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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아름다운 우리말 살리기

나는 세태에 한참 뒤떨어진 원시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크게 부끄럽지도 않다. 그래서 한국을 온통 뒤흔들었던 ‘읽씹’이라는 낱말을 당연히 몰랐다. 읽씹? 어느 외국에서 들어온 욕설인 줄로 알았다. 검색을 해보니 설명이 나와 있다. ‘문자나 메신저, SNS의 메시지 내용을 읽었음에도 아무런 답신을 하지 않는 경우를 이르는 속어.’   ‘안읽씹’이라는 말도 있다고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아, 속어로구나, 그러면 그렇지! 한데, 메시지를 씹는다고? 왜 씹어? 맛있나? 메시지가 소시지의 일종인가? 씹는 거 좋아하다 보면 치과의사 좋은 일만 시키는 건데….   그러니까, 읽기는 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기분 나쁘다, 자존심 상한다. 뭐 그런 말인 모양인데, 그렇다면 보고도 대답이 없으면 ‘보씹’이고, 듣고도 묵묵부답이면 ‘듣씹’이 되는 건가? 이건 너무하다.   아무튼 그놈의 ‘읽씹’ 때문에 한국 정치판이 온통 난리판이었던 모양인데, 나는 무슨 일인지 도무지 관심이 없다. 알고 싶지도 않다. 알아봤자 도움될 건 개뿔도 없고, 애매한 혈압만 오를 게 뻔하다. 다만, 내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속절없이 무참하게 망가지고 있는 우리말의 신세다. 글쟁이 주제에 그런 아픔을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 무기력이 부끄럽고 서글프다.   이런 터무니없는 신조어를 아무런 비판도 망설임도 없이 대서특필하고 왕왕 떠들어대는 언론, 뭐 얻어먹을 거 없나 눈치 살피는 정치판, 재미있다고 낄낄대며 즐기는 대중, 못 본 척, 못 들은 척, 고상한 지식인들…. 소문으로는 ‘읽씹’을 실감 나게 발음하다가 혀 깨문 인간이 한둘이 아니란다.   세종대왕께서 내려다보며 눈물 흘리고 계신다. 극대노하지 않으시는 것만도 성은 망극이다. 이런 신조어를 ‘야민정음’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감히 훈민정음에 빗대다니, 무엄하도다!   내친김에 자료를 찾아보니, 이런 신조어는 엄청나게 많다. 놀라울 정도다. 먹방, 먹튀, 라떼는 말이야, 불금, 내로남불, 가성비처럼 제법 익숙해진 것부터 웃안웃, 뇌피셜, 완내스(완전 내 스타일), 케바케(case by case), 텅장(텅 빈 통장)처럼 방금 탄생한 외계어 수준의 신조어에 이르기까지 현란하게 생성소멸을 거듭하고 있다. 드디어 ‘신조어사전’이 나왔을 정도다.   신조어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데, 아무래도 가장 많은 것이 줄임말이다. 젊은 세대의 생활방식이나 통신기기의 획기적인 발달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긴 글 읽기 싫어하고, 사색은 질색하는….   쌤(선생님), 낄끼빠빠, 갑툭튀, 단짠, 넘사벽, 듣보잡, 솔까말(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등등 기발한 재치가 빛난다. 그런데, 젊은 세대는 그렇게 아껴서 모은 시간에 도대체 뭘 하는지 궁금하다.   이런 말 중 ‘틀딱’이라는 낱말에 눈길이 머물렀다. 틀니+딱딱의 줄임말로, 틀니를 딱딱거리며 잔소리하는 꼰대를 칭하는 말이란다. 아이고, 무서워라, 죽어도 틀니는 하지 말아야지!   당연한 말이지만, 과도한 신조어 사용은 언어를 망가뜨리고 세대 간 단절을 부른다. 심각한 문제다. 특히 신조어에는 은어, 비속어 등이 포함되는 경우가 많아서 언어의 품격을 지키는 점에서 큰 문제다.   우리말의 순수성과 아름다운 가치를 지키는 노력은 문인들에게 주어진 신성한 임무이다. 글 쓰는 사람이나 배우들은 우리말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엉터리 신조어에 맞서, 우리말 구하기 대작전이라도 펼쳐야 할 판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우리말 엉터리 신조어 신조어 사용 한국 정치판

