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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아름다운 장미꽃이 남긴 선물

‘오! 그대는 새벽녘 최후의 황혼이 빛날 때, 무엇을 볼 수 있다고 자랑스럽게 외칠 수 있겠는가? (Oh!  Say, you can see, by the dawn’s early light,  What so proudly we hailed at the twilight’s last gleaming?)’   미국 국가인 ‘별처럼 빛나는 깃발(The Star-Spangled Banner)’ 의 첫 노랫말이다.     아름답게 핀 장미꽃이 우리 곁을 떠나려 한다. 그렇지만 그냥 훌쩍 떠나지 않고 값진 것을 남겨 놓았다. 바로 미국의 ‘국기의 날(Flag Day)’이다. ‘국기의 날’은 1777 년 6월 14일 미국의 각 주 대표자 회의에서 성조기(The Stars and Stripes)를 국기로 인정한 날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국기의 날’은 국기 제정 100년을 기념하기 위해 1877년에 처음으로 공식 축하행사가 열렸다. 특히 뉴욕 주지사는 1897년 ‘국기의 날’을 공식 인정했고, 1949년 트루먼 대통령은 6월 14일을 ‘국기의 날’로 공식화했다.   1812년 독립전쟁 당시 영국군은 미군이었던 변호사 프랜시스 키를 포로로 잡아 배에 태웠다. 구름과 안개가 낀 전선은 앞을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다 오전 7시 쯤 날이 밝자 전쟁터 건물 벽에 성조기가 휘날리고 있음을 본 프랜시스는 벅차오르는 심정으로 ‘별처럼 빛나는 깃발’의 가사를 저기 시작했고 다음날 석방되어 볼티모어로 돌아와 시를 완성했다.   프랜시스 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 애국가 가사가 안타깝게 떠올랐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이라는 가사 때문이다. 이는 얼마나 공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내용인가.  반면 새벽녘 빛나는 별을 보는 희망을 노래하는 가사는 얼마나 건설적이고 현실적인가. 동해와 백두산이 마르고 닳아 버리면 지구는 끝나고 마는 것 아닌가.  더구나 ‘보아라! 동해의 하늘이 열려 있고 아침 해가 솟아있네’라고 동해를 마치 제 나라 땅인 것처럼 표현한 일본 군가도 있지 않은가.     메릴랜드 주 프리데릭에 있는 프랜시스 키의 무덤에는 성조기가 휘날리고 있다. 키가 쓴 ‘별처럼 빛나는 깃발’ 의 끝 부분은 다음과 같다. “우리 국민을 지키고 보전한 큰 힘을 찬양하자. 우리의 주장이 정당하다면 우리는 정복해야 하는 것일세. 이것은 하나님 안에서 믿음을 갖는 좌우명이기 때문일세. 별처럼 빛나는 깃발은 승리의 표상이며 자유의 땅과 용감한 가정의 깃발이기도 하네. (Praise the pow’r that hath made and preserved us a nation.  Then conquer we must,  when our cause it is just,  And this be our motto -“In God is our trust.”  And the star-spangled banner in triumph shall wave O’er the land of the free and the home of the brave.)”  윤경중 / 목회학박사·연목회 증경회장열린광장 장미꽃 선물 국기 제정 변호사 프랜시스 새벽녘 최후

2024-06-23

뉴욕 노래방 업주들 "저작권료 갈취당해"

음악 저작권 소송과 관련해 뉴욕일원 ‘노단유’(노래방·단란주점·유흥업소)의 변호를 맡고 있는 지영훈 안앤지로펌 파트너변호사가 20일 법원에 의견서를 내고 향후 원고 엘로힘USA 측 주장에 반박하는 기자회견을 열 방침을 밝혔다. 〈본지 2024년 2월 9일자 A-2면〉   지 변호사는 이날 “엘로힘USA 측 의견에 반박하는 쟁점을 담아 의견서를 온라인으로 법원에 접수할 예정”이라며 “엘로힘USA 측에서 늦어도 27일까지 최후 반박 서류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지 변호사에 따르면, 퀸즈·맨해튼 일대 노단유가 모인 ‘Korean Entertainment Association USA Inc.(뉴욕한인예능협회)’ 주축으로 기자회견을 기획하고 있다. 회견에는 20~30여명의 노단유 업주들이 참여할 예정이다.   지 변호사는 “기자회견을 통해서 엘로힘USA가 노단유를 돌아다니며 저작권료를 갈취한 만행을 공개하겠다”며 “법적으로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할 계획이다”라고 했다.   엘로힘USA의 저작권 소유가 확인된 7곡 ‘쏘쿨(So Cool)’, ‘푸시푸시(Push Push)’, ‘살만찌고(Sal Man Jji Go)’, ‘니까짓게(Ni Kka Jit Ge)’, ‘가식걸(Ga Sik Gol)’, ‘배아파(Bae A Pa)’, ‘핫보이(Hot Boy)’에 대해서는 피고측 기계서 삭제했다고 밝혔다.   한편 유남현 엘로힘USA 동북부지사장은 지난해 12월의 판결을 토대로 뉴욕일원 노단유를 상대로 저작권료를 수임할 방침이라고 밝힌 바 있다. 강민혜 기자저작권료 노래방 뉴욕 노래방 최후 반박 저작권 소유

