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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거대 담론이 없는 선거

1989년 프랜시스 후쿠야마라는 젊은 정치학자가 ‘역사의 종말?’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다. 그는 여기서 자유민주주의가 공산주의를 이기고 ‘인류 최후의 정부 형태’가 될지 모른다고 주장한다. 동구권의 몰락은 모두 알아차렸지만 소련도, 동독도 아직 사라지기 전이었다. 이런 순발력은 후쿠야마가 진지한 사상가로 인정받는 데 걸림돌이 된다.
 
게다가 논문의 제목이나 진단이 워낙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켜서, 오해도 그만큼 많았다. 후쿠야마는 3년 뒤 단행본 ‘역사의 종말’을 냈는데, 이 책 역시 제대로 내용을 살피지 않은 이들의 빗나간 비판을 엄청나게 받았다.  
 
책의 원제는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인데, 저자는 역사의 종말보다 최후의 인간에 방점을 찍는다. 자유민주주의가 마지막 정치체제라면, 거기서 사는 인간은 대안적 세계를 꿈꿀 수 있나. 그런 희망이 사라지면 그는 무엇을 욕망할까. 읽기에 따라서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비판서다.
 
요즘 ‘역사가 끝났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는 거의 없으리라. 나 역시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1990년대 후쿠야마의 주장에 무시하지 못할 한 덩어리 통찰은 담겼다고 생각한다. 다음 세상에 대한 비전이 없으면, 인간은 시시해진다.  
 


소설가라는 직업 덕분에 자주 인간을 서사적 존재로 바라보게 된다. 오이디푸스왕에서부터 스파이더맨에 이르기까지, 영웅 서사의 주인공은 자신을 둘러싼 이야기를 이해하고 나서 극적으로 변신한다. 서사의 완결 지점을 알게 되면 할 일이 생긴다. 비극적 결단이든 영웅적 도전이든. 그 순간 존재의 의미를 둘러싼 고뇌도 해소된다.
 
현실과 동떨어진 서사를 막기 위해 민주사회에서는 선거 때마다 큰 토론이 벌어져야 한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어떤 이야기가 진행 중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번 대선을 놓고 거대 담론이 사라진 선거라고 한다. 양당 후보는 ‘내가 더 많이 퍼주겠다’고 경쟁한다. 공약들은 좋게 표현해 ‘생활밀착형 마이크로 정책’이고, 선거운동은 인터넷 밈에 의존한다. 탈모 치료 건강보험 확대나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 글자 공약을 보고 무슨 철학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거기에 지금 한국 사회에 대한 어떤 진단이 담겨 있나.
 
후보들이 제 입으로 말하기 꺼리는 조악한 거대 서사가 밑에 깔려있기는 하다. ‘검찰과 친일파가 대한민국을 지배한다’든가 ‘문재인 정권과 586이 나라 망쳤다’든가. 그 서사에서 도출되는 과업은 복수다. 우리가 권력을 잡아서 상대편을 감옥에 보내면 한국 사회도 나아진다는, 명쾌하고 단순무식한 소리다.
 
정의당의 부진도 조국 사태 등에서 헛발질한 것보다는, 대안 정당으로서 대안을 보여주지 못한 데 근본 원인이 있다고 본다. 실제로 어떤 노력을 했는지와 별개로, 지난 몇 년간 정의당은 대중에게 퍼포먼스 정당, 정체성 정치의 정당으로 비쳤다. 그러는 사이 플랫폼 노동의 시대가 왔고, 정의당의 기둥인 노동 비전은 현실에서 더 멀어지는 듯 보였다.
 
‘역사가 끝났다’고 후쿠야마가 말했을 때, 그는 앞으로 사건이나 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사건은 계속 발생하지만, 그것이 다음 정치체제의 출현과 무관하므로, 거기에 역사적인 의미는 부여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젊은 세대의 극심한 젠더 갈등을 생산적인 담론으로 이끌지 못하고 표 계산에 열중하는 한국 정치권의 모습이 떠오른다.
 
‘다음 세상이 없으므로 역사는 끝났다’는 명제는 틀렸다. 하지만 문장을 조금 고쳐 적으면 여전히 유효할 것 같다. 다음 세상을 구체적으로 그리지 못할 때 역사는 끝난다고. 한국 사회는 어떤가.
 
우리는 지금 혼미하다. 우리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몰라서다. 막연하게 소망하는 바가 있지만, 그것을 감성적인 구호 이상의 길고 차분하고 현실에 부합하는 논리로 풀지 못한다. 거기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는, 그냥 다 같이 시시해졌다고.

장강명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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