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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영웅전] 니미츠 제독의 기도

나이가 들수록 귀가 어두워진다. 왜 신은 인간의 말년에 귀를 어둡게 할까. 들어도 못 들은 체하며 초연한 삶을 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인간은 자기 뜻에 따라 오감(五感)의 작동을 멈출 수 있지만 남의 말은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기에 귀는 늘 열려 있다.   체스터 니미츠(1885~1966·사진) 제독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해군 출신 원수(5성 장군)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태평양함대 및 연합군 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현직에서 물러나 부부가 중고차를 몰고 주택담보대출을 갚으며 빠듯하게 살았다. 원수는 예편하지 않으며 보직 없이 평생 원수 대접을 받으니 궁핍하지야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독일계 이민 집안의 검박한 생활 전통을 따른 듯하다. 그런 니미츠 제독이 늘그막에 이렇게 기도했다.   “제가 늙어가며 말이 길지 않게 해주시고, 늙어가며 어느 자리에 참석했을 때 꼭 한마디 해야겠다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주시고, 늙어가며 불의한 무리를 봤을 때 내 손으로 저들을 응징하리라는 만용에 사로잡히지 않게 해주시고, 고민스러울 때 걱정하면서도 침울하지 않게 해주시고, 남을 도운 다음에 공치사하지 않게 해주시고, 남의 고통을 덜어주는 자비를 허락해주시고, 저도 때때로 실수하는 사람임을 깨닫게 해주시고, 마음은 따뜻해도 성자가 되지는 않게 해주시고….”   그의 기도 중에서 다른 부분은 다 이해하겠는데 끝부분의 ‘성자가 되지 않게 해달라’는 구절은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그 기도의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세상에 즐거운 일이 많은데 그것을 참고 살기 어려워서”였다. 아무려면 그가 세속의 즐거움을 탐해 그런 말을 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미국인과 미국 상류사회를 보며 이런저런 호오(好惡·좋아하거나 싫어함)가 있을 수 있겠지만, 니미츠 제독의 이런 정신이 미국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니미츠 제독 니미츠 제독 체스터 니미츠 출신 원수

2023-03-26

[삶과 믿음] 가르침-원수를 사랑하라 2 (눅6:27-38)

 지난 칼럼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다루면서 ①원수까지 사랑하는 무조건적 사랑 ②교환과 목적론적 동기를 가진 조건적인 사랑이 본문에 함께 등장한다는 점을 다루었다. 이 문제를 조금 더 생각해보겠다.     맹자는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 달려가 구해주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인(仁)에 해당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이라고 주장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했다고 믿는데, 하나님의 본성을 사랑과 의로움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의 가장 구체적인 내용은 타자를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맹자의 성선설과 기독교의 하나님형상사상은 “하늘로부터 받은 타고난 자비와 사랑의 성품”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유사하다. 그런데 누가복음 본문에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은 단순히 인간 본성에 의지하는 “보편적인 무조건적 사랑”이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하는 “극단적인 무조건적 사랑”이다. 과연 이러한 무조건 사랑이 가능할까? 인간 품성 속에 담겨있는 보편적 사랑도 일상 속에서는 제한적으로 발현될 뿐인데 어떻게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필자는 바누아투라는 아름다운 남태평양에서 2년간 신학을 가르쳤다. 숨을 멎게 하는 석양, 밤하늘의 빛나는 별들과 눈이 시리도록 밝은 달빛, 서로 용서하고 포용하는 것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바누아투의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 온몸과 마음이 온 우주와 모든 타자에게 확장하는 듯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 순간에는 정말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호주에서 온 선교사가 제국주의적인 오만함으로 여러 문제를 일으켰을 때, 우주적 사랑의 마음은 너무도 쉽게 깨어져 버렸다. 원수 사랑은커녕 이웃도 사랑하기 힘든 것이 인간이다. 우리가 직면하는 세상은 혼동, 외면, 이기심, 차별, 분노, 학대, 깨어진 관계, 학살과 전쟁으로 점철된 추악한 세상이다. 왜 예수께서는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을까?         독일의 신학자 위르겐몰트만은 필자가 다니던 웨스턴 신학교를 방문해서 강의한 적이 있다. 강의 후에 지역교회의 목회자가 “당신은 보편구원론자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2차 세계대전에서 포로수용소 경험을 한 몰트만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천국에서 결코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류 모두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류 모두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이다. 하나님은 가장 지키기 쉬운 약속조차 어긴 아담과 하와를 사랑하셨으며, 끊임없이 배반하고 다른 신을 쫓은 이스라엘을 눈동자처럼 사랑하셨다. 예수께서는 죄인들, 버림받은 자들, 심지어 자신을 떠난 제자들을 한없이 사랑하셨고, 성령은 자신을 훼방하고 시험하고, 거짓말하고, 슬프게 하고, 모욕하고, 소멸하고, 저항하는 자들을 사랑하시어 그들을 위해서 깊은 탄식으로 기도하시고 그들 안에 거하신다. 하나님은 참으로 원수를 사랑하신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인간의 도덕적 영적 능력에 관한 말씀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시는가” 관한 말씀이며, 그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자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초청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는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4:11-19). 차재승 / 뉴브런스윅 신학대학원 교수삶과 믿음 원수 사랑 원수 사랑 무조건적 사랑 우주적 사랑

