했다. "사촌과 부인은 다행히 리버사이드에서의 생활에 만족했는데 특히 기후, 일, 그리고 생활 환경 등이 좋았다. 리버사이드가 미국에서 가장 큰 최초의 한인타운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듯하다." 차의석은 미 육군에 자원 입대했다가 제대했다고 '신한민보'(1919년 3월 13일)는 보도했다. 차의석보다는 차정석이 리버사이드에서 활동을 많이 했다. 차정석이 리버사이드 지방회에서 임원으로 활동했을 때 차의석은 리버사이드에서 공부를 했다. 차의석은 나이가 차정석보다는 어리다. 차정석 가족은 모두 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차의석은 1906년 10월 리버사이드에서 소학교 4반에 입학하였다. 1907년 2월에 리버사이드에서 소학교 5반이었다. 정등렵, 김영일, 김창률 등도 같은 시기에 리버사이드에서 소학교를 다녔다. 1907년 6월에 리버사이드 지방회 통신원으로 임명되었다고 '공립신보' 1906년 11월 8일 '학무보고'에서 밝히고 있다. 1907년 11월에는 솔트레이크 지방회 서기로 나타난다. 차의석은 솔트레이크로 이주한 후 공부를 하면서 독립운동에 전념한듯 하다. 많은 사람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는데 솔트레이크에서 방건초에게 매달 3원씩을 보조받았고, 안리용과 윤진오에게 각각 매달 2원씩 보조받았다고 '공립신보' 1907년 11월 15일자가 보도했다. 1910년에는 다시 리버사이드로 돌아와서 공부했다. 소학생 명단에 차의석의 이름이 보이는데, 백신구의 자녀들인 백명선, 백광선도 나타난다. 이때 차정석은 리버사이드 지방회 회장이었다. 1911년 차의석은 신한민보사에서 활자 조판일을 하였다. 그리고 차의석은 1913년 미주리에 있는 팍칼리지 중학교에서 공부하면서도 조국의 독립을 학생들에게 적극 알리는데 앞장섰다. 그는 학생회에 입회하여 우리나라 정형을 연설하였다고 '신한민보' 1913년 9월 19일자에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신한민보' 1914년 5월 21일 보도. "차씨 서인 교섭. 칼니포니아에서 여러 해 류하던 차의석 씨는 지금 미쥬리 팍볕 땅에 있는 파악칼네지에서 공부하는데 본래 명민하고 재지 있음으로 서양 학생들과 교섭이 빈번하고 교정이 친절하므로 특별히 사랑을 많이 받는 중에 그 학교에 있는 각국인 학생회 '코스모풀니단 클럽'에 입회하여 때때로 본국 정형을 통지하는 중에 금월 5일 특별 대회석에서 본국 정형으로 강개 격절한 연설을 하매, 회중이 박수갈채하기를 오래하였으며 또한 하기 방학 전에 다시 그와 같은 대회를 모일 기회가 있는 고로 차씨는 다시 그 기회를 타서 본국 형편을 말하고자 하는 중이라더라." 차의석 부인 차영선(김영선) 1928년 차의석은 시카고에 재류하는 당시 김영선(차영선)과 결혼하였다. 차영선(김영선)은 의주에 원적을 두었고 이화학교 출신이었다. 간호부를 졸업하고 유학을 위해 1926년 6월에 미국으로 건너왔다. 듀북 대학 입학 예정이었다. '신한민보' 1926년 7월 1일 보도. "김영선 여사 유학차 도미. 본국 의주에 원적을 둔 김영선 여사는 이화학교 출신으로 통천 능암포에 있는 병원에서 간호부 졸업을 한 후 미주 유학을 목적하고 지난 28일에 입항한 천요마루 선편에 도미하여 이민국에서 하룻밤을 지나고 재작일에 상륙하였는데, 김여사는 장차 뜌북 대학에 입학할 예정이라더라." '신한민보' 1928년 6월 14일자는 "차.김 량씨의 백년가약. 6월 10일 쉬카고에서 거행. 쉬카고에 다년 거류하는 차의석 씨와 김영선 양은 6월 10일 하오 1시에 혼인 예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는데 그 혼례식은 파울구드 교수가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차의석은 랜드맥랠니라는 미국 회사에 근무하였고, 차영선(김영선)은 뜌북 대학에서 공부했다. 차영석 부인 차영선(김영선)은 결혼 이후에도 킨우드로링 여자 학교에서 공부를 했는데 성적이 매우 우수하였다. 교감인 머리필드 여사가 학비를 면제해 주었다고 '신한민보' 1929년 10월 17일자는 "가정 생활하는 여학생들의 소식"으로 보도했다. <29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2018-04-01

신한민보 논설 통해 대한독립의 중요성 강조

차정석과 지방회 차정석의 남자 형제는 차원석 차광석 차리석이 있다. 이들은 친형제이거나 같은 항렬의 사촌 형제다. 차원석은 한국에 있었고 차광석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신학 공부를 위해 왔다. 차리석은 중국에서 활동했다. 여자 형제는 차락희 차보석이 있다. 한편 차정석과 차의석은 같은 항렬의 사촌 관계다. 차정석의 활동 차정석은 리버사이드에서 1907년에서 19013년까지 활동했다. 가장 초기의 기록은 1907년 5월 '공립신보'다. '공립신보' 1907년 5월 10일 '하변회보고'에서 총회를 위한 의연금 1원을 냈다. 차정석은 1907년에 리버사이드 지방회 회장이었다. 차정석은 1908년에도 리버사이드 지방회 회장으로 활동한다. 같은 시기에 차정석은 리버사이드 근처에 있는 레드랜즈 지방회의 회장으로도 나타난다. 차정석은 신한민보를 위해 10원을 연조하였다고 '공립신보' 1908년 8월 5일자는 보도했다. 차정석은 1909년 리버사이드 지방회 회장이었다. 1909년 5월 리버사이드에서는 한국 함경남도 문천군 기근에 연조하였다. 차정석은 이응호와 더불어 수전위원으로서 34원 50전의 의연금을 수합하기도 했다고 '신한민보' 1909년 5월 19일자는 보도하고 있다. 1909년 리버사이드 지방 회원들이 지식을 교환하기 위해 토론회를 조직하였는데 차정석은 서기로 선정됐다. 차정석은 1910년 자동차에 목을 부딪치는 큰 사고를 당했다. '신한민보' 1910년 10월 26일 "차정석 씨 낙상. 리버사이드 차정석 씨는 일전에 길로 지나다가 우연히 자동차에 부딪혀 목을 다친 고로 즉시 병원에로 가서 치료하는 중인데 처음에는 목이 부어 언어를 통하지 못하더니 지금에는 적이 차효가 있어 간신히 어음을 발한다더라." 1911년에 리버사이드에서 있었던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 준비를 위해 차정석은 간사 위원으로 역할을 담당했다. '신한민보' 1911년 11월 20일에는 "하변 지방에 대의회 준비. 국민회 하변동 지방회는 금년도 대의회가 해지방에서 소집이 되는 고로 특별히 주인되는 예수를 다할 뿐 아니라 각처 대의원에게 간친한 성의를 표하기 위하여 응접위원은 김인수 씨 간사위원은 차정석 씨로 택정하여 일반 대의원을 편리토록 응접 주선할 터이라더라"고 보도했다. 차정석은 또한 리버사이드 대의원의 자격으로 대의회에 참석했다.'신한민보' 1912년 3월 18일 '하변지방회'보에 차정석은 자치위원과 의무금 수봉위원으로 활동했고 1913년에는 리버사이드 지방회 회장이었다. 차정석은 1917년에는 패서디나로 이주했는데 신한민보사 가옥을 유지하기 위해 모금 운동을 전개하는 논설을 썼다. 신한민보사 가옥이 동포들을 지켜주는 의지처라는 것을 강조했다. 1919년 한국에서 독립 운동이 일어난 이후 차정석은 신한민보에 논설을 게재했는데 한국 동포와 해외 동포의 긴밀한 협력과 단합을 주장하고 있다. '신한민보' 1919년 3월 25일에 게재된 논설이다. "바다 밖에 나온 동포에게 경고. 우리 민족이 나라의 주권과 민족의 행복을 저 원수에게 빼앗긴 이후 저 원수의 한량할 수 없는 압제와 학대를 당하는 중에 그 중 더욱이 우리의 경애하는 지사를 포박하여 악형을 그 몸에 심히 하여 살해하였으며 점점 우심하며 우리 전체 민족을 잔멸코저하는 악독한 정책을 쓰니 우리 해외에 재류하는 동포는 이를 살펴 맹성할지어다. 지난 10년 동안에 이 압제와 학대를 받은 자 그 누구며 악형과 학살을 당한 자 그 누구요. 해외에 있는 우리들의 부형이오 자질이며 친척이오 친구며 아울러 또한 우리의 혈족이니 참으로 볼진대 저 원수는 우리 각 개인의 원수요 온통 민족의 공통한 원수올시다. 그러나 외양에 재류하는 우리 동포 중에 아직도 원수를 원수로 알지 못하며 동족을 동족으로 깨닫지 못하는 자 있으니 가통할 일이올시다. 지나간 일은 다 말씀 않으려니와 오늘날 당한 피치 못할 담책이 온통 민족에게 이르렀으니 이는 곧 본원 2일에 내지 동포들이 원수의 강제 밑에서 협심 단결하고 일시에 각처에서 일어나 대한 독립을 선언함이라. 장쾌하도다. 내지 동포의 애국성이여. 담대하고 용맹하도다 내지 청년의 모험적 대활동이여! 과연 훼와에 있는 자로 하여금 잠을 깨게 하며 기뻐 미칠 듯 뛰놀게 하였도다. 그러나 독립을 선언하였다고 기뻐만 함은 아닐지니 반드시 우리가 독립을 회복하기까지 온통 민족이 굳게 단합하여 전심 성력으로 재주와 재정을 아끼지 말고 중로에 끊침없이 진력하여야 될 바니 우리 일반 동포는 단합하여 인도자의 지휘 아래 의무를 사양치 말고 백절불굴하는 성의로 싸워 나아가다가 독립을 회복하옵시다. 또는 내지 동포의 오늘 당하는 참상을 살피는바 비극 참극이 형언할 수 없겠으리니 첫째로 내지 동포의 생명을 하루 바삐 구원하여야 될지라. 이 구원은 외양에 있는 우리의 원조와 운동이 아니면 할 길이 없으니 한량할 수 없는 참혹한 살육 속에 있는 우리 동족을 빨리 구원하는 일에 혈성을 다하여 진력하시기를 절원하옵고 감히 두어 말로 해외에 계신 모든 동포 앞에 경고를 올리나이다." 차정석 가족 차정석은 1923년에 LA에 새로 채소 상점을 열기로 계획했고 이주 후 1923년에 차정석은 LA지방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신한민보 기자는 차정석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함께 지방 회관으로 갔는데 그곳에는 지방 회원 남녀 30여 인이 모여 있었다고 '신한민보' 1923년 9월 27일자로 보도했다. 차정석은 신한민보가 사라지는 1945년 12월까지도 신한민보에 이름이 나타난다. 계속 의무금을 납부했고 어려움에 처한 동포에게 연조하거나 본국 동포에게 연조하거나 광복군후원금 총회의 활동에 참여하고 지원했다. 차정석 부인 차정성 차정석은 부인 차정성과의 슬하에 자녀를 보지 못했다. 대신 차정성은 시누이 동생들이 있는 샌프란시스코를 빈번하게 내왕했다. 시누이 동생 부부들은 미주 한인 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인물들이다. 이 여성들과 교류하면서 길러주고 돌봐주는 어머니 역할을 했다. 차정성은 1924년 패서디나에 살았는데 동생을 만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다. 차정성은 1925년에도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는데 시누이 동생 백락희(차락희) 집에서 유숙하였다. 그리고 조카 메리를 데리고 LA에 돌아왔다. 1927년 차정성은 다시 패서디나로 이주했는데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친족을 방문했다. 차정성은 1928년 7월 LA주일 학교 대회를 구경 온 시누이 황보석(차보석)과 함께 주일 학교 대회를 구경갔다가 18일 함께 돌아오기도 했다. 이처럼 차정성은 친족들을 방문하는 일이 매우 잦았고 특히 여자 형제들과 매우 친밀하게 지냈고 조카들과도 각별한 사이었다. 1930년에 차정성은 패서디나에 살았는데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동생들을 방문하였다. '신한민보' 1930년 7월 10일 "차부인 상항 심방. 패사데나에 다년 거류하는 차정석 씨의 부인 정성 씨는 상항에 있는 동생들을 심방차로 지난 토요일 저녁에 안착하였더라." 차정성은 1919년 3월 27일자'신한민보'에 "부인 독립 의연금 10원을 의연했다"고 이름이 나타난다. 차정성은 이후에도 부인 단체에 매번 의연하였고 기근 구제 학생 원조 등을 하면서 조국의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8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2018-03-25

