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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말하기의 단계

말을 잘 하고 싶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현대사회는 아무래도 글의 시대라기보다는 말의 시대로 보입니다. 정교하고 수려한 글보다는 하루하루 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일 겁니다. 말하기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말을 하지 않는 것도 말하기라는 점입니다. 말을 잘하는 중요한 방법은 놀랍게도 말을 하지 않는 겁니다. 특히 듣는 사람이 들을 자세가 되어 있지 않거나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때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게 말하기의 첫 단계입니다. 우리는 종종 저 사람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답답해합니다.     말하기 전에 듣는 사람을 살피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듣는 이가 내 이야기를 알아들을 만큼 성장하였는지도 알아봐야 하지만, 듣는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살피는 것도 중요합니다. 도대체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 내가 하는 말은 그저 소음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런 말을 ‘소리’라고 합니다. 말을 소리라고 표현하는 것은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큰소리, 잔소리, 흰소리, 헛소리는 모두 의사소통에 실패한 말입니다.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우리는 일방향의 소리만 들려주고 있는 겁니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말도 실패의 가능성이 높은 말하기입니다. 시간이 없는 이를 붙잡고 하는 말하기나 다른 관심사가 있는 사람에게 관심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듣는 이의 수준이나 관심을 살피는 노력이 필요한 겁니다. 저는 가르침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유학의 글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도 가르치는 방법이라는 내용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해하기 쉽게 가르칠까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안 가르치는 것도 방법이라니요. 저는 안 가르치는 방법도 일종의 배려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말하기입니다.     말하기는 일정한 것이 아닙니다. 즉, 상대에 따라서 말하기는 달라져야 합니다. 아이에게 하는 말이 다르고, 윗사람에게 하는 말이 다릅니다. 많이 아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다르고,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다릅니다. 저는 모르는 사람에게도 잘 설명하는 말하기가 좋은 말하기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는 근기에 따른 설법을 이야기합니다. 상대의 정도에 따라 설명이 달라져야 하는 겁니다. 깨달음의 단계가 높은 사람과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이 똑같은 청자일 수는 없습니다. 상대를 보고, 달리 이야기하려는 태도야말로 늘 조심해야 하는 말하기의 단계입니다.   옛글에서 제일 중요시하는 말하기는 진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언영색(巧言令色)은 가장 피해야 하는 말하기입니다. 교언영색은 그저 남의 환심을 사려고 아첨하는 말하기와 표정을 말합니다. 말하기의 경계 1순위입니다. 거짓으로 남을 속이는 말하기는 남만 속이는 게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나를 속이는 말하기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솔직한 말하기는 쉬운 게 아닙니다. 솔직한 표현이 상처가 되는 일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말이 상처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나의 태도를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비뚤어져 있으면서 말이 바로 나가기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듣는 이의 상태도 잘 살펴야 합니다. 나의 곧은 말이 그에게는 깊은 상처를 줍니다.     말하기의 마지막 단계는 저는 화엄경의 보현행원품 칭찬여래원에서 말하는 변재천녀(辯才天女)의 말하기라고 봅니다. 칭찬여래원은 여래 즉, 부처님을 칭찬하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을 칭찬하는 것이니 얼마나 정성껏 좋은 말로 하여야 할까요? 이때 변재천녀는 부처님을 칭찬하는 역할로 나옵니다. 그야말로 온갖 아름다운 말로 부처님을 칭찬합니다. 부처님에 대한 찬탄은 변재천녀로도 모자랄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부처님만 부처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뭇 중생이 불성을 가진 부처라는 생각은 칭찬에 고민을 더하게 됩니다. 저런 사람까지 칭찬을 해야 한다니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겁니다. 그 순간이 깨달음의 ‘찰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은 상대의 좋은 점을 보려고 노력하고,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말하기가 좋은 말하기입니다. 칭찬이 그대로 수행이듯이, 말하기도 그대로 깨달음이 됩니다. 말하기는 배려이고, 소통이고, 사는 기쁨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이때 변재천녀 큰소리 잔소리 모두 의사소통

