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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으로 읽는 책]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

나는 또 증발하고 있다/ 내가 모르는 새 시, 조금씩/ 나는 너에게 보여 주기 위한// 시// 읽는 사람의 몫이 대부분인/ 가장 무대뽀의 도둑 심뽀의/ 일/ 내가 구운 향기 나는 빵을 먹으며 내// 시// 한 편을/ 읽어 주겠니/ 오늘   최재원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   ‘그래’라고 답하고 싶은 시다. 최근 읽은 시집 중 단연 좋았다. 인용한 시는 ‘너는 시’의 전문.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떨어지지 않는 것들을/ 격자에 맞추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찢어 떼어 놓는 데 쓰고 있다.” ‘시’라는 제목의 시도 있다. 사실 잘 알 수 없고 언어화되기 힘든 것을 시어로 만들면 읽는 사람이 제각각의 언어로 해석하는 것, 시가 바로 이런 것 아닌가.   2021년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최재원의 시집이다. 34세의 젊은 시인은 물리학과 시각예술, 그림을 전공했고 미술비평가, 번역가로도 활동 중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비정형의 과감한 상상력은 “소년도 소녀도 아닌/ 오차도 찰나도 아닌/ 이름을 불러 주세요/ 이름을 부르지 마세요/ 안은 여러 개지만 밖은/ 하나예요 이제 같은 길은/ 없어요” (‘백야’)처럼 이분법을 거부하는 젠더퀴어로도 이어진다. 시인은 “사이에 있는 모든 것들을 통해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사랑할 수 있다”는 수상 소감을 밝혔었다.   “~너는 달리다 말고 돌아와// 걱정 마 / 걱정 마/ 떨어진 것들 내가 하나하나// 그 길의 끝에 내가 다른 몸으로/ 너를 안아 줄게~”(‘그대여’) 시인의 위로가 따뜻하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물리학과 시각예술 미술비평가 번역가 소년도 소녀도

2024-12-18

[문장으로 읽는 책] 꼭대기의 수줍음

강이 끝났다. 10년 전쯤이던가. 압구정과 옥수 사이 구간에서 느끼는 기분에 대해 친구가 말한 적이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공포에 대한 거던가. 물속에 가라앉는 부동감에 대한 거던가. 그에 대한 시를 써 오기도 했었다. 나는 강남에 있는 걔네 집만 곱씹었다. 1호선을 타는 나는 그런 거 모르니까, 하고 별 반응 안 했다. 우리가 이웃이 되는 일은 없겠지. 먹는 사람, 자는 사람 다 있는 이 지하철 한 량 안에서 같이 머무는 동안만 잠깐 이웃인 거지. 과거의 나는 늘 생각보다 더 한심했던 것 같다. 자세하게 살지 않은 탓이다.     유계영 『꼭대기의 수줍음』   “자세해져야 한다. 자세해져야만 보이는 게 있다”라고 작가는 썼다. 압구정과 옥수 사이 계층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작가는 서문에서도 “비가 올 땐 이 많은 새들이 다 어디로 가지? 콧속이 얼어붙는 겨울밤에는 그 많은 고양이가 다 어디에 숨지? 늘 그런 게 궁금했다. 늘 그런 것만 궁금했다”고 썼다.   독창적 상상력이 매력적인 산문집이다. 삶을 자세하게 들여다본 이의 구태의연하지 않은 문장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소의 매력은 무궁무진하지만 그중 제일은 자신의 혀를 콧구멍 속으로 집어넣는 유머 감각이다. 이 사실을 떠올리면 자못 유쾌해진다. 승강장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한 남자가 자신의 콧구멍 속에 손가락을 넣고 중요한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한참 뒤적거리는 장면을 봤다. 소라면 그렇게 오랫동안 헤매지 않았을 텐데. 인간의 무능을 확인할 때 가장 즐겁다.”문장으로 읽는 책 꼭대기 수줍음 독창적 상상력 옥수 사이 가지 콧속