2024-02-20

김건흡 칼럼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전쟁은 참혹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사람들에게 눈물과 고통을 안겨준다. 그래서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전쟁, 아 끔찍한 전쟁이여!”라고 탄식했나 보다.   서로마 멸망 이후 계속 상승세를 타던 동로마제국도 결국은 쇠퇴하면서, 영토는 점점 줄어들고 군사력도 약화되었다. 15세기 초에 동로마제국은 수도 콘스탄티노플과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든 영토를 상실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주인이었던 동로마제국은 비록 콘스탄티노플 부근을 겨우 영유하고 있을 정도로 쇠락했지만, 콘스탄티노플의  테오도시우스 성벽만은 난공불락을 자랑할 만큼 견고했다. 오스만투르크의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이 기독교의 손아귀에 있는 한 오스만 제국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성채만 남은 유럽의 최대도시를 함락하든지, 고사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즉위 3년째에 들어가는 1453년 1월, 술탄은 신하들을 불렀다. 그는 역대 술탄들이 하지 못한 일을 주문했다. 바로 콘스탄티노플 함락이었다. 그는 병력을 준비했다. 정규군 8만 명, 비정규군 2만 명, 도합 10만의 병력을 모았다. 그리고 오스만의 전 함대를 불러모았다. 두 달 후인 3월에 어마어마한 함대가 보스포루스 해협에 닻을 내렸고, 지상병력이 금각만 건너편 갈라타 지역에 집결했다. 술탄은 콘스탄티노플 성벽에 진을 치고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1세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콘스탄티누스는 응답하지 않았다.     4월 6일, 청동대포가 포문을 열었다.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황제의 지휘 아래 수도 방어에 들어갔다. 비잔틴 측의 병력은 황제 휘하의 병력 5천 명, 베네치아와 제노바에서 지원한 외국인 2천 명 등을 합쳐 7천 명에 악간 모자랐다. 7천의 병력이 10만의 대군을 맞게 된 것이다. 성벽만 무너지지 않으면, 식량만 충분하다면 버틸 수 있다. 콘스탄티노플 성은 4차 십자군에 의해 두 번 함락되기 앞서 1000년 동안 숱한 적들을 방어해 낸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다. 하지만 오스만이 끌고 온 청동대포의 위력은 대단했다. 첫날 공격에 육지쪽 카라시우스문 근처 성벽이 허물어졌다. 비잔틴군은 곧바로 무너진 곳을 보수했다.     해상 방어는 금각만 입구에는 쇠사슬이 처져 있는데다 건너편 갈라타 지역에 베네치아 해군이 버티고 있어 오스만군은 성채 남쪽만 포위하고 있었다. 몇 척 되지 않았지만 베네치아와 제노바 해군은 오스만 해군을 오도가도 못하게 했다. 만만할 것 같았던 콘스탄티노플은 한 줌도 되지 않는 방어군에 의해 굳건히 유지되었다. 보름 동안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술탄은 대담한 계획을 밀어붙였다.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배를 육지로 끌어올려 금각만으로 밀어 넣어 성을 포위한다는 계획이었다. 술탄은 해협에서 금각만에 이르는 도로를 닦았다. 도로 위에 철길을 놓고 거대한 받침대를 제작해 쇠바퀴를 달았다. 그 위에 무거운 선박을 실었다. 수십 마리의 황소들이 이끄는 77척의 선박이 높이 70미터의 언덕을 넘어 금각만으로 내려왔다. 콘스탄티노플 시민은 물론 제노바 병력도 모두 대경실색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진 것이다. 금새 금각만이 육지에서 끌려온 오스만의 선박에 의해 장악되었다.   농성 40일이 지나면서 콘스탄티노플의 운명은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소규모의 수비대는 계속되는 전투에 기진맥진했고 난공불락의 성채는 오스만 군의 포격으로 사방이 허물어졌고, 성벽 여러 군데에 구멍이 뚫렸다. 로마누스 문 근처에  있는 망루 4개가 무너져 내려앉았다. 게다가 나머지 수비군들은 내부 분열과 불화로 더욱 약화되었다. 어디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 당시 2000여 명의 용병을 지휘한 사람은 제노바 출신의 유스티니아니라는 용병대장이었다.