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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따듯했던 그때 그 이웃들

방송국 특파원으로 미국에 처음 왔을 때 LA인근 버뱅크 시에 주거지를 마련했다. 버뱅크에는 NBC와 CBS 방송국, 워너 브라더스와 디즈니 영화사, 유니버설 스튜디오 등 미디어 분야 기업들이 집중돼 있어서 마음이 끌렸었다. 집은 드벨이라는 골프 코스 바로 아래에 있어 동네는 고요하고 쾌적하며, 비교적 안정된 분위기였다.     당시 부임하자마자 엄청난 격무에 시달렸다. 방송국 자회사의 방송과 운영을 맡고 있었는데 누적된 적자와 소송 문제, 노조와의 분쟁 등을 겪고 있었고 방송 내용도 조악했다. 방송에 대한 한인들의 불신도 문제였다. 이처럼 현안이 쌓여있다 보니 업무 부담과 스트레스는 말할 수 없었다.     이사한 뒤 몇 주일이 지나자 이웃들이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길에서 만나면 먼저 밝은 미소로 인사를 하면서 따듯하게 말을 걸어왔다. 우리 가족도 그 호의에 성심껏 다가갔다. 이따금 한국 음식도 나누어 주고, 한국문화원에서 한국을 소개하는 화보나 책자를 구해서 돌리곤 했다. 아랫집의 칼 변호사 가정, 그 바로 옆집의 광고회사 사장 딕 네, 뒤쪽 보잉 항공사에서 고위급 엔지니어로 일하다 퇴직한 앤디, 위편에 록히드 항공사 간부 출신 샘, 길 건너 아들의 학교 동급생 친구 마이클 가족이 우리 집을 둘러싼 이웃들이었다. 그들과 점점 더 관계가 가까워져서 만나면 이야기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졌다. 특히 딕은 유엔군 소속으로 부산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알게 돼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정원의 스프링클러가 고장이 났을 때나 후원에 고목이 된 살구나무와 뽕나무를 전지할 때, 차고 문을 자동으로 교체할 때, 가족 중에 병치레할 때나 아이들의 학교 행사가 있을 때 그들은 자기 일처럼 달려와 도와주었다.     이웃들은 자연히 미국 주류사회의 문화, 특히 생활 방식과 가치 체계를 들여다보고 적응할 유리창이자 학교였다. 남에게 조금도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깔끔한 처신, 문제를 어떻게라도 해결해주려는 배려심, 언제 만나도 반갑기만 한 살가운 인사성, 그리고 명품처럼 세련된 매너와 꾸밈없는 언행은 미국 생활을 익히는데 본보기였다.         회자정리(會者定離), 40대의 십여 년을 그렇게 평화로운 동네에서 훈훈하게 지내다가 뉴포트 코스트, 새 둥지로 떠나는 날 이웃들은 집 앞에 모두 모여 배웅을 해주었다. 울컥 감정이 차올라 눈시울을 적신 쪽은 오히려 우리 가족이었다.  가끔 그곳에 들렀다가 동네도, 사람들도, 우정도 남겨놓은 채 옛 둥지를 벗어날 때면 높은 야자수 사이로 쌓였던 추억들이 아련히 멀어져갔다.   송장길 / 언론인·수필가이 아침에 이웃 방송국 특파원 방송국 자회사 방송국 워너

2024-08-06

[이 아침에] 바다의 빛, 바다의 울음

고향은 두메지만 나이 들면서 바다가 곁으로 자꾸 다가왔다. 기회 있을 때마다 바닷가에 나갔고, 여름 휴가철에는 어김없이 해수욕장으로 달려갔다. 방송사 특파원으로 장기 체류한 곳도 두 군데나 해안 도시였다.     홍콩은 빅토리아 해를 해자로 두르고 보석처럼 반짝거렸고, 태평양의 배꼽 같은 로스앤젤레스도 길고 아름다운 해안선을 끼고 융성하고 있었다. 바다는 늘 거대한 수정체로 시야를 가득가득 채웠고, 살가운 바람은 살갗을 문지르고 폐와 뇌를 청소해 지친 심신의 생기를 살려내 주었다. 태양이 이글거리며 떠오르는 여명에는 심부로부터 파토스가 치솟았고, 낙조가 현란한 수채화를 그려내면 그 예술에 홀려 무아의 지경에 잠기곤 했다.   방송사를 사직하고 자영업을 시작하면서는 아예 바닷가로 이사해 바다와 밀월기를 보냈다.  남 캘리포니아의 뉴포트코스트, 배산임수(背山臨水) 언덕의 거실에서 내려다보는 바닷가 경관은 대형 화폭이었다. 하늘이 코발트색이면 바다도 짙푸르고,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으면 덩달아 거무스름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면 회색으로 변해 물장구를 쳤고, 해무(海霧)가 짙게 드리우면 바다는 희뿌연 이불을 덮고 숨었다.                해변의 바위 턱에 걸터앉아 있으면 여기가 오늘에 재현된 ‘에덴’의 서쪽이라는 착각에 취하기도 했다. 뭍 쪽으로는 해송(海松)과 삼나무들이 촘촘히 도열해 있고, 아래로는 모래밭이 곡선으로 휘어지며 끝없이 달리고 있었으며, 육지의 가장자리는 바다의 혀가 부단히 핥아서 보얗게 씻어주었다. 그 위의 광활한 창공을 사다새와 가마우지, 갈매기, 비둘기, 제비들이 무정형으로 이리저리 바쁘게 날아다녔다. 큰 떼를 지어 군무를 춰도 서로 부딪지 않으니 자유와 질서의 진수를 보여주는 장관이었다. 새들의 울음소리는 파도 부딪는 소리와 물결 이는 소리, 바람 소리와 어우러져 정교한 교향곡이거나, 불협화음이 뒤섞여 이루는 웅장한 화음처럼 들렸다. “신의 작품이다” 라는 탄성이 입안에서 우물거렸다.       샌디에이고 쪽에서 샌프란시스코 방향으로 순양함급의 군함 한 척이 느리게 지나가고 있었다. 검고 큰 선체에 여러 개의 포신을 사방으로 겨누고 있어서 괴물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망막에 닿자 시야는 급변해 군함색으로 물들고, 푸르던 바다의 색깔은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다. 하늘에서는 빛의 향연이, 바다에서는 검은 해신의 유령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거실로 돌아와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흉측한 어둠 속에서 띄엄띄엄 작은 불빛들이 가물거렸다. 밤바다의 풍랑과 무서움을 이겨내는 인간들의 의지가 아닌가. 그 형상 위에 동방에서 바다를 건너와 쭈그리고 앉아 있는 존재, 그 삶의 궤적이 겹쳐졌다. 내면에 잠재해 있는 나의 작은 세상은 바다의 빛깔과 바닷소리의 변주 속에서 흔들리는 작은 조각배였다. 송장길 / 언론인·수필가이 아침에 바다 울음 뉴포트코스트 배산임수 바닷가 경관 방송사 특파원

