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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직 여경 장례식 부적절한 행동에 비난 받는 써리 시장 당선자

 근무 중 순직한 RCMP 여경에 대한 장례식장에서 크게 웃는 모습이 찍힌 써리 시장 당선자와 RCMP 고위 관리의 사진이 SNS에 돌아다니며 이에 대한 반감을 지적하는 이메일이 언론사에 보내졌다.   '창피한 RCMP 장례식장 정치 행위(SHAMEFUL RCMP Funeral Politicking)라는 제목의 이메일이 RCMPFuneral Politics 〈rcmpfuneralpollitics@gmail.com〉로부터 3일 오전 7시 30분쯤 본 언론사에 전달됐다.   첨부 된 사진에는 지난 2일 열린 순직 경관 셜리 양(Shaelyn Yang)의 장례식 장에 지난 지자체 선거에서 써리 시장으로 뽑힌 브렌다 로케(Brenda Locke)가 RCMP의 고위간부인 브라이언 에드워즈(Brian Edwards) 치안정감(Assistant Commissioner)과 전국 경찰 연합의 브라이언 소베(Brian Sauvé) 회장 등이 파악대소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메일에서 이들이 양 경관의 장례식을 자신들의 정치 활동(Politicking)을 하기에 적합한 기회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또 장례식에 참석한 다른 RCMP 경찰들이 이런 모습에 불쾌하게 생각했다고도 표현했다.     해당 사진과 동영상 클립을 언론사에 배포하며, 써리 로케 시장 당선자가 버나비 배속 양 경관의 장례식에 초대된 것이 적합한지를 묻고, 왜 에드워즈 치안정감과 소베 회장이 순직 경관에게 자신의 조의를 표해야 하는 순간에 브렌다 시장 당선자와 어울렸는지, 왜 그런 엄숙한 자리에서 농담을 주고 받았는지, 주수상 등은 뒷자리에 앉은 반면 그들은 제일 앞자리에 앉아 양 경관의 가족과 가까이 앉았는데 카메라 앞에서 대중적인 쇼를 한 것인지, 그리고 왜 로케 당선자가 아직 시장 취임 선서도 하기 전에 RCMP 정복을 입은 고위 간부들과 만나서 친한 모습을 보였는지에 대해 따져 물어야 한다는 입장을 제기했다.   인도계 언론사인 보이스 그룹은 해당 내용에 대해 상당한 BC주민이 충격과 역겨움을 느꼈고, 특히 써리 거주자들은 더 황당해 했다고 보도했다.   표영태 기자장례식 부적절 시장 당선자 장례식장 정치 로케 당선자