리버사이드 공원묘지서 '김순학'의 묘지 발견

1911년 지방회 회장으로 피선돼 활동 자치 규칙 17조 마련해서 질서 잡기도 동포들의 행복 증진이 목적이라고 명시 중가주서 맹정희 등과 합동 농원 경영 130에이커 토지에 벼농사 시작하기도 국치기념 행사에서 기도와 기념사 담당 ◆김순학과 김태선(1) 이선주는 리버사이드 근처의 올리브우드와 에버그린 묘지에서 한인으로 추정되는 4개의 묘를 발견했지만 그들이 한인이라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같은 묘지에 있는 순 김(Soon Kim)은 1919년 2월 25일 사망일자만 적혀 있고, 또한 사람인 김씨 리(Kimpsie Lee)는 1926년 1월 21일에 사망한 것으로 적혀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분명히 한인이라는 증거는 그들의 이름이 한국인의 것과 비슷하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선주가 밝힌 1919년 2월 25일 사망한 순 김(Soon Kim)은 김순학이다. '신한민보' 1919년 2월 27일에 "사망. 리버사이드 김순학 2월 23일 횡사"라고 나타나 있다. 김순학은 리버사이드 지방회에서 초기부터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활동했던 인물인데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 임시 의장, 한인 장로선교회 목사, 흥사단, 대한인국민회 리버사이드 지방회장 등을 역임한 중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리버사이드 에버그린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김순학의 묘비는 다른 한인들의 비석보다 크고 생전 기록이 자세히 적혀 있다. 그것은 아마 김순학이 한인 장로 선교회 목사를 역임했고 리버사이드 한인타운에서 리더 역할을 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김순학은 "대한인국민회원이며 동시에 흥사단원이며 한국인"이라고 한국어로 적혀 있으며 "29살인 1904년 10월 12일에 도릭 호를 타고 부인과 함께 하와이에 도착했는데, 작은 체구"라고 적혀 있다. 김순학이 리버사이드에 언제 도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리버사이드 지방회에 처음 입회한 시기는 알 수 있다. 김순학은 '공립신보' 1907년 5월 10일 '하변지방회보' 보도에 처음 이름이 나타난다. "위총회 의연 제씨.…김순학 1원" 김순학은 1907년 5월 리버사이드 총회를 위한 의연금을 1원 낸 것으로 나온다. 적어도 1907년 5월 이전에 리버사이드 지역으로 이주했음을 알 수 있다. '공립신보' 1907년 6월 14일 "하변지방회보. 리버사이드 지방회장 김영일 씨의 보고를 거한즉 신입한 회원은 리근술.김순학 양 씨오…" 김순학은 1907년 6월에 새로 리버사이드 지방회 회원으로 들어온다. 특히 김순학은 1911년 11월 22일 리버사이드에서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가 열렸을 당시 리버사이드 지방회 임시 회장을 수행하고 있었다. '신한민보' 1911년 11월 20일 "리버사이드지방회보. 본월 11일 체임 통상회에 새로 피선된 임원은 왼쪽과 같다. 회장 김순학, 부회장 리병억, 총무 리병억, 서기 마춘봉, 재무 박충섭, 법무 안리영, 구제 김용년, 대의원 김린수." 김순학은 1911년 11월에 처음 리버사이드 지방회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또한 김순학이 리버사이드 지방회 회장으로 있을 때 지방 자치 규칙 17조가 마련되었다. 리버사이드의 치안과 질서를 확립한 것이다. '신한민보' 1911년 12월 4일 "리버사이드 지방회 임시 회장 김순학 씨 보고를 거한즉 11월 18일 특별회에서 지방 자치제도를 조직하고 응용 규칙 17조를 기초하였는데 그 요령은 거류지 질서를 정돈하며 패류를 숙청하여 전체 동포의 행복을 증진이라 함. (가칙 전문은 래호에 기재함)" 그리고 1913년에 리버사이드 지방회 부회장을, 1914년에 회장을 역임하였다. '신한민보' 1912년 12월 9일 "하변 지방회보. 본월 2일 체임 통상회에 개선한 임원은 왼쪽과 같다. 회장 차정석, 부회장 김순학…." '신한민보' 1913년 12월 19 "하변지방회보. 동 회장 김순학 씨의 보고를 거한즉 명년도에 시무할 새 임원은 여좌히 공선한 일. 회장 김순학, 부회장 리일…." 1916년에는 법무원, 1917년에 대의원과 실업부원 등을 역임한다. '신한민보' 1916년 2월 8일 "하변지방회보. 회장 리학현, 부회장 정지영, 총무 안영일, 서기 최윤호, 재무 이성민, 학무원 조득린, 법무원 김순학, 구제원 박충섭, 대의원 문영운." '신한민보' 1916년 12월 21일 "리버사이드지방회보"에 따르면 김순학은 명년도 대의원과 실업부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 김순학은 경제 활동에도 참여한다. 김순학은 윌로우쓰에서 맹정희 등과 함께 합동농원을 경영하였다. 130에이커 토지에서 6350석을 수확해서 순이익 1113원 가량을 남겼다. '신한민보' 1916년 12월 7일 "윌로우쓰 벼농사의 수확, 임지성 순이익 4백여 원 맹정희 순이익 1천여 원. 윌로우쓰 한인 벼농사 맹정희 신광희 마춘봉 김순학 4인의 합동 농원과 임지성 리진섭 양인의 합동 농원의 수학 보고를 듣건대 대체 이익을 본 것이 이하와 같으니 맹정희 농원 130에이커의 수확이 6350석이라 매석 1원 65전에 도매하여 총합 9665원 94전을 가지고 경비금 8552원 83전과 기타 고본을 제하니 순이익이 1113원 11전이라 하고…." 1917년 리버사이드 국치기념 행사에서 김순학은 기도와 국치기념사를 맡았다. '신한민보' 1917년 9월 6일 "리버사이드 지방의 국치 기념. 참통한 예식의 순서. 리버사이드 지방회는 8월 29일 제8회 국치 기념을 거행하였는데 재류 동포의 전수 30여 명이 출석하여 참통한 예식을 거행함이 좌와 같더라." 1. 국가…일동 2. 기도 …김순학 3. 취지 설명…주석 최윤호 4. 창가…정부인 5. 국치기념사…김순학 곽룡주 6. 창가…아이들 7. 국치를 씻을 준비…주석 8. 총회관 가옥채를 위한 연조 9. 기도 폐식. '신한민보' 1918년 1월 24일 '리버사이드 지방회보'에 따르면 김순학은 재무로 나타난다. 김순학은 1918년 창립 기념절 행사에서 "우리 하변 지방회 역사"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김순학이 10년 이상 리버사이드에 계속 머물면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지방회의 역사에 대해 강연하는 역할을 맡은 것 같다. 이 창립기념절 예식에서 아버지 김순학이 강연한 다음 순서에서 아들 김태선이 창가를 불렀다. '신한민보' 1918년 2월 14일 "창립기념절 각 지방, 리버사이드 지방회. 재류 남녀 동포 23인이 당일 식장에 출석하여 동 지방회장 구정섭 씨 주례하에 좌와 같은 예식을 순서로 거행하였다더라. " 1. 개회…주석 구정섭 2. 국가…일동 3. 취지…주석 4. 창가…아이들 5. 축사…리운경 6. 사현금…최재덕 7. 축사…(누구나) 8. 우리 하변 지방회 역사…김순학 9. 창가 …김태선 10. 애국가…일동 11. 삼호만세 12. 폐식 다과 (리운경 씨 축사는 폭원이 없어서 생략함.) 김순학은 속병으로 입원하기도 했다. '신한민보' 1918년 6월 27일 "김씨 입원. 리버사이드에 재류하는 김순학 씨는 속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본월 19일 병원으로 들어갔다더라." <26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2018-03-11

