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사이드 공원묘지서 '김순학'의 묘지 발견
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도산 공화국(25)
자치 규칙 17조 마련해서 질서 잡기도
동포들의 행복 증진이 목적이라고 명시
중가주서 맹정희 등과 합동 농원 경영
130에이커 토지에 벼농사 시작하기도
국치기념 행사에서 기도와 기념사 담당
◆김순학과 김태선(1)
이선주는 리버사이드 근처의 올리브우드와 에버그린 묘지에서 한인으로 추정되는 4개의 묘를 발견했지만 그들이 한인이라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같은 묘지에 있는 순 김(Soon Kim)은 1919년 2월 25일 사망일자만 적혀 있고, 또한 사람인 김씨 리(Kimpsie Lee)는 1926년 1월 21일에 사망한 것으로 적혀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분명히 한인이라는 증거는 그들의 이름이 한국인의 것과 비슷하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선주가 밝힌 1919년 2월 25일 사망한 순 김(Soon Kim)은 김순학이다. '신한민보' 1919년 2월 27일에 "사망. 리버사이드 김순학 2월 23일 횡사"라고 나타나 있다.
김순학은 리버사이드 지방회에서 초기부터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활동했던 인물인데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 임시 의장, 한인 장로선교회 목사, 흥사단, 대한인국민회 리버사이드 지방회장 등을 역임한 중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리버사이드 에버그린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김순학의 묘비는 다른 한인들의 비석보다 크고 생전 기록이 자세히 적혀 있다. 그것은 아마 김순학이 한인 장로 선교회 목사를 역임했고 리버사이드 한인타운에서 리더 역할을 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김순학은 "대한인국민회원이며 동시에 흥사단원이며 한국인"이라고 한국어로 적혀 있으며 "29살인 1904년 10월 12일에 도릭 호를 타고 부인과 함께 하와이에 도착했는데, 작은 체구"라고 적혀 있다.
김순학이 리버사이드에 언제 도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리버사이드 지방회에 처음 입회한 시기는 알 수 있다. 김순학은 '공립신보' 1907년 5월 10일 '하변지방회보' 보도에 처음 이름이 나타난다. "위총회 의연 제씨.…김순학 1원" 김순학은 1907년 5월 리버사이드 총회를 위한 의연금을 1원 낸 것으로 나온다. 적어도 1907년 5월 이전에 리버사이드 지역으로 이주했음을 알 수 있다.
'공립신보' 1907년 6월 14일 "하변지방회보. 리버사이드 지방회장 김영일 씨의 보고를 거한즉 신입한 회원은 리근술.김순학 양 씨오…" 김순학은 1907년 6월에 새로 리버사이드 지방회 회원으로 들어온다.
특히 김순학은 1911년 11월 22일 리버사이드에서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가 열렸을 당시 리버사이드 지방회 임시 회장을 수행하고 있었다. '신한민보' 1911년 11월 20일 "리버사이드지방회보. 본월 11일 체임 통상회에 새로 피선된 임원은 왼쪽과 같다. 회장 김순학, 부회장 리병억, 총무 리병억, 서기 마춘봉, 재무 박충섭, 법무 안리영, 구제 김용년, 대의원 김린수." 김순학은 1911년 11월에 처음 리버사이드 지방회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또한 김순학이 리버사이드 지방회 회장으로 있을 때 지방 자치 규칙 17조가 마련되었다. 리버사이드의 치안과 질서를 확립한 것이다. '신한민보' 1911년 12월 4일 "리버사이드 지방회 임시 회장 김순학 씨 보고를 거한즉 11월 18일 특별회에서 지방 자치제도를 조직하고 응용 규칙 17조를 기초하였는데 그 요령은 거류지 질서를 정돈하며 패류를 숙청하여 전체 동포의 행복을 증진이라 함. (가칙 전문은 래호에 기재함)"
그리고 1913년에 리버사이드 지방회 부회장을, 1914년에 회장을 역임하였다. '신한민보' 1912년 12월 9일 "하변 지방회보. 본월 2일 체임 통상회에 개선한 임원은 왼쪽과 같다. 회장 차정석, 부회장 김순학…."
