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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론] ‘모임’과 김민기

1974년 당시 로스앤젤레스 시티칼리지(LACC)에 다니던 이민 초년생들이 자연스럽게 모이기 시작했다. 서로 애환을 공유하며 그냥 ‘모임’으로 이름을 정했다. 올해 ‘모임’의 50주년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민 초년생에서 이제는 은퇴하거나 은퇴를 앞둔 나이가 되었지만 지금도 우정을 쌓아가고 있다. 이미 우리 곁은 떠난 친구도 있고, 한국이나 타 지역으로 이주한 친구도 있다.     1978년 미주 한인사회 최초로 ‘모임’ 극회를 만들어 유랑극단이라는 연극을 올리기도 했다. 나는 창립 멤버는 아니다. 1974년 11월 이민 온 나는 그다음 해 5월 말 미군에 입대해 3년 동안 서독에서 복무를 마치고 1978년 5월 명예 제대를 했기 때문에 처음 ‘모임’에 참여할 기회가 없었다. 제대 후 심심하던 차에 여름방학 기간 우연히 ‘모임’의 연극 연습 장소에 가게 되었다. 연극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구경 삼아 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연출을 맡고 있던 김석만(전 한국종합예술원 교수)이 나를 지목하며 잠깐 나오라고 했다. “여기 한번 읽어봐.” 얼떨결에 연극배우로 데뷔하게 된 순간이었다.     유랑극단은 이근삼 희곡으로 해방 전 신파 유랑극장 배우들의 다난한 삶을 통해 인생과 예술의 의미를 되물어 보는 작품이다. 당시 나는 이런 배경과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만삭’이 역할을 하게 되었다. 유랑극단을 이끌던 오소공의 죽음으로 유랑극단을 이끌게 된 만삭과 세실이, 그러나 유랑극단의 앞날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1979년 여름 장소현 작으로 ‘이철수 사건’을 배경으로 한 연극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에서 이철수 역을 맡게 된다. ‘이철수 사건’은 한인 이민사뿐 아니라 소수계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이다. 이철수는 1972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중국 갱 멤버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다. 그런데 복역 중 백인 우월주의자인 한 수감자가 이철수를 살해하려다 몸싸움 과정에서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이철수는 사형수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한인 언론계의 원로인 이경원 기자가 당시 이 사건에 의문을 갖고 파헤치면서 결국 진실이 밝혀져 이철수는 무죄로 석방됐다. 연극은 이런 내용을 다뤘다.  연극 수익금은 전액 이철수 구명 후원회에 전달한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연극 배경음악으로 얼마 전 고인이 된 김민기의 노래들이 많이 쓰였다. 그렇게 ‘모임’ 극회와 김민기의 인연이 시작됐다. 김석만 교수와 김민기는 서울대학교 연우무대 동기로 절친한 사이였다. 그래서 연극에서 김민기의 노래를 부르고 배경 음악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모임’ 회원들은 1980년대 김민기가 시작한 신정 야학에 후원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김민기를 딱 1번 만난 적이 있다. 대학로 학전에서 성황리에 공연되던 ‘지하철 1호선’을 김석만 교수와 함께 관람한 후 김민기와 인사를 나눈 것이다. 나는 1984년 윌셔연합감리교회에서 결혼식을 하고 아내와 함께 ‘상록수’를 불렀다. 그리고 김민기의 ‘친구’는 나의 애창곡 중 하나다.     김민기의 노래들은 1970~80년대 한국의 독재정권 시절  많은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워 줬다. 특히 ‘아침이슬’은 대표적인 저항 가요로 불렸다. 김민기 전 학전 대표가 우리 곁을 떠났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모임’과의 인연이 떠올랐다.       한인 사회에서 50년간 지속하는 모임은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동안 우여곡절도 많았고 다툼도 있었지만 다시 화해하고 우정을 나누고 있다. 지금도 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 친구들의 이름을 기억해 본다. 구본우, 제임스 김, 장사한, 박무영, 박준성, 백광호, 김영수, 노재유,  김교효, 강용석, 이광진, 김정석, 그리고 김석만. 그리운 이름들이다.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연구소 소장중앙시론 김민기 전액 이철수 한국종합예술원 교수 미주 한인사회