일곱 자녀 육아로 곤경…동포에 구제금 요청

전낙청 '구제적 강도' 등 소설 지어 넷째 오미스는 수학 잘해 캘텍 진학 ◆전낙청의 경제적 어려움 전낙청은 1918년에 아들을 보았다. '신한민보' 1918년 3월 7일자는 "국민 신적. 리버사이드 전낙청. 2월 5일 생남"이라고 보도했다. 그 아들의 이름은 전경상이다. 전낙청은 아들을 보았지만 부인은 1919년에 병으로 고생하다가 유리와 망치로 스스로 몸을 해하였다. '신한민보'(1919년 10월 11일)는 "리버사이드에 재류하던 전낙청 씨 부인은 수삼 삭 동안 신병으로 고통하다가 지난 토요일에 정신없이 유리 조각과 망치로 전체를 쪼아 만신이 상처뿐인 고로 곧 의사를 청하여 응급 수술을 당하고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 중이나 아직 생사를 알 수 없다 하더라"고 보도했다. 부인이 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전낙청은 7명의 아이들을 돌보아야 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고 신한민보에서 동포들에게 구제금을 요청하였다. 신한민보(1919년 10월 11일)는 "본 지방에 다년 재류하던 전락천 씨는 다수한 가권을 거느리고 생활난으로 골몰하던바 겸하여 씨의 부인은 신병으로 오랫동안 신음하다가 금월 삼일에 하일랜드 공립병원에 입원하온바 그 병세가 참혹하옵고 또한 전락천 씨는 일곱 어린 아이들을 거느리고 곤란과 심로로 애쓰는 현상은 차마 볼 수가 없사와 본 지방에 재류하는 동포 수효대로 구제하기로 발기하고 이 사정을 여러 동포에게 고하옵나니 동족을 사랑하고 자선심이 풍부한 동포는 전 씨를 위하여 다소간 구제금을 본 지방 수전위원 허승원 박충섭 양인에게로 부응하시면 감사하겠소"라고 보도했다. 따라서 엘렌 전과 아이들은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자라났다. ◆전낙청의 자녀들 1918년 리버사이드 국어학교 학생 명단에 전낙청의 자녀들이 있다. 갑반의 전오배스, 을반의 전샘슨, 전엘리사벳, 병반의 전잭 모두 전낙청의 자녀들이다. 1929년에는 전잭과 전오미스가 LA에서 소학 8반이었다. 같은 기사에서 전경무는 딸을 낳았다고 보도하고 있으므로 전잭의 사촌 전경무는 1929년 당시 결혼한 상태였다.(*자녀들 이름은 신문이나 기록문서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표기됨) 전낙청의 딸 엘렌은 리버사이드에서 출생했는데 자신의 경험을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들(Heartwarmers)'이라는 글로 남겼다. 전낙청의 넷째 아들 오미스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는데 그가 수학에 능하기 때문에 캘택에 입학한다고 했다. 전낙청의 아들 전오배스, 전아모스, 전이수, 전샘, 전잭 총 다섯 명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신한민보 1942년 12월 10일자는 "종군 한인 청년. 전오벳 군, 전엠오스 군, 전이수 군, 전쌤 군, 전짹 군 이상은 전낙청 씨의 령유, 전짹은 참전하여 실버스타, 퍼플하트 등의 훈장을 받았다"고 전한다. 신한민보 1945년 10월 4일자는 "지방 소식. 전짹 하사의 영용 전적"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전낙청의 두 아들 역시 2차 세계대전 중 미군에 입대하여 조국의 독립에 이바지하고자 했는데 신한민보(1943년 8월 12일)는 "전오머스 소위 귀성"을 보도하기도 했다. 한편 신한민보 1943년 7월 15일자는 "전쌤 군과 황 앨리스의 결혼. 현재 육군에 복무 중에 있는 소위 전쌤 군과 황성오 씨 부인의 딸 앨리스 양은 7월 17일 밤 8시에 씩스스추리와 캄몬웰트에 있는 쇄토채풀에서 결혼식을 거행할 예정인데…"라고 하였다. 전샘의 부인은 황 엘리스인데 2017년 8월 13일 패서디나의 요양원에서 105번째 생일잔치를 열었다. 엘리스는 하와이 이화 농장에서 출생했고 8살 때 LA지역으로 이주하여 대학교에 재학 중 댄스 파티에서 당시 미공군에 입대해 대위로 근무하던 전샘을 만나 결혼했는데 그녀는 대학 졸업 후 LA 수도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은퇴했다. 남편 전샘은 리버사이드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은 리버사이드에서 보냈다.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동아시아 도서관(East Asian Library)에서 소장하고 있는 또 다른 전낙청의 글, '구제적 강도'와 '오월화'라는 제목의 글이 있는데 '잭 전'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잭 전'이 리버사이드에 있는 미시즈 윌킨스를 만났고 '잭 전'은 '에바 헤스팅'과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제니 윌킨스(Jennie A Wilkins.57)가 세대주인 가정의 피보호자들은 바로 전낙청의 자식과 조카들이었다. 피보호자는 엘리자베스 전(Elizabeth Thun.여.9), 엘렌 전(Ellen Thun.여.7), 잭 전(Jack Thun.남.4), 아모스 전(Amos Thun.남.3), 에서 전(Esau Thun.남.1)이다. '오월화'에서 "29년 가을 9월에 잭이 열여이 하이스쿨에 입학하니"라는 구절이 있다. 실제 잭 전은 LA에서 소학 8반생이었다. 신한민보 1929년 12월 26일자에는 "라성 지방회. 지방 회장 석대원 씨의 보고. 학무 박경신 씨의 보고. 소학. 8반생 리일천, 리매리, 윤영희, 김인, 박윤하, 전짹, 전오마쓰, 김미순, 정대벽 (12세로 14세까지)"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구제적 강도'에서는 잭 전이 종군했다가 돌아온 상황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신한민보 1942년 12월 10일자 "종군 한인 청년. 전오벳 군, 전엠오스 군, 전이수 군, 전쌤 군, 전짹 군 이상은 전락청 씨의 령유"가 이것이 사실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구제적 강도'에는 "리버사이드의 미세스 윌킨스"라는 구절이 나오기 때문에, '구제적 강도'가 실존인물 잭 전과 관련된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소설 속 이름과 1910년 파차파 인구센서스에 나타나는 "제니 윌킨스"가 이름이 같다. 제니 윌킨스는 잭 전을 비롯한 전낙청 자녀들의 세대주로 나타나는 인물이다. '오월화'와 '구제적 강도'에 나타나는 잭 전 이라는 인물을 통해 미주 한인의 삶의 일부를 엿볼 수 있다. 이 두 소설이 연애소설인 만큼, 초기 미주 한인들이 어떻게 사랑하고 연애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작가가 작품을 창작할 때, 작자는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에 맞게 현실을 변형한다. 어떤 것은 과장하거나 또 어떤 것은 삭제해버리거나, 또는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한 과정 끝에 소설이 탄생되고, 소설은 현실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어떤 중요한 것을 새롭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잭 전'이라는 실제 인물을 모델로 했지만, 그의 삶 전체를 그대로 베껴놓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이 소설에 나타나는, 주인공 잭 전의 행적을 사실 확인용으로 활용할 수는 없다. 소설에서는 잭 전이 산수를 잘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아닐 수도 있다. 다만 넷째 아들 오미스가 수학을 잘해 캘텍 대학교에 진학했다는 것은 잭 전도 수학을 잘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캐서린을 좋아했는데, 실제로는 참한 한국 여성을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25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2018-03-04

