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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조종무 1세대 원로 언론인 타계

뉴욕 한인 언론계의 1세대로 일생을 한인사회 언론 발전과 역사학 연구에 헌신한 조종무(사진) 장로가 지난 5월 24일 새벽에 뉴저지주 티넥 홀리네임병원에서 향년 83세를 일기로 소천했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고인은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를 거쳐 지난 1973년 미국으로 와 ▶동아일보사 뉴욕지사 편집국장 겸 상무 ▶조선일보 뉴욕지사 논설위원 ▶교포신문 발행인 등을 역임하며 뉴욕 일원의 한인 신문과 방송계를 중심으로 한인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또 그는 만년에는 한인 이민사와 주요 인물평전, 팰리세이즈파크 등 한인타운 지역사 등을 연구해 한인 이민사 연구에 디딤돌이 될 많은 저서를 출간했다.   고인은 이러한 저술활동으로 한인 이민사의 체계를 잡는데 기여했는데, 그의 저서들은 미국 학계에서도 한인 이민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고인의 장례예배는 29일(수) 오후 7시 30분, 발인예배는 30일(목) 오전 10시에 뉴저지주 리지필드에 있는 뉴저지 중앙장의사에서 진행된다. 하관예배는 같은날 오전 11시 30분에 뉴저지주 잉글우드에 있는 브룩사이드 세미트리에서 열린다.   장례 호상은 뉴욕한인회·뉴저지한인회·고려대 뉴욕동문회·한인사회 연구재단·뉴욕가정상담소·뉴욕경제인협회·뉴욕민화협, 장례위원은 이무림, 강현석, 김영덕, 정해민, 민병갑, 이문성, 하용화, 김광석, 정홍균, 김광희, 황미광, 임마철, 허순범(이상 직함 생략) 등이 맡았다.   유가족 연락처는 안병구 장로(201-556-8668). 박종원 기자 park.jongwon@koreadailyny.com조종무 고 조종무 조종무 타계 조종무 원로 언론인 조종무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조종무 조선일보 교포신문 조종무 역사학 조종무 저서

2024-05-27

[민감(敏感) 중국어] 선화혁명(鮮花革命)

지난달 27일 중국 안후이성의 수도인 허페이시 도심 훙싱로 80번지. 가방을 맨 어린 학생이 어머니가 챙겨주는 국화를 벽에 고이 세우고 허리를 숙였다. 68세의 나이에 불귀의 객이 된 리커창(李克强, 1955~2023) 중국 7대 총리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훙싱로 80번지에는 이후 일주일 동안 추모객의 선화(鮮花), 즉 생화가 산을 이뤘다.   47년 전 베이징에서 비슷한 장면이 연출됐다. 19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周恩來) 초대 총리가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영구차가 천안문 앞 장안가를 지나자 추모 인파가 ‘십리장가송총리(十里長街送總理)’ 정경을 이뤘다. 당시 문화대혁명 10년간 쌓인 불만이 4월 청명절에 천안문에서 폭발했다. 군 통수권이 없던 장칭(江靑) 등 사인방은 ‘반혁명행위’라며 민병과 공안을 동원해 진압했다. 책임을 덩샤오핑 당시 부총리에게 씌워 축출했다. 9월 마오가 죽자 상황이 급변했다. 사인방 타도에 이어 2년 뒤인 1978년 말 당은 천안문 4·5 운동을 완전한 혁명운동으로 복권했다.   리커창은 저우언라이가 아니다. 다만 청렴과 당내 자유파의 대표라는 이미지가 겹친다. 리커창 타계 사흘 뒤 대만의 한 라디오(RTI)가 꽃의 혁명이라며 ‘선화혁명(鮮花革命)’을 처음 언급했다. “리커창으로 인해 중국이 생화의 바다를 이뤘다. 중국의 운명을 바꾸는 한바탕 선화혁명”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때로는 침묵도 혁명이며, 백지부터 생화까지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중국인의 마음이 이미 바뀌었음을 보여줬다”며 “리커창이 중국인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이라고 했다. 덩위원(鄧聿文) 시사평론가도 ‘선화혁명론’에 동조했다. A4 백지를 온몸에 붙인 청년, 방역 요원 등 상하이 청년들의 핼러윈 행진을 보며 “중국 청년이 정치에 관심을 잊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다.   민심은 쉽게 바뀐다. 리커창을 애도하는 ‘선화혁명’과 상하이의 핼러윈 행진에 당국은 SNS 통제와 베이징 지키기에 주력했다. 훙싱로를 가득 메운 생화 주위에는 푸른 조끼를 입은 감시요원을 세웠고 영결식이 끝나자마자 생화를 말끔히 치웠다.   그럼에도 리커창의 영결식 당일 베이징의 한 대학 캠퍼스 사진이 퍼졌다. “내 무덤에 서서 울지 마오. 나는 거기 없다오, 나는 떠나지 않았소.” 영문학자인 고인의 부인이 번역한 ‘천 개의 바람이 되어’로 잘 알려진 추모시였다. 신경진 / 한국 중앙일보 베이징 총국장민감(敏感) 중국어 선화혁명 리커창 타계 상하이 청년들 영구차가 천안문

2023-11-19

타계한 '한인 이민자의 표상'

    지난 6일 향년 84세를 일기로 별세한 미국 최대 동양식품 리브라더스(Rhee Brothers, Inc.) 설립자 고 이승만(Syng Man Rhee) 회장의 장례가 11일 엄수됐다.   메릴랜드 엘리컷시티 소재 벨엘교회에서 박민재 목사의 집례로 열린 장례예배는, 기도, 성경봉독, 설교(백신종 목사), 아들 이용빈, 이라빈, 손주 노승 씨의 조사 및 동생 이승길 롯데플라자마켓 회장의 인사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워싱턴 한인사회의 산증인이자 경제계의 '거목'인 고인의 장례예배는 가족 친지 이외에도 수많은 조문객들이 발걸음 했다. 이들은 지난 1968년 도미한 이래 50년 이상 '청렴', '검소', '봉사' 등 덕목을 실천하며 '리브라더스'를 미주 한인 대표기업으로 성장시킨 고인을 '한인 이민자들의 표상'으로 추억하며 애도했다.     한편 고 이승만 회장은 강원도 강릉시에서 1938년 출생해 1959년 선린상업고등학교와 1963년 성균관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1968년 학업 차 도미해 1970년 워싱턴DC의 아메리칸 대학 대학원을 수료했다. 1963년 ROTC 1기 장교를 거쳐 1976년 주식회사 리브라더스를 설립한 고인은 동양식품 도매업을 시작, 2000년 회장으로 취임했다.    특히 1963년 4•19 학생운동 주체 멤버로 대한민국 건국포상 244호, 2009년 한국 농수산식품장관 표창, 2018년 아시안 상공회의소 비즈니스 리더상 등을 수상했다. 리브라더스 40주년인 2016년 워싱턴한인커뮤니티센터 건립에 10만 달러를 기부했고, 2020년 메릴랜드 코리아타운 조형물 건립에도 기금을 전달했다.   박세용 기자 spark.jdaily@gmail.com이민자 타계 한인 이민자들 워싱턴한인커뮤니티센터 건립 워싱턴 한인사회