2024-07-25

[독자 마당] 한국정치의 문제점

학자들은 정치를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분배’, ‘국가의 운영 또는  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 등으로 정의한다. 이를 쉬운 말로 풀어보면 한 공동체에서 각 구성원의 필요에 따른 요구를 고루 채워주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각기 다른 요구에 맞춰 산술적으로 계량키 어려운 과제들을 풀어가야 함에, 정치는 처한 상황에서 가능한 최상의 결과를 도출해 내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실행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물의 어떤 현상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 정치적이란 표현대로, 보편적 가치논리에 따른 원칙만을 고집하는 것은 무리다. 특정 목적에 따라 적절히 대응하는, 때로 최상만이 아닌 차상으로 변용 대체할 수 있음이 정치의 속성이다.     인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으로는 광대한 번영을 이루었지만, 그릇된 판단과 오류로 극단의 부침과 파란만장의 고난사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러나 정치는 구성원간 연결과 관계설정의 매개 역할로 한 공동체가 결성되고 지속해서 유지, 운영되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불가결의 요소이다. 크고 작은 공동체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이를 이끌어 가는 정치의 역량에 따라 저마다의 궁극적 목표인 안정, 번영이 좌우되기에 이를 위한 능력 있는 정치인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 정치, 정치인은 수혜자들에게 신뢰와 만족을 주고 그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진력해야 할 사명과 의무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어느 곳,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정치,정치인의 자질,역량에 따라 삶의 질과 대외적 위상 등이 결정될 수 있다.      작금의 한국 정치판을 보면 국민이 맡겨준 직위로 국익을 위해 헌신하기보다 자신과 소속집단의 사익을 위해 맡겨진 책무와 신의를 저버리는 일부 저질 정치꾼들이 있다. 그들을 보면서 무거운 마음을 억누른다. 윤천모 / 풀러턴독자 마당 한국정치 한국 정치판 정치 정치인 보편적 가치논리

2023-05-23

[중앙시론] '트롤리 딜레마'의 함정

우리는 사는 동안 끊임없이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물론 그 선택의 결정 과정은 상대적으로 쉬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다.     결정 과정의 어려움을 이론으로 정리한 것 가운데 ‘트롤리 딜레마(Trolley dilemma)’가 있다. 실례로 제동장치가 망가진 전차가 달리고 있다. 선로 위에는 5명의 사람이 있어, 운전자가 선로를 바꾸지 않으면 모두 죽게 된다. 그런데 선로를 바꾸려고 하니 그 선로 위에는 다른 1명이 서 있다. 어떤 결정을 해야 할까?  이 문제는 윤리학에서 가정하는 사고실험의 하나다. 많은 사람은 다수를 살리기 위해 소수를 희생하는 쪽에 손을 들지만, 과연 그럴까?  희생되어야 할 사람이 자신의 자식이거나 부모라면 과연 쉽게 동의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유명한 장기이식 사례가 등장한다. 건강한 신체를 가진 한 사람이 병원에 입원했다. 그런데 그 병원에는 에이브러햄 링컨 같은 위대한 정치가, 슈바이처 같은 의사,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 인류의 기술 수준을 한 단계 도약시킬 수 있는 공학자가 각각 시한부 질병으로 입원해 있다. 이들 4명의 위인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사람의 장기를 떼어 이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장기를 떼어 내면 건강한 사람은 죽는다. 당신은 이들 환자를 담당하는 의사다. 병원의 보안시설은 완벽해서 건강한 환자의 장기를 모두 떼어낸다고 해도, 이는 외부에 절대 알려지지 않고, 사회의 불안도 초래하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과연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트롤리 딜레마는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으나,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 하버드대 교수가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 언급하면서 더욱 인구에 회자되었다. 이런 딜레마 상황은 현실에서 많이 부딪친다. 이민문제, 백신의무화, 총기 자유화 등 초미의 사회 관심사들도 이에 속한다.  그렇다면 이 같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피할 수 있으면 멈추거나 돌아갈 수 있으면 최선이다.     문제는 민주주의는 항상 선택을 요구하고, 그 선택은 반드시 어떤 희생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휴스턴 클리어 레이크 대학(university of Huston Clear Lake)의 이세형 정치학 교수는 이와 관련, “민주주의는 최선을 선택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며, 어떤 정책을 선택함으로써 다른 것의 희생을 감수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이에 따라 “민주주의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라며 “상대방을 배려하고 조금씩 양보하면 의견차를 조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어떻게(How)’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원론에는 공감하지만 각론에서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다. 정의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강조한 샌델 교수도 이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중용(中庸)에 따르면 군자는 한쪽에 치우치거나 기대지 않고 시중(時中)을 두고 행동한다. 시중은 상황에 맞게 대처하여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을 말한다. 반면, 소인은 변화와 융통이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며 욕망이 지나치다. 얼핏 보면 시중인 것 같지만 사실 중용에 역행하는 것이다.   최근 미국이나 한국이나 상황을 보면 너무나 소인배 정치가 판치는 것 같다. 한화큐셀의 조지아 투자 성과를 둘러싸고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의 공치사는 그래도 애교다. 워싱턴 정가와 한국의 여의도 정치판은 ‘웃픈(웃기고도 슬픈)’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어디 정치판뿐이랴. 우리의 주변을 둘러봐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대부분은 확증편향적 소인배 사고에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번 결정을 내렸더라도, 그것이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재고할 수 있는 유연성도 부족하다.     유명 TV드라마에서 주인공이 하는 말이 떠오른다. “이게 최선입니까?”  권영일 / 애틀랜타 중앙일보 객원 논설위원중앙시론 트롤리 딜레마 트롤리 딜레마 딜레마 상황 여의도 정치판