2024-04-07

[아름다운 우리말] 소리를 내다

우리말 소리라는 단어는 참 재미있습니다. 소리는 자연의 소리부터 마음의 소리까지 다양합니다.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는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가벼워지고 위로가 됩니다. 물론 심한 소리는 소음이 되기도 하죠. 우리는 때로 소리를 듣기 위해서 바다에 가고, 산에 가고, 숲길을 걷습니다. 소리 없는 자연은 무척 어색하고 답답할 겁니다. 제가 대학 때 썼던 시의 제목이 ‘소리하는 바다’였음이 문득 떠올라 미소 짓습니다. 대학 1학년 때 바닷소리가 듣고 싶다고 1박 2일 가출을 했을 때 쓴 글이었습니다. 젊은 낭만입니다.   소리는 말과도 통합니다. 소리에 뜻이 더해지면 말이 됩니다. 말소리는 소리이면서 말인 셈입니다. 그런데 소리가 말이 되는 것은 좋지만, 말이 소리가 될 때는 문제가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주로 말이 아닌 말을 소리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단어가 헛소리입니다. 헛소리는 분명히 말이지만 말로 생각하지 않기에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잔소리, 큰소리, 흰소리도 거기에 속합니다. 우리말의 ‘말 같지 않은 소리’라는 표현은 여기에 딱 들어맞는 표현입니다. ‘말 같은 소리,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하는 겁니다.   소리는 말에서 노래가 되기도 합니다. 노랫소리라는 말은 노래가 곧 소리임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제일 듣고 싶은 소리가 노랫소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옛 노래에 아예 판소리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소리가 노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소리꾼이라고 하였고, 노래를 부른다는 말 대신 소리를 한자리 한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사실 노래는 ‘놀다’에서 온 말로 유희에 더 초점이 맞추어진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리는 내 몸통을 악기로 하여 나오기에 가장 솔직하고, 맑은 내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내 몸통과 성대, 입과 코, 그리고 보이지 않는 부분, 머리끝에서까지 소리가 나옵니다. 소리에 우리는 내 감정을 담고, 내 떨림을 담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소리꾼이라고 하는 게 훨씬 정겹고, 딱 들어맞는다는 생각입니다. 노래를 부르는 이는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서 노력하고, 말을 하는 사람은 좋은 소리를 하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몸통이 내는 소리를 종종 죽여 놓고 삽니다. 소리를 죽인다고 하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소리는 곧 사람이기도 합니다. 말하고, 노래하는 소리의 사람입니다. 그런 소리를 죽이면 사람의 기운도 빠져나가는 듯합니다. 물론 소리 죽여 걸어야 하거나, 이야기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부드럽고 다정한 소리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기운 없는 소리가 아니라 따뜻한 소리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소리를 크게 내어야 할 때도 많습니다. 그때조차 소리를 죽여서는 안 됩니다. 소리를 통한 기운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을 백번 되풀이하여 읽으면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이 표현이 참 좋습니다. 모르면 되풀이하여 읽기를 권합니다. 여러 번 읽다 보면 기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뜻을 저절로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표현에서 중요한 한 가지 요소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건 바로 소리 내어 읽는다는 점입니다. 소리를 내어 읽어야 새로운 기운이 생겨나는 겁니다. 큰소리로 읽어야 뜻이 저절로 나타나는 겁니다.   저는 이번 학기에 대학교 1학년 글쓰기 수업을 합니다. 글쓰기 수업은 필연적으로 글 읽기와 연계가 됩니다. 대학생 수업이기에 눈으로 읽기를 예상하겠지만, 제 수업에서는 소리 내어 읽기를 같이 합니다. 학생들도 오랜만에 해보는 경험이랍니다. 소리 내어 책을 읽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합니다. 소리 내어 읽다 보면 뜻도 저 잘 알게 되고, 부수적으로는 기분도 좋아집니다. 이런 것을 언어화라고 합니다. 언어화는 내 속의 생각이나 감정을 언어로 내보이는 것입니다. 내 사고를 뚜렷이 하기도 하고, 스트레스나 불안에서 빠져나오게 하기도 합니다. 소리를 내어 글을 읽어 보세요. 세상이 달라집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잔소리 큰소리 대신 소리

2024-03-03

[중앙시론] “잔소리와 충고가 어떻게 다르지요?”

