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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사형수 이철수씨 구명'…유재건 전의원 별세

남가주 한인사회 올드타이머이자 한국 국회의원 3선 출신인 유재건(왼쪽 사진) 변호사가 한국시간으로 1일 오전 9시 서울에서 별세했다. 85세.   ‘평화·인권·복지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모토로 삼았던 고인은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이민법 세미나를 개최하고 무료법률 상담을 진행하는 등 힘들고 어려운 한인들을 돕는데 앞장섰던 법조인이자 리더였다.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 도중 기자였던 아버지가 납북되면서 졸지에 소년가장이 됐다. 생계를 위해 새벽엔 신문 배달을, 밤이면 모친이 만든 찹쌀떡을 팔러 다녔지만, 경기중·고교를 거쳐 연세대에 전액 장학생으로 특차입학했을 만큼 학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졸업 후 정치외교학 석사학위를 받고 공군 장교로 4년간 복무한 후 한국 유네스코위원회에서 3년간 근무한 고인은 1969년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왔다.     워싱턴 주립대에서 평범하게 사회학 박사과정을 밟던 그는 미국 판사의 권유에 따라 법대에 진학하고 무려 9번의 고배 끝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된 이야기는 유명하다. 모친의 비자 연장을 거부하고 추방 절차를 밟는 이민법원에 출두해 조목조목 반박하고 설명하는 그를 지켜본 담당 판사가 법대에 진학하라고 추천한 게 계기가 됐다.     ‘이철수 사건’은 고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다. 1977년 신문기사를 통해 살인누명을 쓰고 사형수가 된 이철수(당시 25세) 사건을 접한 그는 구명운동에 앞장섰고 결국 사건 발생 10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10년 만에 감옥에서 석방된 이철수 재판은 법대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소수계 인권 변호에 한 획을 그은 케이스로 남았다.     지난 2017년 5월 페퍼다인대 교환 교수로 부임했을 때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고인은 당시 심정을 “아내가 생계를 책임지고 나는 한 푼도 벌지 못하는 무능력한 가장이었다. 그러나 분명 정의는 승리한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힘겨운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본지 2017년 5월 8일자 A-14〉   1990년 한국으로 귀국해 MBC 시사 토론 프로그램과 KBS 심야 토론 프로그램 진행자로 이름을 알렸던 고인은 고 김대중 대통령의 추천으로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직을 맡고 정계에 입문했다. 1996년 출마한 성북구 국회의원 선거에서 현역 3선 의원을 물리쳐 스포트라이트를 뜨겁게 받은 그는 이곳에서 내리 3선을 기록했다.     1997년 대선에선 김대중 후보의 비서실장으로, 2002년 대선 때는 노무현 후보 특보단장을 맡아 킹메이커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국회의원 재임 시절 한미의원외교협의회의 회장, 국회 국방위원장 등을 역임하는 등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간판 외교통·미국통으로 활약했던 고인은 2008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자유선진당 창당을 도운 걸 마지막으로 정계를 은퇴했다.   은퇴후 한국유스호스텔연맹 총재, 제3대 CGN TV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성수씨와 2남 1녀가 있다. 고인의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5일.  ▶연락: (02)3410-6917     장연화 기자삶과 추억 사형수 이철수 이철수 재판 이철수 사건 한국 국회의원