2023-07-11

[특파원 시선] '트럼프 사용법' 알아낸 정치 새내기의 파란

[특파원 시선] '트럼프 사용법' 알아낸 정치 새내기의 파란 트럼프와 적정거리로 버지니아주지사 당선…중간선거에도 효과낼지 관심     (워싱턴=연합뉴스) 백나리 특파원 = "남편과 산책을 하는데 공직에 출마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저는 말을 잠깐 멈췄다가 '당신,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는 게 분명하네'라고 했지요." 미국 버지니아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한 공화당 글렌 영킨(54) 후보의 아내 수잰이 지난 2일(현지시간) 밤 수락 연설을 하러 나오는 남편을 소개하며 한 얘기입니다. 장내를 메운 지지자들 사이에 웃음이 터졌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킨 후보는 출마 선언을 할 때만 해도 정치 경험이 전무한 새내기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글로벌 사모펀드 칼라일그룹의 최고경영자(CEO)를 지내기는 했지만, 버지니아주지사를 한 차례 지낸 바 있어 주민 대부분이 알고 있는 민주당 테리 매콜리프 후보를 상대하기엔 버거웠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영킨 후보가 곧 나와 10여 분간 수락 연설을 했습니다. 교육에 대한 대대적 투자와 대규모 감세 등과 같은 공약을 실현해 당장 변화를 만들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지지자들은 환호했습니다. 하지만 연설에 '트럼프'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영킨 후보가 선거운동 기간 내내 쓴 전략이기도 합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를 확보하면서도 아주 밀착하지는 않으면서 일상에 밀접한 이슈를 중점적으로 부각, 중도층으로 지지를 확대하는 게 영킨 후보의 전략이었습니다. 선거 유세에 같이 서는 일도 없었습니다. 선거 전날 저녁 트럼프 전 대통령이 전화로 지지 유세를 해줬지만 역시 영킨 후보는 모습을 비치지 않았습니다. 대선사기 주장에 따른 혼돈과 의회 난입 사태를 겪으면서 트럼프 전 대통령 쪽에서 한발 물러난 온건 보수를 집중적으로 공략한 겁니다. 영킨 후보의 전략은 주효했습니다. 지난 8월만 해도 5∼6%포인트 차이로 앞서나가선 매콜리프 후보를 추격하더니 선거 직전에는 초접전으로 따라붙어 추월에 성공했고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습니다. 영킨 후보에게 유리한 변수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4년마다 열리는 버지니아주지사 선거는 대선 1년 뒤에 이뤄져 현직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을 갖는데 버지니아 주민들은 1970년대 이후 2013년을 제외하고는 야당 후보를 뽑아줬습니다.       공화당에서는 영킨 후보의 승리도 승리지만 내년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트럼프 사용법'을 알아냈다는 점을 큰 소득으로 치는 분위기입니다. 대선이 조작됐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으며 전통 보수층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미국 우선주의' 구호로 지지층의 열렬한 반응을 끌어내는 트럼프 전 대통령과 적정거리를 유지하면서 중간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여소야대 정국으로 바꿔버리겠다는 구상입니다. 다만 트럼프 전 대통령이 얼마나 협조할지는 미지수입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24년 대권 재도전을 강하게 시사하고는 있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출마 선언을 하지는 않은 상태라 비교적 몸을 낮추고 있습니다. 만약 2022년 중간선거 전에 트럼프 전 대통령이 출마 선언을 하고 전면에 재등장해 존재감을 과시하게 된다면 '트럼프와의 적정거리 전략' 같은 건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공화당에서도 중간선거 전에 트럼프 전 대통령이 출마 선언을 하는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역시나 버지니아주지사 선거 승리의 공로도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영킨 후보가 승리한 다음 날 아침 곧바로 라디오에 출연, "MAGA가 아니었다면 15%포인트 이상 졌을 것"이라며 "우리에게 공로를 돌리는 대신 다들 '트럼프보다 인기가 있네'라고 한다.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MAGA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이었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의 줄임말이자 자신을 따르는 지지층을 지칭합니다. 이제 1년 뒤에 치러질 중간선거에 트럼프 전 대통령이 공화당의 걸림돌이 될지 버팀목이 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nari@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특파원 시선 트럼프 사용법 트럼프 사용법 도널드 트럼프 버지니아주지사 선거

2021-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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