2023-05-12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타계

영국인의 정신적 지주이자 영연방의 수장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96세로 서거했다.   영국 왕실은 8일(현지시간) 여왕이 이날 오후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왕위 계승권자인 여왕의 큰아들 찰스 왕세자가 즉각 국왕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25살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뒤 영국의 군주와 영연방의 수장 자리를 지켜왔다.   영국 최장수 군주이면서 세계 역사상 두번째로 오랜 기간 재위하며 세계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여왕은 즉위 70년 만에 임무를 내려놓게 됐다.   건강 문제에도 불구하고 지난 6일 엘리자베스 트러스 신임 총리를 임명하는 등 최후까지 역할을 충실히 다했다.   이날 왕실이 여왕의 건강이 우려된다는 의료진의 판단을 공개한 후 왕실 직계 가족들은 속속 밸모럴성에 모여들었고 BBC가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여왕 관련 소식을 생중계로 전하는 등 전국이 긴박하게 움직였다.   한편 백악관은 여왕의 타계 소식에 즉각적으로 애도의 뜻을 밝혔다.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언론 브리핑 도중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여왕의 가족과 영국 국민에게로 향한다"며 깊은 애도의 뜻을 밝혔다.   그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말했듯이 미국과 영국 국민과의 관계는 점점 더 강해져왔다"며 "영국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동맹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연합뉴스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타계 엘리자베스 트러스 도중 엘리자베스

2022-09-08

짐 라이언 전 IL 검찰총장 타계

오랜 기간 투병 생활을 해온 전 일리노이 주 검찰총장이자 주지사 후보였던 짐 라이언이 타계했다. 향년 76세.     유가족은 지난 12일 성명서를 통해 지병을 앓아온 라이언 전 검찰총장이 집에서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라이언 전 검찰총장은 그동안 림프종암을 비롯 몇 가지 질환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라이언은 1995년부터 2003년까지 일리노이 주 검찰총장으로 재임했다. 이전에는 듀페이지 카운티 검사장으로 10년간 일했었고 2002년에는 주지사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민주당 소속 로드 블라고야비치 후보에게 패했다.     당시에는 공화당이 제임스 톰슨, 짐 에드가, 조지 라이언 주지사까지 연속으로 주지사직을 이어간 바 있다. 1977년부터 2003년까지 26년 간을 공화당이 주지사직을 내주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언이 패배한 이후로는 브루스 라우너 주지사 한 명을 빼고 민주당이 줄곧 주지사직을 장악하고 있다.     라이언 전 검찰총장은 이름 때문에 선거에서 피해를 많이 본 사례로 거론된다.   2002년 주지사 선거만 하더라도 전임 조지 라이언 주지사와 혼동하는 유권자들이 많았다. 조지 라이언 주지사는 부정부패 혐의로 후에 유죄를 선고 받아 선거에서 불리하게 작용됐고 잭 라이언이라는 상원 후보 역시 2004년 선거에서 문란한 사생활로 중도 사퇴했는데 유권자들이 이를 짐 라이언으로 착각하곤 했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짐 라이언을 전직 주지사로 알고 있다는 유권자가 19%로 나왔을 정도였다.    하지만 주 검찰총장으로 짐 라이언은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업체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온라인 사기와 갱 조직 단속을 강화하는 등 주요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폭력 예방을 위한 단체 설립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시카고서 태어나고 성장한 라이언 전 검찰총장은 자녀 두 명을 이른 나이에 잃고, 아내의 심장마비, 척수암, 심장 수술을 겪는 등 개인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콰메 라울 일리노이 검찰총장은 "라이언이 쉽지 않은 개인사를 겪으면서도 일리노이 주를 위해 희생하고 힘 쓴 노고와 헌신을 잊지 않을 것"이라며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Nathan Park•Kevin Rho 기자검찰총장 라이언 검찰총장 타계 조지 라이언 주지사 선거

2022-06-14

짐 라이언 전 일리노이 주 검찰총장 타계

오랜 기간 투병 생활을 해온 전 일리노이 주 검찰총장이자 주지사 후보였던 짐 라이언이 타계했다. 향년 76세.     유가족은 지난 12일 성명서를 통해 지병을 앓아온 라이언 전 검찰총장이 집에서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라이언 전 검찰총장은 그동안 림프종암을 비롯 몇 가지 질환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라이언은 1995년부터 2003년까지 일리노이 주 검찰총장으로 재임했다. 이전에는 듀페이지 카운티 검사장으로 10년간 일했었고 2002년에는 주지사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민주당 소속 로드 블라고야비치 후보에게 패했다.     당시에는 공화당이 제임스 톰슨, 짐 에드가, 조지 라이언 주지사까지 연속으로 주지사직을 이어간 바 있다. 1977년부터 2003년까지 26년 간을 공화당이 주지사직을 내주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언이 패배한 이후로는 브루스 라우너 주지사 한 명을 빼고 민주당이 줄곧 주지사직을 장악하고 있다.     라이언 전 검찰총장은 이름 때문에 선거에서 피해를 많이 본 사례로 거론된다.   2002년 주지사 선거만 하더라도 전임 조지 라이언 주지사와 혼동하는 유권자들이 많았다. 조지 라이언 주지사는 부정부패 혐의로 후에 유죄를 선고 받아 선거에서 불리하게 작용됐고 잭 라이언이라는 상원 후보 역시 2004년 선거에서 문란한 사생활로 중도 사퇴했는데 유권자들이 이를 짐 라이언으로 착각하곤 했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짐 라이언을 전직 주지사로 알고 있다는 유권자가 19%로 나왔을 정도였다.   하지만 주 검찰총장으로 짐 라이언은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업체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온라인 사기와 갱 조직 단속을 강화하는 등 주요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폭력 예방을 위한 단체 설립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시카고서 태어나고 성장한 라이언 전 검찰총장은 자녀 두 명을 이른 나이에 잃고, 아내의 심장마비, 척수암, 심장 수술을 겪는 등 개인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콰메 라울 일리노이 검찰총장은 "라이언이 쉽지 않은 개인사를 겪으면서도 일리노이 주를 위해 희생하고 힘 쓴 노고와 헌신을 잊지 않을 것"이라며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Nathan Park•Kevin Rho 기자일리노이 검찰총장 검찰총장 타계 조지 라이언 라울 일리노이

