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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두고 돈벌러 타지 다녀오기도

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도산 공화국(35)
리운경 가족③

아들 윌리암은 포병 소위 활약
종군 기록인 '청년용사록' 올라
1943년엔 워싱턴 주립 대학서
군인들에게 한국어 가르치기도


▶김씨리는 어머니

1926년 1월 21일에 사망한 김씨리(Kimpsie Lee)는 리운경의 어머니이다.

'신한민보' 1926년 1월 28일자에는 "사망. 리운경씨 모친(라성). 1월 19일 별세"라고 나타나 있다. 리운경은 1926년 당시 LA에 있었고 리운경 모친도 '나성'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리버사이드 에버그린 묘지에서 "리운경 모친묘"를 찾았는데 당시 리운경 가족들의 본거지는 리버사이드였던 것 같다.

딸 이순희는 1925년에 나성이 아닌 리버사이드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자녀는 리버사이드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를 비롯한 일부 가족들은 사회활동이나 노동을 위해 주거지인 '리버사이드'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신한민보' 1943년 6월 10일자 내용이다. "이윌리암 군의 승직. 리버사이드 바인 스추리에 거류하는 리운경씨와 동부인의 령윤 윌리암 군은 그간 오드 캐롤리나 주 떼비스 영문에 있는 항공 포병학교에서 공부하더니 지난 5월 13일 그 학교를 졸업하는 동시에 연안 포병대 소위로 승직하였다. 그는 잠깐 동안 휴가를 얻어 귀성하였다가 새로 임명을 받은 곳으로 가서 새로운 직무에 복무한다더라."

1918년 11월에 대한인국민회 리버사이드 지방회가 근처 바인 스트리트(Vine Street)로 이전했는데 이운경은 1918년부터 1919년까지 리버사이드 지방회에서 대의원으로 일했었다. 그러므로 바인 스트리트는 리운경에게 친숙한 곳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리운경은 1943년에 세월이 흘러서 나이가 들자 다시 가족들이 살던 리버사이드로 돌아왔던 것 같다. 리운경이 죽자, 본거지인 리버사이드에 묻혔을 것이다.

▶리운경의 자녀들

리운경이 리버사이드에 살았던 1918년에 딸 이순희는 리버사이드 국어학교 갑반이었다. 또한 을반의 리윌링, 리에디, 리이시다, 병반의 리계선 모두 리운경의 자녀이다.

1917년 리버사이드에서 리윌리엄은 그랜쓰 관립학교 1학년을 다녔고, 리순희는 로학교 3학년을 다녔다. 모두 소학교이다. 리운경은 새크라멘토, LA로 이주 했다가 말년은 리버사이드에서 보낸다.

리운경은 1920년에는 북가주 새크라멘토에서 1400에이커의 농원을 류명선 등 6인 공동으로 운영했다.

'신한민보' 1920년 8월 26일자는 "북가주 순행기. 리운경 씨의 주장하는 농원에 당도하니 이곳은 리운경 류명선 씨 등 6인의 10분 병작하는 곳이라…"고 적고 있다. 1923년에는 LA로 이주하여 리영수와 합자하여 식물 상점을 경영했다.

1923년 9월 27일자는 "남가주 동포 심방"이라는 기사에서 리운경의 일터와 사택이 각각 다른 도시에 있었음이 나타난다. 리운경은 LA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했고 사택은 리버사이드에 있었다.

'신한민보' 1923년 9월 27일자 내용이다. "남가주 동포 심방. (제2면에서 이어옴) 박기란씨의 그로셰리와 홍치범씨의 그로셰리와 리운경씨의 그로셰리와 차정석 한승은 양 씨의 동업인 실과상점과 송현주씨의 자사업인 그로셰리를 차례로 심방하니 이곳이 28일의 심방의 마지막이오, 상업처소의 삼방도 마지막이라. 느즉하여 처소에 돌아와 밤을 지나고 그 익일 즉 29일 아침에 박일우씨와 동반하여 스테지를 잡아타고 나성에서 약 30마일 가량 되는 휫들리어에 당도하니 이곳은 윤필건 리전 량씨의 실과 상점이라. … 리버사이드에 당도하여 구정섭씨의 실과 상점 김용련 리운경 구정섭씨의 사택을 일일히 심방하고 김태선씨의 유숙처를 심방하였으며 박영섭씨의 유숙처도 심방하고 동일 하오 7시 30분에 스테지를 잡아타고 LA에 돌아와서 밤을 지나니 이날은 즉 초2일 예뱃날이라."