'신한민보' 1913년 12월 19 "하변지방회보. 동 회장 김순학 씨의 보고를 거한즉 명년도에 시무할 새 임원은 여좌히 공선한 일. 회장 김순학, 부회장 리일…." 1916년에는 법무원, 1917년에 대의원과 실업부원 등을 역임한다.
'신한민보' 1916년 2월 8일 "하변지방회보. 회장 리학현, 부회장 정지영, 총무 안영일, 서기 최윤호, 재무 이성민, 학무원 조득린, 법무원 김순학, 구제원 박충섭, 대의원 문영운." '신한민보' 1916년 12월 21일 "리버사이드지방회보"에 따르면 김순학은 명년도 대의원과 실업부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 김순학은 경제 활동에도 참여한다. 김순학은 윌로우쓰에서 맹정희 등과 함께 합동농원을 경영하였다. 130에이커 토지에서 6350석을 수확해서 순이익 1113원 가량을 남겼다. '신한민보' 1916년 12월 7일 "윌로우쓰 벼농사의 수확, 임지성 순이익 4백여 원 맹정희 순이익 1천여 원. 윌로우쓰 한인 벼농사 맹정희 신광희 마춘봉 김순학 4인의 합동 농원과 임지성 리진섭 양인의 합동 농원의 수학 보고를 듣건대 대체 이익을 본 것이 이하와 같으니 맹정희 농원 130에이커의 수확이 6350석이라 매석 1원 65전에 도매하여 총합 9665원 94전을 가지고 경비금 8552원 83전과 기타 고본을 제하니 순이익이 1113원 11전이라 하고…."
1917년 리버사이드 국치기념 행사에서 김순학은 기도와 국치기념사를 맡았다.
'신한민보' 1917년 9월 6일 "리버사이드 지방의 국치 기념. 참통한 예식의 순서. 리버사이드 지방회는 8월 29일 제8회 국치 기념을 거행하였는데 재류 동포의 전수 30여 명이 출석하여 참통한 예식을 거행함이 좌와 같더라."
1. 국가…일동
2. 기도 …김순학
3. 취지 설명…주석 최윤호
4. 창가…정부인
5. 국치기념사…김순학 곽룡주
6. 창가…아이들
7. 국치를 씻을 준비…주석
8. 총회관 가옥채를 위한 연조
9. 기도 폐식.
'신한민보' 1918년 1월 24일 '리버사이드 지방회보'에 따르면 김순학은 재무로 나타난다.
김순학은 1918년 창립 기념절 행사에서 "우리 하변 지방회 역사"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김순학이 10년 이상 리버사이드에 계속 머물면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지방회의 역사에 대해 강연하는 역할을 맡은 것 같다.
이 창립기념절 예식에서 아버지 김순학이 강연한 다음 순서에서 아들 김태선이 창가를 불렀다.
'신한민보' 1918년 2월 14일 "창립기념절 각 지방, 리버사이드 지방회. 재류 남녀 동포 23인이 당일 식장에 출석하여 동 지방회장 구정섭 씨 주례하에 좌와 같은 예식을 순서로 거행하였다더라. "
1. 개회…주석 구정섭
2. 국가…일동
3. 취지…주석
4. 창가…아이들
5. 축사…리운경
6. 사현금…최재덕
7. 축사…(누구나)
8. 우리 하변 지방회 역사…김순학
9. 창가 …김태선
10. 애국가…일동
11. 삼호만세
12. 폐식 다과 (리운경 씨 축사는 폭원이 없어서 생략함.)
김순학은 속병으로 입원하기도 했다. '신한민보' 1918년 6월 27일 "김씨 입원. 리버사이드에 재류하는 김순학 씨는 속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본월 19일 병원으로 들어갔다더라."
<26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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