‘타이르는 말을 기꺼이 듣는 사람은 지식을 사랑하는 자이나, 책망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이다.’ 고대 지혜문학 중 하나인 ‘솔로몬의 잠언’ 중 한 구절(12:1)이다. 영문을 찾아보니 타이르는 말(라틴어 disciplina)은 규율(discipline)이나 훈육(instruction)으로, 책망(라틴어 Increpatio)은 질책(reproof) 또는 교정(correction)으로 씌어 있다. 우리말과 영문 번역본을 여럿 비교한 끝에 ‘타이르는 말을 귀담아듣고 그것이 옳다면 싫더라도 따르라’라는 뜻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한고조(漢高祖) 유방에게 장량이 공자의 말씀을 빌려 이렇게 말했던 것처럼.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실에 이롭고(忠言逆耳利於行), 독한 약은 입에 쓰나 병에 이롭습니다(毒藥苦口利於病).”     꽤 오래전 어떤 TV 프로그램에서 사회자가 길 가던 여고생에게 던진 질문과 대답. “잔소리와 충고가 어떻게 다르지요?” “잔소리는 듣기 싫은 말이고, 충고는 기분 나쁜 말이에요.” 몇 해 전 같은 질문에 두 초등학생은 이렇게 답했다. “잔소리는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데, 충고는 더 기분 나빠요.” 뒤이어 이런 자막이 등장했다. ‘노터치, 난 나야, 넌 너고….’   으레 ‘기분 나쁘게 듣지 말고…, 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니까’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만 보아도 듣는 이 입장에서 타이름은 잔소리이고 충고는 참견이고 조언은 오지랖이다. 좋은 얘기도, 재미있는 얘기도, 무엇보다도 별 도움 되는 얘기도 아니면서 내 의지에 반하는 그 무엇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듣고 기분 좋을 리 없다. 가치관을 달리하는 사람의 시선은 불편하고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조언은 거북하고 우월한 지위나 우월감에 근거한 충고는 자존감에 생채기를 낸다. 무엇보다도, 결정에 대한 궁극적 책임의 주체는 ‘나’이니 제발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게 듣는 이의 솔직한 심정이다.   잔소리와 충고를 기분 나쁘다고 했던 그 초등학생들이 사춘기 소녀가 되어 다시 등장했다. “젊은 세대와 잘 소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 질문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당찬 대답이 돌아온다. “그냥 세대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빠르지 않을까요?” 덧붙여 “어른이 되면 꼰대가 된다”라며 일침을 가한다. 그야말로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니 모든 간섭을 거부한다는 선전포고다.   경험이 곧 삶의 지혜였던 시절, 세태의 변화가 한가한 소걸음처럼 느릿느릿하던 시절, 어른의 말씀이 농사의 성패를 좌우하고 마을이나 집안의 뜻을 한데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하던 시절과 달리, 오늘의 어른은 온갖 자동화기기 앞에서 절절매고 말 한마디 하기에 앞서 그것이 ‘라떼’(나 때)나 ‘꼰대’ 소리 들을 이야기는 아닌지 눈치를 살핀다. 이렇게 급변하는 세상이 경험과 연륜에 의한 지식과 생각을 경직된 가치관과 아집으로 격하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니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린다.   ‘아! 세월이여, 아! 세태여’(O, tempora! O, mores!)라는 키케로(BC 106~BC 43)의 탄식은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늘 있었던 말이지만, 이 세상은 늘 더 나은 곳으로 변해 왔으니 그 말은 언제나 구세대의 푸념이었을 뿐이라며 외면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은 어른으로서, 아니 이 사회 구성원으로 해야 할 도리가 아니다. 보기에 불편한 것은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고, 염려하는 것은 세상사의 흐름을 미처 좇지 못하기 때문이고, 언짢은 것은 내 뜻과 저들의 뜻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그들과 함께해야 마땅하다.   성공한 30대 여성 사업가 줄스와 퇴직 후 회사를 다시 찾은 70대 시니어 인턴 벤의 이야기 ‘인턴’(2015). 모든 사람이 무시하고 아무런 일도 주지 않으니 벤 스스로 일거리를 찾아 나선다. 친근함과 배려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얻고 경험과 연륜으로 그들의 온갖 고민과 어려움을 해결하며 어느새 그들에게 꼭 있어야 할 사람으로 자리매김한다.   『오베라는 남자』(프레드릭 배크만)를 원작으로 한 영화 ‘오토라는 남자’(2022)의 오토는 퇴직 후 아내를 따라 세상을 뜨려 하지만, 본의 아니게 이웃을 돕느라 번번이 기회(?)를 놓친다. 운전이 서툰 이를 대신해 주차하느라고, 이웃의 난방시설을 수리하느라고, 이웃의 아이를 대신 보고 얼어 죽을 위험에 처한 길고양이를 돌보느라고,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지려다 말고 철로에 추락한 사람을 구하느라고…. 이렇게 급한 일(?)부터 처리하느라 죽음을 하루하루 미루다가 어느새 그는 가장 소중한 이웃이 되어버렸다. “이게 사는 거지….”라는 그의 독백이 귓가에 맴돈다. 그리고 “심장이 너무 크다”라는 의사의 말이 그의 사인(死因)이 아니라 그의 따뜻하고 어른스러운 행실에 대한 은유로 들린다. 전상직 / 서울대 음대 교수중앙시론 잔소리 충고 고대 지혜문학 시니어 인턴 시절 어른