2022-06-13

호킹도 못다 푼 숙제…블랙홀 증발의 미스터리

'모든 것 흡수, 아무것도 방출 안 해' 기존 이론 대신 '열 방출, 소멸' 제기 소멸 때 물질 정보 들어있지 않아 '블랙홀의 정보 역설' 문제 생겨나 경계면 너머 홀로그램에 정보 저장 '부드러운 털' 이론 제시, 더 밝혀야 우주에서 정보가 영원히 사라질 수 있는가? 지난 14일 별세한 세계적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제기했고 마지막까지 탐구했던 의문이다. 이날 과학전문지 라이브사이언스는 "그의 '가장 흥미로운' 과학적 질문은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 있다"고 보도했다. 호킹의 가장 유명한 논문 '블랙홀 폭발?'이 발표된 것은 44년 전인 1974년이었다. 이것은 물리학자들에게 충격을 줬다. 고전적인 개념에 따르면 블랙홀은 완전히 차가워야 한다. 모든 것을 흡수하고 아무것도 방출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70년대엔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었다." 로욜라대 물리학자 로버트 맥니의 말이다. 이 같은 블랙홀은 에너지를 전혀 방출하지 않으며 어떤 물질도 여기서 탈출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차갑고 조용한 상태로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호킹의 논문은 이 천체를 살아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천체가 소멸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70년대 초반 호킹은 양자역학적 효과를 검토한 뒤 깨달았다. 블랙홀은 마치 열과 온도를 지닌 물체이기라도 한 것처럼 원칙적으로 복사파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블랙홀이 에너지를 방출한다면 질량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블랙홀이 수축하면서 온도가 높아지며 더욱 빠른 속도로 복사파를 내놓게 된다는 것을 호킹은 발견했다. 결국 블랙홀은 아마도 완전히 사라지거나 아주 작은 덩어리로 수축할 것이다. 블랙홀 증발의 이 같은 최후 단계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력을 다루는) 상대성이론과 (입자를 다루는) 양자역학을 완전히 통합하는 굳건한 양자 중력 이론이 있어야 한다. 물리학자들은 이를 '만물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이라고 부른다. 호킹의 젊은 시절을 다룬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의 원래 제목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의 계산에 따르면 소멸 단계에서 블랙홀이 내놓는 것은 오로지 열밖에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블랙홀을 만들게 된 물질의 상태에 대한 정보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이는 양자역학의 기본 법칙에 어긋난다"고 맥니는 말했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모든 입자의 미래와 현재 전체는 원리상 파악이 가능해야 하며 일련의 인과관계와 확률론적 사건을 통해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만일 블랙홀이 자신의 정보(역사)가 복원 불가능하게 지워진 상태로 상호 구별이 불가능한 입자들의 수프를 내놓는다면 이 같은 원리에 근본적으로 위배된다. 물리학자들은 이를 '블랙홀의 정보 역설'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는 양자 중력 이론이 만들어진 이래 이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호킹이 경력 후반부에 발표한 가장 극적인 논문은 2014년 발표된 '블랙홀의 정보 보존 및 날씨 예보'다. 이에 따르면 전통적인 의미의 블랙홀은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블랙홀의 주변은 심지어 빛조차 탈출할 수 없는 경계면 즉 '사건의 지평선'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의 논문은 이것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빛이 갇혀 버린 겉보기 사건의 지평선이 존재하지만 이 지평선은 사라질 수 있고 여기서 빛이 탈출하는 것도 허용된다고 그는 썼다. 이것은 사실상 블랙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고 그는 설명했다. 블랙홀의 정보 역설을 해결하기 위한 호킹의 마지막 시도는 2016년 논문이었다. 케임브리지대의 맬콤 페리, 하버드대의 앤드루 스트로밍어와 함께 발표한 '블랙홀의 부드러운 털(Soft Hair on Black Holes)'이다. 이들은 블랙홀이 부드럽거나 에너지가 없는 입자들(소위 '털')로 둘러싸여 있다고 주장했다. 이 털은 블랙홀이 방출하는 입자에서 사라진 정보를 블랙홀 경계면 너머에 있는 홀로그램 판에 저장한다. 그러므로 정보는 형태가 바뀌기는 하지만 정말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홀로그램 판을 완벽하게 묘사하는 것이나 정보 역설을 완전히 해결하는 것은 아직 미해결의 과제다. 우리는 이 문제에 접근할 새롭고 구체적인 도구를 이번에 제시한 것"이라고 이들은 논문에 썼다. 블랙홀의 정보 역설은 양자 중력 이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핵심 질문의 하나로 남아 있다. 한편 호킹의 마지막 연구는 또 다른 우주의 존재에 관한 것이었다고 18일 영국 더타임스가 보도했다. 벨기에 KU 루뱅대의 토머스 헤르토흐 교수와 함께 쓴 논문의 제목은 '영구 인플레이션으로부터의 유연한 출구?'다. 헤르토흐 교수는 "호킹이 사망하기 2주 전에 내용을 최종 협의하고 동의를 얻었다"고 밝혔다. 논문은 1급 학술지에 제출돼 검토가 진행 중이다. 이는 우리 우주가 무수한 우주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다중우주(multiverse)' 이론에 관한 것이다. 우선, 우주는 아주 작은 점으로부터 지수적으로 초팽창해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본다. 문제는 '우리의' 빅뱅은 무한한 수의 여러 빅뱅과 함께 일어났어야 한다는 점이다. 해당 이론에 따르면 이에 따라 각각 별개의 무수한 우주가 만들어져야 했다. 다중우주가 우주배경복사에 흔적을 남겼으며 우리는 이를 우주선에 설치한 탐지기로 측정할 수 있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이다. 우주배경복사란 빅뱅의 흔적으로 온 우주에 퍼져 있는 태초의 빛을 말한다. 하버드대 천문학과의 학과장인 에이비 뢰브는 해당 논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수학을 이용해 이 같은 수학적, 철학적 병목을 우회하고 다중우주에서 존재할 수 있는 유형의 우주에 대해 실질적인 예측을 내놓았다." 조현욱 과학과 소통 대표·객원 과학전문기자