2023-01-23

두꺼운 낯과 시커먼 속

두꺼운 낯과 시커먼 속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살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왜 저런 사람들만 성공하는 걸까? 아니 저렇게까지 해야만 성공이라는 걸 하는 걸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이 의문 앞에서 ‘난 저렇게까지 할 바에야, 그냥 이대로 살겠다’ 하며 돌아서 버린다. 하지만 그러한 ‘진실 회피’는 늘 우리에게 ‘타인에게 휘둘리는 삶’을 살게 만든다. 이게 인생의 진실이다. ‘착하게 살고 싶은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고 싶은데, 그러면서도 내 인생을 살고 싶은데….’ 어찌 보면 참 상식적이고 당연해 보이는 이 소망은 왜 그렇게 풀기 어려운 과제가 되어 버렸을까? 그래서였을까, 햄릿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잔인해지리라, 친절하기 위해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정치의 근본이 사라졌다. 진정한 경세(經世)의 리더십은 간 곳 없고 모략과 꼼수가 난무한다. ‘정치는 나라를 바르게 하는 것’(政者正也)이며 ‘국가는 최선의 삶을 실현하는 공동체’라는 당위를 비웃는 정치 모리배들이 활개 친다. 죄지은 자가 더 큰 소리치는 세상이다. 권력을 갖는다는 건 황금 알을 낳는 오리를 얻게 된다는 뜻일까.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고 약속해서 얻은 자리지만 그들은 자기 주머니를 채우느라 바빴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건 반짝이는 눈앞의 황금이었다. 모든 정책은 돈으로 통한다. 그런데도 정권이 바뀌고 비리를 수사하면 정치 보복이라는 족쇄를 씌워 흐지부지되곤 한다.     청나라 말의 지식인 이쭝우(李宗吾.)는 후흑학(厚黑學)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후흑'이란 용어는 '면후(面厚)'와 '심흑(心黑)'을 합친 말로 '뻔뻔한 얼굴과 음흉한 속마음'을 뜻한다. 청조의 멸망과 신중국 탄생 사이의 대혼란기를 살았던 그는 수천 년 중국 통치술의 정수를 꿰뚫는 화두로서 후흑 원리를 제시했다. 이쭝우는 말한다.“얇지 않은 것을 두껍다 하고 희지 않은 것을 검다고 한다. 두껍다는 것은 천하의 두꺼운 낯가죽을 가리키는 것이고, 검다는 것은 천하의 시커먼 속마음을 말한다. … 뻔뻔한 것은 천하의 대본(大本)이며, 음흉한 것은 천하의 달도(達道)다. 지극한 후흑의 단계에 이르면 천하가 두려워하고 귀신도 무서워한다.”   이쭝우는 우리에게도 소설 삼국지로 친숙한 삼국의 영웅들이 모두 후흑의 대가였다고 말한다. 유비는 무능했지만 뻔뻔한 것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인물이다. 입신하기 전에 당대의 수많은 영웅에게 신세를 지고 이쪽저쪽으로 옮겨 다녔지만 전혀 부끄러운 줄 몰랐다. 호걸의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유비는 울기도 잘했고 '어려운 일에 봉착하면 사람들 앞에서 대성통곡해 패배를 성공으로 바꿔놓았다'고 전해진다. 요샛말로는 '진정성'을 극적으로 연출해 효과적 권력기법으로 삼은 것이다. 조조의 특징은 속마음이 칠흑같이 시커멓다는 것이다. 그는 은인들을 최대한 이용하고 상황이 바뀌면 가차 없이 배반했으며 임기응변에 능해 그 속셈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자신이 '난세의 간웅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오히려 기뻐했다거나 '내가 남에게 버림을 받느니 차라리 내가 남을 먼저 버리리라'는 발언은 삼국지를 흥미롭게 만드는 일화 가운데 하나다. 이처럼 뻔뻔함과 음흉함으로 무장한 책략가들이 서로 일진일퇴하면서 권력을 다투는 광경은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매우 익숙한 모습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은 마르크스주의 책보다는 중국의 정사(正史)인 24사를 평생 옆에 두고 정독했다. 