2024-08-05

“이철수 사건 미국 역사에 기록 남겨 기뻐”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에미상이 최근 후보작들을 발표한 가운데, 살인자 누명을 쓰고 사형 선고를 받은 한인 이철수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이철수에게 자유를(Free Chol Soo Lee)’이 뉴스·다큐멘터리 에미상 최종 후보 3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본지 7월 29일자 A-2면〉   오는 9월 뉴욕에서 열리는 제45회 뉴스&다큐멘터리 에미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Best Documentary)’, ‘뛰어난 역사적 다큐멘터리(Outstanding Historical Documentary)’, ‘뛰어난 홍보물(Outstanding Promotional Announcement)’ 부문 후보에 오른 것이다. ‘뛰어난 홍보물’ 부문은 다큐멘터리 독립렌즈 필름 티저용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1973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발생한 총격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았던 21살의 한인 이민자 이철수의 삶과 경찰과 사법부가 자행한 인종차별에 맞서 ‘이철수 구명운동’을 벌인 한인과 아시안 커뮤니티의 이야기를 담았다.   영문 매거진 코리앰 저널의 편집장 출신인 줄리 하 감독과 뉴욕타임스 등의 영상을 제작했던 유진 이 감독이 공동감독·연출한 이 영화는 저널리스트 출신답게 사건 기록을 꼼꼼히 챙기면서도 이철수라는 인물을 통해 커뮤니티에 주는 메시지를 묵직하게 담아내 주류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한국에서 개봉하기도 했다.   줄리 하 감독은 지난달 26일 본지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전화가 너무 많이 와 정신을 차릴 수 없다”면서도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수 있도록 소중히 보관해온 사진과 필름, 기록 등을 기꺼이 제공해준 한인 커뮤니티에 공을 돌린다”고 팀을 대신해 인사말을 전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소감은.   “에미상 후보로 1개도 아닌 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기쁘고 감격스럽다. 후보로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팀은 ‘작은 영화가 해냈다’고 말했다. 다큐멘터리를 공동 감독/프로듀스한 유진 이 감독에게 가장 감사하다. 또 함께 한 수 김, 진 시엔, 소나 조 프로듀서 등 팀원들도 빼놓을 수 없다. 후보에 올랐으니 상을 하나만이라도 받았으면 하는 욕심이 조금 있다. (웃음) 결과가 너무 기대된다.”   -하 감독에게 에미상 후보가 됐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전 세계가 우리 영화를 알게 됐다는 점이다. (웃음) 솔직히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가 전 세계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우리 한인과 아시안들의 역사가 미국 역사에 길이 남고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기쁘다. 후보에 이름이 올라간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된 동기는.   “살인죄를 뒤집어쓴 청년 이철수가 무죄로 석방되는 데까지 무려 6년의 세월이 걸렸다. 한인 커뮤니티는 물론, 아시안 커뮤니티의 단합된 힘과 목소리로 정의를 구현할 수 있었다. 이철수는 미국에 사는 한인들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미국 내 아시안 아메리칸의 중요한 역사다. 그런데도 그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묻혀있었다. 우린 그걸 그냥 놔둘 수 없었다.”     -다큐멘터리 제작에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영화 제작에 꼬박 6년이란 시간이 소요됐다. 자료 찾는 게 막막했는데 한인 커뮤니티의 도움이 컸다. 중앙일보를 비롯해 당시 신문 스크랩, 사진, 비디오 등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분들이 많았다. 이분들의 기증이 없었다면 이렇게 좋은 영화를 제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커뮤니티가 영감을 주었고 가능하게 했다. 팀을 대표해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한인 커뮤니티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 팀은 선댄스 영화제부터 PBS의 ‘인디펜던트 렌즈’로, 그리고 지금은 에미상 후보 지명까지 놀라운 일을 경험하고 있다. 이 모든 여정을 통해 이철수와 또 그가 한인과 아시안 커뮤니티에 영감을 준 대담하고도 용기있으며 정의로운 운동이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이 영화가 새로운 세대에게 정의를 위해 맞서고 오늘날의 ‘이철수’를 도울 수 있는 영감을 주길 기대한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게시판 아시안 다큐멘터리 이철수 역사적 다큐멘터리 아시안 커뮤니티