2024-12-04

[문장으로 읽는 책] 멋쟁이 희극인

일부러 그 말이 듣고 싶어서 물어보거나 말을 걸 때가 있다. 나도 “아니야 너 안 못생겼어”라는 말이 듣고 싶어서 엄마에게 “요즘 나 최고로 못생긴 것 같다” 했더니 엄마가 말한다. 넌 언제나 나한테 최고였어. 고맙다고 엄마!!   아니야 너 안 못생겼어, 라는 말을 기대하며 엄마에게 요즘 나 부쩍 못생겨진 거 같아 했더니 엄마가 하는 말 “괜찮아, 티 안 나.”     박지선 『멋쟁이 희극인』   이런 글도 있다. “엄마에게 나의 숨은 매력은 뭐냐고 물었다. ‘예쁜 얼굴’이라고 답한 뒤, 내가 좋아할 겨를도 없이 바로 ‘그러나 너무 숨어 있기 때문에 통 보이지 않지’라고 한다.”   세상을 떠난 코미디언 박지선의 아이디어 노트 속 짧은 글들을 모은 책이다. 유쾌하지만 예민하고, 매 순간 스스로 격려하고, 무엇보다 가족과 사랑이 넘쳐났던 그의 모습이 담겼다. 그는 엄마와 함께 세상을 떴다.   “쓰레기통을 열심히 광나게 닦는 사람을 보았다. 모두가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집어넣을 때 그 사람은 그것의 입구를 광나게 닦는다. 덕분에 쓰레기통이 빛이 난다. 그 사람도 빛이 난다.” “걱정은 대체적으로 내가 하는 것보다 남이 만들어주는 게 더 많다. 걱정은 거절한다.” “나는 넘어질 때마다 무언가 줍고 일어난다.” “2월 14일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초콜릿을 산다. 집에 온다. 아빠에게 준다. -끝-”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멋쟁이 희극 멋쟁이 희극인 코미디언 박지선 아이디어 노트

2024-11-27

[문장으로 읽는 책] 마지막 왈츠

인류 최초의 이야기로 알려진 『길가메시 서사시』를 읽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인류에 남아 있는 이야기 중 가장 오래된 이야기의 중심축이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사랑 이야기가 인류 최초의 서사일 것이라 짐작한 나의 사고방식도 어쩌면 로맨틱 러브 중심의 현대적 분위기에 물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목숨까지 바칠 만한 격정적인 사랑이 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서양에서는 아벨라와 엘로이즈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유행했던 12세기경이니, 인류 역사 전체에서 사랑이 이토록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인 셈이다.     황광수·정여울 『마지막 왈츠』   1944년생 황광수와 1976년생 정여울. 두 문학평론가가 나눈 문학적 교감과 우정에 대한 에세이집이다. 병석의 황광수를 대신해 정여울이 두 사람의 대화를 정리했다. 황광수는 책이 나오기 직전 세상을 떴다. “44년생 황광수와 76년생 정여울은 어떻게 이토록 절친한 벗이 되었을까요. 우리 사이엔 아무런 실용적 목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우리의 우정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었으니까요.” 단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직감적으로 서로의 눈빛을 알아보았지요. 우리 두 사람 모두 ‘같은 대상’을 향해 미쳐 있음을. 그것은 ‘문학’이었습니다.”   ‘결혼 아니면 이별’처럼 종착역이 분명한 사랑과 달리 우정은 끝도 목표도 없는 ‘무쓸모의 관계’다. 정여울은 서문에서 “인류는 끊임없이 적이 될 수도 있는 타인을 친구로 만들며 세파를 견디고 변화에 적응해 왔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다”고 썼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왈츠 사랑 이야기 마지막 왈츠 인류 역사

2024-11-20

[문장으로 읽는 책] 상처 입은 당신에게 글쓰기를 권합니다

글쓰기의 치유적 힘을 고민하면서부터 나는, 일류와 삼류는 바로 필자와 독자가 글을 통해서 얼마나 자신을 성찰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게 됐다. 글을 쓰면서 얼마나 위로받고 변화했는가. 글을 읽으면서 자신의 내면에서 무엇을 발견했는가. 삼류에 냉소적인 나, 징징거리는 문체에 치를 떠는 나, 지적인 정보에 압도당하는 나, 평가나 판단에 급급해 글에 몰입하지 못하는 내가 보이는가. 신파에 눈물짓는 나, 로맨스 소설을 읽으며 남몰래 짜릿함을 느끼는 내가 보이는가. 그 외에 어떤 것들이 보이는가.     박미라 『상처 입은 당신에게 글쓰기를 권합니다』   ‘치유하는 글쓰기 연구소’를 이끄는 저자의 치유적 글쓰기 안내서다.   “1. 초등학교 3학년 때 사회과목을 좋아하던 나는 학교에서 백지도 책을 산다고 300원을 가져오라그랬느데 엄마는 주지않았다. 엄마에게 처음으로 욕을 했었다. 물론 마음으로. 반 아이가 미술시간 준비물로 풀을 대신해서 흰쌀밥을 가져왔다. 난 그 밥이 먹고 싶었다.” 글쓰기 워크숍 참가자가 쓴  ‘내 인생이 서러운 100가지 이유’ 중 1번이다. 지금은 회사의 고위 간부가 된 그는 텅 빈 사무실에서 이 글을 썼다. “7. 20대 중반 정도에 나는 이를 해 넣었다. 오로지 나의 힘으로. 그 이가 지금까지 있다. 참 힘든 세월이었다.”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엉망이지만, 오롯이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는 힘을 가진 글. 낭독이 끝났을 때 참가자들은 함께 울었다. 저자는 “이 글이 그날 밤, 그녀와 우리 모두를 구원했다”고 썼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상처 치유적 글쓰기 글쓰기 워크숍 글쓰기 연구소