2021-11-25

[삶과 믿음] 예수의 삶-가르침: 원수를 사랑하라! (눅6:27-38)

예수의 삶은 나눔, 가르침, 저항·투쟁, 영적인 삶, 선포, 보내심이라는 6개의 범주로 요약할 수 있고 누가복음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지난 칼럼에서 나눔에 대해서 다루었고 이번 칼럼에서는 가르침에 대해서 생각해보겠다.     예수께서는, 새 옷과 낡은 옷, 새 포도주와 낡은 포도주(눅5:36-39), 소경이 소경을 인도함, 타자의 눈 속의 티와 자신의 눈 속의 들보, 좋은 열매와 못된 열매(눅6:39-45), 장터에서 춤추는 아이들(눅7:31-32), 씨뿌리는 자와 등불(눅8:4-25), 선한 사마리아사람(눅10:25-37), 종말에 대한 준비(눅12:35-48),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눅13:6-9), 좁은 문(눅13:24-30), 청함의 받은 자들(눅14:7-24), 회개, 탕자(눅15:3-32), 청지기(눅16:1-13), 부자와 나사로(눅16:19-31), 무익한 종(눅17:6-10), 과부의 간청과 기도(눅18:2-8), 악한 농부들(20:9-18)등의 비유로 다채로운 주제를 가르쳤다.     또한 예수께서는 비유만이 아니라 직설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고통받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눅6:20-22), 원수를 사랑하라(눅6:27-38), 외식, 탐욕, 성령, 염려, 하나님 나라(눅12:1-34; 13:1-35; 18:15-17; 19:11-27), 회개와 외식, 제자의 도(눅14:25-35), 회개와 용서(눅17:1-4), 재림(눅17:20-370), 기도(눅18:1-14), 영생과 재물과 선(눅18:18-30)에 대해서 구체적인 교훈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복음서의 핵심적인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의 이러한 가르침인데, 기적이나 십자가와 부활에만 초점을 맞추면 예수의 삶의 그 풍요로움을 놓치고 만다.     이 수많은 가르침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내용은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나와 아무 연관이 없는 자를 사랑하는 것을 우리는 최고의 선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라니! 누가복음 6:27-38까지의 말씀 속에는, ①사랑이 대가와 보상을 넘어서는 ‘무조건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②나와 타자의 행위는 상호적이며, 무조건적 사랑도 목적론적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가르침이 함께 등장한다.       첫째,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도 하는 일이다(6:32). 사랑은 그 ‘상대’를 가지고 있지만 ‘상대적’인 것은 아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 하며, 나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나를 모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눅6:27-28). 더 나아가,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며, 달라고 하는 자에게 주며, 내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고 하지 말라(눅6:29-31).       둘째, 도대체 왜 원수조차 사랑해야 하는가? 여기에 조건적 거래와 대가를 기대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눅6:31), 아무것도 보상을 바라지 말라, 그러면 높으신 자의 아들이 될 것이다(눅6:35), 비판하지 말라 그러면 비판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러면 정죄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러면 용서받을 것이다(눅6:37).     과연 원수조차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 사랑하라는 명령을 따르는 것도 진정한 사랑일까? 무조건적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아는 예수께서 목적론적 대가, 조건적인 거래를 기대하라는 말씀을 함께 하신 것일까? 다음 칼럼에서 이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차재승 / 뉴브런스윅 신학대학원 교수삶과 믿음 예수 원수 무조건적 사랑 무조건적 특징 하나님 나라

2021-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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