2024-08-01

‘이철수에게 자유를’ 에미상 후보…최우수 다큐 등 3개 부문에

1973년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에서 발생한 갱단 살인사건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복역하던 한인 이철수 석방운동을 다룬 영화 ‘이철수에게 자유를(Free Chol Soo Lee·사진)’이 에미상 최우수 다큐멘터리 후보에 올랐다.   25일 에미상을 주관하는 TV예술과학아카데미(NATAS)에 따르면 제45회 뉴스&다큐멘터리 에미상 후보에 ‘이철수에게 자유를’은 ‘최우수 다큐멘터리(Best Documentary)’ 후보 외에 ‘뛰어난 역사적 다큐멘터리(Outstanding Historical Documentary)’ 부문과 ‘뛰어난 홍보 공지(Outstanding Promotional Announcement)’ 부문에도 각각 이름을 올렸다. ‘뛰어난 홍보 공지’ 부문은 다큐멘터리를 소개하는 티저가 뽑혔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줄리 하 감독은 26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최우수 다큐멘터리 후보에 이름이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던 건 한인 커뮤니티의 덕분이었다”며 “소장했던 사진이나 필름 등을 기꺼이 공유하고 이야기를 들려준 한인 커뮤니티에 공을 돌린다”고 말했다.   ‘이철수에게 자유를(Free CholSoo Lee)’은 당시 북가주의 유일한 한인 기자였던 이경원씨의 끈질긴 취재로 사건이 보도된 후 아시안 커뮤니티가 뭉쳐 이철수씨의 석방을 촉구하는 사회운동을 벌여 약 10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실화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현재 아마존 프라임, 애플TV, 무비닷컴에서 볼 수 있다. 시상식은 오는 9월 26일 뉴욕 팔라디움 타임스퀘어에서 열린다. NATAS에 따르면 올해 총 2200개 이상의 작품이 접수됐으며 980명이 넘는 심사위원들이 심사에 참여했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이철수 에미상 다큐멘터리 에미상 에미상 최우수 최우수 다큐멘터리