2024-11-13

[문장으로 읽는 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신체를 전체적으로 감싸는 날씨는 부분적으로 우리의 기쁨과 번민을 좌우한다. 빛은 우리를 경쾌한 기운으로 채우고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개인적 징벌처럼 우리를 짓누른다. 해는 매일 아침 선물을 한아름 안고 떠오른다. 새하얀 눈밭에 발자국을 찍으면 세상에 첫걸음을 떼는 기분이 든다. 눈을 감고 잠들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새벽이 눈부신 빛으로 솟아오르려면 어둠이 필요하다. 힘든 날들은 지나간다. 우리는 1년에 365번이나 그런 날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다.     파스칼 브뤼크네크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까놓고 보면 사기다. 과학기술이 늘려준 것은 수명이 아니라 노년이다.” 이 명제에서 출발하는 책이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삶을 20년이나 더 살라니!” 푸념하는 이들에게 작가는 나이듦의 새로운 태도를 말한다. 가령 인용문처럼 “매일 아침 새 삶을 시작한다는, 말은 안 되지만 꼭 필요한 환상”이 필요하다. “모든 것에서 찬란함을 재발견”하는 기술, 일상적 루틴(습관)도 강조한다. “정신적 나이, 감성적 나이는 생물학적 나이와 일치하지 않는다. 노화를 늦출 방법은 욕망의 역동성 안에 머무는 것뿐”이라는 작가는 “노년은 재건의 대상이다. 엎드려라, 포기하라, 라는 강요를 거부해야 한다”고 썼다.   “50세, 60세, 70세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20세, 30세, 40세 때와 똑같다. 삶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자에게 달고 저주를 퍼붓는 자에게 매섭게 군다. 어느 나이에나 삶은 열의와 피로의 싸움이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오지 생물학적 나이 정신적 나이 개인적 징벌

2024-11-06

[문장으로 읽는 책] 천국은 있다

천국은 있다   뼈의 입장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다가   이미 알고 있었던 일들이   나를 놀라게 한다는 걸 알았다   모든 예상된 일은   예상치 않게 나를 흔든다   물론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뼈가 됐다는 걸   허연 『천국은 있다』   시인 유희경은 허연의 시를 ‘견딤’에 대한 시라고 말한다. “그 견딤은 시종일관 아슬하고,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나 역시 견디고 있음을 깨닫는다”고 썼다. 인용한 시는 ‘이장’의 도입부다. 시인은 어머니의 죽음을 견뎌낸 것도 모자라, 뼈가 된 어머니를 확인하는 이장까지 견뎌낸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처럼 예상된 일이(누구나 죽는다), 예상치 않게 나를 흔드는 것, 그런 속수무책을 지치지 않고 견디는 게 삶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지난겨울 날렸던 연이/ 예기치 못한 각도로/ 곤두박질쳤던 것처럼/ 이별은/ 전면적이고 모든 것인 일// 세상의 모든 설탕 덩어리들이/ 언젠가 다 물에 녹듯/ 긴 잠에서 깨어나면/ 어차피 이 세상이 아닌 것.’ 시 ‘이별의 재해석’의 일부다. 날아오른 연이 떨어지고, 설탕이 녹듯이 사랑도 파국을 향해 간다. 진실했다면 됐다고?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이별한 사람들이 쓴/ 마지막 편지들을 읽는다/ 마지막이므로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 진실은 그저 무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천국 시인 유희경 설탕 덩어리들 마지막 편지들