2022-12-01

'이철수씨 사건 무죄 변론'…유재건 전 의원 별세

    미국 유학 중 살인 누명을 쓴 재미교포 이철수씨 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끌어낸 혜천(惠泉) 유재건(柳在乾) 전 의원이 한국시간으로 1일 오전 9시24분께 삼성서울병원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전했다. 향년 85세.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기고, 연세대 정외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77년 캘리포니아대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7∼1989년 연방정부 지역사회변호사로 일했고, 1982∼1990년 LA에서 법률사무소를 경영했다.      고인이 이철수씨 사건에 뛰어든 것은 변호사 시험 공부를 하던 1977년. 이씨는 1973년 6월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발생한 갱단 간부 피살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돼 체포된 뒤 1973년 6월 1급 살인죄로 종신형이 선고됐고, 교도소 복역 중이던 1977년 자신을 살해하려는 백인 갱단을 정당방위로 맞서다 살해했다며 제2의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한국인 청년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안청소년그룹이 무죄 운동을 펼치는 것과 때를 같이해 '새크라멘토 유니언지' 기자였던 이경원씨가 당시 고인과 함께 사건을 파헤치면서 전기를 맞았다.    고인은 이씨를 면담한 뒤 1차 사건이 잘못됐음을 확신하고 1977년 '이철수 구명위원회'를 결성했고, 이때부터 재판 서류 등을 샅샅이 뒤져 이씨가 7가지 위헌적 재판 절차의 희생양이었음을 밝혀냈다.    이 사건은 이경원씨의 폭로 보도가 이어지고 일본인 3세 야마다 란코씨 등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커뮤니티가 대대적으로 가세한데다 유명한 인권변호사 레너드 와인글래스씨가 무료 변론을 맡았고 이씨와 비슷한 처지에서 어렵게 살아가던 한인들이 성금 20만 달러를 모으는 등 미국 땅에서 살아가는 소수민족이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됐다.    1982년 9월 3일 무죄 평결이 내려지고 제2의 사건도 1983년 사형판결을 무효화함으로써 이씨는 교도소에서 풀려났고, 이 사건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소수민족 연대 승리로 기록됐다. 고인은 2009년 사건 기록을 담은 책 '함께 부르는 노래'를 펴냈다.    고인은 1990년 귀국한 뒤 1993년까지는 'MBC 시사토론', 1993∼1995년에는 'KBS 1TV 심야토론'을 진행했다.    1995년 경기고 동기생인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의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고, 원외 부총재로 임명됐다.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전국구 출마가 유력했지만, 지역구(서울 성북갑) 출마를 선언해 1997∼1999년 총재 비서실장을 지내는 등 김대중 총재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 비서실장도 지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선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됐고, 2003년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3선 의원이 됐다. 2006년초 산업자원부 장관에 임명된 정세균 의원의 뒤를 이어 열린우리당 임시의장을 맡기도 했다.    2009년 한국유스호스텔연맹 총재, 이후 세계유네스코협회연맹 회장을 지냈다. 연세대 1학년 때인 1956년 소련군이 헝가리를 침공하자 대학교 친구인 이만섭(1932∼2015) 전 국회의장과 함께 학도의용군을 결성한 공로로 2006년 헝가리 십자중훈장을 받았다.    유족은 부인 김성수씨와 사이에 2남1녀(유승영·유수화·유대현) 등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7호실에 마련됐다. 5일 오전 발인을 거쳐 미국 서부에 있는 추모공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 02-3410-6917이철수 유재건 이철수 구명위원회 무죄 평결 무죄 판결

2022-12-01

'살인누명' 이철수 다큐 (이철수에게 자유를)…선댄스 영화제서 상영

 살인 누명을 썼던 이철수씨는 늘 자유를 원했다.     그 갈망이 필름 속에 담겼다.   세계 최대 독립영화 축제인 선댄스 영화제에서 이철수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Free Chol Soo Lee(이철수에게 자유를)’가 방영된다.   이철수 씨는 70~80년대 한인사회를 비롯한 전국에서 민권 운동의 상징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선댄스 영화제측은 이번에 한인 감독 줄리 하, 유진 이씨가 이철수 씨의 삶을 다룬 이 작품을 다큐멘터리 부문에 초청했다.   이씨는 지난 1973년 6월 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중국인 갱단원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됐었다. 당시 한 백인 관광객의 잘못된 진술이 그의 삶을 옭아맸다. 당시 여자친구와 전화통화를 하다가 무고하게 체포된 20대 청년의 이씨는 어떠한 물증도 제시되지 않은 재판에서 결국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삶은 그 지점에서 다시 한번 꼬인다.   무기수로 복역 중이던 이씨는 1977년 10월 8일 함께 수감중이던 백인 나치주의자 갱단원 모리스 니드햄을 죽이게 된다. 이씨를 죽이기 위해 모리스가 칼을 휘둘렀고 이씨는 살아남기 위해 그를 죽인 것이었다. 그러나 정당방위였음에도 이씨는 또 재판을 받았고 이번엔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당시 일본인 친구(야마다 란코)가 이씨의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 구명운동을 벌였고 이후 새크라멘토유니언지에서 활동했던 이경원 기자가 이씨의 사연을 보도하면서 전국적인 이슈가 됐다.   이후 한인사회를 중심으로 구명운동의 물결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전국에서 ‘이철수에게 정의를 찾아주자’라는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결국, 1983년 3월 28일 이씨는 억울한 살인누명으로 체포당한 지 10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됐다. 이후 청소년 선도 등 강연 활동 등을 해오다가 지난 2014년 혈관폐색으로 숨을 거뒀다. 이 사건은 미국 내 소수계 민권운동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이번 선댄스 영화제는 팬데믹 사태로 인해 온라인으로 진행된다. 이 작품은 선댄스 영화제 웹사이트(https://festival.sundance.org/#)를 통해 볼 수 있다. 티켓을 구입(20달러)하면 23~24일 사이 온라인 스트리밍을 통해 관람이 가능하다.   한편, 이번 다큐멘터리 영화를 공동 제작한 줄리 하씨는 UCLA 졸업 후 미주 영문 한인 잡지였던 코리암 저널의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유진 이씨는 브라운대학을 졸업한 뒤 뉴욕타임스에서 비디오 저널리스트로 활동해 왔다. 장열 기자이철수 살인누명 선댄스 영화제측 살인누명 이철수 이철수 사건

2022-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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