2018-03-27

뉴턴, 다윈 옆에 눕는 호킹…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 예정

지난 14일 타계한 세계적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가 선배 과학자인 천재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과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 곁에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하게 됐다. 20일 BBC 등 영국언론은 호킹 박사의 유해가 화장된 후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1727년 뉴턴이 묻혔고, 이어 1882년 다윈이 안치됐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존 홀 주임 사제는 성명에서 "스티븐 호킹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사원 내 걸출한 선배 과학자들 곁에 안치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삶과 우주의 미스터리라는 위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과학과 종교의 협력이 필수라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호킹 박사의 유족은 오는 31일 케임브리지대의 그레이트 세인트메리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를 예정이다. 이 교회는 호킹이 50년 넘게 재직하며 우주의 비밀을 탐구해온 이 대학 곤빌 앤 키스 칼리지 인근에 있다. 호킹의 세 자녀는 "아버지는 50년 넘게 케임브리지대에서 지내며 연구했고, 이 대학과 도시의 잘 알려진 핵심 구성원이었다"며 "그가 너무 사랑했고 그를 사랑한 이 도시에서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삶과 작업은 종교인이든 아니든 많은 사람에게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며 "그래서 장례식은 그의 삶의 다양성을 반영해 전통적이면서도 융합적으로 치러질 것"이라고 말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가장 최근에 안치된 유명 과학자로는 뉴질랜드 출생으로 맨체스터대에 재직한 원자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포드(1937년)와 영국 실험물리학자 조지프 존 톰슨(1940년)이 있다. 사원에는 역대 영국 왕과 여왕, 역대 총리 8명의 유해도 안치돼 있다. 최근 안치된 주요 인사로는 영국의 세계적인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1989년)가 있다. 김성탁 특파원

2018-03-21

호킹 박사의 마지막 연구는 '또 다른 우주의 존재 가능성'

최근 타계한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사진) 박사의 마지막 연구는 또 다른 우주의 존재 가능성에 관한 것이었다고 18일(현지시간) 영국 더타임스가 보도했다. 호킹 박사는 임종을 앞두고 인류가 어떻게 다른 우주를 발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논문 '영구 팽창으로부터의 순조로운 탈출(A Smooth Exit from Eternal Inflation)'을 완성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다중 우주(multiverse)'의 실험적 증거를 찾기 위한 우주 탐사 로켓에 필요한 수학적 계산에 착수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우리의 코스모스(cosmos·우주)가 수많은 우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이론에서 비롯한 것이다. 호킹 박사와 이 논문을 공동 저술한 벨기에 KU 루뱅대의 토머스 헤르토흐 이론물리학 교수는 "스타트렉(Star Trek)이 발을 디디기 두려워했던 곳까지 대담하게 나아간 이가 호킹 박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종종 노벨상 후보에 올랐고 받았어야만 하는데, 이제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두 사람의 논문은 호킹 박사가 1983년 동료 물리학자 제임스 하틀과 함께 고안한 '무경계 가설' 이후 호킹 박사를 괴롭혀 온 문제에 다가서고 있다. 무경계 가설은 우주가 어떻게 빅뱅과 함께 갑자기 나타났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2018-03-19