2024-10-30

[문장으로 읽는 책] 무서운 극장

그러나 다시 안토니아 왈, 우리가 최선을 다해 그 춤을 춘 이상 그로부터 무언가는 다시 시작된단다. 삶은 이유 없이 시작되지만, 또한 영원히 대물림되기도 하는 거란다. 춤은 어차피 끝날 테지만, 이유 없이 시작된 단 한 번의 춤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추는 것, 그것이 인생이란다. 그래서였을까? 온 힘을 다해 단 한 번의 춤을 추고 이제 죽음을 맞이하는 안토니아의 마지막 표정에서는 묘한 자부심과 만족감과 회한이 동시에 묻어난다. 내가 본 가장 장엄하고 평화로운 죽음이었다.     김형중 『무서운 극장』   문학평론가인 김형중 조선대 교수의 영화평론집이다. 인용문은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1995)에 대한 글이다. 예전에 보았던 영화지만, 다시 보고 싶어졌다.   “‘사유 없음’, 곧 진부함이 악으로 정의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바로 악의 기원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먹고 자고 배설하는 일이 초미의 관심사라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평범하기 그지없고, 이모티콘으로 말을 대신하고 검색으로 사유를 대신한다는 점에서 진부하기 그지없다.” ‘악의 평범성’으로 유명한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삶을 그린 ‘한나 아렌트’(2012)에 대한 글이다.   “관객이 원하는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제공하지 않는, 말하자면 ‘불편한 영화’”들을 통해 영화와 세계를 오가는 사유의 폭을 보여주는 책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작품의 디테일에 대한 반짝이는 포착과 주제의 복합성에 대한 치열한 존중을 이렇게 별일 아니라는 듯 겸비한 글은 드물다”고 썼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극장 한나 아렌트 문학평론가 신형철 김형중 조선대

2024-10-23

[문장으로 읽는 책] 내게는 수많은 실패작들이 있다

실패작들은 히트작이라면 절대 그러지 않을 방식으로 나에게 들러붙는다. 실패작들은 나를 고문한다. 나는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인다. 영화를 다시 재생해본다. 다른 배우들을 캐스팅해본다. 재편집해본다. 시나리오를 다시 써본다. 다시 한번 상영해본다. 무수한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와 무수한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 사이에서 방황하게 된다. 비난할 만한 대상을 찾아 헤매게 된다.     노라 애프런 『내게는 수많은 실패작들이 있다』   ‘시그널’ ‘킹덤’ 등 수많은 히트작을 낸 김은희 작가의 남편인 장항준 감독은 한 예능 프로에 나와서 아내에게 “언제든 한번 실패할 때가 온다. 그것만 알고 있으면 된다고 말해준다”고 했다. 인생과 창작의 동반자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이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유브 갓 메일’ 등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의 대표주자이던 노라 애프런 감독의 에세이집이다. 영화만큼이나 유머와 예리함이 넘치는 감성으로, 성공한 영화감독이자 세 번 결혼하고 이제는 70줄에 접어든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하루하루 나이 들어가는 노년의 소소한 일상에 대한 소회도 털어놓는다. 흔히 실패의 장점을 설파하거나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웅변하는 글들과 달리 실패에 대한 태도가 담백하다. “내가 보기에 실패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앞으로도 언제든 또 다른 실패를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실패를 받아들이는, 가장 실패 없는 방식이 아닐까. 애프런은 2012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실패작 장항준 감독 할리우드 로맨틱 김은희 작가

2024-10-16

[문장으로 읽는 책]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우리는 삶을 얼마나 너절하고 변변찮고 형편없이 영위하고 있는가! 우리 중 대체 누가 이 대가가 하듯 신과 숙명 앞에 나설 수 있을까. 저렇게 탄원과 감사를 외치며, 뼈저린 존재를 내세워 저렇게 위대하게 항거하면서. 아, 우리는 다르게 살아야 하리라. 다른 모습이어야 하리라. 좀 더 하늘 아래 나무 아래 거해야 할 것이며, 좀 더 묵묵히 혼자 아름다움과 위대함의 비밀에 다가가야 할 것이다.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음악 애호가였고, 문학에도 음악이 주요 키워드였던 헤르만 헤세의 음악 글 모음집이다. 인용문은 에세이 ‘고음악’의 일부. 외딴 시골집에 사는 그가 비 오는 저녁 도시의 고음악회를 다녀온 얘기다. 음악을 들을 때마다 이미지와 풍경, 스토리를 떠올리는 헤세는 그 음악적 인상을 풍부한 언어로 눈에 선하게 옮겨놓는다. 이 글은 이렇게 끝난다. “느긋하게 마지막 비탈을 올라 모두가 자고 있는 집에 들어서니, 느릅나무가 창문 너머 말을 걸어온다. 이제 나는 기쁘게 쉬러 간다. 다시 한동안 삶을 살아가며 그 운명에 기꺼이 농락당해도 괜찮으리라.”   헤세에게 음악은 ‘순수한 현재’이자 ‘미적으로 지각 가능하게 된 시간’ ‘순간과 영원의 동일성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문장으로 읽는 책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 음악적 인상 풍경 스토리

