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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낯과 시커먼 속

두꺼운 낯과 시커먼 속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살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왜 저런 사람들만 성공하는 걸까? 아니 저렇게까지 해야만 성공이라는 걸 하는 걸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이 의문 앞에서 ‘난 저렇게까지 할 바에야, 그냥 이대로 살겠다’ 하며 돌아서 버린다. 하지만 그러한 ‘진실 회피’는 늘 우리에게 ‘타인에게 휘둘리는 삶’을 살게 만든다. 이게 인생의 진실이다. ‘착하게 살고 싶은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고 싶은데, 그러면서도 내 인생을 살고 싶은데….’ 어찌 보면 참 상식적이고 당연해 보이는 이 소망은 왜 그렇게 풀기 어려운 과제가 되어 버렸을까? 그래서였을까, 햄릿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잔인해지리라, 친절하기 위해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정치의 근본이 사라졌다. 진정한 경세(經世)의 리더십은 간 곳 없고 모략과 꼼수가 난무한다. ‘정치는 나라를 바르게 하는 것’(政者正也)이며 ‘국가는 최선의 삶을 실현하는 공동체’라는 당위를 비웃는 정치 모리배들이 활개 친다. 죄지은 자가 더 큰 소리치는 세상이다. 권력을 갖는다는 건 황금 알을 낳는 오리를 얻게 된다는 뜻일까.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고 약속해서 얻은 자리지만 그들은 자기 주머니를 채우느라 바빴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건 반짝이는 눈앞의 황금이었다. 모든 정책은 돈으로 통한다. 그런데도 정권이 바뀌고 비리를 수사하면 정치 보복이라는 족쇄를 씌워 흐지부지되곤 한다.  
 
청나라 말의 지식인 이쭝우(李宗吾.)는 후흑학(厚黑學)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후흑'이란 용어는 '면후(面厚)'와 '심흑(心黑)'을 합친 말로 '뻔뻔한 얼굴과 음흉한 속마음'을 뜻한다. 청조의 멸망과 신중국 탄생 사이의 대혼란기를 살았던 그는 수천 년 중국 통치술의 정수를 꿰뚫는 화두로서 후흑 원리를 제시했다. 이쭝우는 말한다.“얇지 않은 것을 두껍다 하고 희지 않은 것을 검다고 한다. 두껍다는 것은 천하의 두꺼운 낯가죽을 가리키는 것이고, 검다는 것은 천하의 시커먼 속마음을 말한다. … 뻔뻔한 것은 천하의 대본(大本)이며, 음흉한 것은 천하의 달도(達道)다. 지극한 후흑의 단계에 이르면 천하가 두려워하고 귀신도 무서워한다.”
 
이쭝우는 우리에게도 소설 삼국지로 친숙한 삼국의 영웅들이 모두 후흑의 대가였다고 말한다. 유비는 무능했지만 뻔뻔한 것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인물이다. 입신하기 전에 당대의 수많은 영웅에게 신세를 지고 이쪽저쪽으로 옮겨 다녔지만 전혀 부끄러운 줄 몰랐다. 호걸의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유비는 울기도 잘했고 '어려운 일에 봉착하면 사람들 앞에서 대성통곡해 패배를 성공으로 바꿔놓았다'고 전해진다. 요샛말로는 '진정성'을 극적으로 연출해 효과적 권력기법으로 삼은 것이다. 조조의 특징은 속마음이 칠흑같이 시커멓다는 것이다. 그는 은인들을 최대한 이용하고 상황이 바뀌면 가차 없이 배반했으며 임기응변에 능해 그 속셈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자신이 '난세의 간웅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오히려 기뻐했다거나 '내가 남에게 버림을 받느니 차라리 내가 남을 먼저 버리리라'는 발언은 삼국지를 흥미롭게 만드는 일화 가운데 하나다. 이처럼 뻔뻔함과 음흉함으로 무장한 책략가들이 서로 일진일퇴하면서 권력을 다투는 광경은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매우 익숙한 모습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은 마르크스주의 책보다는 중국의 정사(正史)인 24사를 평생 옆에 두고 정독했다. 후흑학을 탐독했다는 전언도 있다. 분명한 것은 마오가 후흑의 달인이라는 사실이다. 혁명의 도정(道程)이나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도 그는 자신에 대한 도전을 일절 용납하지 않았으며 모든 합리적 비판에 대해서도 교묘하게 응징했다. 평생의 혁명동지였던 펑더화이(彭德懷. 당시 국방부장)나 국가 주석이었던 류샤오치(劉少奇)를 숙청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고난도의 권력투쟁에서 그 누구도 마오의 속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공산주의를 급진적으로 실현하려는 대약진운동의 결과 수천만 명의 인민이 아사했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두꺼운 얼굴을 과시한다. 그야말로 후흑학의 정수를 보여준 것이다.  
 