인종차별 심한 SF 떠나 리버사이드로 이주

한인 24가구 거주…남자 62명, 여자 39명 타 지역과는 달리 가족 중심 공동체 형성 전낙청의 조카 전경무는 특파원으로 활동 1945년 귀국해 올림픽대책 부위원장 역임 파차파 캠프 한인들 파차파 캠프가 미국 최초 그리고 최대의 한인 타운이었다는 것이 새로운 연구로 밝혀졌다. 특히 파차파 캠프는 타 지역과는 달리 가족 중심의 공동체가 형성됐다는 특징이 있다. 젊은 총각 중심으로 형성된 타지역의 한인사회와는 달리 여성과 아이들이 함께 거주하는 가족 중심의 한인타운이 형성된 것이다. 1910년 미국 인구 조사에 의하면 파차파 캠프에 24가구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중 16세대는 여성과 아이들이 포함된 가족이었고 총각은 단 6가구였다. 부모는 없고 아이들만 타인에 맡긴 1세대도 있다. 총 101명 중 남성은 62명, 여성은 39명이었다. 파차파 캠프는 우연히 생긴 가족 중심의 한인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도 이미 밝혔다. 리버사이드에 거주하던 안창호를 공립협회 회원들이 샌프란시스코로 이주시켜 공립협회 본부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하와이, 중국, 한국에서 본토에 도착하는 한인들이 무사히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샌프란시스코는 반아시안 정서가 최고였던 시기로 아시안 이민자들은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할 수 없었으며 주거지역도 차이나타운에 국한되었다. 따라서 공립협회의 조직적인 도움이 절대 필요했다. 안창호와 공립협회는 새로 이주한 한인들에게 일자리를 구해주었는데 총각들은 새크라멘토, 유타, 몬태나 등으로 이주시켜 일자리를 제공한 반면 특히 건장하고 경험이 많은 한인 노동자들은 리버사이드로 이주시켰다. 농장주들에게 인정을 받아 더 많은 한인들이 리버사이드에 정착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에 옮긴 것이다. 특히 여성들과 아이들이 있는 한인들은 대부분 리버사이드 지역으로 이주시킨 듯하다. 도산 안창호와 공립협회는 리버사이드에 한인 공동체를 건설하여 일종의 베이스 캠프를 마련하고 독립 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던 것이다. 공립신보와 신한민보에 게재된 각종 기사와 광고를 분석하여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에 거주했던 한인 가족들의 모습과 생활상을 살펴 보기로 한다. 초기에는 안창호의 부인 이혜련의 척숙 (성이 다른 일가 가운데 아저씨뻘 되는 사람)인 김인수와 장남 김용련이 파차파 캠프 한인 공동체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김용련의 딸 바이올렛은 아직도 리버사이드에 거주하고 있다. 김순학과 아들 김태선은 리버사이드에 거주하다가 마차 사고와 암으로 일찍 사망했다. 전낙청과 그의 딸 엘렌, 조카인 전경무와 전경부는 리버사이드 거주하면서 살았던 모습을 글로 남겼다. 따라서 전낙청의 글과 엘렌 전, 전경무의 글들을 통해 당시의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차정석은 초기부터 리버사이드 공립협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파차파 캠프 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 차정석과 부인 차정성은 슬하에 자녀가 없었지만 교회와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백신구와 손광도 부부는 7남3녀의 자식이 있었는데 장녀인 백광선은 자서전 '조용한 방랑'을 남겼는데 파차파 캠프에서의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박충섭과 박영섭 형제 가족도 파차파 캠프의 주요 구성원인데 여동생 박애주는 구정섭과 결혼하여 리버사이드에서 함께 살았다. 후반기에는 리운경과 그의 모친이 파차파 캠프 명맥을 이어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전경무 가족 전경무는 전낙청의 형 전낙준의 아들이다. 하와이에 거주하던 전경무와 전경부 형제는 공부를 더하기 위해 리버사이드에 살고 있던 전낙청의 집에서 살면서 학교를 다녔다. 1913년 전경무가 중학교 1년급, 전경유가 소학교 2년급이었다. 전경유는 전경부를 잘못 표기 한 듯하다. '신한민보' 1913년 10월 31일 "리버사이드 학생. 리버사이드에서 공부하는 우리 동포 학생은 여좌. 전경무 중학교 1년급, 전경유 소학교 2년급, 김달리 동녀학생 1년급" 전낙준과 전경무 가족은 글 쓰는 재주가 많은 듯하다. 전낙준의 아들 전경무는 출판되지 않은 자서전을 남겼는데 그것을 읽고 사촌인 엘렌 전이 개인 메모, 즉 '퍼스널 노트(Personal Note)'를 쓰기도 했다. 거기에서 리버사이드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판잣집의 마루는 여기저기 균열이 있었고 쪼개진 곳도 있었는데 돈이 없어 고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머니는 돗자리라도 짜서 마루에 덮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시간이 없어 방치해야 했다. 이럴 때 경부와 경무의 어머니가 함께 있다면 돗자리를 함께 짤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곧 잊어버렸다." 이선주도 전경무의 기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한인 커뮤니티는 두 줄의 철로 부근에 있었다. 그곳은 모두 스무 채 가량의 빨간 주택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최근에 도착한 약 200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가정을 이룬 10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경부와 경무의 아버지 전낙준과 어머니는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었다. "집이 좁은 데다가 침대도 모자라서 한방에서 네 명이 마루바닥에서 자야 했다." 전낙청은 '홍경래전'과 '부도'라는 소설을 남겼다. 또한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동아시아 도서관(East Asian Library)에서 소장하고 있는 또 다른 전낙청의 글, '구제적 강도'라는 제목의 글이 있는데 '잭 전'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잭 전'이 리버사이드에 있는 미시즈 윌킨스를 만났고 '잭 전'은 '에바 헤스팅'과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미시즈 윌킨스'는 아래를 참고하면 '잭 전'을 돌보아 주던 주인집 아주머니이다. 아래의 '전 엘리자벳, 전 엘렌, 전 잭, 전 애모스, 전 에서'는 모두 전낙청의 자녀들이다. 전경무는 리버사이드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시간 대학에 진학하여 학창시절에 미식축구 선수 및 웅변부장으로 활동했다. 1923년 제1회 대한인유학생 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전경무는 유창한 영어로 사회를 보았다. 이때 서재필이 정계의 유학생의 선진이요, 원로로서 연설하였다. 1924년에는 미국 본토 미시간 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하와이에 있는 부모님에게 근친을 갔는데 하와이 사회에서 큰 환영을 해주었다. 전경무는 영어 웅변가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졸업 후 워싱턴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전경무는 1925년 9월12일에 서매리아와 결혼했다. 1928년 부부는 함께 풀러턴을 방문하여 동포들의 사택에서 만찬을 즐겼다. '신한민보' 1932년 8월 25일 "올림픽 대회의 성황, 인종 관념 없는 스포츠"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는데 이 기사를 취재한 사람이 신한민보사 특파원 전경무이다. 전경무는 대한인국민회 외교원으로서 시카고로 가서 중일 관계, 만주 문제, 조선 문제 등에 대해 강연하기도 했다. 1945년 전경무가 중국 공산당 신문의 통신원이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것은 거짓이라고 신한민보에서 변호해 주었다. 신한민보는 전경무는 중국 헌정당의 기관지 '신중국보'의 영문란 기자가 되었으나 헌정당과 그 기관지는 공산당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1945년 11월 한국으로 귀국하여 올림픽 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활동하였는데 1947년 6월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개최되는 제 40차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5월 29일 미군 전용기편으로 출발하였다가 일본 동경 비행장 근처에 있는 산정에서 탑승 비행기가 충돌하여 동승자 40명과 함께 참사했다. <24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2018-02-25

동포 자본 결집해 도산과 함께 회사 창업

김인수-김용련-김삼손 3대 거주 같은 초등 다니고 같은 묘지 묻혀 집 비운 도산 위해 가족에 큰 도움 나중에 중가주 델라노서 농장 운영 김인수 가족 김인수는 안창호 부인 안혜련(이혜련)의 외오촌숙(성이 다른 일가 가운데 아저씨뻘 되는 사람)으로 리버사이드 지방회에서 활동하며 파차파 캠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에 오래 거주했다. 1905년에는 리버사이드에서 지방회장을 역임했는데 그때 안창호를 맞이하는 행사를 열었다. 주로 오렌지 노동주선사로 활동하였다. 1912년에는 동포들의 자본을 결집하여 경제활동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안창호와 함께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창립하였다. 또한 참외 농사나 감자 농사 등 실업활동에 활발히 하였다. 김인수에게는 장남 김용련과 차남 김용찬, 장녀 김돌리, 차녀 김노라가 있다. 1913년 이후 김인수가 농업 경영을 위해 타처로 이거하였으나 자녀들은 리버사이드에 남아서 학교를 다녔다. 차남 김용찬은 1925년, 둘째 딸 김노라는 1935년에 사망하였다. 김인수는 말년에 다시 리버사이드에 거주하기도 했는데 리버사이드는 그의 본거지였다. 맏아들 김용련 역시 가족을 이뤄 리버사이드에 거주하였다. 1912년 김인수가 실업활동으로 타처로 이거했을 때 리버사이드를 지켰다. 오렌지 노동 주선일을 하였고 남아 있는 가족을 교육시켰다. 김용련의 부인은 김헤이즐이고, 자녀들로는 김삼손, 김맬리, 김조니, 김루시, 김바이올렛이 있다. 김인수의 자녀인 김돌리와 김용련의 자녀들인 김삼손, 김맬리, 김루시가 리버사이드 한글학교를 같이 다녔다. 김용련의 3녀인 바이올렛은 교사로 근무하다가 은퇴했고 지금도 리버사이드에 거주하고 있다. 김용련의 자녀들 중 유일하게 존 김만 결혼했다고 랠프 안이 알려 주었다. 리버사이드 시의 또 다른 묘지인 올리브우드 묘지에서는 헤이즐 김(Hazel Kim, 1889~1978)의 묘지가 발견되었는데 말리(Mallie M Kim), 조니(Johnny Kim), 루시(Lucy R Kim), 바이올렛(Violet C Kim)의 어머니이다. 말리는 리버사이드 갈보리 장로교회 초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기록도 있다. 김영N.(Young N. Kim, 1889~1954)의 묘지도 있다. 그는 김용련이다. 에버그린과 올리브우드 묘지에서 한인 6명의 묘지를 발굴했으며 그들이 모두 한국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인수의 가족은 디렉토리 명단에 따르면, 김닌수(Kim Nin Soo) 아래에 샘 김(Sam Kim), 돌리 김(Dollie Kim), 체스터 Y. 김(Chester Y Kim)이 있다. 김닌수는 김인수이다. 샘 김은 김인수의 손자이자, 김용련의 아들이다. 신한민보에는 김삼손으로 나타난다. 돌리 김(Dollie Kim)은 김달리 또는 김딸리라는 김인수의 맏딸이다. 체스터 Y. 김(Chester Y Kim)은 김돌리의 남편 김정일이다. 김돌리와 김정일은 1926년에 결혼하였다. 이 결혼식은 신부 김돌리의 친정인 김인수의 샌타애나 사택에서 이뤄졌다. 체스터 김과 돌리 김 사이에 아들 도널드 한명이 있다. 김인수와 관련된 최초의 기사는 1905년 공립신보이다. 리버사이드에서 귤따기 노동을 주선하는 김염수는 김인수일 수 있다. '공립신보' 1905년 12월 6일 "적귤방당. 전호에도 말하였거니와 리버사이드에 지금 귤따기를 시작되었는데 공가는 매일에 1원 17전씩이오 그곳에 있는 김염수 씨가 귤 딸 사람 백명을 모집하는 중이라더라." 당시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이 호황을 맞아 백명의 노동자를 모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인수는 1905년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리버사이드 거주한 후 1909년 타지역으로 이주했다가 1910년 다시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로 돌아와서 초기 한인타운 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 아들 김용련도 초기 리버사이드 한인타운 설립 및 운영의 중심 역할을 했다. 김인수의 첫째 아들 김용련은 1906년에 리버사이드 지방회에서 활동하였는데 '공립신보' 1906년 12월 22일 '하변회 보고'에서 리버사이드지방회 사찰로 나타난다. 특히 도산 안창호가 한국에서 신민회 활동을 하고 자주 타지역을 순방하여 정작 자신의 가족들을 돌볼지 못했을 때 이혜련의 삼촌 김인수는 큰 도움을 주었다고 막내 아들 랠프는 증언해 주었다. 김인수는 그후 중가주의 델라노(Delano)로 이주하여 큰 농장을 운영했다. <23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2018-02-18