2024-10-09

[문장으로 읽는 책] 가장 공적인 연애사

연애만큼 자본주의적이며 잔혹한 경쟁의 세계가 없다. … 데이트의 모든 과정에는 돈이 든다. … 연애 중일 때는 연인에게, 연애를 하지 않을 때는 연애를 하기 위해 돈을 쓴다. 연애 경쟁은 삶을 잠식할 정도로 치열하지만, 패자에게는 그 어떤 복지도 없다. 선택받지 못하면 끝이다. 그런데도 모두가 이 불공평한 조건을 받아들인다. 자유로움과 평등이 끝끝내 실현되지 않는 세계가 딱 하나 있다면 그것이 연애와 결혼이다. 인간은 평등한데 왜 인기 있는 사람만 늘 인기 있는가?   오후 『가장 공적인 연애사』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연애라는 가장 인간적인 감정의 배분은 절대로 공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서나 쉽게 사랑받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다. 감정의 승자가 진짜 승자, 권력자다. 연극배우로도 활동하는 장애인 변호사 김원영씨도 정치적 올바름으로 장애인에게 편견 없는 태도를 갖는 사람은 많아졌지만, 과연 장애인(혹은 그 육체)에게 성적으로 매혹당하고 사랑하는가는 다른 문제라고 쓴 바 있다.   “지금도 많은 경우 조건이 사랑에 선행한다. 조건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 조건을 갖춘 상대를 사랑한다. 그리고 이제는 그 사랑 자체도 조건이 된다. 사랑을 할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왜 사랑 가능한 사람만 사랑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매우 심각한 문제에 직면한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연스러운 욕구가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차별하고 선별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   흥미롭고 깔끔하게 정리된 인류의 성과 연애에 대한 역사서다.문장으로 읽는 책 연애사 공적 연애 경쟁 장애인 변호사 사랑 자체

2024-10-02

[문장으로 읽는 책] 카프카의 아포리즘

“주인 나리, 어디로 가시나요?” “모른다.” 내가 대답했다. “단지 여기에서 떠나는 거야, 줄곧 여기에서 떠나는 거라고. 그래야만 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어.” “그럼 나리께서는 목적지를 아신단 말씀인가요?” 그가 물었다. “그렇다네.” 내가 대답했다. “내가 이미 말했잖아.” “‘여기-에서-떠나는 것,’ 그것이 내 목표야.”   편영수 엮고 옮김 『카프카의 아포리즘』   현대인의 불안과 소외, 부조리를 천착했던 카프카의 짧은 글 모음집이다. 폐결핵으로 생사의 기로에 선 그가 두 권의 팔절판 노트에 쓴 ‘아포리즘’, 메모장과 일기·편지 등에서 발췌했다. 인용문은 ‘출발’의 일부. 카프카 문학에 맞닿은 단상들을 읽는 재미가 있다.   “이 세상의 결정적인 특징은 덧없음이다. ~폐허에서 새로운 삶이 꽃핀다는 것은 삶의 지속보다는 죽음의 지속을 입증하는 것이다”(팔절판 노트). “세상의 때 묻은 눈으로 보면, 우리는 긴 터널 속에서, 그것도 입구의 빛이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출구의 빛도 아주 희미해서 시선이 끊임없이 빛을 찾지만 입구도 출구도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빛이 사라져버린 지점에서 사고를 당한 열차 승객들과 같은 입장에 처해 있다”(팔절판 노트). “어른이 책상을 밀어서 아이가 카드로 만든 집이 무너지면, 아이는 화를 내지. 그러나 카드로 만든 집은 책상이 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 집이 카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무너진 거야”(막스 브로트에게 보낸 편지). “예술의 자기 망각과 자기 지양:도피인데 산책 혹은 공격인 척한다”(팔절판 노트).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아포리즘 카프카 카프카 문학 입구도 출구 팔절판 노트

2024-09-25

[문장으로 읽는 책] 가장 공적인 연애사

연애만큼 자본주의적이며 잔혹한 경쟁의 세계가 없다. … 데이트의 모든 과정에는 돈이 든다. … 연애 중일 때는 연인에게, 연애를 하지 않을 때는 연애를 하기 위해 돈을 쓴다. 연애 경쟁은 삶을 잠식할 정도로 치열하지만, 패자에게는 그 어떤 복지도 없다. 선택받지 못하면 끝이다. 그런데도 모두가 이 불공평한 조건을 받아들인다. 자유로움과 평등이 끝끝내 실현되지 않는 세계가 딱 하나 있다면 그것이 연애와 결혼이다. 인간은 평등한데 왜 인기 있는 사람만 늘 인기 있는가?           오후 『가장 공적인 연애사』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연애라는 가장 인간적인 감정의 배분은 절대로 공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서나 쉽게 사랑받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다. 감정의 승자가 진짜 승자, 권력자다. 연극배우로도 활동하는 장애인 변호사 김원영씨도 정치적 올바름으로 장애인에게 편견 없는 태도를 갖는 사람은 많아졌지만, 과연 장애인(혹은 그 육체)에게 성적으로 매혹당하고 사랑하는가는 다른 문제라고 쓴 바 있다.   “지금도 많은 경우 조건이 사랑에 선행한다. 조건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 조건을 갖춘 상대를 사랑한다. 그리고 이제는 그 사랑 자체도 조건이 된다. 사랑을 할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왜 사랑 가능한 사람만 사랑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매우 심각한 문제에 직면한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연스러운 욕구가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차별하고 선별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   흥미롭고 깔끔하게 정리된 인류의 성과 연애에 대한 역사서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연애사 공적 연애 경쟁 장애인 변호사 사랑 자체