2024-07-28

[삶과 추억] '사형수 이철수씨 구명'…유재건 전의원 별세

남가주 한인사회 올드타이머이자 한국 국회의원 3선 출신인 유재건(왼쪽 사진) 변호사가 한국시간으로 1일 오전 9시 서울에서 별세했다. 85세.   ‘평화·인권·복지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모토로 삼았던 고인은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이민법 세미나를 개최하고 무료법률 상담을 진행하는 등 힘들고 어려운 한인들을 돕는데 앞장섰던 법조인이자 리더였다.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 도중 기자였던 아버지가 납북되면서 졸지에 소년가장이 됐다. 생계를 위해 새벽엔 신문 배달을, 밤이면 모친이 만든 찹쌀떡을 팔러 다녔지만, 경기중·고교를 거쳐 연세대에 전액 장학생으로 특차입학했을 만큼 학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졸업 후 정치외교학 석사학위를 받고 공군 장교로 4년간 복무한 후 한국 유네스코위원회에서 3년간 근무한 고인은 1969년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왔다.     워싱턴 주립대에서 평범하게 사회학 박사과정을 밟던 그는 미국 판사의 권유에 따라 법대에 진학하고 무려 9번의 고배 끝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된 이야기는 유명하다. 모친의 비자 연장을 거부하고 추방 절차를 밟는 이민법원에 출두해 조목조목 반박하고 설명하는 그를 지켜본 담당 판사가 법대에 진학하라고 추천한 게 계기가 됐다.     ‘이철수 사건’은 고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다. 1977년 신문기사를 통해 살인누명을 쓰고 사형수가 된 이철수(당시 25세) 사건을 접한 그는 구명운동에 앞장섰고 결국 사건 발생 10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10년 만에 감옥에서 석방된 이철수 재판은 법대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소수계 인권 변호에 한 획을 그은 케이스로 남았다.     지난 2017년 5월 페퍼다인대 교환 교수로 부임했을 때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고인은 당시 심정을 “아내가 생계를 책임지고 나는 한 푼도 벌지 못하는 무능력한 가장이었다. 그러나 분명 정의는 승리한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힘겨운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본지 2017년 5월 8일자 A-14〉   1990년 한국으로 귀국해 MBC 시사 토론 프로그램과 KBS 심야 토론 프로그램 진행자로 이름을 알렸던 고인은 고 김대중 대통령의 추천으로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직을 맡고 정계에 입문했다. 1996년 출마한 성북구 국회의원 선거에서 현역 3선 의원을 물리쳐 스포트라이트를 뜨겁게 받은 그는 이곳에서 내리 3선을 기록했다.     1997년 대선에선 김대중 후보의 비서실장으로, 2002년 대선 때는 노무현 후보 특보단장을 맡아 킹메이커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국회의원 재임 시절 한미의원외교협의회의 회장, 국회 국방위원장 등을 역임하는 등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간판 외교통·미국통으로 활약했던 고인은 2008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자유선진당 창당을 도운 걸 마지막으로 정계를 은퇴했다.   은퇴후 한국유스호스텔연맹 총재, 제3대 CGN TV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성수씨와 2남 1녀가 있다. 고인의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5일.  ▶연락: (02)3410-6917     장연화 기자삶과 추억 사형수 이철수 이철수 재판 이철수 사건 한국 국회의원

2022-12-01

'이철수씨 사건 무죄 변론'…유재건 전 의원 별세

    미국 유학 중 살인 누명을 쓴 재미교포 이철수씨 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끌어낸 혜천(惠泉) 유재건(柳在乾) 전 의원이 한국시간으로 1일 오전 9시24분께 삼성서울병원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전했다. 향년 85세.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기고, 연세대 정외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77년 캘리포니아대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7∼1989년 연방정부 지역사회변호사로 일했고, 1982∼1990년 LA에서 법률사무소를 경영했다.      고인이 이철수씨 사건에 뛰어든 것은 변호사 시험 공부를 하던 1977년. 이씨는 1973년 6월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발생한 갱단 간부 피살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돼 체포된 뒤 1973년 6월 1급 살인죄로 종신형이 선고됐고, 교도소 복역 중이던 1977년 자신을 살해하려는 백인 갱단을 정당방위로 맞서다 살해했다며 제2의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한국인 청년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안청소년그룹이 무죄 운동을 펼치는 것과 때를 같이해 '새크라멘토 유니언지' 기자였던 이경원씨가 당시 고인과 함께 사건을 파헤치면서 전기를 맞았다.    고인은 이씨를 면담한 뒤 1차 사건이 잘못됐음을 확신하고 1977년 '이철수 구명위원회'를 결성했고, 이때부터 재판 서류 등을 샅샅이 뒤져 이씨가 7가지 위헌적 재판 절차의 희생양이었음을 밝혀냈다.    이 사건은 이경원씨의 폭로 보도가 이어지고 일본인 3세 야마다 란코씨 등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커뮤니티가 대대적으로 가세한데다 유명한 인권변호사 레너드 와인글래스씨가 무료 변론을 맡았고 이씨와 비슷한 처지에서 어렵게 살아가던 한인들이 성금 20만 달러를 모으는 등 미국 땅에서 살아가는 소수민족이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됐다.    1982년 9월 3일 무죄 평결이 내려지고 제2의 사건도 1983년 사형판결을 무효화함으로써 이씨는 교도소에서 풀려났고, 이 사건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소수민족 연대 승리로 기록됐다. 고인은 2009년 사건 기록을 담은 책 '함께 부르는 노래'를 펴냈다.    고인은 1990년 귀국한 뒤 1993년까지는 'MBC 시사토론', 1993∼1995년에는 'KBS 1TV 심야토론'을 진행했다.    1995년 경기고 동기생인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의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고, 원외 부총재로 임명됐다.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전국구 출마가 유력했지만, 지역구(서울 성북갑) 출마를 선언해 1997∼1999년 총재 비서실장을 지내는 등 김대중 총재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 비서실장도 지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선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됐고, 2003년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3선 의원이 됐다. 2006년초 산업자원부 장관에 임명된 정세균 의원의 뒤를 이어 열린우리당 임시의장을 맡기도 했다.    2009년 한국유스호스텔연맹 총재, 이후 세계유네스코협회연맹 회장을 지냈다. 연세대 1학년 때인 1956년 소련군이 헝가리를 침공하자 대학교 친구인 이만섭(1932∼2015) 전 국회의장과 함께 학도의용군을 결성한 공로로 2006년 헝가리 십자중훈장을 받았다.    유족은 부인 김성수씨와 사이에 2남1녀(유승영·유수화·유대현) 등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7호실에 마련됐다. 5일 오전 발인을 거쳐 미국 서부에 있는 추모공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 02-3410-6917이철수 유재건 이철수 구명위원회 무죄 평결 무죄 판결