2023-07-09

[열린광장] 잔소리

사람을 관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각자 이념과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의사 소통은 위에서 아래로 또는 아래에서 위로, 그리고 동등한 상황에서의 횡적 경로로 이뤄진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의사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훈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경계하거나 주의해야 할 사항을 사전에 지시하거나 가르침을 뜻하는 말이다. 세담이라는 말은 잔소리란 뜻으로 듣기싫게 필요 이상으로 참견하고 꾸중하며 쓸데 없이 자질구레한 말을 늘어 놓는다는 뜻이다. 훈시속에는 어딘가 사랑의 향기가 풍기는 듯 하며 잔소리는 상대방에 대한 무시 내지는 비난의 의미가 담겨있지 않나 생각된다. 부부 간에도 잔소리가 다툼의 원인이 되어 가정 파탄의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초등학교 시절 매일 아침 전교생이 운동장에서 모이는 조회 시간이 있었다. 교장 선생님이 단위에 올라 간단히 훈시의 말씀이 있었고 조회가 끝나면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행진곡에 맞추어 교실로 들어가면 수업이 시작된다. 그때의 훈시 말씀은 우리의 삶에 큰 교훈을 주었으며 그속에는 사랑이 담겨져 있었기에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다.   어른들이 젊은이들의 행동이 못마땅하다고 잔소리로 자기의 인생 경험을 전해주는 방식은 상대방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직장 상사의 지시 사항도 듣는 사람이 잔소리로 받아들인다면 작업의 성과를 올리지 못할 것이 뻔하다.     상대방이 잔소리로 치부하는 순간 분쟁이 생기고 인간관계에 상처만 남길 뿐이다. 잔소리 속에는 다분히 상대방의 문제점을 바로잡아 주려는 의도가 깔려 있으며 습관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부부 간의 잔소리는 나이가 들수록 흰머리와 더불어 많아 진다고 하니 어쩔수 없는 노릇이지만 잔소리는 언제나 짜증만 날 뿐이다.   살아가면서 세상의 가시 밭길을 어떻게 헤쳐나가느냐가 문제다. 울타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이라고 한다면 공연히 울타리에 잔소리의 못자국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 친구 모임에서도 자기말만 계속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옳고 너는 옳지 않아.” “내 방식이 효율적 이니까 너처럼 하면 안돼.” 그야말로 짜증나는 잔소리다.   잔소리를 하는 사람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널 위해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듣는 사람은 지겹고 모두 날 비난하는 소리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말도 효과 없는 잔소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잔소리가 나오는 순간 의도와 달리 듣는 사람에게 고통만 안겨 줄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모든 잔소리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엄마의 잔소리, 아버지의 잔소리, 마누라의 잔소리는 사랑의 잔소리로 듣는다면  우리의 삶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할 수 있다. 행복한 잔소리로 만들기 위해 나는 오늘도 마누라의 잔소리를  듣는척하며 자리를 피한다.   백인호 / 송강문화선양회 미주회장열린광장 잔소리 잔소리 마누라 잔소리 아버지 훈시 말씀