루게릭병과 함께 55년…호킹의 우주엔 장애가 없었다

"최악의 신경질환을 극복하고 우주의 가장 심오한 비밀을 탐구했으며 전 세계에서 인간 정신력의 상징이 된 물리학자"(워싱턴포스트). "현대 우주론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으며 수백만 명의 세계인에게 영감을 준, 과학의 하늘에서 가장 빛나던 별."(가디언) 지난 14일 별세한 영국의 세계적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에 대한 언론들의 보도다. 76세. 자녀들은 그가 케임브리지의 자택에서 숨졌다고 이날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아버지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다면 우주는 대단한 곳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를 영원히 그리워할 것"이라고 밝혔다. 21세 때'2년 시한부'선고받고 극복 호킹은 뉴턴과 아인슈타인 다음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과학자다. 학자들에게는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을 결합한 우주론으로 이름 높지만 일반인에게는 루게릭병으로 뒤틀어진 신체로 더 유명하다. 호킹은 1942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열대병 전문 의사인 아버지와 적극적인 자유당원인 어머니 사이에 4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 모두 옥스퍼드대 출신이었고 그는 17세에 같은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자연과학 분야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62년 우주론과 일반상대론을 공부하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원에 입학했다. 앞서 그는 대학 졸업반 시절부터 비틀거리거나 넘어지는 증상을 보였다. 검사 결과 온몸의 근육이 서서히 마비되는 희귀병인 퇴행성운동신경질환(일명 루게릭병)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의사는 2년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는 판정을 내렸다. 21세 때인 63년의 일이었다. 우울하게 지내던 그는 신년 파티에서 제인 와일드라는 젊은 여학생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이들의 사랑은 그에게 삶의 의지를 북돋웠으며 두 사람은 65년 결혼했다. 그는 발병 확인 후 55년간 수많은 업적과 일화를 남겼다. 그의 병은 특히 서서히 진행되는 매우 예외적인 사례였던 것으로 드러났지만 자신의 의지와 탐구심 덕분이기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두 손가락만 겨우 움직이는 상태로 휠체어에 부착된 음성합성기로 대화를 나누고 강연을 했다. 말년에는 뺨 근육의 움직임만으로 컴퓨터를 작동하며 연구를 계속한 불굴의 인물이었다. "미니 블랙홀로 노벨상 못 타 아쉽다" 그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갑자기 나는 깨달았다. 내 사형 집행이 연기된다면 할 일이 너무 많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이를 계기로 물리학 연구를 진지하게 시작한 뒤 그는 선언했다. "나의 목표는 단순하다. 우주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다. 왜 현재와 같은 모습을 띠고 있는지, 애당초 왜 존재하는지를 말이다." 그는 66년 박사 학위를 받은 뒤 70년 첫 업적을 발표했다.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로저 펜로즈와 함께 블랙홀의 수학을 우주 전체에 적용해 먼 과거에 특이점이 존재했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시공간이 무한대로 휘어지는 특이점으로부터 대폭발(빅뱅)이 일어나 지금의 우주로 팽창했다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업적은 74년 발표된 소위 '호킹 복사'였다. 미니 블랙홀이 열을 방출하고 결국에는 사라질 것이라는 내용의 양자이론을 도출한 것이다. 블랙홀이란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로 중력이 강한 천체를 말한다. 보통은 태양 질량의 세 배를 넘는 것이지만 우주의 초창기에 만들어진 미니 블랙홀은 그렇지 않다. 양성자보다 작은 크기에 질량은 100억t인데 전 우주에 퍼져 있을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나중에 그는 "이것이 발견되면 노벨상을 받았을 텐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이런 공로 등으로 그는 74년 32세 때 영국 왕립협회의 사상 최연소 회원으로 선출됐다. 5년 후엔 케임브리지대의 루카스 석좌교수가 됐다. 아이작 뉴턴, 폴 디랙 등이 역임한 가장 명예로운 자리다. 두 번째 부인의 학대 혐의 조사 불응 그의 업적은 80년대까지 계속 발표됐다. 우주 인플레이션 이론은 어린 우주가 초고속으로 팽창하는 시기를 겪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82년 호킹은 양자 요동-물질 분포의 미세한 변이- 덕분에 초팽창 과정에서 우주에 은하들이 퍼져 나갈 수 있음을 보였다. 이들 작은 파문이 별과 행성, 생명체의 씨앗을 낳았다는 것이다. MIT의 물리학자 막스 테그마크는 "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이디어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그를 대중 스타로 만든 것은 '시간의 역사'다. 88년 발간된 이 책은 40개국의 언어로 번역돼 1000만 부가 팔렸다. 하지만 사람들이 사 놓고 읽지 않은 목록에서도 1위로 꼽힌다. "여자는 완전 미스터리" 성차별 논란도 그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우주론에서 특히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상, 울프상, 코플리 메달, 기초물리학상을 받았지만 노벨상은 받지 못했다. 이는 실험적 업적이나 실험으로 확인된 이론에 대해서만 상을 주는 탓으로 해석된다. 호킹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첫 부인과는 세 자녀를 두었으나 92년 파경을 맞았다. 호킹의 상태가 악화되며 그의 요구 사항은 늘어나고 병세에 대한 논의를 거부한 탓이라고 제인은 말했다. 그녀는 호킹을 "거대하고 성마른 자아를 지닌 어린애"라며 자신들이 "주인과 종의 관계"가 돼 갔다고 썼다. 호킹은 별거를 시작해 자신의 간호사인 일레인 메이슨에게로 떠났다. 두 사람은 법적 이혼이 마무리된 5년 후에 결혼했다. 11년 만에 이혼으로 끝난 두 번째 결혼에 대해 그는 "정열적이고 열렬했다"고 표현했다. 메이슨은 결혼 생활 중 호킹을 학대, 폭행했다는 혐의로 여러 차례 수사를 받았으나 호킹이 조사에 협조하지 않은 덕에 사건은 종결됐다. 그는 논란을 즐기는 인물이었으며 성차별주의자이자 여성혐오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여자는 완전한 미스터리"라는 말도 남겼다. 또한 철저한 무신론자로 이름 높다. "뇌는 부속이 망가지면 작동이 멈추는 컴퓨터라고 나는 본다. 망가진 컴퓨터를 위한 천국이나 내세 같은 것은 없다. 그것은 어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동화에 불과하다." 조현욱 과학과소통 대표