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이 가시화되었을 때부터 그는 황제와 더불어 전군을 시찰하고, 훈련을 감독했다. 하지만 치열한 공방전 중에 부상을 입은 그는 도망치려고 했다. 황제가 이를 목격하고 소리쳤다.“경의 상처는 경미하다. 위험이 급박하여 경이 필요한 마당에 어디로 물러간단 말이냐?”유스티니아니는 벌벌 떨면서 말했다. “소신은 하나님께서 투르크 인들에게 열어주신 바로 그 길로 물러가고자 합니다.”   5월 28일, 패배를 예감한 황제와 시민들은 함께 마지막 미사를 드렸다.  5월 29일 자정, 이슬람 군은 수륙 양면으로 총공격을 개시했다. 오스만 포병은 전선에서, 갤리선에서, 교량 위에서 사방으로 포격을 가했다. 그리고 무적의 예니체리 부대가 밀어부쳤다. 서쪽 성벽과 북쪽 성벽이 맞닿는 꼭지점 부분의 성문이 뚫리면서 이슬람 군이 성내로 밀려왔다. 콘스탄티노플 황제는 병사들과 함께 오스만 군을 향해 마지막 돌격을 감행하며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황제의 신음소리가 들렸다.“내 머리를 베어줄 기독교인이 한 사람도 없단 말이냐?”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산채로 이교도들에게 사로잡히는 것을 두려워했다. 콘스탄티누스가 황제의 갑옷을 벗어 던진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는 이윽고 혼전 속에서 어느 이름 모를 병사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시신은 시체 더미 속에 묻혔다. 그가 죽자 수비군의 저항은 끝났다. 콘스탄티노플은 약탈당했고 그 와중에 약 4,000명의 시민들이 학살당했다. 이렇게 농성 53일 만에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었고 동로마제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동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메흐메드 2세는 성 소피아 사원에서 나와 황량한 궁전으로 향했다. 그는 마냥 승리의 환희에 취해 있을 수가 없었다. 처참하게 무너진 궁전을 바라보며 인간의 위대함은 덧없는 것이라는 우울한 상념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는 페르시아의 시에 나오는 시의 한 귀절을 읊었다. “거미가 황궁에 집을 지었도다. 부엉이가 아프라시압(페르시아 신화에 나오는 왕)의 탑에서 야경의 노래를 불렀도다.”동로마를 점령한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문명의 승리를 기념해서 콘스탄티노플의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꿨다. 메흐메드의 명령에 따라 동방교회의 본산인 성 소피아 사원은 회교 사원으로 개조된다. 그리고 1923년 오스만투르크제국을 계승한 터키 공화국이 수도를 앙카라로 옮길 때까지 이스탄불은 470년간 가장 위대한 이슬람 세력의 수도로 사용되었다.     한때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던 로마의 최후는 흥망성쇠 생로병사의 순환 고리를 갖는 인간사의 종말과 비유된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도 같았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옛 로마의 광휘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흥망성쇠를 거스를 수 없던, 외롭고 처절하게 결사항전하는 신민들의 절망적인 모습에선 시공을 뛰어넘은 인간적 비애와 연민을 느끼게 된다. 동로마제국의 몰락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오스만투르크의 강력한 군사력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동로마제국의 멸망은 극심한 내부분열과 지도자들의 무능. 안보불감증이 복합적으로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였다. 5세기 비잔틴과 21세기 한국의 상황이 완전히 들어맞을 순 없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흐르는 정신적 심리적 차원의 교훈은 똑같다.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     김지민 기자김건 칼럼 콘스탄티노플 성벽 콘스탄티노플 시민들 콘스탄티노플 최후

2023-03-02

[살며 생각하며] ‘No 여기까지!’