"요주의 인물로 찍힌 도산은 이민국 감시 받아"

대질 심문 받았지만 체류 연장 허락 최종 판단 하지 않고 출국까지 파악 귀국선 소노마호 기관고장으로 회항 환송행사 후 샌프란시스코 출발 맞아 1925년 7월22일 샌프란시스코 앤젤 섬 이민국 문서는 안창호에게 체류 연장이 허가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1925년 8월16일부터 6개월간 체류가 연장되어 즉 1926년 2월16일까지 합법적 체류가 가능해진 것이다. 안창호는 1926년 3월 초에 하와이를 떠났는데 그것은 체류 기간이 넘었기 때문에 이민국이 1926년 3월 2일에 도산 안창호를 강제로 추방시킨 것이다. 안창호는 이민국에 체류 연장 허가를 해 준 것에 대해 감사 편지를 보냈다. 이 감사 편지는 흥사단 편지지에 1925년 8월6일자로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의 임시 커미셔너에게 보내졌다. "내가 신청한 임시 체류 연장을 허락해 준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당신이 보여준 친절과 배려에 깊은 사의를 표명합니다. 아쉽게도 체류 연장 허락 편지가 늦게 도착해서 동부로 가려던 계획은 연기하게 되었습니다." 안창호는 체류 연장 허가를 받은 후 활발한 활동을 지속했는데 '신한민보'는 지속적으로 안창호의 순방활동을 보도했다. '신한민보' 1925년 11월 12일에 '안도산 선생의 북가주 순행'이라는 제목으로 "안도산 선생은 현금 다뉴바와 태프트 등지에 있는 여러 동포들을 심방 중에 있다는데, 불일간에 상항에 도착할 듯하다더라"라고 하였다. 또한 '신한민보' 1926년 2월 4일자 기사에 '안도산 북방 동포 심방 중'이라는 제목으로 도산 안창호가 곧 원동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또 "도산 안창호 선생은 불일간에 원동으로 다시 갈 계획인 바 현금 북가주 몇몇 곳에 거류하는 동포를 심방하는 중이라더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신한민보' 1926년 2월 11일자 기사에서는 '안 도산은 태프트를 다녀와서'라는 제목으로 북가주 방문 소식을 알리고 있다. "도산 안창호 씨가 북방에 순행한다 함은 이미 보도하였거니와, (안창호)씨는 지난 토요일에 상항을 떠나 태프트에 있는 동포들을 심방한 후 나성 본택으로 회환할 예정이라더라." 안창호는 또한 시카고 심문 답변에서도 많은 곳을 방문했다고 밝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LA로 가서 약 2달 머물렀다. LA에서 스톡턴, 새크라멘토, 다뉴브, 리들리, 샌디에이고, 리버사이드, 베이커스필드를 방문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시카고로 향하던 중 덴버에 잠시 체류 후 시카고에 도착했다. 시카고에서 필라델피아, 뉴욕, 코네티컷주의 뉴헤븐, 보스턴, 폴 리버스 (워싱턴 DC), 뉴저지의 패터슨, 다시 뉴욕에 갔다가 시카고에 도착했다." 이민국은 안창호에 대한 대질 심문과 조사를 실시하고 일단 안창호가 신청한 체류 연장을 허락했다. 그러나 안창호가 공산주의자 또는 볼셰비스트인지에 대한 최종 판단은 유보한 상태로 요주의 인물로 분류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미국 이민국은 안창호가 미국 땅을 떠날 때까지 철저히 감시를 했는데 샌프란시스코의 앤젤 섬 이민국은 1926년 2월 6일 (12025/14120) 문서에서 안창호가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는 배에 타는 것을 확인하라고 적혀있다. 문서에는 "안창호는 2월 23일 또는 24일 소노마호(S.S. Sonoma)로 떠날 예정인데 23일인지 24일인지 정확하지 않다. 안창호의 체류 기간은 1926년 2월 16일까지 인데 안창호가 미국을 떠나는 것을 꼭 확인하라"고 적혀있다. 안창호가 소노마호에 승선한 기록에는 필기체로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Continued journey on Sonoma to Australia"(소노마 호를 타고 오스트레일리아로 계속 항해)" 그리고 이 글을 작성한 사람의 사인과 문서 번호도 적혀 있다. 미국 이민국은 도산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소노마 호에 탑승할 때 이미 안창호의 하와이 체류를 불허한 것이다. 1923년 2월23일 샌프란시스코 엔젤 섬 이민국 문서 (12025/14120)은 "안창호가 소노마호를 타고 떠난 것을 확인했다. 사진과 대조해서 확인했다"고 쓰고 있다. 그런데 이 문서 밑에 "1926년 3월2일 소노마로 떠났다. 그리고 이 배는 1926년 2월23일 고장 나서 되돌아 온 적이 있었다"고 적혀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안창호는 원래 하와이에 약 2주 체류하면서 동포들과 만난 후 상해로 갈 예정이었다. '신한민보'는 안창호가 미국을 떠나는 소식을 전했는데 '신한민보'는 1926년 2월 25일에 '안도산 송별회'라는 제목으로 자세히 송별회 소식을 전하고 있다. "1년 전에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왔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송별회를 상항 한인 예배당 안에서 22일 저녁에 개최하였는데 그 순서를 대략 소개하자면, 국민회 총회장 백일규 씨의 사회 하에 개회하고 애국가 1, 2절을 병창한 후에 사회자의 간단한 취지 설명이 있고 인하야 리대위 목사의 송별 기도가 있었다. 그리고 여학도 하소정, 김코렌의 병창 창가가 끝나자 사회자의 소개로 정빈 안도산 선생이 등단하여 40분 동안 도도 수천 언의 간곡한 연설을 하야 청중 중에 감정이 연약한 남녀의 눈물을 쏟아내었다. 그 연설의 상편을 필한 후에 황사선 씨의 독창 창가와 황보식 부인의 피아노 화창이 있은 후에 정빈이 연설을 다시 계속하야 약 40분 동안 열정의 권설이 있은 후에 '우리 다시 만날 때'라는 찬미 제 236장을 병창한 뒤에 정빈의 요청으로 애국가 3, 4절을 병창하고 임정구 목사의 기도로 폐회하다. 안도산의 연설 대지는 당신 스스로가 무슨 영웅이 되어서 우리 광복 사업을 하루 이틀에 성취하겠다고 담보는 할 수 없으나 우리 대한 혁명가 중의 한 분자의 자격을 가지고 우리 광복 사업을 위하야 최후의 일각까지 노력할 결심을 가지고 떠나시노라 하며 우리 일반에게 권고하신 말씀은 누구나 자포자기하지 말고 모두 철저한 대한민국의 혁명가야 되자 하였다. 안도산이 기자에게 잠시 전하는 말씀에 의하면 '이번 떠날 때에 태푸트.산타애나.라성.스탁톤.상항 등지를 심방할 시에 사랑의 송별회와 접대와 또한 예물을 많이 받았는데 무엇으로써 보답할는지 참말 알 수 없다' 하더라. 그리고 떠나시며 나중 말씀이 재미 일반 동포들의 건강과 행복을 축사하노라고 하더라." 안도산은 2월 23일 소노마 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하와이로 출발하였다. 김형찬은 안도산이 남가주의 샌페드로 항을 떠나 배가 고장 나서 샌프란시스코로 회항했다고 밝혔으나 소노마 호는 샌프란시스코 항을 떠났다가 고장 나서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회항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신한민보'에서 송별회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성대히 거행됐다고 보도했기 때문에 샌페드로 항에서 출발한 것이 아님이 확인 되었고 또한 소노마 호 승선 기록 (1926년 3월2일)에 의하면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1926년 2월20일 탑승했다고 적혀 있다. <20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2018-01-28