2022-11-03

[수필] 아내가 없어졌다

몇 달 전에 갑자기 아내가 없어졌다. 그녀의 침대는 그 후로 죽 비어있다. 은퇴했으니 일을 나가진 않았을 테고, 외출했나? 곧 돌아올 것 같은 착각도 든다.     아내가 쓰던 달력은 아직 종착역도 아닌데 3월에 고장이 난 듯 멈춰 서있다. 옷장의 옷들, 신발장의 구두들은 눈 한번 뜨지 않고 그대로다. 응접실의 세간도 그렇고 부엌에 가면 그녀가 꾸려놓았을지 모를 반찬이 아직도 냉장고에 있을 듯하다. 아내가 가꾸던 앞뜰과 뒷마당 잔디밭 끝의 나지막한 비탈 위로 화초와 꽃들은 속없이 활짝 웃는 듯 피어나고 있다.     오랜 병고에 시달리던 아내가 몇 달 전에 하늘나란지 어딘가로 떠났다. 죽기 2주 전, 응급실에 들어갈 때, 늘 그랬듯이 하루 이틀 응급처치 후 집으로 돌아올 줄 알았다.     간호사였던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꿰뚫고 있어서 상태가 안 좋을 때면 응급실에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아무리 다그쳐도 스스로 가늠하고 여부를 결정했다. 그러나 이번엔 그게 아니었다. 응급실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한 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대신 중환자실로 옮겨졌던 거였다. 몇 차례 수술할 때를 제외하곤 중환자실은 처음이었다. 저혈압 상태가 심각하다고 했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아내는 직장암 수술에다 소장이 꼬여서 했던 수술 자리와 방사선치료의 후유증으로 인한 통증을 견디지 못해 비명을 질러댔다. 진통 효과가 떨어질 때마다 의료진은 모르핀 주사로 아내 몸뚱어리의 단단한 고통을 흐트러트리고 멈추게 했다. 그녀의 통증은 내 것처럼 받아들이기에 너무 힘들어 의료진에게 제발 통증만은 없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었다.     모르핀 진통제의 함량은 날마다 점점 높아갔고 코에 끼웠던 산소 호스가 얼굴을 덮어쓰듯 큰 산소마스크로 바뀌면서 아내의 몰골과 의식은 현존하는 세상과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아내는 거역할 수 없는 강물의 물살에 밀려 가물가물 세상과 멀어지는 것 같았다. 차디찬 손을 잡아보지만 떠내려가는 그녀의 온기를 되찾을 수 없었다.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아니면 최소한 잘 있으라는 작별의 인사 한마디도 못 하고 있었다.     마지막 숨을 거칠고 힘겹게 쉴 때 내 마음에 담아 준비해뒀던 ‘내가 당신한테 잘못한 게 너무 많아, 미안해. 용서해주고 다 내려놓고 가벼이…’, 그리고 (티벳사자의서)에서, 또는 많은 임사 체험자들의 증언대로 ‘어디선가 황홀한 빛이 나타나면 두려워하지 말고 그 빛을 따라 들어가’라는 말을 건네주지 못했다. 길 떠나는 아내에게 끝내 노잣돈 한 푼 못 주고 낯선 먼 길을 빈손으로 보내는 것 같았다. 거칠게 쉬던 숨이 잦아들다가 멈춰버리자 결국 그게 그녀의 세상과의 마지막이었다. 태어나 꽃피고 아름답고 슬펐던 삶이라는 한바탕 꿈이 깨어지는 찰나였다. 또한 삶의 괴로움과 병고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의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아내가 남은 식구들과 작별하는 마지막이 어떻게 이렇게 엉성하고 간단하고 허무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과 세상을 창조했다는 신은 창세기에서 왜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들이 언젠가는 사라질 거라고 귀띔이라도 안 해주었나?     밀려오는 통탄, 내 아내에게 준 많은 잘못과 상처들을 용서받지 못한 회한 등 엄청난 무게의 슬픔이 마치 파도처럼 밀려오고 또 밀려왔다.     나는 희미한 온기가 남은 아내의 벌어진 눈과 입을 꼬옥 눌러 죽음을 닫았다. 신의 사랑이라던가 무슨 계시나 은총 같은 공허한 약속들도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하게 아내의 죽음에 함께 가둬버렸다. 지금까지 내가 긴가민가하면서 알고 있거나 추구했던 삶의 의미나 죽음에 관한 신관, 종교나 철학적 사고는 무용이었다. 내가 알지만, 내 반쪽이었던 아내의 삶은 허무맹랑할 정도로 무의미했다. 세상 만물에 대한 의미도 내가 어떻게 부여하느냐에 달렸을 뿐 어떤 고정된 절대적 가치는 없는 것처럼. 그러니 아내가 살아온 삶과 남겨진 추억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부질없고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녀의 예순아홉 생애는 죽음 앞에서 백 살을 산 사람이 있다고 한들 매한가지 아닌가.   나는 장례식 없이 가족만 모여서 조용한 이별식을 한 후에 화장하기로 장례회사와 계약했다. 평소 조문객 불러 모아 치르는 장례식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장례식은 죽은 자와는 상관없이 산 자들 위주로 치러졌고 별로 아름답지도 않은 시신을 진열하고 장례식장 입구에서는 부조금을 접수하는 방식을 나는 혐오해 왔던 터였다. 그리고는 그 접수된 부조금으로 장례비 계산하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아내와 평소에 그런 죽음 후의 절차를 상의한 적도 없으니 그 사항은 공란이었기에 나 혼자 내린 결정의 이유이고 배경이었다. 그러나 곧 내 결정을 수정해야 했다. 자식들과 처가 형제들이 반대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장례 일정을 잡고 장례회사와 연계된 작은 교회를 정했다.     장례식은 교회에서 불교식으로 치렀다. 시작할 때 나는 조문객에게 일러뒀다. 기독교 신자로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랐으나 이제부터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따르겠다며 몇 년 전 불교에 입문했으므로 불교식으로 진행하게 되었다고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내겐 예수와 석가모니 부처와의 경계가 없노라고 덧붙였다. 장례식을 끝내고 화장한 유골함을 영정 사진, 꽃과 함께 집안 응접실에 봉안해 모셨다. 산소에 갈 필요가 없어 좋았다. 때때로 사진을 보고 ‘왜 그랬어?’ ‘미안해’ ‘고마워’라고 말을 건네곤 한다. 요즘엔 ‘왜 그랬어?’는 원망 투라서 뺐다. 딸내미도 제 아들 생일에 유니버설 스튜디오 다녀왔다고 엄마에게 보고를 했다.     석가모니 부처가 말했잖은가, 생겨난 것은 모두 사라진다고. 이제 시간은 비밀처럼 흘러 후회되는 아픔도 그리움도 조금씩 옅어져 간다. 아내가 없어졌듯이 그리움도 차차 없어지겠지. 김윤기 / 수필가수필 아내 아내 몸뚱어리 장례식장 입구 석가모니 부처님