철면피에도 수준이 있다. 철면피의 흑심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후흑의 초보 단계에 불과하다. 두꺼운 얼굴임에도 형체가 없고 시꺼먼 마음을 가졌어도 검은 색깔이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높은 단계다. 후흑의 극치는 한없이 뻔뻔하고 음흉하면서도 ‘순결한 정의의 화신(不厚不黑)’으로 나타나는 경지다. 이런 상승 무공을 구사하려면 ‘후흑을 행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항상 정의와 도덕의 옷을 입어야 한다.’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은 절대 인정하지 않으며 명백한 잘못에도 결코 사과하지 않고 ‘말을 애매모호하게 흐리는’ 거짓말을 정치의 방략으로 삼는 것도 불후불흑의 핵심 기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후흑학을 ‘실리를 위해 도덕을 폐하라’는 처세술로만 읽는 것은 심각한 오독(誤讀)이다. 뻔뻔하고 음흉한 호걸들이 설치던 영웅할거 시대엔 공자·맹자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지만 오늘날 후흑학의 목표는 후흑의 기술을 공맹 도덕과 접목시키는 데 있다고 리쭝우는 결론짓는다. 이를 현대에 맞게 재해석하면 현실 정치의 악취를 뚫고 의미 있는 삶을 지향하는 ‘실천 도덕의 정치’가 중요하다는 철학적 통찰로 승화된다. 정치적 동물인 인간에게 책략과 이익 너머에 있는 규범과 가치를 꿈꾸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그가 말하는 후흑학 의 근본취지는 ‘후흑구국’으로 청조말 부강한 나라를 만들고 열강의 침탈로부터 나라의 독립과 자주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는 ‘후흑’을 개인의 이익을 위해 쓰면 욕된 이름을 얻게 될 뿐이지만, 나라를 위해서 쓰면 난세에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러서야 할 때 물러서고 감출 것을 감추며 냉정할 때에는 냉정하게 행동하는, 공공을 위한 ‘후흑’은 나라를 구하는 난세의 통치학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일상의 매 순간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진리 안에서의 삶’을 살 때 도덕성에 뿌리내린 정치가 탄생한다. 실천 도덕의 정치는 책략과 이익만을 중시하는 거짓 정치를 넘어 의미 있는 삶을 지향하는 ‘반(反)정치의 정치’이다. 궁극적으로는 ‘더 나은 삶이 더 나은 체제를 만든다’. 우리네 일상의 삶이 바뀌어야 정치도 바뀐다. 요즘 정치판을 보면 ‘후흑’이 떠오른다. 진영논리에 휩쓸려 극단적 발언이 난무하고 ‘얼굴에 철판을 깐’ 철면피 정치인들이 즐비하다. 후흑은 멀리 보는 것이다. 역사도 변덕을 부리고 대중도 변덕을 부린다. 리쭝우는 ‘강한 흑’으로 모든 사람의 공리를 도모하라 했다. ‘후흑’을 선하게 사용해 위민선정(爲民善政)하는 정치인들이 보다 많이 나오기를 기원할 뿐이다.
 
 
 

김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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