이민국 투서 탓에 가족 두고 도산 강제 추방 당해

안창호 감시와 수사 1924년 12월 24일자 앤젤 섬 이민국 자료(23880/1-6)에 의하면 "도산 안창호 가족 관계를 확인하고 그가 미국에 입국한 목적이 무엇이며 얼마 동안 체류할 예정인지를 직접 확인하라"는 내용이다. 이 문서에서는 콩 왕과 찰스 홍 이 이름으로 이민국에 제출된 투서로 조사가 시작됐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즉, 미국 이민국은 안창호를 모함하는 투서가 제출된 후부터 안창호에 대한 공식 조사를 시작했다. 1926년 3월 추방될 때까지 안창호에 대한 철저한 감시와 조사를 실시했고 비자기간이 만기되자 더 이상 연장을 허락하지 않고 1926년 3월 강압적으로 추방시킨 것이다. 이민국 문서를 통해 도산 안창호의 추방 과정을 상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1925년 4월 28일자 시카고 이민국 문서(2008/967)에 의하면, 이민국 직원이 106 피게로아 스트리트(106 Figueroa Street)에 있는 흥사단을 방문하여 도산 안창호를 만나려고 시도를 했으나, 당시 안창호는 동부를 여행 중이서 만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워싱턴 카페테리아의 버나드 김이라는 매니저가 도산이 30일 안에 돌아올 것이라고 확인해 주었고, 도착하는 즉시 이민국 직원에게 알리기로 하였다고 한다. 열흘 뒤인1925년 5월 8일자 LA이민국 문서(23880/1-6)는 안창호 신분 확인을 재차 주문하고 있다. 문서는 "안창호는 N. 106 피게로아 스트리트(N. 106 Figueroa Street)에 거주하고 있으니 확인을 부탁한다"는 내용이다. 1925일 5월 11일 LA이민국 문서(25140/24)는 "안창호 조사 중"이라는 제목으로 "안창호는 현재 동부를 방문 중인데 30일 안에 시카고에 도착할 것이다. 현재 모든 문서는 시카고로 보내졌다. 샌타바버러에서 알링턴 호텔 편지지에 투서를 써보낸 사람들을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찾지 못했다. 현재 안창호는 시카고로 갔으니 시카고 보고서가 작성되는 대로 추후 대책을 논의하게 될 것이다. 현재로서는 도산 안창호의 부인과 접촉하지 말도록 권유한다"라고 쓰여있다. 이처럼 이민국은 안창호를 흥사단에서 만나려고 몇 번 시도했으나 안창호가 동부를 여행 중이서 무산되었고 그가 시카고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시카고에서 대질 심문을 행한 것이다. '신한민보' 1925년 7월16일에 안창호의 시카고 방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동방을 여행 중인 안도산 선생은. 시카고에서 서방을 향하여 발정. 시카고 대학 연구과에서 학업을 연구하는 학생의 통신에 의하건대 안도산 선생은 동방 각처 재류 동포의 심방을 마치고 금월 8일 시카고에서 서방을 향하여 발정하였다는데 안 도산 선생은 디트로이트와 클리블랜드와 사우스밴드와 캔자스시티에 산재한 동포를 심방할 예정이라더라" 안창호가 대질 심문에서 밝힌 것과 같이 안창호는 전국 여러 지역을 돌면서 학생들과 만나왔고 또 만날 예정이었던 것이다. '신한민보'는 도산 안창호가 동부 방문을 마치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소식을 1925년 7월30일 "안 도산 상항 착"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동방 각처에 산재한 동포들을 심방하던 안창호 씨는 재작일에 상항에 무사 안착하였는데 선생의 말씀을 들은 즉 이번 동방 여행에 많은 취미를 보았으나 한 가지 유감되는 것은 미주 각처에 계신 동포들을 일일이 다 심방하지 못함이라. 특별히 미국 중부와 서부에 우리 동포들이 많이 계신 곳을 제제 심방코자 예정하였었으나 두 가지 사정상 관계로 인하여 중심에 먹었던 바를 진행하지 못함이 실로 유감이라 한다. 그 사정상 관계 중의 하나는 원동으로 다시 회환할 여행권의 기한이 찼으므로 미국 국무성에 연기 청원을 제출하였으나 가부간 회답이 없으므로 여행권에 대한 법률상 관계로 동포 심방을 계속할 수 없음이오, 또 하나는 여비 문제로 인하여 사세 부득이 여행을 정지하게 되매 다수 동포가 거류하는 곳에도 제제히 심방하지 못함이 일대 유감이라 하더라." 이는 안창호가 이민국에 감사 편지를 보낸 내용과 일치한다. 즉 안창호는 동부의 여러 곳곳을 방문하려고 했으나 여행 허가증이 늦게 도착해서 동포 심방을 계속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안창호는 여행 허가증을 받은 후 계속 동포 사회를 방문했다. '신한민보' 1925년 11월12일에 "안도산 선생의 북가주 순행"이라는 제목으로 이 같은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안도산 선생은 현금 다뉴바와 태프트 등지에 있는 여러 동포들을 심방 중에 있다는데, 불일간에 상항에 도착할 듯하다더라." 이러한 전후의 과정 속에서 1925년 6월3일 시카고 이민국에서 도산 안창호에 대한 직접 심문이 이뤄졌다. 1925년 6월 6일, 즉 심문 3일 후 시카고 이민국 문서(2008/967)는 지난 1925년 4월23일 이민국 문서(25140/24) 샌프란시스코에서 작성한 도산 안창호에 관한 파일(23880/1-6)과 도산 안창호 심문 파일 3장과 복사본과 함께 돌려보낸다. 이 파일은 1924년 12월 24일 투서가 접수된 직후 작성된 파일을 의미한다. 1925년 6월9일 LA이민국은 "안창호 조사 중"이라는 제목으로 시카고 이민국의 브레케 검사관이 1925년 6월3일 심문하여 작성한 심문서와 샌프란시스코 이민국 문서(23880/1-6)를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으로 다시 보낸다. 이것으로 안창호에 대한 조사는 끝난 것이다. 대질 심문을 마친 후인 1925년 6월24일 연방 노동부의 이민국에서는 안창호 신상 기록을 다시 작성했다. 이 문서에 의하면 "안창호는 맷소니아 호(S.S. Matsonia)를 타고 1924년 12월1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는데 당시 47세였다. 결혼을 했으며 직업은 교육자이며 영문을 읽고 쓸 수 있다. 그는 한국인이지만 중국 여권을 소유하고 있는데 중국으로 다시 돌아갈 예정이다. 당시 80달러를 소지하고 있었고 여비는 자비로 충당했으며 1908년부터 1919년까지 미국에 체류한 기록이 있다"라고 돼있다. 그러나 안창호는 1902~1907년 그리고 1911~1919년에 미국에 체류한 적이 있다. 이 문서는 안창호가 8개월간 미국에 체류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1925년 6월26일 샌프란시스코의 앤젤 섬 이민국 문서(12025/02)는 안창호의 체류 연장 신청 처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안창호는 원래 8개월의 체류 허가를 받고 1924년 12월 16일 미국에 입국했다. 안창호는 미국 전역을 여행했고 콩 왕와 찰스 홍 이가 제출한 투서(1924년 12월 15일 접수) 내용을 부인했다. 현재로서는 그 투서 내용의 진위를 판단할 수 없다. 따라서 최종 결정은 모든 정보를 분석한 후 내리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1925년 7월 11일 노동부 샌프란시스코 이민국 문서(55466/466)에는 안창호의 체류 연장 신청을 허락한다고 적혀 있다. 안창호는 6개월을 더 체류할 수 있었지만 투서로 인해 그는 사회주의자 혐의로 조사를 받았고 미국 이민국에서 도산의 신분에 대한 의심이 계속되면서 추방 대상자로 분류가 되었다. 그리고 비자가 만기되는 1926년 3월 초 강제로 출국당하게 된 것이다. <19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2018-01-21

도산 온갖 모함 불구 "내게 적은 없다"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 도산을 볼셰비스트, 즉 공산주의자로 모함한 투서가 동지회 소행이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그러나 간접적 또는 정황적 증거는 여러 곳에서 나온다. 김산은 도산 안창호가 1924년에 LA집에 공산주의 서적이 있다는 혐의로 체포된 적이 있다고 했다. 또한 곽림대는 1924년 뉴욕의 조그만 가게에서 우연히 서재필을 만났는데 그때 나눈 대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서재필이 '워싱턴에 있는 한인 지도자가 도산을 공산주의자로 모함했다'고 하자 내가 '그가 누군가?'라고 물었고 서재필은 화를 내듯이 '정녕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른단 말인가?'라고 대꾸했다. 나는 서재필이 이승만을 지칭한다고 생각했다." 고정휴도 이승만이 안창호를 공산주의자로 모함했다고 밝히고 있다. "1920년대 후반 구미위원부의 위원으로 활동했던 김현규의 회고에 따르면, '이 박사는 자신이 객거국에 대한 충성심에서 안창호, 박용만, 김규식을 과격파 공산주의자라고 미군 정보기관과 정부 반간첩 기관에 통고했다고 자랑하곤 했다'고 한다." 이처럼 이승만 자신이 안창호, 박용만, 김규식 등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한인 지도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미 정보기관에 모함했다는 간접적인 자료들이 있다. 따라서 미국 이민국에 도산 안창호와 흥사단, 대한인국민회를 볼셰비스트로 모함한 투서도 이승만 추종 세력의 소행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당시 이승만과 안창호, 박용만과의 갈등은 한인 사회를 분열시켰다. 그 한 예를 살펴보자. 이승만은 1919년 1월 15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국민회 임원들의 환영을 받았다. 국민회 임원들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승만을 환영했지만 이승만은 장문의 '비밀편지'를 하와이에 있는 측근들에게 보냈다. "첫째, 안창호는 목전의 외교운동비 모집 건으로 근일 하와이에 갈 예정인데 이미 미주 본토에서 모집한 의연금 1만 달러로도 충분하다. 따라서 성공가능성이 없는 사업을 빙자하여 하와이에서 다시 모금하려는 것은 절대 반대이니 동포들과 은밀히 연락하여 될 수 있는 한 이 모금에 응하지 않도록 하라." 이승만은 미주 한인 사회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과 단체에 대한 공격을 서슴지 않았으며 그러한 사례는 많다. 김형찬은 또한 "1925년 6월 24일자 편지에서 도산은 '누가 나를 공산주의자로 모함하여 정부 관계자가 흥사단 본부로 나를 찾아 왔었다'고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민국 자료에 의하면 도산 안창호는 1925년 6월 3일 시카고의 노동부 산하 이민국에서 대질 심문을 받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도산 안창호 추방 사건의 핵심 부분이기 때문에 일부를 번역한다. 이 대질 심문은 브레케(J.B. Brekke) 이민국 검사관이 담당했으며 버나드 김이 통역을 맡았는데 1925년 6월 3일 시카고의 이민국에서 조사가 이루어졌다. 질문: 이름이 무엇인가? 답변: 안창호. 질문: 언제 미국에 도착했나? 답변: 샌프란시스코에 1924년 12월 16일에 도착했다. 질문: 이렇게 많은 지역을 방문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답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인데 특히 학생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이 나를 초청해서 만난 것이다. 질문: 단순히 친구로 만난 것인가, 아니면 강연을 부탁한 것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답변: 개인적인 만남도 있었고 강연을 하기도 했다. 질문: 강연 주제는 무엇인가? 답변: 일반적으로 나는 대한민국의 독립과 자유를 준비하는 것에 대해 조언을 많이 했다. 학생들에게는 정직하게 일하고 기회가 있는 만큼 열심히 배우고 서로 도움을 주라고 했다. 질문: 당신은 소련 정부 또는 러시아에 관심이 있는가? 답변: 나는 직간접적으로 전혀 관심이 없다. 질문: 미국 정부에 대해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었는가? 답변: 아니다. 질문: 미국 정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미국 정부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답변: 나는 미국 정부에 관하여는 어떤 결점도 없다고 생각한다. 질문: 강연 내용 중에 미국 정부가 과격하게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나? 답변: 절대 아니다. 그럴 이유가 없다. 질문: '대한인국민회'라는 단체가 있는가? 답변: 그렇다. 질문: 어떤 목적으로 조직이 만들어졌나? 답변: 한국인들이 서로 협력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질문: 대한인국민회가 미국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노력을 했는가? 답변: 아니다. 질문: 미국에 적들이 있는가? 답변: 내가 아는 한 나에게 적은 없고 나의 행동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있을 수 있다. 질문: 미국에 입국한 진짜 목적이 무엇인가? 답변: 세 가지 목적이 있다. 첫째는 가족과 만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가난한 학생들이 일하면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교육에 관심이 많고 한국에서 교장도 역임했다. 셋째는 옛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질문: 상해로 돌아가기 전 얼마 동안 미국에 체류할 예정인가? 답변: 원래 8개월 간 체류할 예정이었는데 비자를 연장해 준다면 내년 1월까지 더 체류하길 원한다. 이 대질 심문에서 안창호는 자신이 가족과 옛 친구들을 만나고 가난한 한국 유학생들이 학업을 마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미국에 왔다고 밝히고 있다. 동시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는 도산의 투철한 애국심과 의연함을 엿볼 수 있다. 심문이 끝난 후 미국 이민국은 도산 안창호가 미국에 6개월 더 체류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도산 안창호는 1926년 2월까지 체류할 수 있게 되었다. <18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2018-01-15