1924년에 LA에서 중앙 총회장 최진하씨를 위한 환영회를 열었다. 이때 이운경의 요릿집에서 만찬회가 개최되었고 특별히 청요리를 대접하였다.

'신한민보' 1924년 8월 28일자는 "LA 지방회에서 총회장 환영회. 제2회 만찬회의 성황, 다년간 적공이 많은 총회장 최진하 씨를 위하여 만찬회를 17일 하오 7시 35분에 윤필건, 리운경 양 씨의 동업인 찬관에서 개최하였는데 특별히 준비한 청요리로써 빈주가 즐겁게 나누고 해산하였다더라"고 적고 있다. 리운경은 1934년 LA에 있는 여자애국단 신임원 취임식에서 리운경이 축사를 하기도 했다.

딸 이순희는 1925년에 리버사이드 중학 4년생으로 나타난다. 아버지 리운경이 LA에 있었던 1925년에도 이순희는 리버사이드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리버사이드가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신한민보' 1925년 5월 21일자에 "미주 한인 대중소 학생. 리순희 하변 중학…4년생"으로 나타난다. 1927년 이순희는 나성 중학교에 다녔고, 리웰리는 팔리 중학에 다녔다. 리웰리는 이운경의 아들 리윌리엄일 수도 있다. 모두 학년은 알 수 없다.

리운경의 아들 이윌리엄은 1943년에 종군했다.

'신한민보' 1943년 1일 14일자 보도 내용이다. "종군 한인 청년회. 본보는 재미 한인 제2세들이 미한 양국 동원령하에 무장을 떨치고 북미 대륙에 종군한 '청년 용사록'을 만들기 위하여 나성으로부터 각지에서 종군한 제2세의 방명을 차례로 게재하겠고, 재미 한족 연합 위원회 집행부 사무과에서는 이 기록에 근거하여 '종군기'를 만들어 국민 총회관 벽상에 걸고 용사 '스타―'를 부처 광영의 숫자를 표시합니다. 리윌리암 군(리운경 씨 동부인의 령윤), 손폴(손숭조 씨의 령윤), 현재호(현승길 씨 동부인의 3자), 현재윤(현승걸 씨 동부인의 4자), 김쪼(김영근 씨 동부인의 령윤) 이상 1백 10인."

1943년에 리운경은 리버사이드 바인 스트리트에 살았다. 그의 아들 이윌리엄은 포병대 소위로 승직했다.

'신한민보' 1943년 6월 10일자는 "이윌리암 군의 승직. 리버사이드 바인 스추리에 거류하는 리운경 씨와 동부인의 령윤 윌리암 군은 그간 오드 캐롤니나 주 떼비스 영문에 있는 항공 포병학교에서 공부하더니 지난 5월 13일 그 학교를 졸업하는 동시에 연안 포병대 소위로 승직하였다. 그는 잠깐 동안 휴가를 얻어 귀성하였다가 새로 임명을 받은 곳으로 가서 새로운 직무에 복무한다더라"고 보도했다.

1943년 리운경은 워싱턴 주립 대학에서 군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는데 그 임무를 마치고 LA로 돌아왔다.

'신한민보' 1943년 10월 7일자는 "지방 통신. 와싱톤 주립 대학에서 군인들에게 한어를 교수하던 리운경 씨는 그 임무를 마치고 지난 2일에 나성에 래도하여 체류중이라더라"라고 게재했다.

<끝>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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