2018-03-14

루게릭병과 함께 55년…호킹의 우주엔 장애가 없었다

21세 때 '2년 시한부' 선고받고 극복 "미니 블랙홀로 노벨상 못 타 아쉽다" 두 번째 부인의 학대 혐의 조사 불응 "여자는 완전 미스터리" 성차별 논란도 최악의 신경질환을 극복하고 우주의 가장 심오한 비밀을 탐구했으며 전 세계에서 인간 정신력의 상징이 된 물리학자"(워싱턴포스트). "현대 우주론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으며 수백만 명의 세계인에게 영감을 준 과학의 하늘에서 가장 빛나던 별."(가디언) 14일 별세한 영국의 세계적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에 대한 언론들의 보도다. 76세. 자녀들은 그가 케임브리지의 자택에서 숨졌다고 이날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아버지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다면 우주는 대단한 곳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를 영원히 그리워할 것"이라고 밝혔다. 호킹은 뉴턴과 아인슈타인 다음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과학자다. 학자들에게는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을 결합한 우주론으로 이름 높지만 일반인에게는 루게릭병으로 뒤틀어진 신체로 더 유명하다. 호킹은 1942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열대병 전문 의사인 아버지와 적극적인 자유당원인 어머니 사이에 4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 모두 옥스퍼드대 출신이었고 그는 17세에 같은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자연과학 분야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62년 우주론과 일반상대론을 공부하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원에 입학했다. 앞서 그는 대학 졸업반 시절부터 비틀거리거나 넘어지는 증상을 보였다. 검사 결과 온몸의 근육이 서서히 마비되는 희귀병인 퇴행성운동신경질환(일명 루게릭병)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의사는 2년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는 판정을 내렸다. 21세 때인 63년의 일이었다. 우울하게 지내던 그는 신년 파티에서 제인 와일드라는 젊은 여학생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이들의 사랑은 그에게 삶의 의지를 북돋웠으며 두 사람은 65년 결혼했다. 그는 발병 확인 후 55년간 수많은 업적과 일화를 남겼다. 그의 병은 특히 서서히 진행되는 매우 예외적인 사례였던 것으로 드러났지만 자신의 의지와 탐구심 덕분이기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두 손가락만 겨우 움직이는 상태로 휠체어에 부착된 음성합성기로 대화를 나누고 강연을 했다. 말년에는 뺨 근육의 움직임만으로 컴퓨터를 작동하며 연구를 계속한 불굴의 인물이었다. 그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갑자기 나는 깨달았다. 내 사형 집행이 연기된다면 할 일이 너무 많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이를 계기로 물리학 연구를 진지하게 시작한 뒤 그는 선언했다. "나의 목표는 단순하다. 우주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다. 왜 현재와 같은 모습을 띠고 있는지 애당초 왜 존재하는지를 말이다." 그는 66년 박사 학위를 받은 뒤 70년 첫 업적을 발표했다.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로저 펜로즈와 함께 블랙홀의 수학을 우주 전체에 적용해 먼 과거에 특이점이 존재했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시공간이 무한대로 휘어지는 특이점으로부터 대폭발(빅뱅)이 일어나 지금의 우주로 팽창했다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업적은 74년 발표된 소위 '호킹 복사'였다. 미니 블랙홀이 열을 방출하고 결국에는 사라질 것이라는 내용의 양자이론을 도출한 것이다. 블랙홀이란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로 중력이 강한 천체를 말한다. 보통은 태양 질량의 세 배를 넘는 것이지만 우주의 초창기에 만들어진 미니 블랙홀은 그렇지 않다. 양성자보다 작은 크기에 질량은 100억t인데 전 우주에 퍼져 있을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나중에 그는 "이것이 발견되면 노벨상을 받았을 텐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이런 공로 등으로 그는 74년 32세 때 영국 왕립협회의 사상 최연소 회원으로 선출됐다. 5년 후엔 케임브리지대의 루카스 석좌교수가 됐다. 아이작 뉴턴 폴 디랙 등이 역임한 가장 명예로운 자리다. 그의 업적은 80년대까지 계속 발표됐다. 우주 인플레이션 이론은 어린 우주가 초고속으로 팽창하는 시기를 겪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82년 호킹은 양자 요동-물질 분포의 미세한 변이- 덕분에 초팽창 과정에서 우주에 은하들이 퍼져 나갈 수 있음을 보였다. 이들 작은 파문이 별과 행성 생명체의 씨앗을 낳았다는 것이다. MIT의 물리학자 막스 테그마크는 "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이디어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그를 대중 스타로 만든 것은 '시간의 역사'다. 88년 발간된 이 책은 40개국의 언어로 번역돼 1000만 부가 팔렸다. 하지만 사람들이 사 놓고 읽지 않은 목록에서도 1위로 꼽힌다. 그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우주론에서 특히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상 울프상 코플리 메달 기초물리학상을 받았지만 노벨상은 받지 못했다. 이는 실험적 업적이나 실험으로 확인된 이론에 대해서만 상을 주는 탓으로 해석된다. 호킹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첫 부인과는 세 자녀를 두었으나 92년 파경을 맞았다. 호킹의 상태가 악화되며 그의 요구 사항은 늘어나고 병세에 대한 논의를 거부한 탓이라고 제인은 말했다. 그녀는 호킹을 "거대하고 성마른 자아를 지닌 어린애"라며 자신들이 "주인과 종의 관계"가 돼 갔다고 썼다. 호킹은 별거를 시작해 자신의 간호사인 일레인 메이슨에게로 떠났다. 두 사람은 법적 이혼이 마무리된 5년 후에 결혼했다. 11년 만에 이혼으로 끝난 두 번째 결혼에 대해 그는 "정열적이고 열렬했다"고 표현했다. 메이슨은 결혼 생활 중 호킹을 학대 폭행했다는 혐의로 여러 차례 수사를 받았으나 호킹이 조사에 협조하지 않은 덕에 사건은 종결됐다. 그는 논란을 즐기는 인물이었으며 성차별주의자이자 여성혐오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여자는 완전한 미스터리"라는 말도 남겼다. 또한 철저한 무신론자로 이름 높다. 조현욱 과학과소통 대표

2018-03-14

"별이 우주로 떠났다" 호킹 타계에 지구촌 애도 물결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가 14일 타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전 세계 과학자들과 지도자들은 곧바로 애도를 쏟아냈다. 미국의 유명 우주론학자이자 이론 물리학자인 로렌스 크라우스는 이날 자신의 트위터에서 "별 하나가 막 우주로 떠났다"며 "우리는 경이로운 인간과 작별했다"고 밝혔다. 미국의 저명한 천문학자이자 카네기 연구소의 웬디 프리드먼 박사도 "그의 공헌은 아인슈타인 이후 아마도 존재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대중을 사로잡은 점"이라고 평가했다. 프리드먼 박사는 이어 "그는 일반 사람들을 뛰어넘는 정신의 아이콘이 됐다"며 "사람들은 그가 말한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의 탁월함은 알고 있다"고 했다. 미국 시카고대 우주론자인 마이클 터너 박사 역시 자신의 SNS에 "그는 우리가 질문하려고 애써 왔던 가장 큰 의문에 화두를 던지려고 노력해 왔다"며 그 예로 우주의 탄생과 블랙홀, 시간의 방향 등을 거론했다. 미국의 물리학자인 닐 디그래스 타이슨은 호킹과 함께 찍었던 사진을 트위터에 올리면서 "그가 남긴 발자취 때문에 그의 타계로 지적인 공백이 남았지만 공허하지 않다"고 썼다. 타이슨은 "그 공백은 측정할 수 없는 시공간 구조에 파고드는 일종의 공백의 에너지라고 생각한다"며 "명복을 빕니다. 스티븐 호킹 1942∼2018"이라고 덧붙였다. 호주 왕립천체물리학·슈퍼컴퓨터연구센터의 앨런 더피 박사도 이날 호킹의 업적은 "전설적"이라고 적었다. 그는 이어 "그의 연구 서적들은 많은 과학자에게 영감을 주었고 최신의 과학과 우주적 관점으로 수백만 명을 더욱 풍요롭게 했다"고 설명했다. 세계 각국의 지도자와 경영인, 관련 기구도 각자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애도를 표시하기도 했다. 모국인 영국의 테리사 메이 총리는 "호킹 박사는 아주 탁월하고 대단한 지성을 가진 이로 그의 유산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경의를 표했다. 메이 총리는 "동세대에서 최고의 과학자 중 한명으로 그의 용기와 유머, 최대한 값지게 살려는 투지는 아주 감동적이었다"고 트위터를 통해 밝혔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호킹 교수의 선구적인 업적은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었으며 그의 투지와 강인함은 세계인에게 영감을 줬다"면서 그의 명복을 비는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루캉(陸慷)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과학과 인류에 크게 기여했던 호킹 박사는 생전에 세 번이나 중국을 방문해 중국 과학자 및 과학계의 대표들과도 대화했다"면서 "우리는 호킹 박사의 죽음에 애도와 안타까움을 표하며 그의 기여가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밝혔다.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는 성명을 통해 그의 업적과 유산을 칭송하면서 죽음을 애도했다. 앤드루 파슨스 IPC 위원장은 "호킹 박사는 아주 대단한 인물이자 전 세계 장애를 가진 이들의 개척자"라며 "그는 '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밝혔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사티야 나델라 CEO도 "우리는 오늘 위대한 사람을 잃었다"고 적었다. 미 항공우주국(NASA·나사)도 이날 트위터에서 "그의 이론들은 우리와 전 세계가 연구하고 있는 우주의 가능성에 관한 빗장을 풀었다"고 그의 공헌을 높이 평가했다. 나사는 "2014년 우주정거장에 있는 우주 비행사들에게 말한 것처럼 미소중력(무중력)에서 슈퍼맨처럼 계속 날아다니길 기도한다"고 덧붙였다. 앞서 호킹의 자녀들은 이날 성명을 통해 부친의 별세 사실을 알리고 "그는 위대한 과학자이자 비범한 인물이었고 그의 업적과 유산은 오래도록 남을 것"이라고 밝혔다. [연합]