2024-09-18

[문장으로 읽는 책] 충분하다

‘레이크스 미술관의 이 여인이/ 세심하게 화폭으로 옮겨진 고요와 집중 속에서/ 단지에서 그릇으로/ 하루 또 하루 우유를 따르는 한/ 세상은 종말을 맞을 자격이 없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충분하다』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의 유명한 그림 ‘우유 따르는 여인’을 소재로 한 시 ‘베르메르’의 전문이다. 쉽고 짧고 명징하다. 우유를 따르는 일상과 노동의 한 순간을 포착한 그림의 숨 멎는 듯한 긴장감이 고스란히 전해질 뿐만 아니라 우유를 따르는 일상이 계속되는 한 삶은 이어지며 순간은 영원이 된다고 말하는 시다. 미술관 그림 앞에 홀린 듯 골똘한 표정을 짓고 선 이들이 절로 떠오르기도 한다.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쉼보르스카는 익숙한 모티브를 독창적으로 변주하며 일상과 생명을 긍정한 시인이다. 한국어판 『충분하다』는 생전 마지막 시집 『여기』와 유고시집 『충분하다』를 엮은 책. 시인이 제목으로 미리 정해뒀다는 ‘충분하다’는 삶의 막바지, 그가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른다.   ‘가장 좋은 경우는/ 나의 시야, 네가 꼼꼼히 읽히고,/ 논평되고, 기억되는 것이란다.// 그다음으로 좋은 경우는/ 그냥 읽히는 것이지. //세 번째 가능성은/이제 막 완성되었는데/ 잠시 후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나의 시에게’ 부분) 당연한 얘기지만 그의 모든 시가 첫 번째 경우였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하루 우유 노벨문학상 수상

2024-09-11

[문장으로 읽는 책]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

나는 또 증발하고 있다/ 내가 모르는 새 시, 조금씩/ 나는 너에게 보여 주기 위한// 시// 읽는 사람의 몫이 대부분인/ 가장 무대뽀의 도둑 심뽀의/ 일/ 내가 구운 향기 나는 빵을 먹으며 내// 시// 한 편을/ 읽어 주겠니/ 오늘   최재원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   ‘그래’라고 답하고 싶은 시다. 최근 읽은 시집 중 단연 좋았다. 인용한 시는 ‘너는 시’의 전문.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떨어지지 않는 것들을/ 격자에 맞추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찢어 떼어 놓는 데 쓰고 있다.” ‘시’라는 제목의 시도 있다. 사실 잘 알 수 없고 언어화되기 힘든 것을 시어로 만들면 읽는 사람이 제각각의 언어로 해석하는 것, 시가 바로 이런 것 아닌가.   2021년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최재원의 시집이다. 시인은 물리학과 시각예술, 그림을 전공했고 미술비평가, 번역가로도 활동 중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비정형의 과감한 상상력은 “소년도 소녀도 아닌/ 오차도 찰나도 아닌/ 이름을 불러 주세요/ 이름을 부르지 마세요/ 안은 여러 개지만 밖은/ 하나예요 이제 같은 길은/ 없어요” (‘백야’)처럼 이분법을 거부하는 젠더퀴어로도 이어진다. 시인은 “사이에 있는 모든 것들을 통해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사랑할 수 있다”는 수상 소감을 밝혔었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물리학과 시각예술 미술비평가 번역가 소년도 소녀도