2023-03-09

[별별영어] 빨랫줄 위의 잔소리

 언젠가 에든버러에서 만난 웨이트리스가 기억에 남았습니다. 작은 실수를 하고선 “Every time! Not without a single mess!(늘 그래. 하나도 제대로 하는 게 없지)”라며 자책했거든요.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해서 무의식에 새겨놨을까? 엄마일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한편 저 자신은 아이들에게 어떤 잔소리를 각인시켰을까 돌아보며 부모 노릇이 쉽지 않음을 새삼 느꼈지요.   그곳을 떠나 더블린 공항에 내리자 뜻밖의 광경과 마주했습니다. 공항의 긴 복도에 빨랫줄이 그려져 있고 거기 널린 각양각색의 티셔츠 그림 위로 부모의 잔소리가 쓰여 있는 게 아니겠어요. 하나씩 읽는데 어쩜 우리가 하는 말과 그리 비슷한지요.   깜짝 놀란 건 “I hope someday you have children just like you.(꼭 너 같은 애를 낳아 키우기 바란다)”였고 “Do you think that money grows on trees?(돈이 나무에서 열리는 줄 아니)”는 “땅 파면 돈이 나온다니?”의 영어 버전 같았어요.   똑같은 것으로 “방이 꼭 돼지우리 같구나(Look at your room! It looks like a pigsty!)”와 “잘못했다고 해(Say you‘re sorry!)”도 있고, “아닌 건 아니야”는 “What part of no don’t you understand?(아니라고 했는데 뭘 이해 못 해)”로 비슷했죠.   문화가 달라 살짝 다른 잔소리도 있었어요. “If you don‘t clean your plate, you won’t get any dessert!(접시를 깨끗이 비우지 않으면 디저트는 없어)”, “Beds are not made for jumping.(침대는 점프하라고 만든 게 아니야)”처럼요.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에게 하는 “라떼는 ~”도 약간 달랐죠. “When I was your age, I was lucky if I got a jam sandwich.(내가 네 나이 땐 잼 바른 빵 하나만 생겨도 행운이었지)”예요.   부모들에겐 보편적인 심리가 작동하나 봅니다. 보통 화가 나면 자식의 이름을 정식으로 부르잖아요? “한oo!” “김oo!”하고요. 그들도 그래요. “Justin David Clifford!” “Anita Price!” 하는 식이죠. 별명도 모자라 ‘귀요미, 이쁜이, Honey, Sweetie, Pumpkin’ 하며 다정하게 부르다가 성까지 넣어 풀 네임을 부르는 것은 거리를 둔다는 뜻이지요.   본래 잔소리란 듣는 사람보다 하는 사람을 위한 것일까요? 부정적인 말은 참거나 눅눅한 빨래처럼 햇볕에 뽀송하게 말려서 해야겠어요. 가볍게 말해서 같이 웃고 넘길 정도로요. 말은 생각을 반영하지만 일단 하고 나면 생각에 영향을 주니까요. 채서영 /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별별영어 빨랫줄 잔소리 justin david 부모 노릇 더블린 공항