2022-12-01

'살인누명' 이철수 다큐 (이철수에게 자유를)…선댄스 영화제서 상영

 살인 누명을 썼던 이철수씨는 늘 자유를 원했다.     그 갈망이 필름 속에 담겼다.   세계 최대 독립영화 축제인 선댄스 영화제에서 이철수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Free Chol Soo Lee(이철수에게 자유를)’가 방영된다.   이철수 씨는 70~80년대 한인사회를 비롯한 전국에서 민권 운동의 상징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선댄스 영화제측은 이번에 한인 감독 줄리 하, 유진 이씨가 이철수 씨의 삶을 다룬 이 작품을 다큐멘터리 부문에 초청했다.   이씨는 지난 1973년 6월 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중국인 갱단원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됐었다. 당시 한 백인 관광객의 잘못된 진술이 그의 삶을 옭아맸다. 당시 여자친구와 전화통화를 하다가 무고하게 체포된 20대 청년의 이씨는 어떠한 물증도 제시되지 않은 재판에서 결국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삶은 그 지점에서 다시 한번 꼬인다.   무기수로 복역 중이던 이씨는 1977년 10월 8일 함께 수감중이던 백인 나치주의자 갱단원 모리스 니드햄을 죽이게 된다. 이씨를 죽이기 위해 모리스가 칼을 휘둘렀고 이씨는 살아남기 위해 그를 죽인 것이었다. 그러나 정당방위였음에도 이씨는 또 재판을 받았고 이번엔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당시 일본인 친구(야마다 란코)가 이씨의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 구명운동을 벌였고 이후 새크라멘토유니언지에서 활동했던 이경원 기자가 이씨의 사연을 보도하면서 전국적인 이슈가 됐다.   이후 한인사회를 중심으로 구명운동의 물결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전국에서 ‘이철수에게 정의를 찾아주자’라는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결국, 1983년 3월 28일 이씨는 억울한 살인누명으로 체포당한 지 10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됐다. 이후 청소년 선도 등 강연 활동 등을 해오다가 지난 2014년 혈관폐색으로 숨을 거뒀다. 이 사건은 미국 내 소수계 민권운동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이번 선댄스 영화제는 팬데믹 사태로 인해 온라인으로 진행된다. 이 작품은 선댄스 영화제 웹사이트(https://festival.sundance.org/#)를 통해 볼 수 있다. 티켓을 구입(20달러)하면 23~24일 사이 온라인 스트리밍을 통해 관람이 가능하다.   한편, 이번 다큐멘터리 영화를 공동 제작한 줄리 하씨는 UCLA 졸업 후 미주 영문 한인 잡지였던 코리암 저널의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유진 이씨는 브라운대학을 졸업한 뒤 뉴욕타임스에서 비디오 저널리스트로 활동해 왔다. 장열 기자이철수 살인누명 선댄스 영화제측 살인누명 이철수 이철수 사건

2022-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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