이민국 모함 투서로 도산은 끝내 추방당해

도산 안창호 추방 (1924~1926) 도산 안창호는 모두 3차례 미국에서 거주했다. 첫번째는 1902년부터 1907년까지다. 즉 샌프란시스코에서 리버사이드로 이주하여 파차파 캠프 또는 도산 공화국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한 시기이다. 두 번째는 1911년부터 1919년까지로,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 활동을 활발히 전개한 시기다. 마지막은 1924년부터 1926년까지로, 미국 전역을 순례하면서 동포들을 격려하고 유학생들이 안정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 시기이다. 한편, 안창호는 미국 이민국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었는데, 무슨 이유로, 어떠한 과정을 거쳐 추방되었는지 여기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도산 안창호는 1926년에 마지막으로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하와이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추방'되면서 가족과 영영 이별하게 된다. 그리고 윤봉길 폭탄 투하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1938년에 생을 마감한다. 연방 노동부 산하에 속했던 이민국 자료(1924~1926)에 의하면, 이승만 추종자로 추측되는 콩 왕(Kong Wong), 찰스 홍 이(Charles Hong Lee)라는 두 사람 이름으로 안창호를 모함하는 투서가 접수됐다. 이 투서의 요지는 "안창호가 상해를 출발하여 하와이를 거쳐 곧 미국에 도착할 예정인데 그는 볼셰비스트, 즉 사회주의자이니 그를 유심히 잘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민국에서 대한인국민회를 특별히 조사하고 그를 중국으로 조속히 추방하길 희망한다"라고 했다. 이 투서로 미국 이민국은 도산 안창호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고 도산 안창호는 이민국으로부터 대질 심문을 받았다. 그는 줄곧 감시 당하다가 결국 1926년 3월 초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를 거쳐 추방됐다. "볼셰비스트 안창호" 연방 노동부 산하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에 1924년 12월 15일 '콩 왕'과 '찰스 홍 이' 이름으로 서명한 투서가 전달됐다. 도산 안창호가 1924년 12월1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 투서가 접수된 것이다. 그러나 이민국 담당자에게는 미처 전달 되지 못했기 때문에 도산 안창호의 입국은 허락되었다. 이 투서는 캘리포니아주 샌타바버러시의 알링턴 호텔 전용 편지지에 썼는데 총 4장의 장문이다. 영어 문법이 정확하지 않아서 뜻을 번역하기가 약간 힘들었다. 여기서 콩 왕과 찰스 홍 이 두 사람은 동일인물인지 아니면 다른 두 사람인지 확인되지 않았으며 이민국에서도 그들의 신원을 확인하려고 했으나 찾지 못했다고 이민국 자료는 설명하고 있다. 투서 내용은 이렇다. "안창호가 상해를 출발하여 하와이를 거처 곧 미국에 도착할 예정인데 그는 볼셰비스트, 즉 사회주의자이니 그를 유심히 잘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호놀룰루를 경유하여 곧 미국에 도착할 것이다. 그는 미국에 여러 해 살았으며 그의 가족은 LA에 거주하고 있다. 그 후 중국으로 건너가 6년간 체류하면서 볼셰비스트 정부 관계자들과 친분관계를 유지했는데 그가 지금 미국으로 오고 있다. 그는 볼셰비스트 정책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으며 LA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 그리고 흥사단이라는 또 다른 이름의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미국 전역과 멕시코에서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따라서 이민국에서 대한인국민회를 특별히 조사하고 그를 중국으로 조속히 추방하길 희망한다. 아마 대한인국민회는 자신들의 지도자인 안창호를 보호하려 할 것이다. 볼셰비스트 정책을 널리 전파하려고 하는 도산 안창호는 속히 중국으로 보내야 할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에서 로스앤젤레스 이민국에 서신을 보내면서 "이 투서 내용의 진위를 현재로서는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에 현지에서 조사를 해야 할 것이다"라면서 공식 조사를 시작했다. 투서에서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볼셰비스트이며 그가 조직한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 역시 볼셰비스트 조직으로 사회주의를 적극 전파하여 미국에 위협이 된다는 점을 시종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대목은 투서가 단순히 안창호 개인 만을 모함한 것이 아니고 흥사단과 대한인국민회도 볼셰비스트로, 즉 과격한 사회주의 단체로 모함했다는 것이다. 투서에는 이민국 관리자에게 경고하는 내용이 쓰여 있다. 나는 콩 왕과 찰스 홍 이에 관한 자료를 수개월 동안 추적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가명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대한인국민회와 대립 관계에 있었던 대한인동지회 관련 인물들, 즉 이승만의 대리인 또는 이승만의 추종 세력이 투서를 보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생각된다. 당시 미주 한인 사회는 안창호 지지 세력인 대한인국민회와 이승만 지지 세력인 대한인동지회, 박용만의 군사력 증진 세력 등으로 분열되어 반목과 충돌로 상호 불신과 대립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승만은 1921년에 동지회를 설립했는데 그 목적은 자신이 '대통령'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상해 임시 정부를 재정적으로 돕기 위해서였다. 이승만은 추후 영구 총재로 추대되었으며 동지회 회원은 총재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서약해야 했다. 따라서 당시에 동지회와 대한인국민회는 서로 세를 확장하고 회원을 영입하기 위해 반목, 대립, 충돌이 심했던 것이다. 즉 이 투서의 의도는 안창호,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을 공산주의 단체로 모함하여 안창호의 미국 입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을 미국 정부의 견제와 감시 대상이 되도록 하여 그 세력을 와해시키고 동지회의 세력을 확장하여 동지회를 미주 한인 사회의 대표 단체로 발전시키려는 것이다. '도산 안창호' 영문판 저자인 김형찬은 "도산 안창호가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이민국 관계자가 '흥사단은 나쁜 일을 하는 단체'라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김형찬은 또한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누가 흥사단에 대한 모함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 발굴된 자료를 통해 그 이유가 분명히 밝혀진 것이다. 안창호의 추방은 콩 왕과 찰스 홍 이 이름으로 보낸 볼셰비스트 모함 투서로 시작되었으며 이로 인해 미국 이민국에서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했고 안창호는 1926년 3월 2일 미국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추방된 것이다. <17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2018-01-07