2022-09-22

[열린 광장] 뒷모습에 담긴 세월의 흔적

‘여보 사랑해요’ ‘아버지 천국에서 만나요’ ‘천국에서 안식하소서’ 얼마 전 참석했던 장례식장은 고인을 추모하는 글귀가 담긴 꽃들로 가득했다. 그 꽃들 사이에 온화한 표정의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동료 목사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를 잃은 동료 목사를 위로하기 위해 조문객으로 참석한 장례식이 영 어색했다. 목사이기에 조문객으로 장례식장을 찾기보다는 집례나 다른 순서를 맡을 때가 많았다. 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예배를 인도하기에 장례식 내내 긴장하며 서 있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조문객으로 참석한 장례식의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두리번대던 눈길이 장례식장 전면에 붙어 있는 큼지막한 TV에 멈춰 섰다. 찬송가 악보도 보여주고, 고인이 살아계실 때의 행적이 담긴 슬라이드 쇼도 나오는 TV였다.  TV 화면은 집례자와 함께 앞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뒷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맨 앞줄에 앉은 유가족이 울음을 애써 참느라 들썩대는 어깨의 흔들림이 TV 화면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유가족들 바로 뒷줄에 앉아 있는 조문객들의 뒷모습도 TV로 보였다. 그중에 한 중년 사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섞인 사내의 뒤통수가 이리저리로 움직였다. 그것도 내가 고개를 돌리는 대로 따라다녔다. ‘설마 저게 나겠어?’ 하면서 고개를 좌우로 돌리는데, 그 사내의 머리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내가 움직이는 대로 까딱거렸다.     내 뒤통수를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인지 TV 화면에 비친 내 뒤통수가 낯설기만 했다. 저게 남들이 보는 내 뒷모습일 텐데 나만 못 보고 살아왔다는 씁쓸한 마음도 들었다. TV 화면으로 보이는 흰머리가 듬성듬성 섞인 내 뒤통수에는 세월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가만 보니 내 머리만 하얀 것이 아니었다. 내 앞에 앉은 이의 머리도 하얗고, 그 옆에 있는 이의 머리는 가운데가 횅했다. 앞모습만 바라보느라 놓쳐버린 세월의 흔적이 오랜만에 만나는 뒷모습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담긴 것은 뒷모습만이 아닐 것이다. 내가 걸어왔던 길에도 그 흔적이 쌓여 있을 것이다. TV 화면을 통해 비치는 뒷모습을 보면서 앞만 보고 달려왔던 인생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날 사랑하는 가족들의 품을 떠나는 동료 목사의 아버지도 결국은 뒷모습만을 남기고 갔다. 아내에게는 자상한 남편이요, 아들들에게는 하늘 같은 아버지였다. 손주들에게는 한없이 따듯한 할아버지였고, 아름다운 믿음의 본을 보인 신앙인이었다. 그가 남긴 뒷모습이 멋지고, 그가 걸어왔던 길이 아름다웠던 만큼 떠나보내는 이의 마음이 더 아쉬웠을 것이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앞모습이 아니라 뒷모습이 남을 뿐이다. 그날 장례식장에서 만난 내 뒤통수를 보면서 이제는 뒷모습을 잘 관리할 때라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 길을 걸어갈 때도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떼야 할 때다. 내가 밟고 지나온 길이 누군가에게는 따라가야 할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에서 TV 화면에 비친 한 중년 사내의 뒤통수는 세월의 흔적을 잘 쌓으며 살라고 하면서 오늘도 하얗게 변해간다.   이창민 / 목사·LA연합감리교회열린 광장 뒷모습 세월 장례식장 전면 그날 장례식장 아버지 천국