 요즘 두 살 찰리 말이 한창 늘고 있다. 장난감 타일로 만든 집을 부순 후 엄숙한 얼굴로 내게, “다쉬만둡씨다” 할 때는 정말 요절 복통이다. 데이케어냉냉님(선생님)께 배운 말임에 틀림없다. 요새는 콩글리시에 빠졌다. “No 찡찡 to 엄마(엄마가 주문한 것 같다!)” “No 푸푸 to 기저귀” (잘 때만 차는 기저귀에 푸푸를  않겠다는 굳은 결심!) “No 때려 누나(이것은 나의 주문!)” 이렇게 찰리 두 살 인생에 “No” 시리즈가 늘어 간다.     사막을 건너는 마지막 방법인 여섯 번째에는 유일하게 ‘No’가 들어간다. 허상의 국경에서 멈추지 말라(Do not stop at false borders).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Shifting Sands)의 저자 스티브 도나휴와 친구 탤리스는, 니제르로 넘어가는 국경이 다시 열렸다는 말에 트럭을 얻어타고 니제르 국경을 향한다. 하지만 첫 번 도착한 국경에서 어느 여자가 부탁한 편지로 인해 보초에게 붙들린다. 머뭇거리며 위험에 빠질 찰나, 친구 탤리스의 급박한 외침에, 떠나려는 트럭을 간신히 잡아타고 진짜 니제르의 국경을 향해 가게 된다. 그가 멈출 뻔했던 곳은 진짜가 아닌 허상의 국경이었음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사막 같은 인생을 잘 건너기 위한 마지막 방법은, 실제가 아닌 국경에서 멈추지 않는 것이다. 허세 가득한 보초 때문에 머뭇거리며 붙잡혀 있지 않은 것이다. 인생이라는 여행에서 우리는 수 없는 국경과 보초를 마주하게 된다. 이별, 만남, 퇴직, 새로운 일, 투병, 새로운 공부 등이, 그 너머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몰라 불안하기만 한 새로운 국경이다. 이 국경에서 내 마음속 보초는 이렇게 말한다. “과연 혼자 잘할 수 있겠니? 너무 이기적인 결정 아닐까? 이제 와서 새로운 일을? 그러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은 거 아냐? 여기까지인 거야!” 그 앞에서 머뭇거리다, 스스로 그어 버린 허상의 국경에 갇혀버리기엔 삶의 모든 순간이 너무 소중하다.     65세 임기종씨는 설악산 최후의 지게꾼이다. 마라토너가 꿈이었다. 아무리 뛰어도 숨이 가쁘지 않은 신체를 가지고 태어났다. 하지만 3일을 굶고 뛰니 별이 보였다. 16살 때부터 설악산에서 짐을 나르며 생활하다 첫눈에 반해 결혼한 아내는 지적장애인이다. 하나뿐인 아들은 심한 자폐를 가지고 태어났다. 여기까지구나 하고 포기할 법도 한데, 그때부터 임기종씨는 아들이 사는 시설과 다른 장애인 기관들에 기부를 시작했다. 동네 노인들 효도관광도 시켜드리고, 쌀과 라면도 정기적으로 갖다 드렸다. 이렇게 한 기부가 1억원이 넘는다. 그의 꿈은 시설에 있는 아들을 데려와 함께 사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없는 분’들 도와주고, 소년소녀 가장들 장학금 주는 게 소원이시란다. 158cm 키에 60kg 작은 체구로 130kg짜리 냉장고까지 산으로 날랐던 임기종씨는, 설악산에서 차가 더는 못 들어가는 사인인 ‘여기까지’에서부터 빛나는 분이시다.     삶이 국경처럼 다가올 때, 멈추지 않고 이렇게 계속 나아가는 분들의 삶은 참으로 존경스럽다. 인생이라는 그 사막길에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허상의 국경에 붙들려, 여기까지인가 하며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찰리 표현으로, No 여기까지, Yes 이제부터다. 무엇이 우리를 붙들던, 허상의 국경에 멈춰 서지 않는, 호기심에 찬 여행자의 자세로 한 번 살아볼 일이다! 김선주 / NJ 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살며 생각하며 니제르 국경 마음속 보초 설악산 최후