2024-09-04

[문장으로 읽는 책] 마음챙김

마음챙김의 속성을 이해하고 나면 편견을 줄일 다른 방법을 떠올릴 수 있다. 바로 사람들 간의 차이를 더 적게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구별하는 것이다. 맥락의 중요성과 다양한 관점의 존재를 깨닫고 나면 우리는 능력이나 장애에 대한 인식이 상황과 관찰자의 입장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그럼으로써 어떤 장애를 그 사람의 정체성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게 된다. ‘절름발이’나 ‘당뇨 환자’ ‘간질 환자’가 아닌 한쪽 다리를 저는 남자, 당뇨병이 있는 여자, 발작 증세가 있는 청년을 보게 되는 것이다. 절름발이보다는 한쪽 다리를 저는 남자가 더 정교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단순한 ‘청각 장애자’가 아니라 ‘청각이 정상 수준의 70%인 사람’으로, ‘당뇨 환자’가 아니라 ‘인슐린 비의존형 당뇨병이 있는 사람’ 식으로 좀 더 정교하게 구분할 수도 있다.     엘런 랭어 『마음챙김』   심리학자인 저자에 따르면, 범주를 잘게 쪼개어 더 많은 특징을 구별할수록 포괄적인 고정관념과 편견은 줄어들고 독창성과 창의력은 자란다. 저자는 아동 대상 실험결과도 소개한다. “주의 깊은 구별 짓기를 훈련받은 아이들은 편견을 품지 않고 대상의 특징을 구별하는 법을 배웠다. 신체 장애가 특정 기능과 관련된 특성이지 그 사람의 전체와 관련된 특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칠 수 있음이 밝혀졌다.” 구체성과 디테일의 힘이다.   ‘마음챙김(mindfulness)’이란 마음을 열고 주의를 기울이며 창의적인, ‘마음집중’ 상태를 뜻한다. 마음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이 많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마음챙김 청각 장애자 남자 당뇨병 당뇨 환자

2024-08-28

[문장으로 읽는 책] 여행하는 소설

“여행 경험이 많진 않지만 전부터 비행기 표 알아보는 걸 좋아했다. 앞으로 절대 가 볼 일 없고, 가 보지 못할 나라라도 그랬다. 직장 일로 영혼이 어둑해지거나 인간에게 자주 실망할 때면 혼자 이국의 낯선 도시를 검색해 보곤 했다. 태블릿 피시와 다정히 얼굴을 맞댄 채 열대지방 햇볕 쬐듯 전자파를 쬐었다.”     장류진 외 『여행하는 소설』   일상이 막히고 여행이 귀한 경험이 된 시절에 맞춤한 소설집이다. 일곱 명의 작가가 여행을 소재로 썼다. 위 인용문은 김애란의 소설 ‘숲속 작은 집’의 일부. 해외여행 중 메이드에게 팁을 주는 문제로 고민하는 얘기다.   “하루오는 전에 없이 길고 깊은 잠을 잤다. 깨어 보니 낯선 방이었다. 몇 겹의 삶이 지나간 듯 오래 잔 느낌이었다. 그 아침,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는 하루오는 어쩐지 바다 밑바닥에서 빠져나오는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창문을 열고 소음으로 가득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희미한 햇살이 있었고, 자동차들이 무수히 지나다녔고, 매연이 뒤섞인 찬 공기가 창문으로 밀려들었다. 하루오는 아, 하고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어딘지 모르게, 그것은 새로운 세계였던 것이다.” 이장욱의 ‘절반 이상의 하루오’의 일부다. 일본인 하루오는 부산 남포동 모텔방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을 먹으러 가는 길에 “도를 믿느냐”는 기이한 질문을 받고 “기이하게도 죽고 싶었던 마음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건, 나란 존재가 5센티미터쯤 다른 세계로 옮겨진 것 같은 그런 순간이 아니었을까.” 짐 싸고 싶어지는 문장이다.문장으로 읽는 책 여행 소설 여행 경험 열대지방 햇볕 태블릿 피시

2024-08-21

[문장으로 읽는 책] 곱빼기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는 짜장면교의 오랜 신도였다. 자진해서 돈을 갖다 바쳤고, 코를 박고 경배했으며, 외롭고 힘들 때마다 위로를 구했다. 먹다가 젓가락이 부러져도 짜장면 탓으로 돌리지 않고 우리 신앙의 부족을 고백했다. 짜장면은 우리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심지어 언제든 기도드릴 수 있도록 가정 상비용 인스턴트 제품도 만들어주었다. 더구나 곱빼기라는 말, 언제나 가슴을 뛰게 하는 그 한마디로 나는 배교하지 않았다.     박찬일 『곱빼기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누구에게나 인생 음식이 있지만,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짜장면으로 이루어진 사람이다. 짜장면은 그냥 음식이 아니다. 세상 모든 음식 앞에 있다.” “평생 빠져나오지 못할 기름지고 걸쭉한, 검은 늪” 짜장면에 대한 박찬일 셰프의 지고지순한 순애보다. 맛과 식문화에 통달한 저자가 글에 대해서도 예민한 촉수를 펼쳐 보인다. 이제는 평범한 음식이 돼버렸지만 한때는 인생의 특별한 순간을 장식해 주던 음식이다.   “어려서 중국집에 간다는 건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짜장은, 맛으로 완벽한 음식이다. 밀가루와 설탕이 도파민을 뿜어내게 하는 데다, 고온의 기름에 튀겨진 음식은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손꼽힐 자격이 있다. 치킨이 뭔가. 결국 튀겼기 때문에 승자가 된 것이다. 짜장면은 그 기름에 닭 대신 춘장을 튀겼다. 그리고 면을 함께 낸다. …껍질을 잘 벗긴 하얀 밀을 가루로 빻아 반죽하고 다시 가늘고 길게 뽑아낸 면. 그 면이라는 존재에 이미 인간은 영혼을 빼앗긴다.”   오랜만에 짜장면이 당기는 날이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곱빼기 다행 인생 음식 박찬일 셰프 가정 상비용