한파로 오렌지 농장 위축…한인촌 인구 감소

리버사이드 지방회 재정적 어려움 커져 신한민보에 회관 폐지 보도까지 게재돼 지방회가 바인 도로로 이주 결정하면서 파차파는 더 이상 한인촌 역할 못하게돼 '신한민보'는 1912년 6월 17일에 "하변동의 사업. 리버사이드에 있는 동포 정동심.조갑석 양 씨는 사업에 착수하여 웨스트 리버사이드에 밭 15에이커를 6년 계약으로 세득하여 1년 감과 딸기 등의 채소 농원을 경영하기로 방금 기구를 준비하는 중이라 하더라"고 보도했다. '신한민보' 같은 날 다른 기사에서 "하변 동포의 의무금. 춘절을 당하여 각처에서 의무금 보냄이 심히 가득하고 성하더니 리버사이드에 있는 동포들은 신문이 오랫동안 나지 못함을 민망히 알고 의무금을 낱낱이 거두어 보낸 고로 본보가 다시 발간되는데 롬폭 지방 동포들도 이와 같이 의무금을 낱낱이 걷는 중이라 하니 응당 각쳐 동포가 한결같이 마음을 쓸 줄 믿노라"라고 했다. 안창호 가족이 1913년 12월에 LA로 이주한 후에도 1918년 말까지 리버사이드 한인타운에서는 왕성한 활동이 계속되었다. 1913년 한파로 리버사이드에서 성업 중이던 오렌지 농장 산업이 큰 타격을 받게 되자 한인 노동자들도 직장을 잃고 많은 한인들이 중가주와 타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그래서 파차파 캠프 거주 한인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차파 캠프는 한인타운으로서 계속 지속되다가 1918년 대한인국민회 지방회가 근처로 이주하면서 쇠락한다. 1917년 9월 6일 '신한민보' 보도에 의하면 "리버사이드 지방회는 8월 29일 제8회 국치 기념을 거행하였는데 재류 동포 전수 30여 명이 출석하여 침통한 예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이것을 통해 볼 때 그때까지도 30여 명의 한인들이 집단 거주하면서 활동을 전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17년부터 대한인국민회 리버사이드 지방회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한다. '신한민보'는 1917년 6월 14일에 "회보. 하변지방회"에서 "一. 본 지방회 채무보급의 부족액을 바쳤다. 一. 현금 노동의 시기로 인하여 회원 이거가 빈번하므로 4개월간 휴회하기로 하였다"고 보도했다. 또한 '신한민보' 1918년 2월 14일자 보도에 '하변 지방회의 변명…회관 폐지는 풍설'이라는 제목으로 "하변 지방회관의 유지 곤란은 본 신문 지난 호에 게재한 바 있다. 이제 동 지방회 총무 최재덕 씨의 변명을 보건대 이하와 같더라. '귀 신문 지난 호에 게재한 하변 지방회 사실은 누구의 와전인지 알 수 없거니와 우리 하변 지방회의 열심 있는 회원은 매우 불만족하게 생각하나이다. 이곳은 난리 '오렌지' 흉년을 인하여 사람이 많이 모여 잇지 못하거니와 모여 있는 동포는 실로 국민회에 대하여 열정을 기울이니 소수의 사람으로 지방회관을 이만큼 유지하여 오는 것은 스스로 자랑할 만한 일이올시다. 지나간 몇 년 동안 져 오던 지방회의 빚을 근래에 다 갚았고 국어학교를 계속하며 매주일 모이는 사람은 노소를 아울러 무려 20여 인에 달합니다. 아무런들 역사가 오래된 우리 지방회관을 어찌 폐지하오리까.'하였더라. 본보는 이 통신을 의지하여 지난번 통신을 한 풍설에 돌리고 하변 지방회원의 역사 관념이 건전한 것을 공경하노라"라고 보도했다. 이때는 이미 경제적인 어려움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신한민보'는 1918년 4월 18일 "회보. 리버사이드 지방회"에서 "4월 4일 통상회를 경유한 사항이 왼쪽과 같다. 一. 국어학교 직원을 왼쪽과 같이 새로 정하였다. 교장 박일우, 교사 최재덕, 재무 정인영. 一. 회관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교회 방을 얻어 쓰기로 하였다"고 보도했는데 지방회 회관과 교회를 통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18년 12월 대한인국민회 리버사이드 지방회관이 1532 파차파 애비뉴(Pachappa Avenue)에서 근처에 위치한1158 바인 스트리트(Vine Street)로 이전하면서 파차파 캠프는 한인타운으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된다. 필자는 파차파 캠프에 거주했던 한인들의 입국 경로를 찾다가 2차 세계 대전 이전 멕시코와 캐나다 국경을 건너 미국으로 입국한 한인들의 이름을 발견했다. 그러나 정확한 경로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물론 멕시코의 유카탄으로 반노예 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입국했을 가능성이 많아 명단을 대조해 본 결과 유카탄으로 이주했다가 육로로 멕시코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입국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엘렌 전이 쓴 기록에서 그 이유를 대략 알 수 있게 되었다. 1921년에 전낙청은 미국의 멕시코 국경 근처의 한 마을에서 포도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곳의 땅 주인이 그에게 "포도 농사를 지으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했고 그가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전낙청은 당시 한국 학생들이 멕시코에서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건너가는 방법을 모색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낙청은 주씨 성의 한 학생이 멕시코의 멕시칼리에서 미국의 칼렉시코로 넘어오는 것을 도와주었고 그 학생은 국경을 넘자마자 동부로 갔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꽤 유명한 예술인이자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 그는 워싱턴 디씨에서 활동하며 불법으로 미국으로 입국한 한국인들에게 합법적 지위가 주어지도록 증언하면서 자신도 전씨의 도움으로 입국한 사실을 밝혔다. 전낙청은 이러한 사실은 자신들의 자녀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구체적인 내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주씨는 미국으로 망명을 온 것인데 그 학생은 2년 동안 고비를 넘겨 만주에서 러시아를 통해 프랑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멕시코를 가는 배를 타고 멕시코에 도착 후 전씨의 도움으로 미국에 입국할 수 있었던 것이다. 2차 세계 대전 이전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입국한 한인들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16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2018-01-01

중앙총회 부회장 폭행해 대의원직 박탈돼

박용만씨 구타한 오진국씨 하와이 가던 중 사고로 사망  한인 학생 양성소도 설립 타지역 독지가 학비 지원 ▶정등렵 정등렵에 관한 기록은 1906년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공립신보' 1906년 6월 30일자에 기사에 "양씨권학. 회원 위영민, 정등렵 양씨가 학원에 들어가서 곤란을 참고 학업에 근실한 고로 총회에서 열성으로 공부하는 것을 치하하고 예물을 보내는데 차등 학생과 같이 한다더라"고 쓰고 있다. 그는 매우 명석하고 성실한 학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06년 리버사이드에서 소학교 7반에 입학하였고 1907년 4월 28일에 한인 장로 선교회에 가입했다. '공립신보'1907년 12월 13일 기사에 "솔트레이크 통신을 의거한즉 방건초 씨가 교육을 장려하여 학생 정등렵 씨에게 5원, 정봉화 씨에게 5원, 차의석 씨에게 3원씩을 매달 보조한다 하니 방씨가 사회에 열심 있는 것은 세상이 다 감복하는 바이거니와"라고 쓰고 있다. 1907년에 정등렵은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한인들의 조력으로 공부를 계속했고 특히 솔트레이크의 방건초라는 인물은 그의 교육 장려를 위해 지원금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여러 기사를 통해 그의 수학 과정을 알 수 있는데 그는 소학교를 일찍 마치고 중학교까지 학년을 높여갔다. 1909년에는 클레몬트 한인 학생 양성소의 회장으로 선출된다. 이후 1950년 12월 10일에 흥사단소에서 개최된 흥사단 제 37차 북미대회에서 대회 주석 위원장을 역임하는 것으로 보아 미주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1920년 미국 인구 센서스에 의하면 정등렵은 38세로 캘리포니아 다뉴브에서 가스 회사 엔지니어로 근무하고 있었다. ▶한기갑 한기갑은 1906년 4월 1일 한인 장로 선교회에 가입했다. 그의 리버사이드에서의 행적은 찾아볼 수 없으나 갈보리 장로교회 한인 명단에 1907년 11월 11일 LA로 이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클레어몬트로 이주하여 클레몬트 한인 학생 양성소의 발기인 중 한 명으로, 학생 양성소 설립에 크게 힘썼다. 1908년에는 한기갑 자신이 학생 양성소에 소학 7학년으로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학생 양성소의 취지에 가담하였을 뿐 아니라, 양성소에서 개최하는 토론, 연설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애국지사를 배출하기 위한 교육 운동에 주력하였다. 그는 1908년 핸포드 지방회 설립을 청원하였던 재류 한인 중 한 명으로, 캘리포니아 핸포드에 거주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활동 내역에 다른 재외 한인들의 흔적이 눈에 띄는데, 특히 같이 수학하였던 정등렵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을 듯하다. ▶오진국 오진국은 1906년부터 리버사이드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던 인물이다. 리버사이드 지역 한인회에서 학무, 회계 등을 담당하였고, '공립신보'의 리버사이드 지사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같은 지역 학생의 어려움을 보고 자발적으로 기부금을 내어 돕거나, 젊은 동포의 애석한 죽음을 신문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등 동포애와 애국심 또한 강했던 인물이었다. 1907년부터 덴버, 스톡턴, 솔트레이크시티, 샌프란시스코, LA 등을 돌아다니며 한인들의 정황을 파악하고, 각 지역 한인회의 임원으로 참석하였다. 그는 1908년 말까지 활발히 활동하였으나, 1909년부터 급격히 활동이 줄어들었고, 급기야 '신한민보'에 그가 최근 불미스러운 행동과 쟁투를 일삼는다는 비난의 글이 게재된다. 이후 한동안 그는 '신한민보'의 정간을 막기 위한 성금을 모으고, 국민의무금을 성실히 납부하는 등 건전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업무를 이행하며 지냈다. 이때에 그는 캘리포니아 스탁턴에서 이발 사업을 하였다. 그러나 1915년 7월, 오진국은 중앙총회 부회장 박용만 씨를 구타한 혐의로 리버사이드 지역 한인회 대의원직을 삭탈당하게 된다. '신한민보' 1915년 7월 22일의 기사에서 "스톡턴에서 이발 사업하는 동포 오진국은 본월 십이일에 본 항에 들어와 중앙총회 부회장 박용만 씨를 구타하여 박 씨는 다리가 상하여 백인여관으로 돌아와 치료하고 오진국은 본처로 돌아갔다. 그 사실을 듣건대 오 씨가 박 씨에게 대하여 신한국보를 하와이 지방 총회로 환본하는 것과 중앙총회 부회장을 사면하는 것을 당시로써 놓으라 하여 박 씨는 사실을 변명할 여가가 없음으로 이 두 가지를 써서 오 씨에게 준지라. 이 사건이 다 공체에 관한 일이매 개인의 행동으로써 할 바 아니다. 그럼으로써 비공식이오 또는 부정당한 거동이라는 물론이 많다더라"라고 하였다. 오진국은 이 판결에 불복하고 재심을 요청하였으나, 위원회의 판결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오진국은 갑자기 하와이행을 결심하여 9월 30일 하와이로 향하는 소노마 선에 탑승하였고, 배가 하와이로 향하던 도중, 오진국은 물에 빠져 사망하게 된다. 그의 죽음이 사고인지 자살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자살로 추정하는 여론이 우세하다. 오진국 사망 소식을 '신한민보'는 1915년 11월 11일 1면에 "태평양에 장사한 오진국"이라는 제목으로 "9월 30일 상오 2시 40분에 하와이로 가던 소노마 선편에 우리 동포 오진국 씨가 횡사함인지 자살함인지 그 죽은 경우난 리가 알지 못하거니와 그 죽은 사실이 분명함은 … 오 씨는 일찍 미주 한인 사회의 창립시대부터 오날날까지 자기의 생력을 다하여 힘쓰던 사람이라 한번 오 씨가 금년 칠월분에 국민회 중앙 총회 부회장에게 무례한 실수가 있은 후에 여러 사람의 동정을 스스로 끊고 홀로 비관에 처하였었도다."라고 보도했다. 오진국은 미주 한인 사회 창립부터 많은 공헌을 한 인물임을 '신한민보'는 전해주고 있다. <15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2017-12-24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