2022-03-02

[기고] 거대 담론이 없는 선거

1989년 프랜시스 후쿠야마라는 젊은 정치학자가 ‘역사의 종말?’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다. 그는 여기서 자유민주주의가 공산주의를 이기고 ‘인류 최후의 정부 형태’가 될지 모른다고 주장한다. 동구권의 몰락은 모두 알아차렸지만 소련도, 동독도 아직 사라지기 전이었다. 이런 순발력은 후쿠야마가 진지한 사상가로 인정받는 데 걸림돌이 된다.   게다가 논문의 제목이나 진단이 워낙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켜서, 오해도 그만큼 많았다. 후쿠야마는 3년 뒤 단행본 ‘역사의 종말’을 냈는데, 이 책 역시 제대로 내용을 살피지 않은 이들의 빗나간 비판을 엄청나게 받았다.     책의 원제는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인데, 저자는 역사의 종말보다 최후의 인간에 방점을 찍는다. 자유민주주의가 마지막 정치체제라면, 거기서 사는 인간은 대안적 세계를 꿈꿀 수 있나. 그런 희망이 사라지면 그는 무엇을 욕망할까. 읽기에 따라서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비판서다.   요즘 ‘역사가 끝났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는 거의 없으리라. 나 역시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1990년대 후쿠야마의 주장에 무시하지 못할 한 덩어리 통찰은 담겼다고 생각한다. 다음 세상에 대한 비전이 없으면, 인간은 시시해진다.     소설가라는 직업 덕분에 자주 인간을 서사적 존재로 바라보게 된다. 오이디푸스왕에서부터 스파이더맨에 이르기까지, 영웅 서사의 주인공은 자신을 둘러싼 이야기를 이해하고 나서 극적으로 변신한다. 서사의 완결 지점을 알게 되면 할 일이 생긴다. 비극적 결단이든 영웅적 도전이든. 그 순간 존재의 의미를 둘러싼 고뇌도 해소된다.   현실과 동떨어진 서사를 막기 위해 민주사회에서는 선거 때마다 큰 토론이 벌어져야 한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어떤 이야기가 진행 중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번 대선을 놓고 거대 담론이 사라진 선거라고 한다. 양당 후보는 ‘내가 더 많이 퍼주겠다’고 경쟁한다. 공약들은 좋게 표현해 ‘생활밀착형 마이크로 정책’이고, 선거운동은 인터넷 밈에 의존한다. 탈모 치료 건강보험 확대나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 글자 공약을 보고 무슨 철학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거기에 지금 한국 사회에 대한 어떤 진단이 담겨 있나.   후보들이 제 입으로 말하기 꺼리는 조악한 거대 서사가 밑에 깔려있기는 하다. ‘검찰과 친일파가 대한민국을 지배한다’든가 ‘문재인 정권과 586이 나라 망쳤다’든가. 그 서사에서 도출되는 과업은 복수다. 우리가 권력을 잡아서 상대편을 감옥에 보내면 한국 사회도 나아진다는, 명쾌하고 단순무식한 소리다.   정의당의 부진도 조국 사태 등에서 헛발질한 것보다는, 대안 정당으로서 대안을 보여주지 못한 데 근본 원인이 있다고 본다. 실제로 어떤 노력을 했는지와 별개로, 지난 몇 년간 정의당은 대중에게 퍼포먼스 정당, 정체성 정치의 정당으로 비쳤다. 그러는 사이 플랫폼 노동의 시대가 왔고, 정의당의 기둥인 노동 비전은 현실에서 더 멀어지는 듯 보였다.   ‘역사가 끝났다’고 후쿠야마가 말했을 때, 그는 앞으로 사건이나 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사건은 계속 발생하지만, 그것이 다음 정치체제의 출현과 무관하므로, 거기에 역사적인 의미는 부여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젊은 세대의 극심한 젠더 갈등을 생산적인 담론으로 이끌지 못하고 표 계산에 열중하는 한국 정치권의 모습이 떠오른다.   ‘다음 세상이 없으므로 역사는 끝났다’는 명제는 틀렸다. 하지만 문장을 조금 고쳐 적으면 여전히 유효할 것 같다. 다음 세상을 구체적으로 그리지 못할 때 역사는 끝난다고. 한국 사회는 어떤가.   우리는 지금 혼미하다. 우리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몰라서다. 막연하게 소망하는 바가 있지만, 그것을 감성적인 구호 이상의 길고 차분하고 현실에 부합하는 논리로 풀지 못한다. 거기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는, 그냥 다 같이 시시해졌다고. 장강명 / 소설가기고 선거 종말과 최후 한국 사회 대안 정당

2022-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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