2024-08-14

[문장으로 읽는 책] 활기찬 노년과 빛나는 죽음을 맞으라

나는 지금 그릇을 닦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간다. 크림을 만들지 않아도 되고 바느질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 모든 일을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곳으로 간다. 먹지 않는 곳에서는 그릇도 닦지 않을 것이기에. 지금 나를 위해 절대 애도하지 말라. 나는 영원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곳으로 가려는 것이니.     헬렌 니어링 엮음 『활기찬 노년과 빛나는 죽음을 맞으라』   나이듦과 죽음에 대한 지혜의 말들을 뽑아 엮은 책이다. 저명한 사상가·문인·명사들의 명언이 많은데, 그중 저 문장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1860년 ‘어느 식당 여종업원의 비문’이다. 평생 지독한 노동에 시달렸고 죽어서야 자유로울 수 있었던 한 여성 노동자의 토로가 절절하다.   브레히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차라리 충만하지 않은 삶을 두려워하십시오”라고, 몽테뉴는 “나는 힘닿는 한 계속 일하며 살아가고 싶다. 내가 양배추를 심고 있을 때 죽음이 찾아오기를 바란다”(『수상록』)라고 썼다.     곱씹을 말이 많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죽음 그 자체보다 중요하다. 우리가 죽음을 막을 수는 없지만, 죽어가는 모습은 선택할 수 있다.”(사이러스 설즈버거)  “죽음이 우리의 마지막 관문이라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에 관해 너무도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로버트 허홀드)  “아름다운 노년을 맞이하고 싶다면 아름다운 청춘을 누려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바로 우리 자신의 후손이자 선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내가 나인 것은 어제의 내가 바로 나였기 때문입니다.”(엘버트 허버드)문장으로 읽는 책 노년과 여성 노동자 사이러스 설즈버거 엘버트 허버드

2024-08-07

[문장으로 읽는 책] 엄마, 가라앉지 마

연도를 본다. 1933-2017. 저 대시, 저 짧은 대시, 저것이 인생이다. 모든 게 다 저 짧은 문장 부호 안에 들어 있다. 당신이 하고, 생각하고, 보고, 꿈꾸고, 울고 웃은 모든 것. 당신의 전부. 저 대시 안에.     나이젤 베인스 글·그림 『엄마, 가라앉지 마』   “살면서 딱 한 번만 하게 되는 말이 있다. 엄마가 돌아가셨다.” 누구나 겪게 되지만 부정하고 싶은 이별에 대한 책이다.   영국 소도시 철도 노동자의 아내였던 엄마가 치매에 걸렸다. 그로부터 2년, 엄마와 함께한 삶의 마지막을 담은 만화책이다. 치매 환자를 돌보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가족의 역사,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을 떠올리다가도 미처 알지 못했던 엄마의 빚이나 의료·복지 시스템의 문제 등에 대해서는 장탄식을 하기도 한다.     “혼합형 치매라고? … 나는 일종의 자동차 납치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았다. 새로운 경로가 설정되었다. 우리는 이정표가 없는 도로 쪽으로 좌회전을 하고 있었다.” “돌봄 서비스를 신청하는 일 또한 시시포스의 노역이나 다름없었다. 돌보미들은 훌륭했지만 돌봄 시간은 너무 짧았고 그들은 오자마자 택시 불러서 다음 고객에게 가기 바빴다.” “우리 사회가 공동체임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우리가 인생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달려 있다.”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작가의 악몽으로 시작하는 책은, 그가 물 위를 편안하게 유영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치매를 앓던 엄마든, 치매 환자를 간병하던 자식이든 삶이란 가라앉지 않으려는 사투와 같은 것. 모두가 편안해지기를 바라게 되는 책이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엄마 치매 환자 자동차 납치사건 대시 저것

2024-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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