후흑학을 탐독했다는 전언도 있다. 분명한 것은 마오가 후흑의 달인이라는 사실이다. 혁명의 도정(道程)이나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도 그는 자신에 대한 도전을 일절 용납하지 않았으며 모든 합리적 비판에 대해서도 교묘하게 응징했다. 평생의 혁명동지였던 펑더화이(彭德懷. 당시 국방부장)나 국가 주석이었던 류샤오치(劉少奇)를 숙청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고난도의 권력투쟁에서 그 누구도 마오의 속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공산주의를 급진적으로 실현하려는 대약진운동의 결과 수천만 명의 인민이 아사했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두꺼운 얼굴을 과시한다. 그야말로 후흑학의 정수를 보여준 것이다.     철면피에도 수준이 있다. 철면피의 흑심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후흑의 초보 단계에 불과하다. 두꺼운 얼굴임에도 형체가 없고 시꺼먼 마음을 가졌어도 검은 색깔이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높은 단계다. 후흑의 극치는 한없이 뻔뻔하고 음흉하면서도 ‘순결한 정의의 화신(不厚不黑)’으로 나타나는 경지다. 이런 상승 무공을 구사하려면 ‘후흑을 행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항상 정의와 도덕의 옷을 입어야 한다.’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은 절대 인정하지 않으며 명백한 잘못에도 결코 사과하지 않고 ‘말을 애매모호하게 흐리는’ 거짓말을 정치의 방략으로 삼는 것도 불후불흑의 핵심 기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후흑학을 ‘실리를 위해 도덕을 폐하라’는 처세술로만 읽는 것은 심각한 오독(誤讀)이다. 뻔뻔하고 음흉한 호걸들이 설치던 영웅할거 시대엔 공자·맹자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지만 오늘날 후흑학의 목표는 후흑의 기술을 공맹 도덕과 접목시키는 데 있다고 리쭝우는 결론짓는다. 이를 현대에 맞게 재해석하면 현실 정치의 악취를 뚫고 의미 있는 삶을 지향하는 ‘실천 도덕의 정치’가 중요하다는 철학적 통찰로 승화된다. 정치적 동물인 인간에게 책략과 이익 너머에 있는 규범과 가치를 꿈꾸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그가 말하는 후흑학 의 근본취지는 ‘후흑구국’으로 청조말 부강한 나라를 만들고 열강의 침탈로부터 나라의 독립과 자주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는 ‘후흑’을 개인의 이익을 위해 쓰면 욕된 이름을 얻게 될 뿐이지만, 나라를 위해서 쓰면 난세에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러서야 할 때 물러서고 감출 것을 감추며 냉정할 때에는 냉정하게 행동하는, 공공을 위한 ‘후흑’은 나라를 구하는 난세의 통치학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일상의 매 순간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진리 안에서의 삶’을 살 때 도덕성에 뿌리내린 정치가 탄생한다. 실천 도덕의 정치는 책략과 이익만을 중시하는 거짓 정치를 넘어 의미 있는 삶을 지향하는 ‘반(反)정치의 정치’이다. 궁극적으로는 ‘더 나은 삶이 더 나은 체제를 만든다’. 우리네 일상의 삶이 바뀌어야 정치도 바뀐다. 요즘 정치판을 보면 ‘후흑’이 떠오른다. 진영논리에 휩쓸려 극단적 발언이 난무하고 ‘얼굴에 철판을 깐’ 철면피 정치인들이 즐비하다. 후흑은 멀리 보는 것이다. 역사도 변덕을 부리고 대중도 변덕을 부린다. 리쭝우는 ‘강한 흑’으로 모든 사람의 공리를 도모하라 했다. ‘후흑’을 선하게 사용해 위민선정(爲民善政)하는 정치인들이 보다 많이 나오기를 기원할 뿐이다.       김지민 기자낯과 철면피 정치인들 정치 모리배들 요즘 정치판