2018-03-14

"목사인 제가 할 일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복음 선교사로 불리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사진)가 소천했다. <관계기사 4면> 빌리그레이엄복음주의협회(BGEA)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노환으로 인해 21일 오전 7시46분 노스캐롤라이나주 몬트리트 지역 자택에서 99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고 발표했다. 1918년 11월7일 노스캐롤라이노주 샬럿에서 태어난 그는 성서신학교와 휘튼대학교를 졸업하고 21세(1939년)때 목회자가 됐다. 그레이엄 목사는 1949년 LA에서 열린 부흥집회를 계기로 미국 전역에 복음 선교사로 이름을 알렸다. 당시 집회가 열렸던 LA지역 워싱턴 불러바드와 힐 스트리트에는 8주 동안 무려 35만 명의 군중이 몰려들어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 이후 그는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 지도자 중 하나로 발돋움했다. 일생동안 185개국 이상을 돌며 2억 명 이상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했고 34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레이엄 목사는 당파를 가리지 않고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신앙적 멘토로도 활동했다. 세계 각국 정상들을 만날 때도 종교와 관련된 조언을 해왔다. 그는 매년 갤럽이 실시하는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에 60년 연속 포함되기도 했는데, 이는 그레이엄 목사가 미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장열 기자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2018-02-21

아이젠하워 이후 12명 대통령의 영적 멘토

2005년 6월26일 뉴욕 퀸즈.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마지막 전도집회가 열렸다. 평소 카리스마 넘치는 설교를 했던 그는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생애 마지막 집회를 조크로 매듭지었다. "여러분 모두를 훗날 천국에서 뵙기를 바랍니다. 그때는 반드시 사진기 챙겨 오세요." 그 한마디는 청중의 웃음보와 눈시울을 동시에 건드렸다. 당시 전립선암 파킨슨병 등을 앓으며 본격적인 투병 생활을 시작하던 그가 누구나 두려워할 수 있는 죽음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레이엄 목사는 20세기 후반 복음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1950년 빌리그레이엄복음주의협회(BGEA)를 창설해 세계를 돌며 유명 부흥사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미남 목회자였다. 체격과 언변까지 좋았던 그레이엄 목사는 대중적 인기가 높아지자 캘리포니아 모데스토 지역 전도 집회(1948년)에서 일종의 자기 선언을 한다. 돈 섹스 권력 등에 대한 유혹을 피하기 위한 다짐이었다. 그는 "유명 목사들이 가족과 떨어져 집회를 다니다 성적 유혹에 넘어지는 경우를 많이 봤다"며 "나는 이제부터 스스로 조심하기 위해 아내 외의 여성과 단둘이 식사를 한다거나 만남을 갖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그 유명한 '모데스토 선언(Modesto Manifesto)'으로 오늘날 '빌리 그레이엄 룰'로 불린다. 그는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처음으로 한국전쟁 도중 방한(1952년)해 집회를 개최했다. 당시 통역을 맡았던 이가 한경직 목사다. 당시 한 목사는 영락 교회 부지 문제로 재정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레이엄 목사는 딱한 사정을 듣고 이후 전도집회 때마다 한 목사를 데리고 다니며 교회 사정을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줬다. 이 때문에 미국 교계는 한국전 직후 한국 교회들이 처한 사정을 안타깝게 여기며 헌금을 모아주기도 했다. 그레이엄 목사는 이후 5차례(1956년.1973년.1980년.1984년.1991년) 더 한국을 찾았다. 특히 서울 여의도에서 진행됐던 집회 때는 무려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운집했다. 세계 기독교 집회 사상 단일 행사에 최고 군중이 모인 기록이었다. 또 외국인 목사 최초로 두 번(1992년.1994년)에 걸쳐 북한을 방문해 설교를 하고 미국의 대북 메신저 역할을 담당했었다. 교계에서는 그레이엄 목사의 방한이 당시 한국 교회가 급성장한 동력 중 하나로 작용했다는 평가를 한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국민 목사(America's Pastor)'로 불렸다. 9.11 테러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 등으로 미국 전체가 슬픔에 잠겼을 때 그 현장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기도해주고 위로를 전했다. 정치 자체에 대한 관심은 없었지만 역대 대통령들과의 관계는 긴밀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이후 12명 대통령의 조언자이자 영적 멘토 역할을 했다. 그레이엄 목사의 삶은 투병 생활 속에서도 곳곳에 울림을 전했다. 그의 아들(프랭클린 그레이엄)은 소셜네트워크에 가족들 사진으로 빼곡한 아버지의 책상 모습을 공개해 가족애에 대한 잔잔한 감동을 전하기도 했다. 그레이엄 목사는 항상 유명 인사만 상대할 것 같지만 한 무명의 여성이 BGEA 웹사이트에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부자가 되길 원하는가"라며 고민의 글을 남기자 "성경은 예수를 따른다고 모두 부자가 되거나 형통할거라고 약속하지 않았다. 물질의 부유함보다 더 귀한 건 영적인 부유함이니 그것을 좇으라"고 직접 장문의 댓글을 달아주기도 했다. 물론 그레이엄 목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1950년대 미국 내 좌파 마녀사냥을 부추겼고 걸프전을 앞두고 대표 기도자로 나서 전쟁을 옹호했다는 비난도 받았다. 또 2012년 모르몬교 신자인 미트 롬니 공화당 대선 후보를 지지하려고 BGEA 웹사이트에 '모르몬교는 이단'이라고 명시된 부분을 슬쩍 삭제했었다. 이 때문에 기독교 내부에서 신학적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는 평소 손자(윌리 그레이엄)에게 "언젠가 너는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될 거야. 그러나 죽음은 하늘 나라로 거주지 주소를 바꾸는 것뿐이니 슬퍼하지 말라"고 말해왔다. 2018년 2월 21일. 그레이엄 목사는 그렇게 기쁨으로 눈을 감았다. 장열 기자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2018-02-21