2022-04-13

[한홍기의 시카고 에세이] 한 해를 보내며

금년은 나 같은 늙은이에게는 별 기억이 없는 해다. 무엇을 한 듯 한데 워낙 생각나지 않는 무미한 것이었는지, 실제 치매를 앓고 있는 중인지 이렇게 건조할 수가 없다. 나이가 먹을 만큼 먹어서 그런가 참 재미없는 세상이다. 그러나 완전히 간 것은 아니다. 아직도 뭘 할 만큼 기력은 남아있다. 허리가 불편해 그렇지 사지를 잘 건사할 힘이 모자란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의욕이 샘솟듯 하고 그 옛날을 더듬어 보기도 한다.   비록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한국인으로 태어난 걸 자랑한다. 그들은 "나"보다 "우리"를 사랑한다. 우리 엄마 우리나라지 내 엄마 내 나라는 없다. 한국인은 느려터진 것은 참지를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그리고 계산은 순식간이고 명확해 고스톱 한 판을 30초를 넘기지 못하고 해치우는 사람도 많다. 지금 한국이 한 세기도 안돼 숨을 몰아가며 한판에 발전시킨 것을 멀리서 보고 있으면 뿌듯하다. 미국에서는 오래 전 타 인종에 한때 주눅이 들 때가 있었으나 날이 갈수록 모국이 발전해가니 한국인을 싸 잡아 보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동네를 만들고 자식 교육에 열을 올리고 이재에 밝으니 타 동네 사람이 쫓아 오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한국인은 악착같다. 불의를 보고 거품 무는 거야 당연하다고 하지만 모국에서나 이국에서나 같이 총까지 들고 맞대결하는 사람은 우리 밖에 없다.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광주가 살아있지만 LA에서는 그 무서운 검은 아저씨들을 질리게 만드는 것을 보면 진돗개가 사람을 닮았는지 사람이 개를 닮았는지 어느 날은 구분이 안 간다. 남자들이야 군대를 다녀와 전투력이 남아 있겠다 하지만 아줌마들의 걷어붙인 행주산성 막가파 전투력을 보면 꼭 그렇지 만은 아닌 것 같다. 시장 좌판도 아줌마들이 끼고 있지 남정네는 멀리서 지겟다리만 지키고 앉아있다.   그럼에도 한국인은 유독 비빔밥을 좋아한다. 다른 민족에게는 보기 힘든 밥상이다. 뭔가 복잡하다 하면 한 그릇에 다 몽땅 집어넣고 5분이면 끝난다. 한국의 산하를 둘러봐도 옛것과 최첨단이 섞여 눈이 어지러울 지경인데 한눈에 다 비벼 버리고 세계에서 제일 빨리 걷는다. 일본과 축구를 하는 날이면 온 국민이 너 죽고 나 죽자지 동점은 가당치도 않다. 한다 하면 화끈하게 하지 시시한 게 없다. 한마디로 다이내믹이다.   그러면서도 한국인은 감정이 유달리 풍부해 정이 많다. 어려운 사람을 돕기를 좋아하며, 결혼식장 장례식장은 아무리 바빠도 찾아간다.  영화를 보고 아직도 눈시울을 적시는 사람이 많다.   해외의 동포라고 그 DNA가 사라진 건 아니다. 아니 나도 아직은 쓸만한 잔재는 남아있어 지금처럼 기억 없는 세월을 보내느니 내일 새로운 해가 뜨면 무언가를 해야겠다. 이왕이면 언제까지 살는지 모르겠으나 요즘 첨단이라는 블록체인에서 EFT로 나의 창작물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Web 3.0에서 암호화폐로 투자도 하고 싶다. 채굴까지도 해봤으면 하는데 그건 정말 늙어 망령 났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최근 와튼 스쿨의 "마이로 기옌" 국제 경영학 교수가 쓴 "2030 축의 전환"이라는 책이 요즘 유행이다. 그 중 일부 서문에 보면 한국의 역동적 발전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2030년 이후의 세계는 8가지 축으로 한 번도 안 가본 세상이 나온다. 그리고 그것이 곧 다가올 피할 수 없는 장래다. 그러지 않아도 한국인은 외국인에게는 다방면에서 연구 대상이다. 특히 요즘 "K 문화"를 보고는 꼭 "김정은" 같지는 않다고 한다. 아니 둘 다 뭉툭거려 연민의 정을 갖고 보면서도 언젠가는 오천년 묵은 화산이 폭발해 세계를 뒤흔들 암묵적 외경스러운 존재로 생각한다. 그냥 그대로 내년에도 파이팅이다. (hanprise@gmail.com)   한홍기한홍기의 시카고 에세이 옛것과 최첨단 역동적 발전 결혼식장 장례식장

2021-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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