2022-11-23

[시론] 정치판에 등장한 도인들

요즘 갑자기 도인 열풍이 불었다. 도인·법사 등 만화책에서나 볼 법한 인물들이 느닷없이 정치판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긴 수염을 기르고 산속에서 구름을 타고 다닐 줄 알았던 사람들이 권력층 근처에 어슬렁거리는 것을 보면서 세간의 여론이 분분하다. 그래서 가톨릭 사제 입장에서 도인론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한다.   가톨릭 신부가 어떻게 도인을 아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도인처럼 사는 분들이 많았다. 세상을 멀리하고 사막 같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악한 영들과 평생 사투를 벌인 분들의 이야기는 가톨릭교회사에 오래전부터 기록되어 왔다. 이분들의 여러 가지 특질을 통해 참 도인과 가짜 도인을 식별해 보겠다.   참 도인과 가짜 도인의 가장 큰 차이점은 지향하는 욕구가 다르다는 것이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사람의 욕구에 위계가 있다고 하였다. 간단하게 상위 욕구와 하위 욕구로 구분하는데, 하위 욕구란 소유욕을 근간으로 하는 물질에 대한 욕구를 말한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옷 등에 대한 욕구와 권력에 대한 욕구,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욕구는 하위 욕구다. 상위 욕구는 물질적인 차원을 넘어선 존재론적인 욕구로, 삶의 의미, 인간 사회의 존재성에 대해 탐구하려는 욕구이다.    상위 욕구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속세에 무심하다. 가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무소유가 아니라 아예 관심이 없는 상태로 산다. 수도자의 삶을 사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 신경 쓰이게 하는 것들을 다 치워버리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단출하게 산다. 마음을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은 다 유혹이라 생각해서 아예 근처에도 못 오게 하려고 사람들이 오기 어려운 사막에서 수행한 수도자들이 부지기수이다.     반면 가짜 도인들은 하위 욕구를 추구한다. 소유물에 대한 집착과 신분 상승 욕구가 강해서 하이에나처럼 권력층 근처에서 어슬렁거린다.     정서적으로도 문제가 많다. 이들은 가난의 영성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남루한 차림으로 가난을 연출하여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주목받고 싶어 하기도 한다. 가짜 도인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영적 연출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별것 아닌 작은 이적을 자신의 큰 영험한 능력인 것처럼 사기 치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런 여러 가지 속임수로 자신을 이상화하고 심지어 신격화하기도 한다.   참 도인과 가짜 간의 또 하나의 차이점은 겸손이다. 겸손의 어원은 라틴어로 ‘HUMUS’, 즉 땅이다. 사람들이 밟고 다녀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땅인데 참 도인은 땅과 같다. 그래서 세간의 입방아에도 흔들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관심이 없다. 이들은 익은 벼처럼 고개 숙이고, 공부하고, 성찰하면서 자신이 덜된 자, 무지한 자임을 부끄러워하며 산다.   이에 반해 가짜 도인은 요란한 빈 수레 같다. 이들은 자기 무지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무엇을 보았노라 주장하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양 잘난 체하며 심지어 스스로 영험하다 자랑한다. 참고로 이들이 본 것들은 대부분 신경증적 망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허상을 좇다가 망상으로 변질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망상이 마치 예언이나 점괘인 양 이야기하며 사람들을 현혹한다.   자기 내면을 탐색하지 않으면 내면이 썩어들어 간다. 가짜 도인은 마치 포장을 잘하였지만 언행에서 썩은 내가 진동한다. 참 도인은 내면이 생명수다. 그들이 하는 말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준다. 가짜 도인은 내면이 썩은 물이다. 그들이 하는 말은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 가짜 도인은 심리적으로 빈곤한 사람들, 심각한 결핍 욕구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에게 도인이란 자리는 도를 닦는 자리가 아니라 생존수단이기에 속임수를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참 도인들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이다. 가짜 도인들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참 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는 사람들이다. 가짜 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이다. 참 도인들은 자신이 속물이라고 한다. 가짜 도인들은 자신이 천상계 사람이라고 한다.   가짜 도인들이 설치는 것은 사람들이 허상을 좇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이 깨어나지 않으면 가짜 도인들이 세상을 주물럭거리는 시대가 될 것이다. 홍성남 /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시론 정치판 도인 가짜 도인들 하위 욕구로 도인 열풍