2022-09-05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생의 표지판 따라서

일은 할수록 부지런해지고 게으름은 피울수록 늘어난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면 내일이 일년이 되고 수년이 걸린다. 이유 없이 죽은 무덤 없고 나물 캐러 가는 처녀는 핑계도 많다. ‘못한다 안한다 언젠가 한다’라고 비비적대다 보면 정말 못하게 된다. 나는 몸치에 기계치, 운동치를 두루 갖춘 ‘삼치족’에 속한다, 방향감각 없어 뉴욕 아트 엑스포에 30년을 참석해도 여지껏 화장실을 못찿아 헤매인다. 길찿기 젬병이라 장거리 운전 해 본 적이 없다. 운전 미숙아로 낙인 찍히면 운전대 안 잡고 편히 여행하는 이득도 있다.   기계치로 말하자면 나는 왕중왕 타이틀 보유자다. 특별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나 애들도 쉽게 사용하는 기계나 전자제품도 쩔쩔매며 진땀을 뺀다. 부품을 잘못 끼워 오작동 시키거나 파손시키기도 한다. 귀찮아서 사용설명서를 전혀 읽지 않는 탓에 발생한다. ‘하다 하다 안 되면 지침을 읽으십시요(When it is all fail, read instruction )’는 나 같은 사람에게 하는 충고다. 아들 잔소리와 훈계 들으며 그나마 버텼는데 대학 가고부터는 난감한 신세가 됐다. 날 우습게 보는 전자제품과 컴퓨터와의 나 홀로 십년 전쟁! 장족의 발전을 거듭해 아들에게 SOS 안 보내고 대강 해결하기에 이르렀다. 절박함은 발전(?)의 어머니다.   문제는 운동이다. 2주일 이상 실행해 본 종목이 없다. ‘굳세어라 금순아’를 열창하며 시작해도 이 핑계 저 핑계 요 핑계 대며 번번이 낙마했다. 그래서 ‘나는 운동 안 하고도 잘 산다’라는 컨셉에 이르렀다. 세상만사 뜻대로 되면 얼마나 좋으랴. 운동 꼭 해야 한다는 의사 경고 받고 한강에 뛰어드는 기분으로 시작했다.   이렇게 좋은걸 왜 진작 안 했을까. 집 근처에 이토록 아름답고 호젓한 트레일(Trail)이 있는 줄 몰랐다. 트레일의 원뜻은 흔적, 지나간 자국, 배가 지나간 항적(航跡)이나 산길 또는 오솔길을 의미하는데 산책이나 운동할 수 있도록 만든 ‘걷는 길’이다. 매일 2-3 마일씩 울창한 나무 숲 사이 길을 혼자서 걷는다. 친구들이 산책로 걷자며 불러내도 ‘시간 남아 도는 니들이나 잘 하세요’ 사양했다. 정말이지 애들 키우고 사업하며 앞만 보고 달렸다. 욕망의 전차에서 뛰어내릴 수 없었다. 몸이 망가져도 지워진 지게의 무게를 벗어날 수 없었다.   첫 날에는 길을 잃었다. 트레일은 초보자가 걷는 가장 짧은 코스부터 긴 트레일까지 다섯가지 색깔로 표지판이 붙어있다. 덤벙대며 표지판을 잘못 읽어 먼 코스로 들어간 탓에 길을 잃고 첫날부터 4마일을 걸었다. 울창하게 서 있는 고목들과 돋아나는 싱그런 잎들, 언덕 넘어 실개울 건너며 산새소리와 다람쥐 동무 삼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바람이 귓볼을 간지럽히고 작은 벼랑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들으며 생의 찌꺼기 걸러내고 영혼의 먼지를 털어낸다. 오랜 세월을 버텨온 고목들은 허리가 잘린 채로 비스듬히 누워 보라빛과 노랑색의 야생화를 품고 있다. 나무들은 죽어도 등걸로 남아 긴 역사의 버팀목으로 역사를 기록한다.   나이 먹는 일은 슬픈 일이 아니다. 어깨에 진 짐 내려 놓으면 하늘 높이 날아 오를 수 있다. 정말 꼭 하고 싶었던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 무엇을 위해 살지 않고 무엇을 하며 살고,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는대로 살면 이름없는 들꽃에도 이름표 붙여 주리라. 여러 갈래의 표지판이 붙어있어도 헷갈리지 말고 내게 가장 적합한 표지판 따라 걷다 보면, 길을 잠시 잃어도 길 위에 길이 있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표지판 아들 잔소리 장거리 운전 운전 미숙아

2022-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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