사진기 챙겨 천국에서 만나자던 목사

2005년 6월26일 뉴욕 퀸즈.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마지막 전도집회가 열렸다. 평소 카리스마 넘치는 설교를 했던 그는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생애 마지막 집회를 조크로 매듭지었다. “여러분 모두를 훗날 천국에서 뵙기를 바랍니다. 그때는 반드시 사진기 챙겨 오세요”. 그 한마디는 청중의 웃음보와 눈시울을 동시에 건드렸다. 당시 전립선암, 파킨슨병 등을 앓으며 본격적인 투병 생활을 시작하던 그가 누구나 두려워할 수 있는 죽음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레이엄 목사는 20세기 후반 복음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1950년 빌리그레이엄복음주의협회(BGEA)를 창설해 세계를 돌며 유명 부흥사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미남 목회자였다. 체격과 언변까지 좋았던 그레이엄 목사는 대중적 인기가 높아지자 캘리포니아 모데스토 지역 전도 집회(1948년)에서 일종의 자기 선언을 한다. 돈, 섹스, 권력 등에 대한 유혹을 피하기 위한 다짐이었다. 그는 “유명 목사들이 가족과 떨어져 집회를 다니다 성적 유혹에 넘어지는 경우를 많이 봤다”며 “나는 이제부터 스스로 조심하기 위해 아내 외의 여성과 단둘이 식사를 한다거나 만남을 갖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그 유명한 ‘모데스토 선언(Modesto Manifesto)’으로 오늘날 ‘빌리 그레이엄 룰’로 불린다. 그는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처음으로 한국전쟁 도중 방한(1952년)해 집회를 개최했다. 당시 통역을 맡았던 이가 한경직 목사다. 당시 한 목사는 영락 교회 부지 문제로 재정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레이엄 목사는 딱한 사정을 듣고 이후 전도집회 때마다 한 목사를 데리고 다니며 교회 사정을 말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줬다. 이 때문에 미국 교계는 한국전 직후 한국 교회들이 처한 사정을 안타깝게 여기며 헌금을 모아주기도 했다. 그레이엄 목사는 이후 5차례(1956년ㆍ1973년ㆍ1980년ㆍ1984년ㆍ1991년) 더 한국을 찾았다. 특히 서울 여의도에서 진행됐던 집회 때는 무려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운집했다. 세계 기독교 집회 사상 단일 행사에 최고 군중이 모인 기록이었다. 또 외국인 목사 최초로 두 번(1992년ㆍ1994년)에 걸쳐 북한을 방문해 설교를 하고 미국의 대북 메신저 역할을 담당했었다. 교계에서는 그레이엄 목사의 방한이 당시 한국 교회가 급성장한 동력 중 하나로 작용했다는 평가를 한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국민 목사(America’s Pastor)’로 불렸다. 9.11 테러,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 등으로 슬픔에 잠겼을 때 그 현장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기도해주고 위로를 전했다. 그와 30년간 교제했던 한스페터 뉴스크 목사는 “그는 설교단 위보다 일상에서 더 진실하고 겸손했던 목회자”라고 평가했다. 그레이엄 목사의 삶은 투병 생활 속에서도 곳곳에 울림을 전했다. 그의 아들(프랭클린 그레이엄)은 소셜네트워크에 가족들 사진으로 빼곡한 아버지의 책상 모습을 공개해 가족애에 대한 잔잔한 감동을 전하기도 했다. 항상 유명 인사만 만날 것 같지만 한 무명의 여성이 BGEA 웹사이트에 남긴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부자가 되길 원하는가”라는 고민에 “성경은 예수를 따른다고 모두 부자가 되거나 형통할거라고 약속하지 않았다. 물질의 부유함보다 더 귀한 건 영적인 부유함”이라고 직접 장문의 댓글을 달아주기도 했다. 물론 그레이엄 목사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1950년대 미국 내 좌파 마녀사냥을 부추겼고, 걸프전을 앞두고 대표 기도자로 나서 전쟁을 옹호했다는 비난도 받았다. 또, 모르몬교 신자인 미트 롬니 공화당 대선 후보를 지지하려고 BGEA 웹사이트에 ‘모르몬교는 이단’이라고 명시된 부분을 삭제했었다. 이 때문에 기독교 내부에서 신학적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는 평소 손자(윌리 그레이엄)에게 “언젠가 너는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될 거야. 그러나 죽음은 하늘 나라로 거주지 주소를 바꾸는 것뿐이니 슬퍼하지 말라”고 말해왔다. 2018년 2월 21일. 그레이엄 목사는 그렇게 기쁨으로 눈을 감았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2018-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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