2022-02-18

[기고] 사회적 ‘공존지수’를 높여라

언젠가 TV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직장의 신’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그 내용 중 한 장면에 가까스로 권고사직 위기에서 벗어난 만년 과장이 자신을 도와 준 여직원에게 이렇게 고마움을 전하는 대사가 있다.     “혼자서는 못 가. 시계가 어떻게 혼자서 가? 작은 바늘, 큰 바늘이 다 함께 가야 나 같은 고물도 돌아가는 거야.”     주역에 ‘이인동심 기리단금(二人同心 其利斷金)’이란 말이 있다. ‘두 사람이 한마음이면 단단한 쇠도 자른다’는 뜻이다. 이는 함께 사는 사람들과의 인간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비유를 얘기하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학자들은 ‘공존지수’ 혹은  ‘NQ지수(Network Quotient)’라고 부른다.     이 개념은 지능지수(IQ), 감성지수(EQ)와는 별도로 근간에 새로이 생겨난 일종의 신종지수라고 한다. 즉 공존지수(NQ)란 직장이든 조직이든 필요할 때는 사보타지(sabotage)가 아닌 긍정적으로 ‘함께 나누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물론 각자 개인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능력이 바로 ‘공존’의 실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를 들어 물 속을 들여다보면 작은 물고기들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떼를 지어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작은 물고기 하나만 보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여럿이 한데 모여 움직이면 그 거대한 모습에 큰 고기들이 쉽게 근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 자신이 하는 업무를 팀원들과 공유하기를 꺼려하며 그저 불평만 일삼고 남에게 ‘너나 잘하라’며 앞에서 면박을 준다든가 쓸데없이 뒤에서 헐뜯기나 하는 사람들은 성공도 어려울 뿐, 후일 꼭 본인도 ‘헐뜯음’을 당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공존지수는 그 수치가 높을수록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쉽고 또 그 소통으로 인해 얻은 것을 자원으로 해서 더 성공하기 쉽다는 개념이다. 물론 내가 속한 집단은 잘 되고 다른 집단은 소외시킨다는 ‘패거리’ 개념이 아니라 서로 잘 살도록 도와야 한다는 ‘이타적(利他的)’ 개념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근간 고국의 혼란스러운 정국 사태를 거의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밤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정치에 큰 관심을 가졌기보다는 솔직히 그동안의 코로나 비상에 의해 바깥출입이 제한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른바 ‘방콕’이 길어지니 자연히 거의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흘러간 영화나 괜찮은 유튜브의 전문 역사물 보기로 시간을 죽인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웬만한 영화보다는 대선후보들의 치고받기와 그 배후들의 모략과 음모, 배신, 편짜기와 뒤통수 때리는 실제의 장면들이 훨씬 흥미를 끄니 참 헷갈린다.       그런가 하면 내가 사는 미국 사회도 대동소이하다. 늘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 사회가 어쩌다 시정잡배들보다 훨씬 더러운 정치판 모리배들의 죽기 살기 투견장이 되고 있으니 역겨운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얼마 후면 해가 바뀐다. 싫든 좋든 ‘새해’라는 의미 있는 새 날을 앞두고, 우리는 비록 이국에 살더라도 이웃과 더불어 잘 살기 위해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해 주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며 칭찬해주는 자세를 갖는다면 사회적 공존지수(NQ)는 자연히 높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개인에 집착하기보다는 이웃을 도우며 함께 성공을 이끄는 것이 더 큰 행복의 지름길이 된다’는 ‘윈윈’의 이치고, 바로 우리네 삶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손용상 / 소설가·한솔문학 대표기고 공존지수 사회 사회적 공존지수 우리 사회 